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삼

씨름 선수, 씨름 감독, 스포츠 행정가,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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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삼
씨름 선수, 씨름 감독, 스포츠 행정가,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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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씨름 역사상 가장 화려한 기술로 한 시대를 풍미한 '뒤집기의 달인' 이승삼의 생애는 작은 체구로 거구를 제압하는 다윗과 골리앗의 실사판이었습니다. 1980년대 '털보 장사'라는 별명과 함께 한라급의 전설로 군림하며, 자신보다 훨씬 큰 백두급 장사들을 번개 같은 뒤집기 기술로 메다꽂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습니다. 은퇴 후에도 후진 양성과 행정가로서 씨름의 현대화를 이끌었으며, 최근에는 예술과 방송을 넘나들며 씨름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예인(藝人)이자 거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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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경상남도 마산에서의 탄생]

대한민국 경상남도 마산(현 창원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훗날 대한민국 씨름판을 뒤흔들 '기술 씨름의 달인'이 될 아이가 예향과 무술의 고장 마산에서 첫 울음을 터뜨립니다. 평범한 소년으로 자라며 남다른 승부욕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산의 자연 속에서 성장하며 기초 체력을 다졌고, 어린 시절부터 주변 친구들과의 놀이에서 지는 것을 싫어하는 강한 정신력을 소유했습니다.
이 시기의 정서적 배경은 훗날 그가 모래판에서 자신보다 큰 상대를 만나도 위축되지 않는 강단 있는 성격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서 성실하게 자라며 운동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1969

[씨름부와의 운명적 첫 만남]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우연히 씨름부 학생과 경기를 치렀다가 패배한 후 복수심에 씨름을 시작합니다. 싸움이든 운동이든 져본 적이 없던 소년에게 씨름부 친구의 기술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때부터 '이기기 위해' 모래판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입니다.

당시 마산 상남초등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며, 기술을 배운 친구에게 지는 것이 당연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씨름부에 가입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복수를 위해 시작했지만, 모래의 촉감과 상대를 넘기는 기술의 묘미에 점차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지도 교사로부터 남다른 유연성과 순발력을 인정받으며 꿈나무로서의 자질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1973

[마산 성호초등학교 졸업]

마산 지역의 기초 교육 과정을 마치고 중학교 진학을 준비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이미 지역 내 어린이 씨름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실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씨름 유망주로서의 이름을 마산 전역에 알리기 시작합니다.

초등학교 졸업 당시 또래보다 탄탄한 체격을 갖추었으며, 특히 하체 힘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기본적인 씨름 기술인 안다리와 밧다리를 완벽히 익혔고, 경기 운영에 대한 기초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중학교 진학 후 전문적인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체계적인 훈련 루틴을 스스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76

[마산중학교 졸업]

중등부 선수로서의 기량을 닦으며 학업과 운동을 병행합니다. 마산중학교 씨름부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며 전국의 강호들과 겨루는 법을 배웠습니다. 승리에 대한 집념과 기술 연구에 몰두하는 습관이 이 시기에 형성됩니다.

중학생 시절 전국 단위 대회에 출전하며 실전 감각을 키웠고, 패배를 통해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법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으며, 코치진으로부터 영리한 선수라는 칭찬을 자주 들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지역 내 명문 고등학교 씨름부로부터 러브콜을 받으며 엘리트 코스를 밟게 됩니다.

1979

[마산상업고등학교 졸업]

현재의 마산용마고등학교인 마산상고를 졸업하며 고등부 최고의 장사로 군림합니다. 이만기 교수보다 3년 선배로서 당시 마산 씨름의 부흥기를 앞장서서 이끌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의 활약은 대학 무대로 나아가는 탄탄한 디딤돌이 됩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턱수염이 많아 관리의 어려움을 느꼈고, 고3 때부터는 아예 수염을 기르기 시작해 '털보' 캐릭터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상체 근력 강화와 기술의 정교함을 더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자처하며 모래판을 굴렀습니다.
이미 이때부터 자신보다 큰 선수들을 상대로 변칙 기술을 사용하는 실험적인 경기 스타일을 고수했습니다.

1980

[경남대학교 체육교육과 입학]

대학 씨름의 메카인 경남대학교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성인 무대 준비를 시작합니다. 김성주 감독을 만나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비기(秘技)를 전수받게 됩니다. 기술 씨름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이론적, 실천적 연구에 매진합니다.

입학 당시 다른 선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신장이 고민이었으나, 김성주 감독은 오히려 이를 장점으로 삼는 '뒤집기' 기술을 집중 전수했습니다.
뒤집기는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는 최적의 기술임을 깨닫고 이를 자신만의 전매특허로 만들기 위해 매일 수천 번의 연습을 반복했습니다.
체육교육학을 전공하며 인체의 메커니즘을 공부한 것은 기술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82

[다윗과 골리앗의 역사적 대결]

대통령기 전국 장사 씨름대회 대학부 결승에서 205cm의 거구 이봉걸을 쓰러뜨리며 이변을 일으킵니다. 173cm, 83kg의 이승삼이 거대한 골리앗을 모래판에 거꾸로 처박는 순간은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경기를 통해 '뒤집기의 명수'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불가능해 보였던 승리를 오로지 기술 하나로 쟁취하며 민속씨름 대중화의 결정적인 도화선 역할을 했습니다.
관중들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환호했으며, 이 소식은 매스컴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작은 선수도 큰 선수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대한민국 씨름의 패러다임을 기술 위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1983

[프로 씨름단 삼익가구 입단]

민속씨름의 출범과 함께 프로 선수로서의 첫발을 내딛습니다. 대학 시절의 명성을 바탕으로 당시 창단된 삼익가구 씨름단(훗날 보형건설 등)의 핵심 멤버로 계약합니다. 화려한 수염과 뛰어난 실력을 갖춘 '털보 장사'의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됩니다.

프로 데뷔와 동시에 관객 동원 능력이 가장 뛰어난 스타 중 한 명으로 각광받았습니다.
일양약품 소속의 이종식 선수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뒤집기 한판승은 그의 이름을 프로 무대에 각인시킨 명장면이었습니다.
상대방의 몸 아래로 번개처럼 파고드는 그의 움직임은 상대 선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제3회 천하장사 대회 활약]

체급 제한이 없는 천하장사 대회에 출전하여 백두급 장사들과 당당히 겨룹니다. 비록 최종 우승은 놓쳤으나 8강과 4강 문턱에서 보여준 투혼은 팬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한라급의 자존심을 걸고 모래판의 매운맛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씨름판의 3거두였던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 등과 맞대결하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습니다.
무모해 보이는 공격도 과감히 시도하는 그의 스타일은 중계 방송의 시청률을 높이는 원동력이었습니다.
기술 하나하나가 마치 무술 공연을 보는 듯 정교하여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기술 교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84

[제4회 한라장사 타이틀 획득]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4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한라급 결승에서 생애 첫 장사 타이틀을 따냅니다. 쟁쟁한 경쟁자들을 연달아 물리치고 모래판의 주인으로 등극하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합니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장사'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결승전에서 보여준 뒤집기와 들배지기의 연속 동작은 상대의 방어벽을 무력화시켰습니다.
우승 확정 후 트레이드 마크인 수염을 만지며 환호하는 모습은 당시 스포츠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습니다.
첫 우승을 발판 삼아 한라급의 절대 강자로 자리 잡기 위한 장기 집권을 시작합니다.

1985

[제14회 전국장사 한라급 우승]

통산 두 번째 한라장사 황소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건재함을 과시합니다. 일관된 훈련과 철저한 자기 관리로 체급 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고히 했습니다. 팬들은 그의 시원한 뒤집기 한판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냅니다.

대회 기간 내내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며 기술의 완성도가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하체의 회전력을 극대화한 뒤집기 기술은 물리학적으로도 완벽하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이 승리를 계기로 그는 한라급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완전히 각인되었습니다.

1986

[이만기와의 명승부와 뒤집기]

당대 최고의 스타 이만기를 상대로 전설적인 뒤집기 기술을 성공시키며 승리합니다. 같은 대학 후배이자 라이벌인 이만기와의 대결은 항상 구름 관중을 몰고 다녔습니다. 이 경기는 씨름 역사상 가장 화려한 기술이 펼쳐진 대결로 기록됩니다.

이만기의 강력한 들배지기를 공중에서 몸을 돌려 뒤집기로 맞받아친 장면은 지금도 회자되는 명장면입니다.
두 장사의 대결은 단순히 힘의 대결이 아닌 기술의 향연이었으며, 씨름의 예술성을 한 단계 높였습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모래판 안팎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씨름의 부흥을 함께 이끌었습니다.

[제21회 한라장사 결정전 우승]

통산 세 번째 한라장사 타이틀을 획득하며 명예의 전당을 향한 행보를 이어갑니다. 85년 우승에 이어 연속적으로 정상을 차지하며 한라급의 왕좌를 굳게 지켰습니다. 그의 뒤집기 기술은 이제 알고도 못 막는 '필살기'가 되었습니다.

결승 상대의 끈질긴 방어에도 불구하고 순발력 있는 기술 연계로 승리를 따냈습니다.
이 시기 그는 단순히 기술만 좋은 선수가 아니라 지략을 겸비한 전략가로도 인정받았습니다.
관중들은 그가 파고들기만 해도 환호성을 지를 정도로 엄청난 스타성을 보유했습니다.

1987

[전국체육대회 금메달 획득]

민속씨름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최고의 무대인 전국체전에서도 경상남도를 대표해 금메달을 땁니다. 고향 마산의 명예를 걸고 출전한 대회에서 압도적인 실력 차를 보여주었습니다. 지역 사회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으며 씨름 스타로서의 입지를 굳힙니다.

지역 대표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모든 경기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이 금메달은 그가 은퇴 후 지역 씨름 발전에 헌신하게 되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우승 후 마산 시내에서 열린 카퍼레이드에 참여하며 지역 주민들과 기쁨을 함께 나눴습니다.

1988

[제34회 전국장사 한라급 제패]

KBS부산홀에서 열린 대회 결승에서 강시후를 3-1로 꺾고 통산 4번째 한라장사에 오릅니다. 27세의 나이에 거둔 이 성과는 그의 노련미가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부상 위험을 딛고 거둔 승리라 더욱 값진 기록입니다.

결승전에서 셋째 판까지 팽팽한 접전을 벌이다 주특기인 뒤집기로 승부를 결정지었습니다.
부산 지역 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라이브 중계의 주인공으로 활약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80년대 한라급 최다 우승 기록에 근접하며 전설적인 기록을 써 내려갔습니다.

1989

[허벅지 부상으로 인한 첫 위기]

경기 도중 심각한 허벅지 근육 파열 부상을 당해 장기 결장이 불가피해집니다. 화려한 전성기 도중에 찾아온 예기치 못한 시련은 그를 깊은 고뇌에 빠뜨립니다. 하지만 다시 모래판에 서겠다는 일념으로 재활에 전념합니다.

기술 위주의 씨름을 구사하다 보니 하체에 가해지는 하중이 커 부상이 발생했습니다.
당시의 의료 기술로는 회복이 쉽지 않다는 전망도 있었으나, 불굴의 의지로 치료를 이어갔습니다.
이 시기 자신의 경기 영상을 분석하며 기술의 정교함을 더하는 연구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1991

[재도약을 위한 마지막 투혼]

부상을 딛고 다시 모래판으로 돌아와 마지막 전성기를 불태웁니다. 비록 예전만큼의 폭발적인 순발력은 아니었으나,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후배들을 제압했습니다. 팬들은 돌아온 털보 장사의 모습에 열렬한 응원을 보냈습니다.

재기전에서 뒤집기 기술을 다시 한번 성공시키며 '기술은 늙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후배 선수들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하며 경기에 임하는 진지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선수 생활의 마무리를 준비하며 지도자로서의 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1993

[정들었던 모래판을 떠나다]

약 13년간의 화려한 현역 생활을 마감하고 공식 은퇴를 선언합니다. 대한민국 씨름사에 '뒤집기'라는 한 페이지를 남긴 전설의 퇴장이었습니다. 은퇴와 동시에 고향 마산에서 새로운 삶의 장을 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합니다.

은퇴식에서 샅바를 내려놓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많은 씨름 팬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현역 시절 천하장사 타이틀을 얻지 못한 것이 유일한 아쉬움으로 남았으나, 기술만큼은 천하장사급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만기, 이봉걸 등 동료 장사들의 축하 속에 명예롭게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경남대학교 씨름부 코치 임명]

은퇴 직후 모교인 경남대학교 씨름부의 코치로 부임하며 지도자 인생을 시작합니다. 후배들에게 자신의 전매특허인 뒤집기 기술과 실전 경험을 전수합니다. 실력 있는 유망주들을 발굴하여 대학 씨름의 강호로 키우는 데 집중합니다.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지도 방식으로 선수들로부터 높은 신뢰를 얻었습니다.
경남대 박재규 총장의 권유로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학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현역 시절 겪었던 시행착오를 제자들이 겪지 않도록 체계적인 훈련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1995

[제1회 지방선거 시장 후보 출마]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상남도 마산시 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합니다. 씨름 스타로서의 대중적 지지도를 바탕으로 지역 발전을 위한 새로운 도전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기성 정치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의 고배를 마십니다.

운동선수 출신으로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려 했으나 조직력의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낙선 후에도 지역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적극적인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스포츠 행정가로서 활동할 때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1997

[마산시청 씨름단 감독 취임]

고향인 마산시의 이름을 건 실업팀의 수장으로 부임하여 강력한 팀을 구축합니다. 창원과 마산 지역의 씨름 인재들을 불러모아 팀의 전성기를 이끌 준비를 합니다. 현장의 카리스마 넘치는 감독으로서 선수들을 독려합니다.

기술 중심의 훈련을 강조하며 실력은 있지만 빛을 보지 못한 무명 선수들을 발굴하는 데 탁월한 안목을 보였습니다.
선수들과 함께 합숙하며 형님 리더십을 발휘해 팀의 화합을 이끌어냈습니다.
전국 실업 대회에서 우승컵을 여러 번 들어 올리며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확실히 증명했습니다.

1998

[창원시 시장 선거 무소속 출마]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창원시 시장 후보로 다시 한번 출사표를 던집니다. 지역 체육 인프라 확충과 시민 복지 향상을 공약으로 내걸며 선전했습니다. 비록 이번에도 낙선하였으나 지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정치적 야욕보다는 고향 마산과 창원의 씨름 환경을 개선하려는 순수한 열정으로 임했습니다.
선거 과정을 통해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직접 경청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낙선 이후에는 정치보다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씨름의 길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2000

[새천년민주당 특임위원 위촉]

새천년민주당의 스포츠문화체육행정특임위원으로 임명되어 중앙 정치 무대와 인연을 맺습니다. 스포츠 정책 수립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자문역을 수행했습니다. 체육인의 권익 향상을 위한 입법 활동을 지원합니다.

씨름의 국가 무형문화재 지정과 지원 대책 마련을 위한 기초 연구를 도왔습니다.
정당 활동을 통해 체육 행정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문성을 쌓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약 1년 2개월간 활동하며 현장 중심의 스포츠 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2004

[창원대학교 석사 학위 취득]

창원대학교 대학원에서 체육교육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학위 논문을 제출합니다. 운동만 잘하는 선수라는 편견을 깨기 위해 늦깎이 공부에 매진한 결과입니다.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더 깊이 있는 지도자의 길을 준비합니다.

실전 기술의 역학적 원리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는 노력을 담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낮에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도서관에서 연구하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석사 학위는 그가 훗날 대학교 강단에 설 수 있는 중요한 자격 요건이 되었습니다.

2005

[마산 씨름 홍보 및 부활 운동 전개]

침체되어가는 씨름의 인기를 되살리기 위해 지역 축제와 연계한 홍보 활동을 펼칩니다. 거리로 나가 시민들에게 씨름의 재미를 직접 알리고 유소년 캠프를 개최했습니다. '마산의 자부심' 씨름을 지키기 위한 고군분투가 이어집니다.

마산 국화축제 등 대형 행사에서 씨름 시범 경기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전통 씨름 전용 경기장 건립을 위한 서명 운동과 예산 확보를 위해 발로 뛰었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마산 지역의 유망주들이 씨름에 대한 꿈을 잃지 않게 되었습니다.

2008

[경남대학교 체육학 박사 취득]

모교인 경남대학교에서 '전통 씨름의 기술 구조'를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이로써 '박사 장사'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얻으며 학계의 주목을 받습니다. 씨름 이론의 체계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수십 년간의 현장 경험과 데이터를 학술적으로 승화시킨 논문으로 최고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박사 학위 수여식에서 씨름의 세계화를 위한 이론적 토대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이후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씨름의 철학적 가치를 설파하는 데 힘을 얻게 됩니다.

[인제대학교 체육교육과 겸임교수]

인제대학교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대학교수로서의 경력을 시작합니다. 스포츠 지도자론과 실기 과목을 강의하며 현장의 생생한 경험을 전달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스승으로서 씨름의 정신을 전파합니다.

박사 학위 취득 후 첫 공식 강의 활동이었으며, 씨름의 역학적 원리를 쉽게 풀어내 인기를 끌었습니다.
단순한 운동 기술 전달을 넘어 스포츠 맨십과 인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대학 내 씨름 동아리 활성화를 지원하며 아마추어 저변 확대에도 기여했습니다.

2009

[동의대학교 겸임교수 임용]

동의대학교로 활동 영역을 넓혀 체육 인재 양성에 더욱 매진합니다. 부산과 경남 지역의 대학 씨름 네트워크를 강화하며 시너지 효과를 냈습니다. 학문과 현장을 잇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교수로서의 성실한 활동은 학계에서도 높게 평가받아 다양한 학술 세미나의 연사로 초청되었습니다.
씨름의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초기 논의 단계에서 학술적 자문을 제공했습니다.
그의 강의는 이론에만 그치지 않고 학생들과 직접 모래판에서 구르는 열정적인 수업이었습니다.

2011

[씨름의 명예의 전당 헌액 추진]

대한씨름협회의 원로 및 공로자로서 씨름의 역사 보존 사업에 참여합니다. 자신의 현역 시절 자료와 트로피 등을 기증하며 후세에 씨름의 영광을 알리려 노력합니다. 전설적인 장사로서의 위엄을 갖추어 가는 시기입니다.

명예의 전당 건립 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여 공정한 헌액 기준 마련을 제안했습니다.
자신의 대표 기술인 뒤집기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한 영상 자료 제작을 지원했습니다.
은퇴 후 20년이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씨름 발전을 위한 중심 인물로 활동했습니다.

2013

[전설의 뒤집기 시연 경기]

팬들을 위한 이벤트 경기에 나서서 녹슬지 않은 뒤집기 실력을 뽐냅니다. 나이가 무색한 유연함과 폭발적인 기술 연계로 장내를 술렁이게 만들었습니다. '털보 장사'의 귀환에 팬들은 추억에 잠기며 환호했습니다.

은퇴한 동료들과의 친선 경기에서 보여준 그의 움직임은 현역 장사들도 놀라게 했습니다.
경기 후 "기술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것"이라는 소감으로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이 이벤트는 씨름이 젊은 세대에게도 매력적인 스포츠가 될 수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2014

[제자 정경진의 천하장사 등극]

창원시청 감독으로서 지도해 온 제자 정경진이 천하장사에 오르는 쾌거를 거둡니다. 현역 시절 자신이 이루지 못한 천하장사의 꿈을 제자를 통해 마침내 실현합니다. 명장으로서의 입지를 전국에 다시 한번 증명한 순간입니다.

우승 확정 후 정경진 선수가 스승인 이승삼에게 천하장사 용포를 입혀주는 장면은 전국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제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기술적 비밀과 경기 철학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이 우승으로 이승삼은 '장사 출신의 명감독'이라는 최고의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2015

[심판위원장 퇴임 및 휴식]

협회의 공정한 경기 운영을 위해 헌신했던 심판위원장 직무를 마무리합니다. 오랫동안 지켜온 씨름판의 일선에서 물러나 잠시 휴식과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습니다. 하지만 씨름을 향한 마음은 여전히 모래판을 떠나지 않습니다.

위원장 재임 기간 중 오심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비디오 판독 시스템 고도화를 추진했습니다.
후배 심판들의 전문성 향상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해 씨름의 공정성을 높였습니다.
퇴임 후에는 울산 등지에서 개인적인 사업과 취미 생활을 즐기며 에너지를 충전했습니다.

2018

[대한씨름협회 기술위원 활동]

씨름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기술 자문역으로 복귀합니다. 전통 씨름의 보존과 현대적 변용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데 중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세계인들에게 씨름을 어떻게 알릴지 전략을 수립합니다.

북한과의 공동 등재라는 역사적 성과를 위해 남북 체육 교류 행사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씨름의 기술 체계를 외국인들도 알기 쉽게 도식화하는 작업에 아이디어를 제공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선수, 감독을 넘어 씨름을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승화시키는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2019

[대한씨름협회 사무처장 취임]

전국 씨름 행정을 총괄하는 대한씨름협회의 사무처장(전무이사급)으로 발탁됩니다. 협회 운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대회 기획을 현대적으로 개편하는 중책을 맡게 됩니다. 행정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대회 운영의 효율성을 위해 디지털 관리 시스템을 도입하고 후원사를 적극 유치했습니다.
지방자치단체들과의 협력을 강화해 전국 곳곳에서 수준 높은 씨름 대회가 열리도록 지원했습니다.
그의 리더십 하에 씨름협회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역동적인 조직으로 변모했습니다.

2020

[KBS '씨름의 희열' 해설 출연]

씨름 부활의 신호탄이 된 예능 프로그램 '태백에서 금강까지-씨름의 희열'에 해설가로 참여합니다. 전문적인 지식과 정감 있는 입담으로 젊은 시청자들에게 씨름의 매력을 알렸습니다. 과거의 전설이 현재의 스타들을 중계하는 특별한 모습이었습니다.

선수들의 근육 움직임과 샅바 싸움의 미묘한 신경전을 날카롭게 짚어내 호평을 받았습니다.
'뒤집기의 달인'답게 기술의 승부처를 정확히 예측하며 재미를 더했습니다.
이 방송 이후 씨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다시 한번 폭발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2021

[사무처장 임기 만료 및 퇴임]

약 2년간의 헌신적인 사무처장 임기를 마치고 명예롭게 직위를 내려놓습니다. 씨름의 부활 기틀을 닦았다는 높은 평가를 받으며 행정가로서의 소임을 완수했습니다. 퇴임 후에는 예술가로서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준비를 합니다.

임기 동안 씨름 홍보 영상 제작과 SNS 활성화 등 트렌드에 맞는 홍보 전략을 성공시켰습니다.
공정한 경기 문화를 정착시켜 씨름의 대외적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개선했습니다.
씨름인들의 화합을 이끌어낸 공로를 인정받아 감사패를 수여받았습니다.

2022

[예술가로서의 인생 2막 시작]

서양미술사를 공부하고 사진가로 활동하며 예술적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합니다. 평생 모래판에서 보냈던 에너지를 이제는 캔버스와 렌즈에 담아냅니다. '뒤집기'의 정교함이 예술적 감각으로 승화되는 과정입니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하고 팬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인 '이승삼 공간'을 준비했습니다.
개인 사진전을 개최하여 씨름판의 역동적인 모습과 일상의 고요함을 대중에게 선보였습니다.
스포츠 스타가 예술가로 변신한 드문 사례로 꼽히며 제2의 인생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2023

[창원시 씨름진흥협의회 부의장]

고향 창원시의 씨름 진흥을 위한 정책 기구의 부의장으로 위촉됩니다. 시 차원의 씨름 지원 조례 제정과 경기장 현대화 사업에 자문을 제공합니다. 지역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씨름 발전을 위한 마지막 봉사에 나섭니다.

시민 대상 씨름 특강을 열어 인성 교육과 건강 관리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꿈나무 선수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역의 문화유산으로서 씨름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지혜를 모으고 있습니다.

2025

[MG새마을금고 씨름단 감독 취임]

새롭게 창단된 명문 실업팀 MG새마을금고 씨름단의 사령탑으로 전격 복귀합니다. 풍부한 경험과 학술적 소양을 갖춘 그를 영입해 씨름계의 지각변동을 예고합니다. 6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뜨거운 열정으로 현장을 지휘합니다.

취임사에서 '기술 씨름의 부활과 매너 있는 경기'를 팀의 철학으로 선포했습니다.
첨단 분석 장비와 박사 장사로서의 이론을 결합한 혁신적인 훈련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다시 한번 천하장사를 배출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대한민국 씨름의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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