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첩의 역사
음식, 역사, 문화
최근 수정 시각 : 2026-01-07- 12:38:11
케첩의 역사는 '감칠맛'과 '보존'을 향한 욕망이 빚은 세계화의 연대기입니다. 아시아의 발효 어장 '케찹(kê-tsiap)'은 보존성을 무기로 유럽에 전파되었고, 18세기 영국에서는 버섯과 호두 등 현지 재료로 '번역'되는 창조적 변용을 겪었습니다. 1812년 토마토가 처음 도입되고 1834년 '약'으로 오해받는 과도기를 거쳐, 1876년 하인즈가 식초와 설탕으로 보존법을 혁신하고 투명한 병으로 '신뢰'를 판매하며 비로소 오늘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완성되었습니다.
1600
[케첩의 원형, 아시아의 케찹]
현대 케첩의 기원은 중국 남부 푸젠성의 호키엔 방언으로 '절인 생선이나 갑각류의 젓갈'을 뜻하는 '케찹' 또는 '게찹'입니다. 1600년대 활발한 해상 무역의 허브였던 푸젠성을 중심으로, 이 짭조름한 액젓은 중국 남부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유통되었습니다. 냉장 기술이 없던 시대, 맛보다 상하지 않고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보존성' 덕분에 상인들에게 매력적인 상품이 되었습니다.
케첩의 원형인 '膎汁(kôe-chiap)'은 현대의 붉고 달콤한 소스와 달리 발효된 생선이나 해산물에서 나온 짠 국물, 즉 '액젓'에 가까운 물질이었습니다. 1873년 편찬된 중국어-영어 사전에도 이는 '절인 생선이나 조개류의 염수'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17세기 유럽 상인들은 실크, 도자기, 향신료와 함께 이 소스를 중요한 교역품으로 취급했는데, 이는 수개월의 장거리 항해 동안 부패하지 않고 식량을 보존해야 하는 선원들에게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즉, 케첩은 유럽인의 발견이 아니라 이미 아시아의 선진적인 무역망 안에서 경쟁력을 갖춘 글로벌 상품이었습니다.
1699
[유럽의 케첩 수용과 확산]
17세기 말,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은 현지의 발효 어장인 '케찹'을 처음 접하고 그 보존성에 매료되었습니다. 1699년 영국 문헌에는 이 소스를 두고 "높은 동인도 소스"라고 칭송하는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이후 유럽 상인들은 통킹(현 베트남 북부)에서 온 케첩을 최고로 치며 수입에 열을 올렸습니다.
1711년 무역상 찰스 록커는 "최고의 케첩은 통킹에서 온다"고 기록하며 이를 명확한 아시아산 고급 소스로 인식했습니다. 유럽인들은 'ketchup', 'catsup', 'katchup' 등 다양한 철자를 혼용하며 이 소스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원본 소스의 핵심인 '강렬한 감칠맛'을 모방하기 위해 김빠진 맥주나 각종 향신료를 섞는 등 다양한 실험을 감행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수입을 넘어, 아시아의 발효 기술을 흉내 내고 현지화하려는 유럽 식문화의 필사적인 노력이었습니다.
1727
[최초의 유럽식 케첩 레시피]
엘리자 스미스의 베스트셀러 요리책 'The Compleat Housewife'에 역사상 최초의 유럽식 케첩 레시피가 수록되었습니다. 이 'Katchup' 레시피는 아시아의 생선 젓갈 맛을 재현하기 위해 유럽에서 구하기 쉬운 '염장 멸치'를 주재료로 사용했습니다. 이는 생선 기반의 아시아 소스가 서양의 소스로 진화하는 과정의 '잃어버린 고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엘리자 스미스의 레시피는 멸치와 함께 샬롯, 식초, 생강, 육두구, 후추 등을 혼합하여 만들었습니다. 이는 1600년대의 생선 젓갈과 1800년대의 토마토 케첩 사이에 위치한 과도기적 형태로, 영국인들이 '케첩'의 본질을 '생선이 주는 감칠맛'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아시아의 발효 공정을 직접 따라 할 수 없었기에, 이미 발효된 식재료인 염장 멸치를 활용하여 '소스'의 형태로 변형시킨 것입니다.
1750
[토마토 없는 케첩의 황금기]
18세기 영국에서 '케첩'은 토마토 소스가 아니라 '장기 보존이 가능한 고농축 감칠맛 소스'라는 기술적 카테고리를 의미했습니다. 이 시기 영국인들은 버섯, 호두, 굴, 와인, 과일 등 주변의 모든 재료를 활용해 자신들만의 케첩을 만드는 '황금기'를 맞이했습니다. 특히 제인 오스틴도 즐겼다고 알려진 '버섯 케첩'은 간장과 유사한 짙은 풍미로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는 아시아의 '감칠맛'을 유럽의 식재료로 '번역'해낸 창조적 변용의 시대였습니다. 제조 과정이 "썩어가는 늪의 웅덩이"처럼 보였던 버섯 케첩부터, 굴 100개와 화이트 와인 3파인트, 레몬 껍질을 쏟아부은 사치스러운 '굴 케첩', 엘더베리와 멸치로 만든 'Prince of Wales' 케첩까지 다양한 변형이 등장했습니다. 이 모든 레시피의 공통점은 재료가 무엇이든 소금, 식초, 알코올을 이용해 '오랫동안 보관 가능한 감칠맛'을 구현해냈다는 점입니다.
1812
[최초의 토마토 케첩 등장]
필라델피아의 과학자이자 원예가인 제임스 미스가 마침내 '사랑의 사과'라 불리던 토마토를 이용한 최초의 케첩 레시피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토마토가 최고의 케첩 재료라고 주장했으나, 보존을 위해 식초와 설탕 대신 '브랜디'를 사용했습니다. 이로 인해 최초의 토마토 케첩은 달콤하기보다는 알코올 향이 나는 짭짤한 소스에 가까웠습니다.
제임스 미스의 시도는 혁신적이었지만, 기술적으로는 18세기 영국식 케첩 제조법(알코올을 이용한 보존)의 답습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토마토 펄프와 향신료에 브랜디를 섞어 부패를 막으려 했으나, 현대 케첩의 핵심인 식초와 설탕이 빠져 있어 맛과 보존성 모두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스는 현대적 케첩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중요한 '과도기적 산물'이었으며, 당시 사람들에게 토마토 소스는 여전히 낯선 존재였습니다.
1834
[케첩, 만병통치약이 되다]
오하이오주의 의사 존 쿡 베넷 박사가 토마토 케첩을 소화불량, 설사, 황달, 류머티즘 등을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선전하며 '토마토 알약'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토마토는 유독성 식물인 '가지과'에 속한다는 이유로 '독초'라는 오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베넷 박사의 이 의학적 사기극은 역설적으로 토마토를 '독'에서 '약'이자 '식품'으로 격상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1830년대 콜레라가 창궐하고 위생이 열악했던 미국 사회에서, 베넷의 주장은 대중의 건강에 대한 공포심을 파고들며 폭발적인 '토마토 건강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베넷의 성공 이후 수많은 '카피캣'들이 등장해 단순한 설사약을 토마토 알약이라 속여 파는 이른바 '토마토 알약 전쟁'까지 벌어졌습니다. 비록 1850년대에 그 의학적 효능이 허구임이 밝혀지며 시장은 무너졌지만, 이 사건 덕분에 토마토 케첩은 미국 가정의 식탁에 안전한 먹거리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1876
[하인즈, 현대 케첩의 표준화]
헨리 J. 하인즈는 'F. & J. Heinz Company'를 설립하고, 발효 대신 다량의 식초와 설탕을 사용하는 화학적 방법으로 케첩의 고질적인 부패 문제를 완벽히 해결했습니다. 그는 경쟁사들이 부패하거나 저급한 재료를 숨기기 위해 갈색 병을 쓸 때, 속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유리병'을 도입하는 파격적인 전략을 썼습니다. 하인즈는 단순한 소스가 아니라 '순수성'과 '신뢰'를 판매하며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하인즈의 혁신은 '요리'가 아닌 '화학'과 '마케팅'의 승리였습니다. 그는 케첩을 생물학적 발효 식품에서 산성을 이용한 보존 식품으로 재정의했습니다. 보존을 위해 투입한 막대한 양의 식초가 너무 시어지자, 이를 중화하기 위해 다량의 설탕을 넣었고, 이것이 우연히 현대 케첩 특유의 '새콤달콤한' 맛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유해한 화학 보존제 없이도 상온 유통이 가능한 최초의 '보존제 프리' 케첩이자, 소비자가 눈으로 직접 품질을 확인할 수 있는 투명한 병 마케팅은 지난 200년간의 케첩 역사를 종결짓고 오늘날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완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