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슨의 만행과 심판
과학자, 노벨상 수상자, 생물학자, 차별주의자
최근 수정 시각 : 2026-01-23- 14:51:28
제임스 왓슨은 1953년 DNA 이중나선 구조를 규명하여 현대 생명과학의 초석을 놓은 거장으로 평가받으나, 그의 위대한 과학적 성취는 생애 전반에 걸친 성차별, 인종차별, 우생학적 망언으로 인해 완전히 훼손되었습니다. 그는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과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CSHL)를 세계 최고의 기관으로 키워낸 공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위를 빌려 사회적 약자를 폄하하고 과학적 근거 없는 생물학적 결정론을 유포해 왔습니다. 결국 2007년 아프리카인의 지능 관련 발언으로 총장직에서 불명예 퇴진했으며, 2019년 다큐멘터리를 통해 차별적 신념을 재확인함으로써 남아있던 모든 명예직을 박탈당하고 연구소에서 축출되었습니다. 그의 몰락은 과학적 위업이 과학자의 윤리적 책임과 인권 존중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결코 대체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928
제임스 왓슨은 시카고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부터 과학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훗날 그는 생물학 분야에서 활동하며 20세기 생명과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를 이룩하게 됩니다.
이 탄생은 분자생물학의 혁명적 발전과 동시에 과학계의 커다란 윤리적 논쟁의 시작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1953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이룩한 이 업적은 현대 유전학의 기틀을 마련한 역사적 성취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발견 과정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엑스선 회절 데이터를 부적절하게 활용했다는 그늘이 존재했습니다.
이 발견을 통해 왓슨은 세계적인 과학적 천재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1958
그녀는 3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자신의 과학적 권리를 주장하거나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를 잃었습니다.
왓슨은 훗날 그녀가 사망하여 대응할 수 없는 상황임을 이용해 일방적인 인격 공격을 자행했습니다.
프랭클린의 부재는 왓슨의 성차별적 만행이 오랜 기간 여과 없이 전파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1962
노벨상 수상을 통해 왓슨은 과학계의 정점에 올랐으며 막대한 권위와 사회적 영향력을 획득했습니다.
이 상은 그가 향후 자신의 편견을 과학적 사실인 양 포장하는 데 악용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당시 수상자 명단에서 핵심 기여자인 프랭클린은 고인이었다는 이유 등으로 제외되었습니다.
1968
이후 그는 반세기 가까이 헌신하며 CSHL을 세계 유전학 연구의 성지로 변모시켰습니다.
연구소 내에서 그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학문적 제국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이 직위는 훗날 그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 징계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는 근거가 됩니다.
과학 대중서로서 큰 인기를 끌었으나, 동료 과학자에 대한 왜곡된 묘사로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고인이 된 프랭클린에 대한 노골적인 비하 내용을 담아 학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책은 왓슨의 천재적 면모와 동시에 그가 가진 심각한 인격적 결함을 동시에 드러냈습니다.
본인이 싫어했던 애칭을 사용하여 고인을 모욕하고 그녀의 전문성을 깎아내렸습니다.
이는 동등한 동료 과학자가 아닌 대상화된 객체로 취급한 명백한 성차별적 행동이었습니다.
왓슨은 이를 통해 자신의 남성 중심적인 편협한 시각을 대중에게 유포했습니다.
"안경을 벗고 머리를 다르게 했다면 매력적이었을 것"이라는 서술로 외모 품평을 자행했습니다.
과학적 기여를 논해야 할 회고록에서 여성의 외모를 평가 잣대로 삼은 것은 저열한 만행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과학계의 분위기를 고려하더라도 용인될 수 없는 수준의 성차별이었습니다.
그녀의 전문적인 연구 태도를 비사교적인 성격 문제로 치환하여 서술했습니다.
여성 과학자가 연구실 내에서 겪는 구조적 어려움을 무시한 채 개인의 성격 결함으로 몰아갔습니다.
이러한 서술은 훗날 프랭클린의 명예가 회복되기 전까지 그녀의 이미지를 왜곡시켰습니다.
그녀가 찍은 '사진 51'이 결정적 단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단순한 조력자로 취급했습니다.
여성 과학자의 주체적인 연구 성과를 남성 과학자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이는 왓슨의 초기 경력부터 나타난 심각한 윤리적 결함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1990
왓슨은 인류 유전 지도를 작성하는 역사적인 국가 프로젝트를 이끌며 영향력을 극대화했습니다.
이 시기 그의 과학적 권위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막강한 지위를 얻은 그는 이후 더욱 거침없이 자신의 편향된 사회적 견해를 피력하기 시작했습니다.
1994
연구소 내 행정적 권위의 정점을 찍으며 CSHL을 상징하는 인물로 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이곳을 자신의 제국처럼 구축하며 인사와 행정 전반에 절대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이 자리는 훗날 그가 인종주의 발언을 했을 때 이사회가 그를 축출해야 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1997
인권 단체들은 유전적 선별을 통한 생명 경시 풍조를 강력히 규탄했습니다.
과학적 권위를 이용해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이 사건은 왓슨의 우생학적 신념이 사회적 허용 범위를 넘어서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적 지향 유전자가 발견되고 여성이 동성애자 아이를 원치 않는다면 낙태하도록 두어야 한다"고 발언했습니다.
이는 특정 성적 지향을 유전적 결함으로 간주하는 위험한 우생학적 시각을 드러낸 것입니다.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소수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발언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난독증이나 작은 키를 이유로 한 낙태와 동성애 유전자 낙태를 동일 선상에 두었습니다.
그의 해명은 생명을 유전적 형질의 '쇼핑 목록'처럼 취급한다는 비판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논란을 잠재우기는커녕 그의 생물학적 결정론의 위험성만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사과하기보다는 자신의 발언을 정당화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억압하려 시도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언론의 비판 기능을 마비시키려 한 만행이었습니다.
이러한 고압적 태도는 훗날 그가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과정에서 우호 세력을 잃는 원인이 됩니다.
2000
이 초상화는 왓슨이 CSHL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과 위상을 상징하는 기념물이었습니다.
그는 연구소의 역사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권위를 물리적으로 박제하고자 했습니다.
이 초상화는 훗날 그가 완전히 축출되었을 때 가장 먼저 철거되는 대상이 됩니다.
"뚱뚱한 사람을 인터뷰할 때마다 고용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기분이 나쁘다"고 말했습니다.
비만이 야망이나 지능의 결여와 관련이 있다는 근거 없는 가설을 유포했습니다.
이는 노벨상 수상자의 이름으로 명백한 고용 차별을 공개적으로 권장한 사례입니다.
"그것이 바로 라틴 러버가 있는 이유"라며 인종적 스테레오타입을 사실로 둔갑시켰습니다.
영국인에게는 러버가 없고 오직 '환자'만 있을 뿐이라며 국가와 인종을 조롱했습니다.
청중들은 노벨상 수상자의 입에서 나온 저급한 인종주의적 발언에 경악했습니다.
프리드먼은 체중과 성격 차이를 연결하는 어떠한 데이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왓슨의 주장이 과학이 아닌 개인의 편견에 기반한 '의사과학'임을 명확히 했습니다.
동료 과학자들이 왓슨의 발언이 지닌 위험성을 공개적으로 지적하기 시작한 분기점입니다.
2003
행정 일선에서는 물러났으나 연구소의 원로로서 여전히 막강한 실권을 유지했습니다.
연구소는 그의 과거 공로를 인정하며 명예로운 지위를 지속적으로 보장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명예로운 직함은 4년 후 그의 극단적인 인종차별 발언으로 위기를 맞습니다.
2007
자신의 일대기를 담은 책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대대적인 홍보 활동에 나섰습니다.
이 방문 기간 동안의 인터뷰는 그가 평생 쌓아온 명성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자신만만했던 노학자의 영국 방문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이어졌습니다.
[명예 총장(Chancellor Emeritus) 직함 유지]
사임 직후 연구소는 그에게 명예 총장이라는 직함을 부여했습니다.
완전한 관계 단절이 아닌 과거 공로를 인정하는 형식적인 예우를 유지했습니다.
이 조치는 그가 연구소의 구성원으로서 여전히 흔적을 남길 수 있게 한 온정적 처사였습니다.
왓슨은 이 직함을 바탕으로 명예직으로서의 신분을 계속해서 보호받았습니다.
교수진의 일원으로서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는 명예를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연구소는 그가 자중하며 명예롭게 남은 여생을 보내기를 기대했던 결정이었습니다.
이 직함 역시 훗날 그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최종 박탈당하게 됩니다.
[명예 이사(Honorary Trustee) 지위 허용]
연구소의 자문 역할을 할 수 있는 명예 이사 직함도 함께 부여되었습니다.
직접적인 의결권은 없으나 연구소의 원로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위를 허용받았습니다.
왓슨은 이 시기를 거치며 자신이 '비인물'이 되었다고 불평했지만 신분은 유지되었습니다 .
연구소 내부의 영향력을 실낱같이 유지할 수 있게 한 마지막 상징적 보루였습니다.
행정직에서는 물러났으나 물리적으로는 여전히 연구소 공동체의 일원으로 남았습니다.
이는 2019년에 이루어질 전면적인 축출과는 대조되는 온건한 1차 대응의 일환이었습니다.
왓슨은 자신이 세운 제국 안에서 생활하며 조용히 재기를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미래에 대해 "본질적으로 암울하다"는 극단적인 비관론을 폈습니다.
흑인과 백인의 지능이 같다는 전제의 사회 정책은 테스트 결과와 배치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과학적 근거 없는 주장을 인종차별적 선동에 이용한 최악의 만행이었습니다.
[흑인 직원에 대한 차별적 경험 담론]
"흑인 직원을 다루어 본 사람들은 평등이 사실이 아님을 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편협한 개인적 경험을 인종 전체의 보편적 특성으로 규정해 버렸습니다.
이는 유전학의 권위자가 지능의 열등성을 생물학적 사실로 낙인찍은 위험한 행위였습니다..
이 발언은 왓슨이 단순한 실언을 한 것이 아니라 확고한 인종주의자임을 증명했습니다.
박물관 측은 왓슨이 "허용 가능한 논쟁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대중 과학 교육 기관으로서 인종주의적 발언을 묵과할 수 없다는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이 조치는 왓슨의 사회적 고립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첫 번째 실질적 타격이었습니다.
브리스톨 대학교를 포함한 학계 전체가 왓슨과의 단절을 선언했습니다.
지성의 전당에서 인종주의적 망언을 일삼는 과학자의 자리는 없음을 명확히 했습니다.
왓슨의 학술적 영향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피부색이 지능을 예측한다는 주장은 어떠한 과학적 근거도 없다"고 일축했습니다.
현대 유전학의 정설을 훼손하는 왓슨의 주장을 동료 과학자로서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 비판은 왓슨의 망언이 과학적 논쟁의 대상조차 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연구소의 존립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설립자의 권한을 박탈하는 신속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행정적 직무 정지는 왓슨이 CSHL에 미치던 실질적 지배력이 처음으로 중단된 날입니다.
이사회는 연구소의 신뢰성을 회복하기 위해 왓슨의 발언과 철저히 선을 그었습니다.
이사회는 왓슨의 발언이 연구소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음을 명확히 했습니다.
그가 실제로 그런 말을 했다면 매우 슬프고 당혹스럽다는 감정적 성토도 덧붙였습니다.
기관의 윤리적 기준이 설립자 개인의 아집보다 우선함을 대외적으로 공포했습니다.
"아프리카가 유전적으로 열등하다는 믿음에 대한 과학적 근거는 없다"고 인정했습니다.
본인이 인용된 대로 말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며 무조건적인 사과를 표명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과는 훗날 징계를 피하기 위한 거짓된 행위였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콜린스는 해당 주장이 어떤 과학적 증거에 의해서도 지지되지 않는다고 못 박았습니다.
유전학계의 최고 책임자 중 한 명으로서 왓슨의 망언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했습니다.
과학계 내부의 자정 작용이 최고위층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노벨상 수상자의 발언이 극우 인종주의 세력에 정당성을 부여할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과학적 논란을 넘어 사회적 해악을 끼치는 행위로 규정되어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
이로써 왓슨의 발언은 전 세계적 차원의 사회적 문제로 확산되었습니다.
1968년 소장 부임 이후 약 40년 만에 연구소 수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수치를 겪었습니다.
인종차별 망언이 한 과학자의 화려한 행정 경력을 종식시킨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완전한 축출이 아닌 온정적 퇴진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2012
"여성이 있으면 남성은 더 즐겁지만 그들은 아마도 덜 효율적"이라고 발언했습니다.
2007년의 파동 이후에도 그의 성차별적 인식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여성을 동료 연구자가 아닌 즐거움을 주는 객체로 규정하는 태도를 다시 드러냈습니다.
2014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남긴 이의 메달이 경매로 팔려나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우스마노프의 배려로 왓슨은 경제적 이득과 명예를 일시적으로 회복하는 듯 보였습니다.
메달을 되찾은 것과 별개로 왓슨의 뒤틀린 차별 신념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경매에서 메달은 410만 달러에 낙찰되며 전 세계적인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망언으로 인해 수입이 끊기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음을 항변하는 파격적인 행위였습니다.
과학자가 자신의 최고의 영예를 돈으로 환산해 파는 행위에 대해 학계는 다시 실망했습니다.
2019
과거에는 괴팍함으로 치부되던 만행이 현대에는 퇴출 사유가 됨을 증명했습니다.
노벨상이나 이중나선 발견 같은 영광도 인권 침해의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을 공고히 했습니다.
과학계 내부의 자정 작용이 한 단계 진화했음을 상징하는 문화적 변화입니다.
지능의 인종간 차이 주장이 현대 유전학의 정설과 정면 배치됨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인간 유전체의 99.9%가 동일하다는 과학적 사실이 대중적으로 강조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이 자신의 전공 밖에서 편견을 유포하는 행위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습니다.
프랭클린을 비하했던 왓슨의 과거 행적들이 다시 성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성을 동료 연구자로 존중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가치가 다시 강조되었습니다.
남성 중심적인 과학계 내부의 권위주의적 성차별 문화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연구소의 신뢰성을 지키기 위해 설립자라도 축출할 수 있다는 전례가 남았습니다.
기관의 공적 이미지가 개인의 과학적 공로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과학 기관들이 사회적 다양성과 인권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재확인했습니다.
[PBS 다큐멘터리 《American Masters》 방영]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인종차별적 신념을 여과 없이 다시 노출했습니다.
90세가 된 시점에서도 인종 간 지능 차이가 유전적 요인에 기인한다는 주장을 반복했습니다.
2007년의 사과가 진심이 아니었으며 본인의 견해는 변하지 않았다고 단언했습니다.
이 방송은 CSHL이 왓슨과 더 이상 공존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보편적 윤리 기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태도에 대중적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과학계 내부에서도 더 이상 그를 '천재의 괴팍함'으로 덮어줄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
이후 일주일간 왓슨의 퇴출을 요구하는 강력한 사회적 압박이 CSHL에 가해졌습니다.
현대 사회의 보편적 윤리 기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태도에 대중적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과학계 내부에서도 더 이상 그를 '천재의 괴팍함'으로 덮어줄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
이후 일주일간 왓슨의 퇴출을 요구하는 강력한 사회적 압박이 CSHL에 가해졌습니다.
[CSHL 이사회의 최종 축출 결정]
CSHL은 왓슨의 모든 명예직을 박탈하고 관계를 완전히 단절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왓슨의 발언을 "비난받아 마땅하며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강력히 규탄했습니다.
2007년에 유예시켰던 모든 징계를 소급하여 확정 짓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
이는 왓슨의 과학적 제국이 스스로 그를 역사에서 지워버리기로 결정한 날입니다.
[명예 총장(Chancellor Emeritus) 직함 박탈]
왓슨의 인종주의 신념 확인에 따라 명예 총장 지위를 공식 박탈했습니다.
과거의 공로가 현재의 혐오 발언을 면제해 줄 수 없음을 행정적 처분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로써 왓슨은 연구소의 원로로서 가졌던 공식적인 대표성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연구소가 수여했던 최고의 상징적 명예가 한순간에 회수되었습니다.
[올리버 R. 그레이스 명예 교수직 박탈]
학술적 예우 차원에서 유지되었던 명예 교수 직함 역시 모두 박탈되었습니다.
그가 전파하려 한 의사과학적 주장이 정통 유전학 연구소와 공존할 수 없음을 선언했습니다.
학문적 성취가 윤리적 가치를 상실했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보여준 심판이었습니다.
왓슨의 학술적 영향력을 기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부정한 상징적 조치입니다.
[명예 이사(Honorary Trustee) 직함 박탈]
연구소의 의사 결정 구조에 남아있던 최후의 상징적 지위도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연구소의 운영이나 자문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완전 고립 상태가 되었습니다 .
이사회가 설립자의 흔적을 이토록 철저히 지워낸 것은 과학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일입니다.
인종주의와의 타협 불가능성을 기관의 최고 의결 기구가 최종적으로 확정했습니다.
공식 성명에 명시된 "남아있는 모든 흔적을 끊어낸다"는 원칙에 따른 물리적 조치였습니다.
2000년부터 걸려 있던 왓슨의 상징적 초상화는 이제 연구소에서 사라졌습니다.
초상화 철거는 왓슨을 연구소의 역사에서 지우기로 결정한 가장 명백한 상징적 증거입니다.
연구소 아카이브 및 상징물 목록에서 왓슨의 이름과 흔적이 공식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뉴욕 타임스 등 글로벌 언론은 이를 '완전한 퇴출'로 신속히 보도했습니다.
행정적 효력 발생일인 2019년 1월 11일, 왓슨은 자신이 일군 터전에서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스틸먼 소장과 시몬스 의장의 공동 성명 발표]
연구소 최고 지도부가 왓슨의 축출 이유를 담은 강력한 공동 성명을 냈습니다.
성명에서 왓슨의 최근 발언을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원색적으로 규탄했습니다.
2007년의 사과가 번복된 사실을 지적하며 더 이상의 관용은 없음을 천명했습니다.
연구소 리더십이 인종주의적 편견에 맞서 내린 역사적인 도덕적 결단으로 기록됩니다.
[글로벌 언론의 왓슨 퇴출 대대적 보도]
뉴욕 타임스, 가디언 등이 왓슨의 불명예스러운 축출 소식을 전 세계에 전했습니다.
과학자의 윤리적 책임에 대한 국제적 기준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왓슨은 이제 'DNA의 아버지'보다 '타락한 천재'로 대중에게 각인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보도는 과학계에서 인종주의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2025
[별세]
제임스 D. 왓슨 박사가 9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워싱턴포스트 등은 왓슨 박사가 미국 뉴욕 이스트 노스포트의 한 호스피스 시설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왓슨 박사는 지난 2018년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후 요양 중이었다.
정확한 사인은 유족 측에서 공개하지 않았다.
2026
DNA의 비밀은 풀었지만 인간 존중이라는 보편적 윤리는 풀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CSHL은 여전히 그와 관련된 모든 명예적 수식어 사용을 금지하며 단절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빈 초상화 자리는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 웅변하는 역사적 공간이 되었습니다.
지능은 수천 개의 유전자와 환경 요인의 복잡한 상호작용임을 과학계가 재확인했습니다.
인종적 범주로 지능을 나누려는 모든 시도가 의사과학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유전학이 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쓰이지 않도록 경계하는 학문적 풍토가 조성되었습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명예 완전 회복]
왓슨의 퇴출과 함께 그녀의 독보적인 과학적 공로가 전 세계에 다시 알려졌습니다.
왓슨이 씌운 부정적 이미지를 걷어내고 그녀를 DNA 구조의 주역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촬영한 '사진 51'의 가치가 왓슨의 비하를 뚫고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습니다.
성차별의 장벽을 넘고자 했던 여성 과학자의 위대한 투쟁사가 승리한 역사로 기록되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발견도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순간 빛을 잃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과학은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보편적 가치와 공존해야 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왓슨의 사례는 미래의 모든 과학자들에게 가장 뼈아픈 경종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혐오 발언을 일삼는 이에게는 노벨상 수상자라도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는 선례입니다.
과학계의 자정 능력이 시대적 요구에 맞게 작동하고 있음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지식 탐구의 최종 목적은 인권 존중과 인류의 보편적 행복임을 다시 확인한 여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