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수출국 기구

국제 기구, 경제 카르텔, 에너지 정책 협의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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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수출국 기구(OPEC)는 1960년, 서구 석유 자본의 횡포에 맞서 자원 주권을 되찾기 위해 탄생한 역사적인 산유국 연합체입니다. 바그다드에서 5개 창설국이 모여 시작된 이 기구는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 쇼크를 통해 세계 경제의 생사여탈권을 쥐는 막강한 권력기관으로 급부상했습니다. 이후 셰일 혁명과 비OPEC 산유국의 도전 속에서도 'OPEC+' 체제를 구축하며 글로벌 에너지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치열한 서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단순히 경제적 담합을 넘어 자원 민족주의와 국제 정치의 역학 관계를 상징하는 OPEC의 역사는 곧 현대 에너지 문명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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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자원 민족주의의 태동]

베네수엘라가 중동 산유국들에 먼저 손을 내밀며 자원 주권 수호를 위한 첫 발걸음을 뗐습니다. 산유국 간의 소통과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란과 이라크, 쿠웨이트 등과 접촉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결성될 OPEC의 사상적 기반이 된 중요한 외교적 움직임이었습니다.

베네수엘라는 서구 석유 회사들이 자원 수익을 독점하는 것에 반발하여 산유국 간의 결속을 제안했습니다. 당시 '세븐 시스터즈'라 불리는 거대 석유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산유국들의 정보 공유가 필수적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접촉은 단순한 제안을 넘어 산유국들의 연합이라는 구체적인 비전으로 발전했습니다.

1959

[제1회 아랍 석유 회의]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회의에서 산유국들이 석유 가격 결정권에 대한 불만을 공식화했습니다. 석유 회사들의 일방적인 가격 인하에 분노한 산유국들이 공동 대응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회의를 통해 산유국들 사이에서 '오일 카르텔' 결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석유 컨설팅 전문가들은 산유국들에게 석유 생산량 조절과 가격 방어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특히 베네수엘라의 페레스 알폰소와 사우디의 압둘라 타리키가 주도적으로 논의를 이끌었습니다. 이 회의는 OPEC 탄생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으며 산유국들의 단결된 의지를 확인한 자리였습니다.

1960

[석유 회사들의 가격 인하]

거대 석유 회사들이 산유국과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원유 고시가를 인하하며 긴장을 고조시켰습니다. 이는 산유국들의 국가 수입에 직격탄을 날리는 행위로, 참아왔던 산유국들의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더 이상 가격 결정을 자본에만 맡길 수 없다는 절박함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당시 석유 가격은 산유국 정부의 세수와 직결되었기에 일방적인 가격 인하는 주권 침해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라크 정부는 즉각적으로 주요 산유국들을 바그다드로 초청하여 긴급 대책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이 사건은 산유국들이 행동에 나서게 만든 결정적인 '마지막 한 방'이 되었습니다.

[바그다드 회의 개최]

이라크의 주도로 바그다드에서 5개 핵심 산유국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운명적인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베네수엘라,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가 참석하여 공동의 이익을 논의했습니다. 세계 석유 지형을 영원히 바꿀 새로운 기구의 정관을 다듬는 치열한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5개 창설국 대표들은 석유 생산과 판매에 있어 자국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서구 세력의 간섭을 배제하고 오직 산유국들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독립적인 기구 설립에 합의했습니다. 이 회의는 닷새 동안 이어졌으며 각국의 이해관계를 조율하여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로 결정했습니다.

[OPEC의 공식 출범]

바그다드 회의의 결실로 석유 수출국 기구(OPEC)가 공식적으로 창설되었습니다. 자국 자원을 직접 통제하고 석유 가격의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선언적 목표를 세웠습니다. 국제 석유 시장에서 산유국들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초기 5개 회원국은 세계 석유 수출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기구의 출범은 시장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후안 파블로 페레스 알폰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기구의 기틀을 잡았습니다. OPEC은 창설 당시부터 영속적인 정부 간 기구로서의 지위를 명확히 했습니다.

1961

[제1회 OPEC 컨퍼런스]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첫 정기 총회를 열고 기구의 구체적인 운영 지침을 확정했습니다. 기구의 행정 구조와 정관을 정식으로 채택하며 본격적인 활동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회원국 간의 긴밀한 정보 공유와 정책 공조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초대 사무총장이 선출되었으며 본부 설치와 예산 확보 방안이 논의되었습니다. 석유 가격을 1960년 8월 인하 이전 수준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결의안이 채택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조직의 형태를 갖추게 된 OPEC은 이제 석유 회사들과의 협상 테이블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카타르의 가입]

카타르가 OPEC의 여섯 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며 기구의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창설국 외의 국가가 처음으로 가입함으로써 OPEC이 개방적인 기구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중동 지역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카타르의 가입은 OPEC이 단순히 몇몇 국가의 모임이 아닌 국제적인 연합체로 성장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가입 조건에 따라 카타르는 OPEC의 모든 결의안을 준수하고 기구의 목적 달성에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이후 다른 산유국들도 가입을 검토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선례가 되었습니다.

1962

[인도네시아와 리비아의 가입]

아시아의 인도네시아와 아프리카의 리비아가 동시에 가입하며 기구가 대륙을 넘나드는 규모로 확장되었습니다. 전 세계 주요 유전 지역을 아우르는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OPEC이 글로벌 석유 시장 전체를 대변하는 기구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가입은 아시아 산유국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리비아는 당시 신흥 산유국으로서 폭발적인 생산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기구의 협상력을 높여주었습니다. 다양한 지역의 국가들이 모이면서 OPEC 내에서의 정책 조율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유엔의 공식 승인]

유엔 사무국이 OPEC을 정식 정부 간 기구로 인정하며 국제법적 지위를 확고히 했습니다. 창설 2년 만에 국제 사회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는 쾌거를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OPEC은 국제 무대에서 공식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반을 얻었습니다.

유엔 결의안을 통해 OPEC은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석유 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이 승인은 회원국들이 석유 회사들과 협상할 때 강력한 법적 배경으로 작용했습니다. 기구의 공신력이 높아지면서 더 많은 국가들이 OPEC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965

[제8회 컨퍼런스 개최]

제네바에서 열린 회의에서 기구의 운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조직 개편을 단행했습니다. 석유 시장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한 분석 부서를 강화했습니다. 회원국 간의 생산량 조절에 대한 초기 논의가 시작된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기구의 정책 결정 구조를 더욱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개선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시장 분석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발간하여 회원국들에게 전략적인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OPEC이 단순한 이익 단체를 넘어 전문적인 데이터 분석 기구로 성장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본부의 비엔나 이전]

초기 본부였던 제네바를 떠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중립국인 오스트리아의 위치적 이점과 외교적 편의성을 고려한 결정이었습니다. 비엔나는 이후 OPEC의 상징적인 장소로 자리 잡으며 수많은 역사적 결정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OPEC 본부 유치를 위해 다양한 외교적 특권과 면세를 제공했습니다. 유럽 중심부에 위치한 비엔나는 회원국 장관들이 모여 회의를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지금까지도 OPEC 본부는 비엔나의 중심가에서 세계 석유 시장을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1967

[아랍에미리트의 합류]

당시 아부다비가 가입하며 아랍 지역의 산유국 결속이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거대한 매장량을 보유한 아부다비의 합류는 OPEC의 시장 지배력을 한층 강화했습니다. 이는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 시장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아부다비는 가입 직후부터 기구 내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아랍에미리트 연합국이 형성되면서 회원국 지위는 연합국 전체로 계승되었습니다. OPEC은 이로써 세계 최대의 산유 지역인 페르시아만에서의 영향력을 완성했습니다.

1968

[석유 정책 선언 발표]

회원국들의 자원 주권을 명시한 '석유 정책 선언'을 발표하여 국제 사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회원국 정부가 직접 석유 개발에 참여하고 운영권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이는 서구 석유 회사들의 독점 체제에 종언을 고하는 선전포고와 같았습니다.

이 선언은 산유국들이 자신의 땅에서 나오는 자원에 대해 주인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강한 의지였습니다. 가격 결정뿐만 아니라 개발 과정 전반에 대한 통제권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현대 산유국들의 자원 민족주의가 공식적인 정책으로 문서화된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1969

[알제리의 가입]

아프리카의 강력한 산유국인 알제리가 10번째 회원국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알제리의 가입으로 OPEC은 지중해를 넘어 북아프리카까지 영향력을 확실히 뻗쳤습니다. 기구 내에서 급진적인 자원 주권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습니다.

알제리는 가입 당시부터 석유 가격의 공격적인 인상을 주장하는 강경파의 입장에 섰습니다. 알제리의 합류는 OPEC이 단순히 시장 안정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OPEC은 보다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기구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1970

[최저 세율 인상 합의]

카라카스 회의에서 석유 회사들에 부과하는 법인세 최저 한도를 55%로 인상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이는 산유국들의 실질적인 수입을 늘리기 위한 직접적인 경제 조치였습니다. 석유 회사들과의 힘겨루기에서 산유국들이 승기를 잡기 시작한 상징적 사건입니다.

이전까지 석유 회사들은 낮은 세율을 적용받아 막대한 이익을 가져가고 있었습니다. OPEC은 회원국 간의 단결된 행동을 통해 일방적인 과세권 행사를 밀어붙였습니다. 이 합의는 산유국들이 석유로부터 얻는 이익의 분배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1971

[테헤란 가격 협정]

6개 걸프 산유국과 주요 석유 회사들 사이에 5년 기한의 가격 인상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산유국들이 사상 처음으로 다자간 협상을 통해 가격 인상을 관철시킨 사례입니다. 석유 회사들의 가격 독점권이 무너지기 시작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협정 결과 고시가가 즉시 인상되었으며 향후 매년 추가 인상을 보장받았습니다. OPEC은 이 협상을 통해 기구의 강력한 협상력을 전 세계에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후 다른 지역 산유국들도 이 협정을 모델로 삼아 가격 인상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트리폴리 협정 체결]

지중해 연안 산유국들이 리비아에서 석유 회사들과 추가적인 가격 인상에 합의했습니다. 테헤란 협정보다 더 높은 인상폭을 기록하며 산유국들의 요구가 더욱 거세졌습니다. 석유 시장의 주도권이 생산국에게로 급격히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리비아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유럽 시장을 압박하며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냈습니다. 이 협정은 산유국들이 개별적으로 또는 소그룹으로 석유 회사를 압박하는 전술을 익히게 했습니다. 석유 가격은 이제 시장 논리가 아닌 산유국들의 정치적 결정에 의해 좌우되기 시작했습니다.

[나이지리아의 가입]

아프리카 최대의 인구 대국이자 산유국인 나이지리아가 OPEC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서아프리카의 고품질 원유 생산지가 기구 내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OPEC의 공급망 통제력은 이제 서반구와 아프리카 전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나이지리아의 합류는 기구 내 아프리카 국가들의 비중을 획기적으로 높였습니다. 나이지리아는 기구 내에서 생산량 쿼터 준수와 가격 안정화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 가입으로 OPEC은 전 세계 원유 수출의 80% 이상을 통제하는 거대 카르텔이 되었습니다.

1973

[최초의 일방적 가격 책정]

OPEC이 석유 회사들과의 협상 없이 일방적으로 석유 가격을 70% 인상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가격 결정권을 석유 회사로부터 완전히 빼앗아 온 역사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이는 세계 경제에 엄청난 충격을 준 제1차 오일 쇼크의 서막이었습니다.

산유국들은 더 이상 가격을 '협의'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국가 주권의 영역으로 선포했습니다. 배럴당 가격이 수직 상승하면서 에너지 위기가 전 세계를 덮치기 시작했습니다. 석유가 단순한 상품을 넘어 국제 정치의 강력한 무기로 돌변한 순간이었습니다.

[아랍의 석유 금수 조치]

제4차 중동 전쟁 중 아랍 산유국들이 이스라엘 지지 국가들에 대한 석유 수출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OPEC 내 아랍 국가들이 주도한 이 조치로 전 세계는 극심한 연료 부족 사태에 직면했습니다. 석유가 정치적 압박 수단으로 사용된 가장 극적인 사례입니다.

미국과 네덜란드 등 서구 국가들이 주요 타격 대상이 되어 경제적 혼란에 빠졌습니다. 주유소마다 줄이 늘어서고 자동차 운행이 제한되는 등 일상의 풍경이 바뀌었습니다. 이 조치는 OPEC의 힘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으며 서구의 에너지 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에콰도르의 가입]

남미의 에콰도르가 가입하며 베네수엘라와 함께 남미 지역의 목소리를 대변하게 되었습니다. 오일 쇼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산유국 연합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 시점이었습니다. OPEC은 전 세계적인 산유국 네트워크를 완성해 나갔습니다.

에콰도르의 가입은 OPEC이 아랍권 기구라는 편견을 깨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소규모 산유국임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인 단일 대오에 합류하여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습니다. 이후 에콰도르는 기구 내에서 탈퇴와 재가입을 반복하는 독특한 행보를 보이게 됩니다.

1974

[석유 금수 조치 해제]

몇 달간 전 세계를 얼어붙게 했던 아랍 국가들의 석유 금수 조치가 공식 해제되었습니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산유국들이 공급 정상화를 결정하며 시장은 안도했습니다. 하지만 석유 가격은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공행진을 계속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세계 경제는 에너지 효율성을 강조하고 대체 에너지를 찾는 방향으로 선회했습니다. OPEC은 공급을 재개했지만 가격에 대한 전권은 여전히 굳건히 쥐고 있었습니다. 서구 산유국들은 이때의 충격을 잊지 않기 위해 국제에너지기구(IEA)를 창설하며 맞대응했습니다.

1975

[가봉의 가입]

아프리카의 가봉이 준회원을 거쳐 정회원으로 가입하며 OPEC의 영향력을 더욱 넓혔습니다. 중서부 아프리카의 석유 자원까지 OPEC의 우산 아래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기구의 회원국 수는 13개국으로 늘어나며 정점에 달했습니다.

가봉은 작은 규모의 산유국이었으나 전략적인 위치와 일관된 정책으로 기구에 기여했습니다. 이로써 OPEC은 주요 대륙의 산유국들을 모두 포함하는 완전한 글로벌 기구의 외형을 갖췄습니다. 회원국들의 다양성은 이후 정책 합의 과정에서 새로운 도전 과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비엔나 본부 인질 사건]

'카를로스 더 자칼'이 이끄는 무장 괴한들이 비엔나 OPEC 본부를 습격하여 장관들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세계 석유 정책의 심장부가 공격받은 전대미문의 테러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OPEC의 보안 체계가 강화되고 국제 정치적 위상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범인들은 산유국 장관들을 비행기에 태우고 알제리로 이동하는 등 극적인 인질극을 벌였습니다.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연계된 정치적 목적의 테러로 분석되었습니다. 장관들은 무사히 풀려났으나 OPEC의 회의 운영 방식과 보안 수준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1976

[OPEC 국제개발기금 설립]

산유국들의 막대한 수익을 개발도상국들과 나누기 위한 원조 기구인 OPEC 펀드를 창설했습니다. 자신들을 향한 국제 사회의 비난을 잠재우고 남남 협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경제 카르텔을 넘어 국제적인 원조 주체로서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이 기금은 비회원 개발도상국들에게 낮은 금리로 차관을 제공하거나 인도적 지원을 실행했습니다.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고통받는 빈국들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현재까지도 이 기금은 보건, 교육, 인프라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1979

[이란 혁명과 공급 위기]

이란에서 일어난 이슬람 혁명으로 석유 생산이 급감하며 제2차 오일 쇼크가 발생했습니다. 시장의 불안 심리가 가중되면서 유가는 배럴당 40달러 근처까지 폭등했습니다. OPEC은 다시 한번 세계 경제의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절대적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란의 생산 중단은 전 세계 공급망에 거대한 구멍을 냈으며 유가는 1년 만에 두 배 이상 올랐습니다. 공급 부족에 대한 공포로 인해 사재기 현상이 발생하며 유가 상승을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회원국들은 막대한 오일 머니를 벌어들였으나 세계 경제는 심각한 불황에 빠져들었습니다.

1980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OPEC의 핵심 회원국인 이란과 이라크가 전쟁에 돌입하며 기구 내 분열이 심화되었습니다. 양국 모두 생산 시설이 파괴되면서 석유 공급은 더욱 불안정해졌습니다. 회원국 간의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OPEC의 결속력은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전쟁은 무려 8년간 지속되었으며 양국의 석유 수출 능력을 심각하게 훼손했습니다. OPEC 회의장에서도 두 나라 대표들 사이에 날 선 공방이 오가는 등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공급 감소로 인해 유가는 높은 수준을 유지했으나 기구의 통제력은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1982

[생산 쿼터제 도입]

유가 하락을 방어하기 위해 회원국별로 생산량을 제한하는 쿼터 시스템을 처음 도입했습니다. 시장에 공급되는 석유량을 인위적으로 조절하여 가격을 통제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자유로운 생산의 시대를 끝내고 엄격한 관리 체제로 들어갔습니다.

회원국들은 각자의 경제 상황에 따라 더 많은 생산을 원했기에 쿼터 배분은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가 가격 지지자 역할을 하며 생산량을 대폭 줄이는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국가들이 몰래 쿼터를 초과 생산하면서 시스템의 실효성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1983

[사상 첫 가격 인하 단행]

비OPEC 산유국들의 공급 증가로 유가가 떨어지자 OPEC은 창설 이래 처음으로 공식 가격 인하를 발표했습니다. 배럴당 34달러에서 29달러로 가격을 낮추며 시장의 현실을 인정했습니다. 무소불위였던 OPEC의 가격 지배력이 흔들리기 시작한 신호였습니다.

북해와 알래스카 등 비OPEC 지역에서 대규모 석유가 쏟아져 나오면서 OPEC의 시장 점유율이 급감했습니다. 소비국들의 에너지 절약 정책도 수요 감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OPEC은 공급 과잉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뼈를 깎는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1985

[시장 점유율 중심 정책 선회]

가격을 지키기 위해 생산을 줄이던 사우디가 정책을 포기하고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해 생산을 늘리기로 했습니다. 가격 방어보다는 타 산유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겠다는 전략적 판단이었습니다. 이는 곧 전 세계적인 유가 폭락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사우디는 혼자서만 생산을 줄여 가격을 떠받치는 역할에 한계를 느꼈습니다. 생산량을 늘려 시장을 석유로 넘치게 함으로써 고비용 비OPEC 산유국들을 고사시키려 했습니다. 이 정책 변화는 석유 시장에 거대한 '치킨 게임'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1986

[유가 10달러 붕괴 사태]

공급 과잉으로 인해 유가가 배럴당 10달러 미만으로 떨어지는 기록적인 폭락을 경험했습니다. 산유국들의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기구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았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시장의 공포를 온몸으로 체감한 해였습니다.

산유국 정부들은 수입이 급감하면서 대규모 예산 삭감과 경제적 혼란에 직면했습니다. 결국 회원국들은 다시 모여 생산량을 대폭 줄이고 가격을 회복시키는 데 합의했습니다. 이 사건은 OPEC 국가들에게 무분별한 생산 경쟁이 얼마나 위험한지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0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라크가 회원국인 쿠웨이트를 침공하며 걸프 전쟁이 발발하고 석유 시장에 거대한 파동이 일었습니다. 두 주요 산유국의 석유 수출이 중단되면서 유가는 다시 요동쳤습니다. 회원국 간의 주권 침해 사건으로 기구 내의 정치적 갈등은 정점에 달했습니다.

쿠웨이트의 유정들이 불타오르면서 막대한 자원이 낭비되고 환경 오염이 발생했습니다. 다른 회원국들은 부족한 물량을 보충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생산량을 늘려 시장을 안정시키려 노력했습니다. 전쟁 이후 이라크에 대한 국제 제재가 이어지면서 OPEC 내 역학 관계는 크게 변했습니다.

1992

[에콰도르의 회원권 정지]

에콰도르가 가입 19년 만에 회비 부담과 생산량 제한에 대한 불만으로 회원 활동을 정지했습니다. 소규모 산유국으로서 OPEC 정책을 따르는 것보다 독자 노선을 걷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OPEC 창설 이후 처음으로 발생한 주요 회원국의 이탈 사례였습니다.

에콰도르는 당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었으며 생산량을 늘려 수입을 확보하기를 원했습니다. OPEC의 쿼터 제한이 국가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주장을 펼치며 떠났습니다. 이는 OPEC이 모든 산유국의 이익을 균형 있게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낳았습니다.

1995

[가봉의 공식 탈퇴]

가봉이 과도한 회비 납부에 비해 실익이 적다는 이유로 기구를 공식 탈퇴했습니다. 아프리카 산유국으로서의 목소리가 작아지는 것에 대한 실망감이 컸습니다. 회원국 감소로 인해 OPEC의 시장 점유율과 영향력은 다소 위축되었습니다.

가봉은 자신들이 내는 회비만큼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과감히 결별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OPEC 내에서는 사우디 등 거대 산유국 중심으로 정책이 돌아가는 것에 대한 소외감이 팽배했습니다. 가봉의 탈퇴는 기구 내 중소 산유국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1997

[자카르타의 실수]

아시아 금융 위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생산 한도를 증액하는 잘못된 판단을 내렸습니다. 수요가 급감하는 상황에서 공급을 늘린 이 결정으로 유가는 배럴당 10달러까지 재폭락했습니다. 시장의 신호를 제대로 읽지 못한 OPEC 역사상 최악의 판단 중 하나로 꼽힙니다.

자카르타 회의에서 생산량을 늘리기로 합의했을 때, 이미 아시아 경제는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수요가 사라진 시장에 기름을 들이부은 꼴이 되어 유가는 곤두박질쳤습니다. 이후 OPEC은 시장 분석과 데이터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하고 모니터링 체계를 강화했습니다.

1998

[리야드 팩트 체결]

유가 폭락을 막기 위해 멕시코 등 비OPEC 산유국들과 함께 대규모 감산에 합의했습니다. OPEC 단독으로는 시장을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외부와 손을 잡은 사례입니다. 훗날 OPEC+의 원형이 되는 중요한 국제적 공조였습니다.

사우디, 베네수엘라, 멕시코가 주도하여 감산을 이끌어냈으며 이는 유가 회복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비OPEC 국가들과의 협력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확인한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 합의 이후 유가는 서서히 반등하기 시작하여 2000년대의 초호황기를 준비했습니다.

2000

[가격 밴드 메커니즘 도입]

유가를 배럴당 22~28달러 사이에서 유지하기 위한 자동 생산 조절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유가가 밴드를 벗어나면 즉각적으로 생산량을 조절하여 시장을 안정시키려 했습니다.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유가 관리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 시스템은 유가가 너무 오르거나 너무 떨어지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시장에 안정감을 주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중국발 수요 폭발로 유가가 급등하면서 이 밴드 체계는 유명무실해졌습니다.

2003

[이라크 전쟁과 공급 차질]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이라크의 석유 생산이 사실상 중단되며 시장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OPEC은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다른 회원국들의 증산을 허용하는 기민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도 시장 안정을 위한 조율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이라크의 생산 시설이 파괴되고 수출이 마비되면서 전 세계 유가는 상승 압력을 받았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여유 생산 능력이 있는 국가들이 생산을 늘려 유가 폭등을 어느 정도 저지했습니다. 이 시기는 OPEC이 국제 정치의 혼란 속에서도 시장의 최후 보루 역할을 한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2005

[가격 밴드 시스템 포기]

유가가 목표치를 훨씬 웃도는 상황이 지속되자 기존의 가격 밴드 시스템을 공식 중단했습니다. 전 세계적인 수요 증가로 유가는 이제 OPEC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시장 환경에 맞는 다른 방식의 대응이 필요해진 시점이었습니다.

중국과 인도의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석유 수요가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더 이상 배럴당 28달러라는 목표는 현실적이지 않은 수치가 되었습니다. OPEC은 이제 가격보다는 수급 균형을 맞추는 데 더 집중하기로 정책 방향을 수정했습니다.

2007

[앙골라의 가입]

아프리카의 떠오르는 산유국인 앙골라가 가입하며 OPEC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1975년 이후 30여 년 만에 이루어진 새로운 정회원 가입이었습니다. 앙골라의 합류로 OPEC은 아프리카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더욱 확고히 다졌습니다.

앙골라는 내전 이후 급격히 석유 생산량을 늘리며 주요 산유국으로 성장한 상태였습니다. OPEC은 앙골라를 영입함으로써 비OPEC 생산량이 늘어나는 것을 방어하려 했습니다. 앙골라는 이후 기구 내에서 충실한 회원국으로서 활동하며 여러 정책 결정에 기여했습니다.

[에콰도르의 재가입]

떠났던 에콰도르가 15년 만에 다시 OPEC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 정부가 자원 민족주의 노선을 강화하며 국제적인 산유국 공조에 합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회원국이 다시 늘어나면서 기구의 외연이 확장되었습니다.

에콰도르는 자국의 석유 정책을 국제 표준에 맞추고 가격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재가입했습니다. OPEC은 과거 회원국의 복귀를 환영하며 남미 산유국들의 결속을 다졌습니다. 이는 OPEC이 여전히 산유국들에게 매력적인 플랫폼임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2008

[유가 사상 최고치 경신]

국제 유가가 배럴당 147달러를 돌파하며 역사상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했습니다. 전 세계적인 투기 자본의 유입과 공급 부족 우려가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OPEC 국가들은 사상 최대의 수익을 올렸으나 곧이어 닥칠 위기의 전조이기도 했습니다.

유가의 고공행진은 소비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에너지 소비 구조의 변화를 촉구했습니다. OPEC은 유가가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점을 인지하면서도 시장 수요를 따라가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이 시기의 화려한 호황은 곧 글로벌 금융 위기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게 됩니다.

[사상 최대 규모의 감산]

글로벌 금융 위기로 유가가 30달러대로 폭락하자 오란 회의에서 하루 420만 배럴의 감산을 결정했습니다. 기구 역사상 단일 회의에서 결정된 가장 큰 규모의 감산 조치였습니다. 벼랑 끝에 몰린 산유국들이 생존을 위해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급격한 수요 위축에 대응하기 위해 회원국들은 전례 없는 속도로 생산량을 줄였습니다. 이 조치는 시장에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여 유가 폭락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OPEC의 기민한 대응 능력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며 시장의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2009

[인도네시아의 회원권 정지]

인도네시아가 석유 순수입국으로 전락하면서 회원 활동을 일시 정지했습니다. 자국 내 생산 감소와 수요 증가로 인해 산유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OPEC 역사상 경제 구조의 변화로 인해 발생한 첫 번째 이탈 사례였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유가 상승이 오히려 국가 경제에 부담이 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산유국 기구인 OPEC 내에서 수입국의 입장을 대변할 수 없었기에 떠나기로 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산유국들도 언젠가는 자원 고갈로 기구를 떠날 수 있다는 현실을 보여주었습니다.

2011

[리비아 내전과 유가 급등]

'아랍의 봄' 여파로 리비아에서 내전이 발생하며 석유 생산이 사실상 중단되었습니다. 고품질 원유의 공급처가 마비되자 시장은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유가를 100달러 위로 밀어 올렸습니다. 지정학적 위기가 다시 한번 석유 시장을 흔들었습니다.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 붕괴 과정에서 유전 시설들이 공격받고 운영이 중단되었습니다. OPEC 내 다른 국가들은 리비아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증산을 논의했으나 국가별 이해관계로 진통을 겪었습니다. 리비아는 이후 오랜 기간 생산 불안정을 겪으며 OPEC의 불안 요소로 남게 되었습니다.

2014

[셰일 혁명과 유가 하락의 시작]

미국의 셰일 오일 생산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국제 유가가 하락세로 돌아섰습니다. OPEC이 독점하던 시장에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하며 시장 지배력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에너지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셰일 혁명'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기술 발전으로 추출이 불가능했던 셰일층에서 석유를 뽑아내기 시작하면서 공급이 넘쳐났습니다. 미국은 이제 세계 최대의 산유국 중 하나로 부상하며 OPEC을 압박했습니다. OPEC은 자신들의 쿼터 정책이 더 이상 예전만큼 힘을 쓰지 못하는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사우디의 버티기 전략]

유가가 급락하는 상황에서도 사우디가 주도하여 생산량을 줄이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낮은 가격을 유지해 미국의 고비용 셰일 업체들을 시장에서 퇴출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시장 점유율을 지키기 위한 산유국들의 처절한 생존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결정으로 유가는 50달러 아래로 곤두박질쳤으나 셰일 업체들은 예상보다 잘 버텼습니다. 오히려 OPEC 국가들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면서 내부에서 불만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전통적인 감산 방식에서 벗어난 이 실험적 정책은 산유국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2015

[인도네시아의 짧은 복귀]

인도네시아가 중단했던 회원 활동을 6년 만에 재개하며 OPEC에 다시 합류했습니다. 에너지 소비국과 생산국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시장 상황의 변화로 인해 이 복귀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기구 내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산유국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OPEC도 동남아시아 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의 복귀를 반겼습니다. 그러나 수입국인 인도네시아에게 감산 쿼터를 요구하는 OPEC의 정책은 곧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2016

[가봉의 재가입]

21년 전 탈퇴했던 가봉이 다시 OPEC의 정회원으로 복귀했습니다. 저유가 국면에서 단독 대응의 한계를 느끼고 다시 연대의 힘을 빌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아프리카 산유국들의 재결집이 가속화되는 흐름을 보여주었습니다.

가봉은 기구 내에서 소규모 산유국들의 권익을 보호받기를 희망하며 돌아왔습니다. OPEC은 가봉의 복귀를 통해 기구의 정당성과 결속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이후 가봉은 기구 내 정책 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목소리를 냈습니다.

[알제 합의 달성]

오랜 저유가 끝에 알제리에서 열린 임시 회의에서 8년 만에 감산에 전격 합의했습니다. 사우디와 이란의 지정학적 갈등을 딛고 이끌어낸 극적인 합의였습니다. 시장에 강력한 반등 신호를 보내며 OPEC의 건재를 과시했습니다.

이 합의는 구체적인 쿼터 배분보다는 전체 생산량을 줄인다는 원칙적인 합의였습니다. 시장은 OPEC이 드디어 다시 단결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하며 유가가 상승했습니다. 이후 열릴 비엔나 정기 총회에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비엔나 감산 협정 체결]

정기 총회에서 회원국별 구체적인 감산량을 확정하며 알제 합의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시장의 공급 과잉을 해소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동에 나선 것입니다. 이 결정은 유가를 50달러 위로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각국은 자국의 경제적 손해를 무릅쓰고 전체의 이익을 위해 생산을 줄이기로 약속했습니다. 사우디가 가장 큰 폭의 감산을 담당하며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수입국 입장에서 감산에 동의할 수 없다며 다시 회원권을 정지하게 됩니다.

[OPEC+ 체제의 탄생]

러시아를 포함한 10개 비OPEC 산유국들이 OPEC의 감산에 동참하기로 하는 '협력 선언'에 서명했습니다. 이른바 OPEC+라 불리는 거대 산유국 연합체가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전 세계 석유 시장의 통제력이 획기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사우디와 러시아라는 세계 2대 산유국이 손을 잡으면서 석유 시장의 질서가 재편되었습니다. OPEC 단독으로 시장을 조절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판단 하에 비OPEC 국가들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OPEC+는 이후 유가 안정화의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2017

[적도 기니의 가입]

아프리카의 적도 기니가 가입하며 OPEC 내 아프리카 국가들의 비중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저유가 위기 속에서 산유국들의 대동단결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OPEC은 이제 14개 회원국 체제로 운영되며 세를 불렸습니다.

적도 기니는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산유국으로서 OPEC의 감산 정책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이 가입은 OPEC이 여전히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기구임을 입증하는 사례가 되었습니다. 적도 기니는 기구 내에서 안정적인 공급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2018

[콩고 공화국의 가입]

콩고 공화국이 OPEC의 15번째 회원국으로 정식 가입하며 아프리카 중심의 확장을 지속했습니다. 산유국들이 개별적으로 대응하기보다 기구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지배적이었습니다. OPEC은 대륙별 산유국들을 망라하는 거대 조직이 되었습니다.

콩고의 가입은 OPEC이 아프리카 산유국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중심 기구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줍니다. 회원국 확대는 공급 조절의 범위를 넓혀 기구의 효율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늘어난 회원국만큼 각국의 상이한 경제 사정을 조율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2019

[카타르의 충격적 탈퇴]

OPEC의 핵심 회원국이었던 카타르가 천연가스 생산에 집중하겠다는 명분으로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57년 만의 이탈로, 기구 내 정치적 갈등과 사우디와의 외교 분쟁이 배경이 된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중동 산유국들 사이의 균열이 가시화된 사건이었습니다.

카타르는 석유보다는 LNG(액화천연가스) 분야에서 세계 최강국이기에 독자 노선을 택했습니다. 이 탈퇴는 OPEC이 석유 위주의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낳았습니다. 주요 산유국 중 하나인 카타르의 이탈은 기구의 상징성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협력 헌장 채택]

OPEC과 비OPEC 국가들이 영구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협력 헌장'을 정식 채택했습니다. 일회성 감산을 넘어 제도적으로 손을 잡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OPEC+ 체제가 공식적이고 지속적인 기구로 격상된 것입니다.

이 헌장은 산유국들 사이의 데이터 공유와 정책 공조를 정례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사우디의 파트너십이 이제 문서로 보장받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세계 석유 시장은 이제 OPEC이 아닌 OPEC+의 결정에 의해 움직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2020

[에콰도르의 두 번째 탈퇴]

에콰도르가 국가 재정 악화와 생산량 증대 필요성을 이유로 다시 한번 OPEC을 떠났습니다. 기구의 감산 쿼터가 국가 경제 재건에 방해가 된다는 최종 판단을 내렸습니다. 소규모 산유국들의 이탈이 반복되면서 OPEC의 결속력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에콰도르는 외채 상환과 경제난 극복을 위해 최대한의 석유 수출이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OPEC의 정책은 고유가를 지지하지만 생산량을 묶어버리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탈퇴로 인해 남미에서는 베네수엘라만이 유일한 회원국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우디-러시아 유가 전쟁]

코로나19 여파에 대한 대응책을 두고 사우디와 러시아가 의견 대립을 보이며 감산 합의에 실패했습니다. 사우디가 보복적으로 증산을 선언하며 유가는 배럴당 20달러대로 곤두박질쳤습니다. OPEC+ 체제가 붕괴 위기에 처했던 가장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사우디는 가격보다는 시장 점유율을 택하며 러시아를 압박하는 초강수를 뒀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석유 수요가 사라지는 시점에 공급 전쟁이 터지며 유가는 마이너스 가격까지 기록하는 기현상을 보였습니다. 결국 양국은 파멸을 피하기 위해 다시 협상 테이블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역사상 최대 규모 감산 합의]

미국의 중재 아래 OPEC+ 국가들이 하루 970만 배럴이라는 경이로운 규모의 감산에 합의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전례 없는 수요 폭락에 대응하기 위한 극약 처방이었습니다. 산유국들이 공멸을 막기 위해 뭉친 가장 극적인 사례입니다.

이 규모는 세계 원유 공급량의 약 10%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습니다. 미국, 멕시코 등 비OPEC+ 국가들도 직간접적으로 감산에 참여하며 글로벌 공조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합의 덕분에 유가는 바닥을 치고 서서히 반등하기 시작하여 시장은 안정되었습니다.

2021

[감산 단계적 완화 시작]

세계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자 OPEC+는 묶어두었던 생산량을 조금씩 늘리기로 합의했습니다. 시장의 수요 증가 속도에 맞춰 공급을 조절하는 세밀한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위기 극복 이후 정상화로 가는 첫걸음이었습니다.

한꺼번에 생산을 늘리면 유가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매달 증산량을 결정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 시기 OPEC+는 시장의 수급 상황을 철저히 모니터링하며 유가를 60~70달러선으로 유도했습니다. 산유국들의 단결된 행동은 시장에 강력한 신뢰를 주었습니다.

2022

[우크라이나 전쟁과 에너지 위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 시장이 대혼란에 빠지며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다시 돌파했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제재로 공급망이 위협받자 전 세계는 다시 한번 에너지 안보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OPEC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점이었습니다.

서구 국가들은 OPEC에 증산을 요청했으나 OPEC은 러시아와의 파트너십을 이유로 신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의 주범이 되었으며 경제적 고통을 안겼습니다. 이 사건은 OPEC+ 체제가 단순한 경제 연합을 넘어 지정학적 블록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미국 압박 속 대규모 감산]

미국의 증산 요청에도 불구하고 OPEC+는 경기 침체 우려를 이유로 하루 200만 배럴 감산을 전격 결정했습니다. 이는 미국과 사우디의 외교적 마찰을 불러일으키며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OPEC이 서방의 요구가 아닌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사건입니다.

미국 정부는 이 결정을 '러시아를 돕는 행위'라며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사우디 등 산유국들은 유가 하락을 선제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순수 경제적 조치라고 반박했습니다. OPEC의 독립적인 정책 결정권이 국제 정치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습니다.

2023

[깜짝 자발적 감산 발표]

사우디와 주요 회원국들이 시장의 예상을 깨고 정기 회의 외에 자발적인 추가 감산을 발표했습니다. 공매도 세력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자 유가 하단을 확실히 지지하겠다는 의지였습니다. OPEC의 시장 통제 수단이 더욱 다양하고 공격적으로 변했습니다.

이 발표 직후 국제 유가는 즉각적으로 6% 이상 급등하며 시장을 놀라게 했습니다. 공식 합의 외에도 개별 국가들이 협력하여 기습적으로 정책을 발표하는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산유국들의 단결력이 여전히 강력하며 시장에 대한 영향력이 건재함을 증명했습니다.

[브라질의 OPEC+ 가입 추진]

남미 최대 산유국인 브라질이 OPEC+ 체제에 합류하기로 결정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브라질은 직접적인 감산 쿼터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정책 공조에는 함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비OPEC 거대 산유국들이 속속 OPEC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브라질의 합류는 OPEC+의 시장 점유율을 높여 기구의 발언권을 더욱 강화할 것입니다. 루라 대통령은 에너지 전환 시대를 대비해 산유국들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OPEC+가 단순한 감산 기구를 넘어 글로벌 에너지 정책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024

[앙골라의 공식 탈퇴]

OPEC의 생산 쿼터에 불만을 품어온 앙골라가 가입 17년 만에 탈퇴를 전격 선언했습니다. 자국의 생산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기구의 결정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아프리카 주요 산유국의 이탈로 OPEC 내 결속력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앙골라는 투자 유치를 위해 생산량을 늘려야 했으나 OPEC의 감산 요구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 탈퇴로 인해 OPEC의 전체 생산 비중은 줄어들었으며 내부 갈등이 표면화되었습니다. 기구는 이제 회원국들의 개별적인 성장 욕구와 전체의 가격 방어 사이에서 어려운 조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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