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카 마사루

기업가, 발명가, 소니 창업자, 교육자, 공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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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카 마사루
기업가, 발명가, 소니 창업자, 교육자, 공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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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카 마사루는 '기술의 소니'를 일궈낸 전설적인 엔지니어이자 인류의 미래를 고민한 위대한 교육가입니다. 전후 폐허가 된 일본에서 '자유롭고 즐거운 이상공장'을 꿈꾸며 창업한 그는 트랜지스터 라디오, 트리니트론 TV 등 혁신적인 제품을 통해 전 세계인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기업가를 넘어, 유아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과학 교육 진흥에 헌신한 그의 생애는 기술과 인간애가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고귀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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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이부카 마사루의 탄생]

일본 도치기현 가미쓰가군 닛코정(현 닛코시)에서 이부카 다사쿠의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훗날 세계적인 기술 혁신을 주도할 인물이 일본의 고요한 마을에서 첫 울음을 터뜨립니다. 집안의 기대 속에서 영민한 아이로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엔지니어로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부카 또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기계에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본가는 에도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서 깊은 가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치기에서 태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직장 관계로 이동하며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1910

[아버지와의 이별]

불과 두 살의 나이에 아버지 다사쿠를 여의는 큰 슬픔을 겪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할아버지의 집이 있는 서구 도쿄로 이주하며 새로운 생활을 시작합니다. 어린 나이에 겪은 가족의 상실은 그를 더욱 자립심 강한 성격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가계가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양육 아래 도쿄에서 유년 시절의 정서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경험한 환경의 변화는 훗날 그가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도전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15

[성비소학교 입학]

도쿄의 성비소학교(현 세이비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교육을 받기 시작합니다. 기초 학문을 닦으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평범한 소년 시절을 보냅니다. 학교 교육 속에서 기계와 과학에 대한 남다른 흥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당시 그는 수업 시간에도 기계 구조를 관찰하거나 조립하는 일에 몰두하곤 했습니다.
선생님들로부터 질문이 많은 아이로 기억될 만큼 호기심이 왕성했습니다.
도쿄에서의 소학교 생활은 그가 도시적 감각과 근대 과학에 눈을 뜨는 시기였습니다.

1918

[나고야로의 전학]

가족 사정으로 인해 나고야로 거처를 옮기며 학교를 전학하게 됩니다. 낯선 환경이었지만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며 원만하게 적응해 나갑니다. 지역의 환경 변화 속에서도 과학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나고야 지역의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중학교 진학을 준비하며 학업에 매진했습니다.
전학을 거치면서도 성적이 우수했으며 특히 수리적인 감각이 뛰어났습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그가 일본 전역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1921

[아이치현립 제일중학교 입학]

명문인 아이치현립 제일중학교(현 아이치현립 아사히가오카 고등학교)에 입학합니다. 중등 교육 과정을 통해 한층 깊이 있는 학문을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과학 동아리 활동 등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 나가는 시기입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무선 전신기 등 당시 첨단 기술에 매료되어 직접 제작을 시도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발명가'로서의 싹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실험에 몰두하느라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공부만 잘하는 학생이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실천적 지능을 보였습니다.

1923

[관동대지진과 도쿄 복귀]

관동대지진 이후 다시 도쿄로 돌아와 학업을 이어가게 됩니다. 혼란스러운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공부에 집중하며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합니다. 위기 속에서도 잃지 않은 그의 평정심은 주변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지진으로 파괴된 도시의 모습을 보며 기술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복구 과정에서 쓰이는 다양한 기계들을 보며 공학자의 길을 굳게 결심했습니다.
도쿄에서의 중학교 생활 마무리는 그에게 대도시의 역동성을 다시금 느끼게 했습니다.

1926

[와세다 대학 고등공학부 입학]

와세다 대학 고등공학부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공학도의 길을 걷습니다. 이론뿐만 아니라 실기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교수들의 기대를 모읍니다. 자신의 꿈인 기술 개발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청년기를 보냅니다.

대학 시절 그의 성적은 최상위권이었으며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전기공학 분야에 특히 매료되어 회로 설계와 전기적 현상을 연구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끊임없이 토론하며 새로운 기술적 가능성을 모색했습니다.

1929

[무선전신 기술에 대한 심취]

아마추어 무선사 활동을 시작하며 통신 기술의 매력에 깊이 빠져듭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무선 통신 기기를 직접 조립하고 실험합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소니의 통신 기기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직접 만든 수신기로 먼 곳의 신호를 잡았을 때의 희열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회상했습니다.
이 활동을 통해 전자 회로의 실질적인 작동 원리를 몸소 익혔습니다.
무선 통신은 그에게 세상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1933

[와세다 대학 졸업과 천재의 별명]

와세다 대학 이공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합니다. 재학 시절 '네온의 빛에 의한 런닝 전광판' 등을 발명하여 천재 발명가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사회에 자신의 기술을 선보일 준비를 마칩니다.

그의 졸업 논문은 당시 학계에서도 신선한 충격을 줄 만큼 창의적이었습니다.
이미 대학 시절에 여러 건의 특허 아이디어를 구상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학업 마침표를 찍은 그는 연구소 중심의 기업으로 진출하고자 했습니다.

[P.C.L(사진화학연구소) 입사]

졸업 후 사진화학연구소(P.C.L.)에 입사하여 연구원으로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합니다. 영화 녹음 기기와 영상 기술 연구에 참여하며 실무 감각을 익힙니다. 소리와 영상의 기록 기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됩니다.

입사 초기부터 기존의 녹음 방식을 개선하는 혁신적인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영화 제작 현장의 기술적 어려움을 해결하며 엔지니어로서의 명성을 쌓았습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훗날 소니가 방송 및 음향 기기 시장에 진출하는 뿌리가 되었습니다.

1936

[세키코와의 결혼]

동료들의 축복 속에 세키코와 백년가약을 맺고 가정을 꾸립니다. 안정적인 가정 환경 속에서 연구 활동에 더욱 매진할 수 있는 기반을 얻습니다. 한 여자의 남편이자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성실히 생활합니다.

그녀는 평생 이부카의 곁을 지키며 그의 기술적 열망을 묵묵히 지원했습니다.
바쁜 연구 생활 중에도 아내의 내조 덕분에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결혼 생활은 그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어 더 대담한 발명을 가능케 했습니다.

1937

[파리 만국 박람회 수상]

자신이 개발한 네온 빛 기술로 파리 국제 박람회에서 은상을 수상하며 국제적 인정을 받습니다. 일본의 젊은 엔지니어가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자랑스러운 순간입니다. 이 수상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기술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당시 박람회에 출품된 그의 작품은 독창적인 발광 방식과 설계로 주목받았습니다.
해외 전문가들로부터 '창의적인 엔지니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경험은 그가 훗날 소니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야망을 품게 된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940

[일본 광학음향공업 설립 참여]

상사인 가미야마 다다오가 설립한 일본 광학음향공업에 전무이사로 참여합니다. 회사 경영과 기술 관리를 동시에 경험하며 리더로서의 자질을 기릅니다. 독자적인 사업 운영에 대한 실무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소중한 시기였습니다.

전쟁 물자로서의 광학 기기 개발 업무를 맡아 정밀 기술의 극한을 경험했습니다.
조직을 이끌고 인재를 관리하는 법을 익히며 경영자로서의 안목을 넓혔습니다.
비록 전쟁 중이었지만 기술 개발에 대한 그의 열정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45

[도쿄 통신 연구소 설립]

종전 직후 폐허가 된 도쿄의 시로키야 백화점 내에 도쿄 통신 연구소를 설립합니다. 전쟁의 아픔을 딛고 기술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입니다. 소니의 전신이 되는 이 작은 연구소에서 위대한 역사가 시작됩니다.

단 2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라디오 수리 및 변환기 제작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자본도 기술도 부족했으나 '새로운 것을 만들겠다'는 열정만은 가득했습니다.
이 연구소의 설립은 일본 전후 부흥의 지적인 상징이 되었습니다.

1946

[창업 취지서 작성]

회사의 철학을 담은 '창업 취지서'를 직접 작성하여 직원들과 공유합니다. '기술자가 기술을 즐길 수 있는 이상적인 공장'을 만들겠다는 비전을 선포합니다. 이 문서는 오늘날까지도 소니의 기업 정신을 지탱하는 바이블로 통합니다.

이익 추구에만 몰두하는 일반 기업과 달리 문화적 가치 창출을 목표로 내세웠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단결하여 기술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의 확고한 철학은 우수한 인재들이 소니로 모여들게 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도쿄 통신 공업(소니의 전신) 창업]

모리타 아키오와 함께 자본금 19만 엔으로 도쿄 통신 공업 주식회사를 설립합니다. 이부카는 사장(취임은 1950년)으로서 기술적 혁신을 총괄하기로 합니다. 세계 경제 지도를 바꿀 거대한 기업의 공식적인 출범일입니다.

창업 취지서에서 그는 '자유롭고 활기찬 공장'과 '타사가 하지 않는 기술 개발'을 강조했습니다.
모리타 아키오와는 평생의 동지로서 경영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이날의 창업은 현대 전자 산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전기 밥통 개발의 실패]

생활용품으로 사업을 확장하고자 전기 밥통 개발에 도전하지만 참담한 실패를 겪습니다. 밥이 타거나 설익는 문제로 상용화에 실패하며 기술적 한계를 실감합니다. 이 실패는 훗날 더 정교한 기술 개발에 몰두하게 하는 쓴 약이 되었습니다.

당시 나무통 바닥에 전극을 설치한 조잡한 형태였으나 발상 자체는 혁신적이었습니다.
쌀의 품질과 전력 공급이 불안정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이부카는 이 실패를 통해 '진정한 품질'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1949

[자기 녹음 테이프 시제품 개발]

일본 최초로 자기 녹음 테이프의 시제품을 완성하는 성과를 거둡니다. 미국 제품을 분석하고 창의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독자적인 제조 공정을 확립합니다. 소리를 기록하는 매체의 혁명을 예고하는 순간입니다.

당시 구하기 힘들던 코팅 재료 대신 김을 굽는 기술에서 힌트를 얻어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수천 번의 실험 끝에 소리를 깨끗하게 담아내는 코팅 기술을 확보했습니다.
이 개발은 소니가 음향 전문 기업으로 명성을 얻게 되는 핵심 기반이 되었습니다.

1950

[G형 테이프 레코더 출시]

일본 최초의 테이프 레코더인 'G형'을 시장에 선보입니다. 거대한 크기와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관공서와 교육 기관에서 큰 관심을 보입니다. 기록 매체의 패러다임을 바꾼 역사적인 제품으로 기록됩니다.

초기에는 판매가 부진했으나 이부카가 직접 발로 뛰며 제품의 가치를 홍보했습니다.
재판소와 학교에서 기록용으로 채택하면서 비로소 사업이 궤도에 올랐습니다.
이 성공으로 회사는 자금력을 확보하고 다음 단계인 트랜지스터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도쿄 통신 공업 사장 취임]

창립 멤버이자 기술의 핵심이었던 그가 도쿄 통신 공업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정식 취임합니다. 본격적인 경영 전면에 나서서 회사의 비전과 기술 로드맵을 지휘합니다. 경영과 기술의 결합을 통해 소니의 황금기를 준비합니다.

그는 사장이 된 후에도 연구실을 떠나지 않고 직원들과 함께 고민했습니다.
기술적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해결사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소니는 도전적인 조직 문화를 확고히 다졌습니다.

1952

[미국 시찰과 트랜지스터와의 만남]

미국을 시찰하던 중 벨 연구소에서 발명한 트랜지스터를 보고 강렬한 영감을 받습니다. 진공관의 시대가 가고 트랜지스터가 세상을 바꿀 것임을 직감합니다. 소니의 운명을 결정지은 역사적인 시찰이었습니다.

당시 트랜지스터는 군사용이나 특수 목적용으로만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이부카는 이를 민생용 기기, 특히 라디오에 적용하겠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트랜지스터 기술 도입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1953

[트랜지스터 제조권 획득]

미국 웨스턴 일렉트릭(WE)사로부터 트랜지스터 제조 특허 라이선스를 획득합니다. 당시로서는 거액인 계약금을 지불하며 회사의 미래를 건 도박을 시작합니다. 일본 최초의 트랜지스터 생산을 위한 법적, 기술적 토대를 마련합니다.

일본 통산성은 소규모 회사가 감당하기 힘든 기술이라며 처음에는 승인을 거절했습니다.
이부카와 모리타는 정부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결국 승인서를 받아냈습니다.
이 결정은 소니가 글로벌 가전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954

[일본 최초의 트랜지스터 완성]

수많은 실패 끝에 독자적인 기술로 트랜지스터 생산에 성공합니다. 미국 기술을 그대로 복제하는 대신 수율을 높이기 위한 독창적인 제조 공정을 개발했습니다. 일본 전자 산업의 기술 자립을 상징하는 거대한 성취입니다.

이부카는 연구원들에게 '할 수 있다'는 신념을 불어넣으며 매일 현장을 점검했습니다.
생산된 트랜지스터의 품질은 미국 본토의 제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이제 소니는 이를 활용한 세계 최고의 라디오를 만들 준비를 마쳤습니다.

1955

[트랜지스터 라디오 TR-55 출시]

세계 최초 수준의 트랜지스터 라디오인 'TR-55'를 출시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합니다. 전구처럼 뜨거운 진공관 대신 작고 시원한 트랜지스터를 사용하여 휴대성을 극대화했습니다. 소니(SONY)라는 브랜드가 세계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한 제품입니다.

이 제품은 일본 내 시장을 넘어 미국 시장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라디오가 개인용 휴대 기기로 진화하는 역사적 흐름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소니는 이 제품 하나로 세계적인 기술 선도 기업으로 우뚝 섰습니다.

1958

[사명을 소니(SONY)로 변경]

도쿄 통신 공업이라는 어려운 이름 대신 세계 어디서나 부르기 쉬운 '소니'로 사명을 변경합니다. 소리(Sonus)와 귀여운 아이(Sonny)의 의미를 담아 글로벌 브랜드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합니다. 이부카와 모리타의 천재적인 마케팅 감각이 빛난 결정입니다.

당시 일본 기업이 영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은행 등 외부에서는 강력히 반대했으나 이부카는 세계 시장 진출을 위해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사명 변경 이후 소니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브랜드로 급성장했습니다.

1960

[세계 최초 트랜지스터 TV 개발]

라디오에 이어 텔레비전에도 트랜지스터를 적용하여 세계 최초의 휴대용 TV 'TV8-301'을 출시합니다. 거대한 가구였던 TV를 야외에서도 볼 수 있는 크기로 줄인 혁신적인 시도였습니다. 소니의 소형화 기술력을 다시 한번 입증한 쾌거입니다.

내구성과 화면 선명도 문제로 초기 개발 과정에서 고전했으나 이부카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제품은 기술적 상징성은 컸으나 고가여서 상업적으로는 후속작들에게 길을 터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소니의 기술적 자부심이 세계에 다시금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남수포장(Blue Ribbon Medal) 수상]

산업 발전과 기술 혁신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남수포장을 수상합니다. 국가 경제 부흥의 주역으로서 공식적인 예우를 받은 것입니다. 개인의 영예를 넘어 소니의 모든 기술자에게 보내는 찬사였습니다.

전후 일본의 기술력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업적이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시상식에서 그는 기술 개발이 곧 애국의 길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이 수상 이후 그는 더 큰 책임감을 느끼고 사회적 공헌 활동을 구상하게 됩니다.

1961

[미국 소니 주식 상장]

일본 기업 최초로 미국 시장(뉴욕 ADR)에 주식을 상장하며 글로벌 자본력을 확보합니다. 소니의 투명한 경영과 뛰어난 기술력이 세계 금융의 심장부에서 인정받은 것입니다. 글로벌 경영의 선구자적인 행보로 평가받습니다.

모리타 아키오가 현지 마케팅과 상장을 주도했고 이부카는 기술적 뒷받침을 완료했습니다.
이 상장을 통해 소니는 막대한 연구 개발 자금을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니는 이제 단순한 일본 회사가 아닌 전 세계의 회사가 되었습니다.

1964

[트리니트론(Trinitron) TV 개발 착수]

기존의 컬러 TV보다 훨씬 밝고 선명한 영상을 구현하기 위해 독자적인 방식인 '트리니트론' 개발에 돌입합니다. 미국 기업들의 방식을 거부하고 소니만의 고유한 기술을 고집한 무모해 보였던 도전이었습니다. 수년간의 고난 끝에 기술적 완성을 이룹니다.

초기에는 수율이 너무 낮아 회사의 경영이 위험해질 정도의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직원들은 지쳐갔으나 이부카는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며 직접 연구원들을 격려했습니다.
결국 1968년 세계 최강의 컬러 TV 트리니트론이 탄생하며 시장을 평정했습니다.

1966

[유아 개발 협회 설립]

어린이의 무한한 가능성을 연구하기 위해 유아 개발 협회를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취임합니다. 기술 개발만큼이나 인재 육성이 중요함을 깨닫고 교육 분야에 헌신하기 시작합니다. 훗날 '유아 교육의 권위자'로 불리게 된 시발점입니다.

그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지능 발달의 핵심 시기인 영유아기의 적절한 자극이 인류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저서들은 전 세계 부모들에게 베스트셀러가 되며 교육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67

[IEEE Founders Medal 수상]

세계 전기전자공학회(IEEE)로부터 창립자 메달을 수상하며 세계 최고의 공학자로 공인받습니다. 일본인 최초의 수상으로 국제 무대에서 소니 기술의 위상을 증명했습니다. 그의 혁신적인 설계와 창의적 발명이 결실을 맺은 결과입니다.

라디오와 TV 기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결정적인 선정 사유였습니다.
이 상은 당시 전 세계 공학도들에게 가장 영예로운 상 중 하나였습니다.
이부카는 수상 소감에서 기술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1968

[트리니트론 컬러 TV 성공적 출시]

오랜 연구 끝에 완성된 트리니트론 컬러 TV 'KV-1310'을 시장에 내놓습니다. 타사 제품을 압도하는 화질로 출시와 동시에 컬러 TV 시장의 표준을 바꿉니다. 소니의 경영 위기를 일거에 해소하고 막대한 수익을 창출한 효자 제품입니다.

이 기술은 이후 30년 넘게 소니 TV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원천 기술이 되었습니다.
이부카는 이 제품의 성공을 통해 '독창적 기술만이 살길'이라는 신념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전 세계 가정의 거실에 소니 TV가 배치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9

[영국 왕실 예술 협회 벤저민 프랭클린 메달 수상]

과학과 산업의 융합에 기여한 공로로 영국 왕실 예술 협회로부터 명예로운 메달을 받습니다. 서구권에서도 그의 기술 철학이 깊은 공감을 얻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국제적인 문화 사절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수행했습니다.

그는 과학 기술이 단순한 도구를 넘어 예술적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수상을 통해 영국 학계와도 긴밀한 유대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그의 명성은 이제 아시아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1970

[오사카 만국 박람회 자문]

1970년 개최된 오사카 만국 박람회(EXPO '70)의 기술 및 전시 자문으로 활동합니다. 일본의 발전된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대규모 행사의 밑그림을 그립니다. 소니의 혁신적인 전시관을 통해 미래 사회의 모습을 제시했습니다.

멀티 스크린 영상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영상 기술을 전시관에 도입했습니다.
관람객들에게 기술이 주는 즐거움을 선사하며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일본의 전후 부흥이 완성되었음을 상징하는 행사의 중심에 그가 있었습니다.

1971

[소니 회장(Chairman) 취임]

사장에서 회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소니의 중장기 전략과 사회적 공헌 활동에 집중합니다. 일상적인 경영은 모리타 아키오 사장에게 맡기고 자신은 더 넓은 시야에서 회사를 이끕니다. 소니의 리더십 교체를 통해 조직의 역동성을 유지합니다.

그는 회장이 된 후에도 연구소의 젊은 기술자들을 정기적으로 만나 조언했습니다.
기술의 본질과 인간의 필요를 연결하는 철학적 멘토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회장 취임 이후 소니는 더욱 공격적인 글로벌 확장을 지속했습니다.

1972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상]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 및 경제 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오피시에)을 받습니다. 세계적인 기업가로서 국격 상승에 이바지한 점을 높게 평가받은 것입니다. 프랑스 대중들에게도 친숙한 일본의 지식인으로 각인되었습니다.

기술을 통해 동서양의 장벽을 허문 인도주의적 기업가로 칭송받았습니다.
그는 훈장을 받은 후 프랑스의 예술적 감성을 소니 제품 디자인에 접목하려 노력했습니다.
국제적인 훈장 수여는 소니의 신뢰도를 더욱 높여주었습니다.

1974

[유아 교육 저서 '유치원에서는 늦다' 발간]

영유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저서 '유치원에서는 늦다'를 발간하여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 만 3세 이전의 뇌 발달이 지능의 기초가 된다는 이론을 대중화했습니다. 만화가나 예술가들도 그의 교육 철학에 깊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이 책은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부모들의 양육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그는 지식 전달보다 올바른 정서적 환경 조성이 교육의 핵심임을 주장했습니다.
기술자가 교육 분야에서 거둔 성취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입니다.

1976

[소니 명예회장 취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소니의 명예회장으로 추대됩니다. 현업에서는 은퇴했지만 회사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영향력을 유지합니다. 남은 생애를 교육, 복지, 과학 진흥 등 사회적 가치 실현에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명예회장 취임식에는 전 세계 정재계 인사들이 모여 그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자유로운 위치에서 자신이 평소 관심을 가졌던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니의 직원들에게는 영원한 '마스터'로서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훈일등 욱일대수장 수상]

일본 최고 권위의 훈장 중 하나인 훈일등 욱일대수장을 수상합니다. 국가 경제 발전과 과학 기술 진흥에 바친 평생의 공로를 국가가 최종적으로 승인한 것입니다. 일본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가 중 한 명으로 공인받았습니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모든 공을 함께 고생한 소니의 동료들에게 돌렸습니다.
훈장 수여 이후에도 그는 권위 의식 없이 낮은 자세로 사회 봉사에 전념했습니다.
이 훈장은 기술 보국(技術報國)을 실천한 그의 삶에 대한 헌사였습니다.

1977

[와세다 대학 명예 박사 학위 수여]

모교인 와세다 대학으로부터 명예 공학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학문적 성취와 산업적 기여를 동시에 달성한 자랑스러운 동문으로서 예우를 받은 것입니다. 후배 공학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학위 수여식 연설에서 '창의적 실패'의 가치를 학생들에게 설파했습니다.
대학 연구소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모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박사 학위는 그의 지적인 성실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1979

[워크맨(Walkman) 개발의 영감 제공]

비행기 안에서 음악을 듣고 싶어 했던 이부카의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얻어 워크맨 개발이 시작됩니다. 무거운 녹음기 대신 재생 전용 소형 음향 기기를 만들어 달라는 그의 요청이 세계적인 히트 상품을 낳았습니다. 기술의 목적이 '즐거움'에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처음에는 녹음 기능이 없는 제품에 대해 부정적 의견이 많았으나 이부카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워크맨은 전 세계 젊은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꾼 문화적 혁명이었습니다.
이 제품의 성공으로 소니는 제2의 도약기를 맞이했습니다.

1982

[일본 보이스카우트 연맹 이사장 취임]

청소년 인성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일본 보이스카우트 연맹의 이사장을 맡습니다. 자연 속에서 협동심과 리더십을 배우는 스카우트 활동의 가치를 전파합니다. 미래 세대의 리더들을 길러내는 데 직접 참여합니다.

그는 아이들이 직접 텐트를 치고 요리를 하며 자립심을 키워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국제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를 유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일본의 보이스카우트 조직은 한층 현대화되었습니다.

1985

[문화공로자 선정]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어 사회적 공헌을 기립니다. 기술을 문화적 가치로 승화시킨 그의 철학이 널리 인정받은 것입니다. 일본의 자부심을 드높인 거장으로서 다시 한번 조명을 받습니다.

단순한 기업 활동을 넘어 국민들의 문화 수준 향상에 기여한 점이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그는 과학과 예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진정한 창의성이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이 선정은 그가 일본 사회의 원로로서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보여줍니다.

1986

[국제 과학 진흥 재단 회장 취임]

순수 과학 기술의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국제 과학 진흥 재단의 회장직을 수행합니다. 기초 과학 분야의 젊은 연구자들에게 장학금과 연구비를 지원합니다. 국가 경쟁력의 근간인 과학 교육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앞장섭니다.

응용 기술만큼이나 기초 과학이 중요하다는 신념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국제적인 과학 심포지엄을 주최하며 학문적 교류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이 재단은 훗날 일본이 과학 강국으로 유지되는 데 소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1987

[일본 발명 협회 회장 임명]

발명가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발명 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일본 발명 협회의 회장으로 취임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사업화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을 강화합니다. 일본 전역에 발명 붐을 일으키는 데 주력합니다.

학생들의 발명 대회를 지원하며 어린 시절부터의 창의 교육을 장려했습니다.
특허권 보호와 기술 이전에 관한 정책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의 리더십 덕분에 일본의 특허 경쟁력은 세계 최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1989

[문화훈장(Order of Culture) 수여]

일본 최고의 영예인 문화훈장을 수여받으며 국가적 보물로 등극합니다. 과학 기술과 교육 분야에서의 탁월한 업적을 일본 천황으로부터 직접 인정받은 것입니다. 평생을 바친 기술 사랑과 인간애가 완성된 순간입니다.

이 훈장은 예술, 과학 등 문화 발전에 현저한 공헌을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상입니다.
기업가 출신으로는 드문 수상으로 그의 학문적 깊이와 사회적 영향력을 증명합니다.
일본 국민들은 그의 수상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를 보냈습니다.

1990

[심장 박동기 삽입 수술]

고령으로 인한 심장 기능 저하로 심장 박동기 삽입 수술을 받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평생 연구해온 전자 기술의 혜택으로 생명을 연장하게 됩니다. 기술이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가장 숭고한 현장을 몸소 체험합니다.

수술 후 그는 '전자기기가 내 몸 안에서 나를 살리고 있다'며 기술에 대한 경외감을 표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가 말년에 보건 의료 기술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불편한 몸이었지만 연구에 대한 열의는 수술 후에도 여전했습니다.

1991

[소니 파생 과학 연구소 설립]

기존 과학의 틀을 벗어난 미지의 영역을 연구하기 위해 소니 내부에 파생 과학 연구소(ESP 연구 등)를 설립합니다. 기(氣)나 초능력 등 비주류 과학에 대한 호기심을 멈추지 않는 도전 정신을 보여줍니다. 노년에도 식지 않는 그의 지적 호기심을 상징합니다.

비록 학계의 논란이 있었으나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 과학의 본질이라 믿었습니다.
연구원들에게 선입견 없이 현상을 관찰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이는 소니가 가진 유연하고 자유로운 연구 문화를 보여주는 단면이었습니다.

1992

[도쿄도 명예도민 선정]

도쿄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도쿄도 명예도민으로 선정됩니다. 소니 본사가 위치한 도쿄와 함께 성장해온 그의 삶을 기리는 상입니다. 지역 사회의 존경받는 어른으로서 그의 위상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습니다.

도쿄의 교육 행정과 문화 시설 확충에 대한 그의 조언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는 도쿄가 세계 최고의 기술 도시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도민들은 그의 소탈하고 인자한 성품을 사랑하며 수상을 축하했습니다.

[훈일등 욱일동화대수장 수상]

욱일장의 최고 등급인 훈일등 욱일동화대수장을 수상하며 훈장 체계의 정점에 오릅니다. 평생에 걸친 국가 헌신과 세계 평화 기여를 총체적으로 보상받은 것입니다. 기업가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명예를 얻었습니다.

이 상은 국가 원수나 그에 준하는 인물들에게 수여되는 특별한 영예입니다.
이부카 마사루라는 이름이 일본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무게감을 보여줍니다.
시상식 이후 그는 더욱 겸허하게 자신의 남은 시간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1993

[휠체어 생활의 시작]

급격한 기력 저하로 인해 이동 시 휠체어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신체적 한계 앞에서도 정신력만은 맑게 유지하며 소니의 주요 회의에 참석합니다. 마지막까지 기술과 회사를 걱정하는 그의 헌신은 많은 직원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휠체어를 타면서도 '더 편안하고 스마트한 휠체어 기술'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자신의 불편함을 기술적 영감으로 승화시키려는 공학자다운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의 휠체어 행보는 역경을 이겨내는 불굴의 의지를 상징했습니다.

1994

[소니 파운더 명예회장 추대]

창업자로서의 특별한 지위를 존중받아 '소니 파운더 명예회장'이라는 고유한 직함을 부여받습니다. 소니의 정신을 상징하는 영원한 리더로서의 위치를 명확히 한 것입니다. 후계 경영진들은 그를 극진히 예우하며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는 이제 경영의 세부 사항보다는 소니가 나아갈 도덕적 방향성을 제시했습니다.
'소니는 항상 꿈을 꾸는 기업이어야 한다'는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 직함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소니의 역사 속에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1997

[거장의 타계]

도쿄 시바우라의 자택에서 심부전으로 향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일본의 기술 거장이자 교육가였던 위대한 인물이 인류에게 수많은 유산을 남기고 잠듭니다. 전 세계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추모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임종 순간까지도 가족들의 곁에서 평온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이했습니다.
소니 본사에는 전 세계에서 보내온 수천 통의 조전과 꽃다발이 쌓였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소니 사장(社葬)으로 엄수되어 수만 명의 조문객이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습니다.

[정삼위(正三位) 추서]

사후 일본 정부로부터 정삼위 관등을 추서받아 국가적 예우를 받습니다. 살아생전의 공로를 기려 최고의 품계를 부여한 것입니다. 그의 가문과 소니에 돌아간 마지막 영예였습니다.

이 품계는 국가에 현저한 공헌을 한 문무관들에게 수여되는 고귀한 등급입니다.
그의 삶이 일본이라는 국가의 품격을 높였음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증한 것입니다.
후손들은 그의 유지를 받들어 과학 진흥과 유아 교육 사업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1998

[추모 전시회 개최]

소니 본사 및 주요 도시에서 이부카 마사루의 삶을 기리는 추모 전시회가 열립니다. 그가 발명한 초기 라디오부터 트리니트론 TV까지 그의 손때 묻은 유품들이 대중에게 공개됩니다. 기술자로서의 집념과 교육가로서의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전시회에는 그가 직접 작성한 창업 취지서 원본이 공개되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스케치와 실험 노트들은 그의 천재성이 노력의 산물이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수십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며 고인의 업적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겼습니다.

2008

2008.04 사후 11년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 프로젝트가 소니 주도로 진행됩니다. '이부카 마사루의 꿈'이라는 주제로 차세대 기술 포럼과 장학 사업이 확대됩니다. 100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그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합니다.

그의 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유아 교육 센터가 개소되었습니다.
소니의 신제품 개발 과정에서 그의 '도전 정신'을 되새기는 캠페인이 열렸습니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이름은 여전히 혁신과 창의성의 아이콘으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2024

2024.01 사후 27년

[현재 진행형인 이부카 정신]

오늘날까지 소니의 기업 문화와 일본의 과학 교육 시스템 속에 그의 영향력이 깊게 뿌리내려 있습니다. 그가 설립한 유아 교육 재단은 여전히 수많은 아이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기술과 인간을 사랑했던 그의 철학은 인공지능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을 줍니다.

소니는 매년 창립기념일에 그의 창업 취지서를 낭독하며 초심을 다집니다.
전 세계 공학도들에게 이부카 마사루는 '불가능을 가능케 한 엔지니어'의 전형으로 불립니다.
그의 삶은 이제 단순한 역사를 넘어 미래를 개척하는 모든 이의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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