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쿠

축구 선수, 축구 감독, 행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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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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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쿠는 '하얀 펠레'라 불리며 1980년대 세계 축구를 호령한 브라질의 전설입니다. 플라멩구의 영광을 이끌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컨티넨탈컵 우승을 일궈냈고, 이탈리아 세리에 A와 일본 J리그에서도 거대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은퇴 후에도 일본 축구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끈 지도자이자 행정가로서 축구 역사에 불멸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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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축구 전설의 탄생]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킨티누 보카이우바에서 아르투르 안투니스 코임브라, 일명 지쿠가 태어났습니다. 포르투갈 출신 이민자 가정의 막내로 자라며 어린 시절부터 축구와 함께 성장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조제는 플라멩구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이는 지쿠의 축구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형들인 에두와 안투니스 역시 프로 축구 선수로 활약한 축구 가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좁은 골목에서 풋살을 즐기며 기술적인 기본기를 닦았습니다.

1967

[플라멩구 유소년 입단]

형들의 추천으로 아메리카 FC 입단 테스트를 받을 예정이었으나 라디오 기자의 눈에 띄어 플라멩구에 입단했습니다. 유소년 팀에 합류하며 명문 클럽에서의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라디오 기자 셀소 가르시아가 풋살 경기에서 10골을 넣는 그를 보고 플라멩구로 데려갔습니다.
초기에는 체격이 너무 왜소하여 체력을 보강하기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이수했습니다.
근육량을 늘리는 집중 훈련을 통해 성인 팀에서 뛸 수 있는 몸상태를 만들었습니다.

1969

[주니어 팀 공식 승격]

유소년 과정을 거쳐 플라멩구의 주니어 팀으로 승격하며 프로 무대 진입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기술적인 완성도가 높아지며 팀의 핵심 유망주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그는 팀 내에서 가장 뛰어난 테크니션으로 손꼽히며 큰 기대를 받았습니다.
주니어 팀에서의 활약은 훗날 1군 감독들의 눈에 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습득한 프리킥 실력은 그의 평생 전매특허가 되었습니다.

1971

[프로 무대 공식 데뷔]

바스쿠 다 가마와의 경기에서 플라멩구 1군 선수로 첫 공식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신인답지 않은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팀의 결승골을 돕는 귀중한 도움을 기록했습니다.

피우 마라빌랴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화려한 데뷔를 알렸습니다.
전반적인 경기 주도권을 쥐는 플레이메이커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이 경기를 통해 플라멩구 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습니다.

1972

[생애 첫 프로 우승]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생애 첫 프로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팀의 일원으로서 당당히 우승 컵을 들어 올리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습니다.

데뷔 2년 차에 지역 리그 챔피언이 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주니어 팀으로 돌아가 경기력을 재점검하는 시기를 거치기도 했습니다.
우승의 맛을 본 지쿠는 팀의 절대적인 에이스로 거듭나기 위해 훈련에 매진했습니다.

1973

[완전한 주전 자리 확보]

플라멩구의 1군 팀에 완전히 복귀하여 주전 플레이메이커로 자리 잡았습니다. 뛰어난 득점력과 패싱 능력을 동시에 선보이며 팀 전술의 핵으로 급부상했습니다.

시즌 내내 기복 없는 활약을 펼치며 감독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습니다.
리그 전체에서 가장 창의적인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플라멩구는 리그 상위권 경쟁을 이어갔습니다.

1974

[전설의 등번호 10번]

플라멩구의 상징인 등번호 10번을 물려받으며 명실상부한 팀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에서 20골을 터뜨리며 득점 감각을 뽐냈습니다.

전설적인 등번호를 단 첫 해에 득점왕 경쟁을 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습니다.
브라질 유력 매체로부터 전국 리그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제 지쿠는 플라멩구를 넘어 브라질 전체가 주목하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1975

[산드라와 백년가약]

오랜 연인이었던 산드라 카르발류 데 소사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습니다. 안정적인 가정생활은 그가 축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1969년에 처음 만난 연인과 결실을 맺으며 평생의 동반자를 맞이했습니다.
슬하에 아르투르 주니어, 브루누, 티아구라는 세 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가족의 응원 속에 지쿠는 더욱 매서운 경기력을 선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76

[친구를 위한 슬픈 우승]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절친한 팀 동료 제랄두 클레오파스를 기리는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슬픔을 딛고 펠레 등 전설들이 참여한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제랄두 클레오파스 트로피라는 명칭으로 열린 추모 경기였습니다.
플라멩구는 펠레와 히벨리누가 포함된 연합팀을 상대로 2:0 승리를 거뒀습니다.
지쿠는 경기 후 눈물을 흘리며 죽은 친구에게 우승을 바쳤습니다.

[브라질 국가대표 데뷔]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역사적인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데뷔 경기에서 환상적인 골을 터뜨리며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국가대표 데뷔골을 기록하며 삼바 군단의 새로운 에이스 등장을 알렸습니다.
브라질 국민들은 그를 전설적인 펠레의 진정한 후계자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0년 넘게 브라질 중원을 책임지는 핵심 멤버로 활약하게 됩니다.

1977

[남미 올해의 선수 선정]

생애 처음으로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상을 수상하며 대륙 최고의 선수로 공인받았습니다.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오가는 눈부신 활약의 결실이었습니다.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전문가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의 창의적인 패스와 정교한 프리킥은 남미 전역의 공포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상을 통해 지쿠는 세계 무대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1978

[월드컵 첫 무대 밟다]

아르헨티나 월드컵에 브라질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처음으로 세계 최고의 무대를 경험했습니다.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브라질이 대회 3위를 기록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스웨덴과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논란의 골 취소 사건을 겪기도 했습니다.
생애 첫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무패 3위라는 성적을 거두는 데 일조했습니다.
세계 언론은 지쿠라는 새로운 천재의 등장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장남 아르투르 주니어 탄생]

첫째 아들 아르투르가 태어나며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가족의 확장은 그에게 더 큰 책임감과 경기장에서의 동기부여를 제공했습니다.

가족들의 축복 속에 아버지가 된 지쿠는 더욱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이를 위해 더 멋진 경기를 펼치겠다는 다짐이 경기력 향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지쿠는 바쁜 일정 중에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1979

[클럽 최다 득점자 등극]

전설적인 선수 디다의 기록을 넘어 플라멩구 역대 최다 득점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미드필더임에도 불구하고 264골을 돌파하는 경이로운 득점력을 과시했습니다.

플레이메이커가 팀의 최다 득점 기록을 갈아치우는 이례적인 성과였습니다.
그의 득점 페이스는 브라질 축구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팬들은 그를 플라멩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추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코파 아메리카 3위]

브라질 대표팀 소속으로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하여 팀을 3위로 이끌었습니다. 대륙 최고의 팀을 가리는 경쟁 속에서 변함없는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중원에서 경기를 조율하며 여러 차례 결정적인 기회를 창출했습니다.
비록 우승에는 실패했으나 개인적으로는 대회 베스트 라인업 수준의 활약을 했습니다.
이 대회를 통해 남미 축구계에서의 입지를 더욱 탄탄히 굳혔습니다.

1980

[전국 리그 첫 우승]

플라멩구 역사상 처음으로 브라질 전국 리그(브라질레이랑)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습니다.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와의 결승전에서 결정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부상 여파가 있었음에도 결승 2차전에 출전하여 팀의 역전 우승을 도왔습니다.
지역 리그를 넘어 브라질 전체의 챔피언으로 등극한 역사적인 해였습니다.
이 우승을 기점으로 플라멩구의 황금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습니다.

1981

[두 번째 남미 올해의 선수]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컨티넨탈컵 우승 공로를 인정받아 다시 한번 남미 올해의 선수로 뽑혔습니다. 전 세계가 그를 현역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인정했습니다.

유럽 유수의 클럽들로부터 천문학적인 이적 제안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지쿠는 고향 팀인 플라멩구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며 잔류했습니다.
그의 명성은 브라질을 넘어 전 세계 축구 팬들의 우상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남미 클럽 정상 등극]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서 칠레의 코브렐로아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대회 득점왕과 MVP를 동시에 석권하며 압도적인 실력을 전 세계에 증명했습니다.

결승전에서만 4골을 몰아넣는 괴력을 선보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남미 최고의 클럽 선수라는 칭호를 얻으며 명성을 떨쳤습니다.
이 우승으로 플라멩구는 세계 클럽 대항전 티켓을 거머쥐었습니다.

[세계 클럽 챔피언 등극]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인터컨티넨탈컵에서 유럽 챔피언 리버풀을 3:0으로 완파했습니다. 지쿠는 직접 골을 넣지는 않았지만 3골에 모두 관여하며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습니다.

리버풀의 밥 페이즐리 감독도 감탄할 만큼 완벽한 경기 지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부상으로 받은 도요타 차를 팀 동료들과 나누는 미담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플라멩구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의 중심에는 언제나 지쿠가 있었습니다.

1982

[전국 리그 2연패 달성]

그레미우를 꺾고 다시 한번 브라질 전국 리그 정상에 오르며 플라멩구의 전성기를 이어갔습니다. 리그 최고의 득점력을 과시하며 팀의 연승 행진을 주도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득점을 올리며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이 우승으로 플라멩구는 명실상부한 브라질 최고의 명문 구단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지쿠의 리더십은 경기장 안팎에서 빛을 발하며 팀의 단합을 이끌었습니다.

[남미 올해의 선수 3회 수상]

대륙 역사상 드문 기록인 남미 올해의 선수 3회 수상을 달성하며 전설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2년 연속 수상이자 통산 3번째 영광으로 대륙 최강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지쿠라는 이름 자체가 남미 축구의 상징이 된 기념비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실력은 이제 남미라는 무대가 좁게 느껴질 정도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팬들은 그가 유럽 무대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 섞인 우려를 보냈습니다.

[월드컵 황금 사중주 결성]

스페인 월드컵에서 소크라치스, 파우캉, 토니뉴 세레주와 함께 환상적인 미드필더 라인을 구축했습니다. 예술적인 축구로 전 세계를 매료시키며 우승 후보 1순위로 꼽혔습니다.

비록 이탈리아에 패해 2라운드에서 탈락했지만 역대 최고의 팀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지쿠는 대회에서 4골을 넣으며 월드컵 올스타 팀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결과는 아쉬웠으나 브라질식 공격 축구의 정수를 보여준 역사적인 대회였습니다.

1983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영국 잡지 월드 사커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선수상을 받으며 공식적인 세계 1위로 인정받았습니다. 남미와 유럽 모두에서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플라멩구에서의 마지막과 우디네세에서의 시작이 모두 완벽했음을 의미하는 상입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당당히 정점에 섰습니다.
이 수상을 통해 지쿠는 '하얀 펠레'라는 별명에 걸맞은 명성을 확립했습니다.

[이탈리아 우디네세 이적]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금액인 400만 달러에 이탈리아 우디네세 칼초로 이적했습니다. 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우디네세 팬들은 지쿠를 데려오지 않으면 오스트리아에 통합되겠다며 시위까지 벌였습니다.
작은 도시 우디네는 지쿠의 합류로 전 세계 축구의 중심지로 떠올랐습니다.
그의 이적은 이탈리아 세리에 A 전체의 위상을 높이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1984

[세리에 A 득점 2위 기록]

유럽 데뷔 첫 시즌에 19골을 몰아넣으며 미셸 플라티니에 이어 득점 2위에 올랐습니다. 약팀인 우디네세를 이끌고 보여준 경이로운 기록이었습니다.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결장하고도 리그 최정상급 득점력을 과시했습니다.
특히 전설적인 프리킥 골들을 양산하며 이탈리아 수비진을 무너뜨렸습니다.
우디네세 시민들은 지쿠를 신처럼 받들며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습니다.

1985

[이탈리아 탈세 논란과 무죄]

초상권 계약 관련 문제로 법적 분쟁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었으나 훗날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계약상의 오해로 발생한 일이었으나 그에게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1심에서는 유죄 판결이 나와 옥고를 치를 뻔한 위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4년 뒤 모든 혐의를 벗으며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했습니다.
이 사건은 지쿠가 이탈리아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한 결정적 이유가 되었습니다.

[금의환향과 플라멩구 복귀]

친정팀 플라멩구로 복귀하여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화려한 복귀전을 치렀습니다. 마라도나, 루메니게 등 세계적인 스타들이 참여한 특별한 경기였습니다.

플라멩구 팬들은 그들의 영웅이 돌아오자 눈물을 흘리며 환영했습니다.
다시 10번 유니폼을 입은 지쿠는 고향 팀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복귀는 침체되어 있던 브라질 리그에 활력을 불어넣은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선수 생명 위협한 큰 부상]

방구(Bangu)와의 경기에서 수비수 마르시우 누니스에게 살인적인 태클을 당해 무릎 중상을 입었습니다. 커리어를 끝낼 수도 있는 치명적인 부상으로 오랜 재활에 들어갔습니다.

무릎에 세 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던 고통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축구 선수로서 다시 걷기 힘들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지쿠는 하루 8시간 이상의 가혹한 재활 훈련을 견뎌내며 부활을 꿈꿨습니다.

1986

[지역 리그 우승컵 탈환]

플라멩구와 함께 다시 한번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부상 복귀 후 일궈낸 성과라 그 어떤 우승보다 값지고 의미가 컸습니다.

소크라치스와 함께 중원을 장악하며 플라멩구의 클래스를 보여주었습니다.
부상의 후유증을 정신력으로 극복하며 팀원들을 이끌었습니다.
이 우승을 통해 지쿠는 다가올 월드컵 출전에 대한 희망을 키웠습니다.

[기적 같은 그라운드 복귀]

부상 6개월 만에 다시 경기장에 서는 기적 같은 회복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무너진 근육을 다시 세우며 불굴의 의지로 팬들 앞에 섰습니다.

완벽한 몸상태는 아니었지만 그의 존재만으로도 팀은 큰 힘을 얻었습니다.
리그 우승을 위해 헌신하며 자신이 아직 건재함을 골로 증명했습니다.
팬들은 돌아온 영웅의 이름을 연호하며 뜨거운 응원을 보냈습니다.

[마지막 월드컵 출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하며 개인 통산 세 번째 월드컵 무대에 섰습니다. 부상 여파로 선발보다는 조커로 활약하며 팀의 중심을 잡았습니다.

프랑스와의 8강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창의적인 패스는 여전히 위협적이었고 상대 팀을 긴장시켰습니다.
이 대회를 끝으로 지쿠는 월드컵이라는 위대한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

1987

[전국 리그 네 번째 우승]

코파 우니앙(Copa União)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개인 통산 네 번째 전국 리그 타이틀을 거머쥐었습니다.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어린 선수들을 이끌며 우승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당시 리그의 정통성을 두고 논란이 있었으나 지쿠의 실력에는 논란이 없었습니다.
플라멩구의 상징으로서 은퇴 전 마지막 불꽃을 태웠습니다.
이후 지쿠는 서서히 은퇴를 준비하며 후배 양성에 힘쓰기 시작했습니다.

1989

[플라멩구 공식 은퇴]

플루미넨시와의 경기를 끝으로 정든 플라멩구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수많은 기록과 우승컵을 남기고 브라질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은퇴 경기에서 5:0 대승을 거두며 마지막까지 영웅다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플라멩구 역대 최다인 508골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전 세계 축구계는 위대한 플레이메이커의 은퇴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1990

[브라질 체육부 장관 부임]

은퇴 후 브라질 정부의 스포츠 비서관(장관급)으로 임명되어 행정가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브라질 스포츠 시스템의 현대화와 부패 척결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짧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스포츠 행정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법안들을 제안했습니다.
그의 정치적 중립성과 청렴함은 많은 브라질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행정 체계의 한계를 느끼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습니다.

1991

[일본 스미토모 입단]

은퇴 번복 후 일본의 스미토모 금속(現 가시마 앤틀러스)에 입단하며 일본 축구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프로 리그 출범을 준비하던 일본 축구계에 큰 충격과 기쁨을 안겼습니다.

현역 선수로서의 마지막 열정을 일본의 축구 발전을 위해 쏟기로 결정했습니다.
그의 합류로 가시마는 단숨에 일본의 인기 구단으로 도약했습니다.
지쿠는 단순한 선수를 넘어 일본 축구의 스승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93

[J리그 첫 해트트릭]

J리그 공식 개막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자신의 클래스가 영원함을 입증했습니다. 4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본 축구팬들에게 충격적인 데뷔전을 선사했습니다.

나고야 그램퍼스를 상대로 보여준 그의 활약은 J리그 붐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일본 선수들은 지쿠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프로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가시마 앤틀러스의 홈 구장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1994

[선수 생활 최종 은퇴]

41세의 나이로 가시마 앤틀러스에서 선수로서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일본 축구의 기반을 닦은 '축구의 신'으로 불리며 명예롭게 은퇴했습니다.

은퇴 후에도 가시마의 기술 고문으로 남아 팀의 철학을 완성시켰습니다.
그가 남긴 '가시마 정신'은 지금도 팀의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여겨집니다.
지쿠의 등번호 10번은 가시마에서도 전설적인 번호로 남았습니다.

1995

[비치 사커 월드컵 MVP]

브라질 비치 사커 대표팀으로 월드컵에 출전하여 우승과 함께 MVP, 득점왕을 차지했습니다. 은퇴 후에도 공과 함께라면 언제나 최고의 기량을 보였습니다.

모래 위에서도 그의 정교한 킥 능력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비치 사커가 정식 스포츠로 자리 잡는 데 지쿠의 참여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팬들은 다시 한번 그의 화려한 기술에 열광했습니다.

1996

[FIFA 공로상 수상]

축구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FIFA 훈장을 수여받으며 전 세계적인 존경을 받았습니다. 선수와 행정가로서 보여준 헌신에 대한 최고의 보상이었습니다.

전설적인 인물들에게만 주어지는 이 상을 통해 지쿠의 업적이 재조명되었습니다.
지쿠는 수상 소감에서 축구의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는 일에 더 매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후 지쿠는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구상했습니다.

1998

[브라질 대표팀 기술 조정관]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기술 코디네이터로 합류했습니다. 지도부와 선수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며 팀의 준우승에 기여했습니다.

호나우두 등 젊은 스타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수했습니다.
결승전 패배의 아픔을 함께하며 팀의 재건을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직접 감독직을 맡는 데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99

[가시마 임시 감독 부임]

위기에 빠진 가시마 앤틀러스의 지휘봉을 잠시 잡아 팀을 안정시켰습니다. 선수들이 가장 신뢰하는 존재로서 빠르게 팀 분위기를 수습했습니다.

직접 훈련을 지도하며 가시마 고유의 색깔을 되찾아주었습니다.
잠깐의 감독직이었으나 지도자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가시마의 모든 감독 선임 과정에서 지쿠의 자문은 필수적인 절차가 되었습니다.

2002

[일본 대표팀 감독 선임]

필리프 트루시에의 뒤를 이어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사령탑으로 부임했습니다. 일본 축구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끌어야 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일본 선수들의 기술적 장점을 극대화하는 전술을 도입했습니다.
지쿠의 부임은 일본 축구 팬들에게 엄청난 기대와 설렘을 주었습니다.
그는 '자율 축구'를 강조하며 선수들의 창의력을 높이는 데 주력했습니다.

2004

[아시안컵 우승 달성]

중국에서 열린 AFC 아시안컵에서 일본을 이끌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적대적인 응원 속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완벽한 승리를 일궈냈습니다.

결승전에서 주최국 중국을 3:1로 격파하며 대륙 최강의 자리를 확인했습니다.
지쿠 감독의 전술적 유연함이 빛을 발한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이 우승으로 지쿠는 일본 내에서 확고한 지도력을 인정받았습니다.

2006

[독일 월드컵 지휘]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독일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습니다. 아쉽게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으나 일본 축구가 세계와 경쟁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호주전 역전패의 아쉬움이 컸으나 선수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대회 후 지쿠는 일본 축구에 대한 깊은 애정을 남기며 감독직을 마무리했습니다.
일본 축구 협회는 그의 공로를 치하하며 명예로운 이별을 선사했습니다.

[페네르바체 감독 부임]

터키의 명문 구단 페네르바체 SK의 지휘봉을 잡고 유럽 무대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부임 첫 시즌부터 강력한 리더십으로 리그를 평정했습니다.

터키 리그 우승과 터키 슈퍼컵 우승을 동시에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공격적인 축구 철학으로 터키 팬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습니다.
유럽 무대에서도 지도자 지쿠의 명성은 빠르게 높아졌습니다.

2008

[챔피언스리그 8강 진출]

페네르바체를 이끌고 UEFA 챔피언스리그 8강에 진출하는 이변을 일으켰습니다. 유럽의 거물급 팀들을 상대로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며 지도력을 입증했습니다.

클럽 역사상 최초의 챔피언스리그 8강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전 세계는 지쿠가 이끄는 페네르바체의 돌풍에 주목했습니다.
비록 첼시에 패해 4강 진출은 실패했으나 페네르바체의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우즈벡 부뇨드코르 부임]

우즈베키스탄의 FC 부뇨드코르 감독으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도전에 나섰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우즈벡 리그와 컵 대회를 모두 우승시켰습니다.

히바우두 등 스타 선수들과 함께 우즈벡 축구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단기간에 팀의 전력을 극대화하는 그의 능력이 다시 한번 증명되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지쿠의 합류를 국가적인 경사로 받아들였습니다.

2009

[CSKA 모스크바 사령탑]

러시아 명문 PFC CSKA 모스크바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러시아 프리미어리그를 경험했습니다. 러시아 컵과 러시아 슈퍼컵 우승 트로피를 팀에 안겼습니다.

추운 기후와 낯선 환경에서도 빠르게 우승 컵을 수집했습니다.
선수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며 러시아 축구의 특색을 전술에 반영했습니다.
하지만 시즌 중반 성적 부진과 의견 차이로 팀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올림피아코스 감독 취임]

그리스 최고 명문 올림피아코스 FC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유럽 경력을 이어갔습니다. 팀을 챔피언스리그 16강으로 이끄는 등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열정적인 그리스 팬들에게 수준 높은 공격 축구를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보드진과의 불화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는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럽 여정은 다양한 국가와 리그를 경험하며 풍부해졌습니다.

2010

[플라멩구 디렉터 복귀]

은퇴 21년 만에 친정팀 플라멩구의 축구 디렉터로 전격 복귀했습니다. 구단의 현대화와 성적 향상을 위해 4년 계약을 맺고 행정가로 돌아왔습니다.

팬들은 영웅의 귀환에 마라카낭 경기장을 가득 메우며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구단 내부 정치와 보드진과의 마찰로 5개월 만에 사임했습니다.
고향 팀에 대한 실망감을 안고 짧은 행정가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2011

[이라크 대표팀 사령탑]

이라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어 중동 축구 재건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선수들을 독려하며 월드컵 예선을 치렀습니다.

임금 체불 문제 등 이라크 협회와의 갈등으로 이듬해 사임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지쿠는 이라크 축구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그의 지도 아래 이라크는 잠시나마 조직적인 축구를 보여주었습니다.

2015

[FIFA 회장직 도전]

제프 블라터의 부패 스캔들로 공석이 된 FIFA 회장직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축구계의 정화와 민주적인 운영을 기치로 내걸고 전 세계의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현실적인 추천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최종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FIFA 개혁의 필요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쿠는 축구가 다시 축구인들의 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2018

[가시마 기술고문 취임]

자신의 두 번째 고향인 가시마 앤틀러스의 기술 고문으로 재직하며 팀을 돕고 있습니다. 선수, 감독, 디렉터에 이어 고문의 자리까지 팀과 오랜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재도 일본과 브라질을 오가며 가시마의 전력 강화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가시마 선수들은 큰 자부심과 동기를 얻습니다.
일본 축구의 대부로서 지쿠의 유산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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