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하이밍

외교관, 고위관료,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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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12- 09: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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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하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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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하이밍은 중국 톈진시 출신의 고위 외교관입니다. 사리원농업대학에서 한국어를 익히고 1986년 중국 외교부에 입부했습니다. 북한과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에서 다양한 직책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고, 주몽골 중국 대사를 역임했습니다. 2020년 1월부터 제8대 주한 중국 대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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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한반도 전문가의 탄생]

중국 톈진시에서 태어나 성장하며 훗날 외교관이 되기 위한 초석을 다집니다. 유년 시절부터 뛰어난 학업 능력을 보이며 지역 사회의 기대를 받았습니다.

싱하이밍은 1964년 11월 중화인민공화국 톈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중국 외교부 내에서도 손꼽히는 한반도 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한 자양분을 톈진에서 얻었습니다.
이후 그의 행보는 중국의 대외 정책 중 한반도 노선과 궤를 같이하게 됩니다.

1982

[북한 사리원교대 유학]

북한 사리원강건제1사범대학(현 사리원교원대학)에 입학하여 조선어문학을 전공합니다. 현지에서 직접 언어와 문화를 익히며 한반도 전문가로서의 기본기를 갖춥니다.

싱하이밍은 1982년 북한으로 건너가 사리원강건제1사범대학 조선어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소수의 엘리트를 선발하여 북한으로 유학을 보내 한반도 전문가를 양성했습니다.
이 시기에 습득한 유창한 한국어는 훗날 그의 가장 강력한 외교적 무기가 되었습니다.

1984

[사리원교원대학 졸업]

북한에서의 학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대학을 졸업하며 전문 지식을 공고히 합니다. 대학 시절 보여준 학술적 성취는 외교부 입성의 중요한 발판이 됩니다.

1984년 사리원강건제1사범대학을 졸업하며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유학 기간 동안 현지 학생들과 교류하며 북한 사회의 내부 구조와 정서를 깊이 있게 이해했습니다.
이 졸업장은 그가 단순히 언어만 할 줄 아는 외교관이 아님을 증명하는 첫 번째 지표가 되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입학]

사범대학 졸업 후 북한 최고의 명문인 김일성종합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심화 과정을 밟습니다. 최고 학부에서의 경험은 북한 고위층 인맥 형성에 큰 도움을 줍니다.

싱하이밍은 1984년 연이어 북한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 전공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북한 엘리트들의 요람으로, 이곳에서의 공부는 그의 외교 역량을 한 단계 격상시켰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북한의 정치적 체계와 이데올로기를 학문적으로 체득했습니다.

1986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북한에서의 유학 생활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합니다.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한반도 통으로서 중국 외교부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1986년 김일성종합대학 대학원 과정을 졸업했습니다.
4년간의 북한 체류 경험은 그를 중국 내 독보적인 한반도 자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졸업 직후 그는 조국으로 돌아가 외교관으로서의 본업을 시작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중국 외교부 전격 입성]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아시아사(아시아국)에 배정되어 본격적인 공직 생활을 시작합니다. 신입 외교관으로서 한반도 관련 실무를 맡으며 현장 감각을 익힙니다.

1986년 졸업과 동시에 중국 외교부 아시아사 직원으로 임용되었습니다.
그는 아시아사 중에서도 한국과 북한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에 배치되어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외교부 본부에서의 실무 경험은 그가 거시적인 외교 정책의 흐름을 읽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88

[주북한 대사관 발령]

해외 파견 근무의 첫지로 북한 주재 중국 대사관의 직원(수습)으로 부임합니다. 유학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지 외교 무대에 빠르게 적응합니다.

1988년 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의 직원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수습 기간 동안 그는 대사관 운영과 외교 문서 작성 등 기초 실무를 완벽하게 습득했습니다.
사회주의 형제국인 북한과의 외교 최전선에서 그의 경력은 화려하게 시작되었습니다.

1989

[아타셰 직급 승진]

대사관 아타셰(Attache)로 정식 승진하며 외교관으로서의 공식 직함을 얻습니다. 실무형 인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북한 내 다양한 행사에 참여합니다.

1989년 주북한 대사관에서 아타셰 직급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아타셰는 외교관의 가장 기초적인 직급이지만, 그는 이 시기부터 중요한 통역과 의전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냉전 종식의 기운이 감돌던 시기, 그는 평양의 중심에서 정세를 관찰했습니다.

1991

[평양 근무 임무 완수]

주북한 대사관에서의 첫 파견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본부로 복귀합니다. 현장에서 쌓은 생생한 정보는 중국 외교부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1991년 주북한 대사관 근무를 마치고 베이징 외교부 본부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북한 내 정치 동향과 지도부의 성향을 파악한 전문성을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본부 복귀 후 그는 다가올 한중 수교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준비하게 됩니다.

[외교부 본부 아타셰]

외교부 본부 아시아사에서 아타셰로 근무하며 정책 결정 과정을 지원합니다. 수교 전 단계의 민감한 사안들을 다루며 핵심 실무자로 거듭납니다.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외교부 아시아사에서 본부 아타셰로 재직했습니다.
이 시기는 한중 수교를 위한 물밑 접촉이 가장 활발했던 때로, 그는 실무 지원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베이징 본부에서의 근무는 그의 시야를 현장에서 정책 전반으로 넓혀주었습니다.

1992

[초대 주한대사관 3등서기관]

주한 중국 대사관의 3등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대남 외교를 시작합니다. 수교 초기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양국 협력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1992년 주한 대사관의 3등서기관으로 보직을 받았습니다.
그는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을 중국 정부에 보고하고 협력 방안을 모색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 시기 구축한 한국 내 인맥은 훗날 그가 대사가 되었을 때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한중 수교의 역사적 현장]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자마자 주한 중국 대사관의 창설 멤버로 한국에 부임합니다.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역사적인 순간에 실무자로 참여합니다.

1992년 8월 한중 수교 직후 주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의 창설 멤버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수교 초기 대사관의 기틀을 잡는 실무 책임을 맡아 헌신했습니다.
한국어에 능통한 그는 한국 정부 관계자들과의 소통 창구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1993

[한국 내 활동 반경 확대]

서기관으로서 한국 내 다양한 정재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대사관의 입지를 넓힙니다.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대중 매체와의 접촉도 시작합니다.

1993년 주한 대사관 근무 중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현장 활동에 집중했습니다.
수교 초기의 서먹함을 없애기 위해 친화력을 발휘하며 한국 측 파트너들과 신뢰를 쌓았습니다.
그의 업무 처리 능력은 베이징 본부에서도 높은 신뢰를 받았습니다.

1995

[2등서기관 승진 및 복귀]

한국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2등서기관으로 승진하며 외교부 본부로 복귀합니다. 3년간의 한국 근무 경험은 그를 외교부 내 핵심 인재로 각인시켰습니다.

1995년 주한 대사관 임기를 마치고 2등서기관으로 승진하여 본부 아시아사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한국에서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의 대남 정책 수립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본부 근무를 통해 그는 정책 결정의 상층부 메커니즘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아시아사 2등서기관 재직]

본부 아시아사에서 2등서기관으로서 한반도 관련 핵심 사안들을 총괄합니다. 북핵 위기와 남북 관계의 급변 상황 속에서 중국의 입장을 조율하는 실무를 맡습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외교부 아시아사 2등서기관으로 재직했습니다.
이 시기 한반도 주변 정세가 요동치면서 그의 분석과 보고는 외교부 내에서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미 관계와 한일 관계의 변화까지도 면밀히 관찰하며 중국의 전략을 보좌했습니다.

1997

[1등서기관 직급 획득]

성실한 업무 성과를 바탕으로 1등서기관으로 승진하며 중간 관리자의 역할을 맡습니다. 부하 직원들을 지도하고 부서 내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등 책임감이 막중해집니다.

1997년 외교부 본부에서 1등서기관으로 승격되었습니다.
1등서기관은 실무와 관리를 동시에 수행하는 직급으로, 그는 한반도 데스크의 핵심 운영을 책임졌습니다.
그의 전문성은 외교부 내 '한반도 파벌' 내에서도 단연 돋보였습니다.

1999

[부처장(부과장) 발탁]

아시아사 내 한반도 관련 부서의 부처장으로 임명되어 실질적인 팀 리더가 됩니다. 정책의 세부 실행 계획을 수립하고 실무진을 지휘하며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외교부 아시아사의 부처장(중국 직급상 부과장급)으로 근무했습니다.
이 4년간 그는 한반도 정책의 실질적인 설계자 중 한 명으로 활동했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시기, 한중 관계의 비약적 발전을 뒤에서 지원한 실무 책임자였습니다.

2003

[주한대사관 참사관 부임]

참사관 직급으로 다시 한국에 파견되어 대사관의 고위 간부로서 활동합니다. 한중 관계가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합니다.

2003년 주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의 참사관으로 부임했습니다.
참사관은 대사의 참모로서 정무와 경제 등 주요 영역의 정책을 총괄하는 요직입니다.
그는 이 시기 한국의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새로운 한중 협력 시대를 여는 데 일조했습니다.

2005

[한국 내 영향력 확대]

대사관 참사관으로서 한국 내 여론 주도층과의 접점을 대폭 넓힙니다. 다양한 세미나와 포럼에 참석하여 중국의 입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목소리가 됩니다.

2005년까지 주한 대사관 참사관으로 재직하며 한국 사회 전반에 걸친 네트워크를 공고히 했습니다.
특히 한국의 여야 정치인 모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중국의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유창한 한국어 연설은 매번 한국 청중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2006

[주북한대사관 참사관 이동]

한국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다시 평양으로 이동하여 주북한 대사관 참사관을 맡습니다. 남북한 모두를 속속들이 아는 외교관으로서 중국의 균형 외교를 상징합니다.

2006년 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의 참사관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서울 근무 직후 평양으로 이동한 배치는 그의 한반도 전문가로서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 그는 평양 현장에서 중국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2008

[평양 근무 종료 및 복귀]

북한에서의 참사관 임무를 무사히 수행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 준비를 합니다. 남북 관계의 가교 역할을 했던 평양에서의 2년은 그의 경력에 깊이를 더했습니다.

2008년 주북한 대사관 참사관 임기를 마쳤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북한 고위층과의 채널을 재정비하고 중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는 평양에서의 경험을 뒤로하고, 다시 한번 한국으로의 복귀를 명받았습니다.

[주한대사관 공사참사관]

공사참사관(Minister-Counselor)이라는 고위직으로 다시 한국 대사관에 부임합니다. 대사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사관의 실질적인 살림을 책임집니다.

2008년 주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의 공사참사관으로 부임했습니다.
공사참사관은 대사관 내 서열 2~3위에 해당하는 고위직으로, 그의 위상은 수교 초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습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한중 관계의 새로운 전략적 동반자 관계 격상을 현장에서 지휘했습니다.

2010

[한중 현안 조율의 중심]

천안함 및 연평도 포격 사태 등 위중한 시기에 공사참사관으로서 한국 정부와의 소통을 전담합니다. 갈등 상황을 관리하고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중국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2010년 한반도 정세가 극도로 악화되었을 때 그는 대사관의 실무 사령탑이었습니다.
그는 밤낮없이 한국 외교부 관계자들과 접촉하며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이 시기의 위기 관리 경험은 그를 노련한 외교 전문가로 단련시켰습니다.

2011

[외교부 아시아사 부사장]

중국 외교부 본부의 아시아사 부사장(부국장급)으로 승진하며 정책 결정의 핵심으로 진입합니다. 중국의 전체 아시아 정책, 특히 동북아 정책 수립을 총괄하게 됩니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외교부 아시아사의 부사장(Deputy Director-General)으로 재직했습니다.
그는 장예수이, 류전민 등 거물급 외교관들을 보좌하며 중국의 한반도 외교 라인을 이끌었습니다.
이 시기 그는 6자 회담과 북핵 문제 대응 등 굵직한 현안들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2013

[시진핑 시대의 한반도 정책]

시진핑 주석 체제 출범 후 아시아사 부사장으로서 새로운 외교 기조를 현장에 적용합니다. 한국의 박근혜 정부와의 관계 강화를 위한 고위급 방문 등을 기획합니다.

2013년 시진핑 주석의 방한 및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실무를 본부에서 총괄했습니다.
한중 관계의 '황금기'라고 불리던 이 시기에 그는 양국 정상이 합의한 실무 과제들을 차질 없이 이행했습니다.
그의 정책적 식견은 외교부 내에서도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평가받았습니다.

2015

[주몽골 대사 임명]

특명전권대사로 승진하여 주몽골 중화인민공화국 대사로 부임합니다. 한반도를 떠나 새로운 지역에서 중국의 외교 전략인 '일대일로'를 관철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습니다.

2015년 8월 싱하이밍은 생애 첫 대사 보직으로 주몽골 대사에 임명되었습니다.
몽골은 중국의 전략적 동반자이자 에너지 자원 협력의 핵심 국가로, 그의 파견은 큰 기대를 모았습니다.
그는 몽골에서도 강력한 외교력을 발휘하며 중국의 영향력을 공고히 했습니다.

[몽골 대통령 앞 신임장 제정]

몽골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전달하며 대사로서의 공식 활동을 시작합니다. 몽골 정치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양국 간 경제 협력을 가속화합니다.

2015년 8월 21일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신임장을 제정했습니다.
그는 부임 직후부터 몽골의 인프라 건설에 중국 기업들이 대거 참여하도록 길을 텄습니다.
몽골 내에서의 중국 자본 투입은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비약적으로 증가했습니다.

2017

[초원 실크로드 구축 주력]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과 몽골의 '초원의 길' 정책을 연계시키는 데 주력합니다. 몽골의 만성적인 전력난과 교통 인프라 문제를 중국의 지원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합니다.

2017년 싱하이밍은 몽골 내 대규모 도로 및 교량 건설 프로젝트를 성사시켰습니다.
그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중국의 원조가 몽골 국민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됨을 강조했습니다.
몽골 내 반중 정서를 완화하고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노련한 외교를 펼쳤습니다.

2019

[몽골 근무 성공적 마무리]

4년 넘는 몽골 대사 임기를 마치고 다음 행선지를 위해 베이징으로 소환됩니다. 몽골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 훈장을 수여받는 등 찬사를 받았습니다.

2019년 말 그는 몽골 대사직을 이임했습니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몽골과 중국의 관계를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격상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성과는 그가 곧 한반도로 화려하게 복귀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습니다.

2020

[주한 중국 대사 내정]

추궈홍 대사의 뒤를 이어 제8대 주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 특명전권대사로 내정됩니다. 수교 초기 실무진이 대사가 되어 돌아오는 파격적인 인사의 주인공이 됩니다.

2020년 1월 싱하이밍은 한국 대사로 공식 임명되었습니다.
한국 사정에 가장 밝은 '올드 프렌드'의 귀환에 한국 정계와 언론은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대사로 부임하며 한중 관계의 새로운 도약을 약속했습니다.

[한국 땅을 밟은 대사]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한국에 입국하며 대사로서의 첫걸음을 뗍니다. 코로나19 확산이라는 엄중한 상황 속에서도 방역 협력과 우호 증진을 최우선 과제로 내겁니다.

2020년 1월 30일 싱하이밍 대사가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입국 일성으로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사자성어를 인용하며 한중 협력을 강조했습니다.
마스크 지원 등 감염병 위기 속에서의 인도적 지원을 즉각적으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신임장 제정]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고 공식 집무에 들어갑니다. 양국 정상이 합의한 교류 협력을 적극 추진하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지원합니다.

2020년 2월 7일 청와대 본관에서 신임장 제정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시진핑 주석의 안부 인사를 전하며 조속한 방한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정부 간 긴밀한 소통 채널을 복원하고 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코로나19 방역 외교 전개]

방역 물품 지원과 '신속 통로' 개설을 통해 양국 경제인들의 이동을 돕습니다. 전 세계적 팬데믹 상황에서 한중 관계가 모델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2020년 상반기 그는 한국 지방자치단체들과 협력하여 방역 물품을 교환하는 등 활발한 현장 행보를 보였습니다.
특히 기업인들을 위한 패스트트랙 입국 제도는 양국 경제 교류 유지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대사관 차원의 대국민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발신하며 우호 여론 형성에 힘썼습니다.

2021

[정치적 발언 논란의 시작]

당시 야권 대선 후보였던 윤석열의 언론 인터뷰 내용을 반박하는 기고문을 일간지에 보낸 후 논란에 휩싸입니다. 주재국의 정치적 상황에 개입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합니다.

2021년 7월 16일 중앙일보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사드 배치 관련 발언을 정면 반박하는 글을 실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 외교부는 외교 관례에 어긋난다며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이 사건은 온건한 외교관이었던 그의 이미지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변곡점이었습니다.

[한중 문화 교류의 해 추진]

수교 30주년을 앞두고 '한중 문화 교류의 해'를 선포하며 민간 교류 회복에 공을 들입니다. 정치적 갈등 속에서도 문화와 예술을 통한 소통의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2021년 하반기 다양한 문화 전시회와 공연 지원을 통해 한한령 완화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습니다.
그는 직접 행사장을 찾아 한국 예술가들을 격려하고 중국 시장 진출을 독려했습니다.
민간 차원의 감정의 골을 메우는 것이 장기적인 외교의 기초임을 역설했습니다.

2022

[윤석열 정부 출범과 대응]

한국의 정권 교체 이후 새로운 정부와의 관계 정립을 위해 바쁘게 움직입니다. 한미 관계 강화 기조 속에서 중국의 핵심 이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경계의 목소리를 냅니다.

2022년 윤석열 정부 출범 초기, 그는 고위급 축하 사절단 파견 실무를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대미 밀착 행보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중국의 입장을 강하게 전달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그의 발언 수위는 더욱 높아졌으며 거침없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

수교 30주년을 맞아 서울과 베이징에서 동시에 열린 기념행사를 주관합니다. 지난 30년의 성과를 되돌아보고 향후 30년의 공존과 번영을 위한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합니다.

2022년 8월 24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기념 연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는 기념사에서 양국이 '구동존이'를 넘어 '구동화이'의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갈등보다는 협력의 가치를 강조하며 냉랭해진 분위기를 전환하려 시도했습니다.

2023

[베팅 발언과 외교적 파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만찬에서 미국이 승리하고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는 베팅은 잘못된 판단이라며 강하게 경고합니다. 이 발언은 한국 사회 전체에 엄청난 정치적 파문을 일으킵니다.

2023년 6월 8일 성북구 중국 대사관저에서 이재명 대표와 만나 '중국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장면이 실시간 중계되면서 여권은 강력히 반발했고, 외교부는 그를 초치하여 엄중 경고했습니다.
그의 발언은 주재국에 대한 결례를 넘어 주권 침해 논란으로까지 번졌습니다.

[대통령의 직접적인 비판]

윤석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싱하이밍 대사의 태도를 직접 비판하며 갈등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일각에서는 페르소나 논 그라타(기피 인물) 지정까지 거론하며 압박합니다.

2023년 6월 13일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그의 언행을 국민들이 불쾌해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정상급에서 주재국 대사를 실명으로 비판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후 싱 대사는 외부 활동을 자제하며 자숙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한중일 정상회의 실무 준비]

갈등 속에서도 한중일 3국 정상회의 재개를 위한 실무 논의를 재개합니다. 대사로서 한중 관계의 파국을 막기 위해 최소한의 소통 채널을 유지하는 데 주력합니다.

2023년 말 그는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 참석차 방한한 왕이 외교부장을 수행했습니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도 고위급 소통의 물꼬를 트기 위해 한국 외교부와 긴밀히 협의했습니다.
그는 외교적 수사보다는 실질적인 관계 복원을 위한 실무적 접근을 취했습니다.

2024

[마지막 한중 정상회담 수행]

리창 총리의 방한을 수행하며 한중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돕습니다. 재임 기간 중 마지막이 된 고위급 행사를 통해 한중 관계의 안정을 모색합니다.

2024년 5월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의 기간 중 리창 총리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습니다.
그는 이번 회담이 양국 신뢰 회복의 중요한 기점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오랜 임기 동안 겪은 풍파를 뒤로하고 외교적 성과를 내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후임자 결정과 이임 준비]

중국 정부가 그의 교체를 결정하며 4년 5개월간의 한국 대사 임무를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한중 관계의 격랑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되돌아보며 이별을 준비합니다.

2024년 6월 초 싱하이밍 대사의 교체 소식이 공식화되었습니다.
그는 한국 내 지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며 한중 우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역설했습니다.
그의 퇴장은 한중 관계의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국면이 시작됨을 의미했습니다.

[화성 아리셀 공장 현장 방문]

임기 마지막 날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 현장을 찾아 중국인 희생자들을 애도합니다. 마지막까지 자국민 보호와 사고 수습에 최선을 다하며 대사로서의 본분을 다합니다.

2024년 6월 24일 사고 현장을 긴급 방문하여 한국 정부에 철저한 원인 규명과 사후 처리를 요청했습니다.
슬픔에 잠긴 유가족들을 위로하며 중국 대사관 차원의 모든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이 행보는 그가 한국을 떠나기 전 수행한 마지막 공식 대외 활동이 되었습니다.

[한국을 떠나는 지한파 외교관]

모든 공식 일정을 마치고 인천공항을 통해 베이징으로 귀국합니다. 수교 초기부터 대사까지 이어진 30여 년의 한반도 외교 여정을 뒤로하고 조국으로 돌아갑니다.

2024년 6월 25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했습니다.
그는 출국 전 별도의 입장문 없이 조용히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가 남긴 한중 관계의 여러 과제들은 이제 후임 대사의 몫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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