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에바디

변호사, 인권 운동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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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에바디
변호사, 인권 운동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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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변호사이자 저명한 인권 운동가. 첫 이란인이자 첫 무슬림 여성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이란 혁명 후 법관직에서 해임되는 등 이란 정부의 탄압 속에서도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끊임없이 활동했습니다. 그녀의 노벨상 압수 및 가족 체포 사건은 국제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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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시린 에바디 탄생]

이란 하마단에서 미래의 인권 운동가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시린 에바디가 태어났습니다.

상법 교수이자 이란의 첫 공증인 중 한 명이었던 모하메드 알리 에바디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지적인 가풍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법과 정의에 대한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형성하며 자랐습니다. 그녀가 태어난 지 1년 후, 가족은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으로 이주하여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1965

[테헤란 대학교 법학 입학]

학문적 꿈을 이루기 위해 이란 최고의 명문인 테헤란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이란 사회에서 여성의 대학 진학이 흔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업에 대한 열정으로 입학에 성공했습니다. 대학 시절 동안 그녀는 이란의 법체계와 국제법에 대한 깊은 학문적 소양을 쌓았습니다. 이 시기의 학습은 훗날 그녀가 이란의 법적 불평등에 맞서 싸우는 논리적 무기가 되었습니다.

1969

[학사 학위 취득 및 졸업]

테헤란 대학교 법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며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그녀는 여성의 사회 참여가 제한적이던 시절에 법조인으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대학 생활을 마치고 곧바로 이란 사법부의 판사 임용 시험에 도전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이 졸업은 그녀가 이란 역사에 남을 기록적인 커리어를 쌓기 위한 공식적인 첫걸음이었습니다.

[판사 임용 시험 합격]

치열한 경쟁을 뚫고 판사 임용 시험에 합격하여 사법 연수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여성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성취였으며, 당시 이란의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임용 후 6개월간의 실무 수습 기간을 거치며 판사로서 필요한 실무적 감각을 익혔습니다. 이 합격 소식은 당시 이란 여성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으며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1970

[이란 최초 여성 판사 취임]

수습 기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란 역사상 최초의 여성 판사 중 한 명으로 공식 임명되었습니다.

이 임명은 보수적인 중동 사회에서 여성의 권력이 법적 권위로 인정받은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녀는 법대 위에서 공정하고 냉철한 판결을 내리며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시린 에바디는 이란 여성 법조인들의 선구자라는 상징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1971

[석사 및 박사 과정 지속]

판사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학문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사법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테헤란 대학교에서 사법학을 전공하며 법학자로서의 전문성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습니다. 주로 민법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 성과를 보였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법조인으로서 그녀의 명성은 이란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1975

[테헤란 시 법원장 승격]

여성으로서는 유례없는 고위직인 테헤란 시 법원의 주심 판사이자 법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테헤란 시 법원 24호 분과를 이끌며 사법부 내에서 막강한 행정력과 판결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녀의 초고속 승진은 실력 위주의 평가 시스템이 작동하던 당시 사법부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정의를 실현하던 이 시기는 그녀의 법조 인생 중 가장 화려했던 황금기였습니다.

[자바드 타바솔리안과 결혼]

전기 엔지니어인 자바드 타바솔리안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습니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던 두 사람은 서로의 가치관을 존중하며 안정적인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남편 자바드는 훗날 에바디가 인권 활동으로 위험에 처할 때마다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이 결혼은 훗날 정치적 풍파 속에서도 그녀가 사적인 위안을 얻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979

[이슬람 혁명 발발]

이란 사회를 완전히 뒤바꾼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며 그녀의 삶에도 거센 풍랑이 몰아쳤습니다.

팔레비 왕정이 붕괴되고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신정 체제가 들어섰습니다. 혁명 직후 보수적인 이슬람법이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급격히 하락했습니다. 에바디는 국가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 자신이 일궈온 법적 가치가 무너지는 과정을 목격했습니다.

[판사직 박탈 및 강등]

혁명 정부의 조치에 따라 '여성은 판사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판사직에서 강제로 해임되었습니다.

주심 판사였던 그녀는 한순간에 자신이 이끌던 법원의 하급 비서직(사무원)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정부는 여성이 감정적이라는 편견을 근거로 판결을 내리는 행위가 신앙에 어긋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에바디는 이 조치에 대해 사법부 내에서 유일하게 공식적인 항의 서한을 보내며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1980

[첫째 딸 네가르 탄생]

직업적 시련을 겪는 가운데 첫째 딸인 네가르 타바솔리안을 출산했습니다.

강등된 직위에서 오는 수치심과 고통 속에서도 아이의 탄생은 그녀에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딸의 미래를 보며 그녀는 여성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더욱 깊이 느꼈습니다. 네가르는 훗날 저널리스트로 성장하여 어머니의 활동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기여하게 됩니다.

1983

[둘째 딸 나르게스 탄생]

둘째 딸 나르게스 타바솔리안이 태어나며 두 자녀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두 딸을 키우며 에바디는 가족의 안위와 인권 활동 사이에서 고심하는 평범한 어머니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의 포화 속에서 자녀들을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르게스는 훗날 벨기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어머니의 학문적 가업을 잇게 됩니다.

1984

[조기 퇴직 신청]

하급 사무직으로서의 업무가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다고 판단하여 사법부에 조기 퇴직을 신청했습니다.

자신이 판결을 내렸던 장소에서 비서 일을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퇴직 신청은 받아들여졌으나 정부는 그녀에게 변호사 자격증 발급을 거부하며 앞길을 막았습니다. 이후 그녀는 약 8년간 법조계로 돌아가지 못한 채 집에서 글쓰기와 연구에 매진하게 됩니다.

1985

[집필 활동과 인권 연구]

외부 활동이 제한된 시기 동안 이란의 아동 및 여성 인권에 관한 다수의 서적을 집필했습니다.

대표 저서인 '아동의 권리' 등을 집필하며 이란 법 체계 내의 인권적 결함을 논리적으로 분석했습니다. 그녀의 글은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테헤란 대학교 교재로 채택되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 시기의 연구는 훗날 그녀가 인권 변호사로 활동할 때 가장 강력한 이론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1992

[변호사 자격증 취득]

수년간의 거부 끝에 마침내 변호사 면허를 취득하며 법조계로 복귀했습니다.

정권의 압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격증 발급을 요구한 끝에 얻어낸 값진 승리였습니다. 그녀는 즉시 자신의 법률 사무소를 열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판사가 아닌 변호사로서, 그녀는 법정의 반대편에서 새로운 투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94

[아동 권리 보호 협회 창립]

이란 내 아동 학대와 소년병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비영리 단체를 설립했습니다.

정부의 감시 속에서도 아동들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률적 지원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어린이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활동은 에바디가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진정한 운동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7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 지지]

개혁 성향의 후보인 모하마드 하타미의 대통령 당선을 지지하며 이란의 변화를 기대했습니다.

하타미의 당선으로 표현의 자유와 법치주의가 강화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이 시기 그녀는 대학 강연과 언론 기고를 통해 민주주의적 가치를 더욱 적극적으로 설파했습니다. 그러나 보수 사법부의 저항이 계속되면서 그녀의 활동은 여전히 위험한 경계선 위에 있었습니다.

1999

[다리우시 포루하르 유가족 변호]

이란 정보국에 의해 살해된 야당 지도자 다리우시 포루하르 사건의 변호를 맡았습니다.

국가 권력에 의한 연쇄 살인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건 법정 공방을 벌였습니다. 유가족들을 대신해 정부의 책임을 물으며 사법부의 치부를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녀는 이란 내에서 가장 용감한 변호사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테헤란 대학교 학생 시위 변호]

평화적인 시위 도중 사망한 학생 에자트 에브라힘-네자드 사건의 무료 변론을 자처했습니다.

공권력의 과잉 진압으로 희생된 학생의 명예를 회복하고 가해자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보수적인 준군사 조직의 불법 행위를 폭로하는 증거 비디오를 입수했습니다. 이 비디오는 훗날 그녀가 체포되는 빌미가 되었지만 이란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증거가 되었습니다.

2000

[구금 및 징역형 선고]

국가 기밀 유출 및 공권력 모독 혐의로 체포되어 악명 높은 에빈 교도소에 구금되었습니다.

학생 시위 관련 증거 영상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사법부로부터 보복성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25일간 독방에 갇혀 심문을 받았으며, 최종적으로 징역형과 변호사 자격 정지를 선고받았습니다. 국제 인권 단체들은 일제히 이란 정부를 규탄하며 에바디의 즉각 석방을 촉구했습니다.

[집행유예로 석방]

국제적인 압박과 개혁파의 노력으로 실형 집행이 유예되어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비록 변호사 활동은 잠시 중단되었으나 그녀의 투쟁 의지는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석방 후 그녀는 감옥 안에서 본 비인도적인 처우를 증언하며 교도소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이 구금 경험은 그녀가 이란의 사법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확신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1

[라프토 인권상 수상]

노르웨이의 권위 있는 인권상인 라프토 인권상을 수상하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란의 민주주의와 인권 보호를 위해 헌신한 공로를 유럽 사회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이 상은 훗날 그녀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는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수상 소감에서 그녀는 이란의 변화는 외부의 압력이 아닌 내부의 투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2002

[인권보호센터(DHRC) 설립]

동료 변호사들과 함께 이란 내 인권 침해 사례를 감시하는 인권보호센터를 창설했습니다.

양심수들에게 무료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고 인권 상황에 대한 정기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정부의 불법 단체 규정에도 불구하고 센터는 수많은 신념 있는 법조인들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에바디는 이 조직을 통해 개인의 힘을 조직적인 인권 운동으로 결집시켰습니다.

2003

[미국의 이라크 침공 비판]

노벨상 수상자로서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강하게 비판하며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습니다.

무력에 의한 민주주의 이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그녀는 강대국의 패권주의가 오히려 중동의 인권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단순히 서구의 입맛에 맞는 인물이 아닌, 독립적인 평화 주의자임을 증명했습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 발표]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로부터 2003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슬림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의 수상이었으며, 전 세계가 그녀의 업적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당시 그녀는 파리에 머물고 있었으며 소식을 듣자마자 전 세계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습니다. 이란 내 보수 세력은 '정치적 음모'라고 비난했으나, 민중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했습니다.

[이란 귀국과 인파의 환영]

노벨상 발표 후 테헤란 공항을 통해 귀국했으며, 수천 명의 시민이 모여 그녀를 영접했습니다.

흰 꽃을 든 시민들은 '에바디는 우리의 영웅'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렬을 이루었습니다. 정부의 위협 속에서도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모여 그녀의 안전을 보호하고 축하했습니다. 이 귀국 환영 행사는 이란 내 민주화 열망이 얼마나 뜨거운지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습니다.

[노벨상 시상식 참석]

오슬로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히잡을 쓰지 않은 채 연설하며 여성의 자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시상식 연설에서 그녀는 '인권은 국경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임을 당당하게 선포했습니다. 이슬람과 민주주의는 상충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전 세계 무슬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는 이란 여성들에게 억압에 굴하지 않는 용기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2004

[자흐라 카제미 사건 수임]

이란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캐나다계 이란인 기자 자흐라 카제미 사건의 변호를 맡았습니다.

고문에 의한 타살 의혹을 제기하며 사법부 최고위층의 연루 가능성을 조사했습니다. 법정에서 증거를 제시하려 할 때마다 정부의 조직적인 방해와 살해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진실 규명에는 실패했으나 이 사건은 이란 사법부의 야만성을 국제 사회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살해 협박과 보호 요청]

자택 앞에 협박 편지가 놓이는 등 구체적인 살해 위협이 발생하자 정부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보수 극단주의자들은 그녀를 '서방의 첩자'로 몰아세우며 제거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녀는 두려움 속에서도 사무실 문을 닫지 않고 매일 정해진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국제 앰네스티 등 NGO들은 그녀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성명을 연이어 발표했습니다.

2005

[이란 대통령 선거 보이콧]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당선된 대통령 선거 과정의 불공정성을 비판하며 투표를 거부했습니다.

사전 검열을 통해 후보들의 출마를 제한하는 시스템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역설했습니다. 아마디네자드 정권 출범 이후 인권 탄압이 더욱 노골화될 것을 정확히 예견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그녀에 대한 정부의 감시와 탄압은 임계점에 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2006

[노벨 여성 이니셔티브 출범]

다른 여성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과 함께 전 세계 여성 인권을 위한 연합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조디 윌리엄스, 왕가리 마타이 등과 협력하여 분쟁 지역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했습니다. 개별적인 활동을 넘어 국제적 네트워크를 통해 인권 문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에바디는 이 기구의 핵심 리더로서 이슬람 여성 인권 증진을 위한 의제를 주도했습니다.

[자서전 '이란 어웨이크닝' 출판]

자신의 삶과 이란의 현대사를 담은 회고록을 영어로 출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란 정부는 이 책의 이란 내 판매를 금지했으나 국제 사회에서는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혁명 전후의 이란 법조계 비사와 인권 투쟁의 뒷이야기를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이 책은 서구 독자들이 이란 사회의 복잡한 내면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창구 역할을 했습니다.

2008

[DHRC 사무실 강제 폐쇄]

이란 경찰이 그녀가 운영하던 인권보호센터 사무실을 습격하고 강제로 폐쇄했습니다.

인권 선언 60주년 기념 행사를 앞두고 벌어진 명백한 탄압 행위였습니다. 경찰은 영장도 없이 들이닥쳐 서류와 컴퓨터를 압수하고 활동가들을 위협했습니다. 에바디는 폐쇄된 사무실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며 정권의 무도함을 폭로했습니다.

2009

[해외 세미나 참석 중 망명]

세미나 참석을 위해 잠시 이란을 떠난 사이 대규모 시위 탄압이 시작되자 귀국하지 못하고 망명했습니다.

2009년 대선 부정 의혹으로 촉발된 '녹색 운동' 시위 현장에 있었던 동료들이 대거 체포되었습니다. 정부는 에바디를 시위의 배후로 지목하며 귀국 시 즉각 체포할 것임을 시사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하는 비자발적 망명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노벨상 메달 및 자산 압류]

이란 정부가 그녀의 은행 계좌를 동결하고 보관 중이던 노벨상 메달과 증서를 압수했습니다.

노벨상 메달을 압수한 것은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충격적인 도발이었습니다. 정부는 미납된 세금을 징수한다는 명목을 내세웠으나 명백한 정치적 보복이었습니다. 국제 사회의 강력한 항의 끝에 메달은 나중에 반환되었으나 자산 동결은 해제되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구금 및 자백 강요]

이란에 남아있던 남편 자바드가 체포되어 아내를 비난하는 거짓 자백을 강요받았습니다.

정보국 요원들은 자바드를 고문하며 에바디가 외세의 자금을 받았다고 말하게 했습니다. 정부는 이 가짜 자백을 국영 방송에 내보내 에바디의 명예를 실추시키려 했습니다. 에바디는 가족을 인질로 삼는 정권의 비열함을 전 세계에 알리며 더욱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2010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평화상 수상]

유네스코(UNESCO)가 수여하는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망명 중에도 굴하지 않고 평화와 인권을 위해 헌신하는 그녀의 용기가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그녀는 이란 민중의 고통을 전했습니다. 국제 기구들로부터 지속적인 지지를 받으며 그녀의 외교적 영향력은 더욱 커졌습니다.

2012

[바하이 교도 탄압 고발]

이란 내 소수 종교인 바하이 교도들이 겪는 조직적인 박해를 국제 재판소에 고발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박탈된 바하이 학생들의 교육권 회복을 위해 전 세계적인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특정 종교를 넘어 보편적 시민권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큰 공감을 얻었습니다. 이란 정부는 그녀가 이슬람을 배신했다며 비난의 강도를 높였습니다.

2013

[디 엘더스(The Elders) 합류]

넬슨 만델라가 설립한 세계 원로 지도자 모임인 '디 엘더스'의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지미 카터, 코피 아난 등 전 세계적인 리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지구촌 난제를 논의했습니다. 중동 지역의 평화 정착과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 활동을 통해 그녀는 개인 운동가를 넘어 글로벌 오피니언 리더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습니다.

2016

[두 번째 자서전 발간]

망명 생활과 이란의 인권 상황을 다룬 책 '우리가 자유로워질 때까지'를 출간했습니다.

망명지 런던에서 겪은 외로움과 정부의 끈질긴 추적 과정을 솔직하게 담았습니다. 동료 인권 운동가 나르게스 모하마디와의 우정과 연대감을 상세히 기술했습니다. 독자들에게 독재 정권에 맞서는 지식인의 고뇌와 희망을 동시에 전달했습니다.

2018

[이란 경제 시위 지지]

이란 전역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며 정권의 평화적 퇴진과 국민 투표를 요구했습니다.

사회적 불평등과 부패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지적하며 민중의 저항을 정당하다고 옹호했습니다. 국제 사회가 이란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력히 호소했습니다. 망명 중에도 그녀의 발언은 SNS를 통해 이란 내부 시위대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되었습니다.

2019

[이란 여성 스포츠 관람권 옹호]

여성의 축구장 입장 금지에 항의하다 분신한 '블루 걸' 사건에 대해 FIFA의 징계를 요구했습니다.

스포츠 현장에서의 성차별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비극을 전 세계 스포츠계에 알렸습니다. 그녀의 노력으로 마침내 이란 정부는 일부 국제 경기에 한해 여성 입장을 일시 허용했습니다. 작은 권리 하나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이 필요한지 보여준 가슴 아픈 사역이었습니다.

2022

[마흐사 아미니 시위 연대]

히잡 미착용을 이유로 사망한 마흐사 아미니 사건으로 촉발된 '여성, 삶, 자유' 혁명을 전폭 지지했습니다.

Z세대를 중심으로 한 이란 청년들의 용기 있는 투쟁에 경의를 표하며 국제적인 연대를 이끌어냈습니다. 이란 정권이 더 이상 개혁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선포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했습니다. 시위 도중 눈을 잃거나 목숨을 잃은 청년들의 기록을 모아 UN 인권 이사회에 제출했습니다.

2023

[나르게스 모하마디 노벨상 축하]

자신의 동료이자 DHRC 회원인 나르게스 모하마디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자 기쁨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감옥에 갇힌 모하마디를 대신해 국제 무대에서 그녀의 수상이 이란 여권 신장의 큰 승리임을 역설했습니다. 이란에서 두 명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 것은 역사적인 경사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녀는 후배 운동가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정의의 길을 걷고 있음에 깊은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2024

[지속적인 국제 강연 및 로비]

현재까지도 런던에서 거주하며 유럽 의회와 국제 기구들을 상대로 이란 인권 개선을 위한 로비 활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70대 후반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전 세계 활동가들과 화상 회의를 하며 현안을 챙깁니다. 이란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그날까지 자신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녀의 삶은 이란 현대사 그 자체이며, 많은 이들에게 불굴의 저항 정신을 가르쳐주는 살아있는 교과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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