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싱크탱크, 비영리 단체, 국제 관계 연구소, 정책 자문 기관
최근 수정 시각 : 2026-01-16- 14:34:11
카네기 국제평화재단(CEIP)은 1910년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에 의해 설립된 세계 최초의 글로벌 싱크탱크입니다. '전쟁의 폐지'라는 이상주의적 목표로 시작된 이 재단은 국제법의 확립과 국가 간 상호 이해 증진을 위해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헌신해 왔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기록 보존부터 국제 연합(UN)의 창설 지원, 그리고 냉전기 군비 통제 제언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마다 정책적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오늘날 워싱턴 D.C.를 본부로 전 세계 주요 거점에 연구 센터를 둔 재단은 단순한 연구소를 넘어 초국가적 이슈를 다루는 세계적인 지식 네트워크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1910
[앤드루 카네기의 선언]
철강업계의 거물 앤드루 카네기가 전쟁 폐지를 위한 국제 기구 설립의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 그는 인류의 가장 큰 죄악인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선언은 현대적인 국제 평화 운동과 정책 연구의 기틀을 마련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카네기는 평화 운동가들과의 오랜 교류 끝에 이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화 수호를 위한 영구적인 기금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이 제안은 전 세계 지식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평화 연구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엘리후 루트 회장 선임]
미국 국무장관을 역임한 엘리후 루트가 재단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조직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그는 국제 분쟁의 법적 해결을 강조하며 재단의 초기 전략을 수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의 지도력 아래 재단은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진 국제 연구 기관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엘리후 루트는 국제 사법 재판소 설립을 지지하던 대표적인 법률가였습니다.
그의 명성은 재단이 국제 외교 무대에서 빠르게 신뢰를 얻는 데 기여했습니다.
재단은 그의 철학에 따라 '법에 의한 평화'라는 초기 비전을 구체화했습니다.
[창립 기금 기탁 완료]
카네기는 재단 설립을 위해 당시 거금인 1,000만 달러 상당의 채권을 공식 기탁했습니다. 이 자금은 재단이 어떠한 정치적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원인을 분석하고 법적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전례 없는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1,000만 달러는 평화 증진을 위한 단일 기부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습니다.
이 기금은 재단의 초기 운영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제법 프로젝트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카네기는 이 기금이 전쟁이 사라진 후에도 인류의 진보를 위해 쓰이길 희망했습니다.
1911
[국제법 분과 창설]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법적 장치를 연구하는 전문 국제법 분과가 재단 내에 신설되었습니다. 이 분과는 국가 간 분쟁을 중재하고 해결하기 위한 사법적 틀을 마련하는 데 연구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국제 질서의 확립을 통해 평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재단의 의지가 담겼습니다.
제임스 브라운 스콧이 이 분과의 첫 이사로 임명되어 연구를 주도했습니다.
이들은 국제 사법 체계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다양한 법률 문헌을 발간했습니다.
이 연구 성과들은 훗날 상설국제사법재판소 설립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경제 및 역사 분과 창립]
전쟁의 경제적 배경과 역사적 교훈을 탐구하는 분과가 설립되어 다학제적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전쟁이 사회 구조와 경제 체제에 미치는 영향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데이터 기반의 평화론을 제시했습니다. 단순한 선동보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전쟁의 폐해를 증명하려 노력했습니다.
존 베이츠 클라크가 이 분과를 맡아 경제학적 접근을 주도했습니다.
이들은 군비 경쟁이 경제 성장에 미치는 악영향을 실증적으로 연구했습니다.
역사적 사례를 통해 분쟁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대안을 모색했습니다.
[교류 및 교육 분과 신설]
국가 간 시민들의 상호 이해를 높이기 위한 교류 및 교육 분과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국제적인 인식 개선을 위해 도서관 지원과 교수 교환 프로그램 등 문화 외교 사업을 기획했습니다. 오해와 편견을 없애는 것이 항구적인 평화의 지름길이라는 신념을 실천했습니다.
니컬러스 머리 버틀러가 이 분과를 이끌며 민간 외교를 강화했습니다.
전 세계 도서관에 국제 관계 서적을 기증하는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학생들과 학자들의 교류를 통해 국제 평화주의 정신을 전파했습니다.
[뉴욕주 법인 인가]
재단은 뉴욕주의 공식 법인으로 인가받아 합법적인 활동 근거와 조직 체계를 마련했습니다. 이를 통해 재단은 공익 목적의 연구와 교육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법적 토대 위에서 평화를 향한 조직적인 움직임이 가속화되었습니다.
법인화 과정에서 재단의 정관과 목적이 명확하게 규정되었습니다.
재단은 국제법의 발전과 국민 간의 우호 증진을 핵심 사업으로 설정했습니다.
이로써 재단은 체계적인 거버넌스를 갖춘 국제 비영리 기관으로 발돋움했습니다.
1912
[워싱턴 본부 건물 매입]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재단의 공식 활동과 연구를 위한 본부 건물을 매입하여 정착했습니다. 정부 기관 및 주요 외교 사절들과 긴밀히 소통하며 정책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평화 연구의 중심지로서 공간적 기반을 확고히 했습니다.
잭슨 플레이스에 위치한 본부는 외교관과 정치인들의 지식 공유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재단은 이곳에서 정기적인 세미나와 비공개 정책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본부의 정착은 재단이 워싱턴 정책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었음을 상징했습니다.
[초대 회장의 노벨상 수상]
엘리후 루트 회장이 국제 중재와 법적 협력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재단의 활동이 국제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권위를 확립했음을 보여주는 결과였습니다. 재단의 위상은 수상을 계기로 외교가에서 한층 더 격상되었습니다.
루트 회장의 수상은 재단의 정책적 제언이 가진 영향력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재단의 설립 취지를 다시 한번 강조하며 평화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재단은 수상의 영광을 연구 역량 강화와 글로벌 네트워크 확장으로 연결했습니다.
1913
[발칸 전쟁 국제 조사]
재단은 발칸 반도에서 발생한 분쟁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권위 있는 국제 조사단을 파견했습니다. 전쟁의 참혹함과 인권 침해 사례를 객관적으로 기록하여 국제 사회에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이는 분쟁 지역에 대한 현대적인 국제 조사의 선구적인 모델이 되었습니다.
조사단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현지의 목소리와 피해 상황을 담아내려 노력했습니다.
발표된 보고서는 전쟁의 무의미함과 민간인 피해를 적나라하게 폭로했습니다.
이 기록은 훗날 전쟁 범죄에 대한 국제적 인식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14
[파리 유럽 사무소 개소]
유럽 국가들과의 정책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 유럽 사무소를 열고 거점을 확보했습니다. 대륙 간의 정보 격차를 줄이고 유럽 평화 운동가들의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허브로 활용되었습니다. 글로벌 싱크탱크로 도약하기 위한 최초의 해외 거점이었습니다.
파리 사무소는 유럽의 지식인들이 평화와 협력을 논의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재단은 이를 통해 유럽의 복잡한 정세를 현지에서 보다 면밀히 분석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유럽 내 평화 여론을 형성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재단의 창립 이념과는 대조적으로 유럽 전역에서 거대한 규모의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재단은 전쟁 예방의 실패를 경험했으나 곧 전쟁의 원인 분석과 전후 평화 체제 수립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평화의 취약성을 깨닫고 보다 실질적인 대안을 찾아 나서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재단은 전쟁 기간 동안 공격적인 운동보다는 데이터 수집과 기록에 힘썼습니다.
전쟁이 왜 발발했는지에 대한 방대한 사회경제적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련은 재단이 보다 현실적인 국제 정세를 다루는 기관으로 변모하는 계기였습니다.
1917
[루뱅 대학교 도서관 재건]
전쟁으로 파괴된 벨기에 루뱅 대학교 도서관의 복구를 위해 재단의 자금과 자원을 투입했습니다. 파괴된 지식의 보고를 재건함으로써 인류 문명의 연속성을 지키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문화적 복구가 평화 정착의 시작임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도서관 재건 사업은 유럽 지식인 사회에 큰 감동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재단은 수만 권의 책과 자료를 기증하며 학문적 교류가 단절되지 않도록 도왔습니다.
문화적 유산을 복구하여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19
[파리 평화 회담 자문]
재단의 법률 전문가들이 파리 평화 회담의 고문단으로 참여하여 전후 질서 수립에 전문 지식을 보탰습니다. 국제법적 전문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영토 획정과 분쟁 해결 메커니즘을 제안했습니다. 재단의 연구 결과가 실제 베르사유 조약 수립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임스 브라운 스콧 등 재단 인원들이 미국 대표단의 정책 결정을 지원했습니다.
이들은 국제 연맹 규약의 초안 작업에도 깊숙이 관여하여 전문성을 발휘했습니다.
재단은 영구적인 평화 기구 설립을 위해 모든 외교적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1920
[전쟁 경제 및 사회사 발간]
전쟁의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한 '세계대전의 경제 및 사회사' 총서 발간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수백 명의 다국적 학자들이 참여하여 전쟁이 인류 문명에 남긴 흔적을 집대성했습니다. 이는 당대 최대 규모의 국제적 학술 프로젝트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제임스 T. 쇼트웰의 지휘 아래 방대한 분량의 연구서들이 연이어 출간되었습니다.
전쟁이 미치는 사회적 파급력을 통계와 실증 분석으로 입증해냈습니다.
이 자료들은 후대의 역사가와 정책 입안자들에게 필수적인 자산이 되었습니다.
1921
[니컬러스 버틀러 회장 취임]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지식인 니컬러스 머리 버틀러가 제2대 회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재단의 교육적 사명과 민간 외교를 강조하며 활동 범위를 전 세계로 확장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재단은 학술적 명성과 정치적 영향력을 동시에 확보했습니다.
버틀러는 평화 교육이 다음 세대의 전쟁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유럽의 주요 국가지도자들과 긴밀히 소통하며 재단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재단은 그의 강력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국제 무대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1923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 지원]
재단은 네덜란드 헤이그에 설립된 국제법 아카데미의 운영을 장기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의 법률가들이 모여 평화적 분쟁 해결 기법과 법 이론을 공유하는 장을 마련했습니다. 미래의 외교관들에게 국제 규범의 중요성을 교육하는 데 힘썼습니다.
이 아카데미는 현재까지도 국제법 교육의 세계적인 산실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재단은 장학금을 통해 신생국과 가난한 나라의 인재들이 교육받도록 도왔습니다.
법적 전문성을 갖춘 인재 양성이 평화의 핵심이라는 가치를 실천했습니다.
1924
[국제 화해 저널 인수 완료]
국제적인 평화 이슈를 다루는 학술지인 '국제 화해'를 인수하여 공식 간행물로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재단의 연구 성과와 평화 이론을 정기적으로 전 세계 지식인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국제적인 여론과 평화 담론을 형성하는 핵심 채널이 되었습니다.
이 저널은 외교 정책을 연구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필수 자료로 간주되었습니다.
재단은 매달 전 세계의 주요 조약과 외교 문서를 정리하여 공유했습니다.
정보의 투명한 공개를 통해 국가 간 신뢰를 쌓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925
[국제 교환 교수 프로그램 확대]
대학 간의 학술적 장벽을 허물기 위해 대규모 국제 교환 교수 프로그램을 강화했습니다. 다양한 문화권의 학자들이 상대국에서 강의하며 서로의 이해를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학문적 교류가 국가 간의 적대감을 녹이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의 수많은 저명한 학자들이 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입었습니다.
재단은 항공료와 체재비를 전액 지원하여 학문적 독립성을 보장했습니다.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재단이 지향하는 평화주의를 전파하는 사절이 되었습니다.
1928
[켈로그-브리앙 협정의 산실]
전쟁을 국가 정책의 수단으로 포기하는 역사적인 켈로그-브리앙 협정 체결을 배후에서 적극 지원했습니다. 재단의 전문가들이 조약 문안 작성과 국제적인 지지 여론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전쟁의 불법화'라는 인류사의 거대한 진보에 기여했습니다.
제임스 쇼트웰 교수 등 재단 인원들이 프랑스와 미국 사이의 외교 가교가 되었습니다.
재단은 대중을 상대로 이 협정의 정당성을 알리는 범국가적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비록 구속력은 약했으나 전쟁 폐지를 향한 가장 중대한 법적 시도로 기록됩니다.
1931
[버틀러 회장의 노벨상 수상]
니컬러스 머리 버틀러 회장이 국제 평화와 협력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재단 내에서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며 평화 연구 기관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확인했습니다. 재단의 교육적, 외교적 노력이 전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버틀러는 켈로그-브리앙 협정과 국제 교환 학생 프로그램 활성화의 주역이었습니다.
그의 수상은 재단이 가진 민간 외교의 힘을 세계만방에 알린 사건이었습니다.
수상 이후 재단은 보다 폭넓은 국제적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935
[채텀 하우스 공동 회의 개최]
영국의 왕립 국제 문제 연구소와 손잡고 정기적인 공동 학술 회의를 개최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영 협력을 통해 대서양 양안의 외교 정책을 조율하고 지식을 공유하는 장을 마련했습니다. 지식 공동체를 통해 다가올 전쟁의 징후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했습니다.
양국 최고의 싱크탱크들이 모여 국제 정세를 분석하고 공동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재단은 대서양 동맹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경제적 안정을 촉구했습니다.
이 협력 모델은 훗날 글로벌 싱크탱크 간 네트워크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1939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시련]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또다시 전 세계가 전쟁의 화염에 휩싸이며 재단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재단은 국제법의 무력함을 실감했으나 절망하지 않고 차기 국제 평화 기구 구상에 착수했습니다. 전쟁 기간 중에도 전후 평화 구축을 위한 이론적 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재단은 전쟁 기간 내내 중단 없이 국제적 정세를 데이터화하여 수집했습니다.
평화의 실패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여 다음 세대를 위한 실질적 교훈으로 남겼습니다.
이 시기의 연구 결과물들은 훗날 유엔(UN) 창설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44
[덤바턴 오크스 회의 지원]
국제 연합(UN)의 창설 토대가 된 덤바턴 오크스 회의에서 재단 전문가들이 자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새로운 세계 평화 유지 기구의 원칙과 사법적 구조를 세우는 데 법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국제 연맹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실질적인 힘을 가진 기구를 제안했습니다.
재단은 회의 개최 전부터 방대한 참고 자료와 정책 건의서를 정부에 배포했습니다.
주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법적 중재안을 지속적으로 제시했습니다.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실질적인 집단 안보 체계 구축을 강력하게 지지했습니다.
1945
[샌프란시스코 유엔 회의 참여]
유엔 헌장을 최종 작성하기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재단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고문으로 참석했습니다. 재단은 인권 보호와 국제 협력을 명시하는 헌장 조항들이 포함되도록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습니다. 인류 최대의 평화 기구 탄생에 재단의 정책적 지혜가 깊게 투영되었습니다.
재단 소속 학자들은 유엔 헌장의 문구 하나하나를 법률적으로 면밀히 검토했습니다.
비정부 기구들이 유엔 시스템 안에서 활동할 수 있는 제도적 통로를 개설했습니다.
재단은 유엔이 인류 평화의 최후 보루가 되기를 기원하며 모든 자원을 지원했습니다.
1946
[앨저 히스 회장 선출]
유엔 창설 과정에서 눈부신 역량을 발휘한 앨저 히스가 재단의 제3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전후 새로운 질서 수립의 중심 인물로서 재단을 보다 실무적이고 활동적인 조직으로 이끌었습니다. 유엔과 재단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평화의 시대를 열고자 했습니다.
히스는 재단의 연구 기조를 보다 구체적인 정책 수립 중심으로 개편했습니다.
그의 지도 아래 재단은 유엔 본부 유치를 위한 다양한 정책 지원을 실행했습니다.
재단의 위상은 그가 부임하며 전후 외교 정책의 핵심으로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유엔 본부 부지 선정 지원]
유엔 본부가 뉴욕에 정착할 수 있도록 재단이 록펠러 가문의 부지 기증 과정을 정책적으로 도왔습니다. 국제 평화의 전당인 유엔이 최적의 장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집중했습니다. 평화의 중심지가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재단이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부지 기증은 유엔의 뉴욕 정착을 확정 지은 가장 결정적인 외교적 사건이었습니다.
재단은 유엔이 미국 여론의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홍보 활동을 펼쳤습니다.
본부 설립 지원은 재단의 오랜 숙원인 국제 협력의 장이 실현됨을 상징했습니다.
1948
[앨저 히스 간첩 혐의 위기]
앨저 히스 회장이 소련의 간첩이었다는 충격적인 혐의로 청문회에 서며 재단에 유례없는 위기가 닥쳤습니다. 이 사건은 재단의 명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미국 사회에 매카시즘의 광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재단은 창립 이래 가장 힘든 조직적 시련과 내부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히스는 혐의를 부인했으나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고 재단 이사회는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냉전의 비정한 현실이 평화 연구 기관까지 뒤흔드는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재단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직의 투명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1950
[조셉 존슨 회장 체제 출범]
위기에 처한 조직을 재정비하기 위해 국무부 출신의 조셉 존슨이 신임 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재단의 중립성을 조속히 회복하고 냉전기 실질적인 국제 관계 연구에 집중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재단은 조심스럽게 조직을 정비하며 다시금 정책 조언자로 복귀했습니다.
존슨은 정치적 논쟁을 지양하고 엄격한 학술적 엄밀함을 강조하는 리더십을 보였습니다.
재단은 유엔의 효율적인 운영과 군비 통제 문제로 연구의 초점을 전환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도 평화 연구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1952
[유엔 연구 총서 시리즈 발간]
유엔의 구조와 실제 기능을 세밀하게 분석한 전문 연구 총서를 발간하여 국제 사회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유엔이 마주한 제도적 한계와 미래 가능성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짚어냈습니다. 재단은 유엔의 가장 건설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비평가로서 활약했습니다.
이 총서는 각국 외교관들이 유엔 시스템을 이해하는 필독 교과서로 활용되었습니다.
재단은 평화 유지군(PKO)의 효율적인 파견과 운영에 대한 실질적 가이드를 제공했습니다.
국제 연합의 성공이 인류 전체의 생존과 직결됨을 지속적으로 대중에게 알렸습니다.
1956
[신생 독립국 외교 지원 사업]
탈식민화와 함께 탄생한 신생 독립국들의 외교 역량 강화를 위해 대규모 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이들 국가의 외교관들에게 국제법과 협상 기법을 전수하여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조기 정착하도록 도왔습니다. 평화의 지평을 지구 전체로 확장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수많은 젊은 외교관들이 재단의 지원을 받아 전문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국제 무대에서 소외되지 않고 주권 국가로서 목소리를 내도록 지식을 공유했습니다.
신생국들이 폭력이 아닌 평화적 외교의 틀 안에서 성장하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1960
[재단 창립 50주년 기념]
재단 설립 반세기를 맞아 그간의 평화 연구 성과를 돌아보고 미래 50년을 향한 새로운 비전을 선포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목도하고도 꺾이지 않은 평화의 가치를 전 세계에 다시 천명했습니다. 핵 위협이 고조되는 냉전 시대에 재단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전 세계의 평화 연구자들과 노벨상 수상자들이 모여 인류의 미래를 논의했습니다.
재단은 과학 기술의 발전이 평화에 미치는 영향을 새로운 연구 분야로 추가했습니다.
지난 50년의 기록을 집대성한 기념 백서를 발간하여 평화의 역사를 보존했습니다.
1965
[전략적 군비 통제 연구 강화]
미소 간의 핵 군비 경쟁이 정점에 달함에 따라 실질적인 핵 무기 통제 방안 연구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핵 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낮추기 위한 기술적 보완책과 정치적 합의안을 담은 보고서를 잇달아 발표했습니다. 강대국 간의 충돌을 방지하는 이성적인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재단의 연구 데이터는 실제 미소 간의 무기 제한 협상 과정에서 참고 자료로 쓰였습니다.
핵 확산 금지 체제의 필요성을 대외적으로 역설하며 국제적 여론을 주도했습니다.
평화는 무력이 아닌 철저하게 통제된 규범에서 온다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1970
[워싱턴 D.C. 이전 및 조직 통합]
뉴욕에 남아 있던 조직들을 워싱턴 D.C. 본부로 통합하며 정책 중심의 전문 싱크탱크로 체질을 개선했습니다. 권력의 중심부에서 보다 직접적이고 신속한 정책 목소리를 내기 위한 전략적 결단이었습니다. 학술적 깊이에 현실적인 정치 감각을 더하는 혁신을 시도했습니다.
워싱턴 본부는 이제 미 행정부와 의회 관계자들의 주요 정책 논의처가 되었습니다.
재단은 특정 정파에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인 분석을 제공하여 강력한 신뢰를 얻었습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재단은 현대적인 형태의 정책 연구소로 완전히 탈바꿈했습니다.
1971
[포린 폴리시 잡지 인수]
외교 전문지인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를 창간 및 인수하여 국제적 여론 주도권을 획득했습니다. 이 잡지는 국제 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과감한 논쟁을 제공하며 세계적인 권위지로 급성장했습니다. 재단의 정책적 영향력이 일반 대중과 지식인 사회로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포린 폴리시는 기존의 권위주의적인 외교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재단은 이를 통해 대중적 영향력과 고도의 전문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글로벌 외교의 핵심 담론을 직접 생산하고 유통하는 강력한 수단을 갖게 되었습니다.
[토머스 휴스 회장 취임]
정보와 분석 분야의 전문가인 토머스 휴스가 회장으로 부임하여 재단의 연구 역량을 한 단계 높였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연구 관행을 혁파하고 시의적절한 정책 제언을 내놓는 기민한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재단은 현대적인 싱크탱크의 업무 표준을 선도적으로 정립했습니다.
휴스 회장은 능력 있는 젊은 연구원들을 대거 발탁하여 조직에 젊은 에너지를 주입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재단은 미국의 외교 전략을 수립하는 핵심 브레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재단의 보고서는 주요 언론과 의회 청문회에서 인용되는 가장 권위 있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1975
[비확산 전문 프로그램 출범]
핵무기뿐만 아니라 화학 및 생물학 무기의 비확산을 전담 연구하는 전문 프로그램을 새롭게 가동했습니다. 기술 유출을 방지하고 국제적인 감시망을 촘촘히 하는 입법적 대안들을 제시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대량살상무기 위협으로부터 평화를 지키는 전문성을 확보했습니다.
재단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비확산 데이터베이스를 자체적으로 구축했습니다.
정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정기 브리핑을 통해 실질적인 위협 요소를 경고했습니다.
이 활동은 재단이 전 세계 안보 전문가들의 글로벌 허브로 인정받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980
[탈냉전 대비 선제적 연구]
소련 체제의 균열 가능성을 미리 감지하고 냉전 종식 이후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상하는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붕괴 이후 발생할 수 있는 극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선제적인 정책 시나리오를 마련했습니다. 미래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는 싱크탱크의 혜안을 보여주었습니다.
재단은 동구권의 민주화 과정과 경제 전환에 대한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작성했습니다.
핵 통제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실무적 해결책을 지속적으로 연구했습니다.
이 연구 성과들은 훗날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미국의 외교 전략 수립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1985
[미소 관계 완화 프로젝트]
미국과 소련 간의 신뢰를 회복하고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비공식 대화 창구와 연구 프로젝트를 지원했습니다. 양국 정책 입안자들에게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갈등이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평화의 안전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재단은 양국 학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안보 현안을 논의하는 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비공개 채널을 통해 오해를 줄이고 실질적인 협력 가능성을 타진했습니다.
이러한 민간 차원의 노력은 훗날 역사적인 군비 축소 합의로 이어지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1991
[모턴 아브라모비츠 회장 취임]
노련한 외교관 출신인 모턴 아브라모비츠가 제5대 회장으로 부임하여 재단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그는 탈냉전 시대에 맞닥뜨린 새로운 글로벌 도전들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습니다. 재단은 보다 현장 중심적이고 행동하는 연구 기관으로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는 인권 문제와 소수 민족 간의 분쟁 해결을 재단의 최우선 연구 과제로 설정했습니다.
전통적인 국가 안보를 넘어 '인간 안보'를 중시하는 혁신적인 연구 기조를 세웠습니다.
재단의 목소리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장의 아픔을 대변하는 방향으로 울려 퍼졌습니다.
1993
[글로벌 싱크탱크 비전 선언]
재단은 서구 중심의 연구를 탈피하고 전 세계 주요 지역에 거점을 둔 글로벌 싱크탱크로의 전환을 선언했습니다. 세계화 시대에 발맞춰 각 지역의 전문가가 현지에서 직접 평화를 연구하는 혁신적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지식의 생산과 공유 구조를 글로벌 네트워크 중심으로 재편했습니다.
워싱턴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극화된 세계의 시각을 연구에 적극 반영하기로 했습니다.
현지의 생생한 시각이 담긴 연구가 가장 실효성 있는 정책을 만든다는 신념이었습니다.
이 비전은 재단이 21세기에도 세계 최고의 연구 기관으로 남는 결정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1994
[카네기 모스크바 센터 개소]
러시아의 민주화 지원과 소통을 위해 서구 싱크탱크 최초로 러시아 본토인 모스크바에 센터를 설립했습니다. 러시아 내부의 정치 변화를 분석하고 서방과의 대화 창구를 열어두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미-러 관계의 완충지대이자 지식의 교량으로서 역사적 임무를 시작했습니다.
센터 개소 이후 러시아 내 지식인들과의 학술적 교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러시아 대외 정책의 속내와 방향을 전 세계에 알리는 귀중한 창구가 되었습니다.
양국 관계가 악화되는 순간에도 전문가 간의 대화를 유지하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했습니다.
1997
[제시카 매슈스 회장 취임]
환경 정책 전문가인 제시카 터크먼 매슈스가 재단 최초의 여성 회장으로 선출되어 혁신을 주도했습니다. 그녀는 기후 변화와 초국가적 위협이 인류 평화의 핵심 요소임을 강조하며 연구 지평을 넓혔습니다. 재단은 비전통적 안보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의 전문성을 확보했습니다.
매슈스 회장은 재단의 글로벌 네트워크 확장을 공격적으로 추진하여 가시적 성과를 냈습니다.
환경 파괴가 초래할 미래 분쟁 시나리오를 예측하는 선구적인 연구를 장려했습니다.
그녀의 재임 기간 동안 재단은 인종과 전공을 아우르는 다양하고 전문적인 인재를 확보했습니다.
2000
[21세기 평화 대응 전략 수립]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테러리즘과 사이버 공격 등 신종 위협에 대응하는 통합 평화 전략을 발표했습니다. 변화하는 전쟁의 양상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새로운 국제 평화 유지 모델을 정책화했습니다. 과거의 법 중심 평화에서 정보와 기술이 결합된 평화로의 전환을 시도했습니다.
재단은 디지털 전환이 국제 안보 체제에 미치는 영향을 심도 있게 연구했습니다.
비국가 행위자들의 위협을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 공조 체계를 강력히 제안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평화는 정보 분석력과 협력의 속도에 달려 있음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2006
[베이루트 중동 센터 개소]
중동 분쟁의 중심지인 레바논 베이루트에 전문 연구 센터를 열고 중동의 평화를 위한 거점을 마련했습니다. 현지 학자들과 협력하여 민주화와 갈등 해결을 위한 실질적인 해법을 현지에서 논의했습니다. 복잡한 중동 정세를 서방 세계에 올바르게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했습니다.
중동 센터는 현지의 문화적 다양성과 종교적 배경을 존중하는 연구 기조를 견지했습니다.
아랍의 봄 전후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현장의 목소리를 데이터화하여 분석했습니다.
베이루트 거점은 재단의 글로벌 지식 네트워크에서 가장 역동적인 활동을 보여줬습니다.
2007
[카네기 유럽 브뤼셀 센터 설립]
유럽 연합의 심장부인 벨기에 브뤼셀에 유럽 센터를 세우고 대서양 양안의 정책 공조를 강화했습니다. 유럽의 통합과 공동 안보 정책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으로 외교 정책 결정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유럽과 미국을 잇는 가장 강력한 정책 대화 채널을 구축했습니다.
카네기 유럽은 설립 직후 브뤼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싱크탱크 중 하나로 도약했습니다.
유럽의 대외 원조와 안보 협력 시스템을 혁신하기 위한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에서 유럽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2010
[재단 설립 100주년]
재단 설립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 거점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기념 포럼과 비전 선포식을 가졌습니다. 앤드루 카네기의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계승하겠다는 약속을 담은 백서를 발간했습니다. 평화의 정의가 기술, 환경, 인권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임을 선포했습니다.
지난 1세기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방대한 디지털 아카이브를 대중에 공개했습니다.
재단은 앞으로의 100년도 '글로벌 카네기'로서의 소명을 다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평화를 향한 한 세기 동안의 변치 않는 의지는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2011
[카네기-칭화 센터 베이징 개소]
중국의 부상에 발맞춰 명문 칭화 대학교와 협력하여 베이징에 정책 연구 센터를 설립했습니다. 미중 관계의 안정과 건설적인 협력을 모색하는 핵심적인 학술 거점으로 기능하기 시작했습니다. 양국 전문가들이 민감한 현안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하는 민간 외교의 장이 되었습니다.
베이징 센터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안보 지형과 경제 협력을 심층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중국의 대외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했습니다.
미중 간 갈등이 고조될 때마다 전문가 간의 대화 끈을 유지하는 소중한 창구가 되었습니다.
2013
[글로벌 정책 네트워크 시스템 완성]
전 세계의 모든 카네기 해외 거점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24시간 실시간 정책 분석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한 지역의 국지적 분쟁이 글로벌 이슈로 확산되는 과정을 즉각 분석하고 대응책을 마련했습니다. 지식의 생산과 유통이 국경을 완전히 초월하는 혁신을 달성했습니다.
디지털 협업 도구를 전면 도입하여 대륙 간 공동 연구와 브리핑을 상시화했습니다.
재단의 보고서는 여러 언어로 동시 발간되어 전 세계의 정책 결정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글로벌 위기 상황에서 가장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연구 기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2015
[윌리엄 번스 회장 부임]
미 국무부 차관을 지낸 베테랑 외교관 윌리엄 번스가 제9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재단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실전 외교의 풍부한 경험을 재단의 연구 역량과 결합하여 정책 영향력을 극대화했습니다. 재단은 그의 지도 아래 전 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외교 정책 조언자로 재차 공인받았습니다.
번스 회장은 중동과 러시아 전문가로서 재단의 전략적 분석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었습니다.
연구원들에게 사실에 기반한 냉철하고도 현실적인 분석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재단은 권위 있는 싱크탱크 평가에서 지속적으로 세계 1위를 유지했습니다.
2016
[카네기 인도 센터 뉴델리 출범]
아시아의 핵심 동력인 인도의 뉴델리에 연구 센터를 설립하고 아시아 지역의 안보 지형을 강화했습니다. 인도와 주변국들의 정세를 현지에서 직접 연구하며 인도의 글로벌 역할과 평화적 부상을 지원했습니다. 이로써 재단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세계 주요 권역을 모두 포괄하게 되었습니다.
카네기 인도는 기술 혁신과 경제 정책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전문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인도 정부 및 학계와의 강력한 파트너십을 통해 성공적인 현지화 모델을 구축했습니다.
이로써 재단은 유럽, 러시아, 중동, 중국, 인도를 잇는 완벽한 글로벌 지식망을 완성했습니다.
2018
[기술 및 국제 관계 전담부서 강화]
인공지능과 사이버 안보 등 첨단 기술이 국제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전담 연구하는 부서의 기능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기술 격차가 초래할 새로운 형태의 갈등을 예방하기 위한 국제적 가이드라인 제정을 촉구했습니다. 미래의 전장이 될 수도 있는 사이버 공간을 평화로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재단은 실리콘밸리의 기술과 워싱턴의 정책을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첨단 무기 체계의 윤리적 사용과 규제를 위한 구체적인 보고서를 시리즈로 발간했습니다.
기술이 인류의 위협이 아닌 평화의 도구로만 쓰이도록 하는 법안 입안을 도왔습니다.
2021
[마리아노 쿠에야르 회장 취임]
법관 출신의 지식인 마리아노 플로렌티노 쿠에야르가 신임 회장으로 취임하여 재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회복이 세계 평화의 근간임을 강조하며 연구 역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21세기 중반의 국제 질서에 대응하는 새로운 평화 담론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쿠에야르 회장은 재단의 디지털 소통 능력과 글로벌 연대 기능을 한층 강화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위기와 권위주의의 확산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 프로젝트를 의욕적으로 추진했습니다.
글로벌 위기 상황에서 지식인들의 사회적 책임과 평화를 위한 연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2022
[모스크바 센터의 강제 폐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정부의 강제 조치로 28년간 운영된 모스크바 센터가 문을 닫았습니다. 이는 탈냉전기 미-러 지식 교류의 가장 중요한 창구가 사라진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재단은 강한 유감을 표하며 센터의 기능을 다른 거점으로 이전했습니다.
러시아 내에서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던 현지 연구원들은 신변의 보호를 위해 이전되었습니다.
재단은 베를린 등 유럽의 다른 센터로 연구 거점을 옮겨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물리적 공간은 사라졌으나 러시아의 평화와 미래를 위한 연구의 끈은 놓지 않았습니다.
2023
[베를린 사무소 기능 대폭 확대]
모스크바 센터 폐쇄 이후 동유럽과 러시아 정세를 다루는 새로운 전략 거점으로 베를린 사무소의 역할을 강화했습니다. 유럽의 새로운 안보 지형과 우크라이나 재건 문제를 논의하는 유럽 내 핵심 기지로 성장시켰습니다. 변화하는 유럽의 안보 수요에 맞춘 발 빠른 조직 개편을 완료했습니다.
베를린은 현재 카네기 유럽 네트워크에서 가장 역동적인 연구 현장이 되었습니다.
독일 정부 및 주요 EU 기관들과 협력하여 미래 안보 체계를 구축하는 연구를 주도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고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지식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합니다.
2025
[미래 세대를 위한 평화 모델 제언]
환경, 기술, 경제 정의가 모두 결합된 차세대 지속 가능한 평화 모델을 전 세계 정책가들에게 제안했습니다. 기후 위기와 경제적 불평등이 전쟁의 불씨가 되지 않도록 하는 통합 안보 개념을 정립했습니다. 인류의 영속적 생존과 직결된 거대 평화 담론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재단은 글로벌 불균형 해소가 전쟁을 예방하는 가장 확실한 투자임을 증명해냈습니다.
탄소 중립 달성과 국제적 안보 환경의 상관관계를 면밀히 분석한 최종 보고서를 냈습니다.
미래 세대에게 안전하고 평화로운 지구를 물려주기 위한 정책적 청사진을 완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