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제츠
외교관, 정치인
최근 수정 시각 : 2026-01-19- 17:16:27
양제츠는 상하이의 공장 노동자에서 시작해 중국 외교의 정점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영국 유학파 출신으로 '타이거 양'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젠틀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갖춘 외교관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주미 대사, 외교부장, 국무위원, 그리고 정치국 위원을 거치며 수십 년간 미중 관계의 파고를 직접 넘은 현대 중국 외교의 산증인이자 설계자입니다. 특히 알래스카 회담에서 보여준 강경한 발언은 그의 외교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1950
[상하이에서 태어나다]
중국 상하이시 황푸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술적 조예가 깊은 가정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지적 토대를 쌓았습니다.
양제츠는 1950년 5월 상하이의 평범하지만 교육열이 높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상하이의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며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키웠습니다.
훗날 그가 외교관으로서 보여준 유연함과 국제적 감각은 이 시기 상하이에서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968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상하이 전력계기공장에서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이라는 격동의 시기에 현장에서 땀 흘리며 인내를 배웠습니다.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약 4년 동안 공장에서 기술 노동자로 근무하며 하층민의 삶을 체험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성실함을 보였습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그가 대중의 정서를 이해하고 외교 무대에서 끈기 있게 협상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72
[영국 유학길에 오르다]
중국 외교부의 선발을 받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공장 노동자에서 국가의 인재로 발탁되며 외교관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신중국 수립 이후 서구권으로 파견된 초기 유학생 그룹에 포함되어 영국 바스 대학교와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에서 수학했습니다.
영어 실력뿐만 아니라 서구의 정치 체제와 문화를 깊이 있게 학습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 유학 생활을 통해 그는 국제 사회의 문법을 익힌 엘리트 외교관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아내 러아이메이와의 인연]
외교부 동료이자 평생의 동반자인 러아이메이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외교관 부부로서 서로를 격려하며 험난한 외교의 길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러아이메이 역시 뛰어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남편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영국 유학 시절부터 함께 고난을 극복하며 깊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가정에서의 화목함이 양제츠가 공직 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었습니다.
1975
[외교부 번역실 근무]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외교부 번역실에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국가 지도자들의 통역을 담당하며 최고 수준의 외교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탁월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덩샤오핑 등 중국 최고 지도자들의 전담 통역사로 활약했습니다.
정확하고 품격 있는 번역 실력으로 지도부의 두터운 신임을 얻으며 빠르게 승진 가도를 달렸습니다.
단순한 언어 전달을 넘어 외교적 수사와 맥락을 조율하는 능력을 이때부터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1983
[첫 주미 대사관 부임]
주미 합중국 대사관의 2등 서기관으로 발령받아 미국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미중 관계의 최전선에서 실무 경험을 쌓으며 전문가로 성장했습니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서기관으로서 경제, 정치 등 다양한 분야의 미중 현안을 다뤘습니다.
미국 정계 인사들과 폭넓은 인맥을 쌓으며 미국의 대중국 정책 방향을 정밀하게 분석했습니다.
이후 1등 서기관으로 승진하며 대미 외교의 핵심 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1987
[번역실 부처장 임명]
외교부 번역실의 부처장 겸 처장으로 임명되어 실무 책임을 맡았습니다. 후배 외교관들을 양성하고 국가 공식 문건의 번역 수준을 높였습니다.
미국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외교부 내부의 소통과 문서 작업을 총괄하는 중요 직책을 수행했습니다.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으로 외교 문서의 오류를 잡아내고 공식 입장을 정교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행정 관리 능력까지 보여주며 차세대 외교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1990
[주미 대사관 참사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주미 대사관의 참사관과 공사직을 역임했습니다. 냉전 종식 이후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중국의 이익을 방어했습니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주미 대사관에서 근무하며 미국 정부와의 고위급 채널을 관리했습니다.
천안문 사태 이후 얼어붙었던 미중 관계를 복원하고 경제 협력을 지속하기 위한 막후 협상을 주도했습니다.
미국인들에게 거부감 없는 세련된 매너를 보여주며 '타이거 양'이라는 별칭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1993
[북미대양주국 국장]
외교부 본부의 북미대양주국 국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대미 외교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실질적인 사령탑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중국 외교에서 가장 비중이 큰 대미 관계를 총괄하며 정책 결정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호주 등 대양주 국가들과의 관계 설정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전략적 판단력은 당시 지도부로부터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1995
[외교부 부장조리 승진]
외교부의 차관보급인 부장조리로 승진하며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더 넓은 시야에서 중국의 글로벌 외교 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부장조리 직책에 오르며 외교부 내 초고속 승진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주요 국제 회의에 중국 대표단으로 참석하여 다자 외교 무대에서의 협상력을 증명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중국 외교의 차세대 주역으로서 완벽한 검증을 마쳤습니다.
1998
[외교부 부부장 취임]
48세의 나이로 외교부 부부장(차관)에 임명되었습니다. 중국 역사상 최연소 부부장 중 한 명으로 기록되며 외교 실무의 정점에 다가갔습니다.
대미 관계를 비롯한 핵심 외교 현안을 진두지휘하며 장관을 보좌했습니다.
미중 간의 크고 작은 마찰을 해결하는 해결사로 활동하며 국제 사회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부드러운 외모 속에 감춰진 단호한 외교 원칙으로 '외유내강'형 외교관의 전형을 보여주었습니다.
2001
[제7대 주미 대사 부임]
중국을 대표하여 미국 특명전권대사로 부임했습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시기에 맞춰 미중 관계의 가교 역할을 맡았습니다.
2001년 2월, 역대 최연소 주미 대사로 화려하게 워싱턴에 입성했습니다.
부시 가문과의 오랜 인연을 활용하여 공화당 정부와 긴밀한 소통 채널을 구축했습니다.
미국 정계와 언론을 상대로 중국의 입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뛰어난 홍보관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미중 정찰기 충돌 해결]
하이난섬 인근에서 발생한 미중 정찰기 충돌 사건의 위기 관리를 주도했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외교적 해법을 찾아내며 전쟁의 위험을 막았습니다.
사건 직후 미국 국무부와 밤낮없는 협상을 벌이며 승무원 송환과 사과 문제를 조율했습니다.
양국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실질적인 합의를 끌어내는 고도의 협상 기술을 선보였습니다.
이 사건 해결을 통해 그는 위기 관리 전문가로서의 명성을 전 세계에 입증했습니다.
2002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외교관을 넘어 당내 정치 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당의 핵심 의사결정 기구에 이름을 올리며 정치적 위상이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외교 정책이 당의 노선과 일치하도록 조율하는 브레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차기 외교부장 후보군 중 가장 앞서가는 인물로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2005
[외교부 상무부부장 복귀]
4년간의 주미 대사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본부 상무부부장으로 복귀했습니다. 외교부 내 서열 2위로서 장관직 승계를 위한 마지막 준비를 마쳤습니다.
워싱턴에서의 풍부한 현장 경험을 본부 정책에 녹여내는 데 주력했습니다.
다양한 국가들과의 전략 대화를 주도하며 중국 외교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이 시기 그는 행정 능력과 정책 구상 능력 모두에서 정점에 도달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가족의 사생활 존중]
공직 생활 내내 가족의 사생활을 철저히 보호하며 구설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청렴하고 정직한 공직자의 표상으로서 가족들에게도 엄격한 잣대를 적용했습니다.
슬하에 자녀를 두고 있으나 언론 노출을 극도로 자제하며 평범한 삶을 살도록 배려했습니다.
권력을 이용한 부정한 이득을 멀리하며 주변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의 깨끗한 사생활은 그가 고위직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합니다.
2007
[제10대 외교부장 취임]
중국 외교의 수장인 외교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리자오싱의 뒤를 이어 후진타오 시대의 외교 정책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2007년 4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결정을 통해 정식으로 취임했습니다.
통역사 출신 최초의 외교부장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취임 직후부터 '조화로운 세계'라는 중국의 외교 기치를 전파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중앙위원회 위원 선출]
제17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당내 핵심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며 외교 사령탑으로서의 권위를 확보했습니다.
후보위원을 거쳐 정식 위원이 됨으로써 외교 정책 결정에 대한 발언권이 더욱 커졌습니다.
중국 외교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강조하는 당의 방침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당과 정부를 잇는 핵심 고리 역할을 수행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2008
[외교부장 연임 성공]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외교부장으로 다시 임명되었습니다.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안정적인 외교 환경을 조성하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올림픽 개최를 전후로 쏟아진 국제 사회의 비판과 압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전 세계 지도자들을 베이징으로 불러모으는 대규모 외교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관리했습니다.
중국 국력 신장에 걸맞은 '대국 외교'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2009
[난징대학교 박사 학위]
난징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바쁜 공직 생활 중에도 학문적 깊이를 더하며 지성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외교 현안뿐만 아니라 역사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의 박사 논문은 중국의 외교사와 국제 관계 전략에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학술적 배경은 훗날 그가 논리 정연한 설파로 상대국을 압도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2010
[대미 외교의 철학 정립]
수십 년간의 미국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만의 독자적인 대미 외교 철학을 완성했습니다. 힘의 균형을 중시하면서도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실용주의 노선을 견지했습니다.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장 효과적인 대응 방안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철학은 시진핑 시대 중국 외교의 근간이 되어 대미 협상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는 법을 이론화하고 실천했습니다.
2012
[18차 중앙위원 연임]
제18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선출되었습니다. 시진핑 지도부 출범 이후에도 외교 분야의 핵심 원로로 남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지도 체제 하에서 외교 정책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시진핑 총서기의 외교 구상인 '신형 국제 관계' 수립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습니다.
정부직 은퇴 이후에도 계속될 그의 정치적 여정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2013
[국무위원으로 승진]
외교부장에서 물러나 부총리급인 국무위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외교부를 넘어 범정부 차원의 외교 및 안보 정책을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2013년 3월, 리커창 내각의 핵심 일원으로 합류하며 외교 정책의 최종 조정자 역할을 맡았습니다.
중앙외교공작지도소조의 판공실 주임을 겸임하며 당과 정부의 외교 사안을 통합 관리했습니다.
실무 장관에서 국가 전략가로 직무의 성격이 한 단계 격상된 것입니다.
2015
[남중국해 갈등 조율]
민감한 영유권 분쟁 지역인 남중국해 문제에서 중국의 입장을 대변했습니다. 주변국과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다각도의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과의 협력을 강조하며 평화적인 해결을 모색했습니다.
외부 세력의 개입을 차단하고 당사국 간의 대화를 우선시하는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중국의 영토 주권을 지키면서도 국제 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고난도의 외교를 수행했습니다.
2016
[G20 항저우 정상회의]
중국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의 성공적인 운영을 위해 막후에서 총괄 지휘했습니다. 전 세계 지도자들 사이의 이견을 조율하며 공동 선언문을 이끌어냈습니다.
경제 강국으로서 중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고 글로벌 거버넌스에서의 역할을 확대했습니다.
각국 정상들과의 양자 회담을 촘촘하게 기획하여 실질적인 외교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회의를 통해 중국은 세계 경제의 중심축 중 하나임을 다시금 확인시켰습니다.
2017
[정치국 위원 입성]
제19차 당대회에서 중국 권력의 핵심인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외교관 출신으로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권력 서열 25위 안에 진입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외교 분야 인사가 진입하기 힘들었던 정치국에 입성하며 외교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시진핑 2기 체제에서 '중국 특색 대국 외교'를 진두지휘하는 전권을 부여받았습니다.
명실상부한 중국 외교의 일인자이자 시진핑의 최측근 외교 책사로 공인받았습니다.
2018
[외교공작위 판공실 주임]
중앙외교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직을 계속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당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놓인 중국 외교 시스템의 실질적인 운영자가 되었습니다.
정부 조직인 외교부를 지휘하는 당 기구의 수장으로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미중 무역 전쟁 등 엄중한 대외 환경 속에서 중국의 대응 논리를 설계했습니다.
국가 주권과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전랑 외교'의 전략적 배경을 총괄 조율했습니다.
2019
[일대일로 국제협력 포럼]
시진핑의 핵심 전략인 '일대일로'의 국제적 지지를 확산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참여국들과의 경제 협력 모델을 구체화하고 상생의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인프라 구축을 넘어 문화와 인적 교류까지 아우르는 포괄적인 협력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서구권의 우려 섞인 시각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사업의 정당성을 홍보했습니다.
중국 중심의 새로운 국제 질서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2020
[하와이 고위급 회담]
하와이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비공개 회담을 가졌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극도로 악화된 미중 관계의 돌파구를 모색했습니다.
7시간이 넘는 마라톤 협상을 통해 양국 간의 오해를 불식시키려 노력했습니다.
비록 가시적인 합의는 없었으나 소통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외교적 의미가 컸습니다.
그의 인내심과 협상 전략이 돋보였던 긴박한 순간이었습니다.
2021
[알래스카 설전의 주역]
알래스카에서 열린 미중 고위급 회담에서 미국 대표단을 향해 전례 없는 강경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미국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식으로 대화할 자격이 없다"며 중국의 달라진 위상을 천명했습니다.
모두발언 시간 제한을 어기며 16분간이나 미국의 패권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이 발언은 중국 내에서 애국주의 열풍을 일으키며 그를 '국민 영웅' 반열에 올렸습니다.
부드러운 외교관이었던 그가 '전랑'의 선봉장으로 변모했음을 전 세계에 보여준 상징적 사건입니다.
[취리히 제이크 설리번 회담]
스위스 취리히에서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만나 미중 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했습니다. 알래스카에서의 강경함을 뒤로하고 실무적인 대화 모드로 전환했습니다.
미중 양측의 갈등을 관리하고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가드레일 설치를 논의했습니다.
이 회담은 이후 열린 바이든과 시진핑의 첫 화상 정상회담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강온 양면 전략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의 외교적 노련함이 빛났습니다.
2022
[로마 고위급 대화]
이탈리아 로마에서 제이크 설리번 보좌관과 7시간 동안 격론을 벌였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 중국의 입장과 러시아 지원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미국의 우려를 경청하면서도 중국의 독자적인 대외 정책 노선을 명확히 전달했습니다.
핵심 이익인 타이완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전 세계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중국 외교의 원칙을 차분하게 설파했습니다.
[룩셈부르크 회담]
룩셈부르크에서 다시 한번 제이크 설리번과 만나 미중 관계 정상화를 논의했습니다. 반복되는 만남을 통해 상호 오판의 위험을 줄이는 데 주력했습니다.
양국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대화 채널을 상시 가동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한 경계심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평화 공존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그의 끈질긴 대화 노력은 미중 관계의 파국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습니다.
[정치국 위원 퇴임]
제20차 당대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직을 내려놓으며 세대교체의 길을 열었습니다. 72세의 나이로 권력의 일선에서 물러나 원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정치국 위원에서 물러나며 후배인 왕이에게 외교 사령탑 자리를 넘겨주었습니다.
수십 년간 중국 외교를 지탱해온 거목으로서 명예롭게 퇴장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의 퇴임은 중국 외교의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상징했습니다.
2023
[판공실 주임직 이행]
중앙외교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직을 왕이에게 공식적으로 인계했습니다. 모든 실무 권한을 넘기고 고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습니다.
공식적인 업무 인수인계 과정을 통해 조직의 안정성을 확보했습니다.
그는 퇴임사에서 중국 외교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동료들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로써 그가 반세기 동안 몸담았던 외교 무대의 주인공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공직 생활의 완전한 마감]
전국인민대표대회 정기회의를 끝으로 모든 정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상하이의 공장 노동자에서 시작된 55년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했습니다.
국가와 당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으며 명예로운 은퇴를 맞이했습니다.
은퇴 이후에도 중국 외교 발전을 위한 자문과 원로로서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후배 외교관들에게 끝없는 영감과 교훈을 주는 살아있는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회고록 및 기록 정리]
평생의 외교 경험을 정리하며 후대를 위한 기록 작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미중 관계의 이면과 외교적 비화를 보존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그가 겪은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은 중국 외교 사료로서 엄청난 가치를 지닙니다.
현역 시절의 날카로운 감각을 유지하며 국제 정세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록은 훗날 중국 외교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결정적인 자료가 될 것입니다.
2024
[원로 외교관으로서의 삶]
공식 직함은 없으나 국가의 중요한 외교 결정에 지혜를 보태고 있습니다.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평온한 시간을 보내며 삶의 여유를 즐기고 있습니다.
상하이와 베이징을 오가며 유년 시절 좋아했던 예술 활동과 독서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열리는 원로 모임에 참석하여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는 충심을 보입니다.
치열했던 외교 전쟁터를 떠나 인생의 황혼기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2025
[예술과 서예에 대한 열정]
오랜 취미인 서예와 전통 예술에 몰두하며 정신적인 수양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외교관 시절 보여준 정교함이 붓끝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그의 서예 작품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수준급으로 인정받을 만큼 뛰어납니다.
전통 경극에 대한 조예도 깊어 관련 문화 행사를 후원하며 전통 계승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예술을 통해 내면의 평화를 찾고 삶의 철학을 완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2026
[76세의 건강한 노년]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학술 연구와 저술 활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외교 인생 50년을 돌아보는 방대한 분량의 기록물을 정리 중입니다.
그의 건강 비결은 꾸준한 걷기 운동과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끔씩 후배들의 방문을 받아 외교 현안에 대한 통찰력 있는 조언을 건네기도 합니다.
평생을 국가에 헌신한 위대한 외교관의 품격을 잃지 않고 조용히 삶을 가꾸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