한미연합군사령부
정부 기관, 군사 사령부, 한미 동맹, 국제 기구
최근 수정 시각 : 2026-01-18- 16:49:58
한미연합군사령부는 1978년 창설 이래 '같이 갑시다(We Go Together)'라는 표어 아래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해온 세계 최강의 연합 지휘 체계입니다. 6.25 전쟁 직후 유엔군사령부로부터 시작된 연합 방위의 역사는 닉슨 독트린과 주한미군 철수 논의라는 위기를 거쳐 더욱 공고한 상시 연합 체제로 진화했습니다. 평시 작전권 이양과 평택 기지 이전 등 수많은 변곡점을 지나며, 이제는 한국군이 주도하는 미래 사령부 체제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군사 동맹을 넘어 혈맹으로 이어진 한미 양국의 신뢰는 동북아시아 안보의 핵심축으로서 변함없는 위용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1950
[국군 작전권 이양]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에게 이양하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이는 북한의 침략에 맞서 효율적인 연합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역사적 결정이었습니다. 이 조치를 통해 대한민국 국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배속되어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소위 '대전 협정'으로 불리는 이 조치는 6.25 전쟁 발발 초기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시점에 이루어졌습니다. 부산까지 밀려나던 치욕적인 상황에서 유엔의 군사적 지원을 확실히 받아내기 위한 목적이 컸습니다. 이로써 국군의 작전권은 유엔군사령부로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으며, 이는 훗날 한미연합사 창설의 먼 뿌리가 되었습니다.
1953
[한국전쟁 정전 협정]
유엔군과 중공군, 북한군 사이에 정전 협정이 체결되며 총성이 멈추었습니다. 전쟁은 멈추었지만 한반도의 안보 상황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국군의 역량 부족으로 인해 작전권은 여전히 유엔군사령부가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정전 이후에도 미군뿐만 아니라 영국, 터키, 태국 등 다양한 참전국 군인들이 유엔군으로서 대한민국에 주둔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단독으로 전선을 관리할 능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유엔군사령부는 정전 체제의 관리와 감독이라는 핵심 임무를 계속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상상호방위조약 체결]
대한민국과 미국이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서로를 방어하기 위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습니다. 한미 동맹의 법적 기초가 되는 이 조약은 한국 안보의 핵심축이 되었습니다. 주한미군의 지속적인 주둔과 군사적 지원을 보장받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약 체결을 통해 미국은 한국에 군사력을 배치할 권리를 가졌으며, 한국은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경제 발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동맹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한미 혈맹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사령부 창설 이전에도 이 조약은 연합 방위 체제의 실질적인 작동 원리로 기능했습니다.
1957
[주한미군사령부 창설]
극동사령부가 해체되고 주한미군을 전담 지휘하는 주한미군사령부(USFK)가 공식 설립되었습니다. 조지 워커 대장이 초대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한국 내 미군 자산을 통합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엔사와 제8군 사령관이 주한미군 사령관 직책을 겸임하는 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미 태평양 사령부 산하의 지역 사령부로서 한국 내 모든 미군 병력을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초기에는 제8군 사령관이 주한미군 전체를 대표하는 비중이 매우 컸습니다. 용산 기지에 본부를 두고 한반도 전구 내의 행정 및 군수 지원을 총괄하는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1968
[연합 기획참모단 조직]
유엔사 및 주한미군사령부 내에 한미 양국 군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연합 작전 기획참모단이 구성되었습니다. 이는 추후 탄생할 연합사령부의 모태가 되는 조직적 변화였습니다. 양국 군의 상호 운용성을 높이기 위한 체계적인 기획 업무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존에는 미군이 주도하던 작전 계획 수립 과정에 한국군 장교들이 실무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1.21 사태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 대비해 실질적인 작전 계획을 공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참모단은 훗날 통합된 야전군 사령부와 연합사로 진화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청와대 습격 사건 발생]
북한 무장 공비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 도심까지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으며 연합 방위 체제의 허점이 노출되었습니다. 보다 강력하고 즉각적인 연합 작전 지휘 체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김신조를 비롯한 31명의 요원이 청와대 인근까지 도달하면서 안보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후 푸에블로호 납북 사건 등이 겹치며 한미 양국은 위기 대응을 위한 긴밀한 협력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도발은 단순한 지원 체계를 넘어선 통합 사령부 창설 논의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971
[한미 제1군단 창설]
서부전선의 방위를 담당하기 위해 한국군과 미군이 혼합된 다국적 연합 부대인 한미 제1군단이 탄생했습니다. 이는 양국 군이 단일 지휘 체계 아래에서 실질적인 전투 임무를 수행한 최초의 사례입니다. 연합사의 하부 전투 단위로서 기능하며 실전적인 협력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대한민국 육군과 미 육군 제2보병사단 등이 이 부대의 핵심 전력으로 포함되었습니다. 닉슨 독트린으로 인한 주한 미 7사단 철수 이후의 전력 공백을 메우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이 부대는 훗날 한미야전군사령부(CFA)로 개편되었다가 1990년대에 해체될 때까지 전방 방어의 핵심을 담당했습니다.
1976
[팀 스피릿 훈련 시작]
세계 최대 규모의 한미 연합 야외 기동 훈련인 '팀 스피릿(Team Spirit)'이 처음으로 실시되었습니다. 대규모 전력이 한국으로 전개되는 절차를 숙달하며 강력한 억제력을 과시했습니다. 이 훈련은 연합사의 작전 수행 능력을 검증하는 가장 중요한 장이 되었습니다.
미 본토와 태평양 전역의 미군이 한반도로 신속히 전개되는 능력을 키우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매년 실시되면서 북한에 강력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연합사 창설 이후에는 사령부의 지휘 아래 훈련의 규모와 강도가 더욱 체계화되었습니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공동경비구역 내 미군 장교들이 북한군에게 살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며 전쟁 직전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한미 양국은 '폴 번연 작전'을 전개하며 단호한 연합 대응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유엔사와는 별개로 상시 작동하는 연합 사령부 창설의 시급성을 다시 확인시켰습니다.
미군 측은 항공모함과 B-52 폭격기를 전개하는 등 최고 수준의 경계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양국 군의 긴밀한 협조 없이는 우발적인 전쟁을 관리하기 어렵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 위기를 겪은 뒤 1년 만에 연합사 창설을 위한 구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1977
[연합사 창설 공식 합의]
제10차 한미 안보협의회의(SCM)에서 새로운 통합 지휘 기구인 한미연합사령부를 창설하기로 최종 합의했습니다. 지휘관은 미군이, 부지휘관은 한국군이 맡는 구성 원칙이 정해졌습니다. 이는 유엔사가 담당하던 작전 통제권을 보다 실질적인 연합 기구로 넘기는 과정이었습니다.
당시 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에 대응하여 한국의 안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습니다. 유엔군사령부는 정전 협정 관리라는 상징적 역할로 축소하고, 실제 전투 지휘는 연합사가 전담하기로 했습니다. 이 합의는 한미 군사 동맹의 질적인 도약을 의미하는 중대한 결단이었습니다.
1978
[군사위원회(MC) 설치]
연합사령부에 전략 지침을 제공하기 위한 최고의 군사 협의 기구인 한미 군사위원회가 공식 발족했습니다. 양국 합참의장이 주도하여 사령부의 운영 방향을 결정하는 구조를 갖추었습니다. 이는 연합사가 양국의 정치적 의사를 반영하는 군사 조직임을 명확히 한 것입니다.
제1차 군사위원회 회의를 통해 연합사 창설을 위한 행정적, 전략적 준비를 마무리했습니다. 사령부의 권한과 책임 소재를 규정한 약정(TOR)이 이 기구를 통해 확정되었습니다. 이후 연합사는 양국 통수권자의 지휘 아래 놓이게 되는 체계적인 명령 계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미연합군사령부 창설]
서울 용산 기지에서 한미연합군사령부 창설식이 거행되며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 국군과 주한미군을 단일한 연합 작전 체계로 묶는 거대한 지휘 기구가 출범한 것입니다. 전시에 지정된 모든 한미 군 병력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용산 기지 내 연합사 광장에서 양국 군 수뇌부와 정관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깃발을 올렸습니다. 초대 사령관으로 존 베시 대장이, 부사령관으로 류병현 대장이 임명되었습니다. 이 날을 기점으로 한국 안보의 패러다임은 유엔사 체제에서 한미 연합 체제로 완전히 전환되었습니다.
[초대 사령관 베시 취임]
유엔군사령관을 지내던 존 베시 미 육군 대장이 한미연합사의 초대 사령관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신설된 사령부의 조직을 정비하고 연합 작전의 기틀을 닦는 막중한 책임을 맡았습니다. 미군 장성으로서 한국군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같이 갑시다'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베시 대장은 1979년 7월까지 재임하며 초기 사령부의 안정적인 정착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한국군의 작전 능력을 존중하며 양국 군이 대등한 동반자로서 협력할 수 있는 문화를 조성했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연합사는 북한의 도발 의지를 꺾는 강력한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초대 부사령관 류병현 취임]
한국군을 대표하여 류병현 육군 대장이 연합사 초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사령관을 보좌하며 연합사 내 한국군의 비중과 목소리를 높이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한국군 최초로 연합 지휘 체계의 핵심 수뇌부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류병현 대장은 연합사의 참모 조직 구성을 주도하며 한국군 장교들의 전문성을 키우는 데 힘썼습니다. 그는 미군 지휘부와 긴밀히 협력하며 국가 방위의 중추적 기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이후 부사령관직은 한국 육군 대장이 전담하는 전통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1979
[2대 사령관 위컴 취임]
존 위컴 대장이 2대 사령관으로 취임하며 연합사의 지휘권을 이어받았습니다. 격동의 시기를 지나며 연합사의 실전 대응 능력을 한층 강화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도 한미 군사 동맹의 흔들림 없는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위컴 대장은 1982년까지 3년 가까이 재임하며 사령부의 위상을 확고히 했습니다. 특히 대형 연합 훈련인 팀 스피릿의 정례화와 고도화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연합사는 단순한 행정 조직을 넘어선 강력한 야전 사령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최고 경계 태세 발령]
박정희 대통령 서거 사건 직후 연합사는 북한의 오판을 막기 위해 경계 태세를 대폭 강화했습니다. 주한미군에 데프콘 3(DEFCON 3)가 발령되었으며 연합 지휘 체계가 24시간 가동되었습니다. 사령부의 존재가 국가 위기 상황에서 안정판 역할을 수행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시 연합사 수뇌부는 북한군의 이상 징후를 면밀히 감시하며 즉각 응징 태세를 유지했습니다. 미 항공모함 키티호크호가 한국 해역으로 긴급 전개되는 등 강력한 무력 시위가 병행되었습니다. 이 긴박한 대응은 국내 정치적 혼란기에도 외부의 침략 시도를 완벽히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80
[한미야전군사령부 개편]
기존 한미 제1군단이 '한미야전군사령부(CFA)'로 명칭을 변경하고 조직을 확대 개편했습니다. 이는 연합사의 지휘를 받는 현장 야전군 체계를 더욱 전문화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서부전선의 방어 책임이 더욱 명확해지고 연합 작전의 효율성이 높아졌습니다.
명칭 변경과 함께 사령관은 미군 중장이, 부사령관은 한국군 중장이 맡는 체제가 공고해졌습니다. 실제 전투가 발생할 경우 최전방에서 적의 주력을 격멸하는 실전 지휘소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 조직은 연합사의 손과 발이 되어 12년 동안 한반도 허리를 수호했습니다.
1982
[3대 사령관 세네월드 취임]
로버트 세네월드 대장이 연합사령관으로 취임하여 2년간 동맹의 수장을 맡았습니다. 그는 한미 양국 군의 상호 운용성을 높이기 위한 현대화 사업에 집중했습니다. 첨단 무기 체계 도입과 정보 공유 시스템의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한국 지형에 적합한 연합 작전 교리를 발전시키는 데 힘썼습니다. 미 본토와의 실시간 통신망을 강화하여 신속한 전력 전개가 가능하도록 인프라를 개선했습니다. 사령관으로서 그는 한국군 장성들과의 깊은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동맹을 안정적으로 관리했습니다.
1984
[4대 사령관 리브시 취임]
윌리엄 리브시 대장이 4대 사령관으로 부임하며 연합사의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그는 3년간 재임하며 88 서울 올림픽을 앞둔 시점의 안보 환경을 안정적으로 관리했습니다. 북한의 위협에 대비한 정밀 감시 체계 강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리브시 대장은 야전 지휘관 출신답게 실전적인 훈련과 전투 준비 태세를 강조했습니다. 그는 한국군의 전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한국군의 역할을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연합사는 더욱 정교한 대응 시나리오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1987
[5대 사령관 메네트리 취임]
루이스 메네트리 대장이 5대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서울 올림픽 기간의 성공적인 안보 보장을 이끌었습니다. 전 세계인의 축제가 안전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철저한 경계 태세를 유지했습니다. 이 시기에 연합사는 올림픽 안보 지원 본부로서의 기능을 완벽히 수행했습니다.
올림픽 기간 중 발생할 수 있는 테러와 무력 도발에 대비해 한미 연합 특수 작전 체계를 가동했습니다. 메네트리 대장은 평화로운 대회를 위해 막후에서 엄청난 군사적 압박을 북한에 가했습니다. 대회가 끝난 후 그는 연합 방위 태세를 한 차원 높인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1990
[6대 사령관 리스카시 취임]
로버트 리스카시 대장이 6대 사령관으로 취임하며 탈냉전 시대로 접어든 한반도 안보를 책임졌습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한미 연합 작전 통제권의 환수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입니다. 그는 변화하는 동맹 관계에 발맞춘 새로운 사령부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리스카시 대장은 한국군 장성이 연합사의 주요 보직을 맡을 수 있도록 조직 개편을 주도했습니다. 특히 한미야전군사령부의 해체와 한국군 중심의 방어 체계 전환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1993년까지 재임하며 동맹의 미래 지향적인 변화를 위한 초석을 놓았습니다.
1991
[작전권 환수 논의 시작]
제22차 한미 안보협의회에서 평시 작전통제권을 한국군에 이양하기 위한 구체적인 협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연합사의 권한 중 일부를 대한민국 국군에 돌려주는 역사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양국은 안보 자립도를 높여야 한다는 공감대 아래 이 작업을 추진했습니다.
탈냉전 분위기와 대한민국의 국력 신장이 이 논의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평상시의 부대 운영과 훈련 통제권부터 이양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연합사는 전시 작전권을 핵심으로 하되, 평시 권한의 이행 절차를 차근차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1992
[한미야전군사령부 해체]
12년 동안 서부전선을 지켜온 한미야전군사령부(CFA)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습니다. 해당 전선의 방어 임무는 대한민국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로 완전히 이관되었습니다. 이는 연합 방위 체제에서 한국군의 주도권이 확대된 상징적 사건입니다.
미군 지휘 하에 있던 대규모 연합 전투 부대가 사라지고 한국군이 단독으로 전방을 책임지는 체제가 되었습니다. 해체식에는 양국 군 주요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그간의 공로를 기렸습니다. 연합사는 이후 상위 지휘 본부로서의 기능에 더욱 집중하며 전략적 지도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1993
[7대 사령관 게리 럭 취임]
게리 럭 대장이 7대 사령관으로 부임하며 1차 북핵 위기의 긴박한 상황을 지휘했습니다. 북한의 NPT 탈퇴 선언으로 촉발된 전쟁 위기 속에서 연합사의 대응 능력을 극대화했습니다. 실제 타격 계획인 '작전계획 5027'의 실효성을 점검하며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게리 럭 대장은 전쟁 발생 시 엄청난 피해가 예상됨을 경고하며 외교적 해결과 군사적 대비의 균형을 맞췄습니다. 그는 1996년까지 재임하며 평시 작전권 이양이라는 거대한 행정적 변화를 현장에서 진두지휘했습니다. 그의 리더십 덕분에 사령부는 급격한 권한 변화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안보 태세를 유지했습니다.
1994
[평시 작전통제권 환수]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 이후 처음으로 평상시 부대 운영과 훈련에 대한 통제권을 연합사로부터 돌려받았습니다. 연합사는 전쟁 시에만 작전권을 행사하게 되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는 한국군의 자주 국방 역량이 크게 인정받은 기념비적인 순간입니다.
평시 작전권이 합참으로 넘어가면서 한국군은 독자적인 훈련 계획 수립과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북한의 도발에 대비한 연합 정보 자산의 활용과 전시 계획은 여전히 긴밀히 공유되었습니다. 사령부의 기능은 평시 관리에서 전시 대비 및 연합 훈련 기획 중심으로 전문화되었습니다.
1996
[8대 사령관 틸렐리 취임]
존 틸렐리 대장이 8대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21세기를 향한 연합사의 디지털화와 현대화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작전계획 5027'을 현대 전쟁 양상에 맞춰 개정하는 작업을 주도했습니다. 정보 통신 기술을 접목한 실시간 전장 정보 공유 시스템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틸렐리 대장은 한국군과 미군의 통신 장비 호환성을 높이는 데 사활을 걸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연합사는 인공위성과 조기경보기를 활용한 첨단 감시 체계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1999년 말까지 재임하며 사령부를 고도의 지능형 지휘 본부로 탈바꿈시켰습니다.
1999
[9대 사령관 슈워츠 취임]
토머스 슈워츠 대장이 9대 사령관으로 취임하며 새로운 밀레니엄의 안보를 책임졌습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등 급격한 화해 무드 속에서도 철저한 군사적 대비 태세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치적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연합사의 정체성을 강조했습니다.
슈워츠 대장은 '방어는 최선의 공격'이라는 신념으로 강력한 연합 훈련을 지속했습니다. 그는 한국군 지휘부와 격의 없는 소통을 통해 동맹의 화합을 도모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재임 중 연합사 창설 20주년을 기념하며 동맹의 미래 가치를 재정립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2002
[10대 사령관 라포트 취임]
리언 라포트 대장이 10대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참여정부 초기 한미 관계의 격변기를 관리했습니다. 주한미군 기지 이전과 전시작전권 전환 등 굵직한 현안들이 쏟아지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복잡한 갈등 상황에서도 군사적 전문성을 발휘해 동맹의 안정을 꾀했습니다.
라포트 대장은 '용산 기지 이전 협정(YRP)'과 '연합 토지 관리 계획(LPP)'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2006년까지 4년간 장기 재임하며 사령부의 운영 효율성을 높이는 구조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한국 대중과의 접점을 늘리며 주한미군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2003
[기지 이전 협상 본격화]
서울 용산에 위치한 연합사령부와 주한미군 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하기 위한 협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연합사가 60년 가까이 머물던 서울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전략적 요충지로 옮겨가는 시작이었습니다. 국토의 균형 발전과 군사적 효율성을 동시에 고려한 결정이었습니다.
대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기지를 이전함으로써 서울 시민의 편익을 높이고, 미군은 흩어져 있던 전력을 집결시켜 대응 속도를 높이려 했습니다. 연합사 본부 건물의 이전 규모와 시기를 두고 양국 간의 치열한 줄다리기가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은 훗날 평택 캠프 험프리스라는 거대 기지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2005
[전작권 전환 논의 재개]
제37차 안보협의회에서 전쟁 시의 작전통제권까지 한국군에 넘겨주는 방안에 대한 논의가 공식 재개되었습니다. 이는 연합사의 핵심 권한이 대한민국 국군으로 완전히 복귀함을 의미하는 중대한 변화였습니다. 양국은 전환의 적절한 시기와 조건에 대한 기술적 검토에 들어갔습니다.
자주 국방을 강조하던 참여정부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연합사가 해체될 것인지, 혹은 기능만 변경될 것인지를 두고 수많은 군사적 시나리오가 검토되었습니다. 이 논의는 동맹의 성격을 '미군 주도'에서 '한국군 주도'로 바꾸는 근본적인 개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2006
[11대 사령관 버웰 벨 취임]
버웰 벨 대장이 11대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전시작전권 전환을 위한 구체적인 이행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는 전작권 전환 이후에도 동맹이 약화되지 않도록 새로운 지휘 구조를 설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한국군의 독자적인 작전 계획 수립 능력을 키우기 위한 교육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벨 대장은 2008년까지 재임하며 동맹의 미래 지형도를 그렸습니다. 그는 전환 시기 결정과 관련된 논쟁 속에서 군사적 실무 의견을 가감 없이 정부에 전달했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연합사는 권한 이양을 위한 수많은 시뮬레이션과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전작권 전환 시기 합의]
한미 양국 국방장관이 전시작전통제권을 2009년에서 2012년 사이에 전환하기로 전략적 합의를 마쳤습니다. 연합사가 가지고 있던 최고의 지휘권이 대한민국으로 돌아오는 마감 시한이 처음으로 설정된 것입니다. 사령부는 이 일정에 맞춰 조직 해체 및 개편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합의에 따라 연합사는 향후 해체되고 한미 양국 군은 각각 독자적인 사령부를 운영하되 협력하는 체제로 바뀔 예정이었습니다. 이 결정은 군 내부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령부는 이 계획의 실무 집행 기관으로서 방대한 준비 작업을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2007
[연합사 창설 30주년]
사령부 창설 30주년을 맞이하여 한미 동맹의 성과를 축하하고 미래 비전을 공유하는 기념 행사가 열렸습니다. 지난 30년간 단 한 번의 전면전도 허용하지 않은 연합사의 성과가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동맹의 결속력을 재확인하며 '같이 갑시다' 정신을 되새겼습니다.
용산 기지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양국 군 수뇌부와 역대 사령관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습니다. 한반도 안보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온 연합사의 역사를 정리한 기록물들이 전시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전작권 전환을 앞두고 사령부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던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2008
[키 리졸브 훈련 도입]
기존의 RSOI 훈련을 대체하는 새로운 연합 연습인 '키 리졸브(Key Resolve)'가 처음으로 실시되었습니다. 전작권 전환에 대비해 한국군의 지휘 역량을 강화하고 연합 지휘 절차를 숙달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연합사는 이 훈련을 통해 실전과 같은 시나리오 대응 능력을 점검했습니다.
매년 봄에 열리는 이 훈련은 유사시 미 증원 전력의 신속한 전개와 국군의 방어 작전을 결합한 연습입니다. 연합사는 훈련의 명칭 변경을 통해 더욱 능동적이고 공세적인 방어 의지를 표현했습니다. 이 연습은 전작권 환수 전까지 사령부의 작전 능력을 평가하는 핵심 잣대가 되었습니다.
[12대 사령관 샤프 취임]
월터 샤프 대장이 12대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의 한미 안보 현안을 다뤘습니다. 그는 전작권 전환 연기를 포함한 전략적 정책 변화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했습니다.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핵실험 등 고강도 도발에 대해 빈틈없는 대비 태세를 유지했습니다.
샤프 대장은 2011년까지 재임하며 천안함 폭심과 연평도 포격전이라는 초유의 위기 상황을 겪었습니다. 그는 한국군 지휘부와 실시간으로 공조하며 미군 전력의 즉각적인 지원 태세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의 침착하고 단호한 지휘는 위기 상황에서 동맹의 균열을 막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2010
[천안함 피격 연합 대응]
대한민국 해군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하자 연합사는 즉각적인 위기 관리 체제에 돌입했습니다. 미 해군의 이지스함 등을 현장에 급파하여 수색 및 구조 활동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사령부는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다국적 합동 조사단에 군사적 전문 지식을 제공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한미 양국은 동해와 서해에서 전례 없는 고강도 연합 해상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연합사는 북한에 대해 '도발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경고 메시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기 사령부 내의 긴장감은 어느 때보다 높았으며 실질적인 전쟁 억제력을 발휘했습니다.
[전작권 전환 시기 연기]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통해 전시작전권 전환 시기를 2015년 12월로 연기하기로 전격 합의했습니다. 북한의 도발로 엄중해진 안보 상황을 고려한 신중한 결정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연합사의 해체 계획도 3년 이상 뒤로 미뤄지게 되었습니다.
정상 간의 결단에 따라 연합사는 기존의 전환 계획을 대대적으로 수정했습니다. 한국군의 자립 역량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는 평가와 함께 자주권 회복이 늦춰졌다는 우려가 공존했습니다. 사령부는 이 연기 기간을 활용해 보다 정밀한 작전 이양 절차를 재설계했습니다.
2011
[13대 사령관 서먼 취임]
제임스 서먼 대장이 13대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연합 방위 태세를 진두지휘했습니다. 그는 김정일 사망 이후 북한 정권의 불안정성에 대비한 '우발 계획'을 철저히 점검했습니다. 양국 군의 합동 작전 능력을 키우기 위해 실전과 같은 가상 전장 훈련 시스템을 대폭 도입했습니다.
서먼 대장은 2013년까지 재임하며 한국군과의 연대감을 강화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는 미 본토의 대규모 전투 부대를 한국으로 순환 배치하는 체제를 안정적으로 정착시켰습니다. 그의 지휘 아래 연합사는 더욱 유연하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기동력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2013
[14대 사령관 스캐퍼로티 취임]
커티스 스캐퍼로티 대장이 14대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박근혜 정부와의 안보 협력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이라는 새로운 원칙을 실무적으로 정립했습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현실화됨에 따라 맞춤형 억제 전략을 사령부에 도입했습니다.
그는 2016년까지 재임하며 한미 연합 사단의 창설과 같은 혁신적인 동맹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스캐퍼로티 대장은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동맹의 결속을 상징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연합사는 북핵 위협에 대응하는 최강의 보루로서 위상을 굳건히 했습니다.
2014
[조건 기반 전작권 전환 합의]
특정 시한을 정하지 않고 안보 상황과 한국군의 능력을 고려하는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에 양국이 합의했습니다. 이는 안보 공백을 막기 위해 무기한 연기 가능성을 열어둔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연합사는 사실상 전작권이 전환될 때까지 장기간 존속하게 되었습니다.
제46차 안보협의회에서의 이 결정으로 연합사의 해체 논의는 수면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대신 한국군이 핵심 군사 능력을 갖출 때까지 연합 지휘 체계를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사령부는 이 합의에 따라 조직의 안정성을 회복하고 장기적인 발전 전략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16
[15대 사령관 브룩스 취임]
빈센트 브룩스 대장이 15대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미 동맹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흑인 최초의 연합사령관으로서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존중을 표현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의 한반도 배치를 성공적으로 지휘했습니다.
2018년 말까지 재임하며 북한의 6차 핵실험과 잇따른 미사일 도발에 단호히 대응했습니다. 동시에 2018년 평창 올림픽 전후의 남북 화해 무드 속에서 군사적 긴장을 관리하는 유연함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연합사 본부의 평택 이전 결정을 공식화하는 등 사령부의 미래 지향적 변화를 주도했습니다.
2017
[27대 부사령관 김병주 취임]
김병주 대장이 연합사 부사령관으로 취임하여 문재인 정부 초기 한미 연합 방위 태세를 조율했습니다. 그는 한국군 장성으로서 전작권 조기 전환을 위한 기초 역량 평가 작업을 주도했습니다. 연합사 내 한국군 참모진의 위상을 강화하고 실질적인 의사결정 참여도를 높였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한미 양국 군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동맹의 신뢰를 쌓았습니다. 특히 연합 훈련의 명칭 변경과 방식 개선 과정에서 한국측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정계에 진출하여 국방 안보 전문가로서 활약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2018
[16대 사령관 에이브럼스 취임]
로버트 에이브럼스 대장이 16대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2년 8개월간 동맹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전작권 전환 이후에도 사령부의 골격을 유지하되 지휘관 보직을 한국군이 맡는 '미래 사령부' 안을 확정했습니다. 강력한 실전 훈련을 강조하며 연합사의 전투 준비 태세를 최고 수준으로 유지했습니다.
에이브럼스 대장은 주한미군의 험프리스 시대 개막을 현장에서 진두지휘했습니다. 그는 코로나19 대유행이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도 연합 훈련을 중단 없이 수행할 수 있는 방역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그의 재임 동안 연합사는 물리적인 기지 이전과 질적인 지휘 구조 개편이라는 두 가지 과업을 동시에 추진했습니다.
2019
[연합 연습 체계 전면 개편]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키 리졸브와 독수리 훈련이 종료되고 새로운 방식의 연합 연습이 도입되었습니다. 비핵화 협상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실기동 훈련보다는 지휘소 연습 중심의 '동맹' 연습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연합사는 정세 변화에 맞춘 유연한 훈련 모델을 개발하여 적용했습니다.
이 변화는 한미 동맹이 군사적 압박뿐만 아니라 외교적 노력을 뒷받침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연합사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활용해 복잡한 전장 상황을 연습하는 능력을 획기적으로 키웠습니다. 이후 이 연습은 연합지휘소훈련(CCPT)이라는 명칭으로 정착하며 전작권 평가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사령부 평택 이전 확정]
한미 양국은 용산 기지에 남기로 했던 연합사 본부를 평택 캠프 험프리스로 이전하기로 최종 합의했습니다. 이는 주한미군의 핵심 전력이 집결된 곳으로 사령부를 옮겨 작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수십 년간 이어진 용산 시대를 마감하는 역사적 결정이 내려진 것입니다.
서울에 일부 잔류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완전 이전을 선택함으로써 기지 반환 속도가 빨라지게 되었습니다. 사령부 건물 설계와 통신망 구축을 위한 대규모 공사가 평택 현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결정은 연합사가 미래 사령부 체제로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2021
[17대 사령관 라캐머라 취임]
폴 라캐머라 대장이 17대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평택 이전의 마무리와 미래사령부 검증 작업을 지휘했습니다. 그는 현장 중심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부대원들과의 소통을 강화했습니다. 전작권 전환을 위한 2단계 역량 평가인 완전운용능력(FOC) 검증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라캐머라 대장은 2024년 말까지 재임하며 코로나19 이후 연합 훈련을 정상화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북한의 잇따른 미사일 발사에 대응해 전략 자산의 전개를 정례화하며 강력한 동맹의 의지를 과시했습니다. 그의 지휘 아래 연합사는 평택 기지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했습니다.
2022
[을지 자유의 방패 실시]
기존의 연합 연습을 대폭 확대 개편한 '을지 자유의 방패(UFS)'가 처음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정부 연습과 군사 훈련을 통합하여 국가 총력전 수행 능력을 점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연합사는 실제 야외 기동 훈련을 대거 포함시켜 실전성을 획기적으로 높였습니다.
북한의 고도화된 핵 위협 시나리오를 반영하여 더욱 실무적인 연습이 이루어졌습니다. 전작권 전환을 염두에 두고 한국군 대장이 연합사령관 역할을 맡아 지휘하는 절차도 포함되었습니다. 이 훈련은 연합사의 대응 패러다임을 '관리'에서 '능동적 억제'로 전환한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용산 시대 마감 및 이전]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창설 이후 44년 동안 머물렀던 서울 용산 기지를 떠나 평택으로 본격적인 이전을 시작했습니다. 수천 톤의 서류와 장비, 수백 명의 인력이 순차적으로 평택 캠프 험프리스로 이동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안보 지도의 중심이 서울에서 경기 남부로 이동했음을 의미합니다.
이전 과정은 철저한 보안 속에 군사 작전과 같이 치밀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용산 기지의 상징인 화이트 하우스와 주요 시설들이 한국 정부에 반환될 준비를 마쳤습니다. 사령부 부대원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더 나은 연구와 작전 환경이 갖춰진 평택에서 새로운 역사를 쓸 준비를 했습니다.
[평택 캠프 험프리스 개관]
평택기지 내 신축된 연합사령부 건물에서 공식적인 개관식과 국기 게양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로써 주한미군사와 연합사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최상의 지휘 시너지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해외 미군 기지 내에 사령부가 안착한 역사적인 날입니다.
이종섭 국방장관과 라캐머라 사령관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평택 시대의 개막을 알렸습니다. 최첨단 통신 시설과 작전 지휘소를 갖춘 신 청사는 전시에 더욱 강력한 지휘력을 발휘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사령부 근처에 위치한 한국군 제2작전사령부 등과의 협력도 더욱 수월해진 환경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2023
[31대 부사령관 강신철 취임]
강신철 육군 대장이 연합사 제31대 부사령관으로 취임하여 평택 시대의 내실을 다지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는 한미 양국 군의 융합과 미래 지휘 구조 전환을 위한 실무 책임자로서 활동했습니다. 연합 훈련의 성과를 극대화하고 한국군의 작전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미군 지휘부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으며 동맹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았습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변화된 글로벌 안보 환경에 맞는 새로운 전술 도입에 힘썼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연합사는 평택 기지에서의 안정적인 운영 시스템을 완벽히 구축했습니다.
2024
[18대 사령관 브런슨 취임]
제이비어 브런슨 대장이 18대 사령관으로 취임하며 한미연합사의 최신 역사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연합사의 역할을 국제적으로 확대하는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인공지능과 무인 체계를 결합한 미래형 연합 작전 교리 발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브런슨 사령관은 한국군과의 긴밀한 파트너십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그는 취임사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동맹의 견고함을 재확인했습니다. 그의 지휘 아래 연합사는 전작권 전환을 위한 최종 단계의 평가를 성실히 수행하며 미래 지휘 구조로의 변신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2025
[32대 부사령관 김성민 취임]
김성민 육군 대장이 제32대 연합사 부사령관으로 부임하며 한국군을 대표하는 연합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전작권 환수 이후의 미래 사령부 체제 가동을 준비하는 핵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국군의 첨단 전력과 미군의 전략 자산을 통합 운용하는 효율성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김성민 대장은 부임 직후부터 현장 부대들을 점검하며 연합 방위 태세의 허점을 없애는 데 매진했습니다. 그는 한미 양국 군의 장교들이 격의 없이 토론하고 작전을 짜는 문화를 정착시켰습니다. 사령부 내 한국군의 영향력을 실질적으로 확대하며 자주 국방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습니다.
[연합지상군구성군 상설화]
서류상의 조직이었던 연합지상군구성군사령부(CGCC)가 실제 병력과 참모진을 갖춘 상설 부대로 공식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지상 작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한국 육군과 미 8군의 협력을 상시화하기 위한 혁신적인 조치입니다. 연합사의 실전 대응 능력이 한 차원 더 높아진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상작전사령부와 미 8군사령부가 전시에만 결합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평시부터 통합된 지휘 체계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유사시 즉각적인 지상전 전개가 가능해졌으며 군수 및 정보 공유의 속도가 획기적으로 빨라졌습니다. 이 부대의 출범은 연합사가 미래 사령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거둔 가장 구체적인 조직 혁신 사례입니다.
2026
[미래 사령부 체제 가동]
한미연합군사령부가 평택 시대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고 한국군이 주도하는 미래 사령부 체제의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양국은 전작권 전환 조건을 대부분 충족했음을 확인하고 최종적인 이양 시기를 조율하고 있습니다. 동북아시아 최고의 평화 수호 기구로서 위용을 떨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연합사는 단순한 군사 조직을 넘어 정보, 경제, 기술이 융합된 복합적인 안보 동맹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 연합군 중 가장 완벽한 상호 운용성을 보유했다는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넘어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가장 강력한 억제력'으로서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