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페이지

기업인, 컴퓨터 과학자, 구글 공동 창업자

num_of_likes 66

최근 수정 시각 : 2026-01-21- 11:57:53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래리 페이지
기업인, 컴퓨터 과학자, 구글 공동 창업자
report
Edit

컴퓨터 과학의 선구적 가정에서 태어나 인류의 정보 접근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혁신가 래리 페이지의 일대기입니다. 그는 스탠퍼드 대학 시절 세르게이 브린과 함께 '페이지랭크' 알고리즘을 개발하여 구글을 창업했으며, 단순한 검색 엔진을 넘어 안드로이드, 유튜브, 알파벳 지주사 체제 구축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기술적 확장을 주도했습니다. '세상의 정보를 체계화하여 누구나 유익하게 이용하게 한다'는 사명을 실천하며 기술 중심 경영의 전형을 보여준 그의 기록은 현대 디지털 문명의 핵심적인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973

[미시간주 랜싱에서의 탄생]

미국 미시간주 랜싱에서 컴퓨터 과학 분야의 선구적 배경을 가진 가정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부모님은 모두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컴퓨터 관련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자였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래리가 어린 시절부터 기술에 몰두할 수 있는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본명은 로렌스 에드워드 페이지(Lawrence Edward Page)이며 유대계 배경을 가진 어머니 글로리아와 개신교 배경의 아버지 칼 빅터 페이지 시니어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미시간 주립대학교의 컴퓨터 과학 교수였으며 인공지능 분야의 개척자로 불렸고, 어머니 글로리아는 라이먼 브릭스 칼리지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 강사로 활동했습니다.
부모님이 집안 곳곳에 놓아둔 과학 잡지와 1세대 개인용 컴퓨터들은 어린 래리에게 장난감이 아닌 탐구의 대상이자 창의성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1975

[몬테소리 교육의 시작]

두 살의 나이에 미시간주 오케모스에 위치한 몬테소리 학교에 입학하여 자유로운 탐구 교육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 교육 방식은 훗날 그가 구글을 경영하며 강조한 자율성과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의 근간이 됩니다. 그는 약 5년 동안 이 학교에 재학하며 독립적인 사고방식을 길렀습니다.

그가 다닌 오케모스 몬테소리 학교(현재의 몬테소리 래드무어)는 학생 스스로 자신의 관심사를 따르도록 장려하는 환경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훗날 인터뷰에서 몬테소리 교육이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스스로 탐구하며 무언가를 발명하려는 성향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공동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 역시 몬테소리 교육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어 두 사람의 경영 철학이 일치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1979

[첫 컴퓨터 마스터]

여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집으로 가져온 엑시디 소서러 컴퓨터를 처음 접하게 됩니다. 그는 이 기계를 단숨에 마스터하여 학교 숙제를 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래리 페이지가 디지털 세계와 본격적으로 교감한 첫 번째 사례였습니다.

당시 그는 집안에 널려 있던 1세대 개인용 컴퓨터 부품들을 가지고 놀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원리를 자연스럽게 체득했습니다.
단순히 게임을 즐기는 수준을 넘어 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기계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초등학교에서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해 과제를 제출한 첫 번째 학생으로 기록될 만큼 앞서가는 기술 활용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1981

[부모님의 이혼과 성장]

여덟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는 가정사적 변화를 겪게 되지만 양측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는 어머니 글로리아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파트너인 조이스 와일덴탈 교수와도 가깝게 지내며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그가 연구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의 이혼 이후에도 그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으며 집안은 여전히 수많은 컴퓨터 잡지와 부품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형인 칼 빅터 페이지 주니어로부터 집안 물건을 분해하여 원리를 파악하는 법을 배우며 기계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나갔습니다.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가족 구성원들과의 교류는 그가 훗날 융합적인 사고를 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1985

[창업에 대한 초기 결심]

열두 살 무렵부터 자신만의 회사를 결국 세우게 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는 기술적인 발명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발명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업적인 성공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테슬라와 같은 발명가들이 겪은 재정적 어려움을 공부하며 기술과 사업의 연계성을 고민했습니다.
발명 그 자체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어떻게 대중화하고 수익 구조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초기 구상은 훗날 스탠퍼드 대학원 시절 구글을 단순한 연구 프로젝트로 남겨두지 않고 법인화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1989

[음악 캠프를 통한 시간 감각]

여름 기간 동안 미시간주 인터로컨 예술 센터에서 음악 캠프에 참여하며 예술적 감수성을 키웁니다. 그는 주로 색소폰을 연주했으며 작곡법도 공부하며 음악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때 배운 음악적 훈련은 훗날 그가 컴퓨팅 속도에 집착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래리 페이지는 음악에서 '시간'이 가장 핵심적인 요소임을 깨달았으며 타악기나 관악기 연주 시 발생하는 밀리초 단위의 정확성에 매료되었습니다.
음악 캠프에서의 경험은 사용자가 검색 버튼을 누른 후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속도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구글의 '속도 경영' 철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훗날 음악 교육이 자신에게 컴퓨터의 고속 처리 유산을 남겨주었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습니다.

1991

[이스트랜싱 고등학교 졸업]

미시간주 이스트랜싱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고등 교육 과정을 마무리합니다. 재학 시절 뛰어난 지적 능력을 바탕으로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졸업 후 본격적으로 엔지니어링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대학 진학을 준비합니다.

고교 시절에도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능숙했으며 다양한 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여름 방학을 이용해 예술 캠프에 참여하는 등 전인적인 발달을 도모하며 폭넓은 시야를 가졌습니다.
이후 부모님의 모교인 미시간 대학교에 진학하여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시간 대학교 입학 및 활동]

미시간 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하여 컴퓨터 공학 전공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는 학문적 성취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생 활동과 기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학교의 교통 인프라 개선을 위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학부 시절 그는 명예 공학회인 에타 카파 누의 베타 엡실론 지부 회장으로 활동하며 리더십을 증명했습니다.
당시 캠퍼스 내 버스 시스템을 무인 모노레일 형태의 개인 쾌속 운송 시스템으로 교체하자는 급진적인 계획을 학교 측에 제시했습니다.
이 제안은 비록 당시에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가 가진 거시적인 기술 설계 역량과 자율 주행 기술에 대한 초기 관심을 잘 보여줍니다.

1993

[태양광 자동차 팀 참여]

미시간 대학교의 태양광 자동차 팀인 'Maize & Blue'에 합류하여 실제 엔지니어링 프로젝트를 수행합니다. 태양광 에너지를 이용한 차량 설계와 제작 과정에 참여하며 기술적 협업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이는 훗날 구글의 실무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태양광 자동차 프로젝트를 통해 제한된 에너지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최적화하는 공학적 감각을 익혔습니다.
팀원들과 함께 프로토타입을 제작하고 실제 대회에 참가하며 대규모 프로젝트를 이끄는 과정을 경험했습니다.
이 활동은 지속 가능한 에너지 기술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관심으로 이어져 훗날 관련 분야 투자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1994

[레고 잉크젯 프린터 제작]

레고 블록을 이용해 실제로 작동하는 잉크젯 프린터 하우징을 제작하는 독창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합니다. 그는 잉크젯 카트리지를 역설계하여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전자 부품과 기계 장치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혁신적인 도구 활용 능력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기성 프린터가 비싸다는 점에 착안하여 다양한 부품을 유연하게 수용할 수 있는 구조물로 레고를 선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잉크 카트리지의 작동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이를 구동하는 하드웨어 제어 기술을 완벽하게 구현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래리 페이지가 가진 문제 해결에 대한 집요함과 독창적인 발상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됩니다.

1995

[미시간 대학교 학사 졸업]

미시간 대학교에서 컴퓨터 공학 전공으로 우수한 성적과 함께 공학사 학위를 취득하며 졸업합니다. 그는 학부 시절 보여준 뛰어난 연구 성과와 프로젝트 수행 능력을 바탕으로 명문 대학원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졸업 이후 스탠퍼드 대학교로 진학을 결정합니다.

그는 대학 졸업장과 함께 아너스 인증을 받을 정도로 학업에 충실했으며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인재로 평가받았습니다.
졸업 즈음 그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음악 신시사이저를 구축하는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며 창업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번 다졌습니다.
이후 스탠퍼드 대학교 컴퓨터 과학 석박사 통합 과정에 합격하며 팰로앨토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스탠퍼드 입학 및 브린과의 만남]

스탠퍼드 대학교 박사 과정에 입학하며 공동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기간 동안 세르게이 브린이 래리 페이지의 캠퍼스 가이드를 맡으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여러 주제에 대해 서로 논쟁하며 의견 차이를 보였습니다.

첫 만남 당시 두 사람은 성격이 강해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 서로 동의하지 않는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데이터 세트에서 정보를 추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공통적인 학문적 열정을 확인하며 급속도로 가까워졌습니다.
이들의 만남은 인터넷의 역사를 바꿀 '백럽' 프로젝트의 서막이자 세기의 파트너십이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1996

[연구 주제 선정과 웹 탐구]

박사 학위 논문 주제를 고민하던 중 월드 와이드 웹의 수학적 속성을 탐구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웹의 링크 구조를 거대한 그래프로 이해하고 이를 분석하는 것이 가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지도 교수인 테리 위노그라드는 이 아이디어를 강력히 독려했습니다.

그는 당시 텔레프레즌스나 자율 주행차 분야의 연구도 고려했으나 웹 링크 구조 분석이 가장 큰 잠재력을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테리 위노그라드 교수는 훗날 래리 페이지에게 준 이 조언이 자신이 평생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이 연구는 어떤 웹페이지가 특정 페이지에 연결되는지 찾아내는 '백링크' 분석 프로젝트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백럽(BackRub) 프로젝트 착수]

웹을 탐색하며 데이터를 수집하는 크롤러를 구축하고 프로젝트 이름을 '백럽'으로 명명합니다. 그는 학술 논문의 인용 방식이 웹 링크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통찰을 가지고 시스템을 설계했습니다. 세르게이 브린이 곧 이 프로젝트의 복잡성에 흥미를 느끼고 합류하게 됩니다.

당시 웹은 약 1,000만 개의 문서와 수많은 링크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는 학생 수준의 프로젝트를 넘어서는 자원을 필요로 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자신의 기숙사 방을 기계 실험실로 개조하여 저렴한 컴퓨터 부품으로 크롤링 장치를 직접 조립했습니다.
브린은 래리의 아이디어가 인간의 지식을 대표하는 웹을 다룬다는 점에서 가장 흥미로운 프로젝트라고 판단해 협업을 시작했습니다.

[페이지랭크 알고리즘의 탄생]

백링크 데이터를 수집하여 웹페이지의 중요도를 측정하는 '페이지랭크' 알고리즘을 개발합니다. 이 알고리즘은 특정 페이지를 링크하는 다른 페이지들의 수와 신뢰도를 기반으로 점수를 매기는 방식이었습니다. 래리 페이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이 기술은 구글 검색의 핵심이 됩니다.

기존 검색 엔진들이 단순히 단어 빈도수에 의존하던 방식과 달리, 페이지랭크는 웹의 평판을 기반으로 가장 가치 있는 결과를 도출했습니다.
이 알고리즘을 테스트하기 위해 브린과 페이지는 스탠퍼드 대학교의 광대역 캠퍼스 네트워크에 자신들의 장치를 연결했습니다.
검색 결과의 탁월한 정확도가 증명되자 스탠퍼드 사용자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검색 엔진 초기 버전 공개]

스탠퍼드 대학교 웹사이트 내에 구글의 전신인 검색 엔진 서비스를 대중에 처음으로 공개합니다. 초기 버전은 'google.stanford.edu' 주소로 운영되었으며 대학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검색 기능을 제공했습니다. 하드웨어 자원이 부족하여 기숙사 방에 서버를 설치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자신의 기초적인 HTML 프로그래밍 실력을 발휘하여 매우 단순한 디자인의 검색 페이지를 직접 구축했습니다.
사용자가 급증하자 스탠퍼드 대학의 전산 인프라에 부하가 걸릴 정도로 강력한 파급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약 7,500만 개의 HTML URL을 인덱싱하고 200GB 이상의 데이터를 다운로드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97

[구글(Google)로의 이름 변경]

백럽 서비스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시스템을 본격적인 사업으로 전환할 준비를 시작합니다. 엔진의 이름 또한 막대한 양의 정보를 상징하는 '구글'로 변경하기로 합니다. 이는 세상의 정보를 모두 체계화하겠다는 그들의 거대한 야망이 담긴 선택이었습니다.

원래 고려했던 이름은 1 뒤에 100개의 0이 붙는 숫자를 뜻하는 '구골'이었으나 도메인 등록 과정에서의 실수로 'Google'이 되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이 이름이 수많은 웹 데이터를 체계화하겠다는 자신들의 비전과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들은 자바와 파이썬을 이용해 시스템을 더욱 견고하게 재구축하며 성장을 준비했습니다.

[google.com 도메인 등록]

구글이라는 이름을 가진 공식 웹사이트 주소인 'google.com'을 인터넷상에 정식 등록합니다. 이는 스탠퍼드 대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독립적인 인터넷 기업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번째 공식 행보였습니다. 전 세계인들이 사용하는 검색 서비스의 고유 주소가 확정되었습니다.

도메인 등록 이후 래리와 세르게이는 본격적으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사업 계획서를 다듬고 투자자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야후 등 기존 포털 업체들에 기술을 판매하려 시도했으나 거절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타인에게 기술을 넘기는 대신 직접 회사를 운영하여 세상을 바꾸기로 최종 결심했습니다.

1998

[스탠퍼드 석사 학위 취득]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컴퓨터 과학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공식적으로 취득합니다. 박사 과정 연구가 구글 창업으로 이어지면서 학업과 사업을 병행하는 바쁜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는 석사 과정을 마친 후에도 구글의 기술적 완성을 위해 연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학문적으로는 이미 박사 수준의 깊이 있는 연구를 수행 중이었으며, 그의 논문은 학계에서 높은 인용 지수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정식 학위 수여 이후 본격적인 회사 설립을 위해 잠시 박사 과정을 휴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석사 학위는 그가 공식적으로 컴퓨터 과학자로서의 역량을 공인받은 최종 학력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검색 엔진 논문 공식 발표]

세르게이 브린과 공동으로 구글의 아키텍처를 다룬 연구 논문을 브리즈번에서 열린 회의에서 발표합니다. 이 논문은 구글의 전신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학술적으로 입증한 자료였습니다. 인터넷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과학 문서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논문 제목은 'The Anatomy of a Large-Scale Hypertextual Web Search Engine'으로 검색 기술의 정수를 담았습니다.
이 문서를 통해 전 세계 학계는 구글의 기술력이 기존 엔진들보다 압도적으로 우수함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학술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구글이 향후 투자자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결정적인 근거 자료가 되었습니다.

[앤디 벡톨샤임의 첫 투자 유치]

선 마이크로시스템즈의 공동 창업자인 앤디 벡톨샤임으로부터 10만 달러의 투자 수표를 받습니다. 앤디는 래리와 세르게이의 기술 시연을 불과 몇 분 동안 지켜본 뒤 즉석에서 투자를 결정했습니다. 이는 구글이 외부로부터 받은 최초의 시드머니가 되었습니다.

수표의 수취인이 'Google, Inc.'로 되어 있었으나, 당시에는 아직 법인이 설립되지 않아 수표를 즉시 입금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래리와 세르게이는 이 돈을 보관하고 법인 설립 서류를 처리하기 위해 2주 동안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이 투자는 실리콘밸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베팅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구글의 상업적 시작을 알렸습니다.

[차고 사무실 시대의 개막]

멘로파크에 위치한 수잔 워치스키의 집 차고를 빌려 첫 번째 사무실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월 1,700달러의 임대료를 지불하며 좁은 공간에서 세상을 바꿀 코드를 작성했습니다. '차고 창업'이라는 실리콘밸리의 상징적인 문화를 실천했습니다.

사무실 공간이 부족하여 차고 안은 서버용 컴퓨터와 전선들로 가득 찼으며, 직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수잔 워치스키는 훗날 구글의 핵심 임원이자 유튜브 CEO로 활약하게 되는 인연을 이때 맺었습니다.
이 시기 래리 페이지는 직접 서버를 관리하고 알고리즘 최적화에 매진하며 구글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구글(Google Inc.) 공식 설립]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구글 주식회사를 정식으로 설립하고 법인화 절차를 완료합니다. 래리 페이지는 스스로를 회사의 초대 최고경영자로 임명하여 경영 전면에 나섭니다. 단순한 연구 프로젝트가 세계를 지배할 대기업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세르게이 브린은 공동 창업자로서 기술 총괄을 맡았으며, 두 사람은 스탠퍼드 동료인 크레이그 실버스타인을 첫 번째 직원으로 채용했습니다.
법인 설립과 함께 그들은 투자금을 입금할 수 있게 되었으며 본격적인 장비 확충과 서비스 개선에 돌입했습니다.
구글은 이때부터 단순한 검색 도구가 아닌 데이터 기반의 비즈니스 플랫폼으로서 정체성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1999

[본사 팰로앨토 이전]

차고 사무실을 벗어나 실리콘밸리의 심장부인 팰로앨토로 본사를 이전합니다. 직원 수가 늘어나고 사업 규모가 확장되면서 더 전문적인 업무 공간이 필요해졌습니다. 본격적인 IT 기업으로서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성장의 시기였습니다.

새 사무실은 더 많은 서버를 수용하고 엔지니어들을 위한 쾌적한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이때부터 자유로운 사무실 문화를 도입하여 직원들의 창의성을 극대화하려 노력했습니다.
회사는 이 시기 하루 수백만 건의 검색 요청을 처리하며 시장 점유율을 급속도로 높여갔습니다.

[대규모 벤처 투자 유치]

클라이너 퍼킨스와 세쿼이아 캐피털로부터 2,500만 달러의 거액 투자를 유치합니다. 실리콘밸리의 양대 거물로부터 동시에 투자를 받은 것은 구글의 가치를 시장이 전폭적으로 신뢰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자금은 구글의 글로벌 인프라 구축에 투입되었습니다.

투자 유치 과정에서 투자자들은 경영권 보완을 위해 전문 경영인을 영입할 것을 래리 페이지에게 권유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실리콘밸리의 거물급 CEO들을 만난 뒤 전문 경영의 필요성을 점차 수용했습니다.
이 투자금 덕분에 구글은 거대한 서버 농장을 건설하고 검색 속도를 혁신적으로 높일 수 있었습니다.

2000

[검색 인덱스 10억 개 달성]

구글이 인덱싱한 웹페이지 수가 마침내 10억 개를 돌파하며 세계 최대의 검색 엔진으로 등극합니다. 이는 인터넷상의 거의 모든 정보를 구글이 파악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수치였습니다. 사용량 또한 폭증하며 구글은 일상의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단순히 데이터 양을 늘리는 것뿐만 아니라 결과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알고리즘을 고도화했습니다.
이 시기에 애드워즈라는 광고 시스템을 도입하여 구글의 강력한 수익 모델을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쟁사들을 압도하는 기술력으로 구글은 전 세계 검색 시장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2001

[경영진 개편 논의 본격화]

회사의 급격한 성장으로 인해 조직 관리의 복잡성이 커지면서 외부 전문가 영입을 가시화합니다. 투자자들의 압박과 래리 페이지 자신의 고민이 맞물려 구글을 다음 단계로 이끌 리더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래리는 기술 개발에 더 집중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엔지니어들이 주도하는 구글의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비즈니스적 안정을 꾀할 수 있는 인물을 신중하게 물색했습니다.
인텔의 앤디 그로브 등 존경받는 리더들과 상담하며 자신은 제품 전략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 과정은 래리 페이지가 단순히 창업자를 넘어 전략가로서 성숙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에릭 슈밋 의장 영입]

노벨의 CEO였던 에릭 슈밋을 구글의 이사회 의장으로 전격 영입합니다. 래리 페이지는 전문 경영인의 영입을 통해 회사의 체질을 개선하고 대규모 성장에 대비하고자 했습니다. 두 창업자와 전문 경영인의 '3인 체제'가 형성되었습니다.

에릭 슈밋은 래리와 세르게이의 창의성을 존중하면서도 기성 기업의 운영 노하우를 접목시키는 완충 작용을 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에릭 슈밋과의 대화를 통해 경영의 본질에 대해 깊은 영감을 받았으며 그를 파트너로 인정했습니다.
이후 몇 달간의 적응 기간을 거쳐 에릭 슈밋이 공식 최고경영자로 취임할 수 있도록 전폭 지원했습니다.

[제품 부문 사장으로의 전환]

구글의 최고경영자 자리를 에릭 슈밋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제품 부문 사장직을 맡습니다. 그는 실무적인 경영 행정보다는 구글의 핵심 기술과 신제품 개발을 진두지휘하는 역할을 선택했습니다. 기술 중심의 혁신을 잃지 않게 한 결정이었습니다.

에릭 슈밋은 농담조로 래리와 세르게이에게 더 이상 '어른들의 감독'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세 사람의 호흡은 좋았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모든 신규 채용에 대해 최종 승인을 내리는 권한을 유지하며 구글 특유의 인재 선발 문화를 지켰습니다.
그는 이 시기 안드로이드와 같은 미래 먹거리 사업을 비밀리에 준비하며 구글의 영토 확장을 도모했습니다.

2002

[글로벌 리더 선정]

세계 경제 포럼으로부터 '내일을 위한 글로벌 리더'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습니다. 젊은 나이에 기술 혁신을 통해 인류의 미래에 기여한 공로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다보스 포럼 등에 참여하며 글로벌 리더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했습니다.

구글의 검색 기술이 민주주의와 정보의 평등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 학계에서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함께 선정된 전 세계 유망주들과 교류하며 기술이 사회 문제 해결에 어떻게 쓰일 수 있을지 논의했습니다.
이 시기 미시간 대학교 동문회로부터 공로상을 받는 등 학계와 사회 각계의 찬사가 이어졌습니다.

2003

[명예 경영학 박사 수여]

스페인의 IE 비즈니스 스쿨에서 구글 창업과 경영의 성과를 인정받아 명예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여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 점이 유럽 학계에서도 주목을 받았습니다. 비즈니스 리더로서 거둔 성공의 상징이었습니다.

학위 수여식에서 그는 구글의 성공 비결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실험 정신과 속도를 꼽았습니다.
유럽 전역의 젊은 인재들에게 혁신적인 도전을 멈추지 말라는 영감을 주는 강연을 진행했습니다.
이후 같은 해 언스트앤영으로부터 올해의 기업가상을 수상하며 기업가로서의 전성기를 보냈습니다.

2004

[마르코니 재단상 수상]

세르게이 브린과 함께 통신 및 인터넷 분야의 권위 있는 상인 마르코니 재단상을 수상합니다. 검색 기술을 통해 인류의 통신과 정보 습득 방식을 혁신적으로 개선한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세계적인 석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이 지식의 보편화에 기여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이 수상은 페이지랭크 알고리즘이 단순한 사업 아이템을 넘어 인류의 지식 체계를 바꾼 과학적 성취임을 공식화했습니다.
마르코니 재단은 두 젊은 창업자가 인터넷의 가치를 수백 배 증폭시켰다고 극찬하며 상을 수여했습니다.

[구글의 역사적 상장(IPO)]

나스닥 시장에 구글 주식을 공식 상장하며 역사적인 기업공개를 성공적으로 마칩니다. 래리 페이지는 상장 서류에 직접 서명하며 억만장자 대열에 공식적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31세의 나이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IPO를 통해 유입된 막대한 자금은 구글이 단순 검색 서비스를 넘어 다각적인 기술 투자를 할 수 있는 실탄이 되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상장 이후에도 '사악해지지 말자'는 기업 모토를 고수하며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이 사건은 구글이 스타트업을 넘어 전 세계 시가총액 상위권의 거대 테크 기업으로 진화하는 결정적인 분기점이었습니다.

[키홀(Keyhole) 인수 주도]

위성 이미지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 키홀 인수를 주도하며 위치 정보 서비스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래리 페이지는 이 기술이 미래의 핵심 서비스가 될 것임을 직감하고 적극적으로 인수를 추진했습니다. 훗날 구글 지도의 모태가 된 기술입니다.

그는 위성 데이터를 누구나 쉽게 웹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엔지니어링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인수 이후 키홀의 기술은 구글의 인프라와 결합하여 전 세계를 입체적으로 탐험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위치 기반 서비스 시장을 선점함으로써 구글의 생태계는 더욱 견고해지는 계기를 맞이했습니다.

2005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 펠로우]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어 학문적, 예술적 성취를 인정받습니다. 그는 컴퓨터 과학과 비즈니스 리더십을 결합하여 현대 사회의 지식 구조를 바꾼 공로로 이 영예를 안았습니다. 세계적인 지성들과 교류하는 자리에 올랐습니다.

펠로우 선정은 그가 단순히 돈을 많이 번 기업가가 아닌 사회 문명을 진일보시킨 인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아카데미 활동을 통해 기술 윤리와 정보 보안 문제에 대해 활발한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구글 닷 오알지를 설립하며 기업의 이익을 사회로 환원하는 체계를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안드로이드(Android) 비밀 인수]

당시 최고경영자 모르게 비밀리에 모바일 운영체제 기업인 안드로이드를 인수합니다. 래리 페이지는 모바일이 검색의 미래가 될 것임을 예견하고 이 과감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구글이 전 세계 모바일 시장을 지배하게 만든 신의 한 수였습니다.

그는 안드로이드의 창업자 앤디 루빈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안드로이드를 구글의 핵심 소프트웨어로 키우기 위해 전폭 지원했습니다.
에릭 슈밋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았으나 인수 금액이 상대적으로 적어 래리의 판단을 믿고 따르기로 했습니다.
이 인수는 훗날 애플의 아이폰과 경쟁하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모바일 OS를 탄생시킨 토대가 되었습니다.

2006

[유튜브(YouTube) 전격 인수]

동영상 공유 플랫폼인 유튜브를 16억 5,000만 달러라는 파격적인 금액에 인수합니다. 래리 페이지는 텍스트를 넘어 동영상 정보가 미래의 주류가 될 것임을 간파했습니다. 구글을 세계 최고의 미디어 기업으로 도약시켰습니다.

유튜브 인수는 구글 내부에서도 찬반 논란이 있었으나 래리의 강력한 추진력 덕분에 성사될 수 있었습니다.
인수 이후 유튜브는 구글의 검색 및 광고 인프라와 결합하여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유튜브의 독립적인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구글의 기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 성공적인 통합을 이끌었습니다.

2007

[루신다 사우드워스와의 결혼]

카리브해의 넥커 섬에서 과학자 루신다 사우드워스와 화려한 결혼식을 올립니다. 리처드 브랜슨 경이 소유한 이 개인 섬에서의 예식에는 수많은 정재계 명사들이 참석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사생활을 보호하면서도 행복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루신다 사우드워스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생물정보학 박사 학위를 받은 재원으로, 래리와 지적인 유대감을 공유했습니다.
그의 결혼식에는 힐러리 클린턴 등 거물급 인사들이 하객으로 참여하여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결혼 이후에도 자신의 부를 사회 공헌 활동과 과학 연구 지원에 활발히 투입했습니다.

2009

[첫 번째 자녀 출산]

아내 루신다 사우드워드와의 사이에 첫 번째 자녀를 얻으며 아버지가 됩니다. 그는 부모가 된 이후 교육과 환경 문제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대외 활동을 줄이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데 집중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자녀의 사생활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이들이 기술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인간적인 감수성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육아에 임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다양한 과학 프로젝트에 개인적인 기부를 대폭 늘리기도 했습니다.

2011

[호화 요트 센시스 구입]

4,500만 달러 규모의 초대형 호화 요트인 '센시스'를 구입하며 개인적인 휴식 공간을 마련합니다. 이 요트는 헬리콥터 착륙장과 탐험용 보트를 갖추고 있는 첨단 시설을 자랑합니다. 그는 이 요트에서 가족들과 조용한 휴가를 즐기곤 합니다.

뉴질랜드의 한 사업가로부터 구입한 이 요트는 내부 시설이 최고급 호텔 수준으로 꾸며져 있어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요트 여행을 통해 업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미래 기술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평소 은둔형 기업가로 알려진 그답게 요트 위에서도 언론의 노출을 피해 개인적인 삶을 즐겼습니다.

[두 번째 자녀 탄생]

아내 루신다와의 사이에 두 번째 자녀를 맞이하며 단란한 네 가족의 가장이 됩니다. 그는 바쁜 경영 활동 중에도 가정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며 아이들을 양육했습니다. 가족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대중에게는 정보를 거의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된 이후 그는 미래 세대를 위한 지구 환경 보존과 재생 에너지 기술 투자에 더욱 매진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경험이 그가 훗날 어린이용 서비스를 기획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는 억만장자임에도 소박한 생활 태도를 유지하며 자녀들에게도 기술의 올바른 가치를 가르치려 노력했습니다.

[최고경영자 복귀 공식 발표]

에릭 슈밋의 후임으로 다시 한번 구글의 최고경영자로 복귀할 것임을 공식 발표합니다. 에릭 슈밋은 '더 이상 어른의 감독은 필요 없다'는 재치 있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구글은 다시 창업자의 열정 아래 기술 중심의 강력한 드라이브를 예고했습니다.

복귀 발표 직후 시장은 창업자의 귀환을 환영하며 구글의 주가가 급등하는 등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복귀 직후 구글의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민첩한 스타트업 정신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이 발표는 구글이 소셜 네트워크와 모바일 분야에서 새로운 도약이 필요한 시점에 이루어진 전략적 결단이었습니다.

[구글 CEO 공식 업무 개시]

공식적으로 구글의 CEO 업무를 시작하며 조직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편에 착수합니다. 그는 주요 제품 부문을 책임질 수 있는 강력한 리더들을 전면에 배치했습니다. 결정 속도를 높이고 부서 간의 장벽을 허무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는 복귀 후 첫 행보로 유튜브, 검색, 안드로이드 등 핵심 부문을 독립적인 사업 단위처럼 운영하도록 권한을 분산했습니다.
동시에 부서 이기주의를 엄격히 금지하는 정책을 선언하며 조직 결속력을 다졌습니다.
이 시기 구글은 연매출 400억 달러에 육박하는 거대 기업이었음에도 래리의 지휘 아래 다시 역동성을 되찾았습니다.

[모토로라 모빌리티 인수 결정]

구글 역사상 최대 규모인 125억 달러를 투자하여 모토로라 모빌리티를 인수하기로 결정합니다. 래리 페이지는 수만 건의 모토로라 특허를 확보하여 안드로이드 생태계를 보호하려 했습니다. 하드웨어 분야로의 본격적인 진출이었습니다.

이 인수는 구글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수직 계열화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었습니다.
비록 훗날 모토로라를 다시 매각하게 되지만 확보한 특허권은 구글이 모바일 시장에서 생존하는 데 결정적인 방어막이 되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이 과정을 통해 거대 인수합병 시장에서의 협상력과 전략적 통찰력을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2012

[우주 광물 스타트업 투자]

우주 광물 채굴을 목표로 하는 스타트업인 플래니터리 리소시스에 초기 투자자로 참여합니다. 래리 페이지는 우주로 자원 채굴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인류학적 비전에 공감했습니다. 그의 미래지향적인 투자 성향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소행성에서 희귀 금속을 채굴하는 기술이 인류의 자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우주 산업 투자는 훗날 그가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비행 자동차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구글 외부에서도 그는 인류 문명을 진보시킬 수 있는 급진적인 기술들에 자신의 부를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2013

[성대 마비 및 건강 이상 고백]

자신의 성대가 마비되어 목소리가 변하게 된 사연을 공식적으로 고백합니다. 수년 전 감기를 앓은 뒤 오른쪽 성대가 마비되었고 최근 왼쪽 성대까지 마비되었다고 밝혔습니다. 구글 경영에 있어 그의 신체적 한계를 처음 알린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하시모토 갑상선염을 앓고 있었으며 이것이 성대 신경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상황임에도 보조 장치를 활용하거나 소통 방식을 개선하며 CEO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이 고백은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나,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드러낸 용기로 호평받았습니다.

2014

[네스트 랩스(Nest Labs) 인수]

스마트 홈 기술의 선두주자인 네스트 랩스를 32억 달러에 인수하여 사물인터넷 시장 공략을 본격화합니다. 래리 페이지는 모든 기기가 서로 연결되는 시대가 올 것임을 예견했습니다. 소프트웨어 역량을 하드웨어와 결합한 시도였습니다.

애플 출신의 토니 파델이 설립한 네스트는 구글의 에너지를 스마트 홈 플랫폼으로 확장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사용자의 생활 패턴을 학습하여 에너지를 절약하는 스마트 온도 조절기의 가치에 매료되었습니다.
이 인수는 훗날 구글 홈과 다양한 스마트 가전 생태계가 구축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딥마인드(DeepMind) 인수 완료]

영국의 인공지능 연구 기업인 딥마인드를 인수하며 AI 분야의 패권을 쥐게 됩니다. 래리 페이지는 범용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믿고 이 독보적인 기술 조직을 영입했습니다. 훗날 알파고 신드롬을 낳는 위대한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는 딥마인드의 공동 창업자 데미스 허사비스의 비전에 공감하며 인공지능 기술이 모든 서비스를 지능화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인수 당시 윤리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약속하는 등 인공지능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선제적으로 대응하려 노력했습니다.
현재 딥마인드는 구글의 검색 품질 개선은 물론 과학적 한계 극복에 지대한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2015

[알파벳 지주사 체제 발표]

구글을 포함한 자회사들을 관리하는 지주 회사 '알파벳' 체제를 구축할 것임을 발표합니다. 래리 페이지는 검색 사업과 미래 혁신 사업들을 분리하여 경영 효율성을 극대화하려 했습니다. 그는 알파벳의 초대 CEO로 취임하게 됩니다.

이 개편을 통해 순다르 피차이가 구글의 새로운 CEO로 임명되었으며, 래리 페이지는 전략적 의사 결정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알파벳'이라는 이름은 언어를 구성하는 글자들의 모음이자 최고의 수익률을 뜻하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았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이 체제 아래서 실패 가능성이 높은 '문샷' 프로젝트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알파벳 CEO 공식 취임]

지주사 알파벳의 최고경영자로서 공식 업무를 수행하며 구글 이외의 신사업들에 집중합니다. 웨이모, 베릴리 등 독립된 자회사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자본과 기술적 지침을 제공했습니다. 인류의 미래를 설계하는 리더로 거듭난 시기였습니다.

그는 각 자회사의 CEO들에게 전권을 부여하면서도 거시적인 기술 트렌드를 제시하는 멘토 역할을 했습니다.
알파벳 체제 도입 이후 구글의 주가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경영 효율화의 성공을 입증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이 시기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기보다는 연구실을 방문하며 혁신 기술의 상용화를 독려했습니다.

2016

[웨이모(Waymo) 독립 및 가속]

구글의 자율 주행차 프로젝트를 독립 법인인 '웨이모'로 분사시키며 사업화에 박차를 가합니다. 래리 페이지는 대학 시절부터 꿈꾸었던 운전사 없는 자동차 세상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웨이모는 업계 선두 주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웨이모의 안전성 테스트와 기술 고도화 과정을 세밀하게 점검하며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웨이모의 성공적인 독립은 알파벳 체제가 추구하는 '혁신의 사업화'를 보여주는 모범 사례가 되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자동차가 아닌 '운전 그 자체'를 서비스로 제공한다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정립했습니다.

2017

[키티 호크(Kitty Hawk) 공개]

개인적으로 투자한 플라잉 카 기업 키티 호크의 시제품 '플라이어'를 대중에 공개합니다. 래리 페이지는 지상의 교통 체증을 해결하기 위해 개인용 비행 장치가 필수적이라고 믿고 수년간 이 프로젝트를 지원해 왔습니다. 그의 발명가적 열망이 실현된 사례입니다.

키티 호크의 개발 과정에 래리 페이지는 직접 엔지니어링 아이디어를 제공하며 방향을 지휘했습니다.
그는 누구나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안전한 개인용 비행기를 만드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습니다.
구글의 업무와 별개로 그는 이러한 미래형 이동 수단 연구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 호기심을 충족했습니다.

2018

[세계 억만장자 순위 급상승]

포브스 선정 세계 억만장자 목록에서 개인 재산이 약 534억 달러에 달하며 세계 9위에 이름을 올립니다. 구글과 알파벳의 주가 상승 덕분에 그의 부는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를 이용해 난도 높은 과학 프로젝트들을 후원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늘어나는 재산에도 불구하고 사치보다는 기술 혁신과 사회 공헌에 더 많은 자금을 투입했습니다.
그는 개인 재산의 상당 부분을 기부할 것을 약속하는 더 기빙 플레지 정신을 실천하려 노력했습니다.
이 시기 그의 영향력은 단순한 기업가 수준을 넘어 전 세계 기술 트렌드를 주도하는 거물로 확고해졌습니다.

2019

[알파벳 경영 일선 전격 퇴진]

세르게이 브린과 함께 알파벳의 최고경영자 및 사장직에서 물러날 것임을 공식 발표합니다. 그는 구글이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으며 순다르 피차이에게 전권을 넘겨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21년간 이어온 경영 대장정이 마무리되었습니다.

퇴임 서신에서 그는 구글이 이제 성숙한 21세가 되었으며 부모의 역할을 내려놓을 시기가 왔다고 비유했습니다.
경영권은 이양했지만 이사회 구성원이자 대주주로서 구글의 장기적인 방향성에 대한 영향력은 유지했습니다.
그는 퇴임 이후 자신이 관심을 가져온 혁신 기술 연구와 개인적인 과학 프로젝트에 더 많은 시간을 쏟기로 했습니다.

2020

[개인적인 혁신 투자 확대]

경영 퇴진 이후에도 비행 자동차, 재생 에너지, 노화 방지 연구 등에 대한 개인 투자를 더욱 강화합니다. 그는 자신의 기술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스타트업들을 지원하고 기술 자문을 제공했습니다. '발명가이자 후원자'로서의 삶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이 시기 외부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연구 현장을 방문하며 조용한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그의 투자는 단기 수익보다는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파괴적인 혁신 기술에 집중되었습니다.
알파벳의 이사회 멤버로서 회사의 거시적인 전략을 점검하며 순다르 피차이 체제가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2021

[뉴질랜드 영주권 취득]

뉴질랜드의 투자 영주권을 취득하여 그곳에서의 생활을 확대합니다. 뉴질랜드의 청정한 자연환경과 혁신적인 항공 법규 등에 매료되어 수년간 그곳을 자주 방문해 왔습니다. 비행 자동차 실험을 위한 최적의 장소로 뉴질랜드를 선택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뉴질랜드 정부의 적극적인 기술 지원 정책을 높게 평가하며 현지 스타트업 생태계에도 기여했습니다.
그의 영주권 취득 소식은 글로벌 기술 거물들이 새로운 안식처를 찾는 트렌드의 대표 사례로 언급되었습니다.
뉴질랜드에서의 조용한 삶 속에서도 그는 위성을 이용한 전 세계 인터넷 연결 프로젝트 등에 대한 구상을 계속했습니다.

2022

[AI 전략의 보이지 않는 손]

인공지능 분야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알파벳의 대주주로서 구글의 AI 전략을 점검합니다. 그는 구글이 검색 기술의 근간인 인공지능 분야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도록 강력한 연구 드라이브를 주문했습니다. 창업자로서의 기술적 감각이 다시 한번 발휘되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내부 회의를 통해 대규모 언어 모델의 상용화 속도를 높이고 기술 우위를 확보할 것을 독려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경쟁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구글만의 독창적인 AI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경영 전면에는 없었으나 구글의 기술적 뿌리를 수호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습니다.

2023

[구글 창립 25주년 소회]

구글 창립 25주년을 맞아 임직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지난 세월의 소회를 전합니다. 기숙사 방에서 시작된 작은 아이디어가 10억 명 이상이 사용하는 도구가 된 여정을 회상했습니다. 미래 기술에 대한 변치 않는 낙관론을 설파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아직 개발되지 않은 기술이 무수히 많다'며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을 기술로 해결할 수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특히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 사회의 변화에 대해 긍정적인 비전을 공유하며 구글의 사명을 다시 한번 일깨웠습니다.
창업자로서의 권위는 여전했으며 구글의 문화가 혁신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강력한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2024

[노화 방지 연구 칼리코 지원]

알파벳의 자회사 칼리코의 연구 성과를 점검하며 인류의 노화 방지 프로젝트에 힘을 보탭니다. 데이터 분석 기술을 생물학에 접목하여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는 연구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습니다. 기술을 통한 인류 구원의 일환입니다.

그는 노화가 하나의 질병이며 반드시 정복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투자를 지속해 왔습니다.
칼리코 연구원들과 기술적 난제에 대해 토론하며 컴퓨터 과학의 방법론이 생명 과학에 어떻게 쓰일 수 있을지 제언했습니다.
이러한 행보는 그가 상업적 성공을 넘어 인류의 생존을 자신의 마지막 소명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025

[친환경 항공 기술 투자 확대]

전기 수직 이착륙기 상용화 단계에 맞춰 자신의 개인 투자를 친환경 항공 에너지 분야로 확대합니다. 래리 페이지는 개인용 비행 장치가 교통 혁명을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환경 보호와 기술 발전을 동시에 달성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태양광 에너지와 고효율 배터리 기술이 항공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자신의 개인 섬과 연구 단지를 실험실로 활용하여 최신 항공 장치들의 안전성을 테스트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기술이 가져올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도 인류의 이동 자유를 극대화하는 솔루션을 찾는 데 매진했습니다.

2026

[세계 부호 2위 기록과 현재]

2026년 1월 기준 래리 페이지의 개인 자산은 약 2,690억 달러로 추산되며 세계 부호 순위 2위에 오릅니다. 구글과 알파벳의 성장은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현재 이사회 멤버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는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기후 위기 대응 기술과 우주 개척 사업에 전방위적인 지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알파벳 경영진들과 정기적으로 소통하며 차세대 인공지능 개발 방향에 대한 창업자로서의 직관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2026년 현재 래리 페이지는 경영 전면에서 물러난 리더임에도 디지털 문명의 향방을 결정짓는 보이지 않는 거인으로 존재합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