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 브리너

배우, 인권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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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15- 12: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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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 브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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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 브리너는 러시아 태생의 미국 배우로, 삭발한 머리와 독특한 목소리로 유명합니다.뮤지컬과 영화 '왕과 나'에서 몽꿋 왕 역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이 역할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평생 4,525번의 연극 공연에 출연하며 열정적인 연기 생활을 이어갔습니다.폐암으로 사망하기 직전, 대중에게 금연을 촉구하는 공익광고를 남겨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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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블라디보스토크의 탄생]

극동 공화국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광산 기술자인 아버지 보리스 브리너와 어머니 마루시아 블라고비도바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부모님은 그에게 율리 보리소비치 브리너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게 합니다. 훗날 할리우드를 정복할 카리스마의 씨앗이 러시아 땅에서 싹트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스위스계와 몽골계 혈통이 섞인 발명가이자 사업가였으며, 어머니는 러시아 귀족 집안 출신의 인텔리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문화적 배경이 섞인 가정 환경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다국어와 예술적 감각을 익혔습니다.
그의 신비로운 외모와 독특한 분위기는 이러한 복합적인 가계 배경에서 기인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1927

[중국 하얼빈으로의 이주]

아버지가 가족을 떠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자 어머니는 율과 그의 누나를 데리고 중국 하얼빈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낯선 이국 땅에서 소년기를 보내며 생존을 위한 강인한 정신력을 배우게 됩니다. 하얼빈에서의 생활은 그의 방랑자적 기질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가 됩니다.

하얼빈의 YMCA 학교에 다니며 기초 교육을 받았고, 그곳의 다양한 러시아 이민자 공동체와 교류했습니다.
불안정한 가정 형편 속에서도 어머니의 헌신적인 교육 덕분에 예술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아시아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정서적 유대를 만들어주었습니다.

1932

[파리로 향한 대항해]

만주 지역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어머니는 자녀들의 안전과 미래를 위해 프랑스 파리로의 이주를 결단합니다. 유럽의 예술 중심지인 파리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본격적인 예술적 재능을 꽃피울 준비를 합니다. 새로운 언어인 프랑스어를 익히며 유럽 문화의 정수를 흡수합니다.

파리에 도착한 율은 처음에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기도 했으나 곧 도시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매료되었습니다.
러시아 집시들과 어울리며 기타 연주를 배웠고, 밤거리의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며 용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그가 연기하는 인물들의 깊은 감수성과 남성적 매력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1934

[서커스 곡예사로의 변신]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파리의 유명한 서커스단인 시르크 디베르에 공중 곡예사로 입단합니다.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기술을 연마하며 무대 위에서의 존재감을 키워나갑니다. 죽음을 무릅쓰는 곡예를 통해 무대 공포증을 극복하고 담대함을 얻습니다.

공중그네 아티스트로서 수년 동안 활동하며 탄탄한 근육질 몸매와 균형 감각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관객의 환호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법을 배우며 대중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습니다.
이 시절 다져진 신체적 능력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액션 연기를 직접 소화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38

[곡예 도중의 부상과 시련]

공연 중 공중그네에서 추락하는 사고로 등과 어깨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곡예사 생활을 중단하게 됩니다. 인생의 첫 번째 큰 위기를 맞이했지만 이를 연기 공부의 기회로 전환하는 지혜를 발휘합니다. 몸을 쓰는 예술에서 내면을 표현하는 예술로 관심사가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수개월간의 치료 기간 동안 많은 책을 읽으며 인문학적 소양을 쌓고 연극 이론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곡예사로서의 꿈은 접었지만 무대에 대한 열정은 오히려 더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부상 후 회복 과정에서 보여준 끈기는 그의 평생을 관통하는 캐릭터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1940

[미국 대륙으로의 상륙]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유럽을 떠나 어머니와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갑니다. 주머니에는 단 몇 달러뿐이었으나 세계 최고의 배우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신대륙에 발을 내딛습니다.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이민자의 고단한 삶 속에서도 꿈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영어를 전혀 못 하던 상태였으나 끈질긴 노력으로 짧은 시간 안에 유창한 회화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러시아 집시 합창단에서 기타를 치며 생활비를 벌었고 틈틈이 연기 학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뉴욕의 치열한 경쟁 환경은 그를 더욱 날카롭고 강인한 예술가로 단련시켰습니다.

1941

[마이클 체호프와의 만남]

전설적인 연기 스승 마이클 체호프의 제자가 되어 본격적인 연기 훈련을 받기 시작합니다. 신체적 연기와 내면의 상상력을 결합하는 체호프 테크닉을 익히며 배우로서의 기초를 탄탄히 다집니다.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연기 철학은 평생의 연기 지침이 됩니다.

체호프의 극단에 합류하여 미국 전역을 도는 순회 공연에 참여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관객을 압도하는 눈빛과 발성법은 이 시기 훈련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단순한 흉내를 넘어 인물의 본질을 포착하는 연기의 정수를 배웠습니다.

1942

[전시 프랑스어 라디오 방송]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 전시정보국(OWI)에서 프랑스어 라디오 아나운서로 활동하며 연맹군을 지원합니다. 신뢰감 주는 목소리로 유럽의 점령 지역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전쟁이라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가 가진 힘을 확인합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정확한 발음과 감정 전달력을 극대화하는 훈련을 쌓았습니다.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인들에게 자유의 소식을 전하며 인도주의적인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이 시기 익힌 방송 기술은 훗날 영화 감독과 제작자로서 활동할 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44

[버지니아 길모어와 첫 결혼]

동료 배우인 버지니아 길모어와 사랑에 빠져 첫 번째 결혼식을 올립니다. 배우로서의 야망을 공유하며 서로를 지지해주는 동반자적 관계를 형성합니다. 가정을 꾸림으로써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고 활동에 매진할 동력을 확보합니다.

결혼 생활 초기에는 수입이 일정치 않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두 사람의 사랑으로 극복했습니다.
버지니아는 율 브리너의 재능을 누구보다 믿어준 든든한 조력자였습니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 유율 '락' 브리너가 태어나며 행복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1946

[브로드웨이 연극 '거문고 노래' 데뷔]

메리 마틴과 함께 주연을 맡은 연극 '거문고 노래(Lute Song)'를 통해 브로드웨이에 화려하게 데뷔합니다. 동양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의 독특한 외모가 평단과 관객의 찬사를 이끌어냅니다. 뉴욕 연극계에서 주목받는 신예 배우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이 무대에서 보여준 카리스마는 훗날 '왕과 나'에 캐스팅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베테랑 배우들에게 밀리지 않는 당당한 무대 매너를 선보였습니다.
관객들은 그의 강렬한 마스크와 목소리에 매료되어 새로운 스타의 등장을 직감했습니다.

[아들 락 브리너의 탄생]

첫 번째 아내 버지니아와의 사이에서 장남 율 '락' 브리너 2세가 세상의 빛을 봅니다. 아버지가 된 율은 가족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며 더욱 왕성하게 활동에 임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로 겪은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아들에게 헌신합니다.

아들 락 브리너는 훗날 아버지의 전기를 집필하며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율은 바쁜 일정 중에도 아들과 시간을 보내며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습니다.
자녀의 탄생은 그의 삶의 목표를 단순한 명성이 아닌 가족의 안녕으로 확장시켰습니다.

1948

[초기 텔레비전 감독 활동]

뉴욕의 CBS 방송국에서 초기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감독 및 제작자로 활동하며 새로운 매체에 도전합니다. 생방송 환경의 긴박함 속에서 탁월한 연출 감각과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배우를 넘어 연출가로서의 다재다능한 면모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습니다.

기술적인 제약이 많았던 초기 TV 환경에서 창의적인 연출 기법을 도입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카메라 앵글과 조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영상 예술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할리우드 영화 현장에서 감독 및 제작자와 대등하게 소통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949

[영화 '뉴욕 항구' 데뷔]

범죄 스릴러 영화 '뉴욕 항구(Port of New York)'에 마약 밀매업자 악당 역할로 출연하며 스크린에 첫 발을 내딛습니다. 강렬한 악역 연기로 관객들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깁니다. 당시에는 아직 머리카락이 있는 모습이었으나 연기력만큼은 이미 완성형이었습니다.

전형적인 악당 캐릭터를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로 재해석하여 영화의 긴장감을 높였습니다.
할리우드 제작자들에게 그의 스크린 테스트 결과가 긍정적으로 전달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스크린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주연 배우 못지않은 존재감을 발산했습니다.

1950

['왕과 나' 운명적인 오디션]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가 기획한 뮤지컬 '왕과 나'의 오디션에서 시암의 국왕 역을 따냅니다. 원래 연출에 더 관심이 있었으나 대본을 읽은 후 캐릭터에 매료되어 배우로서 무대에 서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전설적인 역할이 시작됩니다.

오디션 당시 그는 기타를 들고 집시 노래를 부르며 면접관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보였습니다.
왕의 오만함과 인간적인 갈등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배우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배역을 위해 그는 평생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삭발을 처음으로 감행했습니다.

1951

[브로드웨이 '왕과 나' 프리미어]

세인트 제임스 극장에서 뮤지컬 '왕과 나'의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올리며 밤사이 스타가 됩니다. 삭발한 머리와 압도적인 근육질 몸매, 위엄 있는 연기로 관객들을 전율케 합니다. 시암 국왕은 이제 율 브리너 이외의 인물을 상상할 수 없게 됩니다.

거트루드 로런스와의 환상적인 호흡은 브로드웨이 역사상 최고의 파트너십으로 기록되었습니다.
'Shall We Dance?' 장면에서 보여준 화려한 춤과 노래는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습니다.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며 3년 넘게 장기 공연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1952

[첫 번째 토니상 수상]

'왕과 나'에서의 열연을 인정받아 토니상 뮤지컬 부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습니다. 연극 무대에서의 압도적인 실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첫 번째 쾌거입니다. 이 상은 그가 브로드웨이의 황제로 군림하는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비록 조연상으로 분류되었으나 사실상 주연급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시상식에서 그는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소감을 전하며 동료 예술가들의 존경을 얻었습니다.
토니상 수상은 할리우드 영화계가 그를 주연 배우로 영입하려 경쟁하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1956

[영화 '왕과 나' 제작 및 개봉]

브로드웨이의 성공을 바탕으로 영화화된 '왕과 나'에서 다시 한 번 시암 국왕 역을 맡아 전 세계 관객을 만납니다. 화려한 테크니컬러 영상 속에 투영된 그의 카리스마는 극장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무대 위의 전설을 스크린으로 옮겨 영원한 기록으로 남깁니다.

데보라 카와 함께한 이 영화는 시각적인 화려함과 깊이 있는 연기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의 독특한 억양과 위엄 있는 걸음걸이는 전 세계적으로 유행이 되기도 했습니다.
영화는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거두며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컬 영화 중 하나로 꼽힙니다.

[영화 '십계' 개봉]

세실 B. 데밀 감독의 대작 '십계'에서 파라오 람세스 2세 역으로 출연하여 찰턴 헤스턴과 대결합니다. 모세에 대항하는 오만한 제왕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내며 악역 이상의 매력을 발산합니다. 할리우드의 대형 에픽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열연을 선보입니다.

람세스의 위엄을 표현하기 위해 더욱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유지하며 신체적인 준비를 마쳤습니다.
'모세!'라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영화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명대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그는 시대극에서 왕이나 신적 인물을 연기하는 독보적인 배우로 자리 잡았습니다.

[영화 '아나스타샤' 개봉]

잉그리드 버그먼과 호흡을 맞춘 영화 '아나스타샤'에서 냉철한 보닌 장군 역을 맡아 열연합니다. 러시아 혁명 이후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복합적인 심리 묘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합니다. 한 해에 세 편의 대작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보닌 장군의 차가운 외면 속에 숨겨진 야망과 사랑을 섬세하게 표현했다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상대 배우 잉그리드 버그먼의 복귀작으로서 그녀가 아카데미상을 받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1956년은 그에게 '율 브리너의 해'라고 불릴 정도로 독보적인 활약을 펼친 시기였습니다.

1957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영화 '왕과 나'로 제2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배우 인생의 정점을 찍습니다. 삭발한 머리로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 최초의 배우라는 기록을 세웁니다. 할리우드가 사랑하는 최고의 주연 배우로서 전 세계적인 권위를 확보합니다.

수상 소감에서 그는 무대에서 시작된 이 배역이 자신에게 준 선물을 잊지 않겠다고 전했습니다.
동양인 캐릭터를 연기하여 아카데미를 점령한 것은 당시로서 매우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오스카 수상 후 그의 몸값은 할리우드 최고 수준으로 뛰어올랐습니다.

1958

[영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개봉]

도스토옙스키의 명작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 장남 드미트리 역을 맡아 광기 어린 열연을 펼칩니다. 자신의 뿌리인 러시아 문학의 인물을 연기하며 깊은 내면 연기를 선보입니다. 고전 문학의 인물을 현실감 있게 그려내어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습니다.

드미트리의 격정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을 폭발적인 에너지를 담아 연기했습니다.
대작 영화들을 거치며 다져진 그의 연기력은 이제 예술 영화의 영역에서도 빛을 발했습니다.
원작의 무게감에 눌리지 않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습니다.

[영화 '대장 부리바' 출연]

앤서니 퀸과 함께 주연을 맡은 영화 '대장 부리바(The Buccaneer)'에서 해적 라피트 역으로 출연합니다. 삭발 머리 대신 가발을 쓰고 변장하여 새로운 외적 변신을 시도합니다. 액션과 낭만이 섞인 해적 캐릭터를 멋지게 소화하며 흥행 파워를 과시합니다.

이 영화는 그가 감독으로도 활동하고 싶어 했던 프로젝트였으나 결국 배우로 참여했습니다.
화려한 의상과 액션 장면을 통해 그의 신체적 매력이 다시 한 번 부각되었습니다.
비록 삭발이 아니었음에도 팬들은 그의 눈빛만으로도 율 브리너임을 알아보고 열광했습니다.

1959

[영화 '여정'과 '소리와 분노' 개봉]

헝가리 혁명을 배경으로 한 '여정'과 윌리엄 포크너 원작의 '소리와 분노'에 연달아 출연합니다. 한 해에 극과 극의 배경을 가진 인물들을 연기하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증명합니다. 단순한 액션 스타를 넘어 진지한 연기자로서의 행보를 이어갑니다.

'여정'에서는 데보라 카와 재회하여 복잡한 정치적 갈등 속의 인물을 깊이 있게 그렸습니다.
'소리와 분노'에서는 남부의 몰락하는 가문의 중심에서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다양한 국적과 배경의 캐릭터를 소화하는 그의 능력은 할리우드에서 독보적이었습니다.

[영화 '솔로몬과 시바' 대타 주연]

타이론 파워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공석이 된 솔로몬 왕 역을 맡아 영화를 완성시킵니다. 제작 중단 위기에 처한 영화를 자신의 가세로 살려내는 의리를 보여줍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으로서 다시 한 번 고대 서사시의 주인공으로 군림합니다.

지나 롤로브리지다와 함께 출연하여 세기의 로맨스를 장엄하게 그렸습니다.
재촬영의 고단함 속에서도 완벽한 왕의 풍모를 잃지 않고 촬영을 마쳤습니다.
이 영화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또 하나의 대규모 서사시 영화로 기록되었습니다.

1960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 특별고문 위촉]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UNHCR)의 특별고문으로 위촉되어 인도주의적 활동을 시작합니다. 전 세계의 난민 수용소를 직접 방문하여 그들의 고통을 세상에 알리는 가교 역할을 합니다. 자신의 이민자 출신 배경을 살려 소외된 이들을 위한 헌신을 다짐합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난민 캠프를 돌며 현장의 실태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홍보했습니다.
그의 지명도를 활용해 국제적인 지원과 관심을 끌어내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단순한 홍보대사를 넘어 실질적인 정책 조언과 기금 마련에도 앞장선 진정한 인도주의자였습니다.

[버지니아와 이혼 및 재혼]

첫 번째 아내 버지니아 길모어와 16년간의 결혼 생활을 마감하고 합의 이혼합니다. 이후 곧바로 도리스 클라이너와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리며 새로운 인생의 장을 엽니다. 사생활의 변화 속에서도 연기에 대한 열정은 변함없이 이어갑니다.

이혼 후에도 전 부인 및 아들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도리스 클라이너와의 사이에서는 딸 빅토리아 브리너가 태어났습니다.
가정 환경의 변화는 그의 내면적 성숙과 연기 철학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습니다.

[영화 '황야의 7인' 개봉]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를 리메이크한 서부극에서 리더 크리스 역을 맡아 열연합니다. 검은 옷을 입고 권총을 든 고독한 총잡이의 모습으로 전 세계적인 서부극 열풍을 주도합니다. 오늘날까지 서부극 최고의 리더 캐릭터로 회자되는 전설을 만듭니다.

스티브 맥퀸, 찰스 브론슨 등 쟁쟁한 배우들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그의 절제된 동작과 날카로운 눈빛은 총잡이 캐릭터의 정석을 제시했습니다.
이 영화는 전 세계적인 흥행 대성공을 거두며 그의 커리어에 또 하나의 대표작을 추가했습니다.

1961

[책 '어린이들을 앞으로' 출간]

유엔 활동의 일환으로 전 세계 난민 어린이들의 실상을 담은 사진집 '어린이들을 앞으로(Bring Forth the Children)'를 출간합니다. 사진작가로서의 탁월한 안목으로 아이들의 눈망울 속에 담긴 희망과 슬픔을 포착합니다. 예술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실천합니다.

책의 수익금 전액을 난민 구호 기금에 기부하여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의 사진은 전문 작가들에게도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만큼 수준이 높았습니다.
이 저술 활동을 통해 그는 단순한 스타를 넘어 영향력 있는 세계 시민으로 거듭났습니다.

1962

[영화 '자레인으로부터의 탈출' 개봉]

정치적 갈등이 폭발하는 가상의 중동 국가를 배경으로 한 액션 영화에서 혁명 리더 역을 맡습니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긴박한 탈출 과정 속에서 강인한 남성미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오락 영화에 출연하며 대중과의 접점을 넓힙니다.

직접 말을 타고 위험한 장면을 소화하며 프로 배우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보여준 그의 리더십은 실제 그의 성격과도 닮아 현장 분위기를 주도했습니다.
흥행 성적도 양호하여 그의 액션 스타로서의 입지를 다시 한 번 굳건히 했습니다.

[영화 '타라스 불바' 출연]

고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작 '타라스 불바'에서 토니 커티스와 함께 출연하여 코사크 기병대장 역을 연기합니다. 자신의 혈통과 맞닿은 캐릭터를 통해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거대한 스케일의 전쟁 장면 속에서도 그의 연기는 단연 돋보입니다.

아들과의 갈등과 국가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입체적인 인물을 그렸습니다.
영화 촬영을 위해 고난도의 기마술을 완벽하게 익혀 주변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 영화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정열적인 연기를 선보인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1963

[영화 '태양의 왕' 출연]

마야 문명을 배경으로 한 영화 '태양의 왕'에서 부족의 리더 치프 블랙 이글 역을 맡아 열연합니다. 원시적인 생명력과 지혜를 지닌 인물을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로 소화해냅니다. 역사와 신화가 섞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있어 대체 불가능한 배우임을 입증합니다.

영화 속의 화려한 전통 장식과 분장은 그의 이국적인 매력을 극대화했습니다.
인종과 시대를 초월하여 다양한 문화권의 리더를 연기하는 행보를 지속했습니다.
비록 영화의 완성도에는 호불호가 갈렸으나 그의 존재감만은 확실했습니다.

1964

[영화 '아시야로부터의 비행' 개봉]

공군 구조대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대니 케이, 조지 샤키리스와 호흡을 맞춥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타인을 구조하는 영웅적인 활동을 진지하게 그려냅니다. 현대적인 전문직 캐릭터를 통해 연기 변신을 시도하며 신선함을 줍니다.

구조 대원들의 치열한 삶과 인간적인 유대를 감동적으로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제작 과정에서 실제 비행 기술에 대해 공부하는 등 고증에 철저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후 그는 현대물과 시대극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유연한 커리어를 구축했습니다.

1965

[영화 '모리투리' 출연]

말론 브란도와 함께 주연을 맡은 첩보 스릴러 영화에서 독일 화물선 선장 뮐러 역을 연기합니다. 당대 최고의 연기파 배우 브란도와 팽팽한 연기 대결을 벌이며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중후한 멋과 깊이 있는 눈빛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높입니다.

나치 정권 하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양심을 무겁고 진지하게 담아냈습니다.
말론 브란도와의 호흡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큰 화제가 된 조합이었습니다.
비록 상업적 성공은 크지 않았으나 연기적인 측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은 숨은 명작입니다.

1966

[영화 '거인 한 발자국' 출연]

이스라엘 건국 영웅 미키 마커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에서 조연으로 출연하여 든든한 조력자 역을 수행합니다. 커크 더글러스와 함께 출연하며 역사적 실화의 감동을 전하는 데 일조합니다. 비중과 상관없이 의미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소신을 보여줍니다.

전장 속에서의 전우애와 국가를 향한 헌신을 묵직한 연기로 뒷받침했습니다.
이스라엘 현지 로케이션 촬영을 통해 사실감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의 참여는 영화의 국제적인 배급과 홍보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영화 '돌아온 7인' 개봉]

'황야의 7인'의 속편에서 유일하게 원년 멤버로 돌아와 리더 크리스 역을 다시 맡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총잡이 리더의 아우라를 뽐내며 시리즈의 정통성을 유지합니다. 팬들에게 익숙한 영웅의 귀환으로 큰 반가움을 선사합니다.

원작의 명성에 도전하는 부담감 속에서도 주인공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멤버들을 이끌며 여전한 카리스마와 총기 액션을 선보였습니다.
이 영화는 이후 서부극 시리즈가 지속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1967

[영화 '트리플 크로스' 출연]

제2차 세계 대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첩보물에서 독일군 장교 바론 역을 연기합니다. 크리스토퍼 플러머와 함께 스파이 세계의 치열한 두뇌 싸움을 그립니다. 절도 있는 군인의 풍모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지성을 표현하며 호평을 받습니다.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배역을 위해 역사적인 배경을 철저히 연구했습니다.
유럽 각지에서 진행된 야외 촬영을 통해 영화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데 일조했습니다.
첩보 장르에서도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은 영화의 무게중심을 잡아주었습니다.

1968

[영화 '빌라 라이드' 개봉]

멕시코 혁명의 영웅 판초 빌라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칩니다. 로버트 미첨과 함께 혁명의 불길 속에서 싸우는 전사의 모습을 강렬하게 그립니다. 이번에는 삭발 대신 풍성한 콧수염과 가발을 착용하여 완벽한 현지 혁명가로 변신합니다.

민중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의 내면적 고뇌까지 훌륭하게 포착했습니다.
촬영 중 발생한 위험한 스턴트 장면도 상당 부분 직접 소화하며 열정을 보였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그는 실존했던 역사적 리더를 연기하는 데 정통한 배우임을 재입증했습니다.

1969

[영화 '네레트바 전투' 출연]

유고슬라비아에서 제작된 대작 전쟁 영화에서 폭파 전문가 블라도 역으로 출연합니다. 올슨 웰스 등 세계적인 거물 배우들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유격대의 영웅적인 항쟁을 그립니다. 동유럽의 정서가 담긴 영화에 출연하며 글로벌한 행보를 이어갑니다.

다리 폭파를 위해 목숨을 거는 긴박한 장면에서 그의 연기 열정이 빛을 발했습니다.
외국 영화 제작팀과도 스스럼없이 소통하며 프로다운 작업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이 영화는 유고슬라비아 영화사에서 가장 제작비가 많이 투입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습니다.

1970

[영화 '아디오스 사바타' 개봉]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의 주인공 사바타 역을 맡아 새로운 스타일의 액션을 선보입니다. 기존 할리우드 서부극보다 더욱 냉소적이고 화려한 총잡이 캐릭터를 구축합니다. 50세의 나이에도 변치 않는 몸매와 액션 감각으로 관객들을 놀라게 합니다.

리 반 클리프가 연기했던 전작의 명성을 이어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사바타를 재창조했습니다.
화려한 의상과 신기한 무기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오락적인 재미를 극대화했습니다.
이 영화는 유럽 지역에서 특히 큰 인기를 얻으며 그의 국제적인 흥행 파워를 확인시켜주었습니다.

1971

[자클린 티옹 드 라 숌과 세 번째 결혼]

도리스와 이혼한 후 자클린 티옹 드 라 숌과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립니다. 프랑스 출신의 새로운 아내와 함께 안락한 가정을 꾸리며 중년의 안정을 찾아갑니다. 사랑에 있어서도 언제나 열정적이었던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행보입니다.

자클린과의 사이에서 베트남 출신의 두 딸 미아와 멜로디를 입양하여 사랑으로 키웠습니다.
가족을 향한 그의 사랑은 혈연을 넘어선 보편적인 인류애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았습니다.

1972

[TV 시리즈 '안나와 국왕' 주연]

영화의 성공을 바탕으로 제작된 TV 시리즈 버전의 '안나와 국왕'에서 다시 한 번 국왕 역을 연기합니다. 안방극장의 시청자들에게 매주 카리스마 넘치는 왕의 모습을 선사합니다. 같은 캐릭터를 매체에 맞게 변화시켜 연기하는 숙련된 기술을 보여줍니다.

비록 시리즈는 단 한 시즌만에 종영되었으나 율 브리너의 연기만큼은 호평 일색이었습니다.
시청자들은 매주 할리우드 대스타의 연기를 안방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 열광했습니다.
이후 그는 한동안 매체 연기보다 무대 공연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1973

[영화 '이색지대'와 총잡이 로봇]

마이클 크라이튼 감독의 SF 스릴러 '이색지대(Westworld)'에서 고장 난 총잡이 로봇 '건슬링어' 역으로 출연합니다. 자신의 출세작 '황야의 7인' 캐릭터를 비틀어 만든 무표정하고 차가운 로봇 연기로 센세이션을 일으킵니다. 현대 SF 영화사에 남을 강력한 아이콘을 탄생시킵니다.

감정이 없는 안드로이드의 공포를 오로지 절제된 움직임과 눈빛만으로 표현했습니다.
그의 차가운 금속성 눈동자는 당시 관객들에게 엄청난 시각적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작품은 훗날 '터미네이터' 등 수많은 로봇 추격 영화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1975

[영화 '최후의 전사' 개봉]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 '최후의 전사(The Ultimate Warrior)'에서 고독한 용병 카슨 역을 맡아 활약합니다. 황폐해진 미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강인한 전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50대 중반임에도 완벽한 액션 소화력을 과시하며 건재함을 알립니다.

영화 속의 실전적인 격투 장면과 단검 액션은 큰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어두운 미래의 절망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리더의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이후 그는 상업 영화보다는 무대 복귀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기 시작했습니다.

1976

[영화 '사명' 출연]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액션 드라마 '사명(Death Rage)'에 출연하며 유럽 시장에서의 활동을 이어갑니다. 은퇴한 킬러가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을 고독하게 그려냅니다. 배우로서 영화 출연을 마무리해가는 시기에 선택한 진중한 액션물입니다.

세월의 깊이가 묻어나는 그의 얼굴은 캐릭터의 고뇌를 표현하기에 완벽했습니다.
유럽 특유의 느와르 감성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흡수하여 세련된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주연 영화 중 하나로 남으며 화려한 스크린 경력을 마감했습니다.

1977

[브로드웨이 '왕과 나' 리바이벌 복귀]

20여 년 만에 다시 브로드웨이 무대로 돌아와 뮤지컬 '왕과 나'의 재공연을 시작합니다. 올드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며 전 회차 매진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웁니다. 더욱 깊어진 국왕의 품격과 위엄으로 무대를 장악합니다.

젊은 시절의 패기 대신 노련한 완숙미로 캐릭터를 재해석하여 평단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공연 기간 내내 그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열정으로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공연의 성공은 그가 죽는 날까지 이 뮤지컬과 함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9

[런던 팔라디움 공연 대성공]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공연장 팔라디움에서 '왕과 나' 공연을 열어 유럽 관객들을 사로잡습니다. 할리우드 대스타의 직접적인 방문에 런던 극장가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국경을 초월한 그의 인기는 영국 무대에서도 여지없이 증명됩니다.

영국 여왕을 비롯한 귀빈들이 공연을 관람하며 그의 예술적 성취를 높게 평가했습니다.
그의 당당하고 압도적인 연기는 까다로운 영국 비평가들의 마음마저 돌려놓았습니다.
이 시기 그는 무대 공연을 통해 관객과 호흡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임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1980

[사진작가로서의 회고전]

평생 찍어온 영화 현장과 가족들의 사진들을 모아 개인 사진전을 개최합니다. 피사체의 본질을 꿰뚫는 그의 사진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대중에게 공개됩니다. 사진작가들이 인정하는 실력파 예술가로서 또 다른 명성을 얻습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등 당대 최고의 사진가들과 교류하며 조언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의 사진에는 화려한 스타들의 인간적이고 소박한 순간들이 진실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전시회는 큰 호응을 얻었으며 사진집으로도 출간되어 예술적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1981

[두 딸의 입양과 가족애]

베트남 전쟁 고아였던 두 소녀 미아와 멜로디를 정식으로 입양하여 극진한 사랑으로 보살핍니다. 스타의 권위보다는 따뜻한 아버지로서의 삶을 최우선으로 여깁니다. 가정 안에서의 행복을 통해 투병 전 마지막 평화로운 시기를 보냅니다.

두 딸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교육에 직접 관여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넓은 시야를 갖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 시기 그는 가족과의 유대가 자신의 예술적 영감의 가장 큰 원천이라고 고백했습니다.

1983

[카시 리와 네 번째 결혼]

무용수 출신의 젊은 아내 카시 리와 네 번째 결혼식을 올리며 마지막 사랑을 맹세합니다. 인생의 황혼기에도 변치 않는 열정적인 삶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카시 리는 훗날 그가 암과 싸울 때 끝까지 곁을 지키는 헌신적인 동반자가 됩니다.

나이 차이를 극복한 두 사람의 사랑은 예술적 교감을 바탕으로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는 카시 리를 만나면서 정서적으로 큰 안정을 얻고 다시 무대에 설 기운을 차렸습니다.
이 결혼은 그가 생애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데 결정적인 정서적 지지대가 되었습니다.

[폐암 진단과 투병의 시작]

지속되는 기침과 통증으로 정밀 검사를 받은 결과 폐암 판정을 받습니다. 평생 애연가였던 자신의 삶을 후회하면서도 암과의 정면 대결을 선포합니다. 투병 사실을 숨기지 않고 공개하며 대중에게 건강의 소중함을 알리기로 결심합니다.

의사로부터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치료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고통스러운 화학 요법 중에도 무대 공연 스케줄을 취소하지 않는 강인함을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이 다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1984

[금연 홍보 영상 촬영]

자신의 사후에 방송되도록 기획된 금연 공익 광고를 촬영하며 유언과도 같은 메시지를 남깁니다. '내가 죽은 후 이 방송을 보고 있다면, 절대 담배를 피우지 마십시오'라는 강렬한 경고를 보냅니다. 죽음을 앞둔 거장의 진심 어린 호소는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줍니다.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었으나 카메라 앞에서는 마지막 기운을 다해 연기했습니다.
이 광고는 훗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전 세계적으로 방영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금연을 이끌어냈습니다.
배우로서의 재능을 가장 가치 있는 인도주의적 활동에 쏟아부은 숭고한 작업이었습니다.

1985

[마지막 브로드웨이 고별 공연]

암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왕과 나'의 브로드웨이 고별 공연을 강행합니다. 평생 4,625회라는 전무후무한 공연 기록을 세우며 무대 위의 왕으로서 마지막 인사를 건넵니다. 관객들은 눈물 섞인 기립박수로 전설의 마지막을 배웅합니다.

공연 도중 실신할 뻔한 위기가 있었으나 정신력으로 버티며 커튼콜까지 마쳤습니다.
그는 무대 위에서 죽는 것이 배우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평소에도 말해왔습니다.
이 공연을 끝으로 그는 영원히 무대를 떠나 요양에 들어갔습니다.

[특별 토니상 수상]

수십 년간 공연계를 빛낸 공로와 '왕과 나'에 바친 헌신을 기리기 위해 특별 토니상을 수상합니다. 투병 중인 그를 위해 동료 예술가들이 마음을 모아 수여한 가장 영예로운 상입니다. 무대 예술가로서의 그의 삶을 완벽하게 정리해준 훈장이었습니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시상식에 참석하여 감동적인 수상 소감을 전했습니다.
무대에 대한 자신의 끝없는 사랑을 표현하며 후배 배우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장내의 모든 예술가들은 눈물을 흘리며 전설적인 거장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생 모르 드 투렌에 안치]

고인의 유해는 평소 아끼던 프랑스의 생 모르 드 투렌에 위치한 수도원 묘지에 안치됩니다. 시끄러운 할리우드를 떠나 평온한 숲 속에 잠들어 영원한 안식을 취합니다. 그의 묘비에는 배우이자 인도주의자였던 그의 삶을 기리는 문구가 새겨집니다.

장례식은 유가족과 가까운 동료들만 참석한 가운데 소박하고 엄숙하게 치러졌습니다.
전 세계에서 수만 통의 애도 서한이 도착하여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영화와 목소리는 후대에 영원히 기억될 문화 유산이 되었습니다.

[전설적인 왕의 승하]

뉴욕의 코넬 의료센터에서 아내와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5세의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전 세계 영화계와 팬들은 세기의 아이콘을 잃은 슬픔에 잠깁니다. 할리우드의 한 황금 시대를 지배했던 거대한 별이 하늘로 돌아갑니다.

사망 직전까지도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며 품위 있게 마지막을 맞이했습니다.
같은 날 오슨 웰스도 사망하여 할리우드는 하루에 두 명의 거인을 잃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할리우드 역사에서 하나의 시대가 저물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1986

[사후 금연 광고의 파급 효과]

그가 사망한 후 방영된 금연 공익 광고가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킵니다. 죽은 자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강력한 경고에 수많은 흡연자들이 담배를 끊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죽어서도 인류를 위해 봉사한 그의 진심이 증명됩니다.

미국 암 협회는 이 광고가 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금연 캠페인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의 진실된 모습은 화려한 스타의 이미지보다 더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는 유명인의 사회적 영향력이 어떻게 긍정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 보여준 최고의 사례가 되었습니다.

1990

[탄생 70주년 기념 회고전]

그의 탄생 70주년을 맞아 뉴욕과 파리에서 대규모 영화 회고전과 사진전이 열립니다. 새로운 세대들이 그의 연기 철학과 예술적 성취를 재발견하는 기회를 갖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그의 독보적인 가리스마를 다시 확인합니다.

복원된 '왕과 나' 필름이 상영되어 관객들에게 최상의 영상미를 선사했습니다.
사진전에서는 그가 찍은 동료 배우들의 비공개 사진들이 전시되어 인기를 끌었습니다.
비평가들은 그를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캐릭터를 구축한 배우로 재평가했습니다.

2005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진 동상]

그의 고향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율 브리너의 탄생을 기리는 기념 동상이 세워집니다. 전설적인 배우가 자신의 뿌리로 돌아왔음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행사입니다. 러시아와 미국을 잇는 문화적 가교로서 그의 존재가 다시 부각됩니다.

동상은 그가 '왕과 나'에서 보여준 국왕의 위엄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습니다.
개막식에는 아들 락 브리너가 참석하여 고향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 동상은 오늘날 블라디보스토크를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2020

2020.07.11 사후 35년

[탄생 100주년 전 세계적 추모]

율 브리너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 영화계에서 다양한 추모 행사가 진행됩니다.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에서는 그의 대표작들을 특별 편성하여 중계합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있는 전설임을 확인합니다.

SNS를 통해 전 세계 팬들이 그를 기억하는 메시지와 사진들을 공유하며 축하했습니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는 그의 별 주변에 많은 꽃과 편지가 놓였습니다.
그의 예술적 혼은 오늘날의 배우들에게도 여전히 큰 영감과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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