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석주
인물, 독립운동, 의열단, 역사, 사건
최근 수정 시각 : 2025-12-27- 20:40:28
황해도 재령 출신의 나석주는 3·1운동 이후 무력 투쟁에 투신하여 신흥무관학교 계열 군사 교육을 거쳐 의열단에 참여했습니다. 1926년 12월 28일, 일제의 식민지 경제 수탈을 상징하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공격했으며, 폭탄은 기대한 피해를 주지 못했으나 총격과 추격전 끝에 자결 순국했습니다. 그의 의거는 침체기에 빠져 있던 국내 독립운동에 큰 충격과 상징적 불꽃을 남긴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1892
[황해도 재령 출생]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고산리에서 부농인 나병헌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한학을 수학했습니다.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춘사(春史). 16세 되던 해 김광선과 혼인함.
1910
[경술국치와 양산학교 설립]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몰수에 격분하여, 고향에 양산(陽山)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에게 민족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지주였던 아버지를 설득해 소작인들의 빚을 탕감해주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도 함.
1919
[3.1 운동 주도와 군자금 모금]
3.1 운동이 일어나자 사리원 등지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이후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금하고, 협조하지 않는 친일파 부호나 악덕 지주를 처단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친일 부호 및 악질 지주에 대한 무력 처단이 이루어졌다고 전해지며, 구체적 인원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음.
1920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 활동 (김구와의 만남)]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현 경찰청+경호실)에서 경호원으로 근무했습니다. 당시 초대 경무국장이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이었습니다.
김구 국장과 나석주 경호원의 관계로 시작되었으며, 김구는 그를 각별히 아꼈음. 훗날 의거 당시 보여준 '원샷원킬'의 사격 실력은 이때 다져진 엘리트 경호원 훈련의 결과물임.
[중국 망명과 무관학교 입학]
일제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평남 진남포를 통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동한 뒤, 신흥무관학교 계열의 군사 교육을 받으며 무장 투쟁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과 인연을 맺고 항일 투쟁의 의지를 다짐.
1923
[한단군관학교 입학 및 무장 활동]
중국 한단군관학교 육군 제1기로 수학하며 군사 훈련을 받았고, 이후 중국 지역에서 무장 독립운동과 관련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26
[독립운동 '어벤져스' 3인방의 거사 기획]
톈진에서 김창숙(자금 지원), 김원봉(기획 및 지시), 나석주(행동대장)가 모여 동양척식주식회사 파괴를 결의했습니다. 이는 나석주 혼자의 결정이 아닌 독립운동계 거물들의 치밀한 합작 프로젝트였습니다. 당시 일제가 토지 수탈을 가속화하자, 경제 착취 기관을 파괴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나석주는 김구 밑에서 경호원으로 일하다가, 더욱 직접적이고 강력한 무력 투쟁을 위해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투신하여 거사를 실행함. 권총 1정과 탄환 8발, 그리고 폭탄 2개를 휴대하고 중국인 '마중덕(馬中德)'으로 위장함.
[국내 잠입]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국내로 잠입한 뒤, 서울로 이동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의 위치를 정탐했습니다.
[조선식산은행 투탄 (1차 실패)]
오후 2시경, 지금의 롯데백화점 명동점 자리에 있던 조선식산은행(현 한국산업은행의 전신)에 들어갔습니다. 대부계 창구에 폭탄을 던졌으나 뇌관 불량으로 불발되었습니다.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건물을 빠져나와 다음 목표물로 이동함.
[동양척식주식회사 습격 및 총격 (오후 2시 10분경)]
을지로(현 KEB하나은행 본점 자리)에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로 이동했습니다. 입구에서 일본인 수위를 사살하고 2층으로 올라가 토지개량부 간부실에 난입, 일본인 관리들을 향해 권총을 난사했습니다.
이후 2층 사무실에 남은 마지막 폭탄 1개를 힘껏 투척했으나, 이마저도 불발되는 비운을 겪음.
[경찰과의 시가전 및 추격]
건물을 빠져나와 을지로 거리로 도주하며 추격해오는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관 다바타(田畑) 등을 사살하고 군중 사이를 누비며 저항했습니다.
당시 일본 경찰들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전신주에 기대어 최후를 준비함.
[자결 순국]
오후 2시 20분경, 경찰에 포위되자 "나는 의열단원이다. 2천만 민중은 조국을 위하여 투쟁하라!"고 외친 뒤,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세 발 쏘아 자결을 시도했습니다.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문당하며 조직의 비밀을 누설할 것을 염려하여 확실한 죽음을 택함.
[병원 이송 후 사망]
중상을 입고 일제 경찰에 의해 총독부 병원(현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심문을 거부하다가 오후 4시경 과다출혈로 순국했습니다.
죽기 직전 자신의 이름을 묻는 경찰에게 '나석주'라고 당당히 밝히고 숨을 거둠. 향년 35세.
1947
[<백범일지> 출간과 기록]
김구 선생의 자서전 <백범일지>가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나석주 의사의 이름과 그의 순국을 슬퍼하는 김구의 심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구는 자신이 아꼈던 보디가드이자 의열단원으로 산화한 나석주의 의거를 높이 평가하며 역사에 남김.
1962
1999
[나석주 의사 동상 제막]
서울 중구 을지로 입구(옛 동양척식주식회사 자리 인근)에 나석주 의사의 동상이 건립되었습니다.
동상 옆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터' 표지석이 함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