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임브리지 대학교

대학교, 교육 기관, 연구 대학, 공립 대학, 영국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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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16- 17: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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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9년 옥스퍼드 학자들의 이주로 시작된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8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류의 지성사를 이끌어온 세계 최고의 학문적 성지입니다. 아이작 뉴턴의 중력 법칙부터 찰스 다윈의 진화론, 그리고 왓슨과 크릭의 DNA 구조 발견에 이르기까지 케임브리지는 현대 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위대한 발견들의 요람이었습니다. 독특한 콜리지 시스템을 바탕으로 지적 독립성과 공동체적 연대를 동시에 실현하며,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와 국가 지도자들을 배출해 온 이곳은 오늘날에도 전통의 가치를 계승하며 미래를 향한 혁신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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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9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기원]

옥스퍼드 시에서 발생한 갈등을 피해 학자들이 케임브리지로 이주하며 대학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과의 마찰로 인해 학문적 자유를 찾아 떠난 이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학술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1209년 옥스퍼드에서 학자와 시민 간의 분쟁이 발생하여 학자 일부가 케임브리지로 피신했습니다.
이 이주 학자들이 모여들면서 케임브리지는 점진적으로 학문적 중심지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정착은 오늘날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대학교가 탄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1226

[총장직의 확립]

대학 공동체를 대표하고 관리하기 위한 총장직이 공식적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대학은 내부적인 규율을 세우고 외부 세력과의 관계를 독자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총장(Chancellor)은 대학의 사법권과 행정권을 행사하는 중요한 위치로 설정되었습니다.
초기 대학은 교회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총장직의 확립으로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이는 대학이 체계적인 조직으로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거버넌스의 시작이었습니다.

1231

[국왕 헨리 3세의 칙령]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가 칙령을 통해 대학에 대한 공식적인 보호와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국왕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대학은 지역사회 내에서 안정적인 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국왕의 칙령은 학자들의 거주를 보장하고 지역 상인들의 바가지 요금을 규제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이로써 케임브리지는 국가가 보호하는 공식적인 교육 기관으로서 위상을 공고히 했습니다.
국왕의 후원은 향후 다른 유럽 대학들과 경쟁할 수 있는 성장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1233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승인]

교황의 교서를 통해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육 과정이 기독교 세계 전역에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 승인은 케임브리지 졸업생들이 전 유럽에서 가르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교황의 승인은 대학에 '유니버시티(University)'라는 보편적 명성을 부여했습니다.
이로써 케임브리지는 옥스퍼드와 대등한 학문적 권위를 국제적으로 공인받았습니다.
중세 대학의 발전 과정에서 종교적 승인은 글로벌 인재 유치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284

[첫 번째 콜리지 피터하우스 설립]

일리 주교 휴 볼샴에 의해 케임브리지 최초의 독립 콜리지인 피터하우스가 세워졌습니다. 이는 학자들이 함께 거주하며 공부하는 케임브리지 특유의 콜리지 시스템의 시작이었습니다.

피터하우스는 옥스퍼드의 머턴 콜리지를 모델로 삼아 설립되었습니다.
기존의 하숙집 형태에서 벗어나 재단이 운영하는 영구적인 학문 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피터하우스는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오래된 콜리지로 그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1290

[교황 니콜라오 4세의 권리 인정]

교황 니콜라오 4세가 케임브리지 대학에 학술적 자유를 보장하는 추가적인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이를 통해 대학 내 지적 활동이 더욱 활발해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대학 구성원들에 대한 면책 특권과 사법적 독립성이 강화되었습니다.
교황청의 지지는 대학이 지방 자치 권력과의 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어막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거치며 케임브리지는 유럽 최고의 명문 대학 중 하나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1318

[스터디움 제네랄레 공식 인정]

교황 요한 22세에 의해 케임브리지가 '스터디움 제네랄레(Studium Generale)'로 공식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전 유럽의 학생들이 모여드는 최고 수준의 교육 기관임을 뜻합니다.

이 칭호는 학위 수여의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유럽 전역의 학자들이 케임브리지의 교육 시스템을 신뢰하고 교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학은 이 시기 이후 본격적으로 건축과 학제를 확충하며 확장기를 맞이했습니다.

1324

[마이클하우스 설립]

왕실 관료였던 허비 드 스탠튼에 의해 마이클하우스가 세워졌습니다. 이는 대학 발전에 있어 평신도 관료들의 후원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마이클하우스는 훗날 헨리 8세에 의해 트리니티 콜리지로 통합되는 중요한 뿌리가 됩니다.
당시 대학의 성장은 종교계뿐만 아니라 왕실의 행정가들에 의해서도 주도되었습니다.
독자적인 토지와 건물을 소유하며 콜리지로서의 행정적 기틀을 다졌습니다.

1326

[유니버시티 홀의 탄생]

대학에 의해 유니버시티 홀이 설립되었으며, 이는 훗날 클레어 콜리지의 전신이 됩니다. 가난한 학자들에게 주거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설립 초기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으나 엘리자베스 드 클레어의 후원으로 재건되었습니다.
여성의 후원이 대학 발전에 기여한 초기 사례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콜리지는 현재 클레어 콜리지라는 이름으로 케임브리지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347

[펨브로크 콜리지 설립]

펨브로크 백작부인 마리 드 생폴에 의해 펨브로크 콜리지가 설립되었습니다. 귀족 사회의 강력한 후원이 대학 교육의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콜리지 내부에 독자적인 예배당을 소유할 수 있는 최초의 교황 허가를 받았습니다.
설립자의 유지를 받들어 학문적 경건함과 지적 수월성을 강조했습니다.
펨브로크는 현재까지도 케임브리지의 전통적인 미관과 학풍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1348

[곤빌 홀의 설립]

에드먼드 곤빌에 의해 곤빌 홀이 세워졌으며, 이는 훗날 곤빌 앤 키스 콜리지의 모태가 됩니다. 실용적인 학문 연구를 중시하는 학풍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곤빌의 사후 윌리엄 베이트먼 주교에 의해 이설 및 재정비되었습니다.
의학과 과학 분야에서 강점을 보이는 콜리지의 전통이 이 시기부터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16세기 존 키스의 기부를 통해 현재의 웅장한 콜리지 규모로 발전하게 됩니다.

1350

[트리니티 홀의 설립]

윌리엄 베이트먼 주교에 의해 법학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트리니티 홀이 설립되었습니다. 흑사병 이후 부족해진 성직자와 관료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법률 교육에 특화된 콜리지로서 영국의 사법 체계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대학 내에서 법학 전공자들이 모여 연구하는 지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트리니티 홀은 현재까지도 법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1352

[코퍼스 크리스티 콜리지 설립]

케임브리지 마을의 길드원들에 의해 공동 설립된 유일한 콜리지인 코퍼스 크리스티가 탄생했습니다. 지역 공동체와 대학이 긴밀하게 협력한 역사적 모델입니다.

마을 주민들이 학자들의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금을 모았습니다.
전통적으로 귀족이나 성직자가 설립하던 방식과 차별화된 독특한 기원을 가집니다.
이 콜리지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귀중한 고문서들을 소장한 도서관으로도 유명합니다.

1428

[베네딕트 수도원 기숙사 설치]

매그달렌 콜리지의 전신인 수도원 기숙사가 설립되어 수도사들의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이는 대학의 초기 역사와 수도원 전통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버킹엄 콜리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종교적 가르침이 핵심이었습니다.
헨리 8세의 종교 개혁 시기에 세속화되어 매그달렌 콜리지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전통적인 수도원 건축 양식이 현재의 콜리지 건물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1441

[킹스 콜리지의 설립]

국왕 헨리 6세에 의해 장엄한 킹스 콜리지가 설립되었습니다. 이튼 콜리지 졸업생들을 위한 상급 교육 기관으로서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설립 초기부터 엄청난 규모의 토지와 재정이 투입된 왕실 프로젝트였습니다.
웅장한 킹스 콜리지 예배당은 이 시기에 설계되어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킹스 콜리지는 케임브리지의 미관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1446

[킹스 콜리지 예배당 건설 시작]

세계적으로 유명한 킹스 콜리지 예배당의 초석이 놓였습니다. 영국 후기 고딕 양식의 정수로 평가받는 이 건축물은 수백 년에 걸쳐 완성되었습니다.

장미 전쟁 등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건축이 여러 차례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팬 볼트(Fan Vault)라고 불리는 부채꼴 모양의 천장 구조는 건축학적 기적으로 불립니다.
예배당의 완성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지적,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1448

[퀸즈 콜리지 설립]

헨리 6세의 왕비 마거릿 오브 안주에 의해 퀸즈 콜리지가 설립되었습니다. 왕비의 후원을 받은 이 콜리지는 이후 여러 여왕의 지지를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1465년 에드워드 4세의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다시 후원하며 명칭이 확정되었습니다.
수학 다리(Mathematical Bridge)를 포함한 역사적인 건축물들로 유명합니다.
인문주의 학풍의 중심지로서 에라스무스 같은 석학들이 머물기도 했습니다.

1473

[세인트 캐서린 콜리지 설립]

로버트 우들라크에 의해 세인트 캐서린 콜리지가 설립되었습니다. 소규모 학자 공동체로 시작하여 내실 있는 교육 환경을 추구했습니다.

설립자가 킹스 콜리지의 학장이었으나 독자적인 교육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세웠습니다.
전통적으로 스포츠와 학업 양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콜리지입니다.
캠퍼스 중앙에 위치하여 대학 내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습니다.

1496

[지저스 콜리지 설립]

일리 주교 존 알콕에 의해 오래된 수녀원 부지에 지저스 콜리지가 세워졌습니다. 기존 건물을 재활용하여 독특한 건축미를 가진 콜리지가 탄생했습니다.

성 라데군드 수녀원이 폐쇄된 후 그 자리에 학문의 전당을 마련했습니다.
광활한 정원과 운동장 부지를 소유하여 쾌적한 연구 환경을 자랑합니다.
수도원적 평화로움이 남아 있어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콜리지 중 하나로 꼽힙니다.

1505

[크라이스트 콜리지의 재건]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의 후원으로 갓 하우스가 크라이스트 콜리지로 대대적으로 개편되었습니다. 헨리 7세의 어머니인 그녀의 기부는 콜리지 발전에 결정적이었습니다.

마거릿 보퍼트는 대학 내 인문주의 교육을 장려하기 위해 막대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찰스 다윈과 존 밀턴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배출한 산실이 되었습니다.
콜리지 정원에 있는 마거릿 보퍼트의 조각은 현재도 그녀의 공헌을 기리고 있습니다.

1511

[세인트 존스 콜리지 설립]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의 유지를 받들어 세인트 존스 콜리지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영향력 있는 콜리지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기존의 성 요한 병원이 폐쇄된 자리에 대규모 건축물이 들어섰습니다.
탄식의 다리(Bridge of Sighs)를 포함한 화려한 건축 유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기금과 교수진을 바탕으로 케임브리지 학술 활동의 중심을 담당해 왔습니다.

[에라스무스의 케임브리지 체류]

인문주의의 거장 에라스무스가 퀸즈 콜리지에 머물며 그리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케임브리지가 유럽 인문주의 운동의 중심지로 도약하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이곳에서 신약 성서의 그리스어 판본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그의 존재는 대학 교육 과정이 중세적 틀에서 벗어나 근대적 인문학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케임브리지가 단순히 종교 기관을 넘어 국제적인 학술 중심지로 인정받게 된 순간입니다.

1534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 설립]

국왕 헨리 8세가 부여한 왕실 칙령에 의해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대학 출판부가 탄생했습니다. 학문적 성과를 인쇄하여 전 세계로 전파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모든 종류의 도서를 인쇄할 수 있는 특권을 국왕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출판 및 평가 기관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 등 인류 역사를 바꾼 수많은 저작물들이 이곳을 통해 세상에 나왔습니다.

1542

[매그달렌 콜리지의 재건]

버드 백작 토머스 오들리에 의해 매그달렌 콜리지가 정식으로 설립되었습니다. 헨리 8세의 종교 개혁 이후 세속적 후원을 바탕으로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사무엘 핍스의 방대한 일기와 도서가 소장된 핍스 도서관으로 유명합니다.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늦게 남성 전용에서 남녀공학으로 전환된 전통적인 분위기를 가졌습니다.
역사적인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고전적인 대학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1546

[트리니티 콜리지 설립]

국왕 헨리 8세가 기존의 여러 홀을 통합하여 웅장한 트리니티 콜리지를 설립했습니다.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세워진 이 콜리지는 세계적인 천재들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마이클하우스와 킹스 홀을 합쳐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부유하고 큰 콜리지가 되었습니다.
아이작 뉴턴, 프랜시스 베이컨 등 인류 최고의 지성들이 이곳 출신입니다.
트리니티의 거대한 안뜰(Great Court)은 유럽에서 가장 넓은 안뜰 중 하나로 꼽힙니다.

1550

[최초의 왕실 지정 교수직]

헨리 8세에 의해 의학, 신학, 법학 등 핵심 분야의 왕실 지정 교수(Regius Professor) 직위가 신설되었습니다. 대학 교육의 전문성과 국가적 관리가 강화되었습니다.

국왕이 직접 급여를 지급하고 임명하는 고위 권위의 직책이었습니다.
이 직위의 신설은 케임브리지가 국가 행정과 학술 발전에 필수적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이 교수직은 케임브리지에서 최고의 명예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1584

[엠마누엘 콜리지 설립]

엘리자베스 1세의 재무장관 월터 마일드메이에 의해 엠마누엘 콜리지가 세워졌습니다. 청교도 정신을 바탕으로 엄격한 도덕성과 학문적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설립자 존 하버드를 배출하여 미국 고등 교육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크리스토퍼 렌 경이 설계한 예배당 건물은 건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산입니다.
자유로운 토론과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학풍으로 유명해졌습니다.

1596

[시드니 서식스 콜리지 설립]

서식스 백작부인 프랜시스 시드니의 유언에 따라 시드니 서식스 콜리지가 설립되었습니다. 소박하지만 강력한 결속력을 가진 학술 공동체를 목표로 했습니다.

올리버 크롬웰이 이곳에서 공부하며 영국의 정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학 내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습니다.
콜리지 정원에는 설립자의 뜻을 기리는 고풍스러운 조형물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1663

[루카스 수학 교수직 신설]

헨리 루카스의 유산으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루카스 수학 교수직이 마련되었습니다. 수학과 물리학 발전에 있어 가장 영예로운 직책으로 여겨집니다.

아이작 뉴턴과 스티븐 호킹 등이 이 직위를 거쳐가며 우주에 대한 이해를 넓혔습니다.
수학뿐만 아니라 천문학, 물리학 전반을 아우르는 연구의 정점을 상징합니다.
이 직위의 신설은 케임브리지가 자연 과학의 세계적 허브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665

[흑사병으로 인한 휴교]

런던에서 시작된 흑사병이 확산되자 대학이 예방 차원에서 휴교를 결정했습니다. 학자들은 고향으로 흩어졌으나 이 시기는 오히려 위대한 발견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젊은 뉴턴은 고향 울즈소프로 돌아가 만유인력과 미적분학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대유행병의 위협 속에서 학자들은 개별적인 연구에 집중하며 지적 성숙을 이뤘습니다.
휴교 기간은 역설적으로 과학 혁명을 앞당긴 창의적 휴식기가 되었습니다.

1667

[뉴턴의 트리니티 펠로우 선출]

아이작 뉴턴이 트리니티 콜리지의 펠로우(Fellow)로 공식 선출되어 본격적인 연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대학이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연구 전념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펠로우로서의 지위는 숙식과 급여를 보장받으며 평생 연구할 수 있는 권리를 뜻했습니다.
뉴턴은 이곳에서 수많은 실험을 통해 광학의 원리를 규명해 나갔습니다.
그의 서재와 연구실은 근대 물리학이 태동한 성스러운 장소로 기억됩니다.

1669

[뉴턴의 루카스 교수 임명]

아이작 뉴턴이 불과 26세의 나이로 제2대 루카스 수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스승 아이작 배로가 제자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자리를 양보한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뉴턴은 교수로서 수학과 자연 철학 강의를 주도하며 학계의 리더로 부상했습니다.
그의 강의 노트는 훗날 위대한 저작들의 초석이 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최고 권위의 교수직에 오른 사례로 대학 역사에 길이 남았습니다.

1687

[프린키피아의 출간]

아이작 뉴턴의 불후의 명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가 대학 출판부의 승인을 거쳐 세상에 나왔습니다. 중력의 법칙을 통해 우주의 운동을 완벽히 설명해 냈습니다.

에드먼드 헬리의 권유와 지원을 받아 케임브리지에서 집필을 마무리했습니다.
현대 과학의 방법론을 정립한 가장 위대한 과학 서적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책의 출간으로 케임브리지는 명실상부한 전 세계 과학의 정점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704

[뉴턴의 광학 출판]

빛의 성질과 무지개의 원리를 설명한 뉴턴의 '광학'이 출판되었습니다. 실험 물리학의 정수를 보여주며 빛에 대한 인류의 무지를 깨뜨린 성과였습니다.

프리즘 실험을 통해 백색광이 여러 색의 혼합임을 입증했습니다.
수학적 증명보다는 실험적 관찰을 중시하여 과학 연구의 또 다른 지평을 열었습니다.
이 저작은 18세기 과학계의 필독서로 자리 잡으며 많은 연구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1715

[세네트 하우스 설계 승인]

대학의 공식 행사와 행정을 담당할 세네트 하우스(Senate House)의 설계안이 확정되었습니다. 캠퍼스 중심부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웅장한 건물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제임스 기브스가 설계를 맡아 대학의 권위와 조화를 고려한 건물을 기획했습니다.
기존의 협소했던 행정 공간을 대체하고 통합적인 관리를 가능케 했습니다.
이 건물은 현재까지도 졸업식이 열리는 대학의 심장과 같은 공간입니다.

1730

[세네트 하우스 완공]

장기간의 공사 끝에 세네트 하우스가 완공되어 대학교의 중심 행정관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화려한 내부 장식과 외관은 케임브리지의 지적 자부심을 상징했습니다.

졸업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는 신성한 장소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중요한 대학 투표와 논의가 이곳에서 이루어지며 대학 민주주의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건축학적으로 18세기 영국의 가장 뛰어난 공공 건물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1800

[다우닝 콜리지 설립]

조지 다우닝 경의 유산에 관한 오랜 소송 끝에 다우닝 콜리지가 공식 설립되었습니다. 고전주의 양식을 탈피한 새로운 건축과 학풍을 추구하며 탄생했습니다.

케임브리지에서 근대적인 교육 과정을 가장 먼저 수용한 콜리지 중 하나입니다.
법학과 의학 전공자들을 위한 특별한 연구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기존의 폐쇄적인 안뜰 구조가 아닌 개방형 캠퍼스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1815

[케임브리지 유니언 설립]

세계 최악의 권위를 가진 학생 토론 단체인 케임브리지 유니언(Cambridge Union)이 창설되었습니다. 학생들의 언론 자유와 논리적 사고력을 기르는 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수많은 정치가와 사상가들이 이곳에서 토론하며 리더십을 길렀습니다.
세계적인 명사들을 초청하여 민감한 사회 이슈를 논하는 권위 있는 플랫폼이 되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는 케임브리지 지성의 상징적 단체로 성장했습니다.

1816

[피츠윌리엄 박물관 설립]

피츠윌리엄 자작의 예술품 기증을 바탕으로 대학 공식 박물관이 세워졌습니다. 학문적 연구뿐만 아니라 예술적 감수성을 키우는 공간이 마련되었습니다.

고대 유물부터 근대 회화까지 방대한 컬렉션을 소유한 세계적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박물관의 웅장한 건물은 19세기 영국 건축의 화려함을 잘 보여줍니다.
학생들에게 영감을 주고 일반 대중에게 지식을 공유하는 교육의 장이 되었습니다.

1823

[케임브리지 천문대 설립]

우주를 관측하고 연구하기 위한 천문대가 대학 부지에 세워졌습니다. 수리 과학의 전통이 천문학적 관측 기술과 결합하여 시너지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최첨단 망원경을 도입하여 항성의 위치와 궤도를 정밀하게 측정했습니다.
존 허셜 등 위대한 천문학자들이 이곳에서 연구하며 현대 천문학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현재까지도 천문학 연구소의 중심적인 시설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1831

[찰스 다윈의 비글호 항해 시작]

케임브리지 졸업생인 찰스 다윈이 스승 헨슬로 교수의 권유로 비글호에 승선했습니다. 이 여행은 훗날 진화론이라는 거대한 사상적 혁명을 낳는 출발점이었습니다.

다윈은 대학 시절 배운 박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동식물을 관찰했습니다.
케임브리지에서의 학제적 교육이 그의 관찰과 분석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생물학의 역사를 바꾼 '종의 기원'의 씨앗이 이 여행에서 뿌려졌습니다.

1837

[피트 빌딩 완공]

대학 출판부의 본부인 피트 빌딩(Pitt Building)이 완공되어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출판의 권위와 현대적 인쇄 기술이 집약된 건축물이었습니다.

윌리엄 피트 전 총리를 기리기 위해 기금으로 지어진 역사적 건물입니다.
출판부의 성장과 함께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술적 영향력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웅장한 고딕 복고 양식의 외관은 케임브리지 시내의 주요 경관을 이룹니다.

1851

[자연과학 트라이포스 신설]

전통적인 신학, 수학 중심 교육에서 벗어나 자연과학 전문 학위 과정(Tripos)이 신설되었습니다. 과학 연구의 전문성을 대학 체제 내에서 공식화한 조치였습니다.

생물학, 화학, 물리학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학사 구조가 마련되었습니다.
연구 중심 대학으로의 전환을 꾀한 19세기 교육 개혁의 핵심 성과입니다.
이후 수많은 과학자들이 이 과정을 통해 배출되어 세계 과학계를 이끌었습니다.

1858

[케임브리지 지역 시험 위원회 설립]

공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 시험 제도가 마련되었습니다. 대학의 학문적 기준을 사회 전체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의 IGCSE와 A-Level 시험의 모태가 된 공신력 있는 평가 시스템입니다.
전 세계 교육 과정의 표준을 제시하는 글로벌 평가 기관으로 성장했습니다.
대학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교육의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1869

[거턴 콜리지 설립]

여성들에게 고등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최초의 여자 콜리지인 거턴이 설립되었습니다. 여성 교육권 확보를 위한 역사적인 진전이었습니다.

에밀리 데이비스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초기에는 캠퍼스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했습니다.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교육 과정을 이수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여성 교육 운동의 발원지로서 전 세계적인 여성 지위 향상에 기여했습니다.

1871

[뉴넘 콜리지 설립]

여성 교육을 장려하기 위한 두 번째 콜리지인 뉴넘(Newnham)이 세워졌습니다. 여성 학자들의 지적 커뮤니티 형성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안나 클러와 헨리 시지윅에 의해 설립되어 내실 있는 연구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거턴과 함께 케임브리지 내 여성 교육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독창적인 붉은 벽돌 건축물과 정원으로 아름다운 캠퍼스를 자랑합니다.

[캐번디시 연구소 설립]

물리학 연구의 혁명을 예고하며 캐번디시 연구소가 공식 설립되었습니다. 실험 물리학의 중심지로서 현대 물리학의 수많은 발견이 이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윌리엄 캐번디시 총장의 기부를 통해 최첨단 실험 설비를 갖췄습니다.
맥스웰, 러더퍼드 등 전설적인 물리학자들이 이곳의 학장으로 재임했습니다.
이후 30명 이상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세계 최고의 과학 연구 시설이 되었습니다.

1874

[맥스웰의 초대 캐번디시 교수 취임]

전자기학의 아버지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초대 캐번디시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연구소의 초기 체계를 잡고 실험 물리학의 방향성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실험 장비 설계부터 연구 방법론까지 직접 관여하며 연구소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전자기파 연구를 통해 현대 통신 기술의 과학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그의 탁월한 리더십 덕분에 캐번디시는 빠르게 세계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1882

[셀윈 콜리지 설립]

조지 오거스터스 셀윈 주교를 기념하여 셀윈 콜리지가 세워졌습니다. 성공회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학문적 우수성을 추구하는 콜리지를 지향했습니다.

기존 콜리지들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학생들을 수용하여 교육 기회를 넓혔습니다.
전통적인 고딕 복고 양식의 아름다운 안뜰과 예배당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따뜻하고 가족적인 분위기의 학풍으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1884

[고고학 및 인류학 박물관 설립]

인류 문명의 흔적을 연구하고 보존하기 위한 고고학 및 인류학 박물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전 세계 각지에서 수집된 방대한 유물들이 연구 자료로 활용되었습니다.

선사 시대 유물부터 태평양 원주민들의 도구까지 희귀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고고학 연구의 실증적 토대를 마련하고 학생들에게 현장 교육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인류의 기원과 문화적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 창고 역할을 수행합니다.

1894

[세인트 에드먼즈 콜리지 설립]

가톨릭 학자들을 위한 거처로 시작된 세인트 에드먼즈가 설립되었습니다. 종교적 소수자들에게도 평등한 학문적 기회를 제공하려는 대학의 포용성을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기숙사 형태로 시작했으나 점차 정식 콜리지의 위상을 갖추었습니다.
성숙한 학업 태도를 가진 대학원생과 성인 학생들을 주로 수용했습니다.
국제적인 학생 구성으로 캠퍼스에 다양하고 개방적인 문화를 불어넣었습니다.

1895

[휴즈 홀 설립]

여성 교사 양성을 목표로 하는 교육 대학인 휴즈 홀(Hughes Hall)이 세워졌습니다. 교육학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우수한 교원을 배출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엘리자베스 휴즈에 의해 창설되어 실용적인 교육 이론을 연구했습니다.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원 중심 콜리지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오늘날 다양한 전문직 과정의 학생들을 아우르는 역동적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1897

[전자의 발견]

캐번디시 연구소의 J.J. 톰슨 경이 음극선 실험을 통해 전자의 존재를 입증했습니다. 이는 원자 이하의 입자를 발견한 인류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기존에 원자가 물질의 최소 단위라는 상식을 뒤엎는 혁명적인 성과였습니다.
이 발견으로 톰슨은 190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현대 전자 공학의 물리적 토대가 케임브리지의 실험실에서 닦여졌습니다.

1904

[식물 학교 공식 개관]

식물학 연구의 전문화를 위해 식물 학교(Botany School) 건물이 공식 개관했습니다. 유전학 연구의 기초가 되는 식물 생리학 연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에드워드 7세 국왕이 직접 참석하여 개관을 축하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방대한 표본실과 실험 정원을 갖추어 연구에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식물 보호와 농업 혁신을 위한 과학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1912

[러더퍼드의 원자 핵 발견]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원자 내부에 아주 작고 조밀한 양전하 핵이 존재함을 규명했습니다. 원자의 구조를 태양계와 유사한 모델로 새롭게 정의한 순간입니다.

알파 입자 산란 실험을 통해 원자 내 대부분이 빈 공간임을 입증했습니다.
현대 원자핵 물리학의 아버지가 케임브리지에서 탄생했음을 보여준 성과입니다.
이 발견은 이후 핵 에너지와 입자 가속기 연구로 이어지는 핵심 고리가 되었습니다.

1919

[여성의 학위 취득 권리 논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여성들에게도 정식 학위를 수여해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사회적 기여에 상응하는 지위를 부여하려는 변화의 움직임이었습니다.

기존에는 교육은 받았으나 정식 학위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는 차별이 있었습니다.
보수적인 성향의 일부 회원들의 반대로 완전한 자격 부여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이 논의는 성 평등한 대학을 향한 멈출 수 없는 흐름의 시작이었습니다.

1921

[여성용 명예 학위 도입]

완전한 회원 자격은 아니지만 여성들에게 학위 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 명예 학위가 도입되었습니다. 제도적 한계 속에서도 여성의 학문적 성과를 부분적으로 인정한 조치였습니다.

여성들이 졸업 후 사회 진출 시 자격 증명에 있어 겪던 어려움을 해소했습니다.
대학 행정 전반에 참여할 권리는 없었으나 교육적 권위는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완전한 남녀공학 대학으로 가기 위한 과도기적 성격의 합의였습니다.

1932

[중성자의 발견]

캐번디시 연구소의 제임스 채드윅이 전하를 띠지 않는 원자 내 입자인 중성자를 발견했습니다. 원자 구조에 대한 인류의 이해를 완성시킨 획기적 발견이었습니다.

이 발견으로 채드윅은 193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중성자의 발견은 원자폭탄과 원자력 발전의 물리적 원리를 제공했습니다.
캐번디시 연구소가 세계 핵물리학의 독보적 중심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인위적 원자 핵 분열 성공]

코크로프트와 월턴이 가속기를 사용하여 세계 최초로 인위적인 원자 핵 분열에 성공했습니다. 연금술의 꿈이 과학적으로 실현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양성자를 리튬 원자핵에 충돌시켜 두 개의 헬륨 핵으로 분리해 냈습니다.
물질에서 막대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성과입니다.
이들은 이 공로로 1951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1933

[호머튼 콜리지의 이전]

런던에서 시작된 호머튼 콜리지가 케임브리지로 완전히 이전하여 정착했습니다. 교육학 전문 교육 기관으로서 대학의 교육 역량을 보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초기에는 여성 전용이었으나 점차 남녀공학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캠퍼스 남쪽에 위치하여 아름다운 조경과 현대적인 교육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오늘날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학생 수가 많은 콜리지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1934

[새 대학교 도서관 개관]

길스 길버트 스콧 경이 설계한 웅장한 대학교 도서관(UL) 건물이 문을 열었습니다. 거대한 타워를 가진 이 건물은 케임브리지 지식의 금고로 불립니다.

납본 도서관으로서 영국에서 발행되는 모든 도서의 사본을 보관합니다.
수백만 권의 장서를 수용할 수 있는 혁신적인 서고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학자들에게 전 세계 모든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최상의 연구 환경을 제공합니다.

1948

[여성의 완전한 회원 자격 획득]

여성들이 마침내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완전한 회원(Full Member)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학위 수여뿐만 아니라 대학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수세기에 걸친 성적 차별을 극복하고 실질적인 평등을 이룬 순간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수여한 학위를 기점으로 여성들의 지위가 공고해졌습니다.
대학 내 인적 구성과 학문적 관점이 더욱 풍부해지는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1951

[프레더릭 생어의 노벨상 수상]

케임브리지의 생화학자 프레더릭 생어가 인슐린의 아미노산 서열을 규명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분자 생물학 연구의 신기원을 열었습니다.

그는 훗날 DNA 염기 서열 분석법으로 두 번째 노벨상을 받게 됩니다.
생명체의 기본 구성 요소를 해독하는 케임브리지의 강력한 연구력을 증명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현대 유전학 및 생명공학 산업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1953

[DNA 이중 나선 구조 발견]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밝혀냈습니다. 생명의 비밀을 푸는 설계도를 발견한 20세기 최고의 과학적 쾌거였습니다.

인접한 이글 펍(Eagle Pub)에서 '생명의 비밀을 발견했다'고 선포한 일화가 유명합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X선 회절 데이터가 중요한 분석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 발견으로 이들은 196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며 영원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1954

[머레이 에드워즈 콜리지 설립]

뉴 홀(New Hall)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전용 콜리지가 새롭게 설립되었습니다. 여성 학자들의 리더십 배양과 학문적 성장을 위한 전용 공간이 확충되었습니다.

당시 여성들을 위한 콜리지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혁신적인 시도로 평가받았습니다.
독특한 돔 형태의 식당 건물 등 현대적인 건축미로 주목받았습니다.
현재는 머레이 에드워즈 콜리지로 불리며 여성 인재 양성의 중심 역할을 합니다.

1960

[처칠 콜리지 설립]

윈스턴 처칠 수상을 기념하여 과학 기술 특화 콜리지인 처칠 콜리지가 세워졌습니다.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공학자와 과학자 양성에 집중했습니다.

학생의 70% 이상을 과학 기술 전공자로 선발하는 독특한 규정을 가졌습니다.
캠퍼스 내부에 처칠 아카이브 센터를 두어 귀중한 정치 문헌들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현대적이고 개방적인 학풍으로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저력을 보였습니다.

1964

[다윈 콜리지 설립]

케임브리지 최초의 대학원 전용 콜리지인 다윈(Darwin)이 설립되었습니다. 성숙한 연구자들을 위한 전문적인 학술 공동체의 필요성이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다윈 가문의 저택이었던 뉴넘 그레인지 부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석·박사 과정 학생들이 자유롭게 교류하는 글로벌 허브가 되었습니다.
학부생 없이 대학원 중심의 심도 있는 세미나와 연구 활동을 지원합니다.

1965

[울프슨 콜리지 설립]

다양한 연령층과 국제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을 위해 울프슨 콜리지가 세워졌습니다. 기존의 전통적인 콜리지 구조를 넘어 현대적이고 평등한 문화를 지향했습니다.

아이작 울프슨 재단의 기부로 설립되어 현대적인 시설을 갖췄습니다.
교수진과 학생 간의 엄격한 격식을 줄인 민주적인 분위기로 유명합니다.
유학 온 성인 학생들과 대학원생들에게 가장 환영받는 콜리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루시 캐번디시 콜리지 설립]

성인 여성들에게 고등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루시 캐번디시가 설립되었습니다. 경력이 단절되었거나 뒤늦게 학업을 시작한 여성들을 지원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전통적인 학생들과 차별화된 맞춤형 교육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다양한 인생 경험을 가진 여성들이 모여 지적 에너지를 공유하는 장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남성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여 더욱 폭넓은 인재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1966

[피츠윌리엄 콜리지 승격]

오랫동안 하우스 형태로 운영되던 피츠윌리엄이 정식 콜리지의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넓은 부지와 현대적 기숙사를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우수한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스포츠와 음악 활동이 매우 활발한 콜리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대 건축가 덴젤 라스던이 설계한 식당 건물은 건축적 미학으로 호평받았습니다.
포용적인 분위기와 강력한 공동체 의식을 자랑하는 콜리지로 성장했습니다.

1967

[클레어 홀 설립]

연구원과 학자들의 휴식과 교류를 위한 고급 연구 콜리지인 클레어 홀이 설립되었습니다. 방문 학자들에게 최상의 연구 환경을 제공하는 국제적 지식 허브입니다.

클레어 콜리지에서 분리되어 더욱 학문적인 심화 연구에 집중하는 구조를 가졌습니다.
전 세계에서 온 최고 수준의 학자들이 가족과 함께 머물며 소통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케임브리지의 지적 자산을 전 세계와 공유하는 가교 역할을 수행합니다.

[펄서의 발견]

케임브리지 대학원생 조슬린 벨 버넬이 주기적인 전파를 방출하는 중성자별인 펄서(Pulsar)를 최초로 발견했습니다. 현대 천체 물리학의 지평을 넓힌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외계인의 신호로 오해받을 만큼 규칙적인 신호를 포착해 냈습니다.
이 발견의 공로로 지도 교수 앤서니 휴이시가 197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현대 천문학이 우주의 극한 환경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실마리를 제공했습니다.

1970

[로빈슨 콜리지 설립]

기업가 데이비드 로빈슨의 막대한 기부로 로빈슨 콜리지가 설립되었습니다.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최근에 설립된 전통적인 방식의 학부 콜리지입니다.

붉은 벽돌을 활용한 독창적인 외관 디자인으로 캠퍼스 내에서 눈에 띄는 존재입니다.
최신 시설의 대형 강당을 보유하여 대학의 주요 세미나 장소로 활용됩니다.
강력한 기금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최고의 장학 혜택과 연구 환경을 제공합니다.

[케틀스 야드 기증 및 개관]

짐 이데가 자신의 수집품과 거처인 케틀스 야드(Kettle's Yard)를 대학에 기증하여 예술관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생활 공간과 예술이 완벽히 조화된 독특한 공간입니다.

학생들이 예술을 박물관이 아닌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20세기 영국 현대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케임브리지의 문화적 깊이를 더해주는 가장 사랑받는 명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74

[남성 전용 콜리지의 혼성 전환 시작]

킹스, 클레어, 처칠 콜리지가 처음으로 여성 학생을 받아들이며 남녀공학 체계로 전환되었습니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남성 중심의 장벽이 완전히 무너진 역사적 순간입니다.

이후 트리니티와 세인트 존스 등 대형 콜리지들도 순차적으로 혼성 체계를 도입했습니다.
여성 학생들의 유입으로 캠퍼스의 지적, 문화적 분위기가 더욱 활기차게 변했습니다.
대학 교육이 모든 성별에 평등하게 열려야 한다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한 조치였습니다.

1976

[비가니의 화학 약품 보관함 발견]

케임브리지 최초의 화학 교수 비가니의 17세기 약품 보관함이 재발견되어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초기 화학 실험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적 사료입니다.

수백 년 전 사용되던 희귀 약품과 추출물들이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근대 과학의 태동기에 케임브리지에서 어떤 연구가 이루어졌는지 입증하는 증거입니다.
현재 대학 박물관에서 보존 및 전시되어 학생들의 탐구심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1977

[세인트 에드먼즈의 정식 콜리지 승인]

오랜 하우스 기간을 거쳐 세인트 에드먼즈가 마침내 대학의 정식 콜리지로 승인받았습니다. 가톨릭 전통을 바탕으로 한 포용적인 학문 공동체로서 입지를 굳혔습니다.

대학원생과 성인 학습자들에게 특화된 교육 프로그램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정식 콜리지 승인 이후 대대적인 건축 확장이 이루어져 규모가 커졌습니다.
국제적인 연구 교류와 인문학적 성찰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1979

[스티븐 호킹의 루카스 교수 임명]

우주론의 거장 스티븐 호킹이 뉴턴의 뒤를 이어 제17대 루카스 수학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장애를 극복하고 우주의 기원을 밝힌 그의 지성은 전 세계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블랙홀 증발 이론 등 현대 물리학의 획기적인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교수직 재임 중 '시간의 역사'를 집필하여 대중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의 존재는 케임브리지가 지적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장소임을 상징했습니다.

1980

[프레더릭 생어의 두 번째 노벨상]

케임브리지의 프레더릭 생어가 DNA 염기 서열 분석법 개발 공로로 두 번째 노벨 화학상을 받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화학 분야에서 두 번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인물입니다.

현대 게놈 연구와 정밀 의료의 핵심 기술이 그의 연구실에서 탄생했습니다.
케임브리지 생화학부의 연구력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그의 기술은 이후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1988

[루시 캐번디시 콜리지의 왕실 칙령 획득]

루시 캐번디시가 왕실 칙령을 획득하여 대학의 완전한 자치 콜리지로 인정받았습니다. 여성 성인 교육 전문 기관으로서의 권위가 법적으로 공고해졌습니다.

이 칙령은 콜리지가 학문적 독립성을 가지고 자체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여성들의 지적 성취가 국가적으로 인정받은 성과입니다.
이후 콜리지는 대대적인 기금 유치를 통해 교육 인프라를 혁신했습니다.

1990

[저지 비즈니스 스쿨 설립]

경영학 전문 교육을 위해 저지 비즈니스 스쿨(Judge Business School)이 설립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이론 중심 학풍에 실무적인 경영 리더십 교육이 결합되었습니다.

폴 저지 경의 기금으로 오래된 병원 건물을 개조하여 최첨단 캠퍼스를 마련했습니다.
전 세계 기업들과 연계하여 혁신적인 경영 프로젝트를 수행합니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비즈니스 스쿨 중 하나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2000

[게이츠 케임브리지 장학금 설립]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으로부터 역대 최대 규모인 2억 1천만 달러를 기부받아 장학 제도를 설립했습니다. 전 세계의 유망한 인재들을 케임브리지로 초청하는 플랫폼이 되었습니다.

리더십과 사회 공헌 의지를 가진 전 세계 유학생들에게 전액 장학금을 제공합니다.
매년 수천 명의 지원자가 몰리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장학 프로그램 중 하나입니다.
대학의 다양성을 높이고 글로벌 난제를 해결할 미래 리더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합니다.

2003

[인간 게놈 프로젝트 완성 참여]

케임브리지의 생거 연구소(Sanger Institute)가 주도하여 인간 DNA의 해독을 마무리했습니다. 인류의 유전적 지도를 완성한 이 작업은 정밀 의학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전체 프로젝트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데이터를 케임브리지 팀이 분석해 냈습니다.
데이터의 공개와 공유를 통해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지식을 보존했습니다.
암 치료 및 희귀 질환 연구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성과입니다.

2009

[대학교 설립 800주년]

대학교 설립 800주년을 맞아 캠퍼스와 런던 등지에서 성대한 기념행사가 개최되었습니다. 8세기의 지적 유산을 축하하고 다가올 미래의 비전을 전 세계와 공유했습니다.

화려한 조명 쇼와 특별 전시회, 대규모 모금 캠페인이 진행되었습니다.
8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특별 로고와 기념품들이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끊임없이 혁신하는 케임브리지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한 자리였습니다.

2013

[북서부 케임브리지 개발 착수]

지속 가능한 캠퍼스 확장을 위해 북서부 지역의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연구 시설과 학생 거주 공간, 지역 커뮤니티가 조화된 친환경 도시를 목표로 했습니다.

에딩턴(Eddington)이라는 새로운 구역을 조성하여 최첨단 주거 인프라를 갖췄습니다.
대학의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물리적 기반을 대폭 확충했습니다.
에너지 자립과 생태계 보존을 고려한 세계적인 친환경 건축 모델로 평가받습니다.

2018

[스티븐 호킹의 서거와 장례식]

케임브리지의 상징이었던 스티븐 호킹 교수가 서거하였으며, 장례식이 대학 내 그레이트 세인트 메리 성당에서 열렸습니다. 전 세계가 그의 위대한 지성과 불굴의 의지를 애도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뉴턴 묘역 옆에 안치되었습니다.
대학은 그의 연구 정신을 기리기 위해 호킹 재단과 특별 연구소를 강화했습니다.
그의 빈자리는 깊지만 그가 남긴 우주론적 업적은 케임브리지 지성의 정수로 남았습니다.

2020

[코로나19 백신 및 치료 연구 주도]

글로벌 팬데믹 위기 속에서 케임브리지 연구진이 백신 개발과 바이러스 분석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대학의 첨단 생명과학 역량이 인류의 생명을 구하는 데 투입되었습니다.

변이 바이러스의 신속한 추적과 역학 조사를 통해 방역 정책에 기여했습니다.
백신 플랫폼 기술의 고도화를 통해 차세대 감염병 대응 체계를 마련했습니다.
대학 출판부와 연구소는 모든 코로나 관련 자료를 무료로 개방하여 지식 공유에 앞장섰습니다.

2023

[최신 세계 대학 순위 상위권 유지]

글로벌 공신력 있는 대학 평가에서 케임브리지가 지속적으로 전 세계 최상위권을 유지했습니다. 연구 영향력과 교육의 질 모든 면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수학, 과학, 인문학 전 분야에서 균형 잡힌 학문적 수월성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산학 협력을 통해 실리콘 펜(Silicon Fen)이라는 기술 생태계를 주도합니다.
전통과 첨단이 공존하는 교육 시스템은 전 세계 인재들을 여전히 케임브리지로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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