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카 칸
가수, 작곡가, 음악가, 작가
최근 수정 시각 : 2026-01-08- 15:07:34
샤카 칸(Chaka Khan)은 '펑크의 여왕(Queen of Funk)'으로 불리는 미국의 전설적인 가수로,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중음악계에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1970년대 펑크 밴드 루퍼스(Rufus)의 리드 보컬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린 그녀는 탁월한 가창력과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솔로 전향 후에도 'I'm Every Woman', 'I Feel for You' 등 시대를 초월한 히트곡들을 탄생시켰습니다. 10개의 그래미 어워드 수상과 전 세계적으로 7천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하며 R&B, 소울, 펑크, 재즈를 아우르는 음악적 스펙트럼을 증명했습니다. 2023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그 위상을 다시 한번 공고히 한 그녀는 현재까지도 강력한 보컬 실력과 예술적 영감을 선사하는 음악적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1953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출생]
이베트 마리 스티븐스(Yvette Marie Stevens)라는 본명으로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났습니다.
찰스 스티븐스와 산드라 콜먼 사이의 다섯 자녀 중 장녀로 태어나 예술적 분위기의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시카고 남부 하이드 파크 지역의 진보적인 가톨릭 가문에서 자라며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예술적 재능은 가족 내에서 시작되었으며, 동생인 이본 또한 나중에 타카 붐이라는 이름으로 가수가 되었습니다.
1964
[첫 음악 그룹 '더 크리스탈레츠' 결성]
11세의 나이에 여동생 이본과 함께 첫 번째 노래 그룹인 '더 크리스탈레츠(The Crystalettes)'를 결성했습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카고 지역 사회에서 노래를 부르며 음악적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대중 앞에 서는 경험을 쌓으며 훗날 세계적인 디바가 될 기초를 닦았습니다. 가족과 함께한 이 초기 활동은 그녀의 인생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7
[블랙 팬서 당원 활동 및 이름 변경]
블랙 팬서 당(Black Panther Party)에 합류하며 사회 운동에 참여했고, 아프리카식 이름인 '샤카 아둔느'를 얻었습니다.
시카고 지부의 아침 식사 프로그램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며 흑인 인권 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습니다. 요루바족의 한 사제로부터 '샤카 아둔느 아두페 호다리 카리피'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이는 '감사하는 전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정치적 사회적 경험은 그녀의 강인한 예술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969
[고등학교 중퇴 및 전업 음악가 활동]
칼루멧 고등학교와 켄우드 아카데미를 다녔으나, 음악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중퇴를 결정했습니다.
학업 대신 실전 음악 무대를 선택하여 시카고 지역의 여러 밴드에서 보컬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캐시미어'와 같은 그룹을 거치며 자신의 목소리를 다듬고 무대 매너를 익히는 실무적인 교육을 스스로 쌓았습니다. 부모님은 처음에는 걱정했으나 그녀의 확고한 의지와 재능을 보고 결국 그녀의 선택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1970
결혼 생활은 1971년에 끝이 났지만, 그녀는 이후 '샤카 칸'이라는 이름을 평생의 활동명으로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짧은 결혼 기간이었으나 음악적 동료로서의 교류가 있었으며 이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 그녀는 '베이비 휴이 앤 더 베이비시터스'의 일원으로도 활동하며 경력을 확장했습니다.
1972
그녀의 합류와 동시에 밴드 루퍼스는 시카고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주목을 받는 그룹으로 급부상했습니다. 파워풀한 보컬 스타일과 독특한 무대 의상은 루퍼스의 음악적 색깔을 정의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습니다. ABC 레코드와 계약을 맺으며 본격적인 메이저 음악 시장 공략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1973
이 앨범은 펑크와 R&B가 혼합된 신선한 사운드로 평단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샤카 칸의 독보적인 목소리는 이미 다른 멤버들의 연주를 압도할 만큼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이 앨범을 통해 그녀는 차세대 R&B 스타로서의 잠재력을 대중에게 처음으로 입증했습니다.
하산 칸과의 이혼 이후 라하산 모리스와의 관계에서 얻은 자녀로, 어머니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육아와 바쁜 투어 일정을 병행하며 음악 인생의 가장 치열한 시기 중 하나를 보냈습니다. 밀리니는 훗날 자라나 어머니의 뒤를 이어 음악가로서의 길을 걷기도 했습니다.
1974
['Tell Me Something Good' 대히트]
스티비 원더가 작곡해준 곡 'Tell Me Something Good'이 수록된 앨범 'Rags to Rufus'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곡은 빌보드 핫 100에서 3위를 차지하며 샤카 칸과 루퍼스를 단숨에 슈퍼스타 반열에 올렸습니다. 토크 박스를 활용한 독특한 사운드와 칸의 거친 보컬은 전무후무한 펑크 음악의 전형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곡의 대성공으로 앨범은 백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골드 인증을 받았습니다.
1975
['Sweet Thing' 발표와 차트 1위]
앨범 'Rufusized'에 수록된 'Sweet Thing'이 R&B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습니다.
샤카 칸이 직접 작곡에 참여한 이 곡은 그녀의 감성적이고 섬세한 보컬 능력을 극대화한 명곡입니다. 이후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리메이크할 만큼 R&B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곡이 되었습니다. 루퍼스는 이 시기 전성기를 누리며 명실상부한 당대 최고의 펑크 밴드로 자리 잡았습니다.
[첫 번째 그래미 어워드 수상]
'Tell Me Something Good'으로 제17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R&B 보컬 퍼포먼스(듀오/그룹)상을 수상했습니다.
전 세계 음악계가 그녀의 가창력과 음악적 성과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시상식에서 보여준 그녀의 카리스마는 루퍼스라는 그룹의 중심이 그녀에게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이 수상은 향후 그녀가 10번이나 그래미를 거머쥐게 될 위대한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1976
[리처드 홀랜드와 두 번째 결혼]
개인적인 삶의 안정을 찾기 위해 리처드 홀랜드(Richard Holland)와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 생활 중 칸은 가정과 커리어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으나 남편과의 갈등도 있었습니다. 리처드 홀랜드는 나중에 그녀의 가장 큰 히트곡 중 하나인 'I'm Every Woman'의 영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1980년 이혼으로 마무리되며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1977
재즈적 요소가 가미된 세련된 편곡으로 평단으로부터 루퍼스 최고의 앨범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At Midnight (My Love Will Lift You Up)' 등 다수의 히트곡이 수록되어 대중적 성공을 이어갔습니다. 이 앨범을 통해 샤카 칸은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가수를 넘어 프로듀싱 능력을 가진 아티스트로 평가받기 시작했습니다.
1978
[솔로 데뷔 및 'I'm Every Woman' 발표]
솔로 가수로서 첫 앨범인 'Chaka'를 발표하고 타이틀곡 'I'm Every Woman'을 대히트시켰습니다.
애슈포드 앤 심슨이 작곡한 이 곡은 여성의 당당함을 노래하며 전 세계 여성들의 찬가(Anthem)가 되었습니다. 루퍼스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팝 디바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앨범은 백만 장 이상 팔리며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고 그녀의 솔로 전향을 성공적으로 안착시켰습니다.
1979
[차남 데미안 홀랜드 탄생]
남편 리처드 홀랜드와의 사이에서 둘째 아이이자 첫 아들인 데미안 홀랜드(Damien Holland)를 얻었습니다.
아들의 탄생은 그녀에게 큰 기쁨을 주었으며, 바쁜 투어 일정 속에서도 아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들 데미안 또한 훗날 음악적 환경에서 자라나며 어머니의 커리어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그녀는 더욱 강한 책임감과 성숙함을 바탕으로 음악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1980
[솔로 두 번째 앨범 'Naughty' 발표]
전작의 성공에 이어 두 번째 솔로 앨범 'Naughty'를 발매하며 대중의 인기를 이어갔습니다.
'Clouds' 등의 곡이 차트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습니다. 전설적인 퀸시 존스와의 협업 등을 통해 음악적 깊이를 더해갔던 시기였습니다. 이 앨범은 그녀가 1980년대 팝 음악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1981
[앨범 'What Cha' Gonna Do for Me' 성공]
세 번째 솔로 앨범을 통해 R&B 차트 정상에 다시 올랐으며 골드 인증을 받았습니다.
비틀즈의 곡을 커버한 'We Can Work It Out' 등을 수록하여 장르를 넘나드는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기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세련되고 강력해졌으며 공연장마다 매진 행진을 기록했습니다. 그녀는 이 앨범을 통해 펑크 요소를 세련된 팝 사운드로 소화해냈다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1982
[재즈 프로젝트 'Echoes of an Era' 참여]
평소 열망하던 재즈 장르에 도전하여 프레디 허버드, 치크 코리아 등 거장들과 함께 앨범을 제작했습니다.
펑크 여왕의 변신에 음악계가 놀랐으나, 그녀는 탁월한 재즈 해석 능력을 선보이며 비평가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그녀가 단순한 팝 가수가 아니라 정통 재즈 가창이 가능한 실력파 음악가임을 입증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향후 자신의 음악 세계에 재즈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게 되었습니다.
1983
[루퍼스와의 마지막 협업 'Ain't Nobody']
밴드 루퍼스와 함께한 마지막 실황/스튜디오 앨범에서 'Ain't Nobody'를 발표하여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이 곡은 밴드 루퍼스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곡 중 하나로, 영국 차트 1위와 미국 R&B 차트 정상을 휩쓸었습니다. 그녀의 절도 있는 보컬과 밴드의 그루브가 완벽하게 조화된 이 곡은 펑크 역사의 교과서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곡으로 제26회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R&B 보컬 퍼포먼스상을 수상하며 루퍼스와의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1984
['I Feel for You' 전 세계적 신드롬]
프린스의 곡을 커버한 'I Feel for You'를 발표하여 전 세계 차트를 점령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멜 멜의 랩 피처링과 스티비 원더의 하모니카 연주가 어우러진 이 곡은 힙합과 R&B의 초기 융합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 곡의 도입부에서 이름이 반복되는 부분은 80년대 대중문화의 상징적인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이 싱글은 미국에서만 백만 장 이상 팔렸고 그녀의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대표곡이 되었습니다.
1985
[그래미 어워드 2관왕 달성]
제27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I Feel for You'로 최우수 R&B 보컬 퍼포먼스(여성)상을 수상하는 등 다관왕에 올랐습니다.
개인 솔로 활동의 정점을 찍는 상징적인 수상으로, 그녀의 혁신적인 사운드가 보수적인 음악계까지 관통했습니다. 시상식에서의 화려한 무대 연출은 칸의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팝 스타 중 한 명으로 대우받게 되었습니다.
1986
[앨범 'Destiny' 발표 및 영화 OST 참여]
지속적인 성공 속에 새 앨범을 발매했으며 영화 '백 투 스쿨' 등의 주제가 작업에도 참여했습니다.
스크린을 통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전파하며 엔터테인먼트 전 분야에서 활약했습니다. 이 앨범 수록곡인 'Love of a Lifetime' 등은 유럽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그녀의 인기를 국제화했습니다. 지속적인 작업 활동을 통해 그녀는 80년대 음악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핵심 인물로 남았습니다.
1988
[앨범 'CK' 발매와 거장들과의 협업]
자신의 이니셜을 딴 앨범 'CK'를 발매하며 프린스, 마일스 데이비스 등과 함께 작업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천재들과 한 앨범에서 호흡을 맞춘 것은 그녀의 음악적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증명합니다. 'It's My Party' 등의 곡을 통해 장르를 규정할 수 없는 독보적인 음악 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앨범은 비록 차트 성적은 전작에 못 미쳤으나 음악적 완성도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1990
특히 영국에서의 인기는 대단하여 로열 앨버트 홀 등 권위 있는 무대에서 공연을 펼쳤습니다. 이 투어는 그녀의 라이브 보컬 실력이 전성기 시절 그대로임을 증명하는 장이 되었습니다. 유럽 시장에서의 성공은 그녀가 훗날 인종과 국적을 초월한 아이콘이 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1992
[앨범 'The Woman I Am' 발표]
90년대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앨범을 발매하며 한층 더 깊어진 성숙미를 선보였습니다.
'Love You All My Lifetime' 등의 곡이 클럽 차트와 R&B 차트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앨범은 그녀가 단순히 80년대 스타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트렌드에 적응했음을 보여준 수작입니다. 이듬해인 1993년, 그녀는 이 앨범으로 자신의 일곱 번째 그래미상을 거머쥐게 됩니다.
1995
[VH1 'Divas Live' 공연 참여]
음악 전문 채널 VH1에서 주최한 'Divas Live' 무대에 올라 다른 전설적인 디바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아레사 프랭클린, 글로리아 에스테판 등과 함께한 이 무대는 그녀의 역사적 위상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습니다. 후배 가수들에게 큰 영감을 주는 선배 가수로서 당당히 무대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이 공연 실황은 전 세계에 방영되어 그녀의 압도적인 가창력을 다시 한번 대중에게 각인시켰습니다.
1996
[베스트 앨범 'Epiphany' 발매]
솔로 데뷔 이후의 커리어를 집대성한 베스트 앨범 'Epiphany: The Best of Chaka Khan'을 발표했습니다.
기존 히트곡들에 더해 신곡들을 추가하여 자신의 음악 여정을 팬들에게 선물했습니다. 이 앨범은 차트 상위권에 머물며 장기적으로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음반이 되었습니다. 팬들은 이 앨범을 통해 칸의 초기 펑크 사운드부터 세련된 팝 소울까지 한눈에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1998
[프린스와의 공동 작업 'Come 2 My House']
음악적 동지인 프린스의 프로듀싱 하에 제작된 정규 앨범 'Come 2 My House'를 발매했습니다.
프린스 특유의 혁신적인 비트와 칸의 자유로운 보컬이 만나 평단으로부터 높은 예술적 평가를 받았습니다. 상업적 성공보다는 음악적 자유를 추구하며 독립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뜻깊은 앨범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앨범을 제작하며 자신의 음악적 뿌리와 미래에 대해 깊은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2001
[더그 라시드와 세 번째 결혼]
프로듀서 더그 라시드(Doug Rasheed)와 조용히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리며 새로운 동반자를 맞이했습니다.
사생활을 존중하며 조용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더그 라시드는 음악 산업의 동료로서 그녀의 활동에 많은 기술적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결혼은 그녀의 중년 이후 삶에 정서적 기반이 되어주며 안정적인 창작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2003
[샤카 칸 재단 설립]
자폐 아동과 위기 가정 여성들을 돕기 위한 자선 재단인 '샤카 칸 재단'을 설립하여 사회 공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교육 프로그램 지원과 상담 사업을 직접 운영했습니다. 특히 고향 시카고와 LA 지역의 소외된 이웃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재단 활동을 통해 그녀는 아티스트를 넘어 영향력 있는 사회 사업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습니다.
2004
[버클리 음악대학 명예 박사 학위 수여]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버클리 음악대학(Berklee College of Music)으로부터 명예 음악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대중음악 발전에 기여한 지대한 공로와 그녀의 독보적인 예술성을 학계로부터 공식 인정받은 사건입니다. 수여식에서 그녀는 미래의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감동적인 연설을 남겼습니다. 독학으로 일궈낸 그녀의 음악 인생이 정규 교육 기관의 최고의 예우를 받는 순간이었습니다.
2007
[앨범 'Funk This'로 화려한 귀환]
펑크의 뿌리로 돌아간 정규 앨범 'Funk This'를 발표하여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지미 잼 앤 테리 루이스가 프로듀싱한 이 앨범은 빌보드 R&B 앨범 차트 1위에 올랐습니다. 전성기 시절의 파워풀한 보컬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여왕의 귀환'이라는 극찬을 들었습니다. 이 앨범은 이후 시상식 시즌에서 그녀에게 또 다른 영광을 안겨주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2008
[뮤지컬 '더 컬러 퍼플' 브로드웨이 데뷔]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 '더 컬러 퍼플(The Color Purple)'에 소피아 역으로 출연하며 연기자로서의 재능도 선보였습니다.
가수로서의 무대와는 또 다른 강렬한 연기력과 풍부한 성량을 요구하는 무대를 완벽하게 소화했습니다. 그녀의 합류로 뮤지컬은 큰 화제를 모았으며 전 회차 매진에 가까운 흥행을 기록했습니다. 예술가로서의 영역을 무대 연극까지 확장하며 다재다능함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그래미 어워드 2관왕 수상]
'Funk This' 앨범과 수록곡 'Disrespectful'로 제50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2개의 상을 거머쥐었습니다.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아티스트임을 만천하에 증명한 역사적 수상입니다. 이로써 그녀의 통산 그래미 수상 횟수는 10회에 도달하는 금자탑을 쌓게 되었습니다. 시상식장에 모인 후배 가수들은 대선배의 여전한 활약에 뜨거운 존경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2011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헌액]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Hollywood Walk of Fame)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별을 헌정받았습니다.
수많은 팬과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2,440번째 별의 주인공이 되어 대중문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시카고 고향 친구인 퀸시 존스 등이 참석하여 그녀의 업적을 기리는 헌사를 낭독했습니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음악 인생 40년을 되돌아보며 팬들에게 감동적인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2013
[음악 데뷔 40주년 기념 공연]
시카고에서 데뷔 4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공연을 가졌으며 시 당국으로부터 '샤카 칸의 날'을 선포받았습니다.
자신의 고향인 시카고에서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화려한 축하 무대를 선보였습니다. 시카고 시장은 그녀의 예술적 성취가 도시의 명예를 드높였다며 공로를 치하했습니다. 4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변함없는 사랑을 보내준 팬들과 함께 눈물과 환희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2016
[약물 중독 치료를 위한 입원 및 회복]
처방 약물 의존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여동생과 함께 자발적으로 재활 센터에 입원하여 회복에 전념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숨기지 않고 대중에게 솔직하게 고백하며 건강한 삶의 중요성을 알렸습니다. 이후 성공적으로 재활을 마치고 복귀하여 자신의 건강 관리 경험을 다른 환자들과 나누는 등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용기 있는 행동은 그녀의 삶에 대한 정직하고 강인한 태도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습니다.
2019
[12년 만의 정규 앨범 'Hello Happiness' 발표]
오랜 공백을 깨고 현대적인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가미한 새 앨범을 발매하여 음악적 건재함을 알렸습니다.
트렌디한 사운드와 그녀의 깊이 있는 목소리가 어우러져 젊은 세대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앨범 발표와 함께 각종 음악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서며 제3의 전성기를 예고했습니다. 나이를 잊은 그녀의 실험적인 시도는 많은 동료 음악가들로부터 높은 찬사를 받았습니다.
2021
[인기 예능 '복면가왕' 출연]
미국판 복면가왕(The Masked Singer)에 '미스 몬스터'로 출연하여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습니다.
가면 뒤에서도 숨길 수 없는 독보적인 음색으로 단번에 정체가 탄로 났을 만큼 개성이 뚜렷했습니다. 젊은 대중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가며 자신의 음악 세계를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 출연을 통해 음악은 즐거워야 한다는 자신의 철학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2023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수차례 후보에 오른 끝에 마침내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에 헌액되는 최고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음악적 탁월함 카테고리에서 수상을 차지하며 현대 음악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장으로 공식 기록되었습니다. 시상식에서 그녀는 수십 년간 이어온 자신의 음악 여정을 돌아보며 감격적인 소감을 남겼습니다. 이 헌액은 그녀가 남긴 펑크와 R&B의 유산이 인류 문화에 끼친 지대한 영향력을 최종적으로 공인한 사건이었습니다.
2024
[지속적인 자선 활동과 차기작 준비]
현재까지도 활발한 소셜 미디어 활동과 자선 행사 참여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며 건강한 근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칠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력적인 목소리를 유지하며 새로운 음악 작업을 구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자신의 재단을 통한 위기 가정 지원 사업 또한 더욱 확대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샤카 칸은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를 넘어 인류의 보편적 감동을 주는 음악적 등대로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