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르본 대학교
국립 대학교, 교육 기관, 연구 중심 대학, 고등 교육 기관
최근 수정 시각 : 2026-01-09- 18:58:24
소르본 대학교(Sorbonne Université)는 1257년 로베르 드 소르본이 세운 신학 칼리지의 지적 전통을 계승하여, 오늘날 세계 최고의 연구 역량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자부심으로 우뚝 섰습니다. 1970년 파리 대학교 해체로 탄생한 인문학의 파리 4대학과 과학·의학의 파리 6대학이 2018년 다시 하나로 뭉치며 유럽을 대표하는 지식의 거함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마리 퀴리부터 알랭 아스페까지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과학적 성취와, 프랑스 인문정신의 본산인 라틴 지구의 역사적 권위가 결합된 이곳은 과거의 영광을 넘어 인공지능과 환경 과학 등 인류의 미래 과제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800년의 지층 위에 쌓아 올린 혁신과 융합의 가치는 소르본을 전 세계 학문 공동체의 영원한 이정표로 만들고 있습니다.
1253
[로베르 드 소르본의 초기 구상]
루이 9세의 고해 신부였던 로베르 드 소르본이 가난한 신학도들을 위한 기숙학교 설립을 처음으로 계획했습니다. 당시 파리 대학교 학생들의 열악한 생활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순수한 교육적 열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훗날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칠 소르본이라는 이름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로베르 드 소르본은 신학 공부에 매진하고 싶어도 경제적 어려움으로 포기하는 학생들을 위해 무료 거처와 식사를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전폭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파리 시내에 적절한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초기 구상은 단순한 장학 시설을 넘어 학자들이 공동으로 생활하며 토론하는 유럽 지식 공동체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1257
[소르본 칼리지 공식 출범]
로베르 드 소르본이 설립한 신학 단과대학이 법적 지위를 인정받으며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파리 대학교 내부에서 신학 연구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지적 권위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의 공식 문장에 새겨진 1257년은 바로 이 역사적인 출범을 기념하는 숫자입니다.
설립 초기 16명의 가난한 석사와 박사 과정 학생들로 구성된 소규모 공동체로 시작되었습니다. 공동체 내부의 엄격한 규율과 수준 높은 학문적 토론 문화는 유럽 전역의 학자들을 끌어들이는 강력한 유인이 되었습니다. 소르본이라는 명칭은 점차 파리 대학교 전체를 상징하는 대명사로 확장되며 프랑스 고등 교육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1259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승인]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소르본 칼리지의 설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며 종교적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이 승인을 통해 소르본은 가톨릭 세계 전체에서 인정받는 정식 교육 기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신학 교육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신성한 지위를 획득하게 된 계기입니다.
교황청의 공식 문서는 소르본이 학문의 자유와 경건한 신앙 교육을 병행하는 장소임을 천명했습니다. 이후 소르본은 가톨릭 교리의 해석과 이단 심판 등에 있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 기관으로 성장했습니다. 유럽 각국의 교회 지도자들이 소르본으로 유학을 오게 되면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1270
[창립자 로베르 드 소르본의 서거]
소르본 대학교의 기틀을 닦은 로베르 드 소르본이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학교에 헌납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학생들의 교육 여건 개선을 강조하며 학교의 영속성을 보장했습니다. 그의 유지는 오늘날까지 소르본 대학교의 핵심적인 교육 철학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방대한 장서와 부동산은 소르본 도서관이 중세 유럽 최대 규모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기반이 되었습니다. 학교 구성원들은 그를 영원한 스승으로 기리며 매년 추모 행사를 거행하여 그의 창립 정신을 되새깁니다. 그의 묘소는 소르본 예배당의 중심부에 안치되어 현재까지도 학교의 성스러운 상징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1274
[초기 도서관 시스템의 구축]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형태의 대학교 도서관 운영 규정을 제정하고 본격적인 자료 수집에 나섰습니다. 필사본 서적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학생들에게 대출해 주는 선구적인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소르본이 유럽 지식 유통의 허브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서적의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책을 사슬로 책상에 묶어두던 '체인 도서관' 방식에서 점차 개방형으로 진화했습니다. 철학, 문학, 신학 등 방대한 분야의 원전들을 확보하여 학자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이 도서관 자산은 소르본 대학교가 암흑기에도 학문적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1470
[프랑스 최초 인쇄기 도입]
기욤 피셰와 장 헤일린의 주도로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인쇄기가 소르본 내부에 설치되었습니다. 지식 전달의 방식이 필사에서 인쇄로 넘어가는 거대한 문명적 전환점을 소르본이 주도했습니다. 책의 가격을 낮추고 지식의 대중화를 앞당기는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독일 마인츠에서 온 인쇄 기술자들이 소르본 지하실에서 첫 번째 인쇄본 서적을 찍어냈습니다. 대학 내 인쇄소 설치는 학술 논문과 고전 텍스트가 대량으로 보급되는 길을 열었습니다. 소르본은 단순히 가르치는 장소를 넘어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현대적 대학교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1622
[리슐리외 추기경의 교장 부임]
소르본 출신의 권력자 리슐리외 추기경이 모교의 교장으로 부임하며 대대적인 쇄신을 선언했습니다. 그는 중세의 낡은 티를 벗겨내고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캠퍼스 재건축 프로젝트를 추진했습니다. 소르본이 프랑스 국가 권력의 지적 지주로 완전히 안착한 시기입니다.
리슐리외는 자신의 막대한 자금력을 투입해 쇠락해가던 소르본 건물을 완전히 새로 짓기로 결정했습니다. 건축가 자크 르메르시에를 고용하여 프랑스 고전주의 건축의 정수를 캠퍼스에 이식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소르본은 학문적 성취와 정치적 권위를 동시에 누리는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1635
[소르본 예배당의 정초식]
리슐리외 추기경의 설계에 따라 현재까지 남아있는 소르본 예배당의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파리 라틴 지구의 중심에 장엄한 돔 구조를 가진 건축물이 들어서며 위용을 뽐냈습니다. 대학의 영적 중심이자 리슐리외 가문의 기념비적인 장소로 기획되었습니다.
예배당은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혁신적인 건축 기법들이 동원되어 완성되었습니다. 이후 소르본의 모든 공식 학술 행사와 장례식 등이 거행되는 성소로 기능했습니다. 현재 이 건물은 프랑스 국가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어 소르본 대학교의 가장 오래된 상징으로 남아있습니다.
1791
[프랑스 혁명과 대학 폐쇄]
프랑스 혁명 정부의 종교 기관 억제 정책에 따라 소르본 칼리지를 포함한 대학들이 강제 폐쇄되었습니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학문적 전통이 혁명의 불길 속에서 중단되는 암흑기를 맞이했습니다. 학교의 자산은 국유화되었고 학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혁명 정부는 구체제의 산물인 신학 교육을 철저히 배격하며 대학의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예배당과 강의실은 한때 예술가들의 작업장이나 창고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단절은 역설적으로 훗날 소르본이 근대적인 세속 국립 대학교로 재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06
[나폴레옹의 제국 대학 창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가 제국 대학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파리 대학교의 기능을 복구했습니다. 폐쇄되었던 문학, 과학, 법학 학부들이 다시 설립되어 소르본 건물을 본부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근대 프랑스 교육 체계의 핵심으로서 소르본이 부활한 순간입니다.
나폴레옹은 국가를 지탱할 유능한 엘리트 양성을 위해 대학 교육의 효율성을 강조했습니다. 소르본은 이제 종교적 기숙학교에서 벗어나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최고 교육 기관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이 시기 정립된 학부 시스템은 오늘날 소르본 대학교의 조직 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808
[파리 문학 단과대학 공식 개설]
제국 대학 조직 법령에 따라 파리 문학부(Faculty of Humanities)가 소르본 캠퍼스에서 정식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인문학 교육의 최고 권위 기관으로서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소르본 대학교 인문학부의 법적이고 실질적인 모태가 되는 사건입니다.
초기 교수진은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들로 구성되어 독보적인 학문적 수준을 자랑했습니다. 고전 문학, 철학, 역사 분야의 표준 커리큘럼을 제정하여 프랑스 지식인의 전형을 만들었습니다. 이 학부의 성장은 소르본이라는 이름이 곧 인문학의 정점이라는 인식을 전 세계에 퍼뜨렸습니다.
1881
[소르본 대규모 재건축 계획 확정]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가 노후화된 소르본 건물을 철거하고 완전히 새로운 '신 소르본'을 건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국가적 자부심을 상징하는 거대 건축 프로젝트를 통해 프랑스 지성의 위엄을 세계에 떨치고자 했습니다. 건축가 앙리 폴 네노가 설계자로 최종 낙점되었습니다.
기존의 무질서했던 캠퍼스 배치를 체계적인 복합 공간으로 재설계하는 대담한 시도였습니다. 전통적인 바로크 양식과 현대적인 기능주의가 결합된 웅장한 도면이 대중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이 재건축은 소르본 대학교를 파리의 지적 랜드마크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물리적 변화였습니다.
1889
[소르본 대강당 공식 개관]
신축 건물의 핵심인 대강당(Grand Amphithéâtre)이 완공되어 성대한 개관식을 가졌습니다. 3,000명에 가까운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규모로 제작되어 각종 국가적 행사의 장이 되었습니다. 예술과 지성이 결합된 유럽 최고의 대학 강당으로 칭송받았습니다.
개관식에는 프랑스 정부 고위 관료와 전 세계 명문 대학 총장들이 대거 참석했습니다. 강당 정면을 장식한 퓌비스 드 샤반느의 거대 벽화 '성스러운 숲'이 처음으로 베일을 벗었습니다. 이후 이곳은 근대 올림픽 부활 회의가 열리는 등 인류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기록되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1894
[근대 올림픽의 탄생 무대]
소르본 대강당에서 피에르 드 쿠베르탱의 주도로 근대 올림픽 부활을 선포하는 국제 회의가 열렸습니다. 스포츠를 통한 평화 증진이라는 인류의 꿈이 소르본의 지적 공간에서 처음으로 현실화되었습니다. 대학교가 세계 시민 의식 함양에 기여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시 전 세계 스포츠 지도자들이 소르본에 모여 올림픽 헌장을 제정하고 국제 올림픽 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소르본의 장엄한 분위기는 근대 올림픽 정신에 학문적인 무게감을 더해주었습니다. 이 역사적인 회의를 기념하는 명판이 현재까지 소르본 대강당 벽면에 새겨져 보존되고 있습니다.
1896
[현대적 파리 대학교의 재탄생]
개별 학부의 연합체였던 파리 대학들이 하나의 통합된 법적 실체인 '파리 대학교'로 다시 뭉쳤습니다. 소르본은 이 거대 대학의 상징이자 행정의 중심지로서 확고히 지위를 부여받았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학문적 권위를 가진 조직으로 재편된 순간입니다.
대학 자율성을 보장하는 새로운 교육법에 따라 총장(Recteur) 체제가 강화되었습니다. 소르본이라는 명칭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고유 명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통합 체제는 1970년 분할 전까지 약 70여 년간 프랑스의 학문적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1903
[피에르·마리 퀴리의 노벨상]
소르본 과학부 소속인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 부부가 방사능 연구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소르본의 연구 수준이 세계 최정상임을 만천하에 입증한 쾌거였습니다. 여성 학자가 노벨상을 수상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소르본 캠퍼스 내 열악한 실험실에서 헌신적으로 연구하여 라듐을 발견해냈습니다. 수상을 계기로 프랑스 정부는 소르본 내부에 더 전문적인 방사능 연구 시설 확충을 지원했습니다. 소르본 대학교 과학 공학부의 뿌리 깊은 노벨상 전통이 시작된 위대한 순간입니다.
1906
[마리 퀴리 최초의 여성 교수 부임]
남편 피에르 퀴리의 사망 이후 마리 퀴리가 소르본 대학교 최초의 여성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600년 넘는 소르본 역사에서 여성이 강단에 서는 전례 없는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전 세계 여권 신장과 학문의 평등에 있어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첫 강의 날, 소르본의 강의실은 그녀의 수업을 듣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온 인파로 가득 찼습니다. 그녀는 과학적 우수성뿐만 아니라 여성의 지적 역량을 증명하며 수많은 소녀에게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현재 소르본 대학교 과학 캠퍼스의 이름이 '피에르 에 마리 퀴리'인 이유가 된 핵심적인 사건입니다.
1911
[마리 퀴리 노벨 화학상 수상]
마리 퀴리가 라듐과 폴로늄 발견의 공로로 두 번째 노벨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서로 다른 두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전설적인 기록이 소르본에서 탄생했습니다. 한 명의 학자가 대학과 국가에 안겨준 최고의 학문적 영광이었습니다.
이 수상으로 소르본 대학교는 방사능 연구와 현대 물리학의 세계적 중심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마리 퀴리는 수상 이후 소르본 내에 라듐 연구소 설립을 주도하며 연구 인프라를 혁신했습니다. 그녀의 끊임없는 탐구 정신은 오늘날 소르본 대학교 과학 기술 연구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1929
[루이 드 브로이의 노벨 물리학상]
소르본 과학부의 루이 드 브로이 교수가 전자의 파동성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양자 역학의 기초를 닦은 그의 이론은 소르본의 학문적 토양 위에서 완성되었습니다. 프랑스 이론 물리학의 자존심을 전 세계에 떨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의 '물질파' 가설은 미시 세계를 바라보는 인류의 시각을 완전히 혁명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소르본은 이를 통해 실험 과학뿐만 아니라 이론 과학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위상을 확보했습니다. 수많은 양자 역학 연구자들이 그의 뒤를 이어 소르본에서 학문적 성취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1946
[쥐시외 과학 캠퍼스 건설 결정]
포화 상태에 이른 소르본 본관을 대신할 새로운 대규모 과학 캠퍼스 건설이 정부 차원에서 결정되었습니다. 파리 시내 와인 저장고 부지를 활용하여 현대적인 연구 단지를 조성하기로 했습니다. 오늘날 소르본 대학교 과학 공학부 캠퍼스의 위대한 서막입니다.
전후 프랑스의 과학 기술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한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로 기획되었습니다. 전통적인 라틴 지구의 교육 공간을 넘어 파리 동부에 새로운 지적 허브를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최첨단 실험 시설과 대규모 강의실을 갖춘 '과학적 사원'을 목표로 설계가 시작되었습니다.
1964
[자만스키 타워 준공]
쥐시외 캠퍼스 중앙에 행정 업무를 총괄하는 초고층 타워인 자만스키 타워가 완성되었습니다. 파리 라틴 지구 어디서나 보이는 대학의 상징으로서 행정의 심장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현대적인 파리 대학교 과학부의 위용을 시각적으로 선포한 사건입니다.
지상 24층 규모로 건설되어 당시 파리에서 가장 높은 교육용 건축물 중 하나였습니다. 행정 서비스뿐만 아니라 주요 연구 센터들이 입주하여 효율적인 통합 운영을 가능케 했습니다. 훗날 석면 제거 공사를 거쳐 더욱 현대적인 모습으로 재탄생하여 현재 소르본 대학교 본부로 쓰입니다.
1968
[5월 학생 혁명의 폭발]
소르본 광장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가 전 프랑스를 뒤흔드는 68 혁명으로 번졌습니다. 보수적인 대학 체제와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분노가 소르본 캠퍼스를 점령하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건은 수백 년간 유지된 파리 대학교 해체의 결정적인 불씨가 되었습니다.
소르본 본관 대강당은 학생들의 열띤 토론과 직접 민주주의의 실험장이 되었습니다. 정부의 공권력 투입과 학생들의 저항은 현대 프랑스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정부는 기존의 거대 대학 체제를 해체하고 학생들의 자율권을 확대하는 대대적인 개혁안을 발표했습니다.
1970
[파리 제4 대학교(파리 소르본) 탄생]
파리 대학교의 유서 깊은 인문학부를 계승하여 파리 제4 대학교가 공식적으로 창설되었습니다. 소르본의 명칭과 역사적 본관 건물을 직접적으로 이어받으며 인문학 교육의 자부심을 지켰습니다. 전형적인 엘리트 인문학 교육 기관으로서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의 최고 수준 교수진이 이 대학으로 집결하여 학문적 정통성을 유지했습니다. 법적으로는 1970년 말에 설립되었으나 실제적인 독립 운영은 이듬해인 1971년부터 본격화되었습니다. 훗날 '파리 소르본 대학교'라는 정식 명칭을 통해 브랜드 가치를 전 세계에 떨치게 됩니다.
1971
[파리 제6 대학교(UPMC) 독립 출범]
파리 대학교의 과학부와 의학부를 계승하여 파리 제6 대학교가 정식으로 출범했습니다. 쥐시외 캠퍼스에 본부를 둔 이 대학은 프랑스 최고의 과학 연구 대학을 목표로 설정했습니다. 물리, 화학, 생물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구 실적을 내며 성장을 가속화했습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교수로 보유한 과학의 산실로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독립 이후 연구 자율성을 바탕으로 수많은 국가 프로젝트와 국제 공동 연구를 주도했습니다. 이 대학은 훗날 '피에르 에 마리 퀴리 대학교'로 이름을 바꾸며 세계적인 과학 명문이 됩니다.
1974
[피에르 에 마리 퀴리 대학교 명명]
파리 제6 대학교가 과학계의 전설인 퀴리 부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학교명을 공식 변경했습니다. '피에르 에 마리 퀴리 대학교(UPMC)'라는 이름으로 국제적인 브랜딩을 강화했습니다. 과학적 정통성과 미래 지향적 연구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순간입니다.
이름 변경을 통해 대학의 정체성을 더욱 명확히 하고 우수한 해외 인재들을 적극 유치했습니다. 국제적인 대학 순위에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과학 대학으로 꾸준히 상위권에 랭크되었습니다. 2018년 소르본 대학교로 통합되기 전까지 UPMC라는 이름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2006
[소르본 아부다비 캠퍼스 개교]
아랍에미리트 정부와 파트너십을 맺고 아부다비에 소르본 대학교 해외 분교를 정식 설립했습니다. 프랑스 고등 교육의 우수성을 중동 지역에 전파하는 지적 외교의 상징적인 성과였습니다. 파리 본교와 동일한 커리큘럼과 학위를 제공하며 글로벌 영향력을 확장했습니다.
UPMC와 파리 소르본 대학교가 공동으로 참여하여 인문학과 과학 교육의 정수를 전파했습니다. 최첨단 시설을 갖춘 아부다비 캠퍼스는 지역 내 최고의 지식 허브로서 빠르게 안착했습니다. 소르본이라는 역사적 브랜드가 국경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는 중요한 국제적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2012
[세르주 아로슈의 노벨 물리학상]
소르본(UPMC)의 세르주 아로슈 교수가 개별 양자 시스템의 측정과 제어를 가능케 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양자 역학 실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미래 양자 컴퓨터 기술의 초석을 닦았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소르본이 21세기에도 과학 혁신의 선두임을 입증했습니다.
빛과 물질의 상호작용을 포착해내는 그의 섬세한 실험 기술은 과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소르본 대학교 소속 학자로서 노벨상의 계보를 잇는 그의 활약은 대학의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그의 연구실은 현재 전 세계 양자 물리 연구자들의 필수 방문 코스이자 성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2017
[소르본 대학교 설립 법령 공식 공표]
프랑스 정부가 파리 4대학과 6대학을 폐지하고 새로운 통합 '소르본 대학교'를 설립한다는 공식 법령을 공표했습니다. 수년에 걸친 복잡한 협의와 준비 끝에 통합 대학의 법적 탄생이 확정된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프랑스 고등 교육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통합 프로젝트가 매듭지어졌습니다.
정부 법령 제2017-596호에 의해 대학의 조직 구조와 거버넌스 체계가 명확히 규정되었습니다. 2018년 1월 1일자로 모든 통합 절차가 발효되어 권리와 의무를 승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프랑스 대학들의 국제적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한 국가적 결단이 실현된 것입니다.
2018
[통합 소르본 대학교의 위대한 출범]
파리 소르본 대학교와 피에르 에 마리 퀴리 대학교가 완전히 하나로 합쳐져 '소르본 대학교(Sorbonne Université)'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인문학부, 과학 공학부, 의학부의 3대 학부를 축으로 하는 거대 연구 중심 대학이 탄생했습니다. 소르본의 800년 역사를 계승하는 새로운 지적 거함의 출항입니다.
통합 즉시 유럽 최대 규모의 대학교 중 하나로 등극하며 글로벌 순위가 급상승했습니다. 전공의 벽을 넘나드는 융합 교육과 창의적 연구를 통해 인류의 미래 과제 해결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기존의 대학 평준화 모델을 넘어선 프랑스 최고의 명문 대학교로서 자부심을 되찾았습니다.
2021
[나탈리 드락-테망 제2대 총장 취임]
컴퓨터 과학 전문가인 나탈리 드락-테망 교수가 통합 소르본 대학교의 두 번째 총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통합 이후 대학의 도약을 이끌 혁신적인 여성 리더로서 큰 기대를 받으며 부임했습니다. 디지털 전환과 사회적 책임 강화를 새로운 핵심 경영 가치로 제시했습니다.
연구 중심 대학으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면서도 학생들의 교육 만족도를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와 환경 보호 연구를 대학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여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소르본 대학교가 세계 최고의 지식 거점으로 자리 잡기 위한 제2기 리더십의 야심찬 출발입니다.
2022
[알랭 아스페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
소르본 대학교(UPMC) 출신인 알랭 아스페 교수가 양자 얽힘 연구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양자 역학의 근본적인 원리를 실험적으로 증명하여 현대 정보 통신 기술의 한계를 극복할 길을 열었습니다. 소르본의 물리 연구가 21세기에도 인류를 선도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연구는 미래 양자 통신과 보안 기술의 발전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핵심적인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소르본에서 수학하고 연구한 그의 학문적 여정은 대학의 교육적 수월성을 다시금 입증한 사례입니다. 이 수상으로 소르본 대학교는 과학 전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전무후무한 기록 이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