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턴 오일러스
NHL 아이스하키 팀, 스포츠 구단
최근 수정 시각 : 2026-01-19- 17:32:46
에드먼턴 오일러스는 북미 아이스하키 리그(NHL) 역사상 가장 화려한 왕조를 구축했던 팀 중 하나로, 캐나다 알버타주의 자부심을 상징합니다. 1970년대 WHA에서 시작해 NHL로 합병된 이후, '하키의 황제' 웨인 그레츠키와 함께 1980년대에만 5번의 스탠리 컵을 들어 올리며 전설적인 역사를 썼습니다. 그레츠키의 트레이드와 오랜 암흑기를 거치며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코너 맥데이비드라는 새로운 세대의 천재를 맞이하며 다시 한번 빙판 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에드먼턴의 혹독한 겨울을 뜨거운 열기로 채워온 이 팀의 기록은 곧 현대 하키의 진화 그 자체입니다.
1971
[WHA 창립 멤버 합류]
에드먼턴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프로 하키팀이 세계 하키 협회의 창립 멤버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빌 헌터가 주도하여 결성된 이 팀은 알버타 지역의 하키 열기를 프로 리그로 확장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에드먼턴 오일러스는 본래 세계 하키 협회(WHA)의 창설 당시 12개 창립 팀 중 하나로 선정되었습니다.
창립자 빌 헌터는 에드먼턴 오일 킹스라는 주니어 팀을 운영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프로 구단 창단을 밀어붙였습니다.
이 결정은 향후 수십 년간 에드먼턴이 북미 하키의 중심지로 도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2
[알버타 오일러스의 첫 경기]
구단 역사상 최초의 공식 경기가 오타와 내셔널스를 상대로 펼쳐졌습니다. 당시 팀은 에드먼턴뿐만 아니라 알버타 전체를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알버타 오일러스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리그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첫 경기에서 오타와 내셔널스를 5-2로 격파하며 상쾌한 시작을 알렸습니다.
팀은 초기 홈 경기를 에드먼턴 가든스와 캘거리 스탬피드 코랄에서 나누어 개최하며 지역적 기반을 넓히려 노력했습니다.
이 시기 팀의 상징적인 주황색과 파란색 유니폼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1973
[에드먼턴 오일러스로 개칭]
알버타 지역 전체를 아우르던 팀 명칭을 에드먼턴에 집중하기 위해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했습니다. 연고지 팬들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팀의 정체성을 에드먼턴 도시 자체에 확고히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캘거리 지역에서의 흥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팀 운영진은 연고지를 에드먼턴으로 완전히 고정하기로 했습니다.
이 명칭 변경은 지역 사회와 구단 사이의 유대감을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이후 구단은 에드먼턴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문화 자산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1974
[노스랜즈 콜리세움 입성]
팀의 새로운 안식처가 될 최신식 경기장인 노스랜즈 콜리세움이 완공되어 첫 홈 경기를 치렀습니다. 이 경기장은 훗날 오일러스 왕조의 수많은 영광을 함께하게 될 전설적인 장소가 되었습니다.
기존의 낡은 경기장을 떠나 15,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전용 구장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 경기장은 훗날 렉솔 플레이스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지며 팬들의 성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쾌적한 관람 환경은 에드먼턴 시민들의 하키 관람 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습니다.
1976
[글렌 세이더의 합류]
구단의 운명을 바꿀 전략가인 글렌 세이더가 선수 겸 감독으로 팀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은퇴 후 단장과 감독으로서 오일러스의 황금기를 설계하는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글렌 세이더는 선수로서의 경력을 마무리함과 동시에 지도자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는 공격적인 하키 스타일을 팀의 컬러로 정착시키며 왕조 건설의 청사진을 그렸습니다.
세이더의 리더십 아래 오일러스는 북미에서 가장 역동적인 하키를 구사하는 팀으로 탈바꿈했습니다.
1978
[웨인 그레츠키 전격 영입]
하키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선수인 웨인 그레츠키가 인디애나폴리스 레이서스로부터 영입되었습니다. 17세의 어린 천재가 팀에 합류하면서 에드먼턴은 세계 하키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구단주 피터 포클링턴은 재정난에 처한 인디애나폴리스로부터 그레츠키를 포함한 3명의 선수를 현금 거래로 데려왔습니다.
그레츠키는 오일러스와 21년이라는 파격적인 장기 계약을 맺으며 팀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이 영입은 단순한 선수 이동을 넘어 스포츠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스카우트 사례로 남았습니다.
1979
[WHA-NHL 합병 및 NHL 가입]
세계 하키 협회가 해체되면서 오일러스를 포함한 4개 팀이 북미 아이스하키 리그에 전격 합류했습니다. 이를 통해 에드먼턴은 세계 최고 무대에서 진검승부를 펼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NHL은 WHA의 4개 팀(에드먼턴, 하트포드, 퀘벡, 위니펙)을 흡수하며 리그를 확장했습니다.
오일러스는 그레츠키를 보호 선수로 묶는 데 성공하며 NHL에서도 경쟁력을 유지할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 합병은 에드먼턴 오일러스가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본격적인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마크 메시에 드래프트 지명]
강력한 리더십과 피지컬을 겸비한 마크 메시에를 드래프트 전체 48순위로 지명했습니다. 메시에는 훗날 웨인 그레츠키와 함께 팀의 황금기를 이끄는 전설적인 캡틴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메시에는 뛰어난 득점력뿐만 아니라 팀원들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습니다.
그는 오일러스에서 5번의 우승을 경험하며 하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그레츠키가 떠난 뒤에도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에드먼턴 팬들에게 영원한 영웅으로 남았습니다.
[NHL 공식 데뷔 경기]
시카고 블랙호크스를 상대로 NHL 무대에서의 첫 경기를 치렀습니다. 비록 첫 경기에서는 패배했지만, 메이저 리그 수준의 하키에 적응하며 미래의 가능성을 확인한 경기였습니다.
첫 경기에서 케빈 로우가 구단 역사상 첫 NHL 득점을 기록하며 이름을 남겼습니다.
웨인 그레츠키는 데뷔 시즌부터 137포인트를 기록하며 NHL 기록을 갈아치우기 시작했습니다.
에드먼턴 팬들은 전석 매진으로 화답하며 새로운 리그에서의 도전을 응원했습니다.
1980
[야리 쿠리와 폴 코피의 영입]
핀란드 출신의 윙어 야리 쿠리와 천재 수비수 폴 코피를 드래프트를 통해 선발했습니다. 이들의 합류로 오일러스는 그레츠키를 보좌할 최강의 라인업을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야리 쿠리는 그레츠키와 환상적인 호흡을 맞추며 역대 최고의 콤비 중 하나로 평가받았습니다.
폴 코피는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공격수 못지않은 득점력을 뽐내며 팀의 공격적인 하키 스타일을 완성했습니다.
이 드래프트의 대성공은 오일러스가 단숨에 우승 후보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1
[전통의 강호 몬트리올 격파]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전통의 명가 몬트리올 캔디언스를 상대로 충격적인 업셋을 달성했습니다. 젊은 오일러스 선수들이 보여준 패기는 북미 하키계에 지각 변동을 예고했습니다.
3전 전승으로 몬트리올을 스윕하며 리그 전체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 승리는 오일러스가 더 이상 신생팀이 아닌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전력임을 입증했습니다.
에드먼턴 전역은 이 승리로 인해 거대한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골텐더 그랜트 푸어 지명]
팀의 골문을 책임질 수호신 그랜트 푸어를 드래프트 전체 8순위로 선발했습니다. 푸어는 위기 상황에서 놀라운 선방을 보여주며 왕조 건설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었습니다.
그랜트 푸어는 흑인 선수로서 NHL 골텐더 잔혹사를 끊어낸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빠른 반사신경과 담력으로 플레이오프 같은 큰 경기에서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푸어의 활약 덕분에 오일러스의 공격진은 마음 놓고 전방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1982
[정규 시즌 첫 100승점 달성]
창단 후 처음으로 정규 시즌 승점 100점을 돌파하며 리그 최강팀 중 하나로 공인받았습니다. 웨인 그레츠키는 이 시즌에 무려 92골을 몰아넣으며 전무후무한 기록을 작성했습니다.
한 시즌 92골 기록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NHL 역사상 최고의 단일 시즌 기록입니다.
팀 전체가 화력 쇼를 선보이며 경기당 평균 5골 이상을 기록하는 가공할 공격력을 뽐냈습니다.
비록 플레이오프에서는 탈락했지만, 오일러스 하키의 전성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렸습니다.
1983
[첫 스탠리 컵 결승 진출]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스탠리 컵 결승 무대에 올랐습니다. 당시 4연속 우승을 노리던 뉴욕 아일랜더스를 상대로 패배하며 고배를 마셨지만, 우승을 위한 귀중한 교훈을 얻은 시기였습니다.
결승전에서 아일랜더스의 노련한 수비에 막혀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패배했습니다.
웨인 그레츠키는 패배 후 아일랜더스 라커룸 앞을 지나가며 그들의 우승 축하 방식에서 진정한 챔피언의 자세를 배웠다고 회고했습니다.
이 실패는 이듬해 오일러스가 완벽한 우승팀으로 거듭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84
[최초의 스탠리 컵 우승 달성]
뉴욕 아일랜더스를 다시 만난 결승전에서 승리하며 마침내 구단 역사상 첫 스탠리 컵을 들어 올렸습니다. 아일랜더스의 5연속 우승을 저지함과 동시에 오일러스 왕조의 시작을 전 세계에 선포했습니다.
결승 시리즈에서 4승 1패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에드먼턴 시대를 열었습니다.
마크 메시에가 플레이오프 MVP인 코너 스마이스 트로피를 차지하며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에드먼턴 시내에는 수만 명의 팬이 쏟아져 나와 창단 첫 우승을 축하하는 카퍼레이드를 벌였습니다.
1985
[스탠리 컵 2연패 위업 달성]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를 꺾고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명실상부한 북미 최강의 팀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웨인 그레츠키는 플레이오프 역대 최다 포인트 기록을 갈아치우며 MVP를 차지했습니다.
결승 시리즈에서 단 1패만을 허용한 채 완벽한 경기력을 선보였습니다.
웨인 그레츠키는 플레이오프 18경기에서 47포인트를 기록하는 경이로운 활약을 펼쳤습니다.
이 우승으로 인해 전문가들은 오일러스를 몬트리올 왕조에 필적하는 팀으로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1986
[정규 시즌 최다 승 및 트로피 석권]
정규 시즌 동안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며 NHL 사상 첫 프레지던츠 트로피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비록 플레이오프에서는 불운하게 탈락했지만, 팀의 전력은 역대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 시즌 56승을 기록하며 정규 리그를 완전히 지배했습니다.
웨인 그레츠키는 215포인트라는 믿기 힘든 기록을 세우며 자신의 한계를 다시 한번 넘어섰습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지역 라이벌 캘거리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며 3연패 달성에는 실패했습니다.
1987
[세 번째 스탠리 컵 우승]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와의 치열한 7차전 승부 끝에 다시 한번 우승 트로피를 되찾아왔습니다. 역대 결승전 중 가장 수준 높은 경기로 평가받는 시리즈에서 오일러스의 저력이 빛났습니다.
7차전까지 가는 혈투 속에서 그랜트 푸어의 눈부신 선방이 팀을 구했습니다.
이 우승으로 오일러스는 4년 동안 3번의 우승을 차지하는 압도적인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팀 내 7명의 선수가 시즌 20골 이상을 기록할 만큼 완벽한 팀워크를 자랑했습니다.
1988
[네 번째 스탠리 컵 우승]
보스턴 브루인스를 상대로 스윕 승리를 거두며 4번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 우승은 '황제' 웨인 그레츠키가 오일러스 유니폼을 입고 거둔 마지막 우승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결승전 도중 정전 사태로 경기가 중단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웨인 그레츠키는 플레이오프 내내 압도적인 기량으로 팀을 이끌며 두 번째 코너 스마이스 트로피를 차지했습니다.
당시 오일러스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하키의 신계를 구축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웨인 그레츠키 충격의 트레이드]
캐나다 전역을 충격에 빠뜨린 웨인 그레츠키의 로스앤젤레스 킹스 트레이드가 단행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스포츠 역사상 가장 비중 있는 거래로 불리며 에드먼턴 팬들의 통곡을 자아냈습니다.
구단주 피터 포클링턴은 막대한 현금과 유망주를 받는 대가로 팀의 상징인 그레츠키를 팔았습니다.
캐나다 국회에서는 그레츠키의 트레이드를 국가적 자산 유출로 규정하고 저지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습니다.
그레츠키는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며 에드먼턴 팬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넸습니다.
1989
[알 해밀턴 영구 결번 헌액]
구단 역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수비수 알 해밀턴의 등번호 3번이 선정되었습니다. WHA 시절부터 팀의 기틀을 다진 전설적인 주장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습니다.
알 해밀턴은 팀의 창단 멤버로서 척박했던 초기 환경을 이끈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그의 결번식은 노스랜즈 콜리세움을 가득 메운 팬들의 기립박수 속에 거행되었습니다.
이후 오일러스는 팀에 헌신한 전설들의 번호를 하나씩 영구 결번하기 시작했습니다.
1990
[그레츠키 없는 다섯 번째 우승]
그레츠키가 떠난 지 2년 만에 보스턴 브루인스를 꺾고 통산 5번째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마크 메시에를 필두로 한 나머지 전설들이 힘을 합쳐 '그레츠키 없이는 우승할 수 없다'는 세간의 편견을 깨뜨렸습니다.
빌 레이니 감독의 지휘 아래 팀은 더욱 끈끈한 수비와 조직력을 선보였습니다.
골텐더 빌 랜포드가 눈부신 활약으로 플레이오프 MVP를 차지하며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이 우승은 오일러스가 단순히 한 명의 스타에 의존하는 팀이 아닌 진정한 명문 구단임을 증명했습니다.
1991
[캡틴 마크 메시에의 이적]
팀의 두 번째 정신적 지주였던 마크 메시에가 뉴욕 레인저스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왕조를 이끌던 핵심 멤버들이 하나둘 떠나가며 오일러스의 화려했던 전성기가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메시에는 우승권 팀으로의 이적을 원했고, 결국 뉴욕으로 떠나 그곳에서도 우승을 일궈냈습니다.
이후 야리 쿠리, 글렌 앤더슨 등 우승 멤버들이 차례로 팀을 떠나며 세대교체의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에드먼턴은 오랜 기간 팀을 지탱했던 영웅들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1996
[팀 이전 위기와 팬들의 사수]
재정난에 빠진 구단주가 팀을 미국으로 이전하려 하자 에드먼턴 시민들과 비즈니스 그룹이 힘을 합쳐 이를 저지했습니다. 하키 팀이 단순한 스포츠 구단을 넘어 도시의 영혼임을 확인한 사건이었습니다.
빌 헌터 전 구단주와 지역 사업가들이 중심이 되어 '에드먼턴 인베스터스 그룹'을 결성했습니다.
그들은 시민 펀드와 후원금을 모아 팀이 에드먼턴에 남을 수 있도록 매각 대금을 마련했습니다.
이 사건은 에드먼턴 오일러스가 팬들에 의해 지켜진 '시민 구단'적 성격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1997
[댈러스 상대 극적 업셋 달성]
전력이 월등히 앞선 댈러스 스타즈를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꺾으며 '기적의 오일러스'를 연출했습니다. 암흑기 속에서도 오일러스 특유의 투지가 살아있음을 보여준 명경기였습니다.
토드 마샹이 7차전 연장전에서 기록한 골은 구단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로 꼽힙니다.
객관적인 전력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며 에드먼턴 팬들에게 다시 우승의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승리는 90년대 후반 오일러스가 리빌딩 과정에서 겪은 가장 화려한 장면이었습니다.
1998
[에드먼턴 인베스터스 그룹 인수]
지역 기업가 37명이 모인 에드먼턴 인베스터스 그룹이 구단 인수를 확정하며 안정적인 운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특정 개인의 소유가 아닌 지역 공동체의 소유라는 독특한 구조로 전환되었습니다.
EIG는 팀의 연고지 이전을 막기 위해 결성된 조직으로, 안정적인 재정 확보에 힘썼습니다.
이들은 하키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바탕으로 구단을 운영하며 에드먼턴 하키의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이 경영 구조는 2008년 대릴 카츠가 인수하기 전까지 약 10년간 유지되었습니다.
1999
[웨인 그레츠키 NHL 전체 결번]
웨인 그레츠키의 등번호 99번이 에드먼턴 오일러스뿐만 아니라 NHL 전 구단에서 영구 결번되는 유례없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오일러스는 그의 친정팀으로서 가장 성대한 결번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그레츠키의 번호는 하키라는 스포츠를 상징하는 숫자가 되어 그 누구도 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에드먼턴 경기장 앞에는 그의 우승 트로피를 든 동상이 세워져 전설을 기리고 있습니다.
팬들은 그가 비록 다른 팀에서 은퇴했어도 영원한 오일러스의 황제임을 인정했습니다.
2001
[야리 쿠리 영구 결번 헌액]
왕조의 핵심 날개였던 야리 쿠리의 등번호 17번이 영구 결번되었습니다. 핀란드 출신 최초의 NHL 전설로서 그가 오일러스에 기여한 공로를 공식적으로 기리는 자리였습니다.
야리 쿠리는 그레츠키의 패스를 골로 연결하는 데 있어 세계 최고의 실력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에드먼턴에서 보낸 10시즌 동안 팀의 5번의 우승을 모두 함께했습니다.
결번식에는 옛 동료들이 모두 모여 그의 헌신과 우정을 축하했습니다.
2003
[그랜트 푸어 영구 결번 헌액]
왕조의 수문장 그랜트 푸어의 등번호 31번이 영구 결번되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놀라운 선방을 보여주었던 그를 위한 최고의 예우가 노스랜즈 콜리세움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랜트 푸어는 오일러스에서만 200승 이상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을 수차례 사수했습니다.
그는 골텐더로서 경기장 분위기를 단숨에 바꾸는 능력을 가진 몇 안 되는 선수였습니다.
그의 번호가 천장에 걸리던 날 팬들은 오랜 시간 기립박수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최초의 실외 경기 헤리티지 클래식]
NHL 역사상 최초의 정규 시즌 실외 경기인 '헤리티지 클래식'을 커먼웰스 스타디움에서 개최했습니다. 영하 20도의 강추위 속에서도 5만 명 이상의 관중이 운집하여 하키의 근본을 되새겼습니다.
에드먼턴 오일러스와 몬트리올 캔디언스의 대결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습니다.
본 경기 전에는 옛 전설들이 모인 올드스타 경기가 열려 팬들의 향수를 자극했습니다.
이 성공적인 개최 이후 NHL은 매년 실외 경기를 여는 전통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2004
[폴 코피 영구 결번 헌액]
역대 가장 공격적인 수비수 중 한 명이었던 폴 코피의 등번호 7번이 영구 결번되었습니다. 오일러스의 속도 하키를 상징했던 그의 업적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행사가 거행되었습니다.
폴 코피는 수비수 단일 시즌 최다 골 기록(48골)을 오일러스 시절에 달성했습니다.
그의 스케이팅 능력은 당시 하키계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결번식에서 그는 에드먼턴에서의 시간이 자신의 경력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회상했습니다.
2005
[크리스 프랑글로 전격 영입]
리그 정상급 수비수인 크리스 프랑글로를 영입하며 다시 한번 대권 도전에 나섰습니다. 락아웃 종료 후 새로운 선수 급여 체계 하에서 단행된 이 대형 영입은 오일러스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프랑글로는 팀의 수비진을 지휘하며 2006년 플레이오프 신드롬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의 영입을 위해 오일러스는 유망주와 지명권을 아끼지 않는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했습니다.
이 선택은 이듬해 팀을 스탠리 컵 결승까지 이끄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2006
[8번 시드의 기적과 결승 진출]
서부 컨퍼런스 최하위 시드로 턱걸이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강호들을 차례로 격파하며 16년 만에 스탠리 컵 결승에 올랐습니다. 언더독의 반란으로 불리며 전 세계 하키 팬들의 응원을 받았습니다.
1라운드에서 리그 전체 1위였던 디트로이트 레드윙스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골텐더 드웨인 롤로슨의 신들린 선방은 팀을 결승 무대까지 견인했습니다.
캐롤라이나 허리케인스와의 결승 7차전 혈투 끝에 아쉽게 패했지만, 에드먼턴의 투지를 보여준 시즌이었습니다.
2007
[마크 메시에 영구 결번 헌액]
영원한 캡틴 마크 메시에의 등번호 11번이 영구 결번되었습니다. 그레츠키와 함께, 혹은 홀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그의 강력한 리더십에 존경을 표하는 성대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메시에는 결번식에서 옛 동료들과 팬들 앞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남겼습니다.
그의 번호는 웨인 그레츠키의 99번 옆에 나란히 걸리며 오일러스 왕조의 위엄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에드먼턴 시는 이날을 마크 메시에의 날로 선포하며 기렸습니다.
2008
[대릴 카츠의 구단 인수]
에드먼턴 출신의 억만장자 대릴 카츠가 EIG로부터 구단을 인수하여 단독 구단주가 되었습니다. 자금력을 갖춘 단일 구단주 체제로 전환되면서 팀의 현대화와 신축 경기장 건설 사업이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츠는 어린 시절부터 오일러스의 열성 팬이었으며, 팀이 영원히 에드먼턴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낙후된 기존 경기장을 대체할 도심형 복합 엔터테인먼트 지구 건설을 제안했습니다.
이 인수는 오일러스가 상업적으로 다시 강력한 구단으로 도약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2009
[글렌 앤더슨 영구 결번 헌액]
결정적인 순간마다 득점을 올렸던 '클러치 가이' 글렌 앤더슨의 등번호 9번이 영구 결번되었습니다. 왕조 시절 6번의 결승골을 터뜨렸던 그의 영웅적 활약이 영원히 박제되었습니다.
앤더슨은 빠른 속도와 저돌적인 문전 돌파로 상대 수비진을 뒤흔드는 선수였습니다.
그는 오일러스 소속으로 거둔 5번의 우승에 모두 핵심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그의 번호는 오일러스 황금기를 상징하는 8번째 영구 결번이 되었습니다.
2010
[테일러 홀 전체 1순위 지명]
성적 부진으로 얻은 구단 역사상 첫 전체 1순위 지명권을 활용해 테일러 홀을 선발했습니다. 오랜 침체기를 끊어내기 위한 '오일 리빌드' 프로젝트의 본격적인 시작이었습니다.
테일러 홀은 팀의 새로운 공격 핵심으로 기대를 모으며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이후 오일러스는 수년간 하위권에 머물며 연속으로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하는 고난의 시간을 겪었습니다.
비록 홀은 훗날 트레이드되었으나, 오일러스의 리빌딩 의지를 보여준 첫 번째 상징이었습니다.
2011
[라이언 뉴전트-홉킨스 지명]
2년 연속 전체 1순위 지명권을 얻어 지능적인 센터 라이언 뉴전트-홉킨스를 선발했습니다. 그는 훗날 팀의 최장수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장하여 묵묵히 팀을 지키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데뷔 초부터 뛰어난 패스 감각과 수비 공헌도로 팀의 핵심 전력이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동료가 팀을 떠날 때도 에드먼턴에 남아 1,000경기 가까이 소화하는 충성심을 보였습니다.
현재까지도 맥데이비드, 드라이자이틀과 함께 팀의 리더 그룹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2012
[네일 야쿠포프 전체 1순위 지명]
NHL 역사상 드문 3년 연속 전체 1순위 지명의 행운을 안으며 러시아 출신의 윙어 야쿠포프를 선발했습니다. 화려한 공격력을 기대했으나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며 리빌딩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야쿠포프는 데뷔 첫 경기에서 화려한 골 셀레브레이션으로 팬들을 열광시켰습니다.
그러나 리그 적응과 부상 등으로 인해 점차 팀 내 비중이 줄어드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 시기는 오일러스가 상위권 도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한지 보여준 사례가 되었습니다.
2014
[리언 드라이자이틀 지명]
독일 출신의 괴물 센터 리언 드라이자이틀을 전체 3순위로 지명했습니다. 압도적인 피지컬과 정교한 패스 능력을 갖춘 그는 훗날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드라이자이틀은 초기 적응기를 거친 뒤 리그를 대표하는 득점 기계로 변모했습니다.
그는 독일 출신 최초로 NHL MVP와 득점왕을 차지하는 역사적인 기록을 썼습니다.
맥데이비드와 함께 결성한 원투펀치는 현대 하키에서 가장 위협적인 조합으로 평가받습니다.
2015
[코너 맥데이비드 전체 1순위 지명]
하키계의 새로운 구원자로 불리는 코너 맥데이비드를 전체 1순위로 지명했습니다. 그레츠키 이후 최고의 재능으로 평가받는 맥데이비드의 합류로 오일러스의 역사는 다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맥데이비드는 압도적인 스피드와 기술로 데뷔하자마자 리그의 지형을 바꿨습니다.
그의 합류로 인해 에드먼턴은 다시 전 세계 팬들의 주목을 받는 인기 구단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주장 완장을 차며 팀을 재건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았습니다.
2016
[렉솔 플레이스 고별 경기]
42년 동안 팀의 터전이었던 렉솔 플레이스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렀습니다. 80년대 왕조의 영광이 깃든 경기장을 떠나보내며 수많은 전설과 팬들이 한자리에 모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벤쿠버 카넉스를 상대로 6-2 대승을 거두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경기 후에는 웨인 그레츠키를 포함한 역대 전설들이 은반 위에 다시 모이는 장엄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곳에서 거둔 5번의 스탠리 컵 우승기는 새로운 경기장으로 이전하기 위해 소중히 보관되었습니다.
[최첨단 구장 로저스 플레이스 개장]
에드먼턴 도심의 지형을 바꾼 최첨단 경기장 로저스 플레이스가 문을 열었습니다. 북미에서 가장 화려하고 시설이 뛰어난 하키 구장으로서 오일러스의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경기장 주변은 '아이스 디스트릭트'라는 거대한 상업 및 주거 복합 단지로 개발되었습니다.
거대한 전광판과 쾌적한 좌석 시설은 팬들에게 최상의 관람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맥데이비드 시대의 본격적인 서막이 이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017
[맥데이비드 하트 트로피 수상]
코너 맥데이비드가 리그 MVP인 하트 트로피와 선수들이 선정한 최고 선수상인 테드 린지상을 동시 석권했습니다. 20세의 나이에 리그 최고의 선수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맥데이비드는 그레츠키 이후 가장 어린 나이에 MVP를 차지한 오일러스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화려한 플레이는 매일 밤 하이라이트 영상을 장식하며 하키 팬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이 수상은 오일러스 리빌딩이 성공적으로 안착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2019
[켄 홀랜드 단장 부임]
디트로이트 왕조를 구축했던 명단장 켄 홀랜드가 오일러스의 수뇌부로 합류했습니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어수선했던 조직력을 정비하고 본격적인 우승 도전을 위한 전력을 보강하기 시작했습니다.
홀랜드 단장은 취약했던 수비진과 골텐더 포지션을 보완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는 베테랑 선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젊은 스타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렸습니다.
이후 오일러스는 매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꾸준한 강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2020
[리언 드라이자이틀 MVP 석권]
리언 드라이자이틀이 하트 트로피와 아트 로스 트로피(득점왕)를 차지하며 세계 최고의 센터로 등극했습니다. 맥데이비드가 부상으로 주춤할 때 팀을 이끌며 자신의 진가를 확실히 증명했습니다.
독일 출신 선수로서는 최초로 NHL 주요 개인 타이틀을 휩쓰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의 정교한 백핸드 패스와 결정력은 리그에서 독보적인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이로써 오일러스는 두 명의 MVP를 보유한 유일한 구단으로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021
[케빈 로우 영구 결번 헌액]
팀의 창단 첫 득점자이자 우승 멤버인 케빈 로우의 등번호 4번이 영구 결번되었습니다. 선수, 감독, 단장을 거치며 평생을 오일러스에 헌신한 그의 노고를 기리는 성대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케빈 로우는 수비수로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팀을 위한 헌신적인 플레이의 표본이었습니다.
그는 오일러스에서 거둔 5번의 우승에 모두 직접 참여한 몇 안 되는 인물입니다.
그의 결번으로 오일러스의 80년대 황금기는 완벽하게 예우 받게 되었습니다.
2022
[서부 컨퍼런스 결승 진출]
지역 라이벌 캘거리 플레임스와의 '알버타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16년 만에 컨퍼런스 결승에 올랐습니다. 맥데이비드와 드라이자이틀이 플레이오프 역대급 기록을 쏟아내며 팀을 이끌었습니다.
캘거리와의 시리즈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화력은 팬들에게 옛 영광을 상기시켰습니다.
비록 콜로라도에게 패해 탈락했지만, 우승권에 근접했음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에드먼턴 도심의 아이스 디스트릭트에는 수만 명의 팬이 모여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습니다.
2024
[18년 만의 스탠리 컵 결승 진출]
압도적인 저력으로 서부 컨퍼런스를 정복하고 마침내 스탠리 컵 결승 무대에 다시 섰습니다. 플로리다 팬서스와의 7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아쉽게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오일러스 하키의 화려한 부활을 알린 시즌이었습니다.
결승 시리즈에서 3연패 뒤 3연승을 거두는 기적 같은 추격전을 선보여 전 세계 하키 팬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캐나다 팀으로서 31년 만의 우승을 노렸던 이 도전은 캐나다 전역의 응원을 받았습니다.
팀은 비록 패배했으나 차기 시즌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맥데이비드 코너 스마이스 수상]
팀의 준우승에도 불구하고 코너 맥데이비드가 플레이오프 MVP인 코너 스마이스 트로피를 수상했습니다. 패배한 팀 선수로서 이 상을 받은 것은 NHL 역사상 5번째이자 스케이터로서는 48년 만의 대기록입니다.
맥데이비드는 플레이오프 한 시즌 최다 어시스트 기록(34개)을 갈아치우며 웨인 그레츠키의 기록을 넘었습니다.
그는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이번 플레이오프에서 가장 압도적인 선수였음을 인정받았습니다.
시상식에서 그는 트로피 수령을 거부하고 동료들과 슬픔을 나누며 진정한 주장의 품격을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