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키 로빈슨
싱어송라이터, 음반 프로듀서, 모타운 레코드 부사장
최근 수정 시각 : 2026-01-11- 11:27:00
스모키 로빈슨은 '모타운 사운드'의 설계자이자 미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우아한 목소리를 가진 전설적인 아티스트입니다. 더 미라클즈의 리더로 시작해 수많은 명곡을 쏟아냈으며, 작곡가이자 음반사 경영자로서도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밥 딜런으로부터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그는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R&B와 소울 음악의 품격을 지켜오며 오늘날까지 전 세계 음악인들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1940
[윌리엄 로빈슨 주니어 탄생]
훗날 '스모키'라는 별명으로 전 세계를 매료시킬 윌리엄 로빈슨 주니어가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디트로이트의 거친 환경 속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의 삼촌은 카우보이 영화를 좋아하는 조카에게 '스모키 조'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이 별명은 훗날 그의 활동명이자 시대를 상징하는 이름인 '스모키 로빈슨'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1955
이 그룹은 훗날 전설적인 '더 미라클즈'의 모태가 되는 둡 활동 그룹이었습니다. 로빈슨은 그룹의 리드 싱어이자 주된 곡 작성자로서 초기부터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디트로이트 지역의 다양한 행사에서 공연하며 실력을 쌓고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1957
고등학교 시절 그는 학업뿐만 아니라 야구 등 스포츠에도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졸업 직전 음악에 전념하기로 결심하며 본격적인 프로 가수의 길을 준비했습니다. 이 시기의 친구들은 훗날 모타운 레코드의 초기 멤버와 아티스트들로 활동하게 됩니다.
로빈슨이 소속된 그룹 마타도어스가 오디션에서 탈락했을 때 베리 고디만이 그의 잠재력을 알아보았습니다. 베리 고디는 로빈슨의 작곡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자신의 첫 번째 제자로 삼았습니다. 두 사람의 파트너십은 훗날 흑인 음악의 성지인 모타운 레코드 설립의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1958
[첫 싱글 Got a Job 발표]
더 미라클즈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 공식 레코드인 'Got a Job'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 곡은 당시 인기곡이었던 실루엣츠의 'Get a Job'에 대한 답변곡 형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베리 고디가 프로듀싱을 맡았으며 엔드 레코드를 통해 발매되어 지역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 싱글의 성공은 베리 고디가 직접 음반사를 설립해야겠다는 확신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9
로빈슨은 베리 고디에게 독립적인 음반사를 차리라고 끊임없이 권유하고 설득했습니다. 회사가 세워진 후 그는 소속 아티스트들의 곡을 쓰고 프로듀싱하는 핵심 인력이 되었습니다. 사실상 모타운의 초기 사운드 정체성을 확립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클로데트는 그룹의 유일한 여성 멤버로서 로빈슨과 함께 음악적 여정을 공유했습니다. 두 사람은 모타운의 성장기를 함께하며 수많은 명곡 탄생의 순간을 함께했습니다. 이들의 결혼 생활은 1986년 이혼하기 전까지 모타운 팬들에게 아름다운 동료이자 부부로 기억되었습니다.
1960
[Shop Around 밀리언셀러 달성]
곡 'Shop Around'가 모타운 최초로 1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곡은 빌보드 R&B 차트 1위와 팝 차트 2위에 오르며 모타운의 위상을 전국적으로 높였습니다. 로빈슨이 작곡한 이 노래는 경쾌한 리듬과 중독성 있는 멜로디로 시대의 찬가가 되었습니다. 이 성공으로 모타운은 재정적 안정 기반을 마련하고 더 많은 아티스트를 영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61
로빈슨은 아티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회사 경영의 핵심 의사결정자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988년 회사가 매각될 때까지 부사장직을 유지하며 모타운의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음악 제작과 경영을 동시에 수행하며 흑인 예술가의 지위를 한 단계 격상시켰다는 평을 듣습니다.
1962
[소울 발라드의 정수 발표]
'You've Really Got a Hold on Me'를 발표하며 소울 음악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로빈슨의 애절한 가창력이 돋보이는 이 곡은 다시 한번 빌보드 차트 톱 10에 진입했습니다. 훗날 비틀즈가 리메이크할 정도로 음악적 완성도가 매우 뛰어난 작품이었습니다. 로빈슨은 이 곡을 통해 단순한 팝 가수를 넘어 깊이 있는 소울 아티스트로 인정받았습니다.
1964
[메리 웰스의 My Guy 작곡]
가수 메리 웰스를 위해 쓴 'My Guy'가 모타운 최초의 여성 아티스트 빌보드 1위곡이 되었습니다.
로빈슨은 자신의 곡뿐만 아니라 타 아티스트를 위한 곡 작업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곡은 영국 차트에서도 큰 인기를 끌며 모타운 사운드의 세계화에 기여했습니다. 여성의 마음을 대변하는 섬세한 가사는 로빈슨의 작사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증명했습니다.
[템테이션스의 My Girl 작곡]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팝송 중 하나로 꼽히는 'My Girl'을 템테이션스를 위해 작곡했습니다.
로빈슨은 템테이션스의 부드러운 화음에 어울리는 완벽한 멜로디와 가사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곡은 템테이션스의 첫 번째 빌보드 1위 곡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사랑받는 불후의 명곡입니다. 로빈슨의 프로듀싱 능력은 모타운 내 다른 그룹들이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65
[The Tracks of My Tears 발표]
스모키 로빈슨의 시적인 감성이 절정에 달한 명곡 'The Tracks of My Tears'를 공개했습니다.
슬픔을 미소로 감추고 살아가는 남자의 심정을 담은 가사는 대중과 평단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롤링 스톤지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 500곡' 중 상위권에 랭크되기도 했습니다. 그의 매끄러운 가성과 절제된 감정 표현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작품입니다.
[Going to a Go-Go 히트]
더 미라클즈의 에너지를 보여주는 업템포 댄스곡 'Going to a Go-Go'를 발표했습니다.
로빈슨은 발라드뿐만 아니라 춤추기 좋은 리듬감 넘치는 곡도 완벽하게 소화했습니다. 이 곡은 롤링 스톤즈 등 수많은 록 밴드들이 리메이크하며 록 음악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60년대 중반 디트로이트의 활기찬 파티 문화를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1967
[그룹명 변경 및 활발한 활동]
그룹 이름을 '스모키 로빈슨 앤 더 미라클즈'로 공식 변경하며 로빈슨의 입지를 더욱 강조했습니다.
이 시기 'I Second That Emotion'과 같은 대형 히트곡들을 연이어 발표했습니다. 로빈슨은 작곡가, 가수, 부사장이라는 1인 3역의 엄청난 업무량을 소화해냈습니다. 그의 지휘 아래 더 미라클즈는 모타운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는 그룹이 되었습니다.
1968
아들의 이름은 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멘토인 베리 고디의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음악 활동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로빈슨은 가족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였습니다. 그의 안정적인 가정 생활은 당시 모타운 아티스트들 사이에서도 귀감이 되었습니다.
1969
딸의 이름 역시 모타운의 초기 레이블 이름인 '탐라(Tamla)'에서 가져왔습니다. 로빈슨의 삶에서 음악과 가족, 그리고 모타운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줍니다. 자녀들은 훗날 로빈슨의 음악적 유산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데 참여하게 됩니다.
1970
[The Tears of a Clown 빌보드 1위]
1967년에 발표했던 'The Tears of a Clown'이 역주행 끝에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습니다.
이 곡은 원래 앨범 수록곡이었으나 영국에서의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미국에서 재발매되었습니다. 로빈슨의 창의적인 가사와 스티비 원더의 멜로디가 만나 불멸의 팝 클래식이 되었습니다. 더 미라클즈로서 거둔 상업적 성과의 정점을 찍은 순간이었습니다.
1972
그는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모타운 부사장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탈퇴를 결심했습니다. 탈퇴 전 'Farewell' 투어를 통해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며 아름다운 이별을 고했습니다. 이후 더 미라클즈는 새로운 리더 빌리 그리핀을 영입하여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73
그룹의 그늘에서 벗어나 로빈슨 본연의 부드러운 음악적 색깔을 온전히 담아냈습니다. 'Sweet Harmony'와 같은 곡들이 히트하며 성공적인 솔로 데뷔를 알렸습니다. 이 앨범은 그가 70년대 소울 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할 준비가 되었음을 증명했습니다.
1975
[A Quiet Storm 장르의 탄생]
앨범 'A Quiet Storm'을 발표하며 현대 R&B의 중요한 하위 장르를 개척했습니다.
이 앨범은 부드럽고 세련되며 로맨틱한 소울 음악의 전형을 제시했습니다. 앨범 타이틀은 훗날 성인 취향의 감성적인 라디오 포맷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평단은 그가 70년대 중반 대중음악의 정서를 한 단계 고양시켰다고 평가했습니다.
1979
이 곡은 빌보드 핫 100에서 4위까지 오르며 전 세계적인 라디오 애청곡이 되었습니다. 로빈슨 특유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로맨틱한 가사와 만나 시대를 초월한 매력을 발산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드라이브나 휴식을 취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울 명곡으로 꼽힙니다.
1981
[Being with You 차트 석권]
싱글 'Being with You'로 영국 싱글 차트 1위에 오르며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미국에서도 빌보드 2위까지 오르며 80년대 초반 그의 대중적 인기를 입증했습니다. 이 곡은 로빈슨이 작곡하고 프로듀싱한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솔로 싱글 중 하나입니다. 그의 우아한 가창력은 80년대 팝 시장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1983
로빈슨은 더 미라클즈 멤버들과 재결합하여 추억의 메들리를 선보였습니다. 이 공연은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로도 유명하지만, 로빈슨의 무대는 모타운의 정통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모타운 사운드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각인시킨 무대였습니다.
1986
오랜 시간 동료이자 부부로 지내온 두 사람의 이별은 많은 팬들에게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로빈슨은 이 시기 개인적인 갈등과 스트레스로 잠시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통해 아픔을 승화시키며 꾸준히 창작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87
당시에는 그룹 더 미라클즈가 아닌 로빈슨 개인만이 헌액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헌액식에서 베리 고디와 모타운 동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이후 2012년에야 더 미라클즈의 다른 멤버들도 명예의 전당에 함께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1988
로빈슨은 경영자로서의 짐을 내려놓고 전업 아티스트로서의 삶에 더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한 시대의 종료를 의미했지만, 그는 새로운 레이블에서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모타운의 정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로서 그는 영원한 모타운의 홍보대사로 남았습니다.
[첫 그래미상 수상]
싱글 'Just to See Her'로 제30회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남성 R&B 보컬상을 수상했습니다.
수십 년간 수많은 히트곡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첫 번째 그래미 경쟁 부문 수상이었습니다. 로빈슨의 가창력이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최고의 수준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순간입니다. 이 곡은 80년대 후반 그의 세련된 팝 소울 감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1989
[자서전 Smokey 발표]
자신의 삶과 모타운의 비화를 담은 자서전 'Smokey: Inside My Life'를 출간했습니다.
음악적 성공뿐만 아니라 마약 중독을 극복한 과정 등 개인적인 아픔도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팬들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더 큰 지지를 보냈으며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자서전은 모타운의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습니다.
1990
[그래미 레전드 상 수상]
음악 산업 전반에 끼친 막대한 영향력을 기려 그래미 레전드 상(Legend Award)을 받았습니다.
이 상은 전 세계 음악계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소수의 아티스트에게만 수여됩니다. 로빈슨은 작곡가와 가수로서 현대 팝 음악의 문법을 바꾼 공로를 다시 한번 인정받았습니다. 수상 소감에서 그는 모든 영광을 자신을 지지해준 팬들과 동료들에게 돌렸습니다.
1991
흑인 음악 커뮤니티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상징하는 중요한 상이었습니다. 많은 후배 아티스트들이 무대에 올라 로빈슨의 곡들을 리메이크하며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후 그는 다양한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휩쓸며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기 시작했습니다.
1993
[국가 예술 훈장 수여]
미국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 영예 중 하나인 국가 예술 훈장(National Medal of Arts)을 받았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으며 국가적 아티스트로 공인받았습니다. 대중음악을 넘어 미국 문화 전체를 풍성하게 만든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였습니다. 로빈슨은 흑인 아티스트로서 드물게 국가적 행사에 꾸준히 초대받는 품격 있는 스타로 남았습니다.
1999
[그래미 평생 공로상]
제41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평생 공로상(Lifetime Achievement Award)을 수상했습니다.
그래미 레전드 상에 이어 평생 공로상까지 거머쥐며 그래미의 정점에 올랐습니다. 그의 음악이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어떻게 세대를 연결했는지 조명하는 특별 영상이 상영되었습니다. 로빈슨은 수상 이후에도 은퇴하지 않고 정규 앨범을 발표하며 현역으로 활동했습니다.
2002
[조니 머서 상 수상]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서 수여하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인 조니 머서 상(Johnny Mercer Award)을 받았습니다.
가수 이전에 뛰어난 작곡가였던 그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상이었습니다. 밥 딜런이 그를 '시인'이라고 부른 이유를 다시금 입증하는 영예로운 순간이었습니다. 로빈슨은 이 시기에도 수많은 팝 스타들과 협업하며 작곡 역량을 과시했습니다.
두 사람은 비공개 결혼식을 통해 조용히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재혼 이후 로빈슨은 더욱 안정적인 정서로 음악 활동과 자선 사업에 매진했습니다. 프란시스는 로빈슨의 공연장마다 동행하며 그를 든든하게 지원하는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2004
[가스펠 앨범 Food for the Spirit]
자신의 신앙심을 담은 가스펠 앨범 'Food for the Spirit'을 발표했습니다.
모든 곡을 직접 쓰고 프로듀싱하며 영적인 평화를 노래했습니다. 기존의 팝적인 색채를 덜어내고 진지한 고백을 담아 평단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 앨범은 그가 인생의 황혼기에서 찾은 내면의 안식과 감사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2006
흑인 사회의 교육적, 문화적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졸업식 축사에서 청년들에게 꿈을 향한 열정과 정직함을 강조했습니다. 아티스트로서 교육계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케네디 센터 아너스 선정]
미국 문화계 최고의 영예인 케네디 센터 아너스(Kennedy Center Honors)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백악관에서 열린 리셉션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음악 인생을 기념하기 위해 수많은 동료 가수들이 헌정 공연을 펼쳤습니다. 로빈슨은 눈시울을 붉히며 자신의 음악이 미국 역사의 일부가 되었음에 감사했습니다.
2009
그는 모타운의 산증인으로서 초창기 이야기를 대중에게 생생하게 전달했습니다. 이 시기 새 앨범 'Time Flies When You're Having Fun'을 발표하며 현역임을 과시했습니다. 나이를 잊은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고왔으며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2012
로빈슨은 멤버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도록 오랜 시간 노력해왔습니다. 헌액식에서 그는 옛 동료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기여 없이는 지금의 자신도 없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로써 더 미라클즈는 완전체로서 음악 역사의 전설로 공식 기록되었습니다.
2016
[거슈윈 상 수상]
의회 도서관에서 수여하는 대중음악 부문 최고 영예인 거슈윈 상(Gershwin Prize)을 받았습니다.
폴 사이먼, 스티비 원더 등에 이어 작곡가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백악관에서 열린 기념 무대에서 자신의 히트곡들을 직접 가창하며 실력을 뽐냈습니다. 그의 작곡 능력이 팝 음악의 고전으로 남을 가치가 충분함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2023
[뮤직케어스 올해의 인물]
베리 고디와 함께 그래미 공식 자선 단체의 '올해의 인물(Person of the Year)'로 선정되었습니다.
모타운을 이끈 두 주역의 공로를 기리는 성대한 헌정 공연이 열렸습니다.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대에서 여전히 활발한 에너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상은 그의 음악적 업적뿐만 아니라 자선 활동과 인격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이 앨범은 여전히 로맨틱하고 세련된 스모키 특유의 R&B 사운드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음악 창작은 자신의 삶 그 자체이며 멈출 생각이 없음을 밝혔습니다. 고령의 나이에도 차트와 미디어의 주목을 받으며 전설의 현재진행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