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 FC
축구 클럽, 스포츠 팀, 이탈리아 세리에 A, 피에몬테, 프로 스포츠 구단
최근 수정 시각 : 2026-01-17- 16:50:14
1906년 유벤투스에서 갈라져 나온 인사들에 의해 설립된 토리노 FC는 이탈리아 축구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영광과 가장 깊은 슬픔을 동시에 간직한 구단입니다. 1940년대 '그란데 토리노'라 불리며 세계를 호령했으나 수페르가 공중 참사로 팀 전체를 잃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황소(Il Toro)'라는 별칭답게 끈질긴 생명력으로 부활하여 1976년 다시 리그 정상에 섰으며, 오늘날까지 피에몬테를 대표하는 상징으로서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연혁은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난 토리노의 백 년사를 기록합니다.
1906
[토리노 축구 클럽 창단]
알프레드 딕을 중심으로 유벤투스에서 탈퇴한 이들과 FC 토리네세의 멤버들이 모여 새로운 클럽을 세웁니다. 보에링거 맥주홀에서 열린 창단 회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팀의 정체성이 확립되었습니다. 이는 피에몬테 지역의 새로운 축구 세력이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유벤투스의 회장이었던 알프레드 딕이 연고지 이전 갈등 끝에 나와 세운 팀입니다.
초기 상징색은 오렌지색이었으나 곧 현재의 자주색(Granata)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창단 직후부터 토리노 시내의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출처: Torino FC Official Website](https://torinofc.it/en/club/history)
1907
[리그 첫 시즌 준우승]
리그에 참가한 첫해부터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준우승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둡니다. 기존의 명문 구단들을 위협하며 북부 이탈리아 축구의 신흥 강자로 우뚝 섰습니다. 우승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팀의 잠재력을 전 세계에 보여준 해였습니다.
결선 라운드에서 밀란 등과 우승을 다투며 끝까지 경쟁을 이어갔습니다.
체계적인 선수 선발과 딕 회장의 과감한 투자가 성적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이후 수년 동안 토리노는 리그 최상위권을 유지하는 강팀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첫 더비 승리]
창단 후 치른 첫 공식 경기이자 첫 번째 토리노 더비에서 유벤투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둡니다. 벨로드로모 움베르토 1세 경기장에서 펼쳐진 이 경기는 숙명의 라이벌전인 '델라 몰레 더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신생 팀이 기존의 강호를 꺾으며 도시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경기 결과는 2대 1로 토리노의 승리였으며 페데리코 페라리가 역사적인 첫 골을 기록했습니다.
이 경기를 통해 유벤투스와 토리노 사이의 치열한 경쟁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창단 직후 거둔 이 승리는 구단의 초기 팬층을 결집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12
[비토리오 포초 부임]
훗날 이탈리아 축구의 전설이 되는 비토리오 포초가 기술 고문으로 합류하여 팀의 전술적 기틀을 마련합니다. 그는 영국식 축구의 장점을 도입하여 토리노의 경기력을 현대화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포초의 지도하에 팀은 한층 더 세련된 조직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포초는 토리노 선수들의 개별 능력을 팀 전술에 녹여내는 데 탁월했습니다.
그의 전술적 실험은 훗날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의 성공으로도 이어집니다.
이 시기 구축된 유스 시스템은 팀의 장기적인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21
[필라델피아 경기장 착공]
클럽의 전용 경기장이 될 스타디오 필라델피아 건설을 위한 첫 삽을 뜹니다. 이는 팀의 영광과 비극이 교차하게 될 성스러운 장소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팬들과 구단의 의지가 모여 지어지는 이 경기장은 토리노의 영혼으로 불리게 됩니다.
피에몬테 지역의 축구 중심지를 지향하며 당시 최신식 설비로 설계되었습니다.
구단주 엔리코 마로네 친자노의 전폭적인 재정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곳은 훗날 그란데 토리노 시절 6년 무패라는 경이로운 기록의 배경이 됩니다.
1926
[필라델피아 경기장 개장]
역사적인 필라델피아 경기장이 완공되어 포르티투도 로마와의 경기로 개장을 축하합니다. 15,000명의 관중 앞에서 화려한 개막전을 치르며 팀의 새로운 시대를 선포했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경기장을 넘어 토리노 시민들의 공동체적 상징이 되었습니다.
개장 경기에서 4대 0 대승을 거두며 새로운 터전에서의 순조로운 시작을 알렸습니다.
건축가 미켈레 페리가 디자인한 목조 스탠드는 당시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미관을 자랑했습니다.
이후 이 경기장은 상대 팀들에게는 공포의 장소이자 '황소들의 요새'가 되었습니다.
1927
[첫 우승 타이틀의 박탈]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유벤투스 선수 뇌물 매수 혐의가 제기되며 타이틀을 박탈당하는 시련을 겪습니다. '알레만디 사건'이라 불리는 이 스캔들은 이탈리아 축구사의 초기 대형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팀의 기량은 입증되었으나 명예에 큰 상처를 입은 시기였습니다.
유벤투스 수비수 루이지 알레만디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타이틀이 취소되었습니다.
토리노 구단은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연맹의 결정을 뒤집지는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오히려 팬들을 결속시켜 다음 시즌 우승을 향한 투지를 불태우게 했습니다.
1928
[공식적인 첫 스쿠데토 획득]
전년도의 논란을 실력으로 잠재우며 드디어 공식적인 첫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합니다. 결선 라운드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이며 이탈리아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는 자주색 유니폼을 입은 황소들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리보나티, 로세티, 발론치에리로 이어지는 '불가사의한 트리오'가 공격을 주도했습니다.
토리노 더비와 밀란 전 등 주요 경기에서 승리하며 자격을 완벽히 입증했습니다.
토리노 시내 전역은 자주색 깃발로 뒤덮여 첫 번째 공식 우승을 자축했습니다.
1935
[최초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
결승전에서 알레산드리아를 5대 1로 격파하며 역사상 첫 번째 코파 이탈리아 우승컵을 들어 올립니다. 리그뿐만 아니라 컵 대회에서도 강팀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준 시즌이었습니다. 이는 토리노가 컵 대회의 강자로 거듭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대거 출전하여 일방적인 경기를 펼친 끝에 승리했습니다.
이 우승으로 토리노는 이탈리아 내에서 더블을 노릴 수 있는 유일한 대항마로 꼽혔습니다.
선수들의 기술적 우위와 체계적인 전술 운용이 빛난 결과였습니다.
1939
[페루초 노보 회장 취임]
사업가 출신의 페루초 노보가 구단주로 부임하며 전설적인 '그란데 토리노'의 토대를 닦습니다. 그는 현대적인 스카우팅 시스템과 경영 기법을 도입하여 팀을 개조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보의 경영 혁신은 토리노가 세계 최강이 된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노보는 단순히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각 포지션에 최적화된 유망주를 영입했습니다.
비토리오 포초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전술적인 조언을 구단 운영에 반영했습니다.
그의 임기 동안 토리노는 이탈리아 축구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1942
[발렌티노 마졸라 영입]
베네치아로부터 당대 최고의 천재이자 영웅인 발렌티노 마졸라를 데려오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팀의 주장이 되어 전설적인 '그란데 토리노' 시대의 심장이자 뇌로 활약하게 됩니다. 마졸라의 합류는 팀의 전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격상시켰습니다.
이적료뿐만 아니라 에지오 로이크와 함께 영입되어 최강의 공격 듀오를 형성했습니다.
마졸라는 경기 흐름이 안 풀릴 때 소매를 걷어붙여 반격을 지휘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토리노 선수들은 단 한 경기도 질 수 없다는 강력한 정신력을 갖췄습니다.
1943
[역사적인 첫 번째 더블 달성]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초로 리그와 코파 이탈리아를 한 시즌에 모두 우승하는 '더블'을 완수합니다. 전쟁의 전운이 감도는 중에도 경기장 안에서는 무적의 행진을 이어갔습니다. 이는 토리노가 자국 내에서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올랐음을 뜻합니다.
리그에서는 독보적인 승점 차로 우승했으며 컵 대회 결승에서도 베네치아를 제압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그란데 토리노'라는 명칭이 대중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포지션에서 완벽한 밸런스를 갖춘 현대 축구의 시초라는 평을 받습니다.
1944
[전시 하키팀 위장 운영]
2차 세계 대전 중 선수들의 징집을 피하고자 소방관 신분으로 위장하여 경기를 이어갑니다. 토리노 피아트 등의 이름을 빌려 전력을 보존하며 스포츠의 맥을 끊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도 축구를 향한 열정으로 팀을 지켜냈습니다.
선수들은 공식적으로는 소방 업무를 수행하며 안전하게 훈련을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전시 비공식 리그에서도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전후 재개된 리그에서 곧바로 우승 경쟁에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1946
[전후 첫 스쿠데토 제패]
전쟁이 끝나고 다시 시작된 공식 리그에서 왕좌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우승합니다. 전쟁의 시련을 이겨낸 국민들에게 토리노의 축구는 승리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했습니다. 본격적인 5연패 왕조의 기틀이 마련된 해입니다.
주전 선수들 대부분이 건강하게 복귀하여 압도적인 경기력을 재개했습니다.
마졸라를 필두로 한 공격진은 경기당 평균 3골 이상의 화력을 쏟아부었습니다.
이 우승으로 토리노는 이탈리아 축구의 재건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1947
[국가대표를 점령한 토리노]
헝가리와의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선발 명단 중 무려 10명이 토리노 선수로 채워지는 기현상이 일어납니다.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필드 플레이어가 단일 클럽 소속으로 구성된 세계 축구사 유일의 기록입니다. 이는 당시 토리노의 전력이 곧 국가의 실력이었음을 증명합니다.
국가대표팀 감독 비토리오 포초는 토리노의 전술을 그대로 이탈리아 팀에 이식했습니다.
당시 상대였던 헝가리도 토리노 선수들의 유기적인 움직임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란데 토리노'가 세계 최강의 전력이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증거입니다.
1948
[한 시즌 125골 득점 기록]
리그 40경기 동안 무려 125골을 터뜨리며 공격 축구의 정점을 보여준 시즌입니다. 현대 축구에서도 도달하기 어려운 경이로운 득점 기록으로 리그 4연패를 달성했습니다. 상대 팀들은 토리노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느껴야 했습니다.
홈 경기인 필라델피아에서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전승에 가까운 성적을 냈습니다.
주전 공격수뿐만 아니라 수비수들까지 득점에 가담하는 토탈 사커의 시초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즌의 득점 기록은 현재까지 이탈리아 리그 역사상 최다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1949
[눈물 속의 리그 5연패 달성]
참사 후 남은 시즌을 유소년 선수들이 치렀으며 상대 팀들도 예우 차원에서 유소년을 출전시킵니다. 이탈리아 연맹은 토리노를 해당 시즌 공식 우승자로 선포하며 5년 연속 우승의 대기록을 마감합니다. 우승컵을 들어 올렸으나 기쁨 대신 애통함만이 가득한 순간이었습니다.
참사로 숨진 선수들의 명예를 위해 전 리그가 하나로 뭉쳐 토리노를 지원했습니다.
유소년 선수들은 형들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잔여 경기를 치렀습니다.
이 5연패는 토리노 역사의 가장 찬란한 영광이자 가장 아픈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수페르가 공중 참사]
포르투갈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비행기가 안개 속에서 수페르가 언덕의 성당 벽에 충돌합니다. 세계 최강이었던 '그란데 토리노' 선수단 전원과 코치진, 기자들이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탈리아 축구의 황금 세대가 한순간에 사라진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발렌티노 마졸라를 포함한 18명의 선수가 희생되었으며, 팀은 공중분해 되었습니다.
장례식에는 무려 50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전설들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배웅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이탈리아 축구는 한동안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잃고 암흑기를 보내게 됩니다.
1953
[비아레조 유소년 대회 우승]
참사 이후 무너진 팀 재건을 위해 유스 시스템에 집중한 결과 권위 있는 유소년 대회에서 우승합니다. 다시 황소의 뿌리가 살아나고 있음을 세상에 증명한 고무적인 소식이었습니다. 비극을 딛고 미래를 향한 희망의 씨앗을 뿌린 시기였습니다.
토리노의 전설들이 가르친 어린 선수들이 전국 최고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 대회 우승은 구단 운영진이 유스 육성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배출된 선수들은 훗날 60년대 팀의 주축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1959
[클럽 역사상 첫 번째 강등]
참사 이후 지속된 전력 약화와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세리에 B로 강등되는 아픔을 겪습니다. 절대 강자였던 팀의 몰락에 팬들은 다시 한번 슬픔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이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인고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요 선수들의 은퇴와 이적이 겹치며 리그 최하위권으로 떨어졌습니다.
명문 구단의 강등은 이탈리아 축구계 전체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이후 구단은 뼈를 깎는 쇄신을 통해 다음 시즌 즉시 승격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1960
[세리에 A로의 즉각 복귀]
하위 리그에서 보낸 지 단 한 시즌 만에 압도적인 성적으로 승격을 확정 지으며 1부 리그로 복귀합니다. 명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선수들의 투혼이 빛난 결과였습니다. 다시 한번 이탈리아 축구의 중심부로 돌아온 황소들을 팬들은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세리에 B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팀 분위기를 빠르게 추슬렀습니다.
새로운 경영진과 유망주들의 활약이 승격의 주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다시 상위권 경쟁을 위한 대대적인 투자가 시작되었습니다.
1964
[지기 메로니의 입단]
이탈리아의 조지 베스트라 불리는 예술적인 윙어 지기 메로니를 영입하며 부흥기를 꿈꿉니다. 그의 화려한 드리블과 자유분방한 모습은 참사 이후 잃어버렸던 구단의 스타성을 회복시켰습니다. 메로니는 토리노 팬들이 가장 사랑한 60년대의 영웅이었습니다.
제노아로부터 영입된 그는 경기장 안팎에서 화제를 몰고 다니는 아이콘이었습니다.
그의 창의적인 플레이는 토리노의 공격 축구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팬들은 그를 통해 그란데 토리노 시절의 화려함을 다시 회상했습니다.
1967
[지기 메로니의 비극적 사망]
팀의 최고 스타 메로니가 경기 후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로 숨지는 안타까운 비극이 일어납니다. 수페르가 참사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팀의 상징을 잃은 토리노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공교롭게도 가해 운전자는 훗날 토리노의 회장이 되는 틸리오 치아바렐라였습니다.
불과 24세의 나이로 요절한 그를 위해 수만 명의 시민이 조문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팀은 극심한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성적이 하락했습니다.
이 사건은 토리노가 겪은 운명적인 비극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곤 합니다.
1968
[두 번째 코파 이탈리아 우승]
메로니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슬픔을 딛고 선수들이 하나로 뭉쳐 컵 대회 우승컵을 차지합니다. 비극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황소의 근성을 다시 한번 증명한 쾌거였습니다. 이 우승은 하늘로 떠난 동료에게 바치는 선수들의 헌사였습니다.
결승 리그에서 인테르와 유벤투스 등을 따돌리고 정상을 탈환했습니다.
조르조 페리니 등 노련한 선수들의 리더십이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이 성공은 70년대 황금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희망의 증거였습니다.
1971
[세 번째 코파 이탈리아 제패]
결승에서 밀란과 치열한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며 다시 한번 컵 대회 정상에 오릅니다. 컵 대회의 강자라는 이미지를 굳히며 세리에 A 명문 구단으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선수들의 강한 집중력과 투혼이 돋보인 우승이었습니다.
전설적인 수비수들이 철벽 수비를 선보이며 팀의 승리를 지켜냈습니다.
이후 토리노는 컵 대회뿐만 아니라 리그 우승을 노리는 컨텐더로 부상했습니다.
이 우승컵은 구단 재건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1972
[파올로 풀리치 득점왕 등극]
팀의 새로운 주포 파올로 풀리치가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며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황소의 공격 본능을 가진 그는 팬들로부터 '풀리치치오'라는 애칭을 얻으며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풀리치의 성장은 토리노가 다시 대권을 노릴 수 있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폭발적인 스피드와 강력한 슈팅력으로 리그 내 모든 수비진을 무력화시켰습니다.
그는 이후 두 차례 더 득점왕에 오르며 70년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의 활약은 1976년 우승의 가장 핵심적인 전력이 되었습니다.
1975
[루이지 라디체 감독 부임]
이탈리아 축구에 전방 압박과 기동력을 강조하는 혁신적인 감독 루이지 라디체가 부임합니다. 그는 보수적인 수비 축구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공격 축구를 토리노에 이식했습니다. 라디체의 전술 혁명은 토리노를 다시 유럽 정상급 팀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선수 전원이 공수 양면에 가담하는 유기적인 플레이를 극도로 강조했습니다.
훈련 방식부터 식단까지 모든 것을 프로페셔널하게 개혁했습니다.
이 부임은 수페르가 이후 가장 위대한 성공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영입이었습니다.
1976
[27년 만의 스쿠데토 탈환]
수페르가 참사 이후 드디어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이탈리아 하키와 축구 정상에 복귀합니다. 유벤투스와의 역대급 우승 경쟁 끝에 승점 1점 차로 짜릿한 역전 우승을 일궈냈습니다. 토리노 시내 전체가 자주색 물결로 뒤덮여 광란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파올로 풀리치와 프란체스코 그라치아니 콤비가 도합 30골 이상을 터뜨렸습니다.
참사 생존자와 유족들이 경기장에서 선수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자축했습니다.
이 우승은 토리노가 비극을 완전히 극복하고 부활했음을 알리는 선언이었습니다.
1977
[기록적인 승점 준우승]
우승 당시보다 높은 승점을 기록했음에도 유벤투스에 밀려 아쉬운 2위를 기록합니다. 두 팀 모두 경이로운 승률을 기록하며 리그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우승 경쟁으로 남았습니다. 비록 준우승이었으나 전력 면에서는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시즌 내내 단 1패만을 기록하는 완벽에 가까운 경기를 펼치고도 준우승했습니다.
토리노 더비의 결과가 우승 향방을 가른 운명적인 시즌이었습니다.
팬들은 우승만큼이나 값진 성과라며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1980
[코파 이탈리아 준우승 기록]
연속해서 컵 대회 결승에 진출하며 80년대 초반 토너먼트의 강자임을 입증합니다. 비록 결승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셨으나 꾸준히 상위권 전력을 유지했습니다. 안정적인 수비를 바탕으로 리그와 컵 대회에서 균형 잡힌 성적을 냈습니다.
로마 등과의 결승전에서 접전 끝에 아쉽게 우승컵을 내주었습니다.
이 시기 배출된 수비수들은 국가대표팀의 핵심 전력으로 성장했습니다.
토리노는 다시 한번 팀 개편을 통해 대권 도전을 준비하는 시기를 보냈습니다.
1985
[리그 준우승과 유럽 복귀]
전술가 지지 라디체 감독 체제에서 다시 한번 리그 2위에 오르며 명가의 자존심을 세웁니다. 견고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세리에 A의 강호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유럽 무대 진출권까지 확보하며 전성기의 끝자락을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유벤투스와 밀란 등 거대 구단들 사이에서 얻어낸 값진 성과였습니다.
젊은 선수들의 성장이 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팬들은 다시 한번 유럽 대항전에서의 활약을 꿈꾸며 열광했습니다.
1989
[충격적인 두 번째 강등]
주축 선수들의 부진과 내부 갈등이 겹치며 리그 최하위권으로 떨어져 강등됩니다. 불과 몇 년 전 준우승을 다투던 팀의 몰락에 팬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토리노는 즉각적인 복귀를 위해 대대적인 인적 쇄신에 착수합니다.
경영진의 실책과 전술적 혼선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안타까운 시즌이었습니다.
강등 확정 후에도 팬들은 경기장을 지키며 팀의 부활을 기원했습니다.
이후 구단은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단 한 시즌 만에 복귀할 준비를 마칩니다.
1990
[미트로파 컵 우승 달성]
세리에 B 우승과 동시에 유럽 클럽 대항전인 미트로파 컵에서 정상에 오릅니다. 하위 리그에서의 시련을 우승컵으로 보상받으며 화려하게 1부 리그로 복귀했습니다. 이는 90년대 초반 토리노의 짧은 부흥기를 이끄는 서막이 되었습니다.
결승전에서 승리하며 다시 한번 유럽 무대에 황소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승격과 우승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팬들의 신뢰를 회복했습니다.
이 성공을 바탕으로 구단은 세계적인 수준의 선수들을 다시 영입하기 시작했습니다.
1991
[에밀리아노 몬도니코 부임]
팀에 가장 적합한 전술을 구사하는 에밀리아노 몬도니코 감독이 지휘봉을 잡습니다. 그는 견고한 수비와 날카로운 역습을 바탕으로 토리노를 다시 강팀으로 만들었습니다. 몬도니코의 지도력 아래 팀은 유럽 전역에서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실리적인 축구로 상위권 팀들을 연달아 잡아내는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선수들과의 깊은 소통을 통해 팀의 결속력을 극대화했습니다.
90년대 초반 토리노의 황금기는 그의 전술적 혜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992
[UEFA 컵 준우승과 아쉬움]
아약스와의 UEFA 컵 결승 2차전에서 세 번이나 골대를 맞히는 불운 끝에 무승부를 기록, 준우승에 머뭅니다.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아쉽게 패했지만 토리노의 투혼은 유럽을 감동시켰습니다. 몬도니코 감독이 의자를 치켜들며 항의한 장면은 구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결승전 시리즈 내내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였음에도 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암스테르담 원정에서 보여준 선수들의 눈물은 팬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비록 준우승이었으나 구단 역사상 최고의 유럽 대항전 성과로 기록됩니다.
1993
[다섯 번째 코파 이탈리아 우승]
로마와의 결승전에서 승리하며 마침내 통산 5번째 코파 이탈리아 우승컵을 차지합니다. 1년 전 유럽 대항전의 아쉬움을 씻어내는 감격적인 승리였습니다. 현재까지 토리노 FC가 거둔 마지막 메이저 대회 우승 기록입니다.
안드레아 실렌지가 멀티골을 터뜨리며 우승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선수들이 하나로 뭉쳐 일궈낸 값진 결실이었습니다.
토리노 팬들은 오랜만의 메이저 우승에 시내 광장을 가득 메우고 환호했습니다.
1996
[재정난에 따른 세 번째 강등]
구단의 극심한 재정 위기와 성적 부진이 겹치며 다시 세리에 B로 떨어집니다. 영광스러웠던 90년대 초반이 지나고 기나긴 암흑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팀은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주요 선수들을 매각하며 빚을 갚으려 했으나 이는 전력 약화로 이어졌습니다.
강등 이후 구단주가 여러 번 바뀌며 운영의 안정성을 상실했습니다.
팬들은 위태로운 구단의 상황을 보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2003
[승격과 강등의 반복 시대]
1부 리그와 2부 리그를 오가는 불안정한 행보를 지속하며 '엘리베이터 팀'이라 불리는 수모를 겪습니다. 재정적 기반이 무너진 상태에서 안정적인 전력을 구축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명문의 자존심이 바닥까지 떨어진 시기였습니다.
잠깐의 승격은 있었으나 곧바로 강등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습니다.
구단 운영진의 전술적 일관성 부족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팬들은 구단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부활이 불가능함을 깨달았습니다.
2005
[파산 선고와 구단 소멸 위기]
승격에 성공했으나 막대한 부채로 인해 리그 참가 자격이 박탈되고 파산을 선고받습니다. 100년에 가까운 역사가 한순간에 사라질 위기에 처하며 팬들은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노력으로 '로도 페트로치' 법을 통해 새로운 법인이 탄생합니다.
법적으로 구단이 해체될 위기였으나 토리노 시장과 시민들이 발 벗고 나섰습니다.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새로운 투자자를 찾아 나선 끝에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이 사건은 구단의 소유권과 명칭을 지키기 위한 위대한 시민 운동의 승리였습니다.
[우르바노 카이로 회장 인수]
미디어 재벌 우르바노 카이로가 파산한 구단을 인수하며 새로운 '토리노 FC'의 탄생을 알립니다. 그는 재정적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무너진 팀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카이로의 등장은 토리노가 현대 축구 시스템에 안착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수 직후 선수 한 명 없던 팀을 며칠 만에 재구성하여 리그에 참여시켰습니다.
그의 경영 능력 덕분에 팀은 빠르게 채무를 정리하고 정상 궤도에 올랐습니다.
팬들은 새로운 구단주에 대한 기대와 함께 냉정한 감시의 눈길을 보냈습니다.
2006
[클럽 창단 100주년 행사]
구단 창단 100주년을 맞이하여 피오렌티나와의 기념 경기를 치르고 성대한 축제를 엽니다. 파산의 위기를 극복하고 맞이한 백 주년이라 팬들에게는 그 의미가 더욱 남달랐습니다. 전설적인 선수들이 대거 참여하여 미래를 축복했습니다.
토리노 시내 곳곳에서 황소들의 행진과 전시회가 열려 장관을 이뤘습니다.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고 새로운 세기에도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다졌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 토리노는 다시 한번 이탈리아 축구의 뿌리 깊은 나무임을 입증했습니다.
2011
[잠피에로 벤투라 감독 부임]
노련한 전략가 잠피에로 벤투라가 지휘봉을 잡으며 팀의 전술적 안정을 가져옵니다. 그는 정교한 패스 축구와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팀의 체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했습니다. 벤투라 체제 아래 토리노는 다시 1부 리그의 강자로 복귀했습니다.
그는 유망주들을 발탁하여 국가대표급 선수로 길러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이후 5년 동안 팀을 이끌며 수페르가 이후 가장 긴 감독 재임 기간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전술적 유산은 현재까지도 팀의 운영 철학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2014
[20년 만의 유럽 대항전 복귀]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마침내 UEFA 유로파 리그 진출권을 획득합니다. 90년대 초반 이후 사라졌던 유럽 무대에 다시 황소의 이름을 올리는 쾌거를 거뒀습니다. 이는 카이로 회장 체제 이후 거둔 가장 눈부신 성취 중 하나입니다.
알레시오 세르치와 치로 임모빌레 공격 듀오의 활약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파르마의 자격 박탈로 얻은 기회였으나 실력 면에서 충분한 자격을 보였습니다.
팬들은 다시 유럽 전역을 누빌 팀의 모습을 보며 자부심을 되찾았습니다.
2015
[20년 만의 더비 승리 재현]
리그에서 유벤투스를 상대로 2대 1 역전승을 거두며 기나긴 더비 무승 행진을 끊어냅니다. 마침내 라이벌의 그늘에서 벗어나 도시의 주인을 가리는 경기에서 당당히 승리했습니다. 이 승리는 토리노 팬들에게 우승만큼이나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주었습니다.
다르미안과 콸리아렐라의 골이 터지는 순간 경기장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열세였던 라이벌 관계에서 대등한 위치로 올라선 상징적 사건입니다.
이후 팀은 강팀을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는 황소의 근성을 확실히 회복했습니다.
2017
[안드레아 벨로티의 활약]
팀의 새로운 상징인 안드레아 벨로티가 한 시즌 26골을 터뜨리며 리그 최고의 공격수로 부상합니다. '수탉'이라는 별칭을 가진 그는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마졸라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벨로티의 존재는 토리노가 중상위권을 유지하는 핵심 전력이었습니다.
빅클럽들의 막대한 제안을 뿌리치고 팀에 잔류하여 주장직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매 경기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로 팬들에게 자주색 긍지를 심어주었습니다.
벨로티는 현대 토리노 역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콘으로 남았습니다.
[스타디오 필라델피아 재개장]
참사 이후 폐허로 방치되었던 팀의 영혼, 필라델피아 경기장이 훈련장 및 유스 경기장으로 재건됩니다. 수십 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팀의 모습에 수많은 팬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는 구단의 전통과 역사를 복원하는 가장 상징적인 조치였습니다.
팬들의 기부금과 구단의 노력이 모여 웅장했던 옛 모습을 일부 복원했습니다.
현재는 1군 팀의 훈련장으로 사용되며 선수들에게 역사적 소명 의식을 심어줍니다.
재개장 행사 당일 수만 명의 인파가 모여 영원한 황소들의 귀환을 환영했습니다.
2019
[승점 63점 기록 경신]
시즌 승점 63점을 획득하며 38라운드 체제 도입 이후 팀 역사상 최다 승점 기록을 세웁니다. 발테르 마차리 감독의 지휘 아래 7위를 기록, 다시 한번 유로파 리그 무대를 밟게 되었습니다. 안정적인 수비와 조직적인 역습이 완성 단계에 이른 시즌이었습니다.
리그 내 강팀들을 잇달아 격파하며 이탈리아 축구의 복병임을 입증했습니다.
이 성과는 구단이 재정적 투명성을 유지하면서도 성적을 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유럽 전역에 다시 한번 자주색 황소들의 끈기를 보여준 자랑스러운 한 해였습니다.
2021
[이반 유리치 감독 부임]
강렬한 전방 압박과 전술적 강도를 중시하는 이반 유리치가 부임하여 팀의 문화를 바꿉니다. 그는 하위권에 머물던 팀을 단숨에 중상위권으로 끌어올리며 다시 경쟁력을 갖게 했습니다. 유리치 체제 하에서 토리노는 리그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선수 개개인의 피지컬과 전술 수행 능력을 극한까지 요구하는 스타일입니다.
그의 지도 아래 많은 유망주가 리그 정상급 수비수와 미드필더로 성장했습니다.
팬들은 유리치의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하키와 축구에 다시 한번 열광했습니다.
2024
[황소의 자존심을 지키는 오늘]
토리노 FC는 현재도 세리에 A의 핵심 구단으로서 이탈리아 축구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수페르가의 비극을 잊지 않으면서도 미래를 향한 끊임없는 도전을 멈추지 않습니다. 자주색 유니폼을 입은 황소들의 행진은 오늘도 피에몬테의 자부심으로 남았습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한 유스 시스템에서 미래의 전설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매 시즌 유럽 무대 복귀를 목표로 탄탄한 전력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토리노 FC는 앞으로도 이탈리아 축구의 가장 숭고한 정신을 상징하는 팀으로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