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폰다
배우, 사회운동가, 작가, 모델, 피트니스 선구자
최근 수정 시각 : 2026-01-21- 11:13:21
제인 폰다는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배우를 넘어, 시대를 깨우는 양심이자 변화의 아이콘으로 살아왔습니다. 헨리 폰다의 딸로 태어나 화려한 스타덤에 올랐지만, 안주하기보다 베트남 전쟁 반대와 여성주의, 환경 운동의 최전선에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두 번의 아카데미상 수상과 피트니스 열풍의 주역으로서 대중문화를 선도했으며,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기후 위기에 맞서 저항하는 그녀의 삶은 '행동하는 예술가'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치열하고 아름다운 궤적을 보여줍니다.
1937
[폰다 가문의 탄생]
뉴욕 시 요크빌에서 전설적인 배우 헨리 폰다와 사교계 명사 프랜시스 포드 시모어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대중의 시선 속에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본명은 제인 시모어 폰다(Jane Seymour Fonda)이며, 헨리 8세의 세 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아버지 쪽은 이탈리아계 조상을 둔 네덜란드 이민자 가문이며, 어머니 쪽은 영국과 프랑스, 캐나다 혈통이 섞여 있습니다.
동생 피터 폰다 역시 훗날 유명한 배우가 되어 남매가 함께 할리우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1950
[어머니와의 비극적 이별]
불과 12세의 나이에 어머니 프랜시스가 정신병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이 사건은 어린 제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당시 아버지는 심장마비라고 거짓말을 했으나, 제인은 1년 후 잡지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비극은 훗날 그녀가 여성 문제와 심리적 치유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23세 연하의 수잔 블랑샤르와 재혼하며 가정 환경은 더욱 복잡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1954
[첫 무대 경험]
오마하 커뮤니티 플레이하우스에서 아버지와 함께 자선 공연 '컨트리 걸'에 출연하며 처음으로 연기의 세계를 접했습니다. 비록 전문적인 활동은 아니었지만 무대의 매력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헨리 폰다는 딸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무대 경험을 권유했습니다.
바사 대학(Vassar College)에 재학 중이었으나 연기에 대한 갈망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예술을 찾아 떠나게 됩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녀가 보수적인 명문가 자제에서 예술가로 변화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1956
[파리 유학과 예술 탐구]
바사 대학을 중퇴하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6개월간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유럽의 자유로운 문화 속에서 예술적 시야를 넓히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그녀의 세련된 감각과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미술뿐만 아니라 영화와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며 할리우드와는 다른 예술적 깊이를 체험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단순한 '스타의 딸'이 아닌 전문 배우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1958
[리 스트라스버그와의 만남]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전설적인 연기 스승 리 스트라스버그를 만나며 배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진짜 재능이 있다'는 스승의 말 한마디는 그녀가 배우의 길에 투신하는 확신이 되었습니다.
스트라스버그는 그녀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연기 세계를 구축하도록 격려했습니다.
메소드 연기법을 익히며 인물에 깊이 몰입하는 법을 배웠고, 이는 훗날 그녀의 압도적인 연기력의 근간이 됩니다.
제인은 이때를 "지붕이 날아가는 듯한 충격을 받은 순간"이라고 회상했습니다.
1959
[모델 활동과 보그 표지]
배우로 데뷔하기 전 뛰어난 외모와 감각으로 모델로 먼저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패션 잡지 보그(Vogue)의 표지를 두 차례 장식하며 당대의 패션 아이콘으로 부상했습니다.
세련된 스타일과 지적인 이미지로 광고계와 패션계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모델 활동을 통해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법과 대중의 시선을 다루는 법을 익혔습니다.
이후 영화계에 진출했을 때도 그녀의 패션 감각은 항상 화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1960
[브로드웨이 데뷔]
연극 '어느 어린 소녀가 있었네(There Was a Little Girl)'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정식 데뷔했습니다. 탁월한 연기로 단숨에 토니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연극계의 신성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조슈아 로건이 연출한 이 작품에서 제인은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물을 섬세하게 연기했습니다.
데뷔작으로 토니상 후보에 오른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성과였습니다.
이 성공은 그녀가 스크린으로 진출하는 강력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스크린 데뷔작 톨 스토리]
로맨틱 코미디 영화 '톨 스토리(Tall Story)'에 출연하며 영화계에 정식 입성했습니다. 농구 선수를 쫓아다니는 치어리더 역을 맡아 싱그러운 매력을 발산하며 관객들의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브로드웨이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앤서니 퍼킨스와 함께 호흡을 맞췄습니다.
그녀의 스크린 데뷔는 '헨리 폰다의 딸'이라는 수식어를 떼어내고 연기자로서 독립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비평가들은 그녀의 신선한 마스크와 당찬 연기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았습니다.
1962
[골든 글로브 신인상 수상]
영화 '워크 온 더 와일드 사이드'에서 거리의 여인 역을 소화하며 제20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가장 유망한 신인여우상을 수상했습니다. 파격적인 연기 변신으로 대중을 놀라게 했습니다.
기존의 청순한 이미지와는 상반된 캐릭터를 선택하여 연기 스펙트럼을 증명했습니다.
이 작품으로 로렐 어워드 신인상까지 거머쥐며 할리우드의 차세대 주역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비평가들은 그녀가 단순히 외모뿐만 아니라 진지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임을 확신했습니다.
1963
[뉴욕의 일요일 흥행]
코미디 영화 '뉴욕의 일요일(Sunday in New York)'에 출연하여 흥행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당시 뉴스데이는 그녀를 "가장 사랑스럽고 재능 있는 젊은 여배우"라고 극찬했습니다.
순진함과 도발적인 매력을 동시에 갖춘 캐릭터를 맡아 관객들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제인은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보증수표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녀는 단순한 상업 영화를 넘어 더 깊이 있는 드라마에 대한 욕심을 키워나갔습니다.
1964
[프랑스 영화 진출]
'조이 하우스'와 '서클 오브 러브' 등 프랑스 영화에 연이어 출연하며 활동 범위를 유럽으로 넓혔습니다. 특히 '서클 오브 러브'에서 선보인 파격적인 모습은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당시 미국 영화배우로서는 드물게 유럽 영화계에 안착하여 글로벌한 명성을 쌓았습니다.
프랑스어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하며 언어적 재능과 연기 열정을 동시에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기 프랑스 영화계의 귀재 로제 바딤 감독과 만나 예술적, 인간적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1965
[캣 벌루의 메가 히트]
코미디 서부극 '캣 벌루(Cat Ballou)'가 유례없는 흥행을 기록하며 할리우드에서 가장 몸값 높은 스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무법자로 변신한 그녀의 당당한 매력은 시대를 사로잡았습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 5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제인을 전 세계적인 톱스타 반열에 올렸습니다.
단순한 조연이나 연인을 넘어 극을 이끌어가는 여성 주인공의 힘을 증명했습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그녀는 작품 선택에 있어 강력한 주도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로제 바딤과의 결혼]
프랑스의 유명 감독 로제 바딤과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감독과 배우로서 환상적인 호흡을 맞추며 유럽과 할리우드를 잇는 예술가 부부로 주목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파리 근교에서 거주하며 예술적 영감을 공유했습니다.
로제 바딤은 제인의 숨겨진 매력을 발굴하여 '바바렐라'와 같은 독창적인 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이 결혼은 제인이 프랑스 지성 사회와 교류하며 정치적 의식을 깨우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67
[맨발 공원의 로코 퀸]
로버트 레드퍼드와 함께한 '맨발 공원(Barefoot in the Park)'이 평단과 관객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뉴욕 신혼부부의 일상을 위트 있게 그려내며 최고의 로코 스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로버트 레드퍼드와의 환상적인 케미스트리는 훗날 여러 작품에서 이어지는 소중한 인연이 되었습니다.
니일 사이먼의 대본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그녀의 지적인 코미디 감각을 극대화했습니다.
제인은 이 영화를 통해 대중적인 친근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갖춘 배우임을 입증했습니다.
1968
[바바렐라와 섹스 심벌]
SF 영화 '바바렐라(Barbarella)'에 출연하여 60년대를 상징하는 섹스 심벌로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미래에서 온 매혹적인 전사로 분한 그녀의 모습은 대중문화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로제 바딤이 감독한 이 영화는 파격적인 의상과 설정으로 큰 논란과 인기를 동시에 모았습니다.
제인은 이 역할을 통해 자신의 신체적 매력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자신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이러한 이미지를 넘어선 진정한 연기적 성취와 사회적 책임감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1969
[연기 인생의 대전환]
영화 '그들은 말을 쏘았다(They Shoot Horses, Don't They?)'에서 처절한 삶을 사는 여인을 열연하며 평단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뉴욕 비평가 협회상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연기파 배우로 완전히 탈바꿈했습니다.
기존의 섹시하고 화려한 이미지를 완전히 지우고, 대공황 시기의 절망적인 인간 군상을 완벽하게 연기했습니다.
이 작품으로 생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진정한 배우로서의 권위를 획득했습니다.
비평가 폴린 카엘은 그녀를 "70년대를 지배할 유일한 여배우"라고 평가하며 찬사를 보냈습니다.
1970
[공항 체포와 정치적 각성]
클리블랜드 공항에서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훗날 비타민제로 밝혀져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주먹을 쥔 채 찍힌 그녀의 머그샷은 반전 운동과 저항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어 정부의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체포 사건은 오히려 그녀의 정치적 신념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인은 정부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 운동에 투신하기 시작했습니다.
1971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영화 '클루트(Klute)'에서 냉소적인 콜걸 브리 다니엘스 역을 맡아 제4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습니다. 메소드 연기의 정점을 보여주며 당대 최고의 배우임을 입증했습니다.
역할을 위해 실제 성 노동자들과 면담하며 캐릭터를 치밀하게 연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수상 소감에서 정치적 발언을 자제하며 오직 배우로서의 감사를 전해 더욱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 수상을 통해 제인은 흥행 스타와 연기파 배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1972
[하노이 방문과 큰 논란]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하여 북베트남군 대공포 위에 앉아 찍은 사진이 공개되며 미국 전역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노이 제인'이라는 오명과 함께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전쟁의 참상을 알리기 위한 행보였으나 군대와 우익 진영으로부터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수년 후 그녀는 당시 사진 촬영이 경솔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했으나 정치적 신념만큼은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연예인이 사회적 발언을 할 때 감수해야 할 책임과 파장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가 되었습니다.
1973
[톰 헤이든과의 재혼]
정치 활동가 톰 헤이든과 결혼하며 사회 운동가로서의 삶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인도차이나 평화 캠페인을 이끌며 반전 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습니다.
로제 바딤과의 이혼 후 가치관을 공유하는 동반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습니다.
결혼 생활 동안 아들 트로이 개리티를 낳았으며, 훗날 흑인 소녀 메리 윌리엄스를 입양하기도 했습니다.
남편의 정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자신도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1977
[영화 줄리아의 성공]
영화 '줄리아(Julia)'에 출연하여 영국 아카데미(BAFTA)와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휩쓸었습니다. 여성 간의 깊은 우정과 신념을 다룬 이 작품은 평단으로부터 최고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작가 릴리안 헬먼 역을 맡아 지적이면서도 고뇌하는 인간의 내면을 완벽하게 소화했습니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와의 연기 호흡은 여성 영화의 교과서적인 사례로 남았습니다.
이 작품으로 다시 한번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며 제2의 전성기를 활짝 열었습니다.
1978
[두 번째 아카데미 주연상]
베트남 전쟁의 상흔을 다룬 영화 '귀향(Coming Home)'으로 제5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두 번째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경험을 연기에 녹여내어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전쟁 반대 운동을 하던 그녀가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는 인물을 연기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영화 제작에도 깊이 관여하여 작품의 진정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 수상을 통해 제인 폰다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배우 중 한 명으로 공인받았습니다.
1979
[차이나 신드롬의 예언]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다룬 영화 '차이나 신드롬(The China Syndrome)'에 출연하여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웠습니다. 영화 개봉 직후 실제 원전 사고가 발생하며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진실을 쫓는 방송기자 역을 맡아 긴박감 넘치는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실제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와 맞물려 영화의 메시지가 강력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제인은 이 작품으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연기력을 재입증했습니다.
1980
[나인 투 파이브의 대흥행]
오피스 코미디 영화 '나인 투 파이브(9 to 5)'가 메가 히트를 기록하며 흥행 스타로서의 위상을 굳혔습니다. 직장 내 성차별 문제를 유쾌하게 풍자하며 여성 관객들의 큰 공감을 샀습니다.
돌리 파튼, 릴리 톰린과 함께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주며 80년대 코미디의 전형을 만들었습니다.
단순한 웃음을 넘어 노동 환경과 여성 인권이라는 주제를 대중적으로 풀어냈습니다.
이 영화의 주제곡은 오늘날까지도 직장인들의 애창곡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1981
[아버지와 마지막 협업]
영화 '황금 연못(On Golden Pond)'에서 평생의 숙제였던 아버지 헨리 폰다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출연했습니다. 실제 부녀 관계가 투영된 연기는 전 세계인의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을 수 있도록 제인이 직접 제작한 영화입니다.
스크린 속 부녀의 화해는 실제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는 감동적인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으로 제인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부녀의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1982
[피트니스 혁명 시작]
운동 비디오 '제인 폰다의 워크아웃'을 출시하며 전 세계적인 홈 피트니스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배우가 아닌 건강 전도사로서 수많은 여성에게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역대 가장 많이 팔린 VHS 비디오로 기록되며 비디오 매체 대중화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비디오 수익은 모두 사회 운동 기금으로 쓰여 그녀의 신념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22편의 시리즈를 통해 1,7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피트니스 산업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1984
[에미상 여우주연상 수상]
TV 영화 '더 돌메이커(The Dollmaker)'로 제36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스크린을 넘어 안방극장에서도 압도적인 연기력을 인정받은 순간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여성의 강인한 삶을 처절하게 연기했습니다.
연기 인생 최초의 에미상 주연상 수상으로 예술적 외연을 넓혔습니다.
비평가들은 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한 그녀의 또 다른 깊이를 이 작품에서 발견했다고 평했습니다.
1986
[마지막 아카데미 후보작]
영화 '다음 날 아침(The Morning After)'에 출연하여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전직 배우 역을 완벽하게 소화했습니다.
심리 스릴러 장르 속에서 불안하고 파괴적인 인물의 내면을 치밀하게 묘사했습니다.
5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한 미모와 연기적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수상은 못 했으나 그녀의 배우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연기 중 하나로 꼽힙니다.
1990
[은퇴 선언과 휴식기]
영화 '스탠리와 아이리스'를 끝으로 연기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할리우드를 잠시 떠났습니다. 수십 년간 쉴 틈 없이 달려온 삶을 돌아보고 개인적인 삶에 집중하기로 한 결정이었습니다.
당시 할리우드에서의 역할 한계와 결혼 생활 등에 집중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많은 팬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은퇴 소식에 아쉬움을 표했으나 그녀는 확고했습니다.
이후 15년간 그녀는 배우가 아닌 한 인간이자 사회 운동가로서의 삶에 전념하게 됩니다.
1991
[테드 터너와의 세 번째 결혼]
미디어 거물 테드 터너와 결혼하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거대 자본과 사회 운동이 만난 세기의 결합으로 불리며 화려한 인생 3막을 시작했습니다.
결혼 후 조지아주의 농장에서 생활하며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테드 터너의 자선 활동과 환경 보호 운동에 큰 영감을 주고 함께 참여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은 2001년 이혼할 때까지 10년간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이어졌습니다.
2005
[자서전 출간과 솔직한 고백]
자서전 'My Life So Far'를 출간하여 자신의 삶을 가감 없이 대중 앞에 드러냈습니다. 가족사부터 섭식 장애, 정치적 고뇌까지 담아낸 이 책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자신의 삶을 '3막'으로 구분하여 분석하며 독자들에게 깊은 성찰을 선사했습니다.
특히 아버지를 향한 복합적인 감정과 세 번의 결혼에 대한 솔직한 평가는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 책은 수많은 여성에게 나이 듦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여성미디어센터 창립]
글로리아 스타이넘, 로빈 모건과 함께 여성미디어센터(WMC)를 공동 창립했습니다. 미디어 내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높이고 성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습니다.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전달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고 전문가들을 육성했습니다.
현재까지 이사진으로 활동하며 미디어의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할리우드 내 성차별 문제 해결을 위한 가장 영향력 있는 조직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15년 만의 화려한 복귀]
영화 '퍼펙트 웨딩(Monster-in-Law)'으로 15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하여 흥행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여전히 녹슬지 않은 코믹 연기로 대중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제니퍼 로페즈와 함께 고부간의 갈등을 유쾌하게 연기하며 세대 간의 화합을 보여주었습니다.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제인 폰다의 티켓 파워가 건재함을 증명했습니다.
이 복귀를 통해 그녀는 노년의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위상을 정립했습니다.
2007
[칸 영화제 명예 황금종려상]
제60회 칸 영화제에서 영화 예술에 기여한 지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 전 세계 영화인들의 기립 박수 속에 최고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역사상 두 번째로 이 상을 받은 인물로 기록되며 그녀의 예술적 지위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시상식에서 그녀는 영화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유럽 영화계는 그녀의 연기력과 사회적 활동이 결합한 독창적인 커리어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2009
[46년 만의 연극 무대 복귀]
브로드웨이 연극 '33개의 변주곡'에 출연하며 46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왔습니다. 베토벤을 연구하는 학자 역을 맡아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토니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방대한 대사와 복잡한 감정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습니다.
그녀의 복귀 공연은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브로드웨이의 뜨거운 화제가 되었습니다.
관객들은 스크린과는 또 다른 그녀의 숨소리와 떨림을 가까이에서 느끼며 열광했습니다.
2014
[AFI 평생공로상 수상]
제42회 미국영화연구소(AFI)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할리우드 역사에 그 이름을 영원히 새겼습니다. 명실상부한 미국의 살아있는 보물로 공인받은 순간이었습니다.
시상식에는 메릴 스트립 등 수많은 후배 배우가 참석하여 그녀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제인은 수상 소감에서 "완벽함이 아닌 진정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 상은 그녀가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리더로서 걸어온 길을 모두 포괄하는 헌사였습니다.
2015
[그레이스 앤 프랭키의 시작]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그레이스 앤 프랭키'에 출연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노년 여성의 우정과 삶을 위트 있게 그려내어 전 세계 시청자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절친한 동료 릴리 톰린과 다시 호흡을 맞추며 환상적인 듀오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노인의 성과 사랑, 우정이라는 금기시된 주제를 유쾌하고 당당하게 풀어냈습니다.
이 드라마는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오래 방영된 오리지널 시리즈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영화 유스의 압도적 존재감]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영화 '유스(Youth)'에 출연하여 짧지만 강렬한 연기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노화와 예술에 대해 고찰하는 이 작품에서 그녀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냈습니다.
분량은 짧았으나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 연기로 골든 글로브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여전한 연기력을 증명했습니다.
비평가들은 그녀의 등장이 영화 전체의 공기를 바꿔놓았다고 극찬했습니다.
2017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제74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습니다. 로버트 레드퍼드와 함께 수상하여 두 사람의 50년 넘는 우정과 예술적 동행이 더욱 빛났습니다.
두 배우가 주연한 '아워 소울즈 앳 나이트'가 영화제에서 함께 공개되어 감동을 더했습니다.
반세기 동안 영화계를 이끌어온 두 거장에 대한 헌정의 무대였습니다.
제인은 수상 소감에서 여전히 연기할 수 있는 기회에 대한 감사를 전했습니다.
2019
[금요일의 소방 훈련 운동]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워싱턴 D.C.에서 '금요일의 소방 훈련(Fire Drill Fridays)'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80대의 나이에 매주 경찰에 연행되면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레타 툰베리의 활동에 영감을 받아 직접 거리로 나선 행동주의의 극치였습니다.
붉은 코트를 입고 연행되는 그녀의 모습은 기후 운동의 전 세계적인 상징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동료 배우가 그녀의 시위에 동참하며 환경 보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이끌어냈습니다.
2021
[세실 B. 데밀 상 수상]
제78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공로상인 세실 B. 데밀 상을 받았습니다. 예술적 성취뿐만 아니라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리더로서의 공로를 기리는 자리였습니다.
수상 소감에서 할리우드의 다양성과 포용성에 대해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온라인 시상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우아함과 카리스마는 화면을 압도했습니다.
이 상은 그녀가 60년간 쌓아온 모든 커리어를 집대성하는 훈장이었습니다.
2022
[암 투병과 완치 소식]
비호지킨 림프종 진단을 받았으나 투병 끝에 암세포가 사라졌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병마 앞에서도 의연한 태도로 팬들을 안심시키며 생의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치료 중에도 기후 운동을 멈추지 않는 초인적인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완치 판정 후 그녀는 "이것이 내가 기후 운동에 더욱 헌신해야 할 이유"라고 말했습니다.
85세의 나이에 암을 이겨낸 그녀의 건강한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2023
[80 포 브레이디의 열정]
영화 '80 포 브레이디(80 for Brady)'에 출연하여 노년의 우정과 모험을 다시 한번 선보였습니다. 실제 친구들과 같은 편안한 연기로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오르는 저력을 보였습니다.
릴리 톰린, 샐리 필드, 리타 모레노와 함께 출연하여 '할리우드 황금 군단'의 위용을 뽐냈습니다.
미식축구 스타 톰 브래디를 찾아가는 유쾌한 여정을 통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함을 증명했습니다.
이 영화의 성공은 중장년층 관객들을 다시 극장으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25
[SAG 평생공로상 헌정]
미국 배우 조합(SAG)으로부터 평생공로상을 받으며 동료 배우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예술가로 추대되었습니다. 88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그녀의 전설에 경의를 표하는 자리였습니다.
현존하는 최고의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녀의 위대한 유산을 찬양했습니다.
시상식 무대에서 그녀는 후배들에게 배우의 사회적 책임을 잊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 상은 제인 폰다가 할리우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가교임을 상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