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항기

가수, 작곡가, 목회자, 배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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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15- 11:5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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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항기
가수, 작곡가, 목회자, 배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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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록 음악의 선구자이자 싱어송라이터 윤항기는 1959년 미8군 쇼로 데뷔하여 음악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1964년 대한민국 최초 록 밴드 '키 보이스'를 결성, 한국 대중음악에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이후 솔로 활동으로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으며, 한때 목회자의 길을 걷기도 했습니다. 2014년 가수로 복귀하여 여전히 대중에게 사랑받는 현역 뮤지션입니다.

연관 연혁
주요사건만
최신순

1943

[음악가 집안의 탄생]

일본 도쿄에서 당대 최고의 예인 부부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한국 뮤지컬의 개척자인 아버지 윤부길과 무용가 어머니 성경자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습니다. 예술적 환경 속에서 운명처럼 음악가로서의 자질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부모님이 공연을 위해 일본과 한국을 오가던 시기에 도쿄에서 첫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해방 직전 가족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와 경기도 개성에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공연 현장을 지켜보며 예술가로서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익혔습니다.

1950

[전쟁과 피란의 시련]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정든 개성을 떠나 남쪽으로 향하는 고달픈 피란길에 오릅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가족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어린 소년 가장의 짐을 짊어집니다. 이 시기 겪은 고난은 훗날 그의 음악에 깊은 서정성과 한을 심어주게 됩니다.

부산까지 내려가 구두닦이와 신문팔이를 하며 동생 윤복희의 손을 꼭 잡고 버텼습니다.
폭격과 굶주림 속에서도 동생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러주던 기억은 가슴 아픈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생존을 위해 길거리에서 익힌 세상 물정은 그의 단단한 자립심을 키워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3

[어머니와의 비극적 이별]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어머니 성경자 여사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어머니의 죽음은 어린 윤항기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감을 안겨줍니다. 음악만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줄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악극단 활동 중 얻은 과로와 지병이 겹쳐 어머니는 너무 일찍 눈을 감으셨습니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동생 복희를 더욱 끔찍이 아끼는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그리움이 쌓일 때마다 흥얼거렸던 멜로디들은 훗날 그가 쓴 수많은 서정 곡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1957

[아버지마저 떠나보내다]

예술적 정신 지주였던 아버지 윤부길마저 지병으로 별세하며 완전한 고아가 됩니다.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차가운 세상에 던져진 남매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겨주신 예술적 유산은 그가 다시 일어서는 힘이 됩니다.

극단 운영의 실패와 병마로 고통받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음악의 길을 당부하고 떠나셨습니다.
청계천 천막촌에서 동생과 함께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며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힘겨웠습니다.
절망의 끝에서 그는 음악을 통해 가문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강한 결의를 다지게 됩니다.

1959

[미 8군 무대 데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미 8군 무대 오디션에 응시하며 정식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합니다. 드럼을 독학으로 익혀 연주자 겸 가수로 활동하며 팝 음악의 최신 흐름을 익힙니다. 척박했던 한국 대중음악계에 팝적인 감각을 지닌 신인으로 주목받습니다.

당시 미 8군 무대는 최고의 실력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이곳에서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쳤습니다.
젓가락으로 북을 치며 밤낮없이 연습한 결과 드럼 실력은 이미 수준급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훗날 그가 한국형 그룹 사운드를 창시하는 데 결정적인 자산이 되었습니다.

1960

[해병대 군악대 입대]

해병대에 자원입대하여 군악대에서 본격적인 음악 이론과 합주를 공부합니다. 군 생활 동안 다양한 악기를 섭렵하며 음악적 지평을 넓히는 귀중한 시간을 갖습니다. 절도 있고 파워풀한 무대 매너의 기초가 이 시기에 닦여집니다.

군악대에서 트럼펫과 드럼을 담당하며 음악적 전문성을 한층 끌어올렸습니다.
동료 대원들과 함께 연주하며 밴드 앙상블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체감했습니다.
전역 후 그는 단순한 가수가 아닌 '밴드 마스터'로서의 꿈을 구체화하게 됩니다.

1962

[밤무대의 풍운아]

전역 후 명동과 종로 일대의 음악 감상실을 누비며 독보적인 인기를 얻습니다. 세련된 팝 창법과 화려한 드럼 연주는 젊은 층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됩니다. 동료 뮤지션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형태의 록 밴드 결성을 준비합니다.

당시 유행하던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들을 완벽하게 소화해냈습니다.
그의 공연이 있는 날이면 음악 감상실 주변은 구경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이 시기 얻은 자신감은 그를 한국 대중음악사의 변곡점으로 이끄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1964

[키 보이스 창단]

한국 최초의 록 그룹인 '키 보이스'를 결성하여 대한민국 그룹 사운드 시대를 엽니다. 차중락, 김홍탁 등 당대 최고의 실력자들과 함께 비틀즈 스타일의 음악을 선보입니다. 트로트가 지배하던 가요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청년 문화를 선도합니다.

드럼을 치며 노래하는 파격적인 보컬로 밴드의 리듬과 에너지를 주도했습니다.
이들의 등장은 한국 대중음악이 '듣는 음악'에서 '즐기는 음악'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키 보이스는 한국 밴드 음악의 원조이자 모든 그룹 사운드의 전설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입술 발표]

키 보이스의 데뷔 음반인 '그녀의 입술'을 발표하며 전국적인 인기를 얻습니다. 수록곡 중 '정든 배는 떠난다' 등이 히트하며 그룹 사운드 음반 시장의 가능성을 확인합니다. 라디오 방송국들이 앞다투어 이들의 곡을 송출하며 인기가 폭발합니다.

기존의 느린 박자에서 탈피한 빠른 비트와 화음은 젊은이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윤항기는 이 앨범에서 작사 및 편곡 작업에도 참여하며 창작력을 드러냈습니다.
국내 그룹 사운드 최초의 본격적인 상업 음반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1965

[방송사 가요대상 은상]

키 보이스 활동 중 TBC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가요대상에서 은상을 수상합니다. 그룹 사운드가 메이저 방송국 시상식에서 본상을 받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록 음악이 주류 가요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단순한 댄스 팀이 아닌 음악성을 갖춘 아티스트 그룹으로 인정받은 결과였습니다.
수많은 여성 팬을 거느리며 한국 최초의 '아이돌 밴드'와 같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 수상을 계기로 키 보이스는 명실상부한 당대 최고의 인기 팀으로 공인받았습니다.

1966

[베트남 위문 공연]

전장의 포화 속으로 들어가 파병 장병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펼칩니다.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는 전선을 돌며 음악으로 군인들의 고단함을 달래줍니다. 이 경험은 그에게 평화와 인류애에 대한 깊은 성찰을 남기게 됩니다.

키 보이스 멤버들과 함께 6개월간 베트남 현지에 체류하며 헌신적으로 활동했습니다.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는 그의 노래에 수많은 장병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전쟁의 비극을 목격하며 음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7

[He-5 밴드 창설]

키 보이스를 떠나 김용호 등과 함께 새로운 밴드 'He-5'를 조직합니다. 더욱 강력하고 세련된 사이키델릭 록 사운드를 추구하며 음악적 변신을 시도합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존 명성을 넘어 새로운 밴드 트렌드를 주도합니다.

기존보다 더 정교한 연주와 화려한 퍼포먼스를 강조하는 무대를 선보였습니다.
시민회관 등 대형 공연장에서 정기적으로 콘서트를 열어 팬덤을 확장했습니다.
윤항기는 이 팀에서 리드 보컬이자 음악 감독으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69

[해변으로 가요 열풍]

여름의 대명사라 불리는 불후의 명곡 '해변으로 가요'를 발표하여 전국을 뒤흔듭니다. 시원한 파도 소리 같은 멜로디와 경쾌한 리듬으로 여름 피서지의 필수 곡이 됩니다. 이 곡으로 인해 윤항기는 남녀노소 모두가 아는 국민 스타로 부상합니다.

그가 직접 작사, 작곡에 참여하여 천부적인 대중적 감각을 입증한 작품입니다.
발표 이후 현재까지도 여름만 되면 울려 퍼지는 전설적인 시즌송으로 남았습니다.
당시 그룹 사운드 음악 중 가장 광범위한 대중적 성공을 거둔 곡으로 기록됩니다.

1970

[He-6로의 진화]

멤버를 보강하여 6인조 밴드 'He-6'로 개편하고 더욱 풍성한 사운드를 지향합니다. 브라스 섹션을 과감히 도입하여 소울과 펑크가 가미된 록 음악을 선보입니다. 당대 최고의 실력파 연주자들이 모인 '슈퍼 그룹'으로 명성을 떨칩니다.

한국적인 록 사운드의 완성도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단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내쉬빌' 등 명문 음악 업소에서 밤낮없는 공연을 펼치며 라이브의 진수를 보여주었습니다.
윤항기의 보컬은 6인조 밴드의 웅장한 연주 속에서도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산했습니다.

1971

[가수왕 타이틀 획득]

각종 가요 시상식에서 가수상을 휩쓸며 그룹 사운드 출신 가수의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뛰어난 가창력뿐만 아니라 직접 곡을 쓰는 싱어송라이터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여동생 윤복희와의 성공적인 합동 공연으로 '예술가 남매'의 위상을 확립합니다.

호소력 짙은 창법과 화려한 무대 매너로 대중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이 시기 발표한 다수의 앨범이 차트 상위권을 장기 집권하며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대중 매체는 그를 '한국의 톰 존스'라 부르며 그의 가창력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1972

[음악적 방황과 모색]

밴드 활동의 정점에서 미래에 대한 고민과 음악적 변화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기존의 록 음악을 넘어 더 폭넓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음악을 구상하기 시작합니다. 솔로 가수로서의 독립을 조심스럽게 준비하는 과도기적 시기입니다.

동료들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면서도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려 애썼습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청취하며 작곡 공부에 더욱 매진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이 시기의 고민은 훗날 그가 70년대 최고의 솔로 스타로 등극하는 거름이 되었습니다.

1974

[솔로 가수 공식 데뷔]

오랜 그룹 생활을 정리하고 독자적인 길을 걷기 위해 첫 솔로 음반을 발표합니다. 밴드의 리더가 아닌 한 사람의 아티스트로서 대중 앞에 홀로 섭니다. 솔로 데뷔와 동시에 전작을 압도하는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성공을 예고합니다.

밴드 시절보다 더 서정적이고 대중 친화적인 멜로디를 선보였습니다.
그룹 사운드 출신은 솔로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가요계의 징크스를 단번에 깼습니다.
작곡가와 가수라는 두 역할을 조화롭게 병행하며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했습니다.

[장밋빛 스카프 증후군]

최대의 히트곡 '장밋빛 스카프'를 발표하며 전국적인 신드롬을 일으킵니다. 애절한 감성과 중독성 강한 후렴구는 전 국민의 마음을 훔칩니다. 이 곡 한 곡으로 윤항기는 명실상부한 70년대 최고의 톱스타 반열에 오릅니다.

노래의 인기 덕분에 당시 시장에서 장밋빛 스카프가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습니다.
라디오 신청 곡 1위를 독점하며 방송사에서도 가장 모시기 힘든 가수가 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중장년층의 애창곡이자 그의 음악 인생을 상징하는 대표곡으로 남았습니다.

1975

[나는 행복합니다 발표]

희망과 긍정의 에너지를 담은 노래 '나는 행복합니다'를 공개합니다. 우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대중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응원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제목처럼 밝고 명랑한 분위기로 전 세대의 폭넓은 사랑을 받습니다.

특유의 소울풀한 목소리가 경쾌한 리듬과 어우러져 독특한 매력을 발산했습니다.
기업 행사나 학교 운동회 등에서 단골 노래로 선정되며 국민 가요로 자리 잡았습니다.
윤항기 자신도 이 노래를 통해 삶에 대한 낙천적인 자세를 갖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1976

[영화 배우로서의 도전]

히트곡의 인기에 힘입어 동명의 영화 '장밋빛 스카프'에 주인공으로 출연합니다. 음악뿐만 아니라 연기 분야에서도 발군의 재능을 뽐내며 만능 엔터테이너로 등극합니다. 스크린 속 수려한 외모와 안정된 연기는 여성 팬들의 마음을 다시 한번 흔듭니다.

당시 인기 가수가 영화에 출연하는 붐이 일었으나, 그는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였습니다.
영화는 흥행에도 크게 성공하며 그의 스타성을 스크린에서도 입증했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필모그래피를 탄탄히 쌓았습니다.

1977

[별이 빛나는 밤에 히트]

감미롭고 로맨틱한 곡 '별이 빛나는 밤에'를 발표하며 차트 상위권을 점령합니다. 밤하늘의 낭만을 노래한 이 곡은 라디오 프로그램의 주제가처럼 널리 울려 퍼집니다. 청춘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통기타와 캠프파이어 문화의 필수 곡이 됩니다.

작곡가로서의 역량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로, 팝적인 감수성이 돋보였습니다.
이 곡을 통해 '로맨틱한 오빠'라는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구축했습니다.
대중과 평단 모두로부터 음악적 완숙미가 느껴진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거야 정말 전국 강타]

흥겨운 리듬과 쉬운 가사의 '이거야 정말'을 발표하며 댄스 유행을 주도합니다. 따라 부르기 쉬운 후렴구는 당시 전국적인 유행어가 될 정도로 파급력이 컸습니다. 남성적인 매력과 세련된 무대 매너가 돋보였던 활발한 활동기입니다.

같은 이름의 영화에도 출연하며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방송가에서는 그의 출연 여부가 시청률을 결정할 정도로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음악 인생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쳤던 전성기의 정점이었습니다.

1978

[희망의 노래 날개]

웅장한 사운드의 대곡 '날개'를 통해 꿈을 향한 비상을 노래합니다. 폭발적인 가창력을 요구하는 이 곡은 그의 보컬적 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됩니다. 삶의 무게에 지친 이들에게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는 노래로 기억됩니다.

비상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은 가사는 사회적으로 큰 공감을 얻었습니다.
각종 특집 무대와 국책 행사에서 피날레를 장식하는 곡으로 자주 선정되었습니다.
가수로서 음악적 깊이를 한층 더 넓혔다는 예술적 평가를 받았습니다.

1979

[불후의 명곡 여러분 탄생]

여동생 윤복희를 위해 작사, 작곡한 '여러분'이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합니다. 가수뿐만 아니라 작곡가로서도 대한민국 최고임을 전 세계에 입증한 쾌거입니다.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하는 철학적인 가사는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줍니다.

동생의 아픈 삶을 곁에서 지켜보며 오빠의 진심을 담아 쓴 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요제 당시 윤복희의 압도적인 무대 장악력과 어우러져 심사위원들을 매료시켰습니다.
현재까지도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곡 중 하나로 손꼽히는 걸작입니다.

[가요계 평정의 해]

올해의 가수상과 작곡상을 동시에 휩쓸며 1979년을 자신의 해로 만듭니다. 노래와 창작 두 분야에서 모두 정상에 오르는 독보적인 행보를 보여줍니다. 동생 윤복희와 함께 남매가 나란히 가요계를 호령하며 가문의 영광을 재건합니다.

국내외 주요 가요제에서의 성과로 거장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습니다.
그가 쓴 멜로디는 하나의 장르가 되어 수많은 후배 가수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쥐며 음악인으로서 가장 화려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1980

[친구 음반과 성숙의 시간]

화합과 우정을 노래한 음반 '친구'를 내놓으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갑니다. 80년대라는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맞춰 음악적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동료 뮤지션들과의 활발한 협업으로 한국 음악의 질적 성장을 돕습니다.

중견 가수로 접어드는 시기에도 변함없는 티켓 파워와 인기를 과시했습니다.
인생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담은 가사들이 팬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방송 출연보다는 라이브 콘서트를 통해 팬들과 직접 소통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1982

[MBC 10대 가수상 선정]

MBC 방송국의 10대 가수상에 이름을 올리며 변치 않는 영향력을 입증합니다. 수많은 신인이 등장하는 80년대 가요계에서도 자신만의 확고한 자리를 지킵니다. 대중음악계의 큰 어른으로서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며 활동합니다.

무대 위에서의 중후한 매력과 가창력은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각종 음악 프로그램에서 그의 노래 인생을 조명하는 특집 무대가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팬들은 그를 국민 가수를 넘어 하나의 전설로 대우하기 시작했습니다.

1983

[양수경 히트곡 작곡]

후배 가수 양수경의 히트곡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 등을 작곡하며 저력을 보입니다. 본인이 부르는 곡 외에도 남에게 주는 곡까지 대히트시키며 명작곡가로 군림합니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폭넓은 창작력을 과시하며 가요계를 뒷받침합니다.

후배 여성 가수들의 섬세한 감성을 잘 잡아내어 곡에 녹여냈습니다.
그가 만든 곡들은 라디오와 길거리에서 연일 울려 퍼지며 큰 수익을 안겨주었습니다.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그를 가요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1984

[KBS 가요대상 본상]

KBS 가요대상에서 본상을 수상하며 공영방송에서도 큰 인정을 받습니다. 꾸준한 음반 활동과 높은 대중적 인지도 덕분에 매년 시상식의 단골 손님이 됩니다. 음악을 향한 멈추지 않는 열정으로 매번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중년의 멋을 담은 발라드 곡들이 성인층 팬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성실하게 무대를 지키는 그의 모습은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습니다.
가수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하나하나 누려가던 시기였습니다.

1986

[마지막 스카프와 건강 이상]

대표곡 '장밋빛 스카프'의 후속 성격인 '마지막 스카프'를 발표하며 향수를 자극합니다. 올드 팬들의 뜨거운 반응 속에서도 무리한 스케줄로 인해 몸에 무리가 가기 시작합니다. 화려한 조명 뒤에서 건강의 적신호를 감지하며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자신의 음악 인생을 정리하듯 혼신을 다해 부른 곡으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여전히 쇄도하는 공연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강행군을 이어갔습니다.
이 시기 가끔 무대 뒤에서 호흡 곤란을 겪는 등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1987

[폐결핵 진단과 사경]

극심한 과로가 겹쳐 폐결핵 진단을 받고 갑작스럽게 쓰러져 생사의 고비를 넘깁니다. 화려했던 모든 무대를 뒤로하고 요양소와 병원에서의 외로운 투병 생활을 시작합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며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됩니다.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상태가 매우 심각했습니다.
인기 절정의 순간에 찾아온 병마는 그를 가장 밑바닥까지 끌어내렸습니다.
절박한 고통 속에서 그는 신을 찾게 되었고, 이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1988

[종교로의 귀의와 서원]

병세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자 남은 생애를 신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연예계를 미련 없이 정리하고 신학 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주변의 만류와 우려도 컸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성직자의 길을 준비합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건강을 되찾은 경험을 '두 번째 생명'이라 불렀습니다.
세속적인 명예보다는 영적인 평안과 봉사의 삶에서 가치를 찾기로 했습니다.
동생 윤복희도 오빠의 결정을 지지하며 함께 신앙생활에 전념했습니다.

1989

[미국 신학 연수와 졸업]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강도 높은 신학 공부에 매진하여 학업을 마칩니다. 유명 가수라는 타이틀을 완전히 잊고 가장 낮은 자세로 성경을 연구합니다. 내면을 다듬으며 새로운 사명을 감당할 영적인 준비를 마칩니다.

연합신학대학교에서 전공을 이수하며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검증받았습니다.
학교 생활 동안 동료 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겸손함을 실천했습니다.
훗날 교단을 세울 때 필요한 신학적 토대를 견고히 다진 시기였습니다.

1990

[목사 안수와 새 인생]

엄숙한 예식 속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정식으로 목회자의 길을 시작합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가 성직자가 되었다는 소식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 노래하는 가수가 아닌 영혼을 구원하는 목자로 거듭난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안수식 당일 많은 동료 연예인이 참석하여 그의 새로운 삶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과거의 자신을 내려놓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로써 '가수 윤항기'는 잠시 멈추고 '목사 윤항기'의 서사가 본격적으로 열렸습니다.

1991

[소외된 이들을 위한 목회]

개척 교회를 세우고 병든 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특수 사역에 전념합니다. 자신의 투병 경험을 바탕으로 환우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치유 집회를 엽니다. 화려한 대형 교회보다는 아픔이 있는 현장을 발로 뛰는 활동을 펼칩니다.

교도소와 고아원 등 가장 낮은 곳을 찾아다니며 위로의 찬양을 불렀습니다.
음악적 재능을 신앙 전파에 활용하여 수많은 이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의 진심 어린 설교와 노래는 종교를 떠나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1993

[예음예술종합신학교 설립]

예술과 신학을 접목한 전문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초대 총장으로 취임합니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실력 있는 예술인들을 양성하여 사회에 공헌하고자 합니다. 교육가로서 인재 양성에 힘쓰며 제3의 인생을 개척합니다.

자신의 평생 경험을 후학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하는 요람을 만들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주며 학업의 꿈을 이어가게 도왔습니다.
이 학교는 이후 수많은 찬양 사역자와 기독 예술인을 배출하는 명문으로 성장했습니다.

1994

[찬양 음반 전파]

신앙의 메시지를 담은 찬양 음반 '여호와를 찬양하라'를 발표합니다. 유행가가 아닌 영적인 감동을 주는 노래로 대중과 다시 소통합니다. 그의 탁월한 가창력은 찬송가에서도 변함없이 빛을 발하며 큰 은혜를 선사합니다.

교회 무대와 집회 현장에서 울려 퍼진 그의 목소리는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변화된 그의 삶을 음악으로 확인시켜주는 귀한 기록이 되었습니다.
음악이 가진 치유의 힘을 종교적으로 완벽하게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996

[기독교 연예인 연합회장]

한국 기독교 연예인 연합회의 회장직을 맡아 연예계 복음화에 앞장섭니다. 동료와 후배 연예인들의 영적인 멘토가 되어 그들의 고충을 듣고 기도합니다. 화려함 뒤에 가려진 연예인들의 외로움을 신앙으로 치유하려 노력합니다.

정기적인 예배와 친목 모임을 주도하며 건강한 연예계 문화를 만들려 애썼습니다.
경제적, 심리적으로 어려운 처지의 연예인들을 위한 긴급 구호 활동도 펼쳤습니다.
그의 리더십 하에 수많은 스타가 신앙을 얻고 삶의 안식을 찾았습니다.

1998

[글로벌 해외 선교]

미국과 유럽 등 해외 교포 사회를 순회하며 대규모 찬양 간증 집회를 개최합니다. 고국을 그리워하는 동포들에게 자신의 삶과 신앙 이야기를 들려주며 위로합니다.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활동 범위를 넓히며 복음을 전파합니다.

집회마다 교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여전한 인기와 영향력을 확인했습니다.
현지 한인 교회들과 협력하여 해외 선교 기금을 마련하는 등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음악이라는 만국 공통어를 통해 이민 생활의 고단함을 씻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2000

[서울국제가요제 특별공로상]

과거 가요제 우승자이자 거장으로서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공로상을 수상합니다. 목회 활동 중에도 대중음악계에서 그의 위상은 여전히 전설로 남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대중음악사적 가치를 공식적으로 다시 한번 확인받는 자리입니다.

후배 가수들의 기립 박수 속에 무대에 올라 감동적인 소감을 전했습니다.
과거의 영광보다는 음악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헌정 공연은 시상식의 백미였습니다.

2003

[대통령 표창 수훈]

예술 활동과 사회 봉사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습니다. 예술가로서의 업적뿐만 아니라 성직자로서의 사회적 공헌도가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개인의 영예를 넘어 가문의 명예를 드높인 경사였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한 꾸준한 자선 활동과 교육자로서의 헌신이 선정 사유였습니다.
국가적 예우를 받으면서도 더욱 낮은 자세로 봉사하겠다는 겸손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활동에 더욱 매진하게 됩니다.

2006

[옥관문화훈장 서훈]

한국 대중음악 발전에 기여한 지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옥관문화훈장을 받습니다. 그룹 사운드의 선구자이자 70년대 가요 황금기를 이끈 주역으로서의 업적을 기린 것입니다. 음악 인생 반세기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예우한 결과입니다.

훈장 서훈식에서 가족과 팬들에게 영광을 돌리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한국 대중음악의 뿌리를 내린 그의 노고가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수상을 통해 그는 명실상부한 '국가 대표 가수'의 지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2009

[데뷔 50주년 기념 공연]

데뷔 50주년을 기념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대규모 콘서트를 개최합니다. 반세기 동안 자신을 사랑해 준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히트곡들을 열창합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가창력과 열정으로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합니다.

키 보이스 시절의 록부터 솔로 시절의 발라드까지 집대성한 무대였습니다.
동생 윤복희가 특별 게스트로 출연하여 남매의 환상적인 하모니를 다시 보여주었습니다.
50년 음악 인생을 정리하는 감동의 서사시를 무대 위에서 완성한 공연이었습니다.

2010

[골든디스크 공로상 수상]

대한민국 최고의 음악 시상식인 골든디스크에서 공로상을 받으며 위엄을 과시합니다. 후배 아이돌 가수들의 뜨거운 환호 속에 무대에 올라 한국 음악의 자부심을 역설합니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거장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한국 음반 산업의 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기리는 의미 있는 상이었습니다.
수상 소감에서 후배들에게 진정성 있는 음악을 할 것을 당부해 울림을 주었습니다.
전설적인 거장의 존재감이 시상식장을 압도했던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2012

[불후의 명곡 전설 출연]

KBS 인기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에 전설로 출연하여 자신의 곡들이 재탄생하는 무대를 지켜봅니다. 후배들의 열정적인 무대에 깊은 감동을 표하며 음악적 소통을 이어갑니다. 젊은 세대에게 윤항기의 음악을 새롭게 각인시킨 소중한 계기였습니다.

아이돌과 실력파 보컬들이 부르는 그의 노래들은 시대를 초월한 생명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후배들의 편곡 감각에 놀라워하며 따뜻한 조언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방송 이후 그의 히트곡들이 차트에서 역주행하는 기현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2014

[걱정을 말아요 신곡 발표]

오랜 침묵을 깨고 신곡 '걱정을 말아요'를 발표하며 가요계에 전격 복귀합니다. 지친 현대인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의 가사가 큰 호응을 얻습니다. 목회자 생활 중에도 잃지 않았던 대중적인 감각을 한껏 발휘한 작품입니다.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다시 마이크를 잡은 그의 모습에 팬들은 환호했습니다.
각종 라디오와 음악 방송에 출연하여 여전한 입담과 가창력을 뽐냈습니다.
은퇴를 모르는 그의 열정은 많은 시니어 세대에게 큰 희망과 자극이 되었습니다.

[은관문화훈장 수훈]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에서 이전보다 높은 등급인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합니다. 한 평생 대중음악에 헌신한 노력을 국가가 다시 한번 최고의 예우로 인정한 것입니다. 한국 대중문화예술 발전에 끼친 공로를 기리는 가장 영예로운 상입니다.

시상식장에서 가장 빛나는 주역으로 우뚝 서서 팬들에게 감사를 전했습니다.
수상 소감에서 자신의 삶을 이끌어준 신과 동료들에게 모든 영광을 돌렸습니다.
살아있는 전설로서의 품격과 겸손함을 동시에 보여준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2015

[복면가왕 깜짝 출연]

MBC 인기 프로그램 '복면가왕'에 가면을 쓰고 출연하여 정체를 숨긴 채 열창합니다. 나이가 믿기지 않는 폭발적인 성량과 고음에 판정단과 시청자들은 경악합니다. 가면을 벗는 순간 전율과 함께 기립박수가 터져 나온 역사적 방송이었습니다.

가면 뒤에 숨겨진 그의 진심 어린 목소리는 세대를 초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예능적 재미와 함께 원로 가수의 저력을 확실히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노래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음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표했습니다.

2017

[가요무대 정기 출연]

KBS '가요무대'에 정기적으로 출연하여 향수 어린 고품격 무대를 선보입니다. 중장년층 시청자들에게 영원한 오빠로서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전통 가요와 팝을 넘나드는 그의 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은 프로그램의 품격을 높여줍니다.

매회 방송 후 게시판에는 그의 무대에 감동했다는 팬들의 글이 쇄도했습니다.
고령의 나이에도 자기 관리에 철저한 그의 모습은 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는 무대 위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며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2018

[예술 선교 컨퍼런스 주최]

기독교 예술인들을 위한 대규모 컨퍼런스를 개최하여 문화 선교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합니다. 예술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철학을 공유하며 수많은 젊은 예술가를 독려합니다. 종교 지도자로서의 영향력을 예술과 결합하여 극대화한 활동입니다.

수많은 후배 뮤지션이 참석하여 거장의 지혜와 신앙적 조언을 경청했습니다.
예술이 가진 치유의 힘을 강조하며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 것을 주문했습니다.
신앙과 예술의 완벽한 조화를 꿈꿨던 그의 평생 과업 중 하나를 달성한 자리였습니다.

2020

[인생다큐 마이웨이 출연]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담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진솔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여동생 윤복희와의 우애, 투병 중 곁을 지킨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며 시청자들을 울립니다. 화려한 스타 뒤에 숨겨진 평범하고 따뜻한 가장의 모습을 공개합니다.

투병 시절 아내의 헌신적인 간호가 없었다면 오늘의 자신도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동생 복희와 함께 식사하며 지난 세월을 회상하는 장면은 큰 감동을 자아냈습니다.
굴곡진 인생을 긍정의 힘으로 이겨낸 그의 이야기는 많은 이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2021

[아침마당 화요초대석]

인기 토크 프로그램 '아침마당'에 출연하여 재치 있는 입담과 삶의 지혜를 나눕니다. 80세를 앞둔 나이에도 정정한 모습으로 건강한 활력을 전파합니다. 시대의 큰 어른으로서 건네는 따뜻한 조언은 시청자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자신만의 건강 비법과 행복한 노후에 대한 생각을 진솔하게 공유했습니다.
과거의 고난이 있었기에 오늘의 소소한 행복이 소중함을 역설했습니다.
시청자들은 그의 밝은 에너지에 응원의 메시지를 아낌없이 보냈습니다.

2022

[데뷔 63주년 감사의 삶]

데뷔 63주년을 맞이하여 여전히 음악과 신앙 안에서 평온하고 활기찬 삶을 이어갑니다. '영원한 현역'으로 남기 위해 매일 아침 목소리를 가다듬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역사임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인 집필 활동과 학교 관련 행사를 병행하며 여전히 바쁜 일상을 보냅니다.
종종 열리는 소규모 콘서트에서 팬들과 가까이 소통하며 행복을 나눕니다.
그의 음악은 스트리밍 사이트를 통해 MZ세대에게도 새롭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2024

[명예 총장으로서의 활동]

신학교의 명예 총장으로서 여전히 교육과 선교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활동 중입니다. 80세를 훌쩍 넘긴 고령임에도 맑은 정신과 체력을 과시하며 후학들을 지도합니다. 예술과 신앙을 향한 그의 열정은 시간의 흐름조차 멈춘 듯합니다.

건강 관리에 철저하며 여전히 대중 앞에 나설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의 음악 인생은 수많은 후배 가수에게 영원한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낳은 위대한 거장 윤항기의 서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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