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케리

정치인, 외교관, 군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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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리
정치인, 외교관, 군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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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리는 미국의 현대 정치와 외교사를 관통하는 핵심 인물입니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훈장 수훈과 이후 반전 운동가로서의 행보는 그의 삶에 깊은 고뇌와 책임감을 불어넣었습니다. 매사추세츠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을 거쳐 2004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며, 이후 국무장관으로서 이란 핵 협정과 파리 기후 협정이라는 거대한 국제적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공직 생활의 마지막까지 기후 위기 대응에 헌신한 그의 여정은 정의로운 사회와 지속 가능한 지구를 향한 끊임없는 투쟁의 기록입니다.

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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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외교관 가문의 탄생]

콜로라도주 오로라의 피츠시몬스 육군 의료 센터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외교관이자 변호사인 아버지와 사회 활동가인 어머니의 지적인 유산을 이어받았습니다.

존 포브스 케리는 리처드 케리와 로즈마리 포브스 사이에서 네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가톨릭 신자였고 어머니는 성공회 신자였으나, 자녀들은 아버지의 신앙을 따라 가톨릭으로 양육되었습니다.
유명한 포브스 가문의 혈통으로서 풍요로운 문화적 배경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1944

[메사추세츠로의 이주]

아버지가 육군 항공대에서 제대한 후 가족과 함께 매사추세츠주로 이사했습니다.
그로턴과 밀리스를 거치며 미국 동부의 정서를 익히는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케리는 생후 첫해를 매사추세츠주 그로턴에서 보낸 뒤 밀리스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 시기는 그의 아버지가 민간 법률가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이후 워싱턴 D.C.로 이주하기 전까지 매사추세츠는 그의 정서적 고향이 되었습니다.

1950

[워싱턴 정계 입문]

아버지가 해군부 법무국에 임용되면서 워싱턴 D.C.의 조지타운으로 이주했습니다.
미국 정치의 중심지에서 성장하며 국가적 사안에 대한 관심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7세의 나이에 워싱턴 D.C.로 옮겨온 케리는 정계 인사들의 자제들과 교류하며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곧 국무부의 유엔 사무국 외교관으로 임명되어 국제 정치의 일선에서 활동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케리가 훗날 외교와 정치의 길을 걷게 되는 근본적인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1954

[베를린 장벽 너머의 모험]

아버지가 베를린 주재 미국 법무관으로 부임하자 독일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전후 유럽의 냉전 상황을 목격하며 역사와 정치의 실체를 몸소 체험했습니다.

12세였던 케리는 소련 점령 구역을 가로질러 히틀러의 벙커를 방문하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하는 대담함을 보였습니다.
분단된 도시 베를린의 모습은 어린 케리에게 냉전의 긴장감과 외교의 중요성을 각인시켰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베를린에서의 외교 활동을 통해 아들에게 공직자의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1957

[엘리트 교육의 시작]

미국으로 돌아와 명문 기숙학교인 페센든 학교와 세인트 폴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엄격한 교육 환경 속에서 웅변 기술을 익히고 정치적 관심을 구체화했습니다.

케리는 뉴턴의 페센든 학교를 거쳐 콩코드의 세인트 폴 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그는 세인트 폴에서 당시의 현안을 토론하기 위해 '존 위넌트 소사이어티'를 설립했습니다.
이 단체는 현재까지도 학교 내에 존재하며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를 돕는 전통으로 남았습니다.

1960

[로큰롤 밴드 활동]

세인트 폴 학교 재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The Electras'라는 밴드를 결성했습니다.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며 학업 외에도 다양한 예술적 재능을 발산했습니다.

밴드 'The Electras'는 학교 댄스 파티에서 연주하며 동료 학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듬해에는 약 500장의 앨범을 제작하여 학교 내에서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이 앨범은 수십 년이 지난 후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대중에게 다시 공개되었습니다.

1962

[예일 대학교 입학]

명문 예일 대학교에 진학하여 정치학을 전공하며 지적 성장을 이어갔습니다.
대학 생활 동안 토론과 운동 등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리더로서의 자질을 닦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대학에 거주하며 예일 정치 연합의 멤버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그는 축구팀에서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하키와 라크로스 팀에서도 재능을 보였습니다.
또한 비밀 사교 모임인 '해골과 뼈(Skull and Bones)'의 일원이 되어 인맥을 넓혔습니다.

[케네디 대통령과의 만남]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처제인 자넷 오친클로스와 데이트하며 대통령 가족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대통령의 요트에 초대받아 함께 항해하며 미국 최고 지도자의 철학을 엿보았습니다.

케네디 대통령과의 만남은 케리에게 정치적 야망과 영감을 심어준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의 요트 '하니 피츠'에 승선하여 대통령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후 케리는 종종 케네디 대통령의 스타일과 수사법에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965

[최고의 웅변가로 인정]

예일 대학교의 웅변 대회에서 우승하며 텐 아이크 상을 수상했습니다.
미국 외교 정책의 제국주의적 측면을 비판하는 연설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연설에서 "서구 제국주의의 유령이 공산주의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더 큰 공포를 준다"고 주장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고조되던 시기에 나온 이 비판적 연설은 그의 통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지도 교수였던 롤린 오스터바이스는 케리의 논리 정연한 변론술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1966

[예일 대학교 졸업]

정치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며 4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국가를 위한 봉사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군 입대를 결정했습니다.

전체 평점 76점이라는 무난한 성적으로 예일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이 향상되는 모습을 보이며 학문적 끈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졸업 직후 해군 예비역에 입대하며 자신의 운명을 베트남 전쟁으로 이끌었습니다.

[해군 예비역 입대]

졸업을 앞두고 미국 해군 예비역에 입대하며 군 복무를 시작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장교 임관을 위한 훈련에 돌입했습니다.

케리는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의 해군 훈련 센터에서 16주간의 장교 후보생 과정을 이수했습니다.
그는 국가의 부름에 응답하여 최전방에서 봉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이후 그는 1978년까지 해군 예비역 신분을 유지하며 군과의 연을 이어갔습니다.

[해군 소위 임관]

장교 훈련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해군 소위로 정식 임관했습니다.
리더십과 전문 지식을 갖춘 장교로서 실전 배치를 기다리며 준비를 마쳤습니다.

임관 후 그는 유도 미사일 호위함인 USS 그리들리(USS Gridley)호에 배정되었습니다.
전쟁의 한복판으로 나아가기 전, 그는 해상 작전의 기본과 통솔력을 익혔습니다.
이후 그는 자신의 희망에 따라 더욱 위험한 보직인 쾌속정 지휘관을 지망하게 됩니다.

1967

[USS 그리들리호 복무]

USS 그리들리호를 타고 베트남 인근 해역으로 첫 실전 배치를 받았습니다.
해상 감시와 순찰 업무를 수행하며 전쟁의 실상을 목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해안 순찰 업무를 수행하며 베트남 전역의 긴장감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원래는 연안 순찰이라는 비교적 안전한 임무를 생각했으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케리는 더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강 위를 누비는 '스위프트 보트(Swift Boat)' 근무를 신청했습니다.

1968

[쾌속정 지휘관 임명]

강력한 화력을 갖춘 쾌속정(PCF)의 지휘관으로서 베트남의 좁은 수로를 누볐습니다.
적의 매복이 잦은 위험한 환경 속에서 대원들을 이끌고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그가 지휘한 50피트 길이의 알루미늄 보트는 장갑은 얇았으나 속도가 매우 빨랐습니다.
케리는 베트남의 좁은 강줄기를 따라 은밀하게 침투하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했습니다.
이 위험천만한 보직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수많은 무공 훈장과 깊은 상처를 동시에 안겨주었습니다.

[첫 번째 퍼플 하트 수훈]

전투 중 적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어 생애 첫 퍼플 하트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완수하려는 투혼을 보이며 부대원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캄란만 북쪽에서 정찰 임무 중 베트콩의 매복 공격을 받아 왼쪽 팔에 파편 부상을 입었습니다.
케리는 부상 부위의 파편을 제거한 뒤 즉시 전선으로 복귀하는 강인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훈장은 그가 베트남 전선에서 흘린 첫 번째 피의 기록이 되었습니다.

1969

[두 번째 퍼플 하트 수훈]

작전 수행 중 폭발 사고로 다시 부상을 입으며 두 번째 퍼플 하트를 받았습니다.
계속되는 위협 속에서도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며 팀을 이끌었습니다.

보트 인근에서 발생한 수중 폭발로 인해 케리는 왼쪽 다리에 파편 부상을 입었습니다.
당시 그는 적의 사격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대응 사격을 지시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반복된 부상은 베트남 전장의 처절한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은성 무공 훈장의 용기]

적의 매복 공격에 정면으로 맞서 저격수를 직접 추격하여 사살하는 무공을 세웠습니다.
이 과감한 행동으로 미국의 권위 있는 은성 무공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B-40 로켓 공격을 받자 케리는 보트를 해안으로 돌진시켜 저격수가 매복한 곳을 습격했습니다.
그는 도주하는 베트콩을 끝까지 추격하여 직접 사살함으로써 아군의 피해를 막았습니다.
이 사건은 케리의 군 경력에서 가장 화려한 무공으로 남았으며, 훗날 정치적 공격의 표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동료를 구한 동성 무공 훈장]

기뢰 폭발로 물에 빠진 동료 대원을 적의 총탄 속에서 직접 구조해냈습니다.
이 헌신적인 행동으로 브이(V) 표시가 달린 동성 무공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근처 보트의 폭발로 동료 짐 래스만이 물에 빠지자, 케리는 팔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그를 끌어올렸습니다.
당시 해안가에서는 베트콩의 사격이 계속되고 있었으나 케리는 동료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날의 부상으로 그는 세 번째 퍼플 하트 훈장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퍼플 하트 수훈]

동료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세 번째 퍼플 하트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세 차례의 부상 기록에 따라 규정에 의해 전방 전투 지역을 떠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기뢰 폭발의 여파로 부상을 입었음에도 동료를 구조한 그의 행동은 숭고한 희생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미 해군 규정상 세 번의 퍼플 하트를 받은 장교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전방 복무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케리는 이 부상을 끝으로 베트남 전선에서의 현역 복무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1970

[반전 단체 VVAW 가입]

'베트남 반전 참전 용사(VVAW)'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반전 운동에 나섰습니다.
훈장을 받은 참전 용사의 목소리는 미국 사회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약 2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VVAW는 당시 반전 운동의 핵심적인 조직이었습니다.
케리는 참전 용사로서의 정당성을 바탕으로 전쟁의 부당함을 널리 알렸습니다.
그는 닉슨 행정부의 압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평화의 가치를 역설했습니다.

[현역 복무의 마침표]

미 해군 현역 복무를 마치고 예비역으로 전환하며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왔습니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후,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전투 현장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온 케리는 전쟁의 무의미함을 강력하게 느꼈습니다.
그는 전우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졌습니다.
이후 그는 해군 중위 계급을 유지한 채 예비역으로 남았습니다.

[줄리아 손과의 결혼]

전쟁에서 돌아온 후 연인 줄리아 손과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가정을 꾸리며 개인적인 안정을 찾고, 사회 활동가로서의 삶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줄리아 손은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으며 케리의 초기 반전 활동과 정치적 행보를 지원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알렉산드라와 바네사라는 두 딸이 태어났습니다.
이후 1988년 이혼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함께 보냈습니다.

1971

[상원 위원회 증언]

상원 외교 관계 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하여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폭로했습니다.
"실수를 위해 죽어가는 마지막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명연설로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참전 용사들을 대표하여 출석한 케리는 전쟁 범죄와 잘못된 국가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당시 TV 중계를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 증언은 그를 일순간에 전국적인 반전 운동의 지도자로 각인시켰습니다.

[훈장 반납의 대담한 시위]

국회의사당 앞에 설치된 펜스 너머로 자신의 훈장과 리본을 던지며 항의했습니다.
전쟁에 대한 분노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평화를 향한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약 1,000명의 참전 용사들이 동참한 이 시위에서 케리는 훈장을 던지며 울분을 표했습니다.
그는 이 행동이 전쟁에서 희생된 전우들을 위한 마지막 예우라고 설명했습니다.
비록 훗날 정치적 논란이 되었으나, 당시에는 반전 운동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었습니다.

1972

[의회 진출의 좌절]

매사추세츠주 제5선거구에서 연방 하원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습니다.
정치 무대에서의 첫 도전은 쓴맛을 보았지만 유능한 정치인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였습니다.

초기 여론조사에서는 앞서 나갔으나 공화당 후보 폴 크로닌에게 패배했습니다.
그는 국민 건강 보험과 약값 할인 등 진보적인 공약을 내걸고 싸웠습니다.
패배 이후 케리는 법조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위해 잠시 학업에 전념하기로 합니다.

1973

[법학 공부의 시작]

보스턴 칼리지 법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법률 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정치적 좌절을 뒤로하고 내실을 다지며 미래를 설계하는 시기를 보냈습니다.

라디오 토크쇼 호스트와 옹호 단체 활동을 병행하며 고단한 학생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겪은 부당함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 시기의 배움은 훗날 그가 검사와 변호사로 활약하는 강력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1976

[법학 박사 학위 취득]

보스턴 칼리지에서 법학 박사(JD) 학위를 취득하고 법조계에 입문했습니다.
지적 무장을 마친 그는 이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전장으로 나아갔습니다.

학업을 마친 케리는 매사추세츠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공직에 진출하여 실전 법률 경험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케리는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이자 참전 용사, 그리고 법률가라는 완벽한 경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검사로서의 첫걸음]

미들섹스 카운티의 차석 지방검사로 임명되어 형사 정의 실현에 앞장섰습니다.
화이트칼라 범죄와 조직 범죄 소탕에 주력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지방검사 존 드론돌로 밑에서 근무하며 탁월한 수사 및 기소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복잡한 사기 사건들을 해결하며 공직자로서의 청렴함을 인정받았습니다.
법정에서의 날카로운 변론은 그가 훗날 청문회의 달인이 되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1977

[수석 차석 지방검사 승진]

능력을 인정받아 미들섹스 카운티의 수석 차석 지방검사로 승격되었습니다.
지방검찰청의 실질적인 운영을 담당하며 조직 내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드론돌로 검사의 신임을 얻어 검찰청의 행정과 기소 전략 전반을 관장했습니다.
그는 특별 범죄 수사팀을 구성하여 지역 내 고질적인 범죄들을 뿌리 뽑으려 노력했습니다.
공직자로서 실무적 역량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시기였습니다.

1979

[개인 법률 사무소 설립]

검찰을 떠나 동료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내건 법률 사무소를 개업했습니다.
민간 변호사로서 활동하며 사회의 다양한 갈등을 해결하는 경험을 쌓았습니다.

로안 스래고 변호사와 파트너십을 맺고 개인 법률 사무소를 운영했습니다.
또한 TV 평론가와 제과점 공동 창업 등 다방면에서 사회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 시기는 그가 정계로 돌아오기 전 민간 영역의 역동성을 체험한 중요한 휴지기였습니다.

1982

[부지사 경선 승리]

매사추세츠주 부지사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승리하며 정계 복귀의 신호탄을 쐈습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당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었습니다.

에블린 머피 등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29%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는 참전 용사와 검사 출신이라는 강점을 내세워 유권자들의 마음을 샀습니다.
이후 마이클 듀카키스 주지사 후보와 러닝메이트가 되어 본선을 준비했습니다.

1983

[매사추세츠 부지사 취임]

제66대 매사추세츠주 부지사로 취임하며 첫 선출직 공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주지사 위원회를 이끌며 행정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본격적으로 발휘했습니다.

듀카키스 주지사의 신임 아래 연방 정부와의 가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산성비 방지와 같은 환경 문제 해결에 앞장서며 주목을 받았습니다.
주 정부의 실무를 두루 섭렵하며 장차 상원의원으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1984

[상원 의원 당선]

매사추세츠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며 워싱턴 정계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공화당 후보 레이 샤멜을 꺾고 상원에 입성하여 중앙 정치 무대에 데뷔했습니다.

폴 총가스 의원의 은퇴로 비어있던 자리를 놓고 치열한 선거전을 치렀습니다.
예비선거에서 강력한 경쟁자 제임스 섀넌을 누르고 본선에서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케리는 28년 동안 매사추세츠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1985

[상원 의원 임기 시작]

연방 상원의원으로서 공식적인 임기를 시작하며 선서를 마쳤습니다.
외교와 안보, 환경 등 국가적 현안 해결을 위한 의정 활동에 돌입했습니다.

워싱턴 D.C.에서 상원의원으로서의 첫 발을 내디디며 포부를 밝혔습니다.
그는 초선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주요 위원회에 배정되었습니다.
이로써 존 케리는 미국 정계의 핵심 인물로 거듭나는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1987

[이란-콘트라 청문회 주도]

이란-콘트라 스캔들 조사를 위한 청문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정부의 부당한 비밀 공작을 파헤치며 강력한 조사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중앙정보국(CIA)과 콘트라 반군 사이의 불법적인 자금 흐름을 추적했습니다.
또한 마약 거래와 정부 기관의 연루 의혹을 제기하며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했습니다.
이 활동을 통해 케리는 상원 내에서 '진실 추적자'라는 명성을 굳혔습니다.

[DSCC 의장 임명]

민주당 상원 선거 캠페인 위원회(DSCC)의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의 상원 선거 승리를 위해 자금 조달과 전략 수립을 진두지휘했습니다.

로버트 버드 원내대표의 임명으로 당의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국을 누비며 민주당 후보들을 지원하고 선거 자금을 모으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이 자리는 그가 당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중요한 기점이 되었습니다.

1991

[걸프전 참전 결의안 투표]

걸프 전쟁을 승인하는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며 신중한 외교 정책을 주장했습니다.
무력 사용보다는 외교적 해결책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지켰습니다.

참전 용사 출신으로서 전쟁이 가져올 비극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그는 경제 제재가 효과를 발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비록 결의안은 통과되었으나, 그의 평화 지향적 태도는 많은 지지자들에게 각인되었습니다.

1995

[테레사 하인즈와의 재혼]

하인즈 가문의 미망인인 테레사 하인즈와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개인적인 행복을 찾음과 동시에 정치적 활동을 위한 든든한 동반자를 얻었습니다.

테레사 하인즈는 존 하인즈 상원의원의 부인이었으며 방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인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1992년 리우 환경 회의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결혼 이후 테레사는 케리의 정치적 여정에서 가장 강력한 조력자 역할을 했습니다.

2001

[상원 소기업 위원회 의장]

미국 경제의 뿌리인 소기업들을 지원하기 위해 상원 소기업 위원회 의장을 맡았습니다.
소상공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경제 활성화를 위한 법안 제정에 주력했습니다.

그는 소기업들이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세제 혜택과 금융 지원을 강화했습니다.
특히 소수자와 여성 기업가들을 위한 특별 지원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경제 정책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2002

[이라크 전쟁 결의안 찬성]

이라크의 무력 사용을 승인하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당시에는 안보상의 필요성을 이유로 찬성했으나 훗날 가장 뼈아픈 정치적 부담이 되었습니다.

케리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당국의 보고를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실제 무기가 발견되지 않자 자신의 투표를 후회하며 부시 행정부를 비판했습니다.
이 투표 기록은 2004년 대선에서 상대 진영의 끊임없는 공격 소재가 되었습니다.

2003

[대선 출마 공식 선언]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대권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변화와 새로운 리더십을 갈망하는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매사추세츠에서 화려한 출정식을 갖고 전국 캠페인에 돌입했습니다.
참전 용사로서 안보를 강화하고 경제를 회생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이후 그는 치열한 당내 경선을 뚫고 민주당의 유력 후보로 부상했습니다.

2004

[스위프트 보트 논란]

베트남 전쟁 당시의 무공 기록을 비난하는 조직적인 공격에 직면했습니다.
'진실을 위한 스위프트 보트 참전 용사' 단체의 폭로로 선거 운동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상대 진영을 지지하는 이 단체는 케리의 무공이 조작되었다는 허위 주장을 펼쳤습니다.
대부분의 동료 대원들이 케리를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격은 중도층의 민심을 흔들었습니다.
이후 부당한 정치적 공격을 뜻하는 '스위프트보팅(Swiftboating)'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습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로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되었습니다.
전당대회 무대에 올라 "저는 존 케리입니다. 임무 수행을 위해 보고합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보스턴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그는 존 에드워즈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습니다.
참전 용사의 정체성을 강조한 그의 수락 연설은 당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부시 행정부의 정책 실패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정권 교체의 당위성을 설파했습니다.

[대선 패배와 승복]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간발의 차이로 패배했습니다.
결과가 확정된 후 신속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국가의 단합을 호소했습니다.

케리는 선거인단 251명을 확보했으나 부시의 286명에 밀려 낙선했습니다.
오하이오주의 결과가 승패를 갈랐으며, 총 득표율에서도 약 2% 차이로 뒤졌습니다.
패배 후 그는 상원으로 돌아가 자신의 소임을 다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2006

[이라크 발언 논란]

학생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이라크에 갇힐 것"이라고 말해 곤혹을 치렀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하려던 농담이 군 비하 발언으로 비춰져 사과했습니다.

캘리포니아주 파사데나 시티 칼리지에서 강연 중 나온 이 발언은 즉각 정쟁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공화당은 케리가 이라크 참전 장병들을 모욕했다고 공격했습니다.
그는 결국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은 장병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해야 했습니다.

2009

[상원 외교 위원회 의장 취임]

미국 외교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기구인 상원 외교 관계 위원회 의장이 되었습니다.
조 바이든 의장의 뒤를 이어 미국의 대외 정책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바마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그는 정부의 외교 파트너로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 현지를 방문하며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이 자리는 그가 훗날 국무장관으로 발탁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습니다.

2013

[중동 평화 협상 개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직접 평화 협상을 다시 시작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수십 차례 중동을 방문하며 양측의 이견을 조율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교착 상태에 빠졌던 평화 회담을 재개하기 위해 직접 협상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비록 최종 합의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나, 대화를 통한 해결 가능성을 모색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의 끈질긴 셔틀 외교는 전 세계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제68대 국무장관 취임]

힐러리 클린턴의 뒤를 이어 오바마 행정부의 두 번째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상원 동료들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인준을 마치고 미국의 외교 수장이 되었습니다.

상원 인준 투표에서 찬성 94표, 반대 3표라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취임 직후 그는 시리아 내전과 중동 평화 협상 등 난제 해결에 뛰어들었습니다.
참전 용사 출신으로서 '전쟁을 막기 위한 외교'를 자신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이란 핵 합의 틀 도출]

이란의 핵 개발 능력을 억제하기 위한 잠정 합의안을 이끌어냈습니다.
국제 사회와 협력하여 중동의 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첫 단추를 꿰었습니다.

제네바에서 열린 협상에서 '공동행동계획'에 합의하며 핵 갈등 해결의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케리는 신중하면서도 낙관적인 태도로 이란 측과 끈기 있게 대화했습니다.
이는 훗날 완성될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의 든든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2015

[시리아 화학무기 대응]

시리아 구타 지역의 화학무기 공격에 대해 강력한 국제적 규탄을 주도했습니다.
화학무기 제거를 위한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해 무력 충돌의 위기를 외교로 풀었습니다.

케리는 증거 자료를 공개하며 아사드 정권의 비도덕성을 전 세계에 고발했습니다.
이후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합의하여 시리아의 화학무기를 폐기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위기 관리 능력은 다시 한번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란 핵 협정 타결]

수년간의 끈질긴 협상 끝에 역사적인 이란 핵 협정(JCPOA)을 체결했습니다.
대화를 통해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막아낸 현대 외교사의 거대한 승리로 기록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최종 협상에서 이란의 핵 활동 제한과 제재 해제에 합의했습니다.
케리는 협상 중 자전거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지팡이를 짚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 협정은 케리 국무장관 재임 시절 최고의 업적 중 하나로 꼽힙니다.

2016

[파리 기후 협정 서명]

미국을 대표하여 역사적인 파리 기후 변화 협정에 공식 서명했습니다.
자신의 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서명하며 미래 세대를 위한 지구 보호를 약속했습니다.

UN 본부에서 열린 서명식에서 케리는 기후 위기가 인류의 실존적 위협임을 경고했습니다.
그는 협정 체결을 위해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을 설득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손녀와 함께한 서명 장면은 환경 보호를 향한 그의 진심을 담은 명장면으로 남았습니다.

2021

[초대 기후 특사 임명]

조 바이든 행정부의 초대 미국 대통령 직속 기후 특사로 임명되었습니다.
내각 수준의 권한을 가진 특사로서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국제 협력을 주도했습니다.

기후 문제를 국가 안보의 핵심 사안으로 격상시키려는 바이든 대통령의 의지가 담긴 인사였습니다.
케리는 취임 즉시 미국의 파리 협정 복귀를 선언하며 전 세계의 기후 행동을 촉구했습니다.
70대의 나이에도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지구를 구하기 위한 마지막 임무에 나섰습니다.

[미중 기후 협력 선언]

중국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도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공동 선언을 이끌어냈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인류 공동의 과제를 위해 협력할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입니다.

상하이에서 중국 기후 특사 셰전화와 만나 탄소 배출 감축 목표를 논의했습니다.
양국은 정치적 갈등과는 별개로 기후 문제만큼은 긴밀히 소통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케리의 노련한 외교력이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다시 한번 빛을 발했습니다.

2024

[기후 특사직 퇴임]

3년간의 기후 특사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공직에서 물러났습니다.
퇴임 후에는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 캠프를 돕기 위해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기후 특사 재임 기간 동안 20여 개국을 방문하며 강력한 탄소 중립 정책을 이끌어냈습니다.
후임자인 존 포데스타에게 바통을 넘기며 기후 위기 대응의 지속성을 강조했습니다.
수십 년간 이어진 그의 공직 생활은 이로써 화려한 마침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대통령 자유 훈장 수여]

국가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민간인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습니다.
참전 용사부터 국무장관까지 이어진 그의 일생에 대한 국가적 예우였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수여식에서 케리의 끈기 있는 외교적 노력과 애국심을 칭송했습니다.
그는 훈장을 받으며 자신과 함께했던 수많은 공직자들과 전우들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훈장은 존 케리가 미국 역사에 남긴 깊은 족적을 상징하는 영원한 훈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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