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네세 칼초
축구 클럽, 세리에 A, 이탈리아 스포츠 구단, 프리울리
최근 수정 시각 : 2026-01-20- 11:28:27
1896년 이탈리아 프리울리 지역의 청년들이 세운 우디네세 칼초는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의 수호자'입니다. 흰색과 검은색 줄무늬 유니폼으로 인해 '얼룩말(Zebrette)'이라는 애칭을 얻었으며, 1922년 코파 이탈리아 초대 준우승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축구사에 강렬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1980년대 지쿠의 영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1986년 잠파올로 포초 가문의 인수 이후 독보적인 글로벌 스카우팅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이를 통해 산체스, 디 나타레와 같은 불멸의 스타들을 배출하며 중소 클럽의 한계를 극복하고 유럽 대항전의 단골 손님으로 거듭난 현대 축구 경영의 모범 사례입니다.
1896
[비공식 전국 우승 달성]
이탈리아 체육 연맹이 주관한 축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트레비소에서 열린 이 대회 결승에서 페라라 팀을 꺾고 역사적인 정상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비록 FIGC의 공식 기록으로 소급 인정되지는 못했으나 우디네세 역사의 가장 큰 초기 자부심입니다.
이 대회는 당시 이탈리아 내에서 열린 가장 규모 있고 권위 있는 축구 행사 중 하나였습니다.
우디네세는 조직력 있는 경기 운영으로 다른 지역 팀들을 압도하는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습니다.
이 우승을 계기로 구단 내에서 축구 부서의 위상이 비약적으로 격상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종합 스포츠 클럽 설립]
우디네 공립 체육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Società Udinese di Ginnastica e Scherma'가 공식 설립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제노아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유서 깊은 스포츠 클럽으로 역사적인 첫발을 뗐습니다.
초기에는 체조와 펜싱이 주력이었으나 곧 축구 부서가 활성화되며 구단의 핵심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설립자들은 지역 청년들의 신체 단련과 고귀한 스포츠 정신 고취를 목적으로 구단을 조직했습니다.
당시 축구는 이탈리아에서 막 보급되기 시작한 신선한 스포츠였으며 학생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 시기의 활동은 훗날 이탈리아 프로 축구 리그가 형성되는 데 중요한 문화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1911
[이탈리아 축구협회 가입]
이탈리아 축구 협회(FIGC)에 정식으로 가입하며 공식 리그 참여를 위한 행정 절차를 완료했습니다.
클럽 명칭을 'AC 우디네세'로 변경하고 전문적인 축구단 운영 체제를 더욱 공고히 구축했습니다.
지역 리그를 넘어 전국구 구단으로 도약하기 위한 본격적인 경쟁의 장으로 진입한 순간입니다.
협회 가입 직후부터 지역 예선 대회에 참가하며 실전 경험과 전술적 기량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체계적인 선수 선발과 과학적 훈련 시스템을 도입하여 타 지역 강호들과의 대결에 대비했습니다.
이 결정은 우디네세가 이탈리아 축구 시스템의 정식 일원이 되는 결정적인 역사적 계기였습니다.
1912
[공식 지역 리그 데뷔]
베네토-에밀리아 지역 리그에 처음 출전하여 공식적인 승점 경쟁과 순위 다툼을 시작했습니다.
당대 강호였던 비첸차, 베네치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우디네 축구의 저력을 보였습니다.
경기장에는 매 경기 수천 명의 지역 팬들이 몰려들어 새로운 축구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데뷔 시즌부터 공격적인 축구 스타일을 선보이며 리그 관계자들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선수들은 지역의 명예를 걸고 매 경기 투혼을 발휘하여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습니다.
이 시기 구축된 라이벌 구도들은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지역 더비의 역사적 모태가 되었습니다.
1920
[전후 재건과 리그 복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되었던 활동을 재개하고 흩어졌던 선수들을 다시 불러모았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다시 공을 찰 수 있다는 사실에 지역 주민들은 큰 위안과 희망을 얻었습니다.
구단은 재창단 수준의 노력을 기울여 경기장 시설을 정비하고 차기 시즌 리그 참가를 준비했습니다.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온 생존 선수들은 후배들을 이끌며 팀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지역 상공인들이 성금을 모아 구단의 운영 자금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이 복귀는 우디네세가 어떤 위기에서도 굴하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922
[코파 이탈리아 초대 준우승]
역사적인 제1회 코파 이탈리아 대회 결승에 진출하여 바도(Vado)와 우승컵을 놓고 격돌했습니다.
연장전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0-1로 아쉽게 패하며 우승 대신 준우승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전국 규모의 메이저 대회에서 거둔 구단 역사상 초기 최고의 성과로 영원히 기록되었습니다.
결승전까지 올라오는 과정에서 유벤투스 등 여러 강호들을 차례로 격파하며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트로피는 놓쳤으나 우디네세 축구의 끈기와 기술을 전 이탈리아에 각인시킨 계기였습니다.
이후 구단은 전국적인 인지도를 확보하며 이탈리아 축구의 주요 세력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1923
[재정 위기와 강등의 고배]
극심한 재정난으로 인해 핵심 선수들을 매각하고 전력이 급격히 약화되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재정적 결핍은 경기력 저하로 직결되어 결국 하부 리그로 강등되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구단 창단 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중대한 존립 위기이자 뼈아픈 성찰의 시간이었습니다.
운영비 부족으로 인해 구단 사무실이 한때 폐쇄될 위기에 처할 만큼 상황이 매우 열악했습니다.
하지만 팬들은 자발적인 모금 운동을 벌이며 팀을 재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의 시련은 구단이 행정적으로 더욱 투명해지고 경영 내실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4
[모레티 경기장 이전]
새로운 홈구장인 스타디오 모레티(Moretti)를 개장하고 본격적인 전용 구장 시대를 열었습니다.
현대적인 관중석과 편의 시설을 갖추어 경기당 입장 수익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경기장 이전을 통해 구단은 다시 한번 상위 리그 승격을 향한 의지를 뜨겁게 불태웠습니다.
개장 기념 경기에는 우디네 시의 주요 인사들과 수천 명의 열광적인 팬들이 운집했습니다.
홈 팬들의 압도적인 응원 열기 덕분에 새로운 경기장에서의 홈 승률이 매우 높게 나타났습니다.
이 경기장은 훗날 프리울리 경기장이 건설되기 전까지 수십 년간 우디네세의 성지였습니다.
1929
[세리에 B 창립 멤버 참여]
이탈리아 프로 리그 개편에 따라 새롭게 창설된 세리에 B의 창립 멤버로 참여했습니다.
전국적인 장기 레이스 시스템 하에서 매주 수준 높은 팀들과 치열한 진검승부를 펼쳤습니다.
1부 리그인 세리에 A 진출을 최종 목표로 설정하고 선수단 전력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리그 첫 시즌부터 안정적인 중위권 성적을 기록하며 운영 능력을 대외적으로 입증했습니다.
선수들은 프로 선수로서의 책임감을 갖추고 매 경기 높은 집중력과 투혼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기 구축된 구단 운영 모델은 훗날 우디네세가 장기 집권하는 행정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1930
[리그 안정화와 전술 혁신]
세리에 B 무대에서 안정적인 성적을 유지하며 팀의 전술적 완성도를 높여 나갔습니다.
젊고 유망한 지역 출신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며 우디네세만의 축구 색깔을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상위권 진입을 위한 체계적인 스카우팅과 훈련 프로그램이 효과를 거두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전술적으로는 수비의 견고함을 중시하면서도 빠른 역습을 시도하는 스타일이 정착되었습니다.
팬들은 팀의 꾸준한 성장세에 고무되어 경기장 관중 수가 매 시즌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이 시기의 안정은 훗날 찾아올 전쟁의 위협 속에서도 구단이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1939
[세리에 C 우승과 승격]
3부 리그인 세리에 C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하며 2부 리그 승격을 확정 지었습니다.
전술적으로 타 팀들보다 한 단계 진화했다는 찬사를 받으며 리그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습니다.
다시 프로 축구의 주류 무대로 복귀하며 우디네 시민들에게 승격의 큰 기쁨을 선사했습니다.
시즌 내내 선두 자리를 한 번도 놓치지 않는 완벽한 경기 운영으로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주전 공격수들의 폭발적인 득점 행진은 상대 수비진에게 공포의 대상 그 자체였습니다.
이 승격은 전쟁 직전 우디네 지역 주민들에게 전해진 가장 큰 스포츠적 위안이자 낭보였습니다.
1943
[2차 대전으로 인한 리그 중단]
제2차 세계 대전의 확전으로 인해 이탈리아 내 모든 공식 축구 경기가 중단되었습니다.
수많은 선수와 구단 스태프들이 군에 징집되어 정든 그라운드를 떠나 전장으로 향했습니다.
축구 시계가 멈춘 절망적인 시기였으나 팀의 명맥을 잇기 위한 비공식 활동은 지속되었습니다.
공습이 잦아지면서 경기장 일부 시설이 파손되는 등 구단 외부적으로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선수들은 훈련 대신 방호 활동에 투입되기도 하는 등 힘겨운 전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전쟁은 구단의 성장을 일시적으로 막았으나 팬들의 재건 의지만큼은 꺾지 못한 시기였습니다.
1945
[해방 후 리그 재건 참여]
전쟁이 끝나고 이탈리아가 해방되자 우디네세도 빠르게 전열을 가다듬어 복귀했습니다.
파괴된 경기장 시설을 보수하고 새로운 경영진을 선출하여 명가 재건의 기치를 높였습니다.
자유를 되찾은 시민들은 다시 경기장으로 구름 떼처럼 몰려와 팀의 부활을 응원했습니다.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온 선수들은 다시 유니폼을 입고 혹독한 훈련에 매진했습니다.
구단은 지역 사회 통합의 상징이 되어 다양한 전후 복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시기 구축된 강력한 유스 시스템은 훗날 팀의 핵심 인재들을 배출하는 화수분이 되었습니다.
1949
[승격을 향한 마지막 사투]
세리에 B에서 시즌 마지막까지 치열한 선두권 다툼을 벌이며 1부 리그행을 정조준했습니다.
선수들의 집중력이 정점에 달하며 리그 후반기에 믿기 힘든 연승 행진을 기록했습니다.
전 이탈리아가 우디네세의 끈질긴 추격전에 주목하며 찬사를 보냈던 시즌입니다.
아쉽게 승점 차로 우승은 놓쳤으나 다음 시즌을 위한 확실한 전력 우위를 확인했습니다.
팀의 조직력은 이미 세리에 A 수준에 도달했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잇따랐습니다.
이 해의 아쉬운 실패는 다음 해 역사적인 첫 승격을 일궈내는 강력한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1950
[사상 첫 세리에 A 승격]
구단 창단 54년 만에 마침내 이탈리아 최상위 리그인 세리에 A 진출권을 거머쥐었습니다.
세리에 B에서 당당히 준우승을 차지하며 이탈리아 축구의 중심부인 1부 리그에 입성했습니다.
우디네 시 전체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으며 시민들은 역사적인 승격을 자축했습니다.
승격 확정 날 우디네 광장에는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 선수단을 뜨겁게 환영했습니다.
강호들과 대등하게 경쟁하기 위해 구단은 대대적인 스쿼드 보강 계획을 전격 수립했습니다.
이 승격은 우디네세가 명문 구단으로 거듭나는 위대한 도약의 역사적 시작점이었습니다.
1951
[1부 리그 안정적 안착]
승격 첫해에 세리에 A 9위라는 예상을 뛰어넘는 성적으로 리그 잔류에 성공했습니다.
전통의 명문 팀들을 상대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베테랑들의 노련미가 빛났습니다.
중소 도시 클럽도 1부 리그에서 충분히 생존할 수 있음을 실력으로 증명했습니다.
안정적인 수비 전술을 바탕으로 승점 관리를 철저히 해낸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습니다.
홈 경기에서는 패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징크스를 만들어내며 상대 팀들에게 공포를 주었습니다.
이 해의 성공적인 데뷔는 우디네세가 1부 리그의 상수로 자리 잡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1953
[비가니의 최다 출전 기록]
구단 역사상 가장 헌신적인 선수 중 한 명인 조반니 비가니가 연일 대기록을 갱신했습니다.
그는 중원에서의 지치지 않는 활동량으로 팀의 공수 연결고리 역할을 완벽히 수행했습니다.
선수단의 기강을 바로잡고 후배들에게 큰 귀감이 되는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았습니다.
비가니는 부상 속에서도 팀의 승리를 위해 경기에 출전하는 강한 정신력을 보였습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상대 팀 미드필더들은 압박감을 느끼며 경기를 어렵게 풀어갔습니다.
그의 기록은 훗날 우디네세의 후배 선수들이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자 목표가 되었습니다.
1955
[세리에 A 준우승 위업]
리그에서 AC 밀란에 이어 당당히 2위를 차지하며 구단 역대 최고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전통의 강호들을 연달아 격파하며 이탈리아 전역에 '우디네세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팀의 전술적 완성도가 최고조에 달했다는 평론가들의 극찬이 연일 이어졌습니다.
공수 양면에서 빈틈없는 완벽한 밸런스를 보여주며 무패 행진을 거듭한 시즌이었습니다.
선수들의 위닝 멘탈리티가 정점에 달해 어떤 강팀을 만나도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비록 우승컵은 아쉽게 놓쳤으나 우디네세의 위상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역사적인 해였습니다.
[스캔들로 인한 강제 강등]
준우승의 영광 직후 불법 행위 연루 혐의로 세리에 B 강등이라는 가혹한 징계를 받았습니다.
경기장 안에서의 위대한 성과가 행정적인 문제로 인해 한순간에 무효화된 비극입니다.
구단은 명예 실추와 함께 핵심 선수들의 대거 이탈이라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습니다.
팬들은 협회의 판결에 강력히 항의하며 우디네 시내에서 대규모 침묵 시위를 벌였습니다.
징계로 인해 팀은 순식간에 해체 수준의 위기를 맞이하며 긴 암흑기에 진입했습니다.
이 사건은 우디네세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시련이자 잊지 말아야 할 교훈으로 남았습니다.
1956
[1년 만의 광속 복귀 성공]
강제 강등의 시련을 딛고 단 한 시즌 만에 다시 세리에 A 승격권을 획득했습니다.
선수들의 단합된 투지와 팬들의 변함없는 지지가 만들어낸 기적 같은 부활이었습니다.
실력으로 자신들이 있어야 할 진정한 자리가 1부 리그임을 만천하에 증명했습니다.
2부 리그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거의 전승에 가까운 우승을 차지하며 승격했습니다.
복귀 이후 구단은 더욱 투명하고 체계적인 운영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팬들은 다시 돌아온 1부 리그 무대에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1961
[성적 부진과 다시 강등]
리그에서 최하위권을 전전하다 결국 다시 세리에 B로 내려가는 쓴잔을 마셨습니다.
주축 선수들의 노쇠화와 전술적 경직성이 부진의 주된 원인으로 뼈아프게 지적되었습니다.
영광의 시대가 잠시 저물고 다시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가혹한 현실을 마주했습니다.
강등 결정 후 구단 내부적으로 대대적인 쇄신이 필요하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유망주들을 기용하며 세대교체를 시도했으나 경험 부족의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이 강등은 훗날 3부 리그까지 떨어지게 되는 기나긴 침체기의 암울한 서막이었습니다.
1964
[3부 리그 추락의 암흑기]
성적 부진이 심화되며 급기야 세리에 C(3부 리그)까지 떨어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1950년대의 화려한 명성은 온데간데없고 가장 낮은 곳에서 치열한 사투를 벌였습니다.
구단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정도로 심각한 재정적, 스포츠적 난국에 직면했습니다.
하부 리그 생활은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고 팬들의 실망감은 날로 커져만 갔습니다.
하지만 프리울리 지역 주민들은 끝까지 팀을 포기하지 않고 재건을 위해 힘을 모았습니다.
이 시기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훗날 우디네세가 다시 비상하기 위한 단단한 거름이 되었습니다.
1976
[프리울리 대지진의 비극]
프리울리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구단 또한 경기장 파손 등 큰 타격을 입었으나 지역 사회를 돕기 위해 앞장섰습니다.
축구를 통해 상처받은 시민들의 마음을 치유하고자 하는 구단의 헌신이 빛났습니다.
선수들과 스태프들은 복구 작업에 직접 참여하며 이재민들을 위로했습니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우디네세는 지역의 구심점이 되어 희망의 불씨를 다시 지폈습니다.
이 사건은 구단과 팬들이 단순한 관계를 넘어 운명 공동체로 묶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스타디오 프리울리 개장]
우디네세의 새로운 현대적 상징인 스타디오 프리울리가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최신식 시설과 웅장한 아치 구조를 갖춘 전용 구장을 확보하며 새 시대를 선포했습니다.
개장 경기로 세레뇨와 격돌하며 프리울리 지역 스포츠의 심장부로 완전히 자리 잡았습니다.
이 경기장은 당시 건축학적으로도 매우 독창적인 지붕 설계로 전 세계적 주목을 받았습니다.
전용 구장 확보를 통해 구단은 안정적인 입장 수익과 수준 높은 팬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이곳은 훗날 우디네세의 위대한 영광과 부활의 순간들을 모두 지켜본 역사의 산증인입니다.
1978
[세리에 B 복귀 성공]
기나긴 3부 리그 생활을 청산하고 마침내 세리에 B 승격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마시모 자코미니 감독의 명석한 지도 아래 팀 조직력을 완벽하게 회복한 결과였습니다.
다시 이탈리아 프로 축구의 주류 무대로 진입하기 위한 확실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리그 막판 극적인 연승 행진을 달리며 우승컵과 승격권을 동시에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선수들은 프리울리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과 함께 뜨거운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승격은 우디네세가 대망의 세리에 A로 향하는 거대한 여정의 화려한 서막이었습니다.
[코파 이탈리아 세미프로 우승]
코파 이탈리아 세미프로 결승에서 승리하며 마침내 컵 대회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정규 리그 승격에 이어 컵 대회 우승까지 차지하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한 해를 보냈습니다.
팀의 전력이 전국적으로 충분히 경쟁력이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해 보인 순간이었습니다.
결승전에서 보여준 선수들의 고도의 집중력과 투혼은 지역 언론의 집중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우승은 팀에 승리 DNA를 다시 강력하게 심어준 상징적인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선수들은 우승 메달을 목에 걸고 우디네 시청 발코니에서 시민들과 함께 환호했습니다.
1979
[20년 만의 세리에 A 복귀]
세리에 B 우승을 차지하며 20년이라는 기나긴 기다림 끝에 1부 리그로 돌아왔습니다.
단 두 시즌 만에 3부에서 1부까지 수직 상승하는 경이로운 페이스를 세계에 보였습니다.
이탈리아 축구계는 우디네세의 전격적인 부활에 경탄과 깊은 주목을 보냈습니다.
자코미니 감독의 혁신적인 전술과 선수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만들어낸 위대한 결실이었습니다.
승격 확정 날 밤 우디네 시내 분수대에는 수천 명의 팬들이 뛰어들어 축제를 즐겼습니다.
이제 우디네세는 단순 잔류가 아닌 과거의 명예를 완전히 회복하기 위한 전진을 시작했습니다.
1980
[미트로파컵 국제 우승]
유럽 중부 지역의 전통 있는 국제 대회인 미트로파컵에서 역사적인 정상에 올랐습니다.
구단 역사상 최초의 공식 국제 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국위를 선양했습니다.
유럽 무대에서도 우디네세의 경쟁력이 충분히 통함을 보여준 상징적 승리였습니다.
결승전에서 헝가리의 강호를 꺾고 우승을 확정 짓는 순간은 프리울리의 거대한 영광이었습니다.
선수들은 유럽 대항전 우승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 기술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했습니다.
이 타이틀은 구단 역사 박물관의 가장 명예로운 자리에 오늘날까지 소중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1983
[축구 영웅 지쿠 전격 영입]
브라질의 살아있는 전설 지쿠(Zico)를 영입하며 전 세계 축구계를 거대한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중소 클럽 우디네세가 당대 최고의 월드 스타를 데려온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지쿠의 합류로 우디네세는 단숨에 전 세계 매체의 집중 조명을 받는 글로벌 구단이 되었습니다.
지쿠는 데뷔 첫 시즌에만 19골을 몰아치며 자신의 월드클래스 실력을 유감없이 과시했습니다.
그의 환상적인 프리킥과 패스를 보기 위해 프리울리 경기장은 매 경기 매진을 기록했습니다.
지쿠 시대는 성적을 넘어 우디네세 팬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낭만과 자부심의 상징입니다.
1985
[지쿠와의 아쉬운 작별]
세금 문제와 고국 복귀 열망으로 인해 지쿠가 두 시즌 만에 팀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짧았지만 강렬했던 영웅의 퇴장에 우디네 팬들은 눈물로 작별을 고했습니다.
지쿠가 남긴 축구적 유산은 훗날 우디네세가 공격적인 축구를 지향하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그가 떠난 후 팀의 성적은 다소 주춤했으나 팬들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최고의 10번입니다.
구단은 지쿠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새로운 유망주 발굴 시스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별은 우디네세가 스타 의존도를 낮추고 시스템 중심 구단으로 변모하는 계기였습니다.
1986
[잠파올로 포초 회장 인수]
지역 사업가 잠파올로 포초가 구단을 인수하며 본격적인 '포초 가문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는 우디네세에 현대적인 경영 기법과 혁신적인 스카우팅 시스템을 전격 이식했습니다.
구단의 재정적 안정과 장기 성장을 위한 기틀이 마련된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입니다.
포초 회장은 전 세계의 저평가된 유망주들을 발굴하여 육성하는 독창적 모델을 확립했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우디네세는 매 시즌 경쟁력 있는 전력을 유지하는 대표적 강소 클럽이 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포초 가문의 헌신은 우디네세를 세계적인 구단 운영의 롤모델로 만들었습니다.
1987
[징계 여파와 다시 강등]
승부 조작 스캔들에 휘말려 승점 감점 징계를 받은 끝에 세리에 B로 강등되었습니다.
포초 회장 부임 초기부터 닥친 거대한 시련은 구단 전체를 큰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경기 외적인 요인으로 인한 강등이었기에 선수들과 팬들의 상실감은 어느 때보다 컸습니다.
감점 징계만 없었다면 충분히 잔류가 가능했던 상황이었기에 판결에 대한 아쉬움이 짙었습니다.
구단은 이 위기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 대대적인 조직 개편과 선수단 재정비를 단행했습니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포초 회장은 팀에 대한 투자를 멈추지 않고 빠른 재도약을 약속했습니다.
1989
[1부 리그로의 성공적 복귀]
하부 리그의 시련을 뚫고 2년 만에 마침내 다시 1부 리그 무대를 밟았습니다.
조직력이 극대화된 경기를 선보이며 승격권을 거머쥐는 탄탄한 저력을 발휘했습니다.
우디네세라는 이름이 다시 이탈리아 축구의 중심에서 당당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승격 결정전에서 터진 극적인 골은 지금도 올드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명장면입니다.
선수들은 승격 확정 후 열광적인 응원을 뿜어내는 팬들과 함께 그라운드에서 환호했습니다.
이 복귀는 우디네세가 다시는 하위 리그로 내려가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습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 개최 지원]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주요 개최지로 스타디오 프리울리가 최종 선정되었습니다.
대회를 앞두고 경기장 시설을 대대적으로 개보수하여 세계적 수준으로 격상시켰습니다.
전 세계 축구 팬들의 이목이 우디네로 집중되며 구단의 국제적 브랜드 가치가 상승했습니다.
스페인, 우루과이 등 강호들의 명경기가 이곳에서 열리며 뜨거운 축구 열기를 뿜어냈습니다.
최신식 미디어 센터와 강화된 안전 설비가 도입되어 경기장 운영의 모범 사례가 되었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 우디네세는 국제적인 구장 운영 노하우와 지역적 자부심을 동시에 얻었습니다.
1992
[벨로토 감독의 전술 실험]
에치오 벨로토 감독 체제에서 새로운 전술적 실험을 거치며 팀의 체질을 개선했습니다.
강력한 압박 축구를 도입하여 리그 내 강팀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경기력을 보였습니다.
선수들의 체력과 활동량을 극대화하여 끈질긴 팀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했습니다.
벨로토 감독은 유망주들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비록 성적의 기복은 있었으나 우디네세가 나아가야 할 공격적 방향성을 제시했습니다.
이 시기 영입된 몇몇 핵심 선수들은 훗날 팀의 중추적인 전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1994
[아쉬운 강등과 재정비]
치열한 잔류 경쟁 끝에 아쉽게 승점 1점 차로 세리에 B 강등을 맞이했습니다.
포초 회장은 좌절 대신 스카우팅 네트워크를 더욱 강화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단기적인 성적보다 장기적인 구단의 철학을 확립하는 데 주력한 시기입니다.
강등은 뼈아팠으나 이 기간 동안 구단은 대대적인 스쿼드 다이어트를 단행했습니다.
더 젊고 역동적인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재편하여 다음 시즌 승격을 준비했습니다.
팬들은 구단의 투명한 운영 계획을 신뢰하며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주었습니다.
1995
[세리에 A 장기 집권 시작]
세리에 B 준우승으로 승격한 이후 현재까지 단 한 번의 강등 없이 1부 리그를 지키고 있습니다.
중소 클럽으로서는 기적에 가까운 수십 년의 장기 잔류 기록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포초 회장의 장기적인 비전과 안정적인 경영이 확실한 열매를 맺은 역사적 시점입니다.
승격 이후 구단은 전술적으로 더욱 세련된 축구를 구사하며 강팀들의 '천적'이 되었습니다.
선수 영입 시장에서 저평가된 우수한 인재들을 선점하는 능력이 돋보였습니다.
이후 우디네세는 이탈리아 축구의 전력 판도를 흔드는 무서운 강자로 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1996
[구단 창단 100주년 축제]
유서 깊은 구단 창단 100주년을 맞이하여 성대한 기념행사와 축제를 거행했습니다.
한 세기 동안 이어져 온 우디네세의 찬란한 역사를 돌아보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했습니다.
팬들은 구단의 깊은 역사에 자부심을 느끼며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함께 축하했습니다.
기념 경기에는 구단을 빛낸 전설적인 선수들이 대거 초청되어 자리를 빛냈습니다.
특별 한정판 유니폼과 기념 서적들이 발간되어 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해에 우디네세는 리그에서도 선전하며 100주년의 영광을 더욱 밝게 빛냈습니다.
1997
[첫 UEFA 컵 진출권 획득]
리그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럽 대항전 진출권을 따냈습니다.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 무대에서도 우디네세의 이름을 알리는 획기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선수들과 감독의 완벽한 호흡이 만들어낸 프리울리 지역의 위대한 성취였습니다.
유럽 무대 진출 확정 소식에 우디네 시 전체는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습니다.
구단은 더 넓은 무대에서 경쟁하기 위해 대대적인 전력 보강과 해외 마케팅에 나섰습니다.
이 성공으로 인해 우디네세는 국제적인 스카우트들이 주목하는 핵심 구단이 되었습니다.
1998
[리그 3위와 비어호프의 활약]
알베르토 자케로니 감독 체제에서 리그 3위를 기록하며 구단 역대급 시즌을 보냈습니다.
독일 출신 올리버 비어호프가 27골로 리그 득점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세리에 A의 '7공주' 시대를 위협하는 강력한 다크호스로 전 유럽에 우뚝 섰습니다.
비어호프의 압도적인 헤더와 마르시오 아모로소의 기술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뤘습니다.
자케로니 감독의 혁신적인 3-4-3 전술은 이탈리아 축구 전술의 새로운 유행이 되었습니다.
이 성적을 바탕으로 우디네세는 명실상부한 이탈리아의 상위권 구단으로 공인받았습니다.
1999
[아모로소 리그 득점왕 등극]
브라질 출신의 마르시오 아모로소가 22골을 터뜨리며 세리에 A 득점왕을 차지했습니다.
비어호프에 이어 2년 연속 우디네세 소속 선수가 득점왕에 오르는 대기록을 썼습니다.
구단 스카우팅 시스템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다시 한번 입증한 강력한 사례였습니다.
아모로소는 화려한 개인기와 날카로운 득점 감각으로 리그 수비진을 초토화했습니다.
그의 활약은 전 세계 빅클럽들의 러브콜로 이어졌으며 구단 가치를 크게 높였습니다.
이후 그는 당시 거액의 이적료를 남기고 파르마로 이적하며 구단 재정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2000
[UEFA 인터토토컵 우승]
체코의 시그마 올로모우츠를 꺾고 UEFA 인터토토컵 사상 첫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구단 역사상 최초의 공식 UEFA 주관 대회 트로피를 들어 올린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이 우승으로 인해 우디네세는 UEFA 컵 본선 진출권을 자력으로 다시 따냈습니다.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일궈낸 승리라 선수들과 팬들의 기쁨은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유럽 전역에 우디네세라는 브랜드를 확실히 각인시키는 성과를 당당히 거두었습니다.
이 우승 트로피는 구단 역사 박물관의 가장 명예로운 자리에 영구히 보존되었습니다.
2001
[디 미켈레의 합류]
테크니션 공격수 다비드 디 미켈레를 영입하여 공격 전술의 다변화를 꾀했습니다.
그는 영리한 움직임과 정교한 킥으로 우디네세 공격진에 창의성을 불어넣었습니다.
다양한 국적의 선수들이 조화를 이루는 우디네세만의 팀 컬러가 완성되던 시기입니다.
디 미켈레는 중요한 경기마다 골과 도움을 기록하며 조커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의 활약은 우디네세가 리그 중상위권 순위를 유지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팬들은 그의 화려한 드리블 기술에 매료되어 '프리울리의 예술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2002
[루치아노 스팔레티 감독 부임]
혁신적인 전술가 루치아노 스팔레티가 새로운 사령탑으로 부임하여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우디네세에 공격적이고 짜임새 있는 축구를 이식하며 팀의 체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했습니다.
선수들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그의 지도력은 곧 경이로운 성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스팔레티 감독 아래 팀은 리그 상위권의 강력한 도전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굳혔습니다.
무명에 가까웠던 많은 선수들이 그의 지도로 이탈리아 국가대표급으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은 우디네세 축구의 품격이 세계적 수준으로 격상된 시기로 평가받습니다.
2003
[이아퀸타의 득점포 가동]
장신 스트라이커 빈첸초 이아퀸타가 팀의 주득점원으로 거듭나며 맹활약했습니다.
그는 압도적인 피지컬을 활용한 포스트 플레이로 팀 공격의 새로운 활로를 열었습니다.
스팔레티 감독의 전술 하에서 가장 위협적인 공격 옵션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아퀸타는 고비 때마다 결정적인 골을 터뜨리며 팀에 귀중한 승점을 안겼습니다.
그의 활약은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발탁으로 이어져 훗날 월드컵 우승 멤버가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팬들은 그의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 스타일을 사랑하며 '프리울리의 거인'이라 불렀습니다.
2004
[전설 안토니오 디 나타레 영입]
엠폴리에서 활약하던 안토니오 디 나타레를 영입하며 위대한 전설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그는 이후 12시즌 동안 우디네세의 상징이자 영원한 주장으로 헌신했습니다.
구단 역사상 최다 출장과 최다 득점 기록을 모두 갈아치운 살아있는 신화의 시작입니다.
디 나타레는 수많은 명문 구단의 이적 제안을 뿌리치고 우디네세에 대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그의 정교한 칩슛과 골 감각은 세리에 A 역사상 최고 수준으로 영원히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우디네 시민들에게 단순 선수를 넘어 지역의 영웅이자 자부심으로 추앙받았습니다.
2005
[사상 첫 챔피언스리그 진출]
리그 4위를 확정 지으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확보했습니다.
중소 클럽 우디네세가 유럽 최고의 무대에 선다는 사실에 이탈리아 전체가 놀랐습니다.
스팔레티 감독의 지도력이 정점에 달했던 시즌의 가장 화려한 결실이었습니다.
마지막 라운드까지 이어진 치열한 순위 경쟁 끝에 극적으로 진출권을 따냈습니다.
프리울리 경기장은 챔피언스리그 찬가가 울려 퍼질 날을 고대하며 환희에 찼습니다.
이 성공으로 구단은 막대한 중계권료 수익과 국제적 명성을 단숨에 거머쥐었습니다.
[챔피언스리그 본선 데뷔전]
그리스의 파나티나이코스를 상대로 역사적인 챔피언스리그 첫 경기를 치렀습니다.
빈첸초 이아퀸타의 해트트릭 맹활약으로 3-0 완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유럽 최고의 무대에서도 우디네세의 화력이 통함을 전 세계에 유감없이 과시했습니다.
경기장 분위기는 월드컵 결승전을 방불케 할 만큼 뜨거운 축구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선수들은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로 상대 진영을 쉴 새 없이 공략하며 압도했습니다.
비록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으나 유럽 강호들과 대등하게 싸운 기억은 전설이 되었습니다.
2006
[아사모아 기안의 대활약]
가나 출신 공격수 아사모아 기안이 팀의 새로운 활력소로 떠오르며 주목받았습니다.
그의 폭발적인 속도와 유연한 신체 능력은 우디네세 공격의 새로운 엔진이 되었습니다.
글로벌 스카우팅의 성공 사례가 꾸준히 이어지며 팀의 전력을 지탱했습니다.
기안은 중요한 순간마다 골을 터뜨리며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그의 활약은 아프리카 최고의 유망주로 손꼽히는 계기가 되어 구단 가치를 높였습니다.
그는 이후 거액의 이적료를 남기고 프리미어리그로 진출하며 구단 재정에 기여했습니다.
2007
[콸리아렐라의 환상적인 골]
공격수 파비오 콸리아렐라가 합류하여 상식을 뛰어넘는 중거리 슛들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디 나타레와 함께 환상적인 공격 조합을 형성하며 리그를 폭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그의 슈팅 능력은 우디네세 경기의 가장 큰 관전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콸리아렐라는 하프라인 근처에서 넣은 골 등 수많은 원더골을 양산해 냈습니다.
그의 활약 덕분에 우디네세는 다시 한번 유럽 대항전 진출권을 노리는 강팀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 우디네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재미있는 축구를 하는 팀으로 칭송받았습니다.
2008
[알렉시스 산체스 전격 합류]
칠레의 유망주 알렉시스 산체스가 임대 생활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팀에 합류했습니다.
그의 경이로운 드리블과 창의적인 플레이는 우디네세 공격의 새로운 엔진이 되었습니다.
포초 가문의 남미 스카우팅 네트워크가 거둔 최고의 성공 사례 중 하나로 꼽힙니다.
산체스는 디 나타레와 함께 환상적인 공격 듀오를 형성하며 리그를 완벽히 폭격했습니다.
그는 이후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며 구단에 천문학적인 이적료 수익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이적은 우디네세가 '최고의 유망주 사관학교'로서의 명성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9
[한다노비치의 철벽 방어]
슬로베니아 출신 골키퍼 사미르 한다노비치가 팀의 수호신으로 우뚝 섰습니다.
그는 놀라운 반사 신경과 페널티킥 선방 능력으로 팀의 실점을 최소화했습니다.
이탈리아 리그를 넘어 유럽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공인받기 시작했습니다.
한다노비치는 한 시즌 최다 페널티킥 선방 기록을 세우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의 존재로 인해 우디네세 수비진은 더욱 자신감 있게 경기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후 인터 밀란으로 이적하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남았습니다.
2010
[디 나타레 사상 첫 득점왕]
안토니오 디 나타레가 29골을 기록하며 생애 첫 세리에 A 득점왕에 등극했습니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전성기를 맞이한 노장의 투혼에 전 이탈리아가 찬사를 보냈습니다.
우디네세 선수로서는 비어호프, 아모로소에 이어 세 번째 득점왕 배출의 기록입니다.
그는 매 경기 믿기 힘든 골 감각을 선보이며 팀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디 나타레의 득점 행진은 우디네세가 다시 상위권으로 도약하는 강력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 시즌의 활약으로 그는 이탈리아 축구 올해의 선수상까지 휩쓰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2011
[디 나타레 2년 연속 득점왕]
지난해에 이어 28골을 기록하며 2년 연속 세리에 A 득점왕 자리를 굳건히 지켰습니다.
연속 득점왕은 리그 역사에서도 매우 드문 대기록으로 그의 위대함을 재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우디네세는 그의 활약에 힘입어 리그 4위를 차지하며 다시 챔피언스리그로 향했습니다.
디 나타레는 나이를 잊은 듯한 활동량과 정교한 마무리 능력으로 팬들을 매료시켰습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상대 수비진은 경기 내내 극심한 심리적 압박을 견뎌야 했습니다.
이 시기 우디네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효율적인 축구를 하는 팀으로 꼽혔습니다.
2012
[리그 3위 탈환과 기적]
프란체스코 구이돌린 감독의 지휘 아래 리그 3위에 오르는 기적 같은 성과를 냈습니다.
주요 선수들의 이적 공백 속에서도 짜임새 있는 조직력으로 거둔 값진 결과였습니다.
2년 연속 유럽 대항전 진출권을 확보하며 구단의 제2 황금기를 구가했습니다.
구이돌린 감독은 철저한 실리 축구와 선수 맞춤형 전술로 승점을 관리하는 노련함을 보였습니다.
선수들은 감독의 철학을 완벽하게 이행하며 리그의 거물급 팀들을 차례로 무너뜨렸습니다.
팬들은 프리울리 경기장에서 다시 한번 유럽 무대의 꿈을 꾸며 뜨겁게 환호했습니다.
2013
[경기장 명칭권 계약 체결]
자동차 브랜드 다치아(Dacia)와 경기장 명칭권 계약을 맺고 현대화 사업을 가속했습니다.
민간 자본을 유치하여 경기장 시설을 개선하기 위한 구단의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이탈리아 클럽 중 드물게 자립적인 경기장 운영 모델을 구축한 선구적인 사례입니다.
계약 수익은 팀의 전력 보강과 청소년 아카데미 지원 자금으로 투명하게 사용되었습니다.
팬들은 명칭 변경에 처음에는 생소해했으나 현대화된 시설물에 높은 만족도를 보였습니다.
이후 이 경기장은 유럽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소형 전용 구장의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2014
[유스 시스템의 성과 가시화]
구단이 장기적으로 투자해 온 유스 시스템에서 재능 있는 선수들이 1군으로 대거 승격되었습니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발굴된 어린 인재들이 성인 무대에서 곧바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우디네세가 '선수를 만들어 파는' 자급자족형 비즈니스 모델을 완성한 시기입니다.
전 세계에서 온 유망주들은 우디네에서 이탈리아 전술을 익히며 가치를 높여갔습니다.
이들은 이후 빅클럽으로 이적하며 구단에 막대한 재투자 자본을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선순환 구조는 우디네세가 중소 클럽으로서 생존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2016
[다치아 아레나 리모델링 완공]
대대적인 전면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완전히 새로운 모습의 경기장을 공개했습니다.
관중석과 피치 사이의 거리를 획기적으로 좁혀 생동감 넘치는 관람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유벤투스에 이어 두 번째로 현대적인 전용 구장을 보유한 구단이 되었습니다.
개장 기념 경기로 유벤투스와 맞붙어 새로운 안방의 위용을 전 유럽에 과시했습니다.
최첨단 조명 시스템과 쾌적한 편의 시설은 방문객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이 시설은 우디네세가 향후 100년의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강력한 인프라 자산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전설 디 나타레 은퇴]
우디네세의 상징 안토니오 디 나타레가 수많은 박수 속에 현역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카르피와의 홈 경기에서 마지막 골을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고 그라운드를 떠났습니다.
한 시대의 위대한 종언이자 우디네세 역사상 가장 슬프고도 영광스러운 퇴장이었습니다.
경기장은 눈물과 기립박수로 가득 찼으며 팬들은 그의 이름을 목놓아 외쳤습니다.
디 나타레는 은퇴 후에도 구단 앰배서더로 활동하며 우디네세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등번호 10번은 팬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불멸의 숫자로 가슴 속에 남았습니다.
2018
[로드리고 데 파울의 활약]
아르헨티나 출신 로드리고 데 파울이 팀의 새로운 공격 핵심으로 급부상했습니다.
그의 창의적인 패스와 강력한 중거리 슛은 우디네세 공격의 가장 날카로운 무기였습니다.
디 나타레 이후 새로운 에이스를 갈망하던 팬들은 그의 플레이에 열광했습니다.
데 파울은 매 시즌 두 자릿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며 팀의 잔류 경쟁을 견인했습니다.
그의 활약은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주전 발탁으로 이어지며 국제적 가치를 높였습니다.
이후 그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하며 구단에 막대한 규모의 이적료를 남겨주었습니다.
2021
[최첨단 선수 훈련 센터 강화]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위한 최첨단 훈련 시설 'Bruseschi' 센터를 확장 개선했습니다.
과학적인 데이터 분석과 선수 회복 시스템을 갖추어 효율적인 관리를 시작했습니다.
구단의 육성 철학을 실현하기 위한 대규모 인프라 투자의 값진 결실이었습니다.
유스 팀과 성인 팀이 유기적으로 소통하며 구단의 축구 철학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국적의 선수들이 최상의 환경에서 훈련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습니다.
이 훈련 센터는 유럽 내 중소 클럽들이 벤치마킹하는 대표적인 성공 모델이 되었습니다.
2024
[지속 가능한 강소 클럽의 모델]
포초 가문의 경영 아래 세리에 A에서 가장 안정적인 중위권 전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철저한 데이터 기반 스카우팅과 효율적 구단 운영으로 흑자 경영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현대 축구의 흐름을 선도하는 우디네세의 행보는 계속됩니다.
전 세계에서 발굴된 재능 있는 유망주들이 우디네세를 거쳐 월드 스타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지역 사회와의 밀착 마케팅을 통해 충성도 높은 탄탄한 팬층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창단 130주년을 향해 달려가는 우디네세는 이탈리아 축구의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