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거스트 윌슨
극작가, 미국인
최근 수정 시각 : 2026-01-13- 09:46:02
오거스트 윌슨은 미국의 저명한 극작가입니다. 본명은 프레더릭 오거스트 키텔 주니어로, '피츠버그 연대기'로 유명하며 퓰리처상을 두 차례 수상했습니다. 1945년 피츠버그에서 태어나 2005년 60세의 나이로 간암으로 사망했습니다.
1945
[프레데릭 킷텔 주니어 탄생]
피츠버그의 가난한 동네인 힐 디스트릭트에서 독일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훗날 어머니의 성을 따라 이름을 바꾸게 될 이 소년은 다인종 사회의 복잡한 정체성을 안고 삶을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프레데릭 킷텔 시니어는 수데텐 독일인 이민자였으며, 어머니 데이지 윌슨은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의 흑인이었습니다.
소년은 인종적 갈등이 상존하던 피츠버그의 힐 디스트릭트에서 자라며 훗날 작품의 배경이 될 수많은 인물과 마주했습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가 평생에 걸쳐 쓴 10편의 연극 시리즈인 '피츠버그 사이클'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59
[센트럴 가톨릭 고교 입학]
학문적 성취를 위해 사립 가톨릭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심각한 인종차별에 직면했습니다. 백인 학생들로부터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학업을 이어가려 노력했습니다.
당시 그는 학교 내에서 유일한 흑인 학생 중 한 명이었으며, 매일같이 사물함에 놓인 인종차별적인 쪽지를 견뎌야 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어린 소년에게 교육 기관 내에 존재하는 구조적 인종주의의 잔인함을 몸소 깨닫게 했습니다.
결국 그는 1년 만에 학교를 떠나야 했으나, 지식에 대한 열망은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1960
[부당한 표절 의혹 사건]
글래드스톤 고등학교 재학 중 나폴레옹에 관한 뛰어난 에세이를 제출했으나 교사로부터 표절 의심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지적 능력을 부정하는 교사의 태도에 분노하여 즉시 자퇴를 결정했습니다.
교사는 흑인 소년이 그렇게 훌륭한 글을 쓸 리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에세이의 진위 여부를 증명하라고 압박했습니다.
윌슨은 결백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교사의 면전에서 에세이를 찢어버리고 학교를 영영 떠났습니다.
이 사건은 그가 제도권 교육을 신뢰하지 않고 독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결정적인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카네기 도서관에서의 독학]
자퇴 후 어머니에게 비밀로 한 채 매일 카네기 공공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흑인' 분류 섹션의 모든 책을 섭렵하며 위대한 흑인 지성인들의 사상을 흡수했습니다.
도서관의 'Negro' 섹션은 그에게 학교가 알려주지 않았던 흑인의 역사와 문학적 풍요로움을 선물한 신성한 장소였습니다.
그는 랭스턴 휴즈와 리처드 라이트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자신의 문학적 목소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카네기 도서관은 정규 학위가 없는 그에게 미국 최초이자 유일한 '도서관 학위'를 수여하며 그의 노력을 기렸습니다.
1962
[미 육군 입대와 조기 제대]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 속에서 미 육군에 입대했으나 군 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약 1년여 만에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왔습니다.
군 생활은 그에게 조직화된 규율 아래서의 삶을 경험하게 했으나, 자유로운 창작 정신을 억누르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는 제대 후 다양한 저임금 노동을 전전하며 피츠버그의 평범한 흑인들의 삶을 가까이서 관찰했습니다.
이때의 노동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노동자 캐릭터들의 현실적인 대사와 감성을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65
[생부의 죽음과 이름 변경]
친부인 프레데릭 킷텔이 사망한 후 자신의 이름을 어머니의 성을 딴 '오거스트 윌슨'으로 공식 변경했습니다. 이는 백인 아버지의 유산을 거부하고 흑인 정체성을 온전히 수용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는 이름을 바꿈으로써 어머니가 자신에게 쏟았던 헌신과 흑인 문화의 뿌리에 대한 존경을 표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첫 타자기를 구입하며 시인으로서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돌입했습니다.
이름의 변경은 단순한 호칭의 변화가 아니라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재확립한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1968
[블랙 호라이즌 극단 창설]
친구 롭 페니와 함께 피츠버그 힐 디스트릭트에 '블랙 호라이즌'이라는 흑인 전용 극단을 세웠습니다. 지역 사회의 흑인들에게 연극을 통해 문화적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연극 연출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었으나 독학으로 익힌 지식을 바탕으로 공연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 극단은 흑인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예술을 통한 공동체의 해방을 꿈꿨습니다.
시인이었던 윌슨이 연극이라는 매체의 강력한 파급력을 깨닫고 극작가로 거듭나는 중요한 실험실이 되었습니다.
1969
[브렌다 버튼과의 첫 결혼]
브렌다 버튼과 결혼하며 가정을 꾸렸으나 예술가로서의 열망과 현실적 삶 사이의 갈등을 겪었습니다. 결혼 생활은 길지 않았지만 그에게 가족이라는 테마를 깊이 고민하게 했습니다.
당시 그는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매우 궁핍한 상태였습니다.
결혼 생활 중 느꼈던 가부장적 책임감과 흑인 남성으로서의 압박감은 훗날 그의 연극 속 부부 관계 묘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1972년에 이혼하며 짧은 결혼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1970
[첫 딸 사키나 안사리 탄생]
첫 부인 브렌다 버튼 사이에서 딸 사키나 안사리가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된 윌슨은 자녀에게 물려줄 문화적 유산과 책임감에 대해 깊이 성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딸의 탄생은 그에게 다음 세대를 위한 흑인 역사의 기록자로서의 사명감을 더욱 굳건히 하게 했습니다.
비록 결혼 생활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는 딸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평생 동안 소통하려 노력했습니다.
자식에게 가해지는 부모의 영향과 역사의 대물림은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가 되었습니다.
1972
[말콤 X의 영향과 의식 각성]
말콤 X의 자서전과 사상을 접하며 흑인 민족주의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자신의 예술이 흑인 사회의 정치적, 문화적 해방에 기여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습니다.
그는 블랙 파워 운동의 흐름 속에서 흑인만의 독자적인 예술 양식을 구축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시기 윌슨은 서구적 미학 기준이 아닌 흑인들의 실제 언어와 음악적 리듬을 시와 연극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말콤 X의 치열한 정신은 훗날 그가 백인 주류 연극계의 편견에 맞서 싸우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1976
[첫 연극 '더 홈커밍' 공연]
시인에서 극작가로 전향한 후 처음으로 쓴 연극 작품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비록 대성공은 아니었으나 연극이라는 매체를 통해 관객과 소통하는 짜릿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 작품은 한 가족의 귀향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화해를 다루었으며, 윌슨 특유의 구어체 대사가 돋보였습니다.
동료들의 긍정적인 평가에 힘입어 그는 시보다 연극이 흑인 공동체의 이야기를 전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본격적인 전문 극작가로 성장하기 위한 첫 번째 실전 훈련이었습니다.
1978
[미네소타주 세인트폴 이주]
친구의 제안으로 고향 피츠버그를 떠나 미네소타주 세인트폴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고향과 물리적 거리를 두게 된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그가 피츠버그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기록하게 했습니다.
세인트폴 과학 박물관에서 대본 작가로 일하며 생계를 꾸리는 안정적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피츠버그를 떠나온 지독한 향수병은 그가 힐 디스트릭트의 소리와 풍경을 대본 속에 더 생생하게 재현하도록 자극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문학적 고향인 피츠버그를 향한 본격적인 연작 연극 구상에 돌입했습니다.
1979
[출세작 '지트니' 집필]
1970년대 피츠버그 비공식 택시 기사들의 삶을 다룬 연극 '지트니'를 완성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흑인들의 일상적인 대화가 가진 시적 리듬을 완벽하게 포착해냈습니다.
당시 흑인들은 인종차별로 인해 일반 택시를 이용하기 어려웠고, '지트니'는 그들의 필수적인 이동 수단이었습니다.
윌슨은 지트니 정류장에 모인 남성들의 대화를 통해 흑인 공동체의 꿈과 좌절, 우정을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이 작품은 훗날 그가 완성할 10편의 연대기 중 가장 먼저 쓰인 의미 있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1980
[플레이라이츠 센터 펠로우십]
미니애폴리스의 플레이라이츠 센터로부터 펠로우십을 받으며 전문 극작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습니다. 다른 작가들과 교류하며 극작 기술을 정교하게 다듬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재정적 지원 덕분에 생계 걱정 없이 집필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작품이 가진 보편적인 힘을 확인하고 더 큰 무대를 향한 야망을 품었습니다.
이 시기에 개발된 작품들이 훗날 브로드웨이를 뒤흔든 명작들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1981
[주디 올리버와 재혼]
미네소타에서 만난 사회복지사 주디 올리버와 두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그녀의 정서적인 지지와 안정된 가정환경 속에서 그는 예술적 창작의 정점을 맞이했습니다.
주디는 윌슨의 글쓰기에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그가 작품 세계에 몰두할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이 시기 윌슨은 자신의 가장 위대한 유산인 '피츠버그 사이클'의 핵심적인 작품들을 쏟아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약 9년 동안 이어지며 윌슨의 인생에서 가장 생산적인 시기를 함께했습니다.
1982
[오닐 센터 워크숍 선정]
유명한 유진 오닐 연극 센터 워크숍에 '마 레이니의 블랙 바텀'이 선정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연출가 로이드 리처즈를 만나 평생의 예술적 동반자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로이드 리처즈는 당시 예일 레퍼토리 극장의 예술 감독이자 전설적인 연출가였습니다.
그는 윌슨의 대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흑인 영혼의 울림을 단번에 알아보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이 만남은 독학 작가였던 윌슨이 주류 연극계의 정점으로 올라가는 역사적인 교두보가 되었습니다.
1983
[연대기 시리즈 공식 구상]
20세기의 각 10년을 하나씩 대표하는 10편의 연극을 쓰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겠다는 야심 찬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계획은 훗날 '피츠버그 사이클' 또는 '센추리 사이클'로 불리며 미국 문학사의 전무후무한 업적이 되었습니다.
그는 각 연극을 통해 흑인들이 겪은 이주, 차별, 투쟁, 그리고 그들만의 문화를 연대기적으로 기록하려 했습니다.
한 작가가 평생을 바쳐 특정 공동체의 100년사를 연극으로 완결 짓겠다는 이례적인 도전이었습니다.
1984
[브로드웨이 화려한 데뷔]
'마 레이니의 블랙 바텀'이 브로드웨이 코트 극장에서 개막하며 엄청난 화제를 모았습니다. 1920년대 시카고의 녹음실을 배경으로 인종적 착취를 날카롭게 비판한 명작입니다.
윌슨은 블루스 음악을 연극적 언어로 완벽하게 번역해내며 관객들에게 전율을 선사했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의 탁월한 대사 소화력과 복잡한 캐릭터 묘사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데뷔를 통해 오거스트 윌슨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극작가 중 한 명으로 단숨에 부상했습니다.
1985
[연극 '펜스' 예일 초연]
예일 레퍼토리 극장에서 그의 가장 대중적인 작품인 '펜스'를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습니다. 전직 야구 선수 출신 아버지 트로이 맥슨의 좌절된 꿈과 가족 잔혹사를 다루었습니다.
이 작품은 1950년대 흑인 남성이 겪는 사회적 장벽과 세대 간의 갈등을 펜스(울타리)라는 상징으로 풀어냈습니다.
주인공 트로이의 장황하면서도 비극적인 독백은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브로드웨이로 진출하기 전 이미 전미 비평가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신드롬을 예고했습니다.
1987
[연극 '펜스' 브로드웨이 입성]
제임스 얼 존스 주연의 '펜스'가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하여 기록적인 흥행을 거두었습니다. 흑인 가정의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비극을 다룬 이 작품은 평단과 대중을 동시에 사로잡았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브로드웨이 연극 중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작품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트로이 맥슨이라는 복합적인 캐릭터는 흑인 남성 리더십의 위기와 가족에 대한 집착을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윌슨은 이 작품을 통해 단순한 흑인 작가를 넘어 전 미국이 주목하는 거장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첫 퓰리처상 수상 영예]
연극 '펜스'로 생애 첫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을 수상하며 미국 최고 작가로서 공인받았습니다. 정규 교육을 거부했던 소년이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술적 상을 거머쥔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경험을 셰익스피어 비극 수준의 품격으로 끌어올렸다고 극찬했습니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이 영광을 힐 디스트릭트의 모든 사람들에게 돌리며 겸손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퓰리처상은 그에게 예술적 자유를 주었으며, 이후 남은 연대기 작업을 이어갈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토니상 작품상 수상]
제41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펜스'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며 브로드웨이를 정복했습니다. 주연 배우인 제임스 얼 존스도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예일 팀의 완벽한 승리를 장식했습니다.
이 시상식은 윌슨이 연극이라는 예술 형식을 통해 인종의 장벽을 허물 수 있음을 증명한 장이었습니다.
그는 토니상 수상을 통해 상업적 성공과 비평적 성공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그의 모든 신작은 브로드웨이가 가장 먼저 기다리는 특별한 초대장이 되었습니다.
1988
[조 터너의 왔다 갔다]
남부에서 북부로 이주해 온 흑인들의 영혼의 방황을 다룬 '조 터너의 왔다 갔다'를 발표했습니다. 아프리카적 영성과 미국의 현실이 기묘하게 결합된 독특한 분위기의 작품입니다.
윌슨은 이 작품에서 '노래'를 찾는 행위를 통해 잃어버린 자아와 정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묘사했습니다.
주인공 헤럴드 루미스가 겪는 영적 위기는 당시 흑인들이 겪었던 실존적 불안을 상징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는 이 연극이 자신의 10개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1990
[워싱턴주 시애틀로 이주]
두 번째 부인과 이혼한 후 시애틀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시애틀 레퍼토리 극장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작품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시애틀의 평온한 환경은 그에게 남은 5편의 연대기를 완성할 수 있는 지적인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그는 시애틀 레퍼토리 극장을 자신의 두 번째 예술적 고향으로 삼고 신작들을 지속적으로 개발했습니다.
이주 후에도 그의 모든 작품은 여전히 피츠버그의 힐 디스트릭트를 배경으로 삼아 강력한 일관성을 유지했습니다.
[피아노 레슨 퓰리처상 수상]
연극 '피아노 레슨'으로 두 번째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을 수상하며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습니다. 조상의 슬픈 역사가 새겨진 가보 피아노를 둘러싼 남매의 갈등을 심도 있게 다루었습니다.
과거를 보존할 것인가, 미래를 위해 청산할 것인가라는 심오한 질문을 피아노라는 상징물에 담았습니다.
윌슨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자신의 역사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중요한 화두를 던졌습니다.
두 차례의 퓰리처상 수상은 그를 생존하는 미국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했습니다.
1991
[두 기차가 달린다 발표]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의 소용돌이 속 평범한 사람들의 대화를 담은 '두 기차가 달린다'를 선보였습니다. 거대 담론이 아닌 식당 안의 일상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투영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믿는 정의와 세상의 정의 사이의 간극을 블랙 코미디 형식을 빌려 탁월하게 묘사했습니다.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젊은 세대와 전통을 고수하는 구세대 사이의 긴장을 섬세하게 담았습니다.
이 작품은 드라마 데스크 어워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며 그의 변함없는 필력을 증명했습니다.
1992
[헤리티지 어워드 수상]
미국 연극계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로운 상들을 연이어 받으며 원로급 대우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제 미국 고등학교와 대학의 문학 교과서에 필수적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흑인 연극인들을 위한 제도적 개선을 끊임없이 요구했습니다.
다양한 강연을 통해 흑인 작가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이미 단순한 극작가를 넘어 흑인 문화의 전권 대사이자 사상적 리더로 추앙받았습니다.
1994
[콘스탄자 로메로와 세 번째 결혼]
연극 의상 디자이너인 콘스탄자 로메로와 결혼하여 마지막 안식처를 찾았습니다. 같은 예술계 동료로서 그녀는 윌슨의 예술적 고뇌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동반자였습니다.
로메로는 그의 후기 작품들의 의상과 미학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두 사람은 시애틀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창작 활동에 집중했습니다.
그녀는 윌슨 사후에도 그의 유산을 보존하고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1995
[세븐 기타즈 발표]
1940년대 블루스 가수들의 삶과 비극을 다룬 '세븐 기타즈'를 발표했습니다. 블루스 음악의 형식을 연극 구조로 치밀하게 변주한 그의 미학적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플로이드 바튼이라는 캐릭터의 실패와 죽음을 통해 흑인 남성 예술가가 겪는 사회적 좌절을 그렸습니다.
윌슨은 이 작품에서 죽음과 애도라는 주제를 통해 흑인 공동체의 결속력을 감동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비평가들은 그가 음악을 극적 언어로 전환하는 데 있어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고 평가했습니다.
1996
[내가 서 있는 땅 연설]
전미 연극 대회에서 '내가 서 있는 땅'이라는 제목의 강렬한 기조연설을 했습니다. 백인 주류 연극계의 흑인 예술 문화적 전유와 '색맹 캐스팅'을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그는 흑인 연극인들이 백인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독립적인 극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연설은 연극계 전반에 걸쳐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윌슨을 논쟁적인 지성인으로 각인시켰습니다.
그는 예술이 정치적이어야 하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는 수단이어야 함을 다시 한번 천명했습니다.
1997
[딸 아주라 카르멘 탄생]
세 번째 부인 콘스탄자 로메로와의 사이에서 막내딸 아주라 카르멘 윌슨이 태어났습니다. 늦둥이 딸의 탄생은 윌슨에게 삶의 새로운 활력과 깊은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는 어린 딸을 위해 집필 시간을 조정하며 아버지로서의 시간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딸을 통해 그는 미래 세대가 살아갈 세상에 대해 더 깊은 연민과 책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정서적 충만함은 그가 남은 연대기 작품들을 더 인간적이고 깊이 있게 마무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1999
[킹 헤들리 2세 발표]
1980년대 레이건 시대를 배경으로 무너진 도심의 흑인 가족 비극을 다룬 '킹 헤들리 2세'를 발표했습니다. 고전 비극의 형식을 현대 흑인 사회의 절망에 이식한 강렬한 작품입니다.
가족의 희망이었던 정원이 파괴되는 상징을 통해 흑인 남성성이 겪는 상실감을 묘사했습니다.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어두운 톤은 당시 흑인 빈민가가 겪었던 구조적 폭력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비록 흥행은 예전만 못했으나 윌슨의 철학적 깊이가 가장 깊게 투영된 수작으로 평가받습니다.
2003
[바다의 보석 브로드웨이 공연]
연대기의 연대순으로 첫 번째에 해당하는 '바다의 보석'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의 기억을 간직한 285세의 신비로운 여인 아줌마 에스터가 등장합니다.
윌슨은 이 작품에서 사실주의를 넘어 아프리카적 초현실주의와 영성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에스터의 집은 흑인 역사의 성소와 같은 공간으로 묘사되며 잃어버린 영혼의 정화를 상징했습니다.
이 작품은 연대기 전체를 관통하는 영적인 뿌리를 설명하는 중요한 퍼즐 조각이 되었습니다.
2005
[간암 말기 진단 통보]
평생의 역작인 연대기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 완성을 앞두고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갑작스러운 투병 소식에 전 세계 연극계는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남은 시간이 불과 몇 달뿐이라고 말했으나 그는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라디오 골프'의 수정을 마무리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예술적 사명을 완수하려는 그의 의지는 장엄하기까지 했습니다.
[마지막 작품 라디오 골프 초연]
연대기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라디오 골프'를 공연하며 10편의 시리즈를 마침내 완결 지었습니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중산층으로 진입하려는 흑인들의 도덕적 딜레마를 다루었습니다.
이 작품은 과거의 역사적 유산과 현대의 경제적 성공 사이의 갈등을 날카롭게 포착했습니다.
윌슨은 100년에 걸친 흑인의 역사가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선언했습니다.
자신의 죽음 직전 시리즈를 완결한 작가의 투혼은 연극사에 유례없는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거장의 영면]
시애틀의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0세기 최고의 흑인 작가이자 미국 문화의 기록자였던 그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잠들었습니다.
그의 서거 소식은 미국 전역의 신문 1면을 장식했으며 수많은 조사가 이어졌습니다.
피츠버그의 힐 디스트릭트에서는 그를 추모하기 위한 행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향 피츠버그에 묻혔으며, 그의 이름은 이제 영원히 미국 연극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오거스트 윌슨 극장 탄생]
브로드웨이의 버지니아 극장이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오거스트 윌슨 극장'으로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흑인 작가의 이름이 브로드웨이 극장 이름으로 명명된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미국 연극계에 남긴 영향력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우였습니다.
많은 흑인 배우와 연출가들은 이 극장의 이름을 보며 윌슨이 닦아놓은 길에 감사함을 표했습니다.
브로드웨이 한복판에서 그의 이름은 영원히 빛나며 새로운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2009
[연극 명예의 전당 헌액]
사후에도 변치 않는 영향력을 인정받아 미국 연극 명예의 전당에 공식 헌액되었습니다. 생전 그가 투쟁했던 예술적 가치들이 정통성 있는 역사로 편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헌액은 그가 쓴 10편의 연대기가 인류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유족인 콘스탄자 로메로가 대신 참석하여 그의 예술 정신이 살아있음을 알렸습니다.
윌슨은 이제 셰익스피어, 입센, 오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전 작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2016
[영화 '펜스'의 전 세계적 흥행]
덴젤 워싱턴이 연출하고 주연한 영화 '펜스'가 개봉하여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습니다. 연극 무대를 넘어 스크린을 통해 대중에게 윌슨의 언어가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이올라 데이비스는 로즈 맥슨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명연기를 펼쳤습니다.
이 영화는 윌슨의 원작 대본을 최대한 존중하며 흑인 가정의 비극을 생생하게 담아냈습니다.
윌슨이 그토록 바랐던 흑인 감독에 의한 영화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역사적인 프로젝트였습니다.
2020
[마 레이니의 블랙 바텀 영화화]
넷플릭스를 통해 그의 데뷔작 '마 레이니의 블랙 바텀'이 영화로 제작되어 공개되었습니다. 채드윅 보스만의 마지막 유작이자 비올라 데이비스의 열연으로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영화는 1920년대 흑인 음악가들이 겪었던 예술적 착취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현했습니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전 세계 수억 명의 사람들이 오거스트 윌슨의 작품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윌슨의 작품이 가진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이 다시 한번 증명된 사례였습니다.
2021
[피츠버그 문화 센터 완공]
고향 피츠버그에 '오거스트 윌슨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 센터'가 대대적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그가 자랐던 힐 디스트릭트 근처에서 흑인 예술을 위한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 센터는 젊은 흑인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윌슨의 정신을 계승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그가 매일 걸었던 거리에 그의 이름을 딴 거대한 문화 전당이 세워진 것은 지역 사회 최고의 경사였습니다.
독학하던 소년의 꿈이 마침내 후배들을 위한 현실의 공간으로 탄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