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벨 위페르
배우, 영화 제작자
최근 수정 시각 : 2026-01-20- 18:27:10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배우 이자벨 위페르는 반세기 넘는 시간 동안 지칠 줄 모르는 예술적 열정으로 영화사를 새롭게 써 내려왔습니다. 1971년 데뷔 이후 클로드 샤브롤, 미하엘 하네케, 홍상수 등 세계적 거장들과 호흡하며 파격적이고 복잡한 여성상을 완벽하게 구현했습니다.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2회,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2회 수상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보유한 그녀는 연기를 단순한 재현을 넘어선 철학적 탐구의 영역으로 격상시켰습니다. 70세가 넘은 현재까지도 주연 배우로서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며 영화 예술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녀의 삶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영화적 전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53
[파리에서의 탄생]
프랑스 파리 16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영어 교사인 어머니와 금속 금형 제작자인 아버지 사이에서 5남매 중 막내로 성장했습니다. 예술적 분위기가 풍요로운 가정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미래의 대배우로서의 감수성을 길렀습니다.
본명은 이자벨 안 마들렌 위페르(Isabelle Anne Madeleine Huppert)입니다.
어머니 안마리 보베의 격려로 아주 어린 나이부터 연기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가족 중 언니인 엘리자베스 위페르와 카롤린 위페르 역시 각각 작가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집안입니다.
1960
[예술 교육의 시작]
어머니의 권유로 베르사유 국립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음악을 통해 정교한 감정 표현과 규율을 익히며 예술적 기초를 닦았습니다. 이 시기의 음악 교육은 훗날 그녀가 보여줄 절제된 연기 스타일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베르사유 국립 음악원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예술적 재능을 증명했습니다.
피아노 연주를 통해 얻은 리듬감은 훗날 대사 전달과 캐릭터 해석에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음악 교육과 병행하여 연기에 대한 열정을 키우며 점차 무대 예술로 관심을 넓혀갔습니다.
1970
[국립연극학교 진학]
프랑스 최고의 연기 교육 기관인 국립고등연극예술학교(CNSAD)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웠습니다. 체계적인 이론과 실습을 거치며 정통 연기파 배우로서의 기량을 연마했습니다. 이곳에서의 배움은 그녀가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 무대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안투안 비테즈 등 저명한 연극인들로부터 사사하며 고전극과 현대극을 아우르는 연기 폭을 넓혔습니다.
다양한 언어와 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지적인 연기 방식을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재학 시절부터 이미 비범한 재능을 보이며 여러 연극 무대에 오르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1971
[영화계 공식 데뷔]
니나 콤파네즈 감독의 영화 '파우스틴과 아름다운 여름'을 통해 은막에 첫선을 보였습니다. 비록 작은 역할이었지만 스크린 속에서 뿜어내는 독특한 분위기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프랑스 영화계의 새로운 얼굴로 등장하며 찬란한 커리어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풋풋하면서도 미묘한 긴장감을 주는 연기로 감독들의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데뷔와 동시에 청순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지닌 마스크로 큰 잠재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매년 쉬지 않고 여러 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성실한 배우로서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1972
[세자르와 로잘리 출연]
클로드 소테 감독의 '세자르와 로잘리'에 출연하며 대선배인 로미 슈나이더와 호흡을 맞췄습니다. 명감독의 연출 아래 프로 배우로서의 현장 감각을 익히는 귀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상업 영화 시스템 내에서의 입지를 조금씩 넓혀나갔습니다.
주연 배우들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는 단단한 연기력으로 비중 이상의 존재감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스타들과 함께하며 연기적 영감을 얻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립해 나갔습니다.
조연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의 내면을 포착하는 섬세한 눈빛이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974
[고발자들의 파격적인 연기]
베르트랑 블리에 감독의 '고발자들'에 출연하여 파격적이고 자유분방한 캐릭터를 소화했습니다. 프랑스 뉴웨이브 이후의 새로운 영화적 흐름 속에서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을 과감히 확장했습니다.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스타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입증했습니다.
제라르 드파르디외, 패트릭 드와에르 등 훗날 거장이 될 배우들과 함께 열연했습니다.
전통적인 가치관에 도전하는 인물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해내며 평단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영화의 흥행으로 이자벨 위페르는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1975
[세자르상 첫 후보 지명]
영화 '알로이즈'에서의 뛰어난 연기로 제1회 세자르 영화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데뷔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영화계가 주목하는 핵심 인재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거머쥔 배우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역사적 실존 인물의 고통을 표현해내며 연기적 깊이가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첫 수상은 놓쳤지만,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질 세자르상과의 긴 인연이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동료 배우들과 평론가들 사이에서 '가장 지적인 젊은 배우'라는 평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할리우드 자본과의 첫 만남]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로즈버드'에 출연하며 국제적인 프로젝트에 처음 참여했습니다. 프랑스어권을 넘어 영어권 영화계에서도 자신의 연기력이 통할 수 있음을 실험했습니다. 전 세계 관객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초기 글로벌 행보였습니다.
피터 오툴, 클로드 다핀 등 전설적인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며 국제적 감각을 익혔습니다.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캐릭터에 완벽히 녹아드는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유럽 배우로서 할리우드와 협력하는 방식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었습니다.
1976
[판사와 살인범 출연]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감독의 수작 '판사와 살인범'에 출연하여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습니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과 사회적 모순을 다룬 진지한 서사 속에서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명감독들과의 협업을 통해 배우로서의 예술적 권위를 견고히 쌓아갔습니다.
필립 느와레, 미셸 갈라브뤼 등 대배우들 사이에서도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복잡한 심리 묘사를 필요로 하는 배역을 맡아 탁월한 분석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작품성 있는 영화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며 평론가들이 신뢰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77
[레이스 짜는 여인으로 비상]
클로드 고레타 감독의 '레이스 짜는 여인'에서 순수하고 상처받기 쉬운 주인공을 완벽하게 연기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국제적 스타로 발돋움했습니다. 위페르 특유의 침묵과 시선이 주는 힘이 극대화된 명작입니다.
사랑의 아픔으로 정신적 붕괴를 겪는 소녀의 심리를 놀라운 절제력으로 표현했습니다.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이 그녀의 연기에 매료되었으며, 주연 배우로서의 위상을 확립했습니다.
이 영화는 지금도 그녀의 초기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작품 중 하나로 꼽힙니다.
1978
[칸 영화제 첫 여우주연상]
클로드 샤브롤 감독의 '비올레트 노지에르'를 통해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습니다. 당시 만 25세의 나이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으며 천재적인 연기력을 증명했습니다. 샤브롤 감독과의 역사적인 파트너십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한 순간이었습니다.
부모를 독살하려 한 실제 범죄자의 기묘하고 이중적인 내면을 서늘하게 연기했습니다.
단순한 악녀가 아닌, 사회적 압박 속에 놓인 복합적인 인물을 탄생시켰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수상을 기점으로 이자벨 위페르는 명실상부한 '거장들의 뮤즈'로 공인되었습니다.
1979
[브론테 자매 출연]
앙드레 테시네 감독의 '브론테 자매'에서 앤 브론테 역을 맡아 이자벨 아자니 등과 호흡을 맞췄습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젊은 여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 작품은 당대 최고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고전 문학의 인물을 현대적이고 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세 자매의 갈등과 문학적 열정을 다룬 극 속에서 차분하면서도 강인한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주연 배우들과의 연기 대결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유지했습니다.
이 시기 위페르는 시대극에서도 현대적인 지성을 잃지 않는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습니다.
1980
[할리우드 대작 천국의 문]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야심작 '천국의 문'에서 여주인공 역을 맡아 할리우드에 본격 진출했습니다. 비록 영화는 상업적으로 큰 실패를 거두었으나 위페르의 연기만은 찬사를 받았습니다. 미국 영화 시스템을 직접 경험하며 배우로서의 시야를 세계로 넓히는 도전이었습니다.
서부 개척 시대의 매춘부 역할을 맡아 강인하면서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발산했습니다.
당시 할리우드 제작사들의 무리한 요구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연기 철학을 고수했습니다.
이 작품의 상업적 실패 이후에도 위페르는 스타성에 연연하지 않고 예술적 선택을 이어갔습니다.
[장 뤽 고다르와의 협업]
누벨바그의 거장 장 뤽 고다르의 '인생'에 출연하며 실험적인 영화 언어를 경험했습니다.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해체하는 감독의 방식에 완벽히 적응하며 배우로서의 유연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가장 전위적인 예술가들과 소통할 수 있는 지적인 배우임을 다시 확인시켰습니다.
캐릭터의 감정보다는 이미지와 메시지를 중시하는 고다르의 연출 아래서도 빛을 잃지 않았습니다.
영화 매체 자체에 대한 깊은 사유를 요구하는 작업에 열정적으로 임했습니다.
고다르와의 작업은 훗날 그녀가 다양한 실험 영화에 참여하는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1982
[로날드 샤마와의 결혼]
영화 제작자인 로날드 샤마와 백년가약을 맺고 가정을 꾸렸습니다.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 정서적 안정을 찾으며 연기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사생활을 철저히 보호하면서도 예술적 동지로서 남편과 깊은 유대감을 유지해 왔습니다.
결혼 이후에도 배우 활동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고 더욱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습니다.
남편 로날드 샤마는 그녀가 출연한 여러 영화의 제작과 홍보를 지원하며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화려한 영화계의 삶과 평범한 가정생활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1983
[딸 롤리타 샤마 탄생]
첫째 딸인 롤리타 샤마를 출산하며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자녀의 탄생은 그녀의 연기에 깊은 감성과 모성, 그리고 생명에 대한 통찰을 더해주었습니다. 딸 롤리타는 훗날 어머니를 따라 배우의 길을 걷게 되는 예술적 후계자가 됩니다.
출산 이후에도 곧바로 작품 활동에 복귀하며 식지 않는 열정을 과시했습니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예술적 자율성을 존중하는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어머니로서의 경험은 위페르가 복잡한 가족 관계를 다룬 영화들에서 탁월한 깊이를 보여주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1986
[아들 로렌초 샤마 탄생]
둘째 아이인 아들 로렌초 샤마가 태어났습니다. 가정이 더욱 풍성해지는 가운데 배우로서의 커리어도 정점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도 결코 연기의 질을 타협하지 않는 프로다운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가족의 지지 속에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워킹맘' 배우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기 위페르는 더욱 성숙하고 강인한 여성 캐릭터들을 연기하며 평단의 신뢰를 쌓았습니다.
사생활에서는 평범하고 소박한 삶을 지향하며 자녀들에게도 건강한 가치관을 심어주었습니다.
1988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클로드 샤브롤 감독의 '여자 이야기'로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낙태를 도운 죄로 사형당한 실존 인물을 처절하게 연기해냈습니다. 칸에 이어 베니스까지 석권하며 유럽을 넘어 세계 최고의 연기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도덕적 딜레마와 가난의 고통 속에서 분투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압도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샤브롤 감독의 냉철한 시선과 위페르의 정교한 연기가 만나 영화적 걸작을 탄생시켰습니다.
이 작품으로 위페르는 역사적 비극을 몸소 증언하는 위대한 배우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셋째 안젤로 샤마 탄생]
셋째인 아들 안젤로 샤마가 태어나며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가장 바쁜 배우 활동 중에도 가정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삶의 균형을 맞췄습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위페르의 연기는 더욱 원숙해지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습니다.
자녀들이 성장함에 따라 그녀의 연기 소재 또한 더욱 다양해지고 과감해졌습니다.
가족은 그녀가 극한의 연기를 소화한 뒤 돌아와 쉴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안식처였습니다.
세 아이 모두 예술적 소양을 갖춘 성인으로 성장하며 그녀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1991
[마담 보바리 출연]
클로드 샤브롤 감독과 다시 만나 고전 문학의 정수 '마담 보바리'를 영화화했습니다. 권태와 욕망 사이에서 파멸해가는 에마 보바리를 위페르만의 차갑고도 뜨거운 감성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전 세계 수많은 '마담 보바리' 영화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원작의 섬세한 심리 묘사를 스크린 위로 완벽하게 옮겨왔다는 찬사를 들었습니다.
화려한 의상과 시대적 배경 속에서도 캐릭터의 내밀한 진실을 포착해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위페르는 고전 캐릭터에 현대적인 생명력을 불어넣는 마술 같은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1995
[의식의 베니스 여우주연상]
영화 '의식(La Cérémonie)'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두 번째 여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계급 갈등과 광기를 다룬 이 스릴러에서 위페르는 속을 알 수 없는 미묘한 캐릭터로 극적 긴장감을 완성했습니다. 샤브롤 감독과의 완벽한 호흡이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샌드린 보네르와 함께 보여준 연기 앙상블은 영화사에서 손꼽히는 강렬한 동반 연기였습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 숨겨진 폭력성을 서늘하게 그려내 평단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수상을 통해 위페르는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다수의 주연상을 보유한 독보적 배우가 되었습니다.
1996
[세자르상 여우주연상 수상]
수차례의 후보 지명 끝에 마침내 영화 '의식'으로 세자르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프랑스 자국 내에서도 그녀의 압도적인 연기력을 공식적으로 예우한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배우에게 주어진 값진 보상이었습니다.
수상 소감에서 자신을 믿어준 감독들과 동료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프랑스 영화계의 자부심이자 얼굴로서 그녀의 위상이 한층 공고해졌습니다.
이후에도 그녀는 수상을 목적으로 연기하지 않고 오직 예술적 가치를 따르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2001
[피아니스트로 칸을 점령하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를 통해 칸 영화제에서 두 번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인간의 억눌린 욕망과 자학적인 심리를 연기한 그녀의 퍼포먼스는 영화계에 거대한 충격과 경탄을 안겼습니다. 연기 인생에서 가장 과감하고 파괴적인 도전을 완벽하게 성공시켰습니다.
피아노 교수 에리카의 차가운 외면과 고통스러운 내면을 처절하게 형상화했습니다.
하네케 감독의 엄격한 연출과 위페르의 한계 없는 연기가 만나 불멸의 걸작이 탄생했습니다.
이 작품으로 위페르는 '지구상에서 가장 연기를 잘하는 배우' 중 한 명이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2002
[8명의 여인들 베를린 은곰상]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뮤지컬 코미디 '8명의 여인들'에 출연하여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단체 수상했습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8명의 여배우와 함께 호흡하며 기존의 무거운 이미지를 벗고 코믹한 매력까지 뽐냈습니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그녀의 연기적 유연성이 빛난 순간이었습니다.
까칠하고 예민한 노처녀 역할을 맡아 능청스러운 코믹 연기와 노래를 선보였습니다.
화려한 캐스팅 속에서도 자신만의 확실한 캐릭터를 구축하여 극의 재미를 더했습니다.
베를린 영화제 수상으로 칸, 베니스에 이어 3대 영화제 주요 부문을 모두 섭렵하게 되었습니다.
2005
[베니스 영화제 특별 사자상]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영화 '가브리엘'에서의 연기와 영화 예술에 기여한 공로로 특별 사자상을 받았습니다. 특정 작품을 넘어 그녀의 전체적인 연기 커리어에 대한 국제적 존경이 담긴 상이었습니다. 거장을 넘어선 거장으로 대우받기 시작한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파국을 향해 가는 부부의 갈등을 다룬 '가브리엘'에서 절정의 연기력을 선보였습니다.
시상식에서 위페르는 연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행복에 대해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 상을 통해 그녀는 영화사의 살아있는 유산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습니다.
2009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 위촉]
제62회 칸 영화제에서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되어 축제를 이끌었습니다.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영화 전반을 바라보는 깊은 통찰력과 권위를 인정받은 결과였습니다. 세계 각국의 뛰어난 작품들을 심사하며 영화 예술의 수호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심사위원단과 함께 엄정한 기준으로 황금종려상을 포함한 수상작들을 선정했습니다.
그녀의 심사 기준은 오직 영화적 진실성과 예술적 성취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칸의 안주인이자 거장으로서 축제 기간 내내 우아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012
[한국 영화 다른나라에서 출연]
한국의 거장 홍상수 감독의 영화 '다른나라에서'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계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세 명의 서로 다른 안느를 연기하며 홍상수 특유의 일상적이고 기묘한 세계에 완벽히 녹아들었습니다. 국경과 언어를 초월한 예술적 우정과 협업의 아름다운 사례로 남았습니다.
한국의 바닷가 마을 모항에서 촬영하며 한국 문화와 정서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즉흥적인 연출 방식에 매료되어 즐겁게 작업에 임했다는 소회를 밝혔습니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영화 아무르의 황금종려상]
미하엘 하네케 감독과 다시 만나 영화 '아무르'에 출연했으며, 이 작품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노부부의 딸 역할을 맡아 담담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연기를 펼쳤습니다. 거장의 작품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적인 존재임을 다시 증명했습니다.
장 루이 트린티냥, 에마뉘엘 리바 등 대선배들과 함께 완벽한 연기 앙상블을 이뤘습니다.
삶과 죽음의 존엄을 다룬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중요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이 영화의 성공은 하네케 감독과의 지속적이고 깊은 신뢰 관계가 낳은 결실이었습니다.
2016
[엘르로 전 세계를 뒤흔들다]
폴 버호벤 감독의 '엘르'에서 성폭행 피해자임에도 당당하게 가해자와 맞서는 강렬한 여성 미셸을 연기했습니다. 이 작품으로 전 세계 평단으로부터 그해 최고의 연기라는 극찬을 받으며 수많은 시상식을 휩쓸었습니다. 위페르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지적이고 도발적인 연기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사건 이후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삶과 욕망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인물을 창조했습니다.
영화의 논쟁적인 소재를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정당화시켰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엘르'의 성공으로 위페르는 커리어의 두 번째 전성기를 화려하게 맞이했습니다.
2017
[클레어의 카메라 출연]
홍상수 감독과 다시 만나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에 출연했습니다. 칸 영화제 기간 중 즉흥적으로 촬영된 이 영화에서 이방인 클레어로 분해 맑고 투명한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한국 영화계와의 깊은 유대감을 다시 한번 확인한 작업이었습니다.
김민희 배우와 함께 호흡하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독특한 작업 방식에 완벽히 동화되어 자유로운 연기를 펼쳤습니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 스페셜 스크리닝 섹션에 초청되어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수상]
영화 '엘르'를 통해 제74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뒀습니다. 할리우드의 견고한 장벽을 뚫고 비영어권 배우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시상식장에서 전 세계 영화인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우아한 수상 소감을 남겼습니다.
미국 외신기자협회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여배우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프랑스 배우가 골든글로브 주연상을 받은 것은 매우 드문 일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수상 소감에서 영화가 국경을 넘어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힘에 대해 역설했습니다.
[세자르상 두 번째 여우주연상]
영화 '엘르'에서의 압도적인 연기로 자신의 고국인 프랑스 세자르 영화제에서 두 번째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전 세계적인 찬사 속에 프랑스 영화계도 그녀의 공로를 다시 한번 높이 기렸습니다. 20년 만에 다시 트로피를 거머쥐며 변치 않는 연기력을 과시했습니다.
후배 배우들에게 귀감이 되는 열정과 실력을 다시 한번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 수상을 통해 위페르는 프랑스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배우 중 한 명으로 공인되었습니다.
현장에서는 감독 폴 버호벤과 기쁨을 나누며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
영화 '엘르'로 생애 처음으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프랑스 영화와 프랑스어 연기만으로 오스카 본상 후보에 오르는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할리우드 스타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예술적 아우라를 뽐내며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비록 수상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노미네이트 자체로 엄청난 기록을 세웠습니다.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위페르의 연기 철학과 깊이를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스카 캠페인 기간 동안 수많은 미국 매체들과 인터뷰하며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2018
[그레타 출연과 스릴러 도전]
닐 조단 감독의 심리 스릴러 '그레타'에서 소름 끼치는 집착을 가진 인물을 연기했습니다. 우아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광기를 서늘하게 표현하며 관객들을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상업적인 스릴러 장르에서도 그녀의 연기는 예술적 품격을 잃지 않았습니다.
클로이 모레츠와 대결하는 구도 속에서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산했습니다.
위페르 특유의 절제된 연기가 공포의 효과를 극대화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캐릭터를 탐구하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2019
[프랭키의 주연으로 활약]
아이라 작스 감독의 '프랭키'에서 죽음을 앞두고 가족들을 모으는 배우 프랭키 역을 맡았습니다. 포르투갈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복잡한 감정을 담담히 그려냈습니다.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로 관객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다시 한번 그녀의 명성을 확인시켰습니다.
가족의 해체와 사랑,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위페르만의 감성으로 풀어냈습니다.
전 세계 감독들이 가장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배우임을 다시금 증명했습니다.
2020
[고다르와 다시 만나다]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유작 프로젝트 등에 참여하며 예술적 동지로서 끝까지 의리를 지켰습니다. 누벨바그의 마지막 황혼 속에서도 그녀는 가장 중요한 영감의 원천으로 남았습니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거장들과의 끈끈한 유대를 유지했습니다.
고다르 감독의 철학적인 시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영화의 미래를 고민했습니다.
자신을 키워준 거장에 대한 존경과 예우를 담아 작업에 임했습니다.
영화사에 기록될 마지막 거장들과의 협업은 그녀의 커리어를 더욱 빛나게 했습니다.
2022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
영화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에서 크리스찬 디올 하우스의 엄격한 이사 역을 맡아 세련된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오랜만에 따뜻하고 유쾌한 영화에 출연하여 대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했습니다. 엄격함 속에 숨겨진 위트와 인간미를 보여준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화려한 패션의 세계를 배경으로 완벽주의자 캐릭터를 우아하게 소화했습니다.
예술 영화뿐만 아니라 웰메이드 상업 영화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폭넓은 연령층의 팬들에게 다시 한번 사랑을 받았습니다.
[베를린 영화제 명예 황금곰상]
제72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평생의 공로를 기리는 명예 황금곰상을 수상했습니다. 세계 3대 영화제의 최고 영예를 모두 얻은 살아있는 전설로서 공식 추대되었습니다. 반세기 동안 쉼 없이 달려온 그녀의 영화 인생에 대한 세계 영화인들의 경의가 담겼습니다.
비록 코로나19 확진으로 시상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으나 화상을 통해 감동적인 소감을 전했습니다.
베를린 영화제 측은 그녀를 '연기를 통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배우'라고 칭송했습니다.
이 수상으로 그녀는 영화 역사에 영원히 각인될 거장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2024
[여행자의 필요 출연]
홍상수 감독과 세 번째로 협업한 '여행자의 필요'가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습니다. 다시 한국을 찾아 막걸리를 마시고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미묘한 인물을 연기했습니다. 홍상수 감독과의 파트너십이 여전히 건재하며 더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영화의 예술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위페르는 홍 감독과의 작업이 자신에게 가장 자유로운 창작의 시간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 영화와 세계 영화를 잇는 가장 중요한 가교 역할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장]
제8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의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되어 축제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칸에 이어 베니스에서도 심사위원장을 맡으며 영화계 최고의 권위를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세계 영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새로운 인재들을 발굴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시상식 내내 품위 있고 공정한 심사로 전 세계 영화인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황금사자상을 비롯한 주요 부문의 수상작을 발표하며 축제의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영화계의 중심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거장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025
[현재의 활동과 미래의 비전]
현재까지도 매년 서너 편의 영화와 연극 무대를 오가며 지치지 않는 창작열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후배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멘토로, 감독들에게는 가장 신뢰하는 파트너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녀의 연기 여정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차기작이 대기 중이며 전 세계 거장들의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고 있습니다.
연기란 단순히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우고 캐릭터를 찾아가는 고독한 작업임을 강조합니다.
영화 예술이 존재하는 한 이자벨 위페르라는 이름은 영원히 빛나는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