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마누엘 판히오
레이싱 드라이버, 자동차 경주 선수, 기업인
최근 수정 시각 : 2026-01-25- 18:24:55
후안 마누엘 판히오는 자동차 경주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인물이자, 포뮬러 원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승률을 기록한 드라이버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작은 마을 발카르세에서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정식 교육 대신 자동차 정비 현장에서 기계를 익히며 천부적인 감각을 쌓았습니다. 30대 후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유럽 무대에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알파 로메오, 마세라티, 메르세데스-벤츠, 페라리를 거치며 5회의 월드 챔피언을 달성했습니다. 특히 1957년 뉘르부르크링에서 보여준 역전승은 모터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경기로 꼽히며, 은퇴 후에도 메르세데스-벤츠 아르헨티나의 회장을 역임하는 등 자동차 산업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습니다.
1911
[발카르세에서 탄생]
이탈리아 이민자 부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부유하지 못한 환경이었으나 부모님의 근면함을 물려받아 어린 시절부터 자립심이 강한 아이로 성장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이탈리아 아브루초 지역에서 건너온 성실한 노동자 계급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운동 신경이 뛰어났으며, 특히 축구에 재능을 보여 '판초'라는 애칭으로 불렸습니다.
가난한 환경이었으나 부모의 근면함을 물려받아 어린 나이부터 자립심을 키웠습니다.
1922
[정비소 견습 시작]
초등학교 졸업 후 지역 정비소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책상 앞에서의 공부보다 자동차 기계의 맞물림에 더 큰 흥미를 느낀 소년의 첫걸음이었습니다.
이론적인 학업보다 기계를 다루는 실무에 더 큰 흥미를 느꼈던 시기입니다.
기름때를 묻히며 엔진의 구조를 파악한 경험은 훗날 그가 차량의 한계를 이해하는 드라이버가 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차를 닦으며 자동차에 대한 꿈을 키워갔습니다.
1924
[포드 대리점 정비소 취업]
지역 내 더 큰 규모의 포드 정비소로 옮겨 전문성을 높입니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인기 있던 포드 차량들을 수리하며 실무 숙련도를 비약적으로 높였습니다.
포드 차량의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메커니즘을 몸소 체험하며 정비 기술자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단순한 수리를 넘어 차량 성능 개선에 대한 감각을 익혔습니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기계를 다루는 솜씨가 정교하기로 정평이 났던 시기입니다.
1927
[생애 첫 운전 경험]
정비소 주인의 신뢰를 얻어 시운전 업무를 담당하게 됩니다. 16세의 나이에 정식 면허 없이 자동차와 교감하며 기계를 다루는 천부적인 자질을 발견합니다.
정비 후 시운전을 담당하게 되면서 차량의 거동과 노면의 반응을 느끼는 법을 배웠습니다.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때부터 속도에 대한 두려움 없이 차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자질을 보였습니다.
이 경험은 그가 정비사에서 드라이버로 진로를 변경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1928
[축구 부상과 레이싱 열망]
취미였던 축구 경기 중 부상을 입어 강제적인 휴식기를 가집니다. 요양 기간 동안 레이싱 잡지를 탐독하며 미래의 진로를 자동차 경주로 확정하는 계기가 됩니다.
부상 회복 기간 동안 레이싱 잡지와 해외 소식을 접하며 세계적인 드라이버들의 삶을 동경했습니다.
축구 선수로서의 꿈은 접었으나, 대신 자동차 경주라는 더 큰 목표를 설정하게 되었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후에는 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자동차 튜닝에 매진했습니다.
1932
[군 복무와 운전병 활동]
육군 포병 부대에 징집되어 복무하며 규율을 익힙니다. 탁월한 운전 실력을 인정받아 장교의 전용 운전병으로 발탁되어 험난한 지형 주행을 마스터했습니다.
엄격한 군 생활을 통해 훗날 레이싱 경기에서 필요한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심을 길렀습니다.
군용 차량을 험지에서 운행하며 다양한 지형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키웠습니다.
전역 후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비소를 차릴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1934
[독립 정비소 공동 오픈]
친구와 함께 발카르세에 자신의 정비소를 차려 사업가로 자립합니다. 이곳은 판히오가 경주에 참가할 차량을 직접 개조하고 성능을 개선하는 비밀 연구소와 같았습니다.
지역 사회에서 정직하고 실력 있는 정비소로 이름을 알리며 안정적인 수익을 올렸습니다.
낮에는 고객의 차를 고치고 밤에는 레이싱을 위한 차량 개조에 몰두했습니다.
자신의 차를 직접 고치고 관리하는 능력은 판히오만의 독보적인 강점이 되었습니다.
1936
[가명으로 레이싱 데뷔]
부모님 몰래 가명을 쓰고 포드 모델 A로 첫 공식 경주에 나섭니다. 비록 엔진 고장으로 중도 하차했으나 전문 레이서로서의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날입니다.
가명 리바다비아는 그가 평소 응원하던 축구팀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차량의 엔진 고장으로 중도 포기했으나, 실전 경기에서 얻은 경험은 그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교훈이 되었습니다.
이 경기를 기점으로 그는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 전문 레이서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1938
[본명으로 첫 완주 성공]
네코체아 경주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상위권 완주에 성공합니다. 노후한 차량으로도 정교한 주행을 선보여 지역 사회와 후원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처음으로 가명이 아닌 본명으로 참가한 경기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후한 차량임에도 불구하고 상위권 드라이버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 주목받았습니다.
이 대회의 성과 덕분에 그는 후원자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39
[내구 레이스 TC 입문]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내구 레이스인 투리스모 카레테라에 데뷔합니다. 쉐보레 차량을 선택한 그는 포드 지지자들과 대항하며 쉐보레의 영웅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 레이싱은 포드와 쉐보레 지지자들의 대결 양상이었으며, 판히오는 쉐보레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비포장도로와 산악 지형을 오가는 극한의 환경에서 차량을 유지하며 달리는 능력을 증명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그는 고도의 집중력과 영리한 경기 운영으로 '엘 마에스트로'의 싹을 틔웠습니다.
1940
[첫 번째 시즌 챔피언]
약 9,500km를 달리는 대장정에서 우승하며 첫 번째 TC 챔피언에 오릅니다. 기계적 결함을 직접 수리하며 달리는 집념 어린 모습에 아르헨티나 전역이 열광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페루의 리마를 거쳐 다시 돌아오는 약 9,500km의 대장정이었습니다.
장거리 레이스에서 기계적 결함을 직접 수리하며 달리는 모습에 국민들이 열광했습니다.
이 우승으로 그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초의 프로 레이싱 챔피언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941
[내구 레이스 2연패 달성]
투리스모 카레테라에서 연이어 우승하며 독보적인 강자로 자리매김합니다. 브라질의 국제 그랑프리에서도 승리하며 남미를 대표하는 드라이버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브라질의 제툴리우 바르가스 그랑프리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국제적인 명성도 얻기 시작했습니다.
차량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빠른 경로를 선택하는 영리한 주행이 특징이었습니다.
연이은 우승으로 그는 막대한 상금과 함께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됩니다.
1942
[전쟁으로 인한 레이싱 중단]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모든 자동차 경주가 전면 금지됩니다. 선수 생활의 전성기였으나 그는 묵묵히 정비소 경영에 집중하며 다음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가장 전성기일 수 있었던 30대 초반의 5년을 레이싱 무대 밖에서 보낸 아쉬운 시기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기간에도 차량 수리와 부품 제작 기술을 더욱 고도화하며 실전 복귀를 준비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체력을 관리하고 레이싱에 대한 열정을 유지했습니다.
1947
[종전 후 서킷 복귀]
로사리오 대회를 통해 오랜 공백을 깨고 화려하게 복귀합니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한 기량을 과시하며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레이서로 발탁되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새로운 세대의 드라이버들과 경쟁하며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여 다시 주목받았습니다.
아르헨티나 자동차 클럽(ACA)의 지원 아래 유럽 진출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된 해입니다.
이 시기의 활약은 후안 페론 정부가 그를 국가 대표 레이서로 발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8
[페루 산악지대 비극적 사고]
경기 중 전복 사고가 발생하여 동료 드라이버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습니다. 이 사건으로 판히오는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으나 동료의 몫까지 달리겠다는 의지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야간 주행 중 먼지로 인한 시야 확보 실패와 노면 상태 악화가 원인이었습니다.
사고 후 판히오는 동료의 죽음에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한때 레이싱 은퇴까지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격려와 동료의 몫까지 달리겠다는 의지로 다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1949
[정부 지원 하 유럽 진출]
아르헨티나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으로 유럽 레이싱 무대에 본격 진출합니다.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유럽의 거물급 레이서들을 연달아 꺾으며 전 유럽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유럽 현지에서 열린 6개 대회 중 4개 대회에서 우승하며 전 유럽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무명의 남미 드라이버가 유럽의 명차들을 압도하는 모습은 당대 최고의 화제였습니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이듬해 창설된 포뮬러 원(F1)의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습니다.
1950
[제1회 F1 챔피언십 참가]
알파 로메오 팀의 리더로 역사적인 첫 번째 포뮬러 원 경주에 참여합니다. 이 시기부터 그는 고도의 테크닉으로 알파 로메오의 명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세페 파리나, 루이지 파지올리와 함께 알파 로메오의 '3F'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첫 시즌부터 탁월한 주행으로 우승권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기계적 이해도가 높았던 그는 알파 로메오의 차량 성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습니다.
[F1 모나코 첫 우승]
좁은 모나코 시가지 서킷에서 압도적인 주행으로 자신의 첫 그랑프리 우승을 달성합니다. 혼란스러운 경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전설적인 드라이버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사고가 빈번했던 혼란스러운 경기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이 우승으로 그는 유럽 대중들에게 확실한 존재감을 각인시켰습니다.
시즌 막판까지 파리나와 챔피언 타이틀을 두고 다퉜으나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1951
[생애 첫 F1 월드 챔피언]
스페인 대회 승리로 생애 첫 번째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확보합니다. 40세의 나이에 이룬 이 업적은 그가 세계 최고의 레이서임을 전 세계에 공포한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알베르토 아스카리와의 사투 끝에 얻어낸 값진 성과였습니다.
판히오는 이 시즌을 끝으로 알파 로메오가 F1에서 철수하자 새로운 도전을 준비했습니다.
그의 첫 챔피언십 우승은 훗날 이어질 5회 달성의 전설적인 시작점이었습니다.
1952
[몬차 서킷 대형 사고]
목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어 선수 생명 최대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밤샘 운전 끝에 참가한 경기에서 발생한 이 사고로 그는 한동안 전신 깁스 상태로 병상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북아일랜드 경기 후 비행기 편을 놓쳐 직접 운전해 몬차까지 밤샘 이동한 피로가 원인이었습니다.
사고 직후 몇 달간 전신 깁스를 한 채 병상에서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이 사고는 그가 선수 생활 동안 겪은 가장 치명적인 부상이었으며, 안전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습니다.
1953
[마세라티 소속 기적적 복귀]
심각한 부상을 딛고 다시 서킷으로 돌아와 건재함을 과시합니다. 시즌 종합 2위를 차지하며 사고의 트라우마를 완벽하게 극복했음을 전 세계 레이싱 팬들에게 증명했습니다.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건재함을 과시했고, 시즌 종합 2위를 차지했습니다.
40대의 나이에도 젊은 드라이버들보다 빠른 반응 속도와 판단력을 유지했습니다.
마세라티 팀원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팀의 전력 강화에 기여했습니다.
1954
[메르세데스 합류와 2회 우승]
시즌 중반 메르세데스-벤츠로 이적하여 두 번째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합니다. 전설적인 경주차 'W196'과 판히오의 만남은 '은빛 화살'의 전설을 창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즌 전반은 마세라티에서, 후반은 벤츠에서 활동하며 양쪽 모두에서 승리를 거둔 특이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독일의 정교한 기술력과 판히오의 천재성이 결합되어 경쟁자들을 압도했습니다.
이 시즌 우승으로 그는 모터스포츠계의 명실상부한 일인자로 공인받았습니다.
1955
[3회 월드 챔피언 수성]
메르세데스-벤츠 팀에서 동료 스털링 모스와 경쟁하며 다시 한번 정상을 차지합니다. 모국 아르헨티나의 폭염 속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는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젊은 천재 스털링 모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며 스승이자 경쟁자로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모국 아르헨티나 그랑프리에서 화씨 100도가 넘는 폭염을 뚫고 우승한 기록은 유명합니다.
강력한 체력과 기계 조작의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룬 절정의 시기였습니다.
[르망 대참사 현장 목격]
수많은 사상자를 낸 르망 24시 사고를 바로 뒤에서 목격하며 구사일생으로 탈출합니다. 이 비극은 메르세데스 팀의 레이싱 철수와 판히오의 안전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동료 피에르 레베의 차량이 관중석으로 날아가는 끔찍한 순간을 목격했습니다.
사고 후 메르세데스-벤츠 팀은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경기를 포기하고 철수했습니다.
모터스포츠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절감하며 과도한 승부욕보다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1956
[페라리 이적 및 4회 챔피언]
페라리 팀 소속으로 4번째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르며 승승장구합니다. 엔초 페라리와의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직 실력만으로 팀을 월드 챔피언십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차가 고장 나자 팀 동료 피터 콜린스가 자신의 차를 양보해 판히오가 우승하게 된 일화가 유명합니다.
서로 다른 3개 팀에서 챔피언을 달성한 최초의 드라이버가 되었습니다.
팀 분위기는 차가웠으나 판히오의 주행 실력만큼은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습니다.
1957
[불멸의 5회 월드 챔피언]
마세라티에서 자신의 마지막이자 5번째 세계 정상에 등극합니다. 서로 다른 4개 팀에서 챔피언을 달성한 이 독보적인 기록은 21세기까지 누구도 넘보지 못한 금자탑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4개 팀(알파 로메오, 마세라티, 벤츠, 페라리)에서 챔피언을 달성한 유일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의 5회 우승은 양적인 수치를 넘어 질적으로도 가장 완벽한 시즌 운영의 결과였습니다.
전 세계 레이싱 팬들은 그를 향해 '엘 마에스트로'라는 칭호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뉘르부르크링의 기적]
50초라는 압도적인 격차를 뒤집고 마지막 바퀴에서 역전 우승을 차지합니다. 46세의 나이로 보여준 이 광기 어린 질주는 모터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단일 경기로 회자됩니다.
46세의 노장 드라이버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극한의 질주를 선보여 전 세계를 경악시켰습니다.
경기 후 판히오 본인도 '다시는 이렇게 운전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질주였습니다.
이 우승은 그의 5번째 월드 챔피언십 타이틀을 확정 짓는 결정적인 승부처였습니다.
1958
[쿠바 혁명군 납치 사건]
정치적 목적을 위해 피델 카스트로의 부하들에게 납치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납니다. 납치 기간 동안 대의를 설명하는 혁명군과 인생에 대해 토론하며 의연하게 대처했습니다.
혁명군은 바티스타 정권의 무능을 알리기 위한 선전 도구로 세계적 영웅인 판히오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납치 기간 동안 정중한 대접을 받았으며, 납치범들과 정치와 인생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29시간 만에 무사히 풀려난 그는 '나를 걱정해준 혁명가들에게 감사한다'는 의연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레이싱 공식 은퇴 선언]
정상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서킷을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통산 51번의 F1 출전 중 24번 우승이라는 경이로운 승률을 남기고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주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경기에서 우승자인 마이크 호손이 존경의 표시로 결승선 직전 판히오를 추월하지 않고 기다려준 일화는 유명합니다.
통산 51번의 F1 출전 중 24번의 우승(승률 47.06%)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습니다.
은퇴 당시 그는 '이제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넘겨줄 때가 되었다'며 담담히 소회를 밝혔습니다.
1974
[벤츠 아르헨티나 회장 취임]
오랜 파트너였던 메르세데스-벤츠 아르헨티나의 수장으로 임명됩니다. 드라이버 시절의 명성과 신뢰를 바탕으로 기업인으로서 제2의 성공적인 삶을 일구어냈습니다.
벤츠 브랜드의 가치를 남미 시장에 전파하고 생산 효율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의 명성과 신뢰도는 기업 홍보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사업 확장에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평생 벤츠와의 각별한 우정을 유지하며 명예 회장직까지 수행하게 됩니다.
1980
[최고의 스포츠맨 상 수상]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포츠인에게 수여되는 다이아몬드 코넥스 상을 받습니다. 레이싱을 넘어 아르헨티나 국민의 자부심이자 영웅으로 공식 인정받았습니다.
마라도나나 메시 이전 시대에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글로벌 스타는 판히오였습니다.
그의 도덕성과 성취는 아르헨티나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레이싱을 넘어 국민적 존경을 받는 인물로서 시상대에 올랐습니다.
1981
[정치적 중립에 대한 소회]
과거 군사 정권 시절 기업인으로서 겪었던 정치적 고뇌와 입장을 밝힙니다. 어떠한 풍파 속에서도 기업의 안정과 고용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음을 강조했습니다.
일부에서는 정권과의 유착을 의심하기도 했으나, 그는 오직 기업 안정과 고용 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강조했습니다.
정치적 풍파 속에서도 그에 대한 대중의 존경심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레이싱처럼 인생의 장애물도 침착하고 지혜롭게 피해 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986
[판히오 박물관 개관]
고향 발카르세에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대규모 자동차 박물관을 세웁니다. 그가 탔던 경주차들과 영광의 트로피들을 직접 기증하여 역사의 교육장으로 만들었습니다.
판히오 자신이 직접 설립 계획에 참여하고 유물들을 기증했습니다.
현재 이 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모터스포츠 박물관 중 하나로 꼽힙니다.
개관식에는 전 세계 레이싱 거물들이 참여하여 그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1991
[노년의 법적 고충과 시련]
회장 재임 시절 자금 운용 문제로 법적 조사 대상에 올라 심적 고통을 겪습니다.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나 이 과정에서 건강이 급격히 쇠약해졌습니다.
최종적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기업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대외 활동을 줄이고 건강 회복과 박물관 관리에만 전념했습니다.
1993
[신장 투병과 마지막 경주]
심각한 신부전증 진단을 받고 정기적인 투석 치료를 시작합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박물관을 찾는 팬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마지막까지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투병 중에도 자신을 찾아오는 팬들과 후배 드라이버들을 친절히 맞이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의 쾌유를 비는 성명을 발표하며 국가적 차원의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병상에서도 모터스포츠 소식을 챙겨 들으며 끝까지 열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1995
[위대한 거장의 영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향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으며, 전 세계 레이싱계는 일제히 그의 죽음을 추모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을 비롯한 수만 명의 시민이 운집했습니다.
장지는 그의 소원대로 고향 발카르세의 가족 묘지에 마련되었습니다.
전 세계 F1 팀들은 경기를 앞두고 묵념의 시간을 가지며 위대한 드라이버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2001
[질주하는 판히오 동상]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 지역에 그의 전설적인 질주 모습을 담은 청동상이 세워집니다. 사후에도 여전히 아르헨티나의 자부심으로 살아있는 그의 존재감을 확인했습니다.
메르세데스-벤츠가 기증한 이 동상은 그의 실물 크기와 경주차를 정교하게 재현했습니다.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판히오의 역사를 알리는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비슷한 동상이 스페인 바르셀로나, 독일 뉘르부르크링, 모나코 등에도 설치되었습니다.
2005
[모나코 서킷의 기념비]
모나코 국왕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판히오를 기리는 특별 기념비가 서킷 입구에 세워집니다. 그가 최초의 우승을 거두었던 상징적인 장소에서 그의 업적을 영원히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모나코 국왕 알베르 2세가 직접 제막식에 참여하여 판히오에 대한 존경을 표했습니다.
유럽 내에서 판히오의 영향력이 단순한 드라이버를 넘어선 문화적 아이콘임을 증명했습니다.
이로써 판히오는 모터스포츠의 성지들마다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2011
[탄생 100주년 추모행사]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클래식카 퍼레이드가 열립니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그의 가치와 품격 있는 주행 정신이 다시 한번 조명되었습니다.
그가 생전에 탔던 차량들이 실제로 서킷을 주행하는 특별 퍼포먼스가 펼쳐졌습니다.
기념우표와 기념주화가 발행되어 전 세계 수집가들에게 보급되었습니다.
판히오의 정신인 '승리보다 품격'이라는 가치가 다시금 강조된 시기입니다.
2015
[유해 발굴 및 친자 소송]
친자 확인을 주장하는 남성에 의해 법원의 유해 발굴 및 DNA 검사 명령이 내려집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전설의 사생활에 대한 전 세계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판히오의 유해가 묘지에서 임시 발굴되어 과학적인 분석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소송은 전 세계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나 법적 절차는 엄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결국 유전자 일치 결과가 나오면서 판히오에게 혈육이 있었음이 공식 확인되었습니다.
2016
[두 번째 혈육 공식 확인]
또 다른 남성 역시 유전자 검사를 통해 판히오의 친자로 법적 인정을 받습니다. 사후 20년 만에 그의 가계도가 새롭게 작성되며 유산 상속 및 보존 사업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판히오가 과거 연인이었던 카탈리나 바실리 등과 맺었던 관계들이 사후에 조명되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가족을 공식적으로 만들지 않았으나, 혈연의 연결은 존재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유산 상속 문제와 박물관 운영에도 큰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2021
[자신만의 박물관으로 이장]
전설적인 드라이버 재키 스튜어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유해가 박물관 내 묘역으로 이장됩니다. 평생을 바친 자동차들과 함께 가장 어울리는 장소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이장식에는 전설적인 전직 드라이버 재키 스튜어트 경이 직접 참석하여 고인의 명예를 기렸습니다.
박물관 1층에 마련된 안치소는 이제 팬들이 그를 직접 기릴 수 있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모든 절차는 국가 영웅에 대한 최고의 예우를 갖추어 엄숙하게 진행되었습니다.
2024
[영원한 레이싱의 마에스트로]
현대적 데이터 분석 결과 역대 최고의 드라이버 순위에서 여전히 최상위권을 유지합니다. 그가 보여준 기술적 천재성과 인격적 고결함은 영원히 후배들의 기준점이 될 것입니다.
슈마허나 해밀턴의 기록보다 판히오의 승률이 더 가치 있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이어졌습니다.
열악한 안전 환경 속에서도 완벽한 주행을 펼친 그의 위대함은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엘 마에스트로'의 전설은 매 경주 시즌마다 회자되며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