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아 CFC
축구 클럽, 스포츠 구단, 유서 깊은 기관
최근 수정 시각 : 2026-01-15- 17:25:36
제노아 크리켓 앤 풋볼 클럽(Genoa Cricket and Football Club)은 1893년 설립된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축구 구단으로, 이탈리아 축구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창기 영국인들에 의해 창단되어 이탈리아 축구 선수권 대회의 초대 챔피언이 되었으며, 통산 9회의 세리에 A 우승(스쿠데토)과 1회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기록한 명문입니다. 특히 1898년부터 1904년 사이 6차례의 우승을 차지하며 초창기 이탈리아 축구계를 지배했으며, 윌리엄 가버트 감독 하에 현대적인 훈련 시스템을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부침을 겪으며 세리에 B와 C를 오가기도 했으나, 열광적인 팬덤과 '스타디오 루이지 페라리스'라는 상징적인 홈구장을 바탕으로 여전히 이탈리아 축구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습니다. 최근 777 파트너스의 인수를 통해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 제노아 크리켓 앤 애슬레틱 클럽 창단
- 제1회 이탈리아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 이탈리아 클럽 최초의 국제 경기 승리
- 스타디오 디 비아 델 피아노(현 루이지 페라리스) 개장
- 윌리엄 가버트 감독 영입
- 일곱 번째 스쿠데토 우승
- 여덟 번째 스쿠데토 달성 및 무패 우승
- 아홉 번째 스쿠데토 및 '스쿠데토' 패치 도입
- 길레르모 스타빌레 영입
- 코파 이탈리아 초대 및 유일한 우승
- 구단 역사상 최악의 시련: 세리에 C 강등
- 로베르토 프루초의 데뷔
- 리그 4위 및 UEFA컵 진출권 획득
- 안필드의 기적: 리버풀 격파
- 엔리코 프레치오시 구단주 인수
- 승부조작 연루 및 세리에 C1 강제 강등
- 잔 피에로 가스페리니 감독 부임
- 세리에 A 전격 복귀
- 디에고 밀리토의 화려한 귀환
- 777 파트너스의 전격 인수
- 15년 만의 세리에 B 강등
- 알베르토 질라르디노 감독 부임
- 세리에 A 승격 확정 및 금의환향
1893
[제노아 크리켓 앤 애슬레틱 클럽 창단]
이탈리아 제노아 소재 영국 영사관에서 찰스 드 그레이브 셀즈 등 영국인 국외 거주자들에 의해 창단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팀 중 하나로, 초기에는 영국인들만 가입할 수 있는 폐쇄적인 클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찰스 드 그레이브 셀즈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초창기 주된 목적은 크리켓과 육상 경기였습니다.
창단 당시의 공식 명칭은 'Genoa Cricket & Athletic Club'이었으며, 이는 이탈리아 스포츠 역사의 중요한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1896
[제임스 리처드슨 스펜슬리의 합류]
의사이자 축구 애호가였던 제임스 리처드슨 스펜슬리가 클럽에 합류하며 축구 부문의 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스펜슬리는 제노아에 축구 분과를 활성화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주도하에 클럽은 단순한 영국인들의 모임을 넘어 본격적인 경쟁 스포츠로서의 축구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선수이자 감독, 행정가로서 초기 제노아의 기틀을 닦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1897
제임스 리처드슨 스펜슬리의 제안으로 폐쇄적인 영국인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지역 사회와 융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결정을 통해 제노아는 이탈리아인들의 팀으로 거듭나며 대중적인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이탈리아 내 축구 보급과 제노아 클럽의 전력 강화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898
[제1회 이탈리아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토리노에서 열린 역사적인 이탈리아 첫 축구 리그 대회에서 초대 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단 하루 동안 토리노의 벨로드로모 움베르토 1세 경기장에서 열린 대회에서 인테르나치오날레 토리노를 꺾고 우승했습니다.
결승전에서 제임스 스펜슬리가 결승골을 터뜨리며 제노아를 이탈리아 축구사 최초의 왕좌로 이끌었습니다.
이 우승은 오늘날의 세리에 A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프로 축구 리그의 상징적인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1899
[구단 명칭 변경: 제노아 CFC]
기존의 '애슬레틱'이라는 단어를 제외하고 'Genoa Cricket & Football Club'으로 명칭을 공식 변경했습니다.
육상보다는 축구에 더 집중하겠다는 구단의 의지를 담아 명칭을 세련되게 다듬었습니다.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CFC'라는 명칭이 이 시기에 확립되어 전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명칭 변경과 함께 구단은 현대적인 축구 클럽의 행정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 축구 선수권 대회 2연패 달성]
대회 결승에서 인테르나치오날레 토리노를 3-1로 격파하며 두 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습니다.
당시 리그는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제노아는 압도적인 기량을 과시하며 타이틀을 방어했습니다.
이 승리를 통해 제노아는 이탈리아 최강의 팀이라는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켰습니다.
초기 축구 규칙의 정립과 경기 운영 방식에서 제노아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1900
[리그 3연패 및 초대 '코파 델라 카테고리아' 영구 소장]
토리노의 FBC 토리네세를 3-1로 꺾고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리그를 지배했습니다.
3연패를 달성한 팀에게 주어지는 영구 우승컵 소유권을 획득하여 구단의 명예를 드높였습니다.
스펜슬리와 파스퇴르 형제 등 핵심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던 시기입니다.
이로써 제노아는 이탈리아 축구 초창기 100%의 우승 확률을 기록하는 전설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1901
당시 강력한 도전자였던 밀란에게 일격을 당하며 독주 체제가 잠시 주춤했습니다.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 내용 면에서는 이탈리아 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준우승은 구단에 새로운 자극제가 되어 선수들을 다시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02
수비 위주의 탄탄한 전술을 바탕으로 밀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며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우승을 통해 제노아는 다시 한번 리그의 최강자임을 입증했습니다.
당시 전설적인 쿼텟이라 불리는 선수들이 팀의 승리를 주도했습니다.
1903
유벤투스와의 라이벌 관계가 본격화된 시기이며, 제노아는 월등한 기량 차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기 제노아는 이탈리아 축구 전술의 혁신을 이끄는 리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팬들은 쏟아지는 우승 소식에 열광하며 제노아를 '이탈리아의 지배자'라고 칭송했습니다.
[이탈리아 클럽 최초의 국제 경기 승리]
프랑스 니스를 방문하여 FBC 니스를 상대로 3-0 승리를 거두며 이탈리아 축구의 우수성을 해외에 알렸습니다.
이탈리아 팀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 팀과 공식 경기를 치르고 승리한 최초의 사례입니다.
제노아의 국제적인 명성이 높아지면서 유럽 전역에서 친선 경기 제안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승리를 넘어 이탈리아 축구 외교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1904
초기 이탈리아 축구 역사의 7년 중 6년을 제노아가 우승하며 사실상 '제노아 천하'를 완성했습니다.
스펜슬리의 노련한 지도력과 선수들의 완벽한 호흡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입니다.
구단은 이 우승을 끝으로 초창기 절대 강자로서의 역사를 집대성했습니다.
1906
[프랑스 레이싱 클럽 드 프랑스와의 친선전]
당시 프랑스 최강팀 중 하나인 레이싱 클럽 드 프랑스를 제노아로 초청해 국제 경기를 가졌습니다.
제노아 시민들의 엄청난 관심 속에 경기가 열렸으며, 유럽 축구 교류의 장이 마련되었습니다.
비록 경기 결과는 무승부였으나 양국 축구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제노아 구단은 이를 통해 홈구장 현대화와 관중 수용 능력 확대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1908
[외국인 선수 출전 금지 규정 반발 및 대회 기권]
이탈리아 축구 연맹이 외국인 선수의 출전을 금지하는 규정을 발표하자 이에 항의하며 리그 참가를 기권했습니다.
영국인들이 주축이었던 제노아에게 이 규정은 구단의 존립을 위협하는 차별적 조치였습니다.
제노아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우승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출전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연맹이 규정을 완화하게 만드는 압박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1911
[스타디오 디 비아 델 피아노(현 루이지 페라리스) 개장]
제노아 마라시 지역에 현재의 홈구장인 스타디오 루이지 페라리스의 전신인 경기장을 완공하여 개장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현대적인 경기장 중 하나로 손꼽혔으며 약 20,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개장 경기에서 인테르와 맞붙어 성대한 축하 행사를 치렀습니다.
이 경기장은 이후 제노아 CFC의 영원한 집이자 제노바 시의 상징적인 스포츠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1912
가버트 감독은 체계적인 피지컬 훈련과 전술 분석을 도입하여 이탈리아 축구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선수들에게 '미스터(Mister)'라고 불린 최초의 인물로, 이 명칭은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감독을 뜻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가버트의 부임은 제노아가 다시 한번 이탈리아를 지배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가버트 감독의 전술이 빛을 발한 경기로, 원정 경기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완벽한 승리를 따냈습니다.
이 승리는 제노아 선수들에게 강한 자신감을 심어주었으며 리그 선두권으로 치고 나가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양 팀의 경쟁 관계는 이 시기부터 더욱 치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915
[일곱 번째 스쿠데토 우승]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리그가 중단되었으나, 당시 선두였던 제노아에게 전후 연맹이 공식 우승을 선언했습니다.
중단 당시 압도적인 성적으로 북부 리그 결승에 진출해 있었으며, 실력 면에서 이견이 없는 챔피언이었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1919년이 되어서야 우승 타이틀을 정식으로 인정받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이 우승은 전쟁으로 희생된 수많은 제노아 선수들과 구단 관계자들에게 헌정되었습니다.
1922
[렌초 데 베키의 전성기 시작]
'신의 아들'이라 불리던 수비수 렌초 데 베키가 팀의 주장이자 핵심으로 활약하며 수비진을 이끌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기술을 가진 수비수로 평가받았으며, 지능적인 수비로 팀의 무실점 행진을 주도했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제노아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뚫기 힘든 수비 벽을 구축했습니다.
데 베키는 제노아 팬들에게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로 영원히 기억되는 인물입니다.
1923
[여덟 번째 스쿠데토 달성 및 무패 우승]
라치오를 결승에서 꺾고 시즌 내내 단 한 번도 패하지 않는 경이로운 기록으로 우승했습니다.
윌리엄 가버트 감독의 전술적 완성도가 극에 달했던 시즌으로, 공수 양면에서 완벽함을 보였습니다.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무패 우승 기록을 세우며 구단의 위상을 정점에 올렸습니다.
전국적인 찬사가 쏟아졌으며 제노아는 명실상부한 '무적의 팀'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924
[아홉 번째 스쿠데토 및 '스쿠데토' 패치 도입]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초로 유니폼에 챔피언을 상징하는 방패 문양(스쿠데토)을 부착했습니다.
사보이아 왕조를 꺾고 아홉 번째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이는 구단 역사상 마지막 세리에 A 우승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승 팀이 유니폼에 이탈리아 국기 문양의 방패를 다는 전통이 바로 제노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기록은 제노아 구단과 팬들에게 가장 큰 자부심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1925
[조반니 데 프라의 활약과 국가대표 선발]
제노아의 전설적인 골키퍼 조반니 데 프라가 국가대표팀의 주전으로 활약하며 구단의 명성을 높였습니다.
그는 동물적인 반사 신경과 대담함으로 제노아의 골문을 든든하게 지킨 수문장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대표팀이 국제 대회에서 성과를 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제노아 출신 스타였습니다.
팬들은 그를 '마라시의 거미줄'이라고 부르며 그의 활약에 열광했습니다.
1928
[파시스트 정권에 의한 강제 명칭 변경]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의 민족주의 정책에 따라 구단 명칭이 'Genova 1893 Circolo del Calcio'로 변경되었습니다.
영단어 'Genoa'를 이탈리아어인 'Genova'로 강제 수정하는 등 구단의 영국적 뿌리를 지우려 했던 아픈 역사입니다.
구단은 어려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팀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명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17년 동안 유지되었습니다.
1929
[미트로파 컵(Mitropa Cup) 데뷔]
유럽 최초의 클럽 대항전인 미트로파 컵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가하며 국제 무대 경험을 쌓았습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중유럽의 강호들과 맞붙어 이탈리아 축구의 수준을 시험했습니다.
비록 첫 대회에서 우승에는 실패했으나, 클럽의 국제적인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제노아의 세련된 경기 매너는 유럽 축구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1930
당시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던 스타빌레의 영입은 전 유럽 축구계의 큰 화제였습니다.
그는 제노아 유니폼을 입고 폭발적인 득점력을 선보이며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켰습니다.
스타빌레의 영입은 제노아가 글로벌 스타를 보유한 빅클럽임을 입증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33
[홈구장 명칭 변경: 스타디오 루이지 페라리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구단의 영웅적인 주장 루이지 페라리스를 기리기 위해 경기장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선수로서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해 헌신한 그의 희생정신을 영원히 기억하려는 구단의 결정이었습니다.
현재까지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익숙한 '루이지 페라리스'라는 명칭이 이때 확정되었습니다.
경기장 명칭 변경과 함께 대대적인 시설 보수 공사가 진행되어 관중 편의가 향상되었습니다.
1934
절대 강자였던 제노아에게 강등은 구단 운영의 허점을 드러낸 뼈아픈 시련이었습니다.
선수단의 노쇠화와 재정적 어려움이 겹치며 순위 싸움에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강등 직후 구단은 대대적인 개혁과 유소년 선수 육성을 통해 빠른 복귀를 다짐했습니다.
1935
단기적인 시련을 딛고 빠르게 전열을 정비하여 클래스를 입증한 결과입니다.
복귀 과정에서 보여준 화끈한 공격 축구는 팬들의 다시 돌아온 발길을 붙잡았습니다.
이 복귀를 통해 제노아는 다시 한번 상위권 경쟁에 뛰어들 준비를 마쳤습니다.
1937
[코파 이탈리아 초대 및 유일한 우승]
결승전에서 로마를 1-0으로 꺾고 구단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코파 이탈리아 우승컵을 차지했습니다.
피렌체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승리하며 9개의 스쿠데토에 이어 컵대회 타이틀까지 추가했습니다.
이 우승을 통해 제노아는 명실상부한 이탈리아의 '그랜드 슬래머'급 팀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우승 트로피와 함께 선수들은 제노바 시내에서 성대한 카퍼레이드를 펼쳤습니다.
1938
강호들과의 대결에서 밀리지 않는 탄탄한 전력을 유지하며 팬들의 기대를 모았습니다.
전술적인 유연성과 선수들의 투혼이 조화를 이루었던 성공적인 시즌이었습니다.
비록 우승에는 닿지 못했으나, 제노아가 여전히 우승권에 근접한 팀임을 증명했습니다.
1945
[구단 명칭 복구: 제노아 CFC]
제2차 세계 대전 종료 후, 강제로 변경되었던 구단 명칭을 원래의 'Genoa Cricket and Football Club'으로 복구했습니다.
파시즘의 그늘에서 벗어나 구단의 정통성과 영국적 뿌리를 되찾은 상징적인 날입니다.
제노바 시민들은 원래 이름을 되찾은 구단에 열렬한 환호를 보내며 축하했습니다.
이 결정은 전후 구단 재건의 가장 중요한 첫걸음으로 평가받습니다.
1946
전쟁 기간 중 입은 시설 피해를 복구하고 새로운 젊은 인재들을 대거 영입했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극복한 팬들은 다시 경기장을 가득 메우며 팀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이 시기 제노아는 사회 통합의 매개체 역할을 수행하며 지역 사회에 희망을 주었습니다.
1951
전후 혼란기와 맞물려 팀 성적이 급격히 하락하며 맞이한 두 번째 시련이었습니다.
리그 막판까지 이어진 치열한 생존 싸움에서 아쉽게 무너지며 강등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구단 수뇌부는 이를 계기로 장기적인 팀 빌딩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실감했습니다.
1953
승격 과정에서 팀의 단합력이 돋보였으며, 신구 조화가 완벽히 이루어졌습니다.
팬들은 마라시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구단의 복귀를 성대하게 축하했습니다.
복귀한 제노아는 이전보다 더 안정적인 운영을 통해 1부 리그 안착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1958
남미 특유의 유연한 개인기와 정교한 패싱 게임으로 관중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이들의 활약 덕분에 제노아는 중상위권 순위를 유지하며 탄탄한 전력을 과시했습니다.
해외 인재 발굴 시스템이 빛을 발한 성공적인 영입 사례로 꼽힙니다.
1962
[코파 델레 알피(Coppa delle Alpi) 첫 우승]
알프스 인근 국가 클럽들이 참가하는 국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국제 경쟁력을 증명했습니다.
프랑스, 스위스 팀들을 연달아 물리치며 이탈리아 축구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정규 리그 우승은 아니었으나, 오랜만에 거둔 국제 대회 타이틀에 구단 전체가 고무되었습니다.
이 우승은 60년대 제노아의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1964
결승에서 카타니아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컵 대회의 명수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선수들의 집중력과 토너먼트 운영 능력이 돋보였던 대회였습니다.
연속적인 국제 무대 성공은 제노아의 브랜드 가치를 유럽 전역에 알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1970
[구단 역사상 최악의 시련: 세리에 C 강등]
성적 부진과 경영 위기가 겹치며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3부 리그인 세리에 C까지 추락했습니다.
9번의 우승을 차지했던 명문 팀이 3부 리그까지 내려간 것은 이탈리아 축구계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구단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팬들은 오히려 더 끈끈하게 결집하여 팀을 살리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71
바닥을 치고 일어난 구단은 조직력을 재정비하여 승격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3부 리그 시절에도 평균 수만 명의 관중이 몰려 팬들의 변치 않는 사랑을 입증했습니다.
이 승격을 기점으로 제노아는 다시금 명가 재건을 위한 중장기 계획에 착수했습니다.
1973
그는 데뷔 초부터 뛰어난 득점 감각을 선보이며 제노아의 공격진을 이끄는 보배로 떠올랐습니다.
팬들은 그에게 '폭격기'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그의 골 행진에 열광했습니다.
프루초는 훗날 로마로 이적하기 전까지 제노아의 상징적인 스타 플레이어로 활약했습니다.
1976
강력한 공격력과 안정된 수비의 조화를 앞세워 리그를 평정했습니다.
오랜 시간 1부 리그를 기다려온 팬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된 우승이었습니다.
승격 확정 당일 제노바 시내는 팀 컬러인 붉은색과 푸른색 깃발로 뒤덮였습니다.
1981
탄탄한 조직력을 강조하는 실베스트리 감독의 철학이 선수들에게 완벽히 이식된 결과입니다.
이 승격을 통해 제노아는 80년대 초반 세리에 A의 주요 팀으로 다시 부각되었습니다.
구단은 승격과 동시에 전력 보강을 위한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1982
[나폴리전 무승부와 기적적인 생존]
리그 마지막 경기 나폴리 원정에서 극적인 무승부를 거두며 라이벌 AC 밀란을 제치고 1부 리그 잔류에 성공했습니다.
경기 종료 직전 터진 골로 승점을 확보하여 강등을 피한 역사적인 명승부였습니다.
나폴리 팬들과 제노아 팬들 사이의 우호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밀란의 강등과 제노아의 생존이 엇갈리며 이탈리아 축구계에 큰 화제를 낳았습니다.
1985
재정적 안정을 바탕으로 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제노아는 유럽 대항전 진출이라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스피넬리 시대는 구단에 명확한 비전과 성장 동력을 제공한 시기로 평가받습니다.
1989
그는 과학적인 접근과 열정적인 리더십으로 선수들의 잠재력을 끌어냈습니다.
승격 성공 후 그는 제노아 팬들에게 성자와 같은 추앙을 받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 제노아는 세련되면서도 거친 항구 도시 특유의 축구 스타일을 완성했습니다.
1990
[오스발도 바뇰리 감독 부임과 도약]
베로나의 우승을 이끌었던 거장 오스발도 바뇰리 감독이 부임하며 제노아의 현대적 전성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뇰리 감독은 실용적이면서도 강력한 팀 컬러를 구축하여 상위권 팀들을 위협했습니다.
그의 지도 아래 제노아는 전술적으로 가장 완성도 높은 팀 중 하나로 평가받았습니다.
선수들은 감독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매 경기 투혼을 발휘했습니다.
1991
[리그 4위 및 UEFA컵 진출권 획득]
리그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펼치며 4위를 기록,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현대적인 유럽 대항전 진출권을 따냈습니다.
유벤투스, 인테르 등 빅클럽들과 대등하게 경쟁하며 거둔 눈부신 성과입니다.
이 기록은 전후 제노아가 거둔 최고의 성적 중 하나로 팬들에게 큰 자부심을 주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으며 유럽 무대로의 도전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1992
이탈리아 클럽 최초로 안필드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는 역사적인 대기록을 작성했습니다.
토마시 스쿠라비와 카를로스 아길레라의 활약이 돋보인 잊을 수 없는 명승부였습니다.
전 세계 축구 매체들이 제노아의 저력을 집중 보도하며 클럽의 위상이 정점에 올랐습니다.
비록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으나, 유럽 무대에 제노아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습니다.
선수들은 전 유럽의 찬사를 받았으며 구단의 브랜드 가치는 획기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이 4강 기록은 현재까지도 제노아의 가장 화려한 국제 대회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1995
[승부차기 패배로 인한 강등의 아픔]
잔류 결정전 플레이오프에서 파도바와 맞붙어 승부차기 끝에 패하며 세리에 B로 강등되었습니다.
유럽을 호령하던 전성기 직후에 찾아온 갑작스러운 몰락에 팬들은 비통에 잠겼습니다.
단 한 번의 승부차기가 구단의 운명을 바꾼 잔인한 순간으로 기억됩니다.
이 강등 이후 제노아는 약 1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1부 리그 복귀를 위해 고군분투하게 됩니다.
1996
2부 리그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대회에서 우승하며 명가의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웸블리라는 축구의 성지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린 것은 선수들에게 잊지 못할 경험이었습니다.
어려운 시기 팬들에게 희망을 선사한 소중한 우승 기록입니다.
2003
프레치오시 구단주는 부임 직후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팀의 1부 리그 복귀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의 공격적인 경영 방식은 논란과 성과를 동시에 낳으며 제노아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후 약 18년 동안 이어지는 '프레치오시 체제'의 시작점이었습니다.
2005
[승부조작 연루 및 세리에 C1 강제 강등]
세리에 B 우승으로 1부 리그 승격을 앞둔 시점에서 승부조작 사건(카소 제노아)에 휘말려 최하위 강제 강등 징계를 받았습니다.
베네치아와의 경기와 관련된 부정행위가 적발되어 승격이 취소되고 3부 리그로 추락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습니다.
구단과 팬들에게는 역사상 가장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순간으로 기록됩니다.
프레치오시 구단주는 법적 분쟁을 벌였으나 징계는 확정되었고, 팀은 밑바닥에서 재기를 노려야 했습니다.
2006
그는 3-4-3 포메이션을 바탕으로 역동적이고 파괴적인 축구를 제노아에 이식했습니다.
가스페리니 감독은 팀을 짧은 시간 내에 상위권으로 도약시킨 명장으로 추앙받게 됩니다.
그와 함께하는 기간 동안 제노아는 세리에 A에서 가장 매력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팀으로 거듭났습니다.
2007
유벤투스, 나폴리와 함께 역대급 세리에 B 시즌을 치르며 얻어낸 값진 승격이었습니다.
징계와 시련을 딛고 일어선 제노아 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광장에서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 복귀를 통해 제노아는 다시 한번 이탈리아 축구의 중심부로 진입했습니다.
2008
밀리토는 복귀 첫 시즌부터 압도적인 득점력을 과시하며 리그 득점 선두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는 팬들에게 단순한 선수를 넘어 구단의 영웅이자 '일 프린치페(왕자)'로 불렸습니다.
밀리토의 활약에 힘입어 제노아는 강호들을 연파하며 상위권으로 치고 나갔습니다.
2009
밀리토와 티아고 모타라는 핵심 자원들의 맹활약이 뒷받침된 최고의 시즌이었습니다.
리그 챔피언급 경기력을 선보이며 전 유럽에 제노아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비록 두 핵심 선수를 시즌 종료 후 인테르로 보냈으나, 구단은 막대한 이적료 수익을 챙겼습니다.
2012
[라치오전 승리와 극적인 잔류 성공]
시즌 막판까지 이어진 강등 위기 속에서 라치오를 꺾고 승점을 추가해 1부 리그 잔류를 확정했습니다.
관중 난동과 경영진 비판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거둔 투혼의 승리였습니다.
선수들은 팬들의 질타를 뒤로하고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하여 팀의 강등을 막아냈습니다.
이 사건은 구단 운영 방식에 대한 팬들의 본격적인 개혁 요구가 분출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5
[리그 6위 달성 및 유로파 라이선스 거부 파동]
리그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6위를 차지했으나, 행정적 결함으로 UEFA 라이선스 발급이 거부되어 유럽 대항전 진출이 무산되었습니다.
경기장 시설 및 재정 서류 문제로 인해 공들여 쌓은 성적이 무위로 돌아간 안타까운 사건입니다.
대신 7위였던 라이벌 삼프도리아가 진출하게 되자 팬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구단 수뇌부의 무능함이 지적되며 프레치오시 구단주에 대한 사퇴 압박이 거세졌습니다.
2017
유리치 감독은 팀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으며 시즌 초반 선전했으나 기복을 겪었습니다.
선수들에게 극한의 활동량을 요구하는 그의 스타일은 팀의 정체성을 다시 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성적 부진으로 경질과 복귀를 반복하는 파란만장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2019
[피오렌티나전 0-0 무승부와 벼랑 끝 잔류]
리그 최종전에서 피오렌티나와 비기고 타 경기 결과에 따라 간신히 세리에 A 잔류를 확정했습니다.
엠폴리의 패배 덕분에 승점 차이로 강등을 면한 천운이 따랐던 시즌입니다.
경기 내내 이어진 팽팽한 긴장감 속에 제노아 선수들은 육탄 방어로 실점을 막았습니다.
이 사건은 구단 역사상 가장 긴박했던 잔류 드라마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2021
[777 파트너스의 전격 인수]
미국 소재 투자 그룹인 777 파트너스가 엔리코 프레치오시로부터 구단 지분 99.9%를 인수했습니다.
오랜 기간 이어져 온 프레치오시 시대가 막을 내리고 대규모 외국 자본 유입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신임 구단주는 데이터 기반의 현대적 운영과 대대적인 인프라 투자를 약속했습니다.
팬들은 새로운 경영진에 큰 기대를 걸며 구단의 현대화를 환영했습니다.
2022
[15년 만의 세리에 B 강등]
경영진 교체 초기 혼란 속에서 성적 부진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2부 리그로 강등되었습니다.
강등 확정 직후 선수단은 팬들에게 사과하며 빠른 복귀를 다짐했습니다.
경영진은 강등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투자를 멈추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제노아의 위대한 역사를 재건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알베르토 질라르디노 감독 부임]
유소년 팀 감독이었던 월드컵 챔피언 출신 알베르토 질라르디노를 성인 팀 감독으로 전격 승격시켰습니다.
질라르디노 감독 부임 이후 팀은 급격한 상승세를 타며 승격 경쟁의 선두 주자로 나섰습니다.
그는 안정적인 수비 밸런스와 효율적인 공격 전술로 팀을 완벽히 장악했습니다.
선수단에 승리하는 DNA를 다시 심어준 결정적인 지도자 교체였습니다.
2023
[세리에 A 승격 확정 및 금의환향]
아스콜리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리그 종료 2경기를 남기고 1부 리그 승격을 조기에 확정 지었습니다.
강등된 지 단 1년 만에 압도적인 성적으로 복귀하며 명가의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제노바 시내 중심가인 데 페라리 광장은 구단 복귀를 축하하는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질라르디노 감독과 선수들은 팬들의 영웅으로 등극하며 축제의 밤을 보냈습니다.
2024
[현재까지의 행보 및 미래 비전]
세리에 A에서 안정적인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최첨단 훈련 시설 구축과 글로벌 유소년 네트워크 확장을 통해 구단의 미래 가치를 높이고 있습니다.
루이지 페라리스 경기장의 대대적인 리모델링 계획을 수립하여 홈 팬들에게 최상의 관람 환경을 약속했습니다.
이탈리아 축구의 뿌리로서 제노아 CFC는 130년이 넘는 역사를 바탕으로 새로운 100년을 설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