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키 스튜어트
카레이서, 레이싱 팀 구단주, 스포츠 해설가, 안전 활동가, 사업가
최근 수정 시각 : 2026-01-15- 16:53:37
재키 스튜어트 경(Sir Jackie Stewart)은 포뮬러 원(F1)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드라이버 중 한 명이자, 모터스포츠의 안전 기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혁명가입니다. '플라잉 스코트(Flying Scot)'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1969년, 1971년, 1973년 세 차례에 걸쳐 월드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그는 단순한 속도의 경쟁을 넘어, 동료 드라이버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 캠페인을 주도하여 서킷의 안전 펜스, 의료 시설, 풀페이스 헬멧 도입 등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은퇴 후에도 스포츠 해설가, 포드 모터 컴퍼니의 고문,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딴 '스튜어트 그랑프리' 팀의 구단주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갔으며, 현재는 아내의 투병을 계기로 치매 연구 기금인 'Race Against Dementia'를 설립하여 인류애를 실천하고 있는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1939
[스코틀랜드 밀턴에서의 탄생]
영국 스코틀랜드 던바턴셔의 밀턴(Milton) 지역에서 존 영 스튜어트(John Young Stewart)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자동차와 깊은 인연이 있었으며, 아버지는 오스틴(Austin) 자동차 딜러십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형 지미 스튜어트(Jimmy Stewart) 또한 훗날 카레이서로 활동하며 재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전쟁 직전의 혼란기 속에서 자동차 정비와 판매가 이루어지는 환경 속에서 유년 시절을 시작했습니다.
1944
어린 시절의 재키 스튜어트는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으나 그는 심각한 난독증을 앓고 있었으며, 이는 그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공부보다는 신체적인 활동이나 기계적인 장치들에 더 관심을 보이며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1
난독증으로 인한 읽기 및 쓰기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교사들로부터 지적 능력이 낮다는 오해를 자주 받았습니다.
이 시기 그는 지적 성취보다는 스포츠와 사격 분야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 노력했습니다.
학교 교육 시스템은 그에게 매우 가혹했으며, 이는 그가 훗날 난독증 인식 개선 활동에 투신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1954
학교를 그만둔 후 그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문 소유의 '덤벅 가라지(Dumbuck Garage)'에서 견습 정비사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자동차 엔진을 만지며 기계적 원리를 몸소 익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학업에서는 실패했으나 자동차를 다루는 현장 기술은 그의 레이싱 경력에 막대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1958
[클레이 피전 사격 선수 활동]
레이싱 선수가 되기 전, 클레이 피전 사격(Clay Pigeon Shooting) 선수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사격 분야에서 뛰어난 집중력을 발휘하며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활약했습니다.
영국 챔피언십과 유럽 대회 등 여러 권위 있는 대회에서 우승하며 스포츠인으로서의 자질을 입증했습니다.
사격을 통해 익힌 고도의 집중력과 반사 신경은 훗날 레이싱 서킷 위에서도 큰 장점이 되었습니다.
1960
최종 선발 과정에서 미세한 차이로 올림픽 본선행 티켓을 놓치는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사격 선수로서의 정점을 꿈꿨던 그에게 이 실패는 다른 길을 모색하게 하는 강력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올림픽 탈락 이후 그는 형의 권유와 주변의 제안으로 자동차 경주에 대한 관심을 본격화했습니다.
1961
[레이싱 경력의 비공식 시작]
배리 파일러(Barry Filer)의 제안으로 울튼 파크(Oulton Park)에서 레이싱 카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A.N. Other'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비밀리에 주행 테스트에 참여했습니다.
테스트 결과 이미 현역 드라이버들을 압도하는 랩타임을 기록하며 천재적인 재능을 드러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지역 레이싱 팀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며 공식 데뷔를 준비하게 됩니다.
1962
[헬렌 맥그리거와 결혼]
오랜 연인인 헬렌 맥그리거(Helen McGregor)와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렸습니다.
헬렌은 재키의 전성기 시절 모든 경기를 함께 다니며 그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두 사람은 슬하에 마크와 폴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으며, 레이싱계의 대표적인 잉꼬부부로 불렸습니다.
결혼 이후 안정된 심리 상태는 그가 본격적인 프로 레이서의 길로 나아가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1963
[에퀴리 에코스 팀 합류]
스코틀랜드의 유명 레이싱 팀인 '에퀴리 에코스(Ecurie Ecosse)'에 합류하여 쿠퍼 T49 등을 운전했습니다.
팀 합류 이후 여러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영국 내 미디어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강력한 속도와 더불어 자동차의 기계적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드라이빙 스타일을 구축했습니다.
이 시기의 활약은 켄 티렐(Ken Tyrrell) 감독의 눈에 띄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4
비가 내리는 가혹한 환경에서도 압도적인 격차로 승리하며 '빗속의 제왕'이라는 칭호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모나코 F3 그랑프리에서의 우승은 F1 팀들의 스카우트 전쟁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하위 카테고리에서는 더 이상 상대가 없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켄 티렐과의 역사적 만남]
켄 티렐의 포뮬러 3(F3) 팀 입단 테스트를 위해 굿우드(Goodwood) 서킷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주전 드라이버였던 브루스 맥라렌보다 빠른 랩타임을 기록하여 현장에 있던 관계자들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티렐은 즉석에서 그에게 계약을 제안했으며, 이는 두 사람의 전설적인 파트너십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레이싱 역사상 가장 강력한 '사제지간'으로 불리며 수많은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F1 로터스 테스트 및 BRM 계약]
로터스(Lotus)와 BRM 등 명문 F1 팀들의 테스트 제안을 받고 BRM 팀과 정식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콜린 채프먼의 로터스 팀은 그를 영입하려 했으나, 재키는 그래험 힐이 있는 BRM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선배 드라이버로부터 배울 수 있는 환경을 선호했으며, 이는 매우 현명한 경력 관리로 평가받습니다.
신인으로서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맺으며 화려한 F1 입성을 예고했습니다.
1965
첫 경기에서 6위를 기록하며 포인트를 획득하는 인상적인 데뷔 성적을 남겼습니다.
데뷔 초부터 기성 드라이버들과 대등한 경쟁을 펼치며 '신동'의 등장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BRM 팀의 주축 선수로 빠르게 성장하며 팀 동료 그래험 힐과 강력한 경쟁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모나코 그랑프리 첫 포디움]
가장 까다로운 코스로 알려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3위를 차지하며 첫 포디움에 올랐습니다.
좁고 굽이진 시가지를 완벽한 차체 제어 능력으로 통과하며 상위권에 안착했습니다.
이 성적을 통해 그가 단순한 속도뿐만 아니라 고도의 테크닉을 겸비했음을 증명했습니다.
당시 챔피언이었던 짐 클라크 등과 나란히 서며 차세대 월드 챔피언 후보로 부상했습니다.
[이탈리아 그랑프리 첫 승리]
몬차(Monza) 서킷에서 열린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구단 역사와 자신의 인생 첫 F1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격렬한 추월전 끝에 팀 동료 그래험 힐을 꺾고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습니다.
데뷔 시즌에 그랑프리 우승을 달성하며 F1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루키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우승으로 그는 시즌 종합 3위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첫해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1966
드라이버들에게 풀페이스 헬멧 착용과 안전벨트 사용을 강력히 권고하고 실천했습니다.
경주차의 탈부착식 스티어링 휠 개발과 서킷 내 의료 시설 확충을 위해 구단주들을 압박했습니다.
당시 레이싱 관계자들은 그를 겁쟁이라고 비난했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안전의 중요성을 전파했습니다.
BRM P261 경주차로 완벽한 레이스를 펼치며 모나코의 복잡한 서킷을 지배했습니다.
모나코에서의 우승은 그가 세계 최고의 정교함을 가진 드라이버임을 다시 한번 확립시켜 주었습니다.
이 시기 그는 단순히 빠른 선수를 넘어 레이싱의 전략을 이해하는 드라이버로 진화했습니다.
[인디애나폴리스 500 데뷔]
미국의 전설적인 경주인 인디 500에 처음 출전하여 레이스 종료 직전까지 압도적인 리드를 유지했습니다.
경주 종료 8바퀴를 남기고 오일 압력 문제로 멈춰 서기 전까지 150바퀴 이상을 선두로 달렸습니다.
비록 우승은 놓쳤으나 6위를 기록하며 '올해의 루키(Rookie of the Year)'에 선정되었습니다.
대서양 건너 미국 레이싱 팬들에게도 자신의 이름과 실력을 강렬하게 각인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스파-프랑코샹에서의 대형 사고]
벨기에 그랑프리 도중 폭우 속에서 시속 266km의 속도로 충돌하여 차체에 갇히는 대형 사고를 당했습니다.
경주차가 전복되고 연료가 새어 나오는 상황에서 갈비뼈와 어깨가 골절된 채 25분간 갇혀 있었습니다.
당시 서킷에는 적절한 의료진이나 구급차도 부족했으며, 동료 드라이버들이 그를 구출해야 했습니다.
이 사고는 그가 이후 평생을 바치게 될 '모터스포츠 안전 캠페인'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1967
[BRM H16 엔진의 시련]
신뢰성이 낮고 무거운 BRM H16 엔진 장착 경주차로 인해 성적 부진과 리타이어를 반복했습니다.
팀의 기술적 선택이 실패하면서 1967년 시즌에는 단 한 번의 포디움(벨기에 2위)만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기량으로도 기계적 결함을 극복하기 어려웠던 고통스러운 한 해였습니다.
이 시기의 좌절은 그가 켄 티렐과 다시 손잡고 새로운 팀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하게 만들었습니다.
1968
프랑스의 마트라 차체와 영국의 포드 코스워스(Ford-Cosworth) 엔진의 결합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이적 첫해에 네덜란드, 독일, 미국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전성기 기량을 회복했습니다.
비록 부상으로 일부 경기를 결장했으나 시즌 준우승을 차지하며 챔피언 탈환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독일 뉘르부르크링의 전설적 우승]
짙은 안개와 폭우가 쏟아지는 '그린 헬(Green Hell)'에서 2위와 4분 이상의 격차로 우승하는 기적을 선보였습니다.
손목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에서도 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는 서킷을 미친 듯한 속도로 달렸습니다.
F1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드라이빙 중 하나로 손꼽히며 그의 천재적인 감각이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레이스 직후 그는 뉘르부르크링 서킷을 '녹색 지옥'이라고 명명하며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1969
[첫 번째 월드 챔피언 등극]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1969년 시즌 F1 월드 드라이버 챔피언십 우승을 확정 지었습니다.
마트라 MS80 경주차를 몰고 시즌 11개 경기 중 6승을 거두는 압도적인 기록을 세웠습니다.
프랑스 차체 팀이 월드 챔피언을 차지한 역사상 유일한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그의 첫 타이틀은 단순한 속도뿐만 아니라 켄 티렐과의 유기적인 협력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1970
[마치(March) 팀 이적 및 티렐의 제작 선언]
마트라와의 결별 후 마치 701 섀시를 이용해 경주에 참여했으나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외부 섀시의 한계를 느낀 켄 티렐은 비밀리에 자신들만의 경주차인 '티렐 001'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재키는 개발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며 드라이버의 관점에서 차량의 성능을 최적화했습니다.
이 시기의 고군분투는 훗날 티렐 팀이 독립적인 제작사로 성공하는 중요한 과도기가 되었습니다.
1971
레이싱 성적뿐만 아니라 안전 활동가로서 서킷의 문화를 바꾼 사회적 공헌이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스포츠 스타로서 국가적 영웅의 지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그의 수상은 모터스포츠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국가적 자부심이 되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두 번째 월드 챔피언 등극]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 2위를 차지하며 통산 두 번째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직접 제작한 티렐 003 경주차로 시즌 6승을 거두며 경쟁자들을 완벽하게 따돌렸습니다.
공기 역학적인 프런트 윙 도입 등 기술적인 혁신을 레이스 성적으로 연결시켰습니다.
이 우승으로 재키 스튜어트는 1970년대 초반 F1의 명실상부한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1972
[위궤양 투병과 힘겨운 시즌]
심각한 위궤양(Stomach Ulcer) 증세로 인해 시즌 중반 일부 경기에 불참하며 컨디션 난조를 겪었습니다.
과도한 일정과 긴장감으로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복귀 이후 아르헨티나, 프랑스 등에서 승리하며 투혼을 발휘했습니다.
에머슨 피티팔디에게 챔피언 자리를 내주며 시즌 2위를 기록했으나 드라이빙 실력은 여전히 최정상이었습니다.
신체적 고통 속에서도 레이싱을 지속하며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혹독한 한 해를 보냈습니다.
1973
[세 번째 월드 챔피언 등극]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4위를 차지하며 통산 세 번째 월드 드라이버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타이어 펑크로 최하위까지 처졌으나 무려 15대 이상의 차를 추월하며 포인트를 따내는 신들린 레이스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우승으로 그는 짐 클라크가 보유했던 최다 우승 기록(25승)을 넘어 27승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습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명예롭게 물러날 준비를 마친 위대한 거장의 피날레 시즌이었습니다.
[프랑수아 세베르의 죽음과 은퇴 결심]
미국 그랑프리 예선 도중 자신의 후계자이자 절친한 동료인 프랑수아 세베르(François Cevert)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재키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고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원래 이 대회를 끝으로 은퇴할 계획을 비밀리에 세우고 있었으나, 사고 직후 마지막 100번째 레이스를 포기했습니다.
세베르의 죽음은 그가 평생을 바친 안전 캠페인의 당위성을 다시 한번 뼈아프게 확인시켜 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통산 99번의 그랑프리 출전, 27번의 우승, 43번의 포디움이라는 화려한 기록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생존 확률이 매우 낮았던 그 시절, 최고의 기량을 유지한 채 살아서 은퇴한 드문 사례가 되었습니다.
은퇴 이후 그는 레이싱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레이싱을 안전하게 바꾸는 역할로 전환했습니다.
1974
[ABC 스포츠 해설가 활동 시작]
미국의 ABC 방송사에서 '와이드 월드 오브 스포츠(Wide World of Sports)'의 해설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박식한 자동차 지식과 유려한 화술로 레이싱 중계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대중들에게 복잡한 레이싱 기술을 알기 쉽게 설명하며 미식축구와 야구 못지않은 인기를 이끌어냈습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스코틀랜드 억양과 지적인 이미지는 미국 시청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1976
레이싱뿐만 아니라 사격, 승마 등 자신이 경험한 스포츠 분야에서 깊이 있는 해설을 제공했습니다.
그의 방송 활동은 전문 스포츠인에서 대중적인 미디어 명사로 영역을 확장한 사례입니다.
에미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방송인으로서의 역량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80
[난독증 진단과 인식 개선 활동]
성인이 된 이후 비로소 자신이 난독증(Dyslexia)임을 공식 진단받고 이를 대중에게 공개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실패가 지능의 문제가 아닌 학습 장애였음을 깨닫고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이후 난독증 환자들을 위한 재단 지원과 교육 프로그램 홍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성공한 스포츠 스타가 자신의 취약점을 공개함으로써 수많은 난독증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1990
[국제 모터스포츠 명예의 전당 헌액]
레이싱 역사에 남긴 공로를 기려 국제 모터스포츠 명예의 전당(International Motorsports Hall of Fame)에 헌액되었습니다.
선수로서의 기록뿐만 아니라 안전에 대한 기여도가 헌액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전 세계 모터스포츠 전문가들로부터 시대를 초월한 거장으로 다시 한번 인정받았습니다.
이 시기 그는 은퇴 후에도 여전히 업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원로로 대우받았습니다.
1996
[스튜어트 그랑프리 팀 창단]
아들 폴 스튜어트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포뮬러 원 팀인 '스튜어트 그랑프리(Stewart Grand Prix)'를 창단했습니다.
포드(Ford) 모터 컴퍼니의 전폭적인 기술 지원을 받아 독립 제작사로서 F1 무대에 도전했습니다.
은퇴한 드라이버가 구단주로 변신하여 경쟁력 있는 팀을 만들어낸 드문 성공 사례입니다.
그는 드라이버 관리와 마케팅 분야에서 뛰어난 경영 능력을 발휘하며 팀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모터스포츠 발전뿐만 아니라 영국의 자선 활동과 대외 이미지 제고에 기여한 점이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작위를 받기 전 단계로서 그의 사회적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상징합니다.
그는 스포츠 스타를 넘어 국가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자 자선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97
[F1 팀 데뷔 및 첫 포디움]
팀 창단 첫해인 1997년 시즌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루벤스 바리첼로가 2위를 차지하며 기적 같은 포디움을 달성했습니다.
신생 팀으로서 첫해에 포디움에 오르는 것은 현대 F1 역사상 매우 드문 성과였습니다.
재키 스튜어트의 전략적 판단과 신인 드라이버의 패기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었습니다.
이 성적으로 인해 스튜어트 그랑프리 팀은 단숨에 중위권의 다크호스로 부상했습니다.
1999
[스튜어트 그랑프리의 첫 우승]
유럽 그랑프리에서 조니 허버트(Johnny Herbert)가 우승하며 팀 역사상 첫 승리이자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변화무쌍한 날씨 속에서 재키의 현역 시절 전술적 조언이 빛을 발하며 거둔 승리였습니다.
구단주로서 시상대 위에 올라 아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승리는 팀이 거대 자본인 포드에 매각되기 전 가장 화려한 정점의 순간이었습니다.
[팀 매각 및 재규어 레이싱 전환]
스튜어트 그랑프리 팀을 포드에 전격 매각하였고, 팀은 이후 '재규어 레이싱'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소규모 팀의 한계를 극복하고 팀의 미래 성장을 위해 대기업에 운영권을 넘기는 전략적 결단을 내렸습니다.
매각 이후에도 그는 재규어 레이싱과 포드 모터 컴퍼니의 명예 고문으로 활동하며 연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재규어 레이싱은 훗날 현재의 최강팀인 레드불 레이싱(Red Bull Racing)의 모태가 됩니다.
2001
[기사 작위 수여]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Knight Bachelor)를 수여받아 '재키 스튜어트 경'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스포츠 성적을 넘어 그의 안전 활동, 경영적 성공, 자선 활동 전체를 아우르는 최고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 스포츠인으로서 기사 작위를 받은 것은 매우 드문 일로 지역 사회의 큰 자랑이 되었습니다.
수여식에서 그는 자신의 명예를 전 세계 모터스포츠 안전을 위해 목숨을 잃은 동료들에게 돌렸습니다.
2002
실버스톤(Silverstone) 서킷의 발전과 영국 GP의 유지를 위해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정부 및 F1 관리 기구들과의 협상에서 영국 레이싱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BRDC는 더욱 체계적이고 영향력 있는 조직으로 성장했습니다.
2007
[자서전 'Winning Is Not Enough' 출간]
자신의 일생과 레이싱 철학을 담은 자서전 'Winning Is Not Enough'를 출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단순한 경기 기록이 아니라 난독증 극복 과정과 안전 캠페인에 대한 진솔한 고백을 담았습니다.
성공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고뇌와 두려움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 책은 스포츠 자서전의 수작으로 꼽히며 많은 젊은 선수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2008
[영국 그랑프리 60주년 기념 행사 주도]
영국 그랑프리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는 대규모 행사를 실버스톤에서 개최하고 직접 클래식카를 주행했습니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과거 자신의 챔피언십 경주차를 타고 트랙을 돌며 팬들과 소통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레이싱의 전설로서 팬들에게 향수와 감동을 동시에 선사했습니다.
행사를 통해 영국이 모터스포츠의 중심지임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2012
[롤렉스(Rolex) 글로벌 홍보대사 활동]
세계적인 시계 브랜드 롤렉스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명품 이미지의 대명사로 활동했습니다.
수십 년간 이어진 브랜드와의 신뢰 관계는 스포츠 마케팅의 전설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그는 롤렉스의 가치와 자신의 레이싱 철학인 정밀함, 우아함을 결합하여 홍보했습니다.
상업적인 활동을 넘어 브랜드의 역사적 증인으로서 다양한 글로벌 캠페인에 참여했습니다.
2016
[Race Against Dementia 재단 설립]
아내 헬렌 스튜어트 여사가 치매 진단을 받자,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글로벌 연구 재단을 직접 설립했습니다.
레이싱에서 혁신을 일구었듯, 치매 연구에도 F1의 빠른 의사결정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전 재산 중 상당 부분과 대대적인 모금 활동을 통해 젊은 과학자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아픔을 인류 공통의 과제 해결을 위한 에너지로 승화시킨 위대한 행보입니다.
2018
[뉘르부르크링 우승 50주년 기념]
1968년 전설적인 독일 그랑프리 우승 50주년을 맞아 해당 서킷에서 특별 헌정 행사를 가졌습니다.
당시 우승했던 마트라 MS10 차량과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되며 올드 팬들의 향수를 자극했습니다.
안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모던 서킷의 발전상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반세기가 지나도 변치 않는 그의 영향력과 레이싱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 자리였습니다.
2020
[코로나19 팬데믹 중 자선 활동]
팬데믹 상황에서도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치매 연구 기금 모금을 멈추지 않고 독려했습니다.
비대면 인터뷰와 소셜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여 사회적 소외 계층인 치매 환자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습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연구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시대적 위기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그의 열정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2023
미공개 영상과 인터뷰를 통해 레이서로서의 화려함 이면에 숨겨진 아픔과 고뇌를 조명했습니다.
특히 아내 헬렌과의 사랑 이야기와 안전을 위한 투쟁이 중점적으로 다뤄졌습니다.
살아있는 전설의 기록물로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었습니다.
2024
[현재까지 이어지는 인류애적 행보]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뮬러 원 패독을 방문하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루이스 해밀턴, 막스 베르스타펜 등 현역 드라이버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합니다.
'Race Against Dementia' 재단은 매년 가시적인 연구 성과를 내며 치매 정복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재키 스튜어트 경의 삶은 스포츠 스타가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교본으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