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럭셔리 브랜드, 패션 하우스, 가죽 제품 제조업체, 시계 및 주얼리 제조사
최근 수정 시각 : 2026-01-25- 16:31:24
1837년 파리의 작은 마구 제작소에서 시작된 에르메스는 6대를 이어온 장인 정신을 통해 세계 최고의 럭셔리 하우스로 거뚝 섰습니다. 마차의 시대에서 자동차의 시대로 변모하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에르메스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안장, 가방, 스카프 등 복제 불가능한 예술적 가치를 창조해냈습니다. 가족 경영의 전통을 지키며 타협하지 않는 품질을 추구해온 이들의 서사는 단순한 상업적 성공을 넘어, 전 세계 지성인과 예술가들이 선망하는 동시대적인 클래식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 에르메스 마구 작업장 설립
- 포부르 생토노레 24번지 이전
- 오아 쿠루아 가방 출시
- 지퍼 재킷 최초 제작
- 첫 여성용 핸드백 출시
- 싹 아 데페슈 출시
- 실크 스카프 '까레' 탄생
- 공식 로고 및 상표 등록
- 가방 이름을 '켈리'로 공식 변경
- 장 루이 뒤마 회장 취임
- 에르메스 '버킨백' 출시
- 파리 증권거래소 공식 상장
- 위대한 경영자 장 루이 뒤마 별세
- 악셀 뒤마 총괄 대표 취임
- LVMH와의 지분 분쟁 완전 종결
- PETA 악어 농장 학대 영상 폭로
- 애플워치 에르메스 에디션 발표
- 뷰티 라인 '루즈 에르메스' 공식 론칭
- 미국 소비자 반독점 집단소송 제기
- 미국 법원 반독점 소송 기각 판결
- 탐사매체 글리츠 고객 감시 시스템 폭로
1801
[티에리 에르메스 출생]
에르메스 가문의 시조인 티에리 에르메스가 독일 크레펠트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크레펠트는 프랑스 영토였으며, 그는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며 엄격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티에리 에르메스는 숙련된 피혁 가공 기술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의 가족은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을 피해 안정적인 정착지를 찾아 다녔습니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그에게 견고함과 품질에 대한 집요한 감각을 심어주었습니다.
1821
[파리 이주와 기술 습득]
청년 티에리 에르메스가 마구 제작 기술을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 파리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당대 최고의 장인들 밑에서 실력을 연마하며 가업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파리의 번화가에서 그는 귀족들의 마차에 들어가는 마구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말의 몸에 딱 맞는 안장과 굴레를 만드는 것은 고도의 정밀함을 요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는 수년간의 수습 과정을 통해 가죽을 다루는 독보적인 바느질 기법을 익혔습니다.
1828
[티에리 에르메스의 결혼]
티에리 에르메스가 크리스틴 페트로닐 피에라르와 결혼하여 파리에 가정을 꾸렸습니다. 이는 그가 프랑스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결혼 후 그는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자금을 성실히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내조는 그가 장인으로서의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이 시기 그는 파리 마구 업계에서 성실한 기술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1831
[샤를 에밀 에르메스 탄생]
티에리의 아들이자 훗날 가업을 크게 번창시킬 샤를 에밀 에르메스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가죽의 질감을 익히며 장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샤를 에밀은 아버지로부터 직접 엄격한 마구 제작 기술을 전수받았습니다. 그는 단순한 기술자를 넘어 사업가로서의 자질을 일찍부터 드러냈습니다. 에르메스 가문의 2대 경영자로서의 교육이 자연스럽게 시작된 시기였습니다.
1837
[에르메스 마구 작업장 설립]
티에리 에르메스가 파리 그랑 불바르 지역에 자신의 첫 마구 작업장을 개업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 에르메스의 공식적인 시작이 되었습니다.
설립 초기 에르메스의 고객들은 주로 파리의 상류층과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는 '새들 스티치'라 불리는 독특한 바느질 기법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품질에 대한 타협 없는 고집은 개업 초기부터 에르메스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1855
[파리 엑스포 첫 메달 수상]
에르메스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하여 마구 부문에서 우수한 품질을 공인받았습니다. 국제적인 무대에서 에르메스의 이름이 처음으로 빛난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박람회에서 선보인 마구들은 견고함과 우아함의 조화로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수상을 계기로 유럽 각국의 왕실에서 주문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에르메스는 단순한 작업장에서 전문 브랜드로의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1859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 탄생]
가문의 3대 경영자가 될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훗날 자동차 시대에 맞춰 에르메스를 현대적인 패션 하우스로 탈바꿈시키는 주역이 됩니다.
에밀 모리스는 가문의 유산인 장인 정신에 현대적 감각을 입히는 데 천부적이었습니다. 그는 여행 문화의 확산을 예견하고 제품군을 다각화하는 지혜를 보였습니다. 훗날 지퍼 기술을 도입하여 가죽 제품의 혁신을 이끈 인물이기도 합니다.
1867
[엑스포 1등 금메달 획득]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다시 한번 마구 부문 1등 금메달을 수상하며 독보적 지위를 굳혔습니다. 기술력에 있어서 경쟁자가 없음을 전 세계에 선포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금메달 수상 이후 에르메스는 프랑스 황실의 공식 납품업체로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작업 방식은 다른 장인들에게 표본이 될 정도로 정교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에르메스라는 이름은 최고의 품질과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1878
[창립자 티에리 에르메스 사망]
에르메스의 기틀을 닦은 창립자 티에리가 향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후 아들 샤를 에밀 에르메스가 가업을 온전히 승계하여 제2의 도약을 준비했습니다.
티에리는 가문 사람들에게 품질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유지를 남겼습니다. 그는 정직한 노동과 장인 정신이 브랜드의 유일한 생존법임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남긴 기술적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에르메스 제품 제작의 핵심 원칙입니다.
1880
[포부르 생토노레 24번지 이전]
샤를 에밀 에르메스가 현재 에르메스의 성지인 포부르 생토노레 24번지로 매장을 옮겼습니다. 이곳에 안착하며 귀족과 상류층 고객들과 더욱 밀착된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이 건물은 현재까지도 에르메스 그룹의 세계 본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매장 뒤편에 직접 작업장을 두어 제조와 판매를 동시에 수행하는 시스템을 확립했습니다. 이 위치 선정은 에르메스가 명실상부한 하이엔드 브랜드로 안착하는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1890
[해외 왕실 납품 확대]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를 포함한 유럽 각국 왕실에 마구를 납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에르메스의 명성이 프랑스 국경을 넘어 세계 최고임을 입증하는 증거였습니다.
러시아 황실은 가장 까다로운 품질 기준을 요구하는 고객 중 하나였습니다. 에르메스는 혹한의 기후에서도 견딜 수 있는 특수 가공 가죽 제품을 개발했습니다. 이 시기 매출의 상당 부분이 해외 왕실과 귀족들의 주문에서 발생했습니다.
1892
[오아 쿠루아 가방 출시]
기수들이 안장과 부츠를 넣고 다닐 수 있도록 고안된 대형 가방 '오아 쿠루아'를 선보였습니다. 이것은 에르메스 가죽 핸드백 역사의 실질적인 시초가 되는 모델입니다.
말을 타는 고객들의 실제적인 요구사항을 반영하여 내구성을 극대화한 디자인입니다. 가죽의 절단면을 다듬는 엣지 코트 기법이 이 가방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했습니다. 훗날 버킨백과 켈리백의 디자인적 모태가 되는 역사적인 모델로 평가받습니다.
1902
[에르메스 프레르 체제 출범]
샤를 에밀의 아들들인 아돌프와 에밀 모리스가 경영에 합류하며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형제 경영을 통해 브랜드의 규모를 키우고 본격적인 제품 다각화에 착수했습니다.
아돌프는 전통적인 마구 제작 부문을, 에밀 모리스는 새로운 시장 개척을 담당했습니다. 형제 경영 체제는 에르메스가 변화하는 시대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안장 외에도 여행용 가방 등 다양한 가죽 소품들이 제작되었습니다.
1914
[에밀 모리스의 미국 시찰]
에밀 모리스가 대량 생산과 신기술을 탐색하기 위해 미국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자동차 산업의 폭발적 성장을 목격하고 마구 시대의 종말을 예견했습니다.
미국의 자동차 산업 발전 속도를 보고 그는 안장 시장의 축소를 직감했습니다. 그는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액세서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에밀 모리스는 이 여행에서 지퍼라는 새로운 발명품을 목격하게 됩니다.
1918
[지퍼 재킷 최초 제작]
미국에서 들여온 지퍼 기술을 활용하여 세계 최초의 가죽 지퍼 재킷을 제작했습니다. 영국 왕세자 에드워드 8세를 위해 만든 이 옷은 패션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 지퍼는 아주 생소한 기술이었으며, 에르메스는 이를 패션에 도입한 선구자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지퍼는 프랑스에서 '에르메스 클로저'라는 이름으로 한동안 불렸습니다. 기술적 진보를 럭셔리에 녹여내는 에르메스 특유의 창의성이 빛난 순간이었습니다.
1919
[아돌프 에르메스의 은퇴]
공동 경영자였던 형 아돌프가 마구 시장의 쇠퇴를 우려하며 은퇴를 결정했습니다. 동생 에밀 모리스가 단독으로 경영권을 인수하여 가문의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돌프는 전통적인 마구 제작의 한계를 느끼고 경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에밀 모리스는 형의 지분을 모두 매입하여 공격적인 사업 확장을 꾀했습니다. 이는 에르메스가 마구 제작소에서 토털 패션 하우스로 변모하는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
1920
[가죽 의류 라인업 확장]
자동차 운전자와 스포츠 애호가들을 위한 가죽 의류 컬렉션을 대대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장갑, 모자, 코트 등 최고급 가죽으로 만든 의류들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마구 기술을 의류 제작에 응용하여 타 브랜드가 흉내 낼 수 없는 내구성을 자랑했습니다. 고객들은 에르메스의 가죽 의류를 입는 것을 현대적인 우아함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이 시기 에르메스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서의 초기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1922
[첫 여성용 핸드백 출시]
에밀 모리스가 아내를 위해 직접 디자인한 첫 번째 여성용 가죽 핸드백을 출시했습니다. 이것은 마구 고정 장치를 가방 잠금장치로 응용한 혁신적인 제품이었습니다.
기존의 오아 쿠루아 가방을 축소하여 일상에서 들 수 있는 크기로 제작했습니다. 여성 고객들은 에르메스 가방의 견고함과 기능적인 아름다움에 열광했습니다. 핸드백 시장의 진출은 에르메스 매출 구조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4
[뉴욕 지점 설립 및 해외 진출]
미국 뉴욕에 지점을 설립하며 본격적인 글로벌 시장 공략에 나섰습니다. 프랑스 휴양지인 칸과 비아리츠에도 매장을 열어 전 세계 부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해외 시장에서도 에르메스의 장인 정신은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여행 문화의 발달과 함께 에르메스의 여행용 가방과 소품 주문이 폭주했습니다. 브랜드의 국제적 인지도가 급상승하며 명품 하우스로서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1925
[남성 기성복 분야 진출]
가죽 재킷 외에도 남성들을 위한 기성복 라인을 처음으로 매장에 선보였습니다. 골프나 승마 등 사교 활동에 적합한 우아한 활동복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에르메스 의류는 최고급 소재와 절제된 디자인으로 '조용한 럭셔리'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당대 신사들은 에르메스의 옷을 입고 사교 활동을 즐기는 것을 품격으로 여겼습니다. 패션 하우스로서의 기틀이 이 시기에 단단해졌습니다.
1927
[시계 라인업 론칭]
에르메스 최초의 시계 제품들을 매장에 선보이며 액세서리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초기에는 스위스 제조사들과 협업하여 스트랩과 디자인을 완성했습니다.
가죽 스트랩의 품질은 기존 시계 브랜드들이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시계는 에르메스 고객들의 필수적인 액세서리로 빠르게 자리 잡았습니다. 훗날 독자적인 시계 제조 부문을 갖게 되는 긴 역사의 서막이었습니다.
1928
[주얼리 라인업 확장]
마구의 금속 부속품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은 주얼리 컬렉션을 출시했습니다. 팔찌와 목걸이 등에도 가죽과 금속의 조화가 강조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말의 재갈이나 고리 모양을 본뜬 디자인은 에르메스만의 독창적인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주얼리 부문은 여성 고객들에게 브랜드의 예술성을 각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단순한 장신구를 넘어 수집 가치가 있는 예술품으로 평가받기 시작했습니다.
1929
[여성 패션 컬렉션 발표]
파리에서 에르메스 이름으로 첫 여성 기성복 패션쇼를 개최했습니다. 세련된 승마복 스타일을 일상복으로 변주한 의상들이 전문가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여성용 승마 바지와 코트는 당대 여성들의 해방된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했습니다. 에르메스는 유행을 쫓기보다 유행을 만드는 브랜드로 인정받았습니다. 패션 중심지 파리에서 에르메스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1930
[유럽 전역 매장 확장]
영국 런던과 스페인 등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 거점 매장을 마련했습니다. 전 세계적인 대공황 속에서도 에르메스의 희소 가치는 상류층에게 유효했습니다.
위기 속에서도 품질에 대한 고집은 에르메스를 더욱 빛나게 했습니다. 각국의 왕실과 부호들이 에르메스의 단골 고객으로 확보되었습니다. 이 시기 에르메스는 국제적인 하이엔드 브랜드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굳혔습니다.
1935
[싹 아 데페슈 출시]
훗날 '켈리백'으로 불리게 될 사다리꼴 모양의 가방 '싹 아 데페슈'를 출시했습니다. 완벽한 비례와 우아한 잠금장치가 특징인 에르메스의 역작입니다.
출시 당시에는 세련된 서류 가방의 용도로 기획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이 이 가방의 우아함에 매료되면서 핸드백으로 더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에르메스 핸드백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주는 전설의 시작이었습니다.
1937
[실크 스카프 '까레' 탄생]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첫 실크 스카프 '쥬 드 옴니버스'를 출시했습니다. 고도의 프린팅 기술과 최고급 실크가 결합된 예술적인 제품이었습니다.
하나의 스카프를 만드는 데 수백 가지의 색상을 겹쳐 찍는 공정이 도입되었습니다. 스카프의 테두리를 손으로 직접 말아 박는 '룰로타주' 기법이 이때 확립되었습니다. 실크 스카프는 에르메스의 예술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캔버스가 되었습니다.
1938
[샹 달크르 팔찌 출시]
배의 닻줄 고리에서 영감을 받은 '샹 달크르' 팔찌를 처음으로 선보였습니다. 기하학적이고 균형 잡힌 링크 디자인은 주얼리 디자인의 혁신으로 꼽혔습니다.
로베르 뒤마가 해변을 산책하다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제품은 에르메스가 일상의 사물에서 예술적 영감을 찾는 감각을 증명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에르메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주얼리 라인 중 하나입니다.
1945
[공식 로고 및 상표 등록]
네 마리의 말과 마부, 듀크 마차가 그려진 공식 로고를 상표로 등록했습니다. 에르메스가 '준비된 마차'를 제공한다는 브랜드 철학을 담은 문장입니다.
로고 속 마차에는 주인이 타고 있지 않은데, 이는 고객이 직접 운전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상징합니다. 이 로고는 에르메스의 뿌리와 자부심을 상징하는 시각적 지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브랜드 상징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1946
[실크 넥타이 제작 시작]
실크 스카프 제작 노하우를 활용하여 남성용 넥타이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정교한 패턴과 화려한 색감으로 남성 패션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에르메스 넥타이는 특유의 중량감과 광택으로 성공한 남성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매 시즌 발표되는 독창적인 동물 패턴과 문양은 수집가들을 양산했습니다. 선물용으로 가장 선호되는 명품 아이템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습니다.
1949
[실크 넥타이 정규 컬렉션화]
넥타이 부문을 독립적인 정규 컬렉션으로 격상시키고 생산을 확대했습니다. 카지노 출입을 위해 넥타이가 필요했던 신사들의 요구에서 시작된 성공이었습니다.
넥타이는 에르메스 입문 아이템으로서 브랜드 접근성을 높여주었습니다. 정교한 실크 인쇄 기술은 모조품이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수준이었습니다. 비즈니스 현장에서 에르메스 넥타이는 하나의 신뢰를 상징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1950
[오렌지색 박스 표준화]
전쟁 물자 부족으로 선택했던 오렌지색 종이 박스가 브랜드의 상징으로 굳어졌습니다. 예상치 못한 색상이 에르메스만의 독보적인 시각적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원래 에르메스 박스는 베이지색이었으나 전쟁 중 해당 종이를 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임시로 사용한 오렌지색이 오히려 활기차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어 정식 채택되었습니다. 현재 이 오렌지색은 '오랑쥬 에르메스'라는 고유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1951
[첫 향수 '오 데르메스' 출시]
조향사 에드몽 루드니츠카와 협업하여 브랜드 최초의 향수를 선보였습니다. 가방 내부의 은은한 가죽 냄새를 모티브로 한 세련된 향기였습니다.
이 향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유니섹스 향을 지향했습니다. 후각을 통해 에르메스의 가죽 공예 전통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향수 사업은 훗날 에르메스 그룹의 핵심적인 한 축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 사망]
에르메스의 현대적 기틀을 마련한 3대 경영자 에밀 모리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위 로베르 뒤마가 가업을 이어받아 4대 경영 시대를 열었습니다.
로베르 뒤마는 창의적인 디자이너이자 철저한 관리자로서 에르메스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가문 내부의 결속력을 다지고 브랜드의 예술성을 한 단계 높였습니다. 이 시기 에르메스는 전통 유지와 현대적 혁신 사이의 완벽한 균형을 찾았습니다.
1956
[가방 이름을 '켈리'로 공식 변경]
그레이스 켈리 왕비가 든 사진이 화제가 되자 '싹 아 데페슈'를 '켈리'로 바꿨습니다.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브랜드 제품의 이름이 된 역사적인 사례입니다.
가방 이름의 변경은 고객들의 자발적인 부름에서 시작된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습니다. 켈리백은 기품 있는 여성들의 필수 아이템으로 등극하며 세계적인 품귀 현상을 빚었습니다. 이 사건은 에르메스가 신화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입니다.

1961
[향수 '깔레쉬' 출시]
에르메스 최초의 여성 전용 향수 '깔레쉬'를 시장에 선보였습니다. 로고 속의 마차 이름을 딴 이 향수는 클래식한 여성미를 강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꽃향기와 우디 향이 조화된 이 향수는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향수병 디자인 또한 에르메스 특유의 절제미가 돋보여 수집가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후 에르메스는 전문적인 조향 팀을 꾸려 독자적인 향수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1967
[여성복 아티스틱 디렉터 영입]
카트린 드 카롤리이를 영입하여 여성 기성복 컬렉션을 전면 개편했습니다. 실크 스카프 무늬를 의류에 접목하는 등 에르메스만의 스타일을 정립한 시기였습니다.
전통적인 승마복 요소를 현대적인 도심 패션으로 재해석하여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에르메스 기성복은 유행에 민감하지 않은 클래식한 가치를 제안했습니다. 고객들은 에르메스의 옷을 대를 물려 입을 수 있는 소중한 자산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1970
[본점 내부 대대적 리뉴얼]
포부르 생토노레 24번지 매장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고객들에게 더욱 쾌적하고 우아한 쇼핑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대규모 투자였습니다.
매장 내부 인테리어에 최고급 소재를 사용하여 브랜드의 품격을 시각화했습니다. 각 제품군이 돋보일 수 있도록 공간을 세분화하고 장인들의 정신을 곳곳에 담았습니다. 리뉴얼 이후 본점 방문객 수는 급증하였으며 파리의 명소로 확실히 자리 잡았습니다.
1971
[스카프 디자인의 예술성 강화]
로베르 뒤마가 직접 디자인에 참여하며 스카프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승격시켰습니다. 정교한 패턴과 화려한 색채 배합은 타 브랜드가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가 디자인한 패턴들은 오늘날까지도 복각되어 출시될 만큼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지닙니다. 예술가들과의 협업 시스템 또한 이 시기에 더욱 체계적으로 정립되었습니다. 스카프는 에르메스의 창의적 에너지가 분출되는 핵심 품목으로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1972
[스위스 시계 법인 설립]
스위스 비엘에 '라 몽트르 에르메스' 법인을 설립하고 시계 제작 전문성을 확보했습니다. 시계 제조의 성지인 스위스에 거점을 마련하여 본격적인 경쟁에 나섰습니다.
스위스의 시계 장인들과 프랑스의 가죽 장인들이 협력하는 독특한 구조를 갖췄습니다. 이후 에르메스는 자체 무브먼트 개발 등 기술적인 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시계는 에르메스의 정밀함과 예술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강력한 제품군이 되었습니다.
1973
[영국 런던 플래그십 오픈]
영국 런던에 독립적인 대형 매장을 열며 유럽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더욱 넓혔습니다.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 고객들에게 에르메스의 장인 정신은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영국 왕실과 귀족들이 에르메스의 단골 고객으로 확실히 확보되었습니다. 승마 문화가 발달한 영국의 특성은 에르메스의 뿌리와 잘 맞닿아 시너지를 냈습니다. 이후 런던 매장은 에르메스의 유럽 매출 성장의 핵심 기지가 되었습니다.
1974
[향수 '아마존' 출시]
자유롭고 모험적인 여성을 상징하는 새로운 향수 '아마존'을 선보였습니다. 기존의 우아함에 역동적인 매력을 더한 이 향수는 젊은 층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아마존 향수는 에르메스가 추구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마케팅 캠페인 역시 현대적이고 활동적인 이미지를 강조하여 브랜드 이미지를 쇄신했습니다. 이로써 에르메스 향수는 다양한 연령대의 팬덤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1976
[존 롭 파리 경영권 인수]
전설적인 맞춤 구두 브랜드 존 롭 파리를 인수하여 최고급 신발 부문을 강화했습니다. 장인 정신이 깃든 브랜드를 그룹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전문성을 극대화했습니다.
에르메스의 가죽 선정 기준이 존 롭의 구두 제작에도 적용되어 품질이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신발 부문은 에르메스 토털 룩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과 같았습니다. 존 롭의 인수는 에르메스가 단순히 가방 브랜드에 머물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습니다.
1977
[로베르 뒤마 사망]
에르메스의 예술적 지평을 넓힌 4대 경영자 로베르 뒤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후 아들 장 루이 뒤마가 경영권을 이어받아 위대한 혁신의 시대를 예고했습니다.
로베르 뒤마는 에르메스 스카프와 오렌지색 박스를 브랜드 상징으로 안착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예술가들과의 적극적인 협업을 통해 명품에 문화를 입히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의 경영 철학은 아들에게 계승되어 에르메스의 제2 전성기를 준비하게 됩니다.
1978
[장 루이 뒤마 회장 취임]
가문의 5대 경영자로 취임한 장 루이 뒤마가 본격적인 브랜드 현대화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전통에 갇혀있던 에르메스를 전 세계가 열광하는 트렌디한 브랜드로 바꿨습니다.
그는 취임 직후 파격적인 광고 캠페인을 도입하여 젊은 세대에게 다가갔습니다. 실크와 가죽 부문의 생산 시설을 현대화하고 유통망을 글로벌하게 확장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에르메스의 매출 규모는 수십 배로 성장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1979
[파격적 광고 캠페인 도입]
청바지를 입은 모델이 에르메스 스카프를 두른 파격적인 광고 사진을 발표했습니다. 보수적인 명품 브랜드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자유롭고 현대적인 감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광고는 패션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에르메스의 젊은 변신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프렌치 플레어'를 주제로 한 캠페인은 브랜드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장 루이 뒤마의 과감한 마케팅 전략이 시장에서 완벽하게 적중한 순간이었습니다.
1980
[일본 시장 본격 진출]
아시아 시장의 잠재력을 보고 일본에 대규모 매장을 열며 시장 공략을 시작했습니다. 일본 고객들의 품질에 대한 까다로운 기준은 에르메스의 철학과 잘 맞았습니다.
일본은 에르메스 전체 매출에서 비중이 매우 큰 핵심 시장으로 급부상했습니다. 정교한 장인 정신을 중시하는 일본 문화와 에르메스의 장인 정신이 시너지를 냈습니다. 이후 일본은 에르메스가 아시아 시장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거점이 되었습니다.
1982
[향수 전문 자회사 설립]
향수 부문의 전문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독립적인 자회사를 설립하고 투자를 늘렸습니다. 전문 조향사들과의 협업 시스템을 더욱 강화하여 품질을 높였습니다.
향수 개발 과정에 가죽 장인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등 부서 간 융합 연구를 꾀했습니다. 원료 선정부터 생산까지 전 과정을 에르메스가 직접 통제하여 독자성을 확보했습니다. 이후 에르메스 향수는 명품 향수의 표준을 제시하는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습니다.
1984
[전설적인 '버킨백' 탄생]
장 루이 뒤마가 비행기에서 만난 제인 버킨의 요청으로 실용적인 수납력을 갖춘 가방을 디자인했습니다.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소유하고 싶은 가방 '버킨백'의 시작입니다.
제인 버킨은 소지품이 많아도 편하게 들 수 있는 가방을 원했고 뒤마는 이를 경청했습니다. 버킨백은 자유분방하고 실용적인 스타일로 켈리백과는 또 다른 매력을 발산했습니다. 오늘날 버킨백은 전 세계 여성들에게 부와 지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86
[홍콩 경마 대회 후원]
홍콩에서 '에르메스 컵'이라는 경마 대회를 주최하며 브랜드의 뿌리를 알렸습니다. 아시아 시장에서의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 사교계와 유대감을 강화한 전략이었습니다.
이 대회를 통해 에르메스는 아시아 부유층 고객들과 강력한 정서적 연결을 맺었습니다. 브랜드의 역사적 배경인 승마 문화를 축제 형식으로 풀어내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매년 열리는 이 행사는 아시아 사교계의 가장 중요한 연례 이벤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87
[창립 150주년 기념 축제]
에르메스 창립 150주년을 맞아 파리 센 강에서 성대한 축제와 불꽃놀이를 열었습니다. 한 세기 반 동안 지켜온 가업과 장인 정신을 기리는 장엄한 행사였습니다.
150주년 기념 한정판 제품들이 출시되어 전 세계 수집가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장 루이 뒤마는 이 행사에서 에르메스의 미래 100년을 준비하는 비전을 발표했습니다. 전통과 혁신이 조화를 이루는 브랜드로서의 위상을 전 세계에 다시 한번 각인시켰습니다.
1989
[은식기 전문 업체 퓌포카 인수]
프랑스의 유서 깊은 실버웨어 제조사 퓌포카를 인수하여 홈 컬렉션을 대폭 보강했습니다. 고객의 식탁까지 에르메스의 미학으로 채우겠다는 야심 찬 확장 전략이었습니다.
퓌포카의 정교한 은공예 기술은 에르메스의 장인 중심주의와 완벽하게 일치했습니다. 장인들의 협업을 통해 가죽과 은이 결합된 혁신적인 오브제들이 탄생했습니다. 이 인수는 에르메스가 토털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진화하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1991
[중국 베이징 첫 매장 오픈]
중국 시장의 잠재력을 예견하고 베이징에 첫 번째 에르메스 매장을 개설했습니다. 중국 럭셔리 시장의 여명기에 선제적으로 진출하여 브랜드 우위를 점했습니다.
중국 고객들에게 에르메스의 역사와 장인 정신을 교육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중국 특유의 문화와 에르메스의 정체성을 결합한 다양한 문화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오늘날 중국은 에르메스 전체 매출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전략적 시장입니다.
1992
[팡탱 가죽 작업장 확장 정비]
파리 외곽 팡탱에 대규모 가죽 작업장을 새롭게 정비하고 확장했습니다. 급증하는 가죽 제품 수요에 대응하면서도 전통적인 장인 제작 방식을 지켜내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장인들이 최상의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설계된 건축미가 돋보이는 공간입니다. 가죽의 선별부터 재단, 바느질까지 모든 공정이 철저한 도제 시스템 아래 이루어집니다. 이곳은 전 세계 에르메스 가죽 장인들의 요람이자 기술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합니다.
1993
[파리 증권거래소 공식 상장]
에르메스가 기업공개를 단행하며 파리 증시에 상장되었습니다. 지분의 80% 이상을 가족들이 보유한다는 조건하에 투명한 경영과 자본 확충을 동시에 꾀했습니다.
거대 자본의 위협으로부터 가족 경영의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상장 이후 에르메스의 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하며 우량주 중의 우량주로 평가받았습니다. 확충된 자금은 전 세계 매장 네트워크 확장과 새로운 생산 거점 마련에 투입되었습니다.
1995
[크리스털 브랜드 생 루이 인수]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크리스털 제조사 생 루이를 인수하여 그룹 포트폴리오를 확장했습니다. 빛과 가죽, 실크가 조화를 이루는 에르메스만의 예술 영역을 구축했습니다.
생 루이의 정교한 컷팅 기술은 에르메스 홈 컬렉션에 화려함과 품격을 더했습니다. 장인들의 협업을 통해 탄생한 조명과 소품들은 럭셔리 인테리어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습니다. 에르메스는 이를 통해 프랑스의 전통 공예 예술을 보존하는 문화적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1997
[마르탱 마르지엘라 아티스틱 디렉터 영입]
전위적인 디자이너 마르탱 마르지엘라를 영입하여 여성복 부문에 혁신을 일으켰습니다. 보수적인 브랜드가 파격적인 디자이너를 영입한 것은 패션계의 큰 사건이었습니다.
마르지엘라는 로고를 드러내지 않고도 품격을 보여주는 지적인 미니멀리즘을 선보였습니다. 그가 디자인한 옷들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 '타임리스 럭셔리'의 정수였습니다. 이 시기 에르메스 여성복은 패션 전문가들 사이에서 최고의 예술적 찬사를 받았습니다.
2000
[뉴욕 매디슨가 메종 오픈]
미국 뉴욕의 매디슨 에비뉴에 대규모 플래그십 스토어인 '메종 에르메스'를 열었습니다. 미국 시장에 대한 존중과 확고한 성장 의지를 전 세계에 다시 한번 보여주었습니다.
매장 내부에는 승마 용품부터 주얼리까지 모든 라인업이 완벽하게 갖춰진 공간입니다. 뉴욕 상류층 고객들을 위한 프라이빗 서비스와 전시 공간이 함께 마련되었습니다. 이 매장은 뉴욕 쇼핑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으며 브랜드 로열티를 획기적으로 높였습니다.
2001
[도쿄 긴자 '메종 에르메스' 완공]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유리 블록 외관의 긴자 메종이 완공되어 화제를 모았습니다. 일본 고객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에르메스의 예술적 야심이 투영된 건축물이었습니다.
건물 내부에는 갤러리와 정원, 극장까지 갖춰져 단순한 매장 이상의 문화 공간 역할을 합니다. 유리 블록은 에르메스의 투명한 경영과 예술적인 감성을 상징하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일본 고객들에게 에르메스는 브랜드 이상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확실하게 안착했습니다.
2003
[장 폴 고티에 영입]
패션계의 악동이라 불리는 장 폴 고티에를 영입하여 파격적인 에르메스 룩을 제안했습니다. 장 루이 뒤마의 과감한 인재 기용 능력이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고티에는 에르메스의 전통 소재를 도발적이고 관능적으로 재해석하여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의 컬렉션은 패션쇼마다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브랜드의 화제성을 최고조로 높였습니다. 전통 브랜드가 어떻게 창의적인 혁신을 지속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였습니다.
2004
[가죽 제작 공방 추가 신설]
폭발하는 가죽 제품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공방을 열었지만 장인 제작 원칙은 고수했습니다. 희소 가치를 지키기 위해 생산량을 무리하게 늘리지 않는 결단이었습니다.
신설 공방에서도 모든 공정은 여전히 100% 수작업으로만 이루어졌습니다. 장인 한 명이 가방 하나를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여전히 타협되지 않았습니다. 품질 유지를 위해 장인 교육 기간을 더욱 늘리는 등 원칙 중심의 성장을 이어갔습니다.
2005
[오프라 윈프리 파리 매장 입장 거부]
미국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가 파리 에르메스 본점 방문 시 입장을 거부당했습니다. 에르메스 측은 보안 문제라고 해명했으나 인종차별 논란이 일었습니다.
이 사건은 에르메스의 폐쇄적이고 오만한 고객 응대 태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습니다.
[패트릭 토마스 공동 매니저 임명]
가문 외부 인사인 패트릭 토마스를 장 루이 뒤마와 함께 공동 매니저로 임명했습니다. 전문 경영인 체제를 도입하여 그룹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전략적인 시도였습니다.
패트릭 토마스는 에르메스의 전통을 이해하면서도 비즈니스적 예리함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가족 경영과 전문 경영의 조화를 통해 에르메스는 더욱 견고한 성장을 지속했습니다. 가문 내부에서도 그의 경영 능력에 대해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며 안정기를 맞았습니다.
2006
[장 루이 뒤마 회장 은퇴]
에르메스를 세계 최고의 브랜드로 키운 거장 장 루이 뒤마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28년간의 재임 동안 매출 규모를 수십 배로 키운 그의 공로는 역사에 남았습니다.
은퇴 이후 그는 명예 회장으로서 조언자 역할을 계속 수행하며 중심을 잡았습니다. 그는 '에르메스는 문화를 만드는 회사'라는 철학을 전 임직원에게 남겼습니다. 패트릭 토마스가 에르메스 최초의 비가문 출신 단독 CEO로 임명되었습니다.
2007
[향수 '떼르 데르메스' 글로벌 대성공]
조향사 장 클로드 엘레나가 만든 남성 향수 '떼르 데르메스'가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대지와 하늘 사이의 향을 형상화한 이 향수는 남성 향수의 새로운 고전이 되었습니다.
출시 직후 수많은 향수상을 휩쓸며 평단과 시장의 찬사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에르메스 향수 특유의 정제되고 투명한 정체성을 전 세계에 확립시킨 일등 공신입니다. 향수 사업은 에르메스 그룹 내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효자 부문으로 완전히 자리 잡았습니다.
2008
[에르메스 기업 재단 설립]
전통 공예 보존과 예술가 지원을 위해 '에르메스 기업 재단'을 공식 설립했습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문화 예술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철학적 실천의 일환이었습니다.
재단은 매년 다양한 전시회와 장인 교육 프로그램을 전 세계적으로 운영합니다. 특히 사라져가는 전통 기술을 기록하고 복원하는 사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습니다. 에르메스 재단은 예술계에서 가장 권위 있고 진정성 있는 문화 재단으로 인정받습니다.
2009
[서울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안착]
한국 시장의 중요성을 반영하여 서울 도산공원 인근에 대규모 플래그십 스토어를 성공적으로 운영했습니다. 한국 명품 시장에서 에르메스의 독보적 위상을 확인한 시기였습니다.
매장 내부에는 에르메스 박물관과 갤러리, 카페가 어우러져 복합 문화 공간으로 기능합니다. 한국의 우수한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을 통해 현지화 마케팅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서울 메종은 아시아 시장에서 가장 역동적인 성장을 보여주는 핵심 매장 중 하나입니다.
2010
[가족 지주 회사 'H51' 설립]
LVMH의 위협에 맞서 가문 구성원들이 지분을 묶은 지주 회사 'H51'을 설립했습니다. 주식을 수십 년간 매각하지 않기로 합의하여 적대적 인수를 원천 봉쇄했습니다.
이 결정으로 에르메스 가문은 의결권의 과반 이상을 완벽하게 수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돈보다 가업의 가치와 독립성을 지키겠다는 가족들의 강력한 결속력을 보여주었습니다. LVMH는 결국 더 이상의 지분 확보를 포기하고 한발 물러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대한 경영자 장 루이 뒤마 별세]
에르메스의 현대적 신화를 쓴 장 루이 뒤마 명예 회장이 향년 72세로 별세했습니다. 그는 에르메스를 단순한 상표에서 '정신적 가치'로 승격시킨 지성의 거인이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전 세계 패션계 거물들이 대거 참석하여 마지막 길을 예우했습니다. 장인에 대한 존중과 품질 우선주의라는 그의 유훈은 에르메스의 불변의 원칙이 되었습니다. 그의 서거 이후 에르메스 가족들은 결속력을 더욱 다지며 위기 대응 체제에 들어갔습니다.
[LVMH의 지분 공격 발생]
LVMH 그룹이 에르메스 지분 17.1%를 기습적으로 확보했다고 발표하여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가족 경영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중대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투자 목적이라 주장했으나 에르메스는 즉각 반격했습니다. 가족들은 '적대적 인수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법적 대응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거대 자본과 독립 장인 정신의 대결로 전 세계적 관심을 끌었습니다.
2011
[크리스토프 르메르 영입]
여성복 부문에 크리스토프 르메르를 영입하여 에르메스 특유의 차분하고 고급스러운 미학을 강화했습니다. 그의 디자인은 에르메스의 정체성과 완벽하게 조화되었습니다.
그는 화려함보다는 소재의 본질을 살린 우아한 실루엣을 강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에르메스 기성복이 추구하는 '타임리스 럭셔리'의 개념을 더욱 견고하게 다졌습니다. 고객들은 그가 만든 옷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지적인 우아함을 얻는다고 평가했습니다.
2012
[악셀 뒤마 차기 대표 지명]
장 루이 뒤마의 아들 악셀 뒤마가 패트릭 토마스의 뒤를 이을 차기 대표로 지명되었습니다. 가문 출신 리더의 복귀로 브랜드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악셀 뒤마는 금융권 경험과 현장 실무 경험을 두루 갖춘 준비된 차세대 리더였습니다. 그는 가죽 제품 부문을 담당하며 실무 능력을 입증하여 가문 내부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경영권 승계 과정은 매우 계획적이고 안정적으로 진행되어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켰습니다.
2013
[악셀 뒤마 총괄 대표 취임]
가문의 6대 경영자로 악셀 뒤마가 총괄 매니저(CEO)에 공식 취임했습니다. 그는 에르메스의 독보적 럭셔리 지위를 더욱 강화하고 디지털 혁신을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에르메스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의 경영 철학을 대변했습니다. 넘치는 수요에도 불구하고 품질을 위해 공급을 제한하는 에르메스의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에르메스는 매출과 영업 이익에서 매년 신기록을 경신했습니다.
2014
[LVMH와의 지분 분쟁 완전 종결]
LVMH 그룹이 에르메스 지분 대부분을 분할 매각하기로 합의하며 전쟁이 끝났습니다. 에르메스는 가족 경영의 독립성을 지켜내며 역사적인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법원의 중재와 에르메스 가문의 강력한 저항이 결실을 본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LVMH는 향후 수년간 에르메스 주식을 매입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약속했습니다. 이로써 에르메스는 외부 자본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 장인 정신에만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2015
[PETA, 악어 농장 학대 영상 폭로]
동물보호단체 PETA가 텍사스와 짐바브웨의 에르메스 가죽 공급 농장에 잠입해 악어들이 잔혹하게 도살되는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버킨백 하나를 위해 악어 2~3마리가 희생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윤리적 비난을 받았습니다.
[제인 버킨, "내 이름을 지워달라" 요청]
학대 영상을 접한 제인 버킨이 에르메스 측에 잔혹한 생산 방식이 개선될 때까지 가방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공식 요청했습니다.
브랜드의 뮤즈가 등을 돌린 사상 초유의 홍보 위기였습니다.
[애플워치 에르메스 에디션 발표]
IT 기업 애플과 협력하여 전용 시계 라인업을 발표하며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습니다. 전통 장인 기업과 첨단 기술 기업의 만남은 명품의 새로운 정의를 내렸습니다.
에르메스 전용 시계 페이스 디자인과 고유의 가죽 스트랩이 적용되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전통 브랜드가 디지털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여준 가장 성공적인 협업 사례입니다. 이후 이 파트너십은 매년 새로운 버전을 출시하며 장기적인 상생 모델이 되었습니다.
[에르메스-제인 버킨 갈등 봉합]
에르메스가 사육 환경 개선과 감사를 약속하면서 제인 버킨이 이름 삭제 요청을 철회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에르메스는 자체 농장을 확대하는 등 이국적 가죽 사용을 멈추지 않아 논란의 불씨를 남겼습니다.
2016
[나데쥬 반히 시불스키 영입]
여성 기성복 아티스틱 디렉터로 나데쥬 반히 시불스키를 영입하여 새로운 변화를 줬습니다. 그녀는 여성의 실루엣을 존중하는 현대적인 에르메스 룩을 완성했습니다.
그녀의 디자인은 절제된 고급스러움과 기능적인 아름다움이 완벽하게 조화되었습니다. 실크와 가죽을 의류에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 더욱 과감하고 창의적인 시도를 선보였습니다. 현대 에르메스 여성을 정의하는 데 그녀의 리더십은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2017
[글로벌 생산 기지 확충]
프랑스 전역에 새로운 가죽 공방들을 추가로 설립하여 증가하는 글로벌 수요에 대응했습니다. 지역 사회의 고용 창출과 전통 공예 전수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습니다.
공방을 늘리면서도 장인 한 명이 제품 하나를 끝까지 책임지는 방식은 유지했습니다. 메이드 인 프랑스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모든 생산 시설은 프랑스 내에 집중되었습니다. 품질 관리를 위해 각 공방의 규모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키우지 않는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2018
[지속 가능 경영 강화 발표]
환경 보호와 자원 순환을 위한 구체적인 지속 가능 경영 전략을 대외적으로 선포했습니다. 럭셔리 브랜드로서 지구 환경에 기여할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탄소 배출 저감과 친환경 소재 연구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약속했습니다. 제품의 수명을 무한히 늘리는 수선 서비스를 글로벌 전 매장으로 확대 강화했습니다. 에르메스의 제품이 일회성 소모품이 아닌 '자산'임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행보였습니다.
2019
[온라인 커머스 플랫폼 고도화]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세대를 위해 온라인 매장의 접근성과 고객 경험을 획기적으로 개선했습니다. 온라인에서도 오프라인과 같은 품격 있는 구매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에르메스의 철학이 담긴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하여 온라인 고객들과 소통을 강화했습니다. 희소 가치가 높은 일부 제품을 온라인에서도 선보이며 채널 간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온라인 매출 비중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며 수익 구조가 다변화되었습니다.
2020
[뷰티 라인 '루즈 에르메스' 공식 론칭]
브랜드 최초의 립스틱 컬렉션을 출시하며 본격적인 뷰티 시장 진출을 선언했습니다. 가방과 스카프에서 영감을 받은 색채와 질감을 화장품에 그대로 녹여냈습니다.
립스틱 케이스는 리필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지속 가능성의 가치를 담았습니다. 출시 당일 전 세계 주요 매장에서 줄서기 현상이 발생하는 등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뷰티 라인은 에르메스를 처음 접하는 고객들에게 훌륭한 입문 채널이 되었습니다.
2021
[비건 가죽 소재 가방 개발 발표]
버섯 균사체를 기반으로 한 신소재 가방 '실바' 개발 소식을 전하며 혁신을 예고했습니다. 전통 가죽 장인 기업으로서 미래 소재를 수용하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마이코웍스 사와의 협업을 통해 가죽의 질감과 내구성을 가진 친환경 소재를 구현했습니다. 환경을 생각하는 가치 소비 학생들에게 브랜드의 새로운 매력을 각인시켰습니다. 에르메스가 단순히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기술적 도전을 지속함을 증명했습니다.
2022
[사상 최대 실적 경신]
팬데믹 이후 전 세계적인 럭셔리 수요 폭증에 힘입어 역대 최고의 매출액을 기록했습니다. 경기 불황 우려에도 불구하고 에르메스의 가치는 더욱 견고해졌음을 입증했습니다.
전 지역, 전 제품군에서 두 자릿수 이상의 성장을 거두며 독보적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특히 버킨백과 켈리백의 자산 가치가 주목받으며 리셀 시장에서도 가격이 치솟았습니다. 에르메스는 이를 바탕으로 가죽 장인들을 위한 교육 시설에 더욱 공격적으로 투자했습니다.
2023
[전 제품군 10~13% 기습 인상]
원자재 비용 상승 등을 이유로 전 제품 가격을 대폭 인상했습니다. 이는 통상적인 인상 폭을 상회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베블런재(가격이 오를수록 수요가 느는 재화)로서의 입지를 굳히기 위한 초고가 전략의 일환으로 해석됩니다.
[리옹 가죽 공방 추가 신설]
프랑스 리옹 인근에 수백 명의 장인이 근무할 수 있는 대규모 공방을 새롭게 열었습니다. 일자리 창출과 전통 기술 전수라는 사회적 책임을 지속적으로 실천했습니다.
모든 신규 장인들은 최소 18개월 이상의 엄격한 도제 교육을 이수한 후 투입됩니다. 공방 건물은 탄소 중립 인증을 받은 친환경 건축 설계가 적용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생산량 증대보다 중요한 것은 품질의 유지임을 공방 운영을 통해 몸소 실천했습니다.
2024
[파리 패션위크 PETA 런웨이 난입]
파리 패션위크 에르메스 쇼장에 PETA 활동가들이 난입해 '야생 동물 가죽 금지'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전 세계 패션계에 생중계되며 에르메스의 동물 학대 이슈를 다시금 환기시켰습니다.
[1차 수정 소장 제출 (사기 혐의 추가)]
원고 측이 에르메스가 재고가 있음에도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며 조직적인 기만 및 사기 혐의를 소장에 추가했습니다.
단순한 끼워팔기를 넘어 소비자 기만 행위를 부각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지속 가능 럭셔리 비전 2024 발표]
한 세기 반을 넘어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에르메스의 새로운 비전을 공유했습니다. 수선 서비스의 대대적 강화와 투명한 원료 공급망 확보를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전 세계 매장에 수선 전문 장인 배치를 확대하여 '평생 소장'의 가치를 지원합니다. 가죽 수급부터 제작까지 전 과정의 탄소 발자국을 공개하는 투명 경영을 약속했습니다. 에르메스는 이를 통해 럭셔리 산업이 나아가야 할 지속 가능한 방향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미국 소비자, 반독점 집단소송 제기]
캘리포니아 소비자 티나 카발레리 등이 에르메스를 상대로 '끼워팔기(Tying Arrangement)' 혐의로 집단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원고들은 버킨백을 사기 위해 원치 않는 다른 제품 구매를 강요받았으며, 이는 셔먼법 위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2차 수정 소장 제출]
원고 측이 시장의 정의를 '초고가 럭셔리 핸드백 시장'으로 좁혀 에르메스의 독점력을 입증하려는 논리를 보강했습니다.
버킨백의 대체 불가능성과 가격 비탄력성을 강조했습니다.
2025
[주주총회에서 PETA의 직접 압박]
주식 취득을 통해 주주 자격을 얻은 PETA가 주주총회에 참석해 악셀 뒤마 회장에게 비건 버킨백 출시를 요구했습니다.
외부 시위를 넘어 기업 거버넌스 내부로 투쟁의 장을 옮긴 전략적 변화였습니다.
[지역별 차등 가격 인상 단행]
미국 시장 가격을 7% 인상한 반면 유럽은 4.5% 인상하여 지역 간 가격 격차(Arbitrage Gap)를 심화시켰습니다.
이는 원정 쇼핑을 유발하고, 이를 막기 위한 고객 감시 명분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미국 법원, 반독점 소송 기각 판결]
캘리포니아 연방법원은 '시장 정의의 실패' 등을 이유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Dismissed with prejudice)하고 에르메스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법원은 기업이 판매 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고유한 사업적 판단이며, 버킨백 외에 다른 대체재가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제9순회항소법원에 항소 제기]
원고 측이 1심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장을 제출했습니다. 법적 공방은 상급 법원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소송은 럭셔리 업계 전반의 판매 관행에 대한 중요한 법적 기준이 될 전망입니다.
[내슈빌 매장 '피의 퍼포먼스' 시위]
내슈빌 매장 오픈식에서 PETA 활동가가 피 흘리는 악어 분장을 하고 '다이-인' 시위를 벌여 고객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화려한 매장 이미지에 균열을 내고 고객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퍼포먼스였습니다.
2026
[버킨 30 미국 가격 $14,900 돌파]
가격 재인상을 통해 버킨 30 토고 가죽 모델의 미국 가격이 약 14,900달러(약 2천만 원)에 도달했습니다.
유럽 가격과의 차이가 3,000달러 이상 벌어지며 가격 장벽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탐사매체 글리츠, 고객 감시 시스템 폭로]
프랑스 매체 글리츠가 에르메스의 조직적인 고객 사찰 실태를 보도했습니다. 구글 지도로 거주지를 확인하고 SNS를 추적하는 등의 감시 행위가 드러났습니다.
고객의 재력, 거주지, 리셀 이력을 기반으로 '레드 플래그(블랙리스트)'를 운영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인권 침해 논란이 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