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요시히데

정치인, 일본총리, 국회의원,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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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요시히데
정치인, 일본총리, 국회의원,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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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농가에서 태어나 도쿄로 상경해 주경야독으로 호세이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요코하마 시의원을 거쳐 중앙 정치에 입문했으며, 아베 신조 내각에서 7년 9개월간 역대 최장수 내각관방장관을 역임했습니다. 2020년 제99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여 짧지만 강렬한 리더십을 보여주었으며,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미일 동맹 강화 등 주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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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아키타의 아들로 태어나다]

아키타현 오가치군 아키노미야촌(현 유자와시)의 딸기 농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친 스가 와사부로는 만주철도 직원 출신으로 귀국 후 딸기 재배를 보급한 지역 유지였습니다. 농촌의 고요한 환경 속에서 근면 성실함을 익히며 성장했습니다.

부친 와사부로는 지역의 딸기 품종인 '아키노미야 딸기'를 브랜드화시킨 성공한 농업인이자 정치가였습니다. 훗날 스가는 어린 시절 농사일이 너무 힘들어 고향을 떠나고 싶어 했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교사 출신이었으며, 스가는 두 누나와 남동생 한 명 사이에서 자라며 가정 교육을 엄격히 받았습니다.

1967

[유자와 고등학교 졸업]

지역 명문인 아키타현립 유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학창 시절을 마쳤습니다.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농사를 물려받으라는 부친의 뜻에 저항하며 독자적인 진로를 모색했습니다. 졸업 직후 더 넓은 세상인 도쿄를 향해 무작정 상경을 감행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특별히 정치를 꿈꾸지는 않았으나, 농촌의 폐쇄적인 분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이 컸습니다. 부친은 장남인 그가 가업을 잇기를 강력히 원했으나, 스가는 집을 떠나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는 훗날 일본 정계에서 세습 의원들과 대결하며 자수성가형 정치인으로 거듭나는 첫 번째 고집의 발현이었습니다.

[도쿄 상경과 노동]

도쿄에 도착한 후 이타바시구의 골판지 공장에 취직하여 생계를 꾸렸습니다. 낮에는 고된 노동을 하고 밤에는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는 치열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단순한 노동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기 위해 대학 진학을 결심했습니다.

골판지 공장에서 일하며 사회의 쓴맛을 직접 체험했으며, 2년 만에 퇴사한 후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전전했습니다. 도쿄 중앙도매시장에서 카트 운반 일을 하거나 건축 현장에서 일하며 학비를 모았습니다. 이 시기의 고생은 훗날 스가가 서민들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려 노력하는 정서적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69

[호세이 대학 입학]

학비가 가장 저렴하다는 이유로 호세이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생계를 위해 공장과 시장에서 일하며 야간 수업과 병행하며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정치를 학문으로 접하며 조금씩 공적인 삶에 대한 관심을 키웠습니다.

사립 대학 중 학비가 싸고 실무 중심적인 학풍을 가진 호세이 대학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경제적 이유였습니다. 공수도부 활동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며 인내심을 길렀고, 이는 훗날 정계의 험난한 파도를 견디는 힘이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곤궁한 환경이었지만 지독한 성실함으로 학점과 생활비를 동시에 관리했습니다.

1973

[호세이 대학 졸업]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4년 만에 호세이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잠시 민간 기업에 취직하여 사회 경험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졸업 후 건재 유지 관리 회사인 '켄세쓰 설비'에 입사하여 평범한 샐러리맨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직장 생활 중 정치가 세상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힘임을 깨닫고 정치권 진입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대학 동창회 관계자를 통해 정계 입문의 기회를 찾던 중 인생의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1975

[국회의원 비서로 입문]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중의원 의원의 비서로 채용되며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요코하마를 지역구로 둔 유력 정치인 밑에서 실무 정치를 온몸으로 익혔습니다. 1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비서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비서 시절 스가는 요코하마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민원 해결사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오코노기 의원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어 주요 정계 인사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익힌 조직 관리 기술과 정보 수집 능력은 훗날 그가 '정무의 귀재'로 불리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1987

[요코하마 시의원 당선]

요코하마시 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습니다. 비서 시절 닦아놓은 밑바닥 민심을 기반으로 지방 자치 최전선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강력한 추진력으로 요코하마의 행정 시스템을 개혁하려 노력했습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신발이 닳을 정도로 집집마다 방문하는 저인망식 선거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당선 후에는 효율적인 시정 운영을 강조하며 불필요한 예산 낭비를 지적해 주목받았습니다. 당시 요코하마 시장조차 그를 두려워할 정도로 시정 장악력이 대단하여 '그림자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1991

[시의원 재선 성공]

성공적인 의정 활동에 힘입어 요코하마 시의원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지방 행정의 전문가로서 입지를 굳히며 더 큰 무대인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 꿈꾸었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확인한 결과였습니다.

재선 기간 동안 도시 계획과 환경 정책 분야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냈습니다. 주민 편의를 최우선으로 하는 그의 스타일은 당파를 초월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지방 정치의 한계를 느끼고 국정 전반에 참여하고 싶다는 결심을 굳힌 시기였습니다.

1996

[중의원 의원 첫 당선]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가나가와 2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47세의 나이로 중앙 정계에 공식 데뷔하며 국회의원으로서의 행보를 시작했습니다. 자민당 내 소장파 의원으로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신설된 소선거구제 하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국회에 입성했습니다. 자수성가형 정치인답게 기성 파벌에 얽매이지 않고 정책 중심의 정치를 지향했습니다. 정계 입문과 동시에 오코노기 파벌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1998

[가토 파벌 가입과 탈퇴]

자민당 내 가토 파벌에 몸담았으나 당내 주도권 다툼 과정에서 소신을 지키기 위해 탈퇴를 결심했습니다. 파벌 논리보다는 현실적인 국익과 정권의 안정을 우선시하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이는 그가 훗날 '파벌 없는 실력자'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른바 '가토의 난' 당시 가토 고이치 의원의 무모한 도전에 반대하며 독자 노선을 택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적 의리는 지키되 현실 감각을 잃지 않는 냉철한 정치가로서 이미지를 굳혔습니다. 이후 특정 파벌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그룹과 소통하는 유연함을 보였습니다.

2000

[중의원 재선 성공]

제42회 총선에서 승리하며 2선 의원이 되었습니다. 중앙 정치 무대에서 서서히 무게감을 키우며 당내 요직에 등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책 기획 분야에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경제 구조 개혁과 규제 완화 관련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실무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당내 신진 세력들의 모임을 주도하며 차세대 리더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현장의 목소리를 입법 과정에 반영하려는 노력을 지속하며 지역구 관리에도 철저했습니다.

2002

[국토교통대신 정무관 임명]

고이즈미 내각에서 국토교통대신 정무관으로 임명되어 정부 관료로서 첫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인프라 구축과 도시 재생 등 굵직한 행정 현안을 다루었습니다. 실무 행정의 메커니즘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공항 건설과 철도망 확충 프로젝트에 깊숙이 관여하며 추진력을 발휘했습니다. 관료주의의 폐단을 목격하고 이를 개혁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행정부 내에서의 성공적인 경험은 훗날 그가 장관급 요직을 맡는 든든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2003

[중의원 3선 달성]

제43회 총선에서 다시 한번 승리하며 중진 의원으로 가는 길목에 섰습니다. 지역구에서의 탄탄한 기반을 바탕으로 당내 영향력을 대폭 확장했습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개혁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선거 때마다 보여주는 그의 성실한 현장 방문은 후배 의원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우정민영화 등 당시 자민당의 핵심 개혁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당내 여론을 결집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정치적 감각과 실무 능력을 고루 갖춘 인물로 평가받으며 중앙 무대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2005

[중의원 4선 성공]

자민당이 대승한 제44회 총선에서 당당히 4선에 성공했습니다. 중견 정치인으로서 당과 정부를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총무대신 정무관 등을 거치며 방송 통신 정책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선거 승리 후 총무부대신으로 임명되어 방송법 개정과 통신 시장 경쟁 도입을 주도했습니다. 이때부터 이동통신 요금이 너무 비싸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하 정책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베 신조라는 인물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그를 차기 지도자로 옹립하기 위한 물밑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2006

[총무대신으로 첫 각료 입성]

제1차 아베 내각에서 총무대신에 임명되며 처음으로 국무위원이 되었습니다. 지방 자치, 통신, 우편 등 광범위한 행정 영역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고향납세(후루사토 납세)' 제도를 직접 제안하고 추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도시로 몰리는 세금을 고향으로 환원시키자는 그의 아이디어는 일본 지방 행정의 혁신으로 평가받습니다. 방송사와의 갈등을 무릅쓰고 방송 수신료 인하를 압박하는 등 강력한 실행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기 아베 신조와의 강력한 신뢰 관계를 형성하며 정권의 핵심 브레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2007

[아베 1차 내각의 총사퇴]

아베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퇴와 내각 해산으로 장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정권의 실패를 현장에서 지켜보며 권력의 무상함과 더불어 철저한 준비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야당 시절을 거치며 아베의 재기를 돕는 가장 충실한 동지가 되었습니다.

장관직 퇴임 후에도 아베 신조의 곁을 지키며 그가 다시 총리가 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했습니다. 정권 운영의 미숙함을 반성하고 관료 조직을 어떻게 장악할지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이 시기 쌓은 '인내와 복수'의 전략은 훗날 8년 가까운 장기 집권의 기반이 됩니다.

2009

[중의원 5선 달성]

자민당이 참패하여 야당으로 전락한 힘든 선거에서도 5선에 성공했습니다. 당의 위기 속에서 조직선거부장 등 중책을 맡아 자민당 재건에 앞장섰습니다. 철저한 실리주의와 밑바닥 정서 파악으로 선거 판세를 분석했습니다.

야당 시절 '그림자 내각'에서 활동하며 민주당 정권의 정책 허점을 날카롭게 공격했습니다. 전국을 돌며 자민당 지지 기반을 다시 다지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아베 신조의 자민당 총재 복귀를 위해 다른 파벌들을 설득하고 여론을 조성하는 킹메이커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2012

[자민당 간사장 대행 취임]

아베 신조가 자민당 총재로 복귀하자 간사장 대행으로 임명되어 당의 실무를 총괄했습니다. 정권 탈환을 위한 선거 전략과 당내 결속을 진두지휘했습니다. 강력한 장악력으로 당을 전투적인 조직으로 변모시켰습니다.

이시바 시게루 간사장을 보좌하면서도 실질적인 선거 공천과 자금 관리를 주도했습니다. 민주당 정권에 실망한 유민심을 정확히 파악하여 아베노믹스 등 매력적인 공약을 발굴했습니다. 정권 교체를 확신하며 내각 구성의 밑그림을 그리는 핵심 참모로서 활약했습니다.

[내각관방장관 취임]

제2차 아베 내각의 출범과 함께 정부의 2인자인 내각관방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정권의 안방 살림과 위기 관리, 언론 대응을 모두 책임지는 막중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때부터 역대 최장수 관방장관이라는 대기록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매일 두 번씩 열리는 정례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의 입장을 냉철하고 일관되게 전달했습니다. 부처 간의 칸막이 행정을 타파하고 총리 관저 주도의 강력한 의사결정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관료들에 대한 인사권을 쥐는 '내각인사국' 설립을 주도하여 공무원 조직을 완벽히 장악했습니다.

2014

[중의원 7선 성공]

제47회 총선에서 압승하며 7선 의원의 고지에 올랐습니다. 아베 정권의 실세로서 그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으며, 국정 전반에 걸친 영향력을 과시했습니다. 위기 상황마다 총리를 대신해 현장을 수습하는 소방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선거 승리 이후에도 관방장관직을 연임하며 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했습니다. 북한 미사일 도발이나 재해 발생 시 관저에 상주하며 24시간 대응 체제를 가동했습니다. 아베 총리의 전폭적인 신뢰 속에 '정권의 수호신'이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존재감을 뽐냈습니다.

2017

[중의원 8선 달성]

제48회 총선에서 승리하며 8선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자민당 내에서 그와 대적할 실력자가 없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장기 집권의 피로감을 해소하기 위해 현장 중심의 실속 있는 정책들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전국적인 관광 활성화를 위한 비자 완화와 외국인 노동자 수용 확대 정책을 주도했습니다. 휴대전화 요금 인하를 정권의 핵심 과제로 다시 한번 설정하여 기업들을 압박했습니다. 부드러운 미소 뒤에 숨겨진 차가운 행정력으로 각 부처의 이기주의를 혁파했습니다.

2019

[레이와 아저씨의 탄생]

새로운 연호인 '레이와(令和)'를 발표하는 담화를 직접 발표했습니다. 연호가 적힌 판을 들어 올리는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면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친근한 '레이와 아저씨'라는 별칭을 얻으며 대중적 인기가 급상승했습니다.

헤이세이 발표 당시 오부치 게이조 관방장관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차기 총리 후보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SNS상에서 관련 패러디가 쏟아지는 등 딱딱한 이미지를 탈피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본인은 쑥스러워했으나, 이 인지도는 훗날 총재 선거에서 결정적인 자산이 되었습니다.

2020

[아베 총리의 사임 발표]

건강상의 이유로 아베 신조 총리가 전격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동지의 퇴진에 충격을 받았으나 정권의 공백을 막기 위해 결단을 내렸습니다. 아베 정권의 정책을 계승하겠다는 기치 아래 총재 선거 출마를 결심했습니다.

처음에는 출마를 고사했으나 주변의 강력한 권유와 정국 안정을 위해 마음을 바꿨습니다. 파벌이 없는 스가였지만 그의 능력을 인정한 주요 파벌들이 잇달아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계속성과 안정'을 키워드로 내세워 당내 여론을 단숨에 장악했습니다.

[자민당 제26대 총재 당선]

압도적인 표차로 이시바 시게루와 기시다 후미오를 꺾고 자민당 총재로 선출되었습니다. 무파벌 출신으로는 극히 드문 사례로 일본 정치사에 새로운 기록을 남겼습니다. 서민 출신 정치가의 승리에 국민들은 높은 기대감을 보였습니다.

총 534표 중 377표를 획득하여 당내 전폭적인 지지를 확인했습니다. 취임사에서 '일하는 내각'을 만들겠다고 선언하며 실무 중심의 인사를 예고했습니다. 아베 장기 집권 이후의 일본을 책임질 새로운 지도자로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제99대 내각총리대신 취임]

국회 지명 선거를 거쳐 일본의 제99대 총리로 공식 취임했습니다. 아키타현 출신 최초의 총리이자 호세이 대학 출신 최초의 총리라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코로나19 극복과 경제 재생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고 스가 내각이 돛을 올렸습니다.

취임 직후 디지털청 설립과 종신 고용 파괴 등 과감한 개혁안을 내놓았습니다. 관료들에게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라고 주문하며 현장 중심 행정을 강조했습니다. 세습 의원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총리직에 오른 그의 행보는 많은 젊은이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디지털청 설립 추진]

일본의 뒤처진 아날로그 행정을 일신하기 위해 디지털청 설립을 전격 지시했습니다. 도장 문화와 팩스 사용을 금지하고 행정 전산화를 강력하게 밀어붙였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국가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관료들의 반발을 억누르고 부처 간 데이터를 통합하는 혁신적인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민간 전문가들을 대거 채용하여 유연하고 빠른 행정 시스템을 구축하려 노력했습니다. 이는 스가 내각의 가장 상징적이고 가시적인 개혁 성과 중 하나로 꼽힙니다.

2021

[미일 정상회담 개최]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외국 정상으로는 최초로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미일 동맹의 굳건함을 확인하고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정을 위한 협력을 약속했습니다. 국제 무대에서 일본의 외교적 위상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공동 성명을 통해 대만 해협의 평화와 안정을 명시하며 안보 공조를 강화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유대감을 쌓으며 실용 외교의 진면목을 보여주었습니다. 외교 경험 부족이라는 일각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당당한 국가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백신 접종 가속화 주도]

코로나19 백신 접종 속도가 느리다는 비판에 직접 대책을 지휘했습니다. 하루 100만 회 접종이라는 공격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자위대 대규모 접종 센터를 설치했습니다.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감염 확산 차단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당시 지자체와 의료계의 비협조로 난관에 봉착했으나 강력한 톱다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목표했던 접종 속도를 달성하며 고령층 사망률을 크게 낮췄습니다. 방역 정책의 성패가 정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인식 하에 매일 상황을 체크했습니다.

[도쿄 올림픽 개막 완수]

코로나19 확산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도쿄 올림픽 개최를 강행하여 완수했습니다. 취소와 연기라는 압박 속에서도 선수들의 꿈과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무관중 개최라는 초유의 방식으로 안전하게 대회를 마무리했습니다.

감염 폭발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국내외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철저한 방역 매뉴얼을 가동했습니다. 올림픽 이후 이어진 패럴림픽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으며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비록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 되기도 했으나, 국제적 약속을 지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차기 총재 선거 불출마 선언]

코로나19 대응에 전념하기 위해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전격 발표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선언으로 정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나 본인의 개혁 과제들이 어느 정도 본궤도에 올랐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박수받을 때 떠나겠다는 고집스러운 미학을 보여주었습니다.

지속적인 지지율 정체와 당내 인사들의 압박 속에서 정면 돌파 대신 용퇴를 택했습니다. 퇴임 직전까지도 탄소 중립 선언과 불임 치료 건강보험 적용 등 민생 정책을 챙겼습니다. 단 1년의 재임 기간이었지만 굵직한 정책적 성과를 남기고 명예로운 퇴장을 준비했습니다.

[내각 총사퇴 및 총리 퇴임]

기시다 내각의 출범과 함께 총리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관방장관 8년, 총리 1년이라는 긴 국정 책임자로서의 여정을 마쳤습니다. 퇴임 후에도 평의원으로서 당과 국가 발전을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기로 했습니다.

퇴임사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시간이었다'며 국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의 퇴임 이후 일본 정계는 기시다 후미오 체제로 빠르게 재편되었습니다. 많은 국민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일했던 '워커홀릭' 총리의 뒷모습을 기억했습니다.

[중의원 9선 성공]

총리 퇴임 직후 치러진 제49회 총선에서 가나가와 2구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표차로 9선에 성공했습니다. 총리 출신 의원으로서의 품격과 지역 주민의 변함없는 신뢰를 확인했습니다. 국회에서 중진으로서의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직 총리가 선거구에서 낙선하는 이변 없이 안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지역구 구석구석을 돌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민심을 다시 한번 청취했습니다. 의회 정치의 베테랑으로서 후배 의원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경험을 전수하는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2022

[아베 국장 조사 낭독]

총격으로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국장에서 친구 대표로 조사를 낭독했습니다. 진심 어린 슬픔을 담은 조사는 많은 일본인과 전 세계 조문객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수십 년을 함께한 동지이자 친구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습니다.

조사 중 '당신은 일본의 보물이었다'는 대목에서 목이 메어 잠시 멈추는 모습이 보도되었습니다. 평소 표정 변화가 없던 스가가 보여준 눈물에 많은 이들이 인간적인 공감을 느꼈습니다. 이후 아베의 정치적 유산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스가의 행보에 이목이 쏠렸습니다.

2023

[일한의원연맹 회장 취임]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중요한 직책인 일한의원연맹 회장에 취임했습니다. 경색되었던 양국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의원 외교의 선두에 섰습니다. 실용주의 외교 철학을 바탕으로 소통의 창구를 넓혔습니다.

취임 후 한국을 직접 방문하여 정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신뢰를 쌓았습니다. 경제와 안보 협력을 위해 양국이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스가의 적극적인 활동은 기시다 내각의 한일 관계 정상화 노력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2024

[자민당 부총재 취임]

이시바 시게루 체제의 출범과 함께 자민당 부총재로 임명되었습니다. 당내 최고의 원로이자 실력자로서 정권의 안정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파벌 해체 이후 혼란스러운 당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이시바 총리와의 과거 갈등을 뒤로하고 당의 승리를 위해 손을 잡았습니다. 부총재로서 당무와 선거 관리에 직접 관여하며 영향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스가 요시히데라는 이름이 가진 정치적 무게감이 자민당 내에서 다시금 조명받은 사건입니다.

[중의원 10선 대기록 달성]

제50회 총선에서 승리하며 마침내 10선 국회의원의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자민당이 고전하는 상황에서도 요코하마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정치 인생의 황혼기에도 여전히 강력한 현역임을 만천하에 알렸습니다.

선거 승리 후 자민당의 대대적인 혁신을 촉구하며 다시 한번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지역구의 노후화 문제와 저출산 대책 등 현실적인 정책 대안을 꾸준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당선은 일본 정계에서 자수성가형 정치인이 갈 수 있는 최고의 높이를 상징합니다.

2025

[국가 고문으로서의 활동]

풍부한 국정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 주요 정책의 고문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디지털 전환과 인구 감소 대응 분야에서 정부의 핵심 브레인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정파를 초월한 존경을 받으며 국가의 어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최근까지도 아침 일찍 산책을 하며 체력을 관리하고 매일 신문을 꼼꼼히 읽는 성실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해외 정치인들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일본의 외교적 공간을 넓히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스가 요시히데의 연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 정치의 안정과 혁신을 향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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