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기 (씨름 선수)

씨름 선수, 대학교수, 방송인, 정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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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기 (씨름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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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씨름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모래판의 황제' 이만기는 스포츠를 넘어 한 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이었습니다. 1983년 초대 천하장사 등극을 시작으로 통산 10회의 천하장사 타이틀을 거머쥐며 씨름판을 평정했으며, 한라급의 체구로 거구들을 제압하는 화려한 기술 씨름은 온 국민을 매료시켰습니다. 은퇴 후에는 학문적 성취를 통해 체육학 박사이자 대학교수로 변신하며 끊임없는 자기 계발의 표본이 되었고, 최근에는 친근한 매력의 방송인으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본 연혁은 모래판에서 시작된 그의 위대한 여정과 학문, 정치, 방송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삶의 기록을 서사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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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이만기 탄생]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신전리에서 훗날 대한민국 씨름의 전설이 될 이만기가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의 사랑 속에서 건강하게 성장하며 남다른 신체 조건과 운동 신경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탄생은 한국 민속 스포츠 역사의 새로운 장을 예고하는 서막이었습니다.

본관은 합천(陜川)이며, 의령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힘이 좋고 운동 신경이 뛰어나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이후 마산으로 전학을 가면서 본격적인 씨름 인생의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1976

[무학국민학교 졸업]

마산 무학국민학교를 졸업하며 어린 시절의 기초 교육을 마무리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처음 샅바를 잡으며 씨름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모래판의 매력을 느끼며 천부적인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28회 졸업생으로, 당시 부족한 씨름부 인원을 채우기 위해 권유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사람이 부족해 시작했으나 점차 상대를 넘기는 기술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본격적인 엘리트 체육인의 길로 들어서는 첫 번째 중요한 단추였습니다.

1979

[마산중학교 졸업]

씨름 명문인 마산중학교를 졸업하며 청소년기 선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중학교 시절 이미 지역 내에서 적수가 없을 정도의 독보적인 실력을 뽐냈습니다. 기술 씨름의 기본을 완성하며 차세대 유망주로 우뚝 섰습니다.

마산중학교 28회 졸업생으로 재학 시절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체구는 크지 않았으나 영리한 기술을 사용하여 거구의 상대들을 제압했습니다.
이 시기의 꾸준한 훈련은 훗날 '씨름판의 테크니션'이라는 별명을 얻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1982

[마산상고 졸업]

마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며 고교 씨름의 최강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신체가 급격히 성장하며 힘과 기술을 완벽하게 겸비하게 되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대학가와 실업팀의 뜨거운 영입 경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마산상업고등학교(현 용마고) 56회 졸업생으로 고교 씨름계를 평정했습니다.
기존의 정적인 씨름에서 벗어나 화려한 들배지기와 뒤집기 등 역동적인 기술을 완성했습니다.
개인전뿐만 아니라 단체전에서도 핵심 전력으로 활동하며 학교의 명예를 드높였습니다.

[경남대학교 입학]

고향의 명문 사학인 경남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하여 대학 선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며 지덕체를 갖춘 스포츠맨으로 성장했습니다. 대학 시절의 훈련은 그를 불세출의 영웅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사범대학 소속으로 입학하여 장차 교수가 될 꿈을 함께 키워나갔습니다.
대학팀 선배들과 경쟁하며 실전 감각을 극대화하고 전술적 깊이를 더했습니다.
경남대학교 씨름부의 전성기를 이끌며 대학 씨름의 위상을 전국적으로 높였습니다.

1983

[가전제품 광고 모델]

인기 스타의 척도인 가전제품 광고 모델로 발탁되어 대중적인 인기를 과시했습니다. 스포츠 스타가 당대 최고의 인기 직업군으로 떠오르는 상징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수려한 외모와 건강한 이미지로 광고계의 블루칩이 되었습니다.

대우전자 '로얄 컬러 TV' 광고에 출연하여 전국적인 화제를 모았습니다.
스포츠 스타가 메인 스트림 광고를 석권한 드문 사례 중 하나였습니다.
이후 수많은 CF에 출연하며 단순한 운동선수를 넘어 연예인급 인기를 누렸습니다.

[제1대 한라장사 등극]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한라급 예선에서 우승하며 첫 장사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한라급의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기술로 체급을 평정했습니다. 훗날 이어질 거대한 전설의 화려한 예고편이었습니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역사적인 첫 민속씨름 대회에서 거둔 성과입니다.
한라급 선수로서 보여준 빠른 몸놀림과 화려한 뒤집기는 관객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이날의 우승으로 '이만기'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처음으로 강하게 각인되었습니다.

[초대 천하장사 등극]

대학생 신분으로 거구의 형님들을 모두 꺾고 역사적인 제1대 천하장사에 올랐습니다. 결승에서 최욱진을 호미걸이로 제압하며 전 국민을 충격과 열광에 빠뜨렸습니다. 씨름이 국민 스포츠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체급 제한이 없는 천하장사 결정전에서 백두급 장사들을 기술로 제압했습니다.
마지막 판에서 전설적인 호미걸이 기술을 성공시키며 승리를 확정 지었습니다.
이 우승은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로 비유되며 거대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제2회 천하장사 석권]

제2회 천하장사 씨름대회에서 다시 정상에 오르며 실력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연승 행진을 이어가며 독보적인 독주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모래판의 새로운 지배자로서 입지를 확고히 다졌습니다.

1회 대회에 이어 연속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천하장사의 위엄을 과시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침착하게 경기를 풀어가는 노련한 경기 운영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이만기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1984

[제4회 천하장사 탈환]

제4회 대회에서 다시 천하장사 자리를 탈환하며 황제의 위용을 뽐냈습니다. 일시적인 부진을 딛고 일어서는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경쟁자들의 거센 추격을 뿌리치고 최정상의 자리를 지켜냈습니다.

3회 대회의 아쉬움을 씻어내고 다시 한번 모래판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기술을 구사하며 상대방의 허점을 찌르는 영리한 플레이가 돋보였습니다.
이 우승으로 통산 세 번째 천하장사 타이틀을 획득하며 기록을 이어갔습니다.

[제6회 천하장사 우승]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제6회 대회에서 우승하며 변함없는 기량을 입증했습니다. 꾸준한 자기 관리와 훈련을 통해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했습니다. 연말 시상식과 각종 매체에서 올해의 스포츠인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겨울의 추위를 녹이는 뜨거운 경기로 관객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습니다.
백두급 선수들과의 힘 대결에서도 밀리지 않는 탄탄한 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통산 네 번째 천하장사 기록을 세우며 전설의 길을 계속해서 걸었습니다.

1985

[제7회 천하장사 등극]

제7회 천하장사 대회에서 정상에 오르며 연속 우승의 기쁨을 맛봤습니다. 그의 기술 씨름은 날이 갈수록 정교해져 상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만기 신드롬'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전성기 시절이었습니다.

결승전에서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보이며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습니다.
전국의 아주머니 팬들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국민 사위로 불렸습니다.
씨름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TV 시청률이 폭등하는 사회적 현상을 만들었습니다.

[현대 씨름단 창단 멤버]

프로 씨름팀인 현대 씨름단의 창단 멤버로 합류하며 본격적인 프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기업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체계적인 선수 관리와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마추어와 프로를 잇는 교두보 역할을 하며 씨름의 산업화에 기여했습니다.

당시 최고 대우를 받으며 현대 씨름단에 입단하여 팀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이후 2016년 해체 전까지 현대 씨름단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습니다.
프로 선수의 위상을 높이고 후배 선수들에게 고액 연봉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1986

[경남대학교 졸업]

경남대학교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하며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바쁜 선수 생활 중에도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은 성실한 학생이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더 넓은 세상을 향한 학문적 도전 의지를 다졌습니다.

체육교육학과 학사 졸업생으로서 미래의 지도자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 거둔 수많은 장사 타이틀은 학교의 명예를 드높인 훈장이었습니다.
졸업 이후에도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여 학문에 대한 열정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제9회 천하장사 제패]

제9회 대회에서 다시 한번 천하장사에 등극하며 불멸의 기록을 써 내려갔습니다. 강력한 라이벌인 이준희, 이봉걸과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거둔 값진 승리였습니다. 장안의 화제였던 '3이(李) 라이벌 전'의 승자로 우뚝 섰습니다.

거인 이봉걸과의 대결은 '다윗과 골리앗'의 실사판으로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기술의 이만기, 힘의 이봉걸, 세련미의 이준희 구도에서 항상 우위를 점했습니다.
통산 여섯 번째 천하장사 타이틀을 거머쥐며 전무후무한 기록에 다가갔습니다.

[제11회 백두장사 우승]

제11회 백두급 대회에서 우승하며 체급별 장사 타이틀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천하장사뿐만 아니라 각 체급에서도 꾸준한 성적을 내며 성실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래판의 모든 부문을 석권하는 진정한 챔피언의 모습이었습니다.

백두장사 18회 기록 중 하나로, 중량급 선수들 사이에서도 기술의 우위를 입증했습니다.
한라급 출신이라는 선입견을 완전히 깨부순 강력한 퍼포먼스였습니다.
이 우승으로 씨름계의 모든 상업적, 명예적 가치를 사실상 독식하게 되었습니다.

1987

[제14회 천하장사 우승]

제14회 천하장사 결정전에서 우승하며 황금기를 구가했습니다. 수많은 도전자들을 물리치며 정상의 자리를 장기 집권했습니다. 그의 경기는 언제나 관객을 몰고 다니는 최고의 보증수표였습니다.

체력적인 부담이 올 수 있는 시기였으나 철저한 자기 관리로 극복해냈습니다.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는 고도의 심리전과 기술이 정점에 달한 해였습니다.
통산 일곱 번째 천하장사 타이틀을 획득하며 씨름의 전설을 만들었습니다.

1988

[제15회 천하장사 석권]

제15회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독주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88 서울 올림픽의 열기와 함께 씨름에 대한 관심도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대한민국 스포츠를 대표하는 얼굴로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국가적 경사가 많았던 해에 국민들에게 승리의 기쁨을 선사했습니다.
모든 경기에서 깨끗한 매너와 투혼을 보여주어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통산 여덟 번째 천하장사 기록을 세우며 전설의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1989

[경남대 대학원 석사]

경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체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문적 깊이를 더했습니다. 씨름 선수들의 기술 사용 실태에 관한 연구로 현장의 경험을 이론화했습니다. 운동선수는 공부를 안 한다는 편견을 깨뜨린 의미 있는 성취였습니다.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실제적인 연구를 진행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논문명은 '씨름선수들의 기술사용 실태에 관한 연구'로 실천적인 내용을 담았습니다.
이 석사 학위는 훗날 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중요한 학문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제18회 천하장사 우승]

제18회 대회에서 우승하며 다시 한번 천하의 주인임을 선포했습니다. 기라성 같은 후배들이 등장하는 시기에도 끄떡없는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세대를 아우르는 씨름의 절대 강자로 평가받았습니다.

노련한 경기 운영과 순간적인 폭발력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통산 아홉 번째 천하장사 타이틀을 획득하며 두 자릿수 우승을 눈앞에 두었습니다.
이 시기 그의 경기 승률은 80%를 훌쩍 넘는 경이로운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1990

[천하장사 10회 대기록]

제21회 천하장사 대회에서 우승하며 마침내 통산 10회 천하장사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했습니다. 씨름 역사상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역을 구축했습니다. 모래판의 황제로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모두 안았습니다.

결승에서 불꽃 튀는 접전 끝에 우승을 차지하며 십장생(十壯生)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그의 10회 우승 기록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전설입니다.
이 우승을 끝으로 그는 후배인 강호동에게 왕좌를 물려주는 운명적인 흐름을 맞이합니다.

[강호동과의 세대교체]

신성 강호동과의 준결승 대결에서 패하며 역사적인 세대교체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강호동의 도발적인 세리머니에 '깝치지 마라'고 일침을 가했던 일화는 지금까지도 회자됩니다. 시대의 영웅들이 모래판에서 충돌한 드라마틱한 사건이었습니다.

절대 강자였던 이만기를 꺾은 강호동의 등장은 씨름계에 큰 충격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긴장감 넘치는 대결은 시청자들에게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이후 이만기는 박수 칠 때 떠나는 지도자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1991

[경남대학교 교수 부임]

은퇴와 동시에 모교인 경남대학교의 체육교육학과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현장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지도자로서 후배 양성에 매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로서의 삶은 그에게 또 다른 성취감을 안겨주었습니다.

20대 후반이라는 파격적인 나이에 대학교수로 임용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학업과 운동을 병행했던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이후 수년간 강단에서 스포츠 철학과 전문 기술을 가르치며 명성을 이어갔습니다.

[한숙희와 결혼]

미모의 신부 한숙희와 결혼식을 올리며 가정을 꾸렸습니다. 6년여의 열애 끝에 맺은 결실로 연예계와 스포츠계의 축복이 쏟아졌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인생의 새로운 막을 올린 기쁜 날이었습니다.

부인 한숙희와는 대학 시절부터 사랑을 키워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결혼 생활 중 남편을 헌신적으로 내조하며 이만기의 제2의 인생을 도왔습니다.
훗날 방송을 통해 부부의 유쾌한 일상을 공개하며 다시 한번 화제가 되었습니다.

[공식 은퇴 선언]

정든 모래판을 떠나 공식 은퇴를 선언하며 화려한 선수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345전 293승 52패라는 경이적인 승률을 남기고 떠나는 영웅의 뒷모습이었습니다. 수많은 팬들의 눈물과 박수 속에 전설이 막을 내렸습니다.

부산사직체육관에서 열린 은퇴식은 국가적인 행사 급으로 치러졌습니다.
천하장사 10회, 백두장사 18회, 한라장사 7회라는 대기록을 훈장으로 남겼습니다.
은퇴 직후 곧바로 모교인 경남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며 제2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1992

[장남 이민범 탄생]

첫째 아들 민범이가 태어나며 아버지가 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가정을 꾸린 후 맞이한 첫 경사로 삶의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를 닮아 건장한 체격으로 자란 장남은 훗날 방송에도 출연했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부성애를 배우고 삶의 가치관이 더욱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족은 그가 겪는 수많은 도전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1994

[차남 이진범 탄생]

둘째 아들 진범이가 태어나면서 네 식구의 단란한 가정을 완성했습니다. 두 아들의 아빠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교수 활동과 사회 활동에 매진했습니다. 집안의 활력소가 된 아이들의 성장은 그에게 큰 행복이었습니다.

두 아들 모두 아버지의 운동 유전자를 물려받아 건강하게 성장했습니다.
가정 내에서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은 훗날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사랑 넘치는 가정환경은 그가 대중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유지하는 원천이었습니다.

[유명 속옷 광고 출연]

부인 한숙희와 함께 속옷 브랜드의 파격적인 광고에 출연했습니다. '아내에게는 저 이만기도 넘어갑니다'라는 명카피로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씨름 선수의 강인함 속에 숨겨진 애처가의 면모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했습니다.

실제 아내와의 동반 출연으로 진정성 있는 유머를 선사했습니다.
이 광고는 당시 최고의 인기 CF 중 하나로 꼽히며 대중적 호감도를 높였습니다.
천하장사가 아내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은 반전 매력으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갔습니다.

1995

[건강 음료 모델 활약]

건강 음료 광고 모델로 활약하며 대중들에게 건강 전도사 이미지를 전파했습니다.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상징하는 인물로 낙점되어 브랜드 가치를 높였습니다. 은퇴 후에도 변함없는 티켓 파워를 보여준 활동이었습니다.

씨름 장사의 활력 있는 모습이 제품의 특징과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각종 지면 광고와 TV 광고를 통해 시청자들과 꾸준히 만났습니다.
방송인으로서 본격적으로 영역을 확장하기 전, 광고계의 총아로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1997

[경남은행 홍보 모델]

고향의 금융기관인 경남은행의 홍보 모델로 선정되어 신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지역 사회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홍보 활동에 적극 임했습니다. 경남 지역민들에게 친숙한 영웅으로서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했습니다.

아내와 함께 동반 출연하여 화목한 가정의 표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은행의 안정성과 이만기의 신뢰감이 시너지를 내어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지역 축제나 행사에도 자주 참여하며 고향 사랑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2001

[인제대학교 교수 부임]

인제대학교 스포츠헬스케어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연구와 교육에 매진했습니다. 풍부한 실전 경험과 박사 학위의 이론을 접목한 강의로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스포츠 산업 인재 양성을 위한 새로운 터전에서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현재까지도 인제대학교에서 후배들을 지도하며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단순한 실기 교육을 넘어 스포츠 경영과 생리학 등 폭넓은 분야를 가르칩니다.
교수 활동을 바탕으로 사회 각계의 자문 위원으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중앙대 체육학 박사 취득]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체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문의 정점에 올랐습니다. 운동 생리학을 전공하여 스포츠 과학자로서 전문성을 공인받았습니다. 끊임없는 자기 계발을 통해 진정한 '박사 장사'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논문명은 '트레드밀 운동부하를 통한 운동선수들의 총항산화 능력 변화 연구'입니다.
매우 전문적인 분야의 연구로 학계의 호평을 받았으며 실무와 이론을 겸비하게 되었습니다.
이 학위는 그가 대학교수로서 롱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2002

[의령군수 출마 시련]

고향인 의령의 군수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며 정치권에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지역 발전을 향한 순수한 열정으로 유세에 나섰으나 고배를 마셨습니다. 정치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인생의 쓴맛을 본 첫 번째 시기였습니다.

전국적인 지명도에도 불구하고 지역 정치의 복잡한 역학 관계를 넘지 못했습니다.
낙선 이후에도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와 관심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경험은 그가 장차 더 큰 정치적 도전을 준비하는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2004

[제17대 총선 낙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원내 진입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정치인으로서의 포부를 펼치려 노력했으나 유권자들의 최종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연이은 낙선은 그에게 깊은 성찰의 시간을 주었습니다.

우리당 후보로 마산 지역에 출마하여 선전했으나 정치적 지형의 변화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선거 과정에서 겪은 수많은 비난과 오해는 그를 인간적으로 더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낙선 후 다시 강단으로 돌아가 본업인 교육 활동에 더욱 집중했습니다.

2006

[김해시장 출마 고배]

지방 선거에서 김해시장 후보로 출마하며 행정가로서의 변신을 꿈꿨습니다. 지역 밀착형 공약을 제시하며 시민들과 소통했으나 당선의 영광은 얻지 못했습니다. 정치 인생의 세 번째 시련을 겪으며 잠시 정계와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소신 있는 정치를 실현하려 했으나 조직력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연이은 선거 패배로 재산상의 손실과 정신적인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이후 그는 방송 활동을 통해 대중과의 접점을 다시 찾기 시작했습니다.

2008

[무릎팍도사 레전드 출연]

MBC '황금어장-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솔직담백한 입담으로 안방극장을 사로잡았습니다. 선수 시절의 비화와 정치 도전의 아픔을 진솔하게 털어놓으며 큰 공감을 얻었습니다. 방송인으로서의 잠재력을 다시금 확인시킨 기념비적인 출연이었습니다.

라이벌 강호동과의 재회로 큰 화제를 모으며 역대급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방송 중 공개된 터질 듯한 종아리 근육은 여전히 '황제'의 위용을 증명했습니다.
이 방송 이후 그는 다시 한번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며 예능계의 러브콜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2009

[우리 돼지 홍보 모델]

국산 돼지고기 홍보 모델로 발탁되어 축산 농가 돕기에 앞장섰습니다. 방송인 현영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유쾌한 광고 영상을 선보였습니다. 친근한 이미지로 우리 농산물 소비 촉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씨름 선수의 보양식 이미지와 돼지고기의 영양가가 잘 어우러진 광고였습니다.
특유의 호탕한 웃음과 건강미로 소비자들에게 제품의 신뢰를 전달했습니다.
이후에도 각종 공익 모델과 홍보 대사로 활동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했습니다.

2011

[골프 브랜드 광고 모델]

스크린 골프 브랜드 모델로 활동하며 중장년층 스포츠 팬들에게 어필했습니다. 씨름 외에도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는 활기찬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트렌디한 스포츠 문화에 합류하며 세련된 이미지를 더했습니다.

골프 실력 또한 수준급인 것으로 알려져 광고의 현실감을 높였습니다.
스포츠 스타로서 건강한 여가 생활의 표본이 되어 브랜드 인지도 상승에 기여했습니다.
변화하는 대중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광고 활동을 성공적으로 이어갔습니다.

2013

[금융 브랜드 홍보 대사]

금융 브랜드의 얼굴로 활약하며 성실하고 듬직한 중년의 멋을 뽐냈습니다. 농가에 뿌리를 둔 기업 이미지와 의령 출신인 이만기의 배경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대중들에게 안정감과 미래 설계를 위한 희망을 전했습니다.

다수의 광고 시리즈에 출연하며 국민 장사다운 듬직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보험의 가치와 장사의 우직함을 연결한 마케팅 전략이 대중에게 주효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신뢰받는 방송인으로서의 브랜드 파워를 더욱 확고히 했습니다.

2014

[백년손님 출연과 인기]

SBS 예능 '자기야-백년손님'에 출연하여 장모님과의 유쾌한 케미를 선보였습니다. '천하장사 사위'로서 쩔쩔매는 인간적인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습니다. 고정 출연을 통해 제2의 예능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장모 최위득 여사와의 티격태격하는 일상은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무대 위에서의 엄격한 모습과는 정반대인 소탈한 모습이 매력 포인트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도 '만기 형님'으로 불리며 친숙해졌습니다.

2016

[총선 재도전과 패배]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며 다시 한번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김해을 지역구에서 뜨거운 지지를 얻었으나 최종 낙선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며 정계를 은퇴하고 본업에 충실하기로 했습니다.

높은 지지율로 당선이 기대되었으나 막판 변수를 이기지 못하고 낙선했습니다.
낙선 인사를 통해 유권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깔끔하게 승복하는 신사도를 보였습니다.
이후 교수 활동과 방송 활동에 전념하며 대중에게 더 큰 즐거움을 주기로 했습니다.

2017

[씨름의 전설 멘토 출연]

씨름 부활을 위한 예능 프로그램에 전설의 멘토로 출연하여 후배들을 격려했습니다. 과거 영광의 순간들을 재현하며 씨름에 대한 대중의 향수를 자극했습니다. 씨름의 저변 확대를 위해 헌신하는 선배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후배 장사들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하며 지도자적 역량을 뽐냈습니다.
씨름의 기술적 아름다움을 방송을 통해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민속 스포츠인 씨름이 다시 젊은 층에게 사랑받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2019

[관절 건강 모델 선정]

관절 건강기능식품 모델로 선정되어 중장년층의 건강 수호자로 활약했습니다. 수십 년간 씨름으로 단련된 무릎과 관절 건강의 상징으로 낙점되었습니다. 진정성 있는 홍보 활동으로 제품의 인기를 크게 끌어올렸습니다.

실제 운동선수로서 겪었던 관절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설득력을 높였습니다.
각종 TV 쇼와 광고를 통해 중장년층 소비자들의 깊은 신뢰를 얻었습니다.
장기 모델로 활동하며 브랜드의 간판 얼굴로 완벽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뭉쳐야 찬다 시즌1 합류]

JTBC '뭉쳐야 찬다'에 창단 멤버로 합류하여 축구에 도전했습니다. 종목을 불문한 전설적인 선수들과 함께 고군분투하며 인간미 넘치는 축구 실력을 선보였습니다. 맏형으로서 팀의 중심을 잡으며 예능 대세로 등극했습니다.

초반에는 축구에 서툰 모습으로 웃음을 주었으나 점차 실력이 향상되었습니다.
다른 전설들과의 우정과 갈등을 리얼하게 보여주며 프로그램 흥행을 견인했습니다.
'만기'와 '안정환' 감독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은 프로그램의 큰 백미였습니다.

2020

[스포츠 명예의 전당 헌액]

대한체육회가 선정한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한국 스포츠 발전에 기여한 지대한 공로를 국가적으로 인정받은 순간이었습니다. 씨름인으로서는 최초이자 최고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역대 전설적인 스포츠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위대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씨름이 단순한 민속 경기를 넘어 현대 스포츠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했습니다.
그의 헌액은 모든 씨름인들에게 자부심과 새로운 희망을 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2021

[뭉쳐야 찬다 시즌2 도전]

'뭉쳐야 찬다' 시즌 2에 참여하여 축구 열정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더욱 강력해진 멤버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베테랑의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끝없는 도전 정신으로 시청자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선사했습니다.

나이를 잊은 투혼과 훈련 모습으로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팀의 고문이자 정신적 지주로서 팀원들을 독려하고 원만하게 이끌었습니다.
방송을 통해 스포츠의 진정한 가치와 삶의 즐거움을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었습니다.

2022

[인제대 스포츠헬스 학과장]

인제대학교에서 학과장을 맡아 행정력과 지도력을 동시에 발휘했습니다. 전문적인 체육 인재 양성을 위한 커리큘럼 혁신에 앞장섰습니다. 교육자로서 안정적인 입지를 다지며 학문적 성과를 꾸준히 쌓아갔습니다.

학생들의 진로 상담과 취업 지원에 직접 나서며 소통하는 교수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지역 사회와 연계한 스포츠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건강 증진 활성화에 기여했습니다.
강의실과 행정실을 오가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교육 사명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2023

[뭉쳐야 찬다 시즌3 합류]

세계 무대로 진출하는 '뭉쳐야 찬다' 시즌 3에 합류하여 글로벌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 스포츠 영웅의 자부심을 가지고 해외 팀들과 경기를 펼쳤습니다. 변치 않는 스포츠 정신으로 한국 씨름 선수의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해외 원정 경기에서도 맏형다운 카리스마로 팀의 분위기를 주도하며 리드했습니다.
현지 팬들과 소통하며 한국의 민속 스포츠와 스포츠 스타를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순의 나이에도 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은 건강한 삶의 가장 좋은 표본이 되었습니다.

2024

[지방시대위원회 위원 위촉]

대통령 직속 지방시대위원회의 위촉위원으로 발탁되어 국가 정책에 참여했습니다. 지역 불균형 해소와 스포츠를 통한 지역 활성화에 대한 고견을 제시했습니다. 스포츠 영웅을 넘어 정책 전문가로서 활동 범위를 넓혔습니다.

자신의 고향 사랑과 지역구 출마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정책 제안을 했습니다.
지방의 체육 문화 인프라 확충과 전문 인재 양성을 위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사회적 영향력을 올바른 곳에 사용하며 국가 발전에 기여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2025

[씨름 40주년 기념 공로패]

민속씨름 40주년을 맞아 열린 기념행사에서 주역으로 참여하여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며 씨름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동료 및 후배들과 함께 씨름의 가치를 재확인했습니다.

기념 인터뷰를 통해 '씨름은 내 인생 그 자체'라는 감동적인 소회를 밝혔습니다.
팬사인회와 특별 강연을 통해 시민들과 직접 소통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살아있는 전설로서 씨름이 영원히 전승되어야 할 우리 민족의 자산임을 강조했습니다.

2026

[인제대학교 정년 퇴임 준비]

수십 년간 몸담았던 강단을 떠날 준비를 하며 교육자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도전과 열정의 가치를 전수하고 있습니다. 퇴임 이후에도 사회 공헌과 방송 활동을 계속할 계획입니다.

제자들의 정성 어린 환송 속에 명예로운 퇴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교육자로서 보낸 시간은 선수 생활만큼이나 소중한 인생의 자부심으로 남았습니다.
앞으로도 스포츠와 교육을 잇는 가교 역할은 멈추지 않고 수행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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