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 카르포프

체스 선수, 그랜드마스터, 세계 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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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12- 10: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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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 카르포프
체스 선수, 그랜드마스터, 세계 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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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 러시아의 전설적인 체스 그랜드마스터이자 세계 챔피언입니다. 4살 때 체스에 입문하여 1975년부터 1985년까지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지키며 체스 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그의 전략적인 플레이와 뛰어난 실력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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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체스 황제의 탄생]

소련 우랄산맥 인근의 즐라토우스트에서 아나톨리 예브겐예비치 카르포프가 태어납니다.

카르포프는 러시아 첼랴빈스크주의 즐라토우스트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노동자 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지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이 아이가 훗날 100개월 넘게 세계 랭킹 1위를 지키는 거장이 될 것임을 당시에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1955

[4세의 첫 체스 입문]

불과 4세의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체스를 배우며 일찍이 재능을 발견합니다.

어린 카르포프는 아버지를 통해 체스의 규칙을 처음 익히게 되었습니다.
또래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 그는 체스 기물들의 움직임에 매료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첫 경험은 그가 평생 체스라는 예술에 헌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0

[1급 체스 플레이어 달성]

9세의 나이에 1급(First-category) 체스 플레이어 등급을 획득하며 신동으로 불립니다.

카르포프는 성인들과의 대결에서도 밀리지 않는 실력을 보여주며 빠르게 등급을 올렸습니다.
9세라는 어린 나이에 1급 플레이어가 된 것은 당시 소련 체스계에서도 드문 일이었습니다.
지역 사회에서는 이미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1962

[후보 마스터 등극]

11세의 나이에 후보 마스터(Candidate Master)가 되며 전문가의 길로 접어듭니다.

전문적인 체스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감각으로 후보 마스터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대국을 통해 포지션 이해도를 높이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이 성공적인 행보는 소련의 체스 교육 시스템이 그를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1963

[보트비닉 체스 학교 입학]

전 세계 챔피언 미하일 보트비닉의 명문 체스 학교에 입학하여 정식 교육을 받습니다.

처음 보트비닉은 카르포프를 보고 '체스에 대한 감이 없고 미래가 없다'는 혹평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카르포프는 성실한 노력으로 스승의 편견을 깨뜨리고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최고의 교육 환경 속에서 그는 세계적인 엘리트 선수로 거듭나기 위한 기초를 다졌습니다.

1966

[최연소 소련 내셔널 마스터]

15세의 나이에 소련 최연소 내셔널 마스터가 되어 역사를 새로 씁니다.

소련은 당시 세계 체스의 중심지였으며, 이곳에서의 마스터 자격은 국제적인 실력을 의미했습니다.
15세라는 기록은 당시 기준으로 역사상 최연소 기록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는 소련 체스 국가대표팀의 차세대 주자로 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첫 국제 대회 우승]

체코슬로바키아의 트르시네츠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합니다.

해외에서 열린 첫 성인 국제 대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기량으로 1위에 올랐습니다.
전 세계 리스너들과 평론가들은 이 어린 러시아 선수의 냉철한 경기 운영에 경악했습니다.
본격적인 국제 무대 정복의 서막이 오른 순간이었습니다.

1967

[유럽 주니어 챔피언십 우승]

그로닝겐에서 열린 유럽 주니어 체스 챔피언십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립니다.

유럽 전역의 유망주들이 모인 자리에서 카르포프는 단연 돋보이는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의 승리는 운이 아닌 정교한 수 읽기와 전략의 산물임을 전 유럽에 입증했습니다.
이 우승으로 그는 주니어 무대에서 더 이상 적수가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1968

[모스크바 국립대 입학]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시작하지만 곧 새로운 결정을 내립니다.

학업 성적이 우수했던 카르포프는 명문 모스크바 국립대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체스에 더 집중하기 위해 곧 다른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의 삶에서 학업과 체스는 항상 균형을 이루었지만, 체스의 비중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1969

[레닌그라드 국립대 전학]

코치 세묜 푸르만과 가깝게 지내기 위해 레닌그라드 국립 대학교로 전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합니다.

그는 자신의 성장을 도울 푸르만 코치가 있는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경제학 공부는 훗날 그가 체스 정치와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체스 훈련과 학업을 병행하며 그는 더욱 성숙한 플레이어로 진화했습니다.

[세계 주니어 챔피언십 우승]

스톡홀름에서 열린 세계 주니어 체스 챔피언십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합니다.

11경기 중 10점을 기록하며 보리스 스파스키 이후 소련 선수로는 처음으로 이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이 우승과 동시에 그는 인터내셔널 마스터(IM) 자격도 자동으로 부여받았습니다.
전 세계 체스계는 이제 그를 차기 세계 챔피언 후보로 거론하기 시작했습니다.

1970

[그랜드마스터 타이틀 획득]

카라카스에서 열린 대회에서 4위를 차지하며 19세의 나이로 그랜드마스터(GM)가 됩니다.

당시 19세의 그랜드마스터는 전 세계에서 가장 어린 나이의 기록이었습니다.
그는 성인 프로 무대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갖추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제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세계 챔피언 왕좌가 되었습니다.

1971

[알레힌 메모리얼 공동 1위]

모스크바에서 열린 강력한 알레힌 메모리얼 대회에서 공동 우승을 차지합니다.

전설적인 세계 챔피언들을 기리는 이 대회에서 그는 최강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그의 레이팅은 2540에서 급격히 상승하며 엘리트 그룹에 진입했습니다.
기복 없는 그의 성적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1972

[체스 올림피아드 데뷔]

스코페 올림피아드에서 소련 국가대표로 처음 출전하여 팀의 금메달에 기여합니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그는 훌륭한 팀플레이어로서의 면모도 과시했습니다.
소련 팀은 그의 활약에 힘입어 우승을 차지했고, 그는 개인적으로도 높은 승률을 기록했습니다.
이후 그는 총 6번의 올림피아드 금메달을 획득하게 됩니다.

1973

[레닌그라드 인터조널 우승]

레닌그라드 인터조널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며 세계 챔피언 도전자 결정전에 진출합니다.

이 대회 우승으로 그는 현 챔피언 바비 피셔에게 도전할 자격을 얻기 위한 첫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그의 엘로 레이팅은 2660까지 치솟으며 세계 최정상급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도전자 결정전에서의 활약이 전 세계의 기대를 모았습니다.

1974

[도전자 결정전 최종 승리]

빅토르 코르치노이를 결승에서 꺾고 바비 피셔에게 도전할 공식 권리를 획득합니다.

레프 폴루가예프스키, 보리스 스파스키를 차례로 격파한 뒤 코르치노이까지 제압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미국과 소련의 자존심이 걸린 '세기의 대결'의 주인공으로 내정되었습니다.
전 세계는 피셔와 카르포프의 대결을 학수고대했습니다.

1975

[밀라노 대회 우승]

챔피언 등극 직후 열린 강력한 밀라노 대회에서 우승하며 실력 논란을 잠재웁니다.

카르포프는 자신이 '싸우지 않는 챔피언'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주요 대회에 출전했습니다.
밀라노에서의 우승은 그가 진정한 세계 최강자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10년간 체스계를 완벽하게 지배하게 됩니다.

[제12대 세계 체스 챔피언 등극]

바비 피셔의 불참 선언으로 카르포프가 부전승으로 세계 챔피언에 공식 임명됩니다.

피셔가 경기 조건에 대한 이견으로 타이틀 방어를 포기하자 FIDE는 카르포프를 챔피언으로 선포했습니다.
대국 없이 챔피언이 된 것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그는 이후 수많은 대회 우승으로 실력을 증명했습니다.
미하일 탈 이후 최연소 챔피언이라는 기록도 함께 세웠습니다.

1976

[첫 소련 챔피언 타이틀 획득]

제44회 소련 체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국내 최강자임을 확인합니다.

세계 챔피언임에도 소련 국내 챔피언십 우승이 없었던 그는 이 대회를 통해 마지막 퍼즐을 맞췄습니다.
소련의 쟁쟁한 그랜드마스터들을 모두 제치고 얻은 값진 승리였습니다.
그는 총 3번의 소련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게 됩니다.

1977

[라스팔마스 및 틸뷔르흐 우승]

라스팔마스와 틸뷔르흐 등 주요 국제 대회를 휩쓸며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이 시기 카르포프의 승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는 참가하는 거의 모든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며 알레힌의 대회 우승 기록을 위협했습니다.
그의 '보아뱀' 스타일은 완성 단계에 이르러 상대의 숨통을 조였습니다.

1978

[레닌그라드 국립대 졸업]

경제학 학위를 받고 대학교를 공식적으로 졸업하며 지적인 기반을 완성합니다.

바쁜 경기 일정 속에서도 학업을 소홀히 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졸업장을 손에 넣었습니다.
경제학적 사고방식은 그의 체스 스타일과 인생관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이제 학업의 부담을 덜고 오직 체스 왕좌를 지키는 데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기오 시티 타이틀 방어 성공]

필리핀에서 열린 숙적 빅토르 코르치노이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며 챔피언 자리를 지킵니다.

심리전과 정치적 긴장감이 가득했던 이 매치는 3개월 넘게 이어졌습니다.
결국 마지막 32번째 경기에서 승리하며 6승 5패 21무로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이 승리는 그가 명실상부한 최강의 챔피언임을 전 세계에 공표한 사건이었습니다.

1979

[몬트리올 '별들의 대회' 우승]

역사상 가장 강력한 라인업으로 꼽히는 몬트리올 토너먼트에서 미하일 탈과 공동 우승합니다.

당대 최고의 선수 10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그는 다시 한번 정점에 섰습니다.
탈과 함께 보여준 환상적인 경기력은 체스 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카르포프의 경력에서 1979년은 대회 우승 기록이 가장 정점에 달한 해 중 하나였습니다.

[첫째 아들 아나톨리의 탄생]

첫 번째 부인 이리나 쿠이모바와의 사이에서 아들 아나톨리가 태어납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더해지며 그의 삶은 더욱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했습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을 정도로 애정이 깊었습니다.
가족의 탄생은 치열한 승부 세계에서 그에게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주었습니다.

1981

[레닌 훈장 수여]

소련 정부로부터 국가 최고 영예인 레닌 훈장을 받으며 공로를 인정받습니다.

소련의 국위를 선양한 공로로 그는 단순한 스포츠 스타를 넘어 국가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 상은 그가 체스를 통해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력을 상징하는 증표였습니다.
그는 소련 체스의 황금기를 이끄는 상징적인 인물로 추앙받았습니다.

[메라노 타이틀 방어 성공]

이탈리아 메라노에서 다시 만난 코르치노이를 완파하며 2차 타이틀 방어를 마칩니다.

지난번보다 훨씬 수월하게 6승 2패 10무의 성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코르치노이와의 기나긴 라이벌전은 사실상 카르포프의 완승으로 마감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철옹성 같은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1982

[소련 평화 기금 의장 취임]

소련 평화 기금(Soviet Peace Fund)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인도주의 활동을 시작합니다.

체스판 밖에서도 그는 평화와 구호 활동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이 직책을 통해 그는 수많은 자선 행사와 국제 평화 회의에 참여했습니다.
체스 플레이어로서의 명성을 인류의 공익을 위해 사용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습니다.

1983

[두 번째 소련 챔피언 등극]

다시 한번 소련 체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국내 일인자임을 재확인합니다.

세계 무대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그는 여전히 압도적인 존재였습니다.
강력한 신진 세력들의 도전을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모두 물리쳤습니다.
이 우승은 훗날 가리 카스파로프라는 거대한 해일이 닥치기 전의 고요한 승리였습니다.

1984

[카스파로프와의 역사적 첫 대결]

떠오르는 태양 가리 카스파로프와 세계 챔피언십 대결을 시작합니다.

역사상 가장 긴 48경기가 치러진 이 매치는 체스 역사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카르포프는 초반 5승을 거두며 앞서갔으나 카스파로프의 끈질긴 추격에 직면했습니다.
결국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건강상의 이유로 대국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1985

[세계 챔피언 타이틀 상실]

재경기 끝에 가리 카스파로프에게 패배하며 10년간 지켜온 왕좌를 내어줍니다.

새로운 시대의 천재 카스파로프에게 패배하며 그의 시대는 일시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비록 타이틀은 잃었으나 카르포프는 끝까지 품위 있는 패배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패배는 두 사람의 기나긴 144판 대결의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1986

[런던-레닌그라드 리매치]

카스파로프와 타이틀 탈환을 위한 재경기를 치렀으나 근소한 차이로 실패합니다.

런던과 레닌그라드를 오가며 열린 이 경기에서 그는 다시 한번 카스파로프를 옥죄었습니다.
치열한 공방 끝에 아쉽게 무릎을 꿇었지만, 그는 여전히 세계 2위의 강력한 도전자였습니다.
전 세계 팬들은 이 두 천재의 대결에 매번 열광했습니다.

1987

[세비야 매치 극적인 무승부]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대결에서 무승부를 기록하며 타이틀 탈환의 문턱에서 멈춥니다.

마지막 경기 전까지 앞서있던 카르포프는 승리만 하면 왕좌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카스파로프의 기적적인 마지막 경기 승리로 12대 12 무승부가 되어 챔피언 자격은 유지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 중 하나로 이 경기를 기억합니다.

1988

[세 번째 소련 챔피언 등극]

카스파로프와 공동으로 소련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하며 자존심을 지킵니다.

두 거물은 국내 무대에서도 치열하게 경쟁하며 공동 1위에 올랐습니다.
다른 모든 경쟁자를 압도하며 두 사람만의 리그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습니다.
이 우승은 카르포프의 마지막 소련 챔피언 타이틀로 기록되었습니다.

[초대 세계 래피드 챔피언]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세계 래피드(속기) 체스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합니다.

정밀한 수 읽기뿐만 아니라 빠른 판단력에서도 그는 세계 최고임을 입증했습니다.
클래식 체스뿐만 아니라 속기 무대에서도 정점에 오르며 전천후 플레이어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체스의 모든 형태에서 챔피언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1990

[리옹-뉴욕 마지막 타이틀전]

카스파로프와 벌인 마지막 세계 챔피언십 매치에서 다시 한번 패배를 맛봅니다.

리옹과 뉴욕에서 열린 이 매치는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에서 정점을 찍었습니다.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지만, 카르포프는 카스파로프에게 가장 두려운 적수임을 끝까지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두 사람의 대결은 토너먼트 대회로 장소를 옮기게 됩니다.

1993

[FIDE 세계 챔피언 복귀]

얀 티만을 꺾고 FIDE 세계 체스 챔피언 타이틀을 다시 거머쥡니다.

카스파로프가 FIDE를 탈퇴하자 카르포프는 공식 기구의 왕좌에 복귀했습니다.
분열된 체스계였지만 그는 공식적인 챔피언으로서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이후 1999년까지 이 자리를 지키며 제2의 전성기를 누립니다.

1994

[리나레스의 전설적인 우승]

역사상 가장 강한 대진으로 꼽히는 리나레스 대회에서 역사적인 성적으로 우승합니다.

카스파로프를 포함한 당대 최강자들을 모두 제치고 13경기 중 11점을 획득했습니다.
이 성적은 퍼포먼스 레이팅으로 환산했을 때 2985라는 경이로운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그의 커리어 중 가장 완벽한 토너먼트 승리로 평가받는 순간이었습니다.

1996

[엘리스타 타이틀 방어 성공]

가타 캄스키를 제압하고 FIDE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지켜냅니다.

엘리스타에서 열린 매치에서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떠오르는 강자 캄스키를 물리쳤습니다.
그의 실력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세계 최정상급임을 입증했습니다.
그는 4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무결점의 챔피언이었습니다.

1998

[로잔 타이틀 방어 성공]

인도의 비스와나탄 아난드를 물리치고 다시 한번 타이틀 방어에 성공합니다.

아난드라는 젊은 강자를 상대로 타이브레이크까지 가는 혈투 끝에 승리했습니다.
그의 체력과 집중력은 여전히 전성기 못지않음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이 승리는 그의 마지막 세계 챔피언 타이틀 방어 기록이 되었습니다.

1999

[FIDE 챔피언 타이틀 반납]

FIDE의 새로운 경기 방식에 항의하며 세계 챔피언 자리에서 자진 사퇴합니다.

FIDE가 챔피언십 제도를 토너먼트 방식으로 바꾸자 카르포프는 전통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거부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왕좌를 포기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후 그는 공식 챔피언은 아니지만 체스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늦둥이 딸 소피아의 탄생]

두 번째 부인 나탈리아 불라노바와의 사이에서 딸 소피아가 태어납니다.

늦은 나이에 얻은 딸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체스에만 매몰되지 않고 가족과 함께 소소한 행복을 즐기는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딸이 보여주는 체스에 대한 작은 관심에도 큰 위안을 얻었다고 고백했습니다.

2004

[세계 체스 명예의 전당 헌액]

체스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세계 체스 명예의 전당에 공식 헌액됩니다.

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룬 그에게 수여된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닌, 영원히 기억될 거장들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명예의 전당 헌액식은 그의 위대한 커리어를 기리는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2005

[러시아 공공회의 위원 위촉]

러시아 공공회의(Public Chamber of Russia) 위원으로 활동하며 사회 활동을 본격화합니다.

체스 영웅으로서 가진 영향력을 러시아의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교육, 문화,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이 활동은 그가 훗날 본격적인 정계 진출을 하게 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2006

[생태 안전 및 환경 보호 위원장]

러시아 공공회의 내의 생태 안전 및 환경 보호 위원회의 의장을 맡습니다.

그는 러시아의 환경 문제와 생태계 보존을 위해 정책적인 제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체스판 위에서의 치밀함으로 환경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전 세계를 돌며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전도사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2011

[국가두마 의원 당선]

러시아 연방 하원(국가두마) 의원에 선거를 통해 처음으로 당선됩니다.

통합러시아당 후보로 출전하여 압도적인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의석을 확보했습니다.
이제 그는 체스 기물이 아닌 법안과 정책을 다루는 정치가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스포츠 스타가 정계에서도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표본이 되었습니다.

2016

[국가두마 의원 재선 성공]

의정 활동 성과를 인정받아 러시아 하원 의원 재선에 성공합니다.

그는 꾸준한 활동을 통해 지역구 유권자들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습니다.
체스 보급과 아동 복지 정책 등에 힘쓰며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정치 무대에서도 그는 '보아뱀'처럼 끈질기게 정책 목표를 달성해 나갔습니다.

2021

[국가두마 의원 3선 성공]

다시 한번 의원직을 유지하며 3선 중진 의원으로서의 입지를 다집니다.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성한 의정 활동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원로 정치인이자 스포츠 영웅으로서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의 삶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거대한 연대기입니다.

2022

[불의의 사고와 회복]

사고로 인한 부상으로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빠르게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입원 소식에 전 세계 체스 팬들이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체스 챔피언다운 강인한 정신력으로 고비를 넘기고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더욱 건강에 유의하며 대중 앞에 다시 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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