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폴 사르트르

작가, 철학자, 실존주의자, 극작가, 사회 운동가, 언론인,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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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폴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소설, 연극, 철학 저서 등 방대한 작품을 남기며 20세기 프랑스 지성계를 풍미했다. 특히 그의 실존주의 사상은 전후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행동하는 지식인의 상징으로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고 68혁명에 동참하는 등 삶과 철학을 일치시키고자 노력했다.

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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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장폴 사르트르 출생]

프랑스 파리 16구 외조부 집에서 부르주아 가문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알자스 지식인 슈바이처 가문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프랑스 해군 장교였다.

장폴 샤를 에마르 사르트르는 1905년 6월 21일 파리 16구에 있는 외조부 집인 미냐르로 13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르주아 가문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알자스의 지식인, 교수 가문인 슈바이처 가문 출신이었으며, 아버지는 파리 이공과 대학을 나온 프랑스 해군 장교였다.

1906

[아버지의 사망]

사르트르가 태어난 지 15개월 만에 아버지 장바티스트 사르트르가 황열로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성장했다.

어린 사르트르는 사르트르가 태어난 지 15개월이던 1906년 9월에 황열로 사망한 아버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1918

[리세 몽테뉴 및 앙리 4세 재학, 폴 니장과의 만남]

13살에 리세 몽테뉴를 다니기 시작했고, 이후 16살 무렵 리세 앙리 4세로 전학하여 평생의 친구이자 작가가 되는 폴 니장을 만났다.

13살에 사르트르는 리세 몽테뉴를 어느정도 다니다가 16살에 이르러 리세 앙리 4세로 전학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5학년, 6학년 시절을 보낸다. 거기서 그는 훗날 작가가 되는 폴 니장을 만나게 되며 니장과의 우정은 1940년 니장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922

[첫 문학 작품 창작]

리세 루이르그랑에서 폴 니장과 함께 고등사범학교 입학을 준비하며 두 편의 짧은 꽁트를 쓰며 첫 문학 작품을 창작했다.

1922년부터 2년 동안 사르트르는 폴 니장과 항상 같이 다니며 리세 루이르그랑에서 고등사범학교 입학 준비를 했다. 그곳에서 사르트르는 관습에 묻힌 삶을 경멸하고 풍자한, 지방 교사의 울적한 이야기를 다룬 짧은 꽁트 두 편을 쓰며 첫 문학 작품을 창작했다.

1924

[파리 고등사범학교 합격]

리세 루이르그랑 입학 2년 만에 폴 니장과 함께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합격하여 철학, 사회학, 심리학을 전공했다.

루이르그랑에 들어온 지 2년만인 1924년, 사르트르와 니장 둘 모두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합격했다.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 사회학,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레몽 아롱과 메를로 퐁티 등과 교제하였다.

1927

[야스퍼스 저서 번역 교정 참여]

폴 니장과 함께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 프랑스어 번역본을 교정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1927년에는 니장과 함께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교정하기도 했다.

1928

[아그레가시옹 시험 낙제]

1급 교원 자격 시험인 아그레가시옹 철학시험에 처음 응시했으나 낙제하여 지인들을 놀라게 했다.

1928년에 아그레가시온(1급 교원 자격) 철학시험에 낙제하였는데, 사르트르의 지인들은 모두 이에 놀랐다.

1929

[아그레가시옹 수석 합격 및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 결혼 제안]

아그레가시옹 철학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고, 당시 차석이었던 시몬 드 보부아르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며 평생의 반려자로 맞이했다.

이듬해 다시 응시하여 1929년 수석으로 합격했다(폴 니장도 같은 해에 합격). 같은 시험의 차석은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시몬 드 보부아르였으며, 이를 계기로 사르트르의 집을 방문한 그녀에게 사르트르는 1929년 계약 결혼을 제안하게 된다.

[군 입대 및 복무]

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11월에 군에 입대하여 기상 관측병으로 18개월 동안 복무했다. 이후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경험도 했다.

사범학교를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한 뒤, 그 해 11월 군에 입대하여 기상 관측병으로 18개월간 복무한다.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일도 있었으나 극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1931

[교사 생활 및 '진리의 전설' 집필]

군 제대 후 파리와 파리 근교의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진리의 전설'을 집필했으나 출판이 거부되었다.

제대 후인 1931년 그는 파리와 파리 근교의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다. 이때 그는 20페이지 분량의 「진리의 전설」을 집필하는데, 순전히 사르트르 자신의 지식만으로 저술된 이 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출판은 거부되었다.

1932

[후설의 현상학 접촉]

레몽 아롱으로부터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설명을 처음 듣고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2년 베를린 프랑스 문화원의 강사로 있던 레몽 아롱으로부터 처음으로 후설의 현상학에 관해 듣고 (1929년 후설이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한 강연을 직접 들을 기회를 놓친 것으로 보인다)

1933

[베를린 유학 및 현상학 연구]

프랑스 문화원 장학생으로 독일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나 현상학을 더욱 심층적으로 연구했다.

다음 해에 프랑스 문화원의 장학생으로 베를린으로 유학하여 현상학을 좀 더 깊이 연구한다.

1935

[메스칼린 주사로 인한 환각과 우울증]

상상력 실험을 위해 메스칼린 주사를 맞고 환각과 반년간의 우울증을 겪었으며, 이때 생긴 갑각류 공포증은 평생 지속되었다.

1935년에 상상력에 대한 실험을 위해 친구였던 의사 라갓슈로부터 메스칼린 주사를 받았는데, 이때 온몸을 게와 낙지가 감싸고 도는 환각을 겪었고 때문에 반년 동안 우울증 증세로 괴로워했다(갑각류에 대한 공포는 이후 평생 지속되었다).

1936

[완성 및 초기 철학서 출판]

단편소설 을 완성하고 철학서 《상상력》과 《자아의 초월성》을 출판하며 작가 및 철학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파리로 돌아와 다시 교직 생활을 하면서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1936년 단편 을 완성했고, 《상상력》(1936)과 《자아의 초월성》(1936)을 발표했다.

1938

[소설 《구토》 출판]

소설 《구토》를 출판하여 문학계에 널리 이름을 알렸으며, 철학서 《감정 이론 개요》도 함께 발표했다.

소설 《구토》를 출판(1938년)함으로써 문학계에 널리 알려진다. 같은 해 《감정 이론 개요》도 출판했다.

1939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및 단편집 《벽》 출판]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군에 소집되어 복무했으며, 같은 해 단편집 《벽》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소집되었다가, 단편집 《벽》을 출판했다.

1940

[독일군 포로 및 《바리오나》, 《상상계》 발표]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경험을 했고, 희곡 《바리오나 또는 천둥의 아들》과 철학서 《상상계》를 발표했다.

1940년 독일군에 포로가 되었는데, 희곡 《바리오나 또는 천둥의 아들》과 철학서 《상상계》를 발표했다.

1941

[레지스탕스 활동 참여]

가짜 신체장애 증명서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파리로 돌아왔고, 모리스 메를로퐁티 등과 함께 대독 저항 운동 단체를 조직하며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했다.

1941년에 가짜 신체장애 증명서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파리로 귀향, 멜퐁티 등과 같이 대독 저항 운동 단체를 조직하였다. (점령기 당시 애매한 태도로 그의 레지스탕스 참여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함.)

1943

[《존재와 무》 출간 및 철학적 지위 확립]

주요 철학서 《존재와 무》를 출간하여 철학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고, 희곡 도 발표했다.

1943년에 《존재와 무》를 내놓아 철학자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다. 그리 활발하지 않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 당시 레지스탕스에 적극적인 알베르 카뮈를 알게 된다. 같은 해 희곡 도 발표했다.

1944

[《닫힌 방》 및 《침묵의 공화국》 발표]

희곡 과 수필집 《침묵의 공화국》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1944년에 희곡 과 수필집 《침묵의 공화국》을 발표했다.

1945

[미국 강연 활동]

미국의 초청을 받아 여러 도시에서 강연을 진행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1945년 미국의 초청을 받아 각지에서 강연을 하였다.

[잡지 창간 및 《자유의 길》 발표]

잡지 를 창간하여 실존주의 사상을 널리 확산시켰고, 소설 《자유의 길》을 발표하며 문학적 명성을 이어갔다.

종전 후인 1945년 10월 제3의 길을 알리기 위한 잡지 지를 창간하여 실존주의에 대해서 논하면서 소설, 평론, 희곡 등 다채로운 문필 활동에 종사하였다. 소설 《자유의 길》도 1945년에 발표되었다. 해방 이후, 사르트르는 현저한 명성과 성공을 거뒀다.

1946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출판]

강연록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출판하여 실존주의 철학 사상을 대중에게 선언했고, 희곡 등을 발표했다.

1946년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출판했고, 희곡 와 도 같은 해에 발표했다.

1948

[민주 혁명 연합 준비 위원회 결성]

제3의 정치 세력 수립을 위해 '민주 혁명 연합 준비 위원회'를 결성했으나, 이념 갈등으로 1949년 해산되었다.

1948년 3월에는 제3의 정치 세력을 위해 민주 혁명 연합 준비 위원회를 결성했으나 친미화, 우익화로 내부 분열이 생겨 1949년 11월 해산되고 말았다.

1950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동조]

1950년대 초 프랑스 공산당의 노동력과 용기에 감동하여 지에 공산당에 동조하는 글을 썼고, 이로 인해 많은 동료들이 떠났다.

1950년대 프랑스 공산당의 노동력과 용기에 감동해 지에 프랑스 공산당에 동조하는 글을 썼으나 이로 인해 많은 동료들이 떠났다.

1956

[프랑스 공산당 지지 철회]

소련의 헝가리 침공 이후 권위주의를 비판하며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사르트르는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이 일어난 이후 권위주의를 비판하며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1960년대부터는 그 대안으로서 마오주의 파벌들을 지지하기 시작하였으나, 나중에는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묘사하였다.

1960

[《변증법적 이성 비판》 출판]

주요 철학서 《변증법적 이성 비판》 제1부를 출판하며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을 제시했다.

1960년에 《변증법적 이성 비판》 제1부를 출판했고 사후에 미완결로 나올 제2부를 준비했다. 이 책은 자신의 방법론을 적용하고자 하는 보다 실천적인 시기로 구별된다.

1964

[자서전 《말》 발표 및 명예 거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룬 자서전 《말》을 발표했다. 같은 해 레종 도뇌르 훈장과 콜레주 드 프랑스 정교수직도 거절했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서 열한 살 때까지의 자신의 삶을 그려낸 자서전 (1964)을 발표했다. 그는 1945년 레종 도뇌르를, 또 콜레주 드 프랑스의 정교수직을 거절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이 영광들은 작가를 제도화 시키며 그의 자유를 잃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를레트 엘카임 입양]

아를레트 엘카임을 입양하며 가족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1964년 사르트르는 아를레트 엘카임을 입양한다.

1964.10.22 1해당 사건의 피인용 횟수를 나타냅니다. 59세

[노벨 문학상 수상 거부]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어떤 인간도 살아있는 동안 신성시되길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사르트르는 자서전 발표와 함께 그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1964년 10월 22일, 스웨덴 아카데미는 장폴 사르트르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했다. 이틀 뒤 1964년 10월 24일, 그는 스웨덴 아카데미에 보낸 공개 서한에서 그것에 관련하여 더 길게 설명했으며, 그 본문은 나중에 프랑스 일간지 와 에 각각 게재되었다. 거절의 이유로 사르트르는 "어떤 인간도 살아있는 동안 신성시되길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

1967

[러셀 법정 의장 참여]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러셀 법정'의 의장을 맡아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비난하고 재판하는 활동에 참여하며 반전 운동에 기여했다.

그는 1967년에 벌써 전쟁, 그 가운데 특히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비난하고 재판하던 증인과 운동가들, 그리고 세계 각국의 지식인의 법정을 자처한 러셀 법정(Russell-Tribunal)에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의장으로서 나타났었다.

1968

[프랑스 5월 혁명 참여]

프랑스 5월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학생 시위를 지지했고, '르 몽드' 논단을 통해 학생 운동의 의의를 강조했다. 당시 드골 대통령이 그의 체포를 막았다는 일화가 있다.

1968년 5월 사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거리에서, 강단에서, 신문에서, 파업 공장의 입구에서 저항의 반향이 되었다. "세계의 학생 운동과 함께 우리가 여기서 표명한 연대는 [...] 모든 정치 체제와 조직(몇 예외를 제외하고)의 기만에 대한 첫 응답이다. 모든 언론기관(거의 예외 없이)은 몇 달간 이 운동을 왜곡하고 그 의미를 변질시키고자, 혹은 조롱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라며 1968년 5월 1일 의 논단에서 사르트르는 언명했다. 그를 체포할 것을 권하는 참모들에게, 당시 드골 대통령이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넣을 수는 없다"며 사르트르의 체포를 말렸다는 일화가 있다.

1971

[《집안의 천치》 출판]

귀스타브 플로베르에 대한 방대한 연구서 《집안의 천치》 1, 2권을 출판했다.

이후 문학 저술을 계속해 1971년 플로베르 평전 1,2권을 출판했다.

1973

[갑작스러운 실명]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인해 더 이상 문학 저술 활동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1973년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문학 저술을 중단했다.

1974

[김지하 석방 호소문 서명]

대한민국의 시인 김지하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자, 그의 시 '오적' 번역본을 읽고 석방 호소문에 서명하며 국제적인 인권 운동에 동참했다.

시인 김지하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선동죄 혐의로 체포되고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을 때,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의 번역본을 받아 읽어보고는 곧바로 석방 호소문에 서명을 해주었다고 한다(이듬해 2월에 김지하는 풀려났다).

1980

[장폴 사르트르 사망]

요독증에 걸려 파리 브루세 병원에서 75세의 나이로 폐수종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요독증에 걸린 사르트르는 1980년 4월 15일 만 75세에 임박한 나이로 파리 브루세 병원에서 폐부종으로 사망했다. 전 세계는 사르트르의 사망 발표로 큰 충격에 빠졌다.

[5만 명이 운집한 장례식]

그의 장례식에는 5만 명이 넘는 추모객들이 운집하여 파리 도로를 가득 메웠으며, 치안 당국 없이 진행된 대규모 장례 행렬은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1980년 4월 19일에 기행된 그의 장례식에는 5만 명의 사람들이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파리의 도로를 메우며 장례 행렬을 따라갔는데, 치안 당국 없이 진행된 엄청난 인파 가운데는 르 아브르나 파리에서 사르트르가 가르쳤던 옛 제자들, 1950년대의 공산당원과 동지들, 알제리에서의 평화를 외친 사회 운동가들, 마지막으로 젊은 마오이스트들이 있었다.

1993

[비앙카 램블린의 성착취 주장 논란]

프랑스 작가 비앙카 램블린이 회고록에서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에게 성착취를 당했다고 주장하여 논란이 일었다.

1993년 프랑스 작가 비앙카 램블린(본명 비앙카 비에넨펠트)은 그녀의 책 Mémoires d'une jeune fille dérangée(정신 나간 어린 소녀의 회고록)에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에게 성착취를 당했다고 썼다. 램블린은 리세 몰리에르에 재학 중일 때 교사 보부아르에게 성적 착취를 당했으며, 1년 후 보부아르가 그녀를 사르트르에게 소개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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