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토르 아다모
가수, 싱어송라이터, 작가, 배우
최근 수정 시각 : 2026-01-07- 11:22:52
살바토르 아다모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태양 아래 태어나 벨기에의 광산 마을에서 성장하며, 유럽 샹송의 황금기를 수놓은 전설적인 음유시인입니다. 특유의 애수 섞인 목소리와 시적인 노랫말로 전 세계 팬들의 심금을 울린 그는 '눈이 내리네(Tombe la neige)'라는 불멸의 명곡을 통해 국경과 언어를 초월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1억 장 이상의 앨범 판매고를 기록하며 대중음악사의 거인으로 우뚝 섰음에도, 그는 언제나 겸손한 태도로 평화와 인류애를 노래해 왔습니다. 건강의 고비 속에서도 펜을 놓지 않고 음악적 혁신을 거듭하는 그의 삶은 단순한 연예인의 생애를 넘어 시대를 기록하는 하나의 문학적 서사와도 같습니다.
1943
[시칠리아 코미소 출생]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코미소에서 아버지 콘체토 아다모와 어머니 주세피나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가시지 않은 시기에 가난한 가정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떠나야 했던 평범한 노동자였습니다. 이 시칠리아의 뿌리는 훗날 아다모의 음악 세계에 흐르는 특유의 멜랑콜리와 따뜻한 감성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1947
전후 이탈리아와 벨기에 사이의 노동 협정에 따라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탄광 노동자로 이주하던 시기였습니다. 아다모는 벨기에에서 자라났지만 가정 내에서는 엄격한 이탈리아식 교육을 받으며 이중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했습니다. 광산 마을에서의 고단한 삶과 이주민으로서의 소외감은 그의 가사에 깊은 인본주의적 시각을 심어주었습니다.
1950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특히 시 쓰기와 외국어 습득 능력이 남달랐다고 전해집니다. 선생님들은 그가 장차 훌륭한 언론인이나 학자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학업을 적극적으로 독려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학교 도서관에서 시집을 탐독하는 동시에 기타를 독학하며 음악이라는 예술적 지평을 넓혀갔습니다.
1960
당시 10대 후반의 나이로 직접 작사하고 작곡한 노래를 들고 무대에 서서 기성 가수들을 압도했습니다. 파리에서 열린 결선 무대에서 보여준 독특한 음색과 시적인 가사는 심사위원들로부터 만장일치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아버지가 아들의 재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프로 가수의 길을 걷는 문이 되었습니다.
1962
초기에는 그의 약간 갈라지는 듯한 독특한 목소리에 대해 일부 제작자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다모는 자신의 음악적 신념을 굽히지 않고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곡들을 꾸준히 만들어냈습니다. 이 시기에 녹음된 초기 싱글들은 벨기에 라디오 방송을 통해 조금씩 입소문을 타며 대성공의 조짐을 보였습니다.
1963
[그대 없이는 메가 히트]
발표곡 'Sans toi, ma mie'가 벨기에와 프랑스 차트를 점령하며 순식간에 톱스타 반열에 올랐습니다.
애틋한 서정성이 돋보이는 이 발라드는 당시 유럽 청년들의 감수성을 완벽하게 저격하며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라디오 방송 횟수 기록을 경신하고 거리마다 그의 노래가 울려 퍼질 정도로 압도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 성공을 통해 아다모는 벨기에의 신예 가수를 넘어 유럽 전체가 주목하는 거물급 아티스트로 급부상했습니다.
[눈이 내리네 발표]
전 세계적인 불멸의 히트곡 'Tombe la neige'를 발표하여 지구촌 전체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연인을 기다리는 마음을 함박눈에 비유한 이 곡은 아다모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대표곡이 되었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외국 곡으로는 드물게 국민 가요급의 인기를 얻었으며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불렸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겨울 시즌만 되면 전 세계 라디오에서 빠지지 않고 흘러나오는 클래식 샹송의 정수로 꼽힙니다.
당시 인기 가수였던 길베르 베코의 오프닝 공연자로 무대에 섰으나 주연급 못지않은 환호를 받았습니다. 공연 후 평단은 그를 '새로운 샹송의 시인'이라 명명하며 그의 뛰어난 무대 장악력과 감수성을 극찬했습니다. 이후 아다모는 올랭피아 극장의 단골 아티스트가 되어 수십 차례 이상 이곳에서 매진 공연을 이어갔습니다.
1964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성공]
경쾌한 리듬의 'Vous permettez, Monsieur?'를 발표하여 전 유럽 음악 차트를 휩쓸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에게 결혼 허락을 구하는 위트 있는 가사로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만 수십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국경을 넘나드는 흥행 위력을 과시했습니다. 이 곡을 통해 아다모는 슬픈 발라드뿐만 아니라 밝고 유쾌한 곡도 완벽하게 소화함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밤의 고독과 그리움을 폭발적인 감성으로 노래하여 그의 탁월한 가창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프랑스 전국 차트에서 수주 동안 1위를 차지하며 '아다모 전성시대'가 왔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습니다. 이 곡은 훗날 수많은 후배 가수들이 리메이크하며 샹송의 고전적인 텍스트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장미가 피고 지는 자연의 섭리를 인간의 사랑과 죽음에 투영한 철학적인 가사가 돋보이는 곡입니다. 아다모 특유의 섬세한 가사 쓰기는 이 시기에 이르러 평론가들로부터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대중은 그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가사가 전달하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이야기에 매료되었습니다.
1965
[내 손을 그대 허리에]
사랑의 순수함을 예찬한 명곡 'Mes mains sur tes hanches'를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서정적인 멜로디는 듣는 이들에게 평온한 휴식과 낭만적인 분위기를 선사했습니다.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최고의 프러포즈 곡으로 널리 쓰이며 시대의 아이콘이 된 노래입니다. 아다모는 이 곡의 대히트로 자신의 음악적 브랜드인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전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1966
[미국 카네기 홀 공연]
뉴욕 카네기 홀에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며 미국 시장에 화려하게 입성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비영어권 가수로서 미국 최고의 클래식 공연장에서 단독 공연을 갖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미국 언론은 그를 '프랑스어권의 비틀즈'라 부르며 그의 독보적인 감성에 높은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현지 관객들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 아다모가 전달하는 서정적 선율에 매료되어 기립 박수를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
그의 음악적 뿌리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 콘체토 아다모가 시칠리아에서 익사 사고로 별세했습니다.
성공의 최정점에서 맞이한 가족의 비극은 아다모에게 형언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가난한 광부 생활을 하면서도 아들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 헌신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아다모는 이 사건 이후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짊어지며 한층 더 성숙해졌습니다.
1967
[인샬라 평화의 노래]
중동 전쟁의 긴장 속에서 평화를 갈구하는 명곡 'Inch'Allah'를 발표하여 거대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중동 지역의 화합을 기원하며 쓴 이 곡은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큰 논란과 열광을 동시에 불렀습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방송 금지 처분을 내리기도 했으나 대중의 지지는 압도적이었으며 평화의 찬가가 되었습니다. 이 곡을 기점으로 아다모는 단순한 연애 가수를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지성적 예술가로 진화했습니다.
당시 인기 가수들이 영화에 출연하던 유행 속에서도 아다모는 진지한 연기 태도로 임해 호평받았습니다. 그의 차분하고 지적인 이미지는 영화 속 캐릭터와 잘 어우러져 관객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이후 그는 몇 편의 영화에 더 주연으로 참여하며 다재다능한 종합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1968
여름날의 낭만을 노래한 이 곡은 아다모의 세련된 편곡 감각과 보컬의 유연함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이 곡은 수많은 무도회와 축제에서 연주되며 대중문화 속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성공을 거뒀습니다. 아다모는 이를 통해 유행을 타지 않는 자신만의 고전적 스타일을 확립해 나갔습니다.
1969
부모가 된 기쁨을 담아 아이를 위한 따뜻한 노래들을 작곡하며 팬들과 감동을 나눴습니다. 바쁜 세계 투어 중에도 가정을 챙기는 다정한 아버지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습니다. 안토니는 훗날 아다모의 음악적 유산을 관리하고 소통하는 든든한 파트너로 성장하게 됩니다.
니콜은 아다모가 유명해지기 전인 무명 시절부터 그의 곁을 묵묵히 지켜준 첫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화려한 연예계에서도 매우 모범적이고 견고한 것으로 팬들 사이에서 유명합니다. 가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의 성품은 이후 수십 년간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1970
가수로서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정극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한 중요한 작품이었습니다. 영화의 주제곡 또한 직접 부르며 연기와 음악이 공존하는 그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대중은 아다모의 차분하고 깊은 사유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감독 및 주연 도전]
영화 'L'Île aux coquelicots'에서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과 주연을 모두 소화했습니다.
그의 시적 상상력이 영상으로 구현된 이 작품은 아다모만의 탐미적인 미학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단순한 연기를 넘어 제작 전반을 지휘하며 창조적인 예술가로서의 욕구를 마음껏 발산했습니다. 상업적인 흥행을 넘어 한 예술가가 지닌 다채로운 재능을 증명한 용기 있는 시도로 기록됩니다.
1971
그의 서정적인 가사와 멜로디는 일본인 특유의 감수성과 완벽하게 결합되어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일본 팬들은 그의 가사를 일본어로 직접 번역해 따라 부르는 등 거장에 대한 깊은 존경을 보였습니다. 이후 아다모는 매년 일본을 방문하여 무대에 서는,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서구 가수가 되었습니다.
1972
[꿈꾸는 이들에게 앨범]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자 한 음반 'A ceux qui rêvent encore'를 발매하여 호평을 받았습니다.
사회의 부조리와 꿈을 잃은 청춘들을 향한 위로의 메시지를 세련된 멜로디에 담아냈습니다. 전통 샹송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동시대적인 사운드를 수용하여 음악적 정체를 극복했습니다. 비평가들은 그가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는 통찰력 있는 아티스트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1975
[이것이 나의 인생 발표]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자전적인 곡 'C'est ma vie'를 발표하여 팬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무대 위에서 살아온 수십 년의 세월을 담담하고 진실하게 노래하여 그의 인생관을 드러냈습니다. 이 곡은 오늘날까지 그의 모든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가장 감동적인 넘버로 꼽힙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가사의 무게감이 더해져 듣는 이들에게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유도합니다.
1976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노래로 힘을 보태고자 했으나 일부의 오해를 사기도 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정치를 넘어선 인류애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후 가사에서 사회적 비중이 높아졌습니다. 이 경험은 아다모가 훗날 평화 대사로 활동하는 데 중요한 정서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1977
단순한 유행가가 아닌 특정 국가의 아픔에 동참하는 태도로 유럽 지성계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스페인어 버전으로도 제작되어 현지에서 엄청난 반응을 얻으며 자유의 상징과도 같은 곡이 되었습니다. 아다모는 음악이 국경을 허물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입증해 보였습니다.
1979
안네트 할스트와의 인연으로 태어난 딸로, 아다모는 그녀를 각별한 애정으로 보호하며 키웠습니다. 딸에 대한 사랑을 가사에 녹여내며 가족의 가치를 다시금 대중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이 시기 그의 음악은 이전보다 더욱 따뜻하고 포용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습니다.
1980
아이들이 매스컴의 노출 없이 평범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철저하게 사생활을 지켰습니다. 벤자민은 훗날 아버지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아 록 밴드 등에서 음악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가정에서 얻는 안식은 아다모가 쉼 없이 세계 공연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TBC 고별방송에서 한국인을 위로함]
동양방송(TBC)의 고별방송에서 한국어로 그의 대표곡 <눈이 내리네>를 부르며 한국 팬들의 슬픈 마음을 따뜻한 마음을 담아 위로해 주었습니다. 정말 그 방송을 들었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1980년 11월 30일, 동양방송의 마지막 방송에서 살바토르 아다모는 한국어로 자신의 히트곡인 <눈이 내리네 (Tombe la Neige)>를 열창하며 특별한 순간을 선사했습니다.
1981
80년대 초반의 전자 음악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도입하며 음악적 노화를 거부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인간 내면의 고독과 소통의 갈망을 수족관이라는 메타포에 담아 표현한 수작입니다. 팬들은 그의 끊임없는 실험 정신에 박수를 보냈으며 상업적으로도 견실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82
과거에 대한 회상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균형 있게 담아내어 중장년층 팬들에게 큰 공감을 샀습니다. 수록곡들은 각종 라디오 차트 상위권에 오르며 아다모의 음악적 생명력이 여전함을 증명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유럽 전역에서 대규모 콘서트 투어를 진행하며 식지 않는 인기를 과시했습니다.
1984
세계 투어 중 갑작스럽게 쓰러졌다는 소식에 전 세계 팬들은 큰 충격에 빠져 그의 회복을 기도했습니다. 그는 수술 후 수개월 동안 모든 외부 활동을 끊고 조용히 요양하며 건강 회복에만 전념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예술가로서의 속도를 조절하게 된 중대한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1985
팬들은 기적처럼 돌아온 아다모를 향해 눈물 섞인 응원과 뜨거운 기립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후 그는 이전보다 한층 더 깊어진 감성과 여유로운 무대 매너로 대중을 사로잡았습니다. 사선을 넘나든 경험은 그의 음악에 생명의 소중함과 감사의 마음을 짙게 드리우게 했습니다.
1987
[유랑의 사람들 발표]
집 없는 사람들과 소외된 이들에 대한 애정을 담은 곡 'Les gens du voyage'를 발표했습니다.
이주민의 자녀로 살았던 자신의 뿌리를 투영하여 소외된 삶에 대한 깊은 공감을 노래했습니다. 전통적인 샹송 리듬에 월드 뮤직의 색채를 입혀 음악적으로도 새로운 평가를 받았습니다. 비평가들은 아다모가 시대의 그늘을 밝히는 등불 같은 예술가라며 다시금 주목했습니다.
1989
[별들의 길 위에서]
꿈과 서정을 노래한 앨범 'Sur la route des étoiles'를 발매하며 90년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90년대의 현대적인 편곡 기법을 대담하게 수용하면서도 아날로그적 감성을 유지했습니다. 이 앨범을 통해 그는 젊은 신세대들에게도 자신의 음악이 유효하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수록곡들은 라디오 차트 상위권을 유지하며 그가 영원한 현역임을 만천하에 알렸습니다.
1992
노래 가사로 다 담지 못한 내면의 깊은 이야기들을 문학적인 형식을 빌려 대중과 나누었습니다. 그의 유려한 문체는 평단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즉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습니다. 음악가와 문학가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확립하며 인문학적 소양을 널리 알린 시기였습니다.
1993
평소 노래를 통해 강조해온 평화와 화합의 가치를 실무적인 구호 활동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와 남미의 분쟁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어린이들의 고통을 보듬고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의 진정성 있는 행보는 많은 팬들이 자선 활동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선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1995
아프리카 현지 리듬과 프랑스어 가사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음악적 외연을 크게 넓혔습니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현지 음악가들과 협업하며 신선한 창작의 자극을 얻었다고 밝혔습니다. 팬들은 멈추지 않는 그의 창조적인 에너지에 찬사를 보냈으며 대중적으로도 호조를 보였습니다.
1998
중년의 안정기에 접어든 거장이 보여주는 여유와 깊은 성찰이 돋보이는 명반입니다. 수록곡들은 삶의 소소한 아름다움을 예찬하며 많은 사람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프랑스어권 국가뿐만 아니라 독일과 이탈리아 등에서도 높은 앨범 판매 기록을 세웠습니다.
2001
이탈리아 이주민의 아들이 벨기에 최고의 영예인 작위를 받은 것은 국가적 통합의 상징이었습니다. 아다모는 수여식에서 '광부의 아들이 이 자리에 선 것은 무한한 영광'이라며 소회를 밝혔습니다. 이후 그는 공식 명칭에 기사를 포함하게 되었으며 벨기에를 대표하는 국가적 얼굴로 존중받았습니다.
2002
프랑스의 소중한 문화 유산인 샹송을 전승하고 발전시킨 그의 공로를 국가가 공인한 것입니다. 벨기에와 프랑스를 잇는 문화 가교 역할을 해온 그의 위상이 다시 한번 굳건해졌습니다. 이 수훈으로 그는 명실상부한 범유럽권의 대표적 지성이자 예술가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습니다.
2004
갑작스러운 소식에 전 세계 음악계는 큰 충격에 빠졌으며 그의 회복 여부는 불투명했습니다. 그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내심 있게 재활에 전념하며 무대 복귀를 향한 의지를 다졌습니다. 전 세계 팬들은 그가 다시 노래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수만 통의 쾌유 편지를 보냈습니다.
2005
예술적 성취뿐만 아니라 전 인류적 평화에 기여한 그의 삶에 대한 국가적 경의가 담겼습니다. 재활 치료 중에 전해진 이 소식은 그에게 커다란 삶의 희망과 정신적인 위안을 안겨주었습니다. 프랑스 대통령은 그를 '국경을 초월한 사랑과 지성의 대변인'이라 칭송하며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당시 투병 중이었던 그를 격려하기 위해 동료 가수들이 무대에 모여 그의 명곡을 헌정했습니다. 그는 비록 무대에 직접 서지는 못했지만 영상 메시지를 통해 감사의 인사를 전해 모두를 울렸습니다. 이 시상식은 아다모가 유럽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거대한 무게감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습니다.
2007
[기적의 복귀 앨범 발표]
뇌출혈을 극복하고 3년 만에 정규 음반 'La Part de l'ange'를 발표하며 기적적으로 복귀했습니다.
투병의 고통을 딛고 만들어낸 이 앨범은 더욱 투명하고 깊어진 거장의 영혼을 담아냈습니다. 그는 앨범 발매 후 여러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변함없는 미성을 선보여 대중에게 큰 감동을 줬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의 복귀는 투병 중인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2008
[후배들과의 듀엣 앨범]
신예 아티스트들과 자신의 히트곡을 재해석한 'Le Bal des gens bien'을 발매해 흥행했습니다.
칼라 브루니, 줄리앙 도레 등 프랑스 최고 인기 가수들이 대거 참여하여 그의 위상을 증명했습니다. 고전적인 곡들이 세련된 사운드로 재탄생하며 젊은 층까지 그의 팬덤으로 흡수했습니다. 이 앨범은 차트 상위권에 장기간 머물며 아다모가 여전히 시대의 아이콘임을 입증했습니다.
2010
팬들과 일대일로 마주 앉아 대화하는 듯한 소박하고 진실된 가사가 일품인 작품입니다. 화려한 기교 대신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내면의 진실을 담는 데 주력했다고 밝혔습니다. 어쿠스틱한 선율 속에 녹아든 거장의 음성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위로와 안식을 주었습니다.
2012
[인생의 회전목마 앨범 발매]
삶의 희로애락을 상징하는 음반 'La Grande Roue'를 발표하고 대규모 투어를 진행했습니다.
인생을 거대한 관람차에 비유하여 철학적인 통찰력을 담아 노래한 고품격 샹송 앨범입니다. 그는 7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지치지 않는 무대 매너를 보이며 진정한 예술가의 혼을 보여주었습니다. 음악 평론가들은 그가 나이가 들수록 노랫말의 문학적 수준이 정점에 달하고 있다고 극찬했습니다.
2013
시칠리아 출신으로서 이탈리아를 빛낸 세계적 거장으로 최고의 예우를 받으며 등장했습니다. 무대에서 대표곡을 이탈리아어로 부르자 전 관객이 일어서서 존경의 기립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 순간은 아다모의 이탈리아적 뿌리와 유럽적 성취가 하나로 만나는 역사적인 장면이었습니다.
2014
60년대 자신을 무대로 이끌어주었던 베코에 대한 깊은 존경과 그리움을 곡마다 담았습니다. 베코의 역동적인 원곡들을 아다모만의 부드러운 감성으로 재해석하여 평단의 높은 지지를 얻었습니다. 샹송의 두 거장 사이에 흐르는 아름다운 유대감을 보여주며 전통의 가치를 일깨웠습니다.
2016
기사 작위에 이어 벨기에 국적 예술가가 받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명예를 거머쥐었습니다. 벨기에 문화 발전과 국가 이미지 제고에 기여한 공로를 국가가 다시 한번 공식화한 것입니다. 그는 수훈 소감에서 '몽스의 탄광 소년이 여기까지 온 것은 기적 같은 사랑 덕분'이라 말했습니다.
2018
[당신이 아신다면 앨범 발표]
비밀스러운 고백과 고요한 사색을 담은 앨범 'Si vous saviez...'를 성공적으로 발매했습니다.
70대의 나이에도 음악적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소 실험적인 사운드를 도입했습니다. 수록곡들은 가사의 깊이와 사운드의 세련됨이 조화되어 성인 음악 차트 상위권에 올랐습니다. 아다모는 여전히 매일 시를 쓰고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창조적인 삶의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2021
가수로서 보낸 60년의 세월을 문학적인 필치로 정리하며 독자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넸습니다. 이 책은 벨기에와 프랑스 서점가에서 화제를 모으며 작가로서의 명성을 다시금 입증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 상처와 현재의 평안을 가감 없이 서술하며 팬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갔습니다.
2023
[프랑스어 버전 팝 앨범]
영미권의 유명 팝송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부른 역작 'In French Please!'를 발표했습니다.
엘튼 존, 닐 영 등의 명곡들을 아다모만의 감성으로 재해석하여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80세의 고령에도 변함없는 열정적인 가창력과 탁월한 번역 감각을 보여준 명반입니다. 평단은 '거장의 품격이 느껴지는 혁신적인 시도'라며 그의 멈추지 않는 도전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80세 생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전해진 소식에 전 세계 팬들은 다시 한번 우려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는 의료진의 권고를 받아들여 무리한 활동 대신 절대적인 안정을 취하며 치료에 전념했습니다. 비록 무대는 멈췄으나 SNS를 통해 팬들에게 '반드시 건강하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겼습니다.
[팔순 맞이 국가적 축하]
80세 생일을 맞이하여 벨기에와 프랑스 공영 방송에서 그의 일생을 조명하는 특집 다큐를 방영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과 예술가, 그리고 수많은 팬들이 그의 장수와 쾌차를 비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가 유럽 문화사에 남긴 거대한 족적을 다시 확인하며 전 국민적인 존경을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병상에서 맞이한 생일이었으나 쏟아지는 사랑에 감동한 그는 다시 한번 일어설 의지를 다졌습니다.
2024
국경과 종교를 초월한 그의 평화 철학은 여전히 전 세계 많은 이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펜을 놓지 않고 새로운 시와 멜로디를 구상하며 다음 무대를 조용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다모는 오늘날 살아있는 샹송의 전설이자 인류애를 상징하는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