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프루시안테
음악가, 기타리스트,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최근 수정 시각 : 2026-01-21- 14:11:13
존 프루시안테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기타리스트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시대를 초월한 영혼의 울림을 전하는 기타리스트입니다. 18세의 나이에 팀에 합류해 밴드의 음악적 정체성을 확립했으나, 폭발적인 인기 뒤에 숨겨진 고독과 약물 중독으로 두 번의 탈퇴와 복귀를 반복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롤링 스톤 선정 역대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는 실험적인 솔로 활동과 전자 음악 탐구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하며 현대 록 음악사의 독보적인 전설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70
[전설의 시작, 탄생]
뉴욕 퀸스에서 예술가 부모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뛰어난 음악적 재능은 그가 장차 거장이 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본명은 존 앤서니 프루시안테(John Anthony Frusciante)이며 이탈리아계 혈통입니다.
아버지는 줄리어드 출신의 피아니스트였고, 어머니는 가수를 꿈꾸던 재능 있는 성악가였습니다.
가정 내의 풍부한 예술적 환경은 그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1977
[부모님의 이별과 이동]
부모님의 별거 이후 어머니와 함께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로 이주했습니다. 새로운 환경은 그의 음악적 취향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뉴욕과 애리조나를 거쳐 정착한 캘리포니아는 당시 펑크 록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부모님의 이별이라는 어린 시절의 상처는 그를 내성적이고 음악에 침잠하는 성격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그는 현실의 아픔을 잊기 위해 라디오에서 나오는 선율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1978
[양부의 지원과 정착]
어머니의 재혼으로 로스앤젤레스 마르 비스타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새아버지는 그의 예술적 열정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지원해준 든든한 조력자였습니다.
새아버지는 존이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독려하며 자존감을 높여주었습니다.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존은 본격적으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안정적인 가정 분위기는 그가 음악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심리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1979
[펑크 록과의 조우]
로스앤젤레스의 펑크 록 씬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특히 밴드 'Germs'의 음악을 반복해서 들으며 독창적인 연주 방식을 스스로 터득했습니다.
Germs의 앨범 (GI)를 수천 번 반복 청취하며 가사 하나하나와 기타 톤을 분석했습니다.
정석적인 튜닝 대신 자신만의 비표준 튜닝법을 발명하여 복잡한 리프를 한 손가락으로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의 파격적인 음악 경험은 훗날 그의 정형화되지 않은 연주 스타일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1981
[기타 거장들의 탐구]
제프 벡, 지미 페이지, 지미 헨드릭스 등 전설적인 기타리스트들의 연주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술적 완성을 넘어 그들의 영혼이 담긴 연주 방식을 체득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지미 헨드릭스의 화려한 테크닉과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는 그에게 평생의 영감을 주었습니다.
매일 수십 시간 동안 기타를 붙잡고 거장들의 솔로를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기타라는 악기가 가진 무한한 표현 가능성을 발견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1984
[운명적인 밴드와의 발견]
자신의 기타 스승을 통해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독특한 펑크 사운드에 전율을 느끼며 순식간에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다.
당시 기타 스승이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오디션을 준비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밴드의 초기 음반들을 섭렵하며 모든 기타 리프와 베이스 라인을 외울 정도로 몰입했습니다.
훗날 이 밴드의 멤버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라도 한 듯 그들의 음악적 행보를 추적했습니다.
1985
[첫 공연 관람과 동경]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공연을 처음으로 직접 관람했습니다. 무대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에 압도되어 자신도 저런 음악을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당시 기타리스트였던 힐렐 슬로박의 연주 방식에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는 힐렐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고 그의 모든 움직임을 눈에 담았습니다.
공연 후 그는 밴드가 언젠가 거대한 경기장을 채우는 스타가 될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1986
[학교를 떠나 음악으로]
부모님의 허락하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음악의 길에 올인했습니다. 제도권 교육보다는 현장의 소리를 택하며 오직 실력만으로 승부하고자 했습니다.
자퇴 후 로스앤젤레스로 거처를 옮겨 음악가로서의 실무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했습니다.
기타 연구소(GIT)에 등록했으나 정형화된 수업에 흥미를 잃고 독학의 길을 택했습니다.
이 결단은 그가 짧은 시간 안에 독보적인 기술을 완성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8
[플리와의 음악적 교감]
드럼 연주자 D. H. 펠리그로를 통해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베이시스트 플리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첫 잼 세션에서 완벽한 음악적 호흡을 확인하며 전설적인 듀오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플리는 존의 천재적인 기타 감각과 밴드 곡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깜짝 놀랐습니다.
서로의 소리에 반응하며 즉흥적으로 선율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깊은 유대감을 쌓았습니다.
이 만남은 존이 밴드에 합류하게 되는 가장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가 되었습니다.
[팀 합류와 환희의 순간]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정식 기타리스트로 영입되었습니다. 합류 소식을 들은 그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집안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시 다른 밴드와 계약을 맺은 지 불과 2주 만에 칠리 페퍼스의 제안을 받고 바로 이적했습니다.
기존의 우상이었던 밴드에 멤버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에게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그는 힐렐의 발자취를 따르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운드를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우상의 죽음과 슬픔]
밴드의 창립 멤버이자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힐렐 슬로박이 약물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 충격 속에서도 존은 그의 음악 정신을 이어받기로 결심했습니다.
힐렐의 죽음으로 밴드는 해체 위기에 몰릴 정도로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존은 생전 힐렐과 나누었던 짧은 대화들을 떠올리며 그의 기타 톤을 연구했습니다.
우상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존에게 밴드의 구원자로서의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1989
[Mother's Milk 앨범 참여]
합류 후 첫 앨범인 《Mother's Milk》를 발표하며 공식 데뷔했습니다. 프로듀서와의 갈등 속에서도 자신의 연주 역량을 세상에 처음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프로듀서 마이클 바인혼은 존에게 무거운 헤비메탈 톤을 강요하며 마찰을 빚었습니다.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는 Stevie Wonder의 'Higher Ground' 커버 등에서 화려한 펑크 기타를 선보였습니다.
이 앨범은 밴드가 상업적인 성공으로 나아가는 교두보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1991
[세계적 성공, BSSM]
희대의 명반 《Blood Sugar Sex Magik》을 통해 세계적인 록스타 반열에 올랐습니다. 릭 루빈과 협업하며 고립된 대저택에서 오직 음악에만 침잠하여 예술적 정점을 찍었습니다.
할리우드 힐스의 한 저택에서 외부와 차단된 채 멤버들과 합숙하며 녹음했습니다.
'Under the Bridge'의 서정적인 기타 도입부는 그의 감수성이 집약된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힙니다.
이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1,300만 장 이상 팔리며 밴드의 전성기를 활짝 열었습니다.
1992
[암흑기와 약물의 늪]
탈퇴 이후 심각한 약물 중독과 우울증에 빠져 은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기타를 거의 손에서 놓은 채 육체적, 정신적으로 무너져가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헤로인 중독으로 인해 치아가 모두 상하고 피부 질환을 앓는 등 건강이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그의 집 벽은 낙서로 뒤덮였고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끊은 채 그림과 일기에만 몰두했습니다.
이 시기의 처참한 생활은 훗날 친구 조니 뎁이 제작한 단편 다큐멘터리 'Stuff'에 담기기도 했습니다.
[인기 뒤에 숨겨진 고통]
갑작스러운 거대한 성공과 명성에 심한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클럽 공연을 선호했던 그는 대형 공연장으로 변해버린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인기가 높아질수록 멤버들과의 대화가 줄어들고 내면의 우울증이 깊어졌습니다.
그는 예술로서의 음악이 상업적으로 소비되는 방식에 대해 강한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공연장 무대 위에서도 환청을 듣는 등 정신적으로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도쿄 공연 중 첫 탈퇴]
일본 투어 도중 전격적으로 밴드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무대에 서는 것을 거부하며 공항으로 향했고, 이는 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공연 전날 멤버들에게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음을 통보하고 다음 날 바로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남겨진 멤버들은 남은 일정을 취소하거나 급하게 대역을 구해야 하는 곤경에 처했습니다.
존은 음악계를 떠나 은둔하며 자신만의 세계로 숨어버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1993
[친구 리버 피닉스의 비극]
절친했던 배우 리버 피닉스의 죽음을 목격하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함께 약물을 복용하던 동료의 죽음은 그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공포와 회한을 남겼습니다.
리버 피닉스가 사망한 밤, 존은 바이퍼 룸 공연장 현장에 함께 있었습니다.
약물 파티의 참혹한 결말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중독을 끊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존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기억 중 하나로 남아 그의 음악적 슬픔을 심화시켰습니다.
1994
[첫 솔로 음반 발표]
약물 중독 중에도 자신의 내면을 담은 첫 솔로 앨범 《Niandra LaDes and Usually Just a T-Shirt》를 발표했습니다. 가공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소리는 평단의 엇갈린 반응을 자아냈습니다.
밴드 탈퇴 전후에 녹음했던 데모 곡들을 모아 발표한 파격적인 형식의 음반입니다.
정교한 믹싱 대신 자신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그대로 기록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 앨범은 오늘날 아방가르드 록의 숨겨진 수작으로 평가받으며 마니아들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1996
[화재와 소중한 유산의 소실]
은둔하던 할리우드 힐스 저택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평생 수집해온 소중한 빈티지 기타들과 수많은 미공개 녹음물들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목숨은 건졌으나 음악가로서의 역사가 담긴 소장품들을 모두 잃어버리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빈손으로 남겨진 그는 더욱 깊은 절망감을 느끼며 삶의 의미를 잃어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상실은 역설적으로 그가 과거를 털어내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7
[두 번째 솔로 음반의 슬픔]
약물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미완성 곡들을 모은 《Smile from the Streets You Hold》를 발표했습니다.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담긴 이 앨범은 그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상징합니다.
발매 당시 그는 거의 죽음 직전의 상태였으며, 앨범 수록곡 중 일부는 녹음 도중 비명을 지르는 듯한 모습을 담았습니다.
존은 훗날 이 앨범을 발매한 것을 후회하며 한동안 시장에서 회수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에서 외치는 처절한 기록이었습니다.
1998
[재활 시도와 삶의 의지]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재활원에 입소하여 치열한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는 오직 음악만을 생각하며 중독의 굴레를 벗어던졌습니다.
모든 치아를 틀니로 교체하고 망가진 피부를 치료하는 등 혹독한 신체 재건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는 요가와 명상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고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며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다시 불타오르면서 그는 다시 기타를 잡을 힘을 얻었습니다.
[6년 만의 기적적인 재결합]
건강을 회복한 존에게 플리가 찾아와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재합류를 제안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제안을 수락한 그는 밴드의 제2의 전성기를 열 준비를 마쳤습니다.
당시 밴드는 데이브 나바로와의 결별 이후 해체 위기에 직면한 상태였습니다.
플리는 존의 복귀만이 밴드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그를 설득했습니다.
앤서니 키디스 또한 존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과거의 갈등을 모두 씻어냈습니다.
1999
[Californication의 대흥행]
재합류 후 첫 결과물인 《Californication》이 전 세계적인 메가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한층 성숙하고 미니멀해진 그의 기타 사운드는 밴드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수록곡 'Scar Tissue'와 'Otherside' 등에서 보여준 절제된 감수성은 전 세계 리스너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이 앨범은 밴드 역사상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그들의 입지를 확고히 했습니다.
존은 이 시기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창의적인 순간 중 하나로 회상합니다.
2001
[솔로 음악의 새로운 지평]
세 번째 솔로 앨범 《To Record Only Water for Ten Days》를 발표했습니다. 전자 음악적 요소와 뉴웨이브의 영향을 받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정갈한 사운드를 선보였습니다.
신시사이저를 적극 활용하여 몽환적이면서도 명료한 멜로디를 구축했습니다.
어두웠던 과거의 아방가르드 스타일에서 벗어나 가사가 선명하게 들리는 팝적인 요소를 가미했습니다.
솔로 아티스트로서 그가 가진 무한한 변신 가능성을 입증한 앨범입니다.
2002
[By the Way 앨범의 조율]
멜로디 중심의 앨범 《By the Way》를 통해 음악 감독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밴드의 사운드를 더욱 정교하고 풍성하게 빚어내며 평단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화음을 강조하는 백보컬과 다양한 레이어의 기타 연주로 앨범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비치 보이스와 같은 클래식 팝 사운드를 연구하여 밴드 음악에 이식했습니다.
이 앨범은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음악적 스펙트럼이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2003
[위대한 기타리스트 18위 등극]
음악 잡지 롤링 스톤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100인'에서 18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현역 뮤지션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높은 순위를 기록하며 거장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의 독창적인 톤과 즉흥 연주 능력, 그리고 감정을 실어 나르는 주법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지미 헨드릭스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유지하는 독보적인 아티스트로 인정받았습니다.
이 수상은 그가 록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적인 위상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었습니다.
2004
[6개월간 6장의 앨범 발표]
단 6개월 만에 무려 6장의 서로 다른 솔로 및 프로젝트 앨범을 발표하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폭발적인 창작 욕구를 분출하며 음악적 한계를 시험했습니다.
《Shadows Collide with People》을 시작으로 사이키델릭, 어쿠스틱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습니다.
투어 휴식기 동안 쌓아둔 수십 곡의 아이디어를 쉬지 않고 결과물로 만들어냈습니다.
이 기록적인 활동은 그가 단순한 기타리스트를 넘어 전천후 작곡가임을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2005
[Curtains와 내면의 고백]
어쿠스틱 사운드에 집중한 솔로 음반 《Curtains》를 공개했습니다. 장식을 덜어내고 오직 목소리와 기타만으로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내어 감동을 주었습니다.
방 안에서 속삭이는 듯한 친밀한 레코딩 방식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화려한 록스타의 모습 뒤에 숨겨진 인간 존 프루시안테의 담백한 내면을 보여주었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의 가사가 가진 시적인 깊이와 멜로디의 순수함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2006
[Stadium Arcadium의 기타 교향곡]
밴드의 더블 앨범 《Stadium Arcadium》에서 절정에 달한 기타 연주를 선보였습니다. 거의 모든 곡에 다채로운 기타 솔로를 입히며 밴드의 사운드를 우주적 스케일로 확장했습니다.
이 앨범으로 그래미 어워드 '베스트 록 앨범' 등 여러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을 받은 폭발적인 에너지와 정교한 화음 구성을 동시에 보여주었습니다.
전 세계 투어를 통해 수만 명의 관중 앞에서 자신의 전성기 기량을 마음껏 뽐냈습니다.
2007
[Mars Volta와의 협업]
진보적인 록 밴드 'Mars Volta'의 앨범들에 참여하여 실험적인 기타 연주를 보탰습니다.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협업을 통해 음악적 외연을 지속적으로 넓혀나갔습니다.
친구 오마르 로드리게스 로페즈와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수많은 트랙에 연주자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메인스트림 록과는 다른 난해하고 복잡한 구성의 음악 속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더 난해하고 실험적인 음악을 시도하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2008
[밴드의 장기 휴식과 고민]
Stadium Arcadium 투어 종료 후 밴드는 무기한 휴식기에 들어갔습니다. 존은 이 기간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음악적 지향점이 어디인지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년간 이어진 살인적인 투어 일정으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멤버들은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했고, 존은 다시 한번 솔로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대규모 공연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창작의 공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커졌습니다.
2009
[The Empyrean의 서사]
장대한 컨셉 앨범 《The Empyrean》을 발표했습니다. 삶과 우주, 정신적 세계를 다룬 이 작품은 그의 솔로 커리어 중 가장 높은 예술적 성취로 평가받습니다.
플리, 조쉬 클링호퍼 등 가까운 동료들이 참여하여 풍성한 사운드를 완성했습니다.
사이케델릭 록과 정교한 오케스트라 편곡이 어우러져 한 편의 종교적인 서사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이 앨범을 끝으로 한동안 록 음악의 틀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영역으로 이동했습니다.
[두 번째 작별, 아름다운 이별]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다시 한번 탈퇴했습니다. 첫 번째 탈퇴 때와 달리 멤버들과의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음악적 성장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더 이상 록 밴드의 형식 안에 갇히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멤버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자신을 대신할 기타리스트로 절친한 동생 조쉬 클링호퍼를 추천하며 팀의 미래를 배려했습니다.
탈퇴 발표 이후 그는 전자 음악과 합성기 연구에 완전히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2012
[전자 음악으로의 급진적 전향]
앨범 《PBX Funicular Intaglio Zone》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전자 음악가로 변신했습니다. 기존의 기타 중심 사운드를 완전히 버리고 복잡한 프로그래밍과 비트 중심의 음악을 선보였습니다.
록 팬들에게는 다소 난해할 수 있는 파격적인 행보였으나 본인은 창작의 기쁨을 강조했습니다.
애시드 하우스, 정글, 일렉트로니카 등 다양한 전자 음악 장르를 깊이 있게 탐구했습니다.
악기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뒤로하고 오직 소리의 조합에만 집중하는 구도자적 모습을 보였습니다.
2015
[Trickfinger의 탄생]
'Trickfinger'라는 가명으로 애시드 하우스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전자 음악 씬에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장르를 가리지 않는 천재성을 입증했습니다.
1980년대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를 활용하여 고전적이면서도 실험적인 비트를 만들어냈습니다.
대중적인 성공보다는 소리 자체의 질감과 구조를 탐구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존 프루시안테라는 이름을 지우고 오직 음악 그 자체로 평가받고자 하는 의도가 담겼습니다.
2019
[10년 만의 기적 같은 재합류]
레드 핫 칠리 페퍼스에 세 번째로 합류한다는 소식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10년간의 긴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전설의 귀환에 전 세계 록 팬들이 열광했습니다.
밴드 측은 공식 SNS를 통해 조쉬 클링호퍼와의 작별과 존의 복귀를 동시에 알렸습니다.
멤버들과의 재회는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며 다시 연주하고 싶다는 존의 의사가 컸습니다.
그의 복귀 소식만으로도 밴드의 브랜드 가치는 순식간에 수직 상승했습니다.
2022
[복귀작 Unlimited Love]
재합류 후 16년 만에 원년 멤버급 라인업으로 제작한 《Unlimited Love》를 발표했습니다. 여전한 기타 톤과 밴드 멤버들과의 완벽한 합을 보여주며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개봉 첫 주 빌보드 200 차트 1위에 오르며 압도적인 지배력을 증명했습니다.
릭 루빈이 다시 프로듀서로 참여하여 밴드 고유의 유기적인 사운드를 복원해냈습니다.
존은 이전보다 더 여유롭고 깊이 있는 연주로 앨범의 품격을 높였습니다.
[Return of the Dream Canteen]
같은 해에 연이어 두 번째 더블 앨범을 발표하며 폭발적인 창작 에너지를 뽐냈습니다. 한 해에 두 장의 정규 앨범을 1위에 올리는 대기록을 세우며 역사를 썼습니다.
한 번의 녹음 세션에서 쏟아져 나온 수십 곡의 아이디어를 두 장의 앨범으로 나누어 발매했습니다.
실험적인 기타 주법과 팝적인 멜로디가 공존하는 풍성한 구성을 자랑합니다.
존은 이 활동을 통해 자신이 팀의 핵심적인 창작 동력임을 다시금 각인시켰습니다.
2024
[지속되는 전설의 여정]
전 세계를 도는 대규모 투어와 함께 다음 음악적 행보를 준비 중입니다. 5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소리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잃지 않고 매일 진화하고 있습니다.
공연마다 매진 사례를 기록하며 젊은 세대들에게도 록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전자 음악 연구와 신시사이저 수집을 병행하며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단순한 연주자를 넘어 동시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살아있는 지표로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