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걸
씨름 선수, 대학교수, 정치인
최근 수정 시각 : 2026-01-15- 12:35:03
대한민국 씨름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신체 조건을 가졌던 '인간 기중기' 이봉걸의 생애는 모래판의 거대한 혁명이었습니다. 205cm라는 유례없는 신장으로 등장하여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씨름의 황제' 이만기와 함께 1980년대 씨름 황금기를 이끈 '3이(李) 시대'의 주역이었습니다. 특히 이만기의 독주 체제를 무너뜨리고 천하장사에 등극하던 순간은 한국 스포츠사의 전설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은퇴 후에도 후학 양성과 정치, 방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씨름의 가치를 알리는 데 헌신한 그는, 단순한 거구를 넘어 인내와 투지로 가득 찬 거인의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1957
[거인의 탄생]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태어날 때부터 골격이 남달랐던 그는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훗날 대한민국 모래판을 뒤흔들 거구의 역사가 안동 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안동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그는 타고난 건강 체질로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어린 시절 이미 동년배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클 정도로 신체적 성장이 압도적이었습니다.
그의 큰 체구는 곧 운동 관계자들의 눈에 띄어 운동선수로서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0
[씨름과의 첫 만남]
중학교 시절 큰 키와 힘을 바탕으로 씨름부에 입단하며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준비합니다. 기초 체력을 다지며 씨름의 기본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너무 큰 키가 오히려 균형을 잡는 데 방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농구 등 다른 운동 종목의 권유도 받았으나 한국 전통 무예인 씨름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신체 조건을 장점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남들보다 두 배 이상의 땀을 흘리며 모래판을 굴렀습니다.
기술을 하나씩 익혀가며 안동 지역 내 청소년 씨름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1973
[대구 영신고등학교 전학]
더 체계적인 훈련을 위해 씨름 명문인 대구 영신고등학교로 진학합니다. 이곳에서 그는 뛰어난 지도자들을 만나며 기술 씨름의 정수를 배우게 됩니다. 고등학교 시절의 혹독한 훈련은 훗날 그가 프로 무대에서 버틸 수 있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대구 지역의 강력한 라이벌들과 겨루며 실전 감각을 극대화하는 시기를 보냈습니다.
특히 키 차이를 극복하려는 상대들의 공격을 방어하며 자신만의 방어 기술을 습득했습니다.
고교 전국대회에서 상위권에 입상하며 차세대 유망주로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76
[한남대학교 입학]
대전의 한남대학교(당시 숭전대학교) 체육교육과에 입학하며 대학 선수의 길을 걷습니다. 대학 무대에서도 그의 큰 키는 상대를 압도하는 가장 무서운 무기였습니다.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며 지와 체를 겸비한 운동선수로 성장했습니다.
대학 시절 전국체전 등 주요 대회에서 메달을 휩쓸며 대학 씨름계의 최강자로 군림했습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들배지기' 기술이 완성 단계에 이른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대전 지역 씨름 연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지역을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1983
[프로 씨름의 출범과 데뷔]
민속 씨름이 창설되면서 럭키금성 황소 씨름단(현 LG 투자증권)의 창단 멤버로 입단합니다. 프로 무대에 데뷔하자마자 그의 신체 조건은 모든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습니다. 대한민국 씨름이 화려한 TV 중계 시대를 여는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데뷔 당시 그의 공식 신장은 205cm, 체중은 140kg이 넘는 압도적인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그의 등장은 씨름이 단순히 힘의 대결이 아닌 체급과 신체 조건의 싸움임을 대중에게 각인시켰습니다.
팬들은 그를 '인간 기중기'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그의 경기에 열광적인 응원을 보냈습니다.
[제1회 천하장사 대회 참가]
역사적인 제1회 천하장사 결정전에 참가하여 프로 선수로서의 첫 신고식을 치릅니다. 비록 첫 우승은 놓쳤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상위권에 이름을 올립니다. 당시 우승자인 이만기와의 라이벌 구도가 이때부터 예견되었습니다.
압도적인 체구에도 불구하고 유연한 움직임을 보여주어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결승 토너먼트 과정에서 여러 강호를 꺾으며 결승 문턱까지 진격하는 저력을 발휘했습니다.
대중은 이만기라는 기술 천재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항마로 이봉걸을 점찍었습니다.
1984
[모래판의 3이(李) 시대 정립]
이만기, 이준희와 함께 '3이 시대'를 열며 민속 씨름 최고의 흥행 카드로 등극합니다. 각기 다른 신체 조건과 기술을 가진 세 선수의 대결은 전국적인 씨름 붐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이들 중 가장 높은 타점에서 공격하는 파괴적인 씨름을 구사했습니다.
이만기의 화려한 기술, 이준희의 노련한 경기 운영에 맞서 그는 뚝심 있는 공격을 펼쳤습니다.
세 선수가 맞붙는 날이면 거리의 사람들이 TV 앞에 모여들어 교통이 원활해진다는 설이 돌 정도였습니다.
이봉걸은 특히 이준희 선수에게는 강한 면모를 보이며 팽팽한 접전을 이어갔습니다.
1985
[허리 부상의 시련]
선수 생활의 위기를 가져온 고질적인 허리 통증과 싸우기 시작합니다. 거대한 체구를 지탱해야 하는 척추에 무리가 오면서 경기력 저하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은퇴를 고려하기보다 재활을 선택하며 다시 모래판으로 돌아왔습니다.
장시간의 훈련과 격렬한 경기 도중 쌓인 피로가 척추 디스크 증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진통제를 투혼하며 경기에 임하는 모습은 많은 팬에게 감동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주었습니다.
이 부상은 훗날 그의 선수 생활을 단축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나 그의 투지는 꺾지 못했습니다.
1986
[광고계의 블루칩 부상]
천하장사 등극 후 광고계에서 수많은 러브콜을 받으며 국민적인 인기를 누립니다. 특히 소속팀의 모기업인 럭키금성(LG)의 전속 모델로 활동하며 친근한 이미지를 쌓았습니다. 강한 힘과 순박한 미소를 가진 그의 캐릭터는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당시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나 가전제품 광고에 출연하여 큰 매출 상승을 이끌었습니다.
그의 광고 출연료는 당시 톱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고액이었습니다.
운동선수도 엔터테이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선구적인 사례 중 하나입니다.
[백두장사 타이틀 획득]
천하장사 아래 체급별 최고 권위인 백두급 대회에서 우승하며 기세를 올립니다. 허리 부상을 털어내고 완벽하게 부활했음을 전 국민에게 알린 결과였습니다. 이 우승은 곧이어 다가올 천하장사 등극의 전조 현상이었습니다.
자신보다 훨씬 작고 빠른 선수들의 밑파고들기 공격을 완벽하게 차단하며 승리했습니다.
결승전에서 보여준 가공할 만한 '밀어치기'는 상대 선수를 모래판 밖으로 밀어낼 정도로 위력적이었습니다.
우승 확정 후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간의 힘들었던 재활 시간을 회상했습니다.
[제10대 천하장사 등극]
마침내 이만기를 꺾고 생애 첫 천하장사 타이틀을 거머쥐며 모래판의 정점에 오릅니다. 당시 이만기는 무적의 행진을 이어가고 있었기에 그의 승리는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장충체육관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새로운 영웅의 탄생에 환호했습니다.
이만기의 허리 기술을 높은 타점의 들배지기로 맞받아치며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우승이 확정된 순간 그는 흥겨운 '봉걸 댄스'를 선보여 방송계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승리는 이봉걸이라는 이름이 이만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전설이 된 순간입니다.
1987
[제11대 천하장사 2연패]
전년도의 승리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천하장사 2연패라는 대기록을 달성합니다. 다시 한번 모래판을 제패하며 '이봉걸 시대'가 도래했음을 전 세계에 선포했습니다. 그의 씨름은 기술과 체격의 완벽한 조화로 평가받았습니다.
결승전에서 숙명의 라이벌 이만기와 다시 맞붙어 한 수 위의 실력을 과시했습니다.
높은 키에서 쏟아지는 들배지기는 가히 방어 불가능한 수준의 정밀함을 보였습니다.
이 우승으로 그는 통산 2회의 천하장사 기록을 보유하며 명예의 전당 후보로 등극했습니다.
[민속씨름 7연승 대기록]
대회 중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연승 행진을 이어가며 무결점의 경기를 선보입니다. 상대 선수들이 그의 샅바조차 제대로 잡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포스를 풍겼습니다. 이 시기는 이봉걸의 체력이 가장 절정에 달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대회 예선부터 결승까지 모든 경기를 완승으로 마무리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의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만으로 상대가 기권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습니다.
당시 씨름 관계자들은 '이봉걸을 넘으려면 다리를 공략해야 한다'는 전술을 수립하기도 했습니다.
1988
[재발한 허리 부상과 성적 부진]
고질적인 허리 디스크가 심화되면서 대회 참가를 포기하거나 조기 탈락하는 일이 잦아집니다. 통증 때문에 자신의 주특기인 들배지기를 구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팬들은 그의 부진에 안타까움을 표하며 빠른 회복을 기원했습니다.
정밀 진단 결과 수술이 필요하다는 권고를 받았으나 재활 치료를 고집하며 출전 의지를 보였습니다.
무리한 경기 출전으로 인해 무릎 관절까지 무리가 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이 시기 라이벌인 이만기는 다시 치고 올라오며 그와의 격차를 벌리기 시작했습니다.
1989
[마지막 혼을 담은 복귀전]
은퇴를 권유하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마지막 전성기를 불태우기 위해 다시 모래판에 섭니다. 비록 예전만큼의 폭발력은 아니었지만 노련한 기술로 신예 선수들을 압도했습니다. 관객들은 거인의 마지막 투혼에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부상 부위에 두꺼운 테이핑을 하고 모래판에 들어서는 그의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했습니다.
어린 선수들을 상대로 '선배의 위엄'을 보여주며 여러 대회에서 4강 이상의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경기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기를 바란다는 심경을 밝혔습니다.
1990
[공식 은퇴 선언]
정들었던 모래판을 떠나며 정식으로 은퇴를 선언합니다. 화려했던 7년간의 프로 생활을 마감하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하기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씨름계는 큰 별이 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대대적인 은퇴식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은퇴식에서 그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지지해준 팬들과 라이벌들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은퇴 당시 그가 남긴 '이만기는 최고의 라이벌이자 동료였다'는 말은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었습니다.
모래판에 자신의 샅바를 내려놓는 의식은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1991
[영화 '장사의 꿈' 출연]
은퇴 직후 영화계의 제안을 받아 스크린에 깜짝 데뷔합니다. 씨름 선수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에서 본인의 연기를 직접 선보이며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연기력은 서툴렀으나 그의 거구와 진솔한 목소리는 영화에 현실감을 더했습니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그는 프로 배우 못지않은 성실함으로 스태프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비록 영화가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의 새로운 도전은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이후에도 방송 프로그램에서 그의 영화 출연 경험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활용되었습니다.
1992
[가수 데뷔와 음반 발표]
놀랍게도 정규 음반을 발표하며 가수로 변신하여 대중 앞에 섭니다. 타이틀곡 '남자의 남자'는 그의 묵직한 베이스 음색과 어우러져 중장년층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든 거인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각종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노래 실력을 뽐내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씨름하는 것보다 더 긴장된다"는 소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씨름 선수가 은퇴 후 예술 분야로 진출하는 파격적인 행보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1993
[대전 지역 씨름 지도자 활동]
은퇴 후 고향 같은 대전 지역으로 돌아와 후배 씨름 선수들을 지도하기 시작합니다. 대전광역시 씨름협회의 기술 자문을 맡아 지역 꿈나무들을 발굴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의 풍부한 경험은 어린 선수들에게 큰 영감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졸업한 한남대학교 후배들을 위해 특별 지도를 하며 애정을 쏟았습니다.
체격 조건이 좋은 학생들을 직접 찾아가 씨름의 길로 인도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대전 지역 씨름이 전국 체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데 보이지 않는 공헌을 했습니다.
1995
[럭키금성 씨름단 코치 부임]
친정팀인 럭키금성(현 LG투자증권)의 코치로 부임하여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합니다. 선수 시절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팀의 전략 수립과 기술 지도를 총괄했습니다. 그는 후배들에게 성실함과 기본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엄격한 지도자였습니다.
선수들과 함께 숙소 생활을 하며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따뜻한 형님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지도한 선수들이 백두장사와 천하장사에 오르며 지도자로서의 능력도 입증받았습니다.
모래판 위에서의 승부사 기질을 이제는 벤치에서 발휘하며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1997
[씨름 해설위원 데뷔]
방송사 씨름 중계의 해설위원을 맡아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안방으로 전달합니다. 전문적인 지식과 걸출한 입담으로 시청자들에게 씨름의 재미를 한층 높여주었습니다. 현장의 긴박함을 본인의 경험에 빗대어 설명하는 방식이 호평을 받았습니다.
경기 흐름을 짚어주는 날카로운 분석과 정겨운 사투리가 섞인 해설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라이벌이었던 이만기와의 공동 해설은 팬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습니다.
해설위원 활동을 통해 씨름이 대중과 더 가까워지는 데 기여했습니다.
2001
[한남대학교 사회체육학과 교수 임용]
모교인 한남대학교의 교수로 임용되어 강단에 서기 시작합니다. 단순한 운동선수를 넘어 학문적으로 스포츠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전문가로 거듭났습니다. 학생들에게 씨름의 철학과 체육 지도자의 자세를 가르치며 큰 신망을 얻었습니다.
그의 강의는 현장 중심의 생생한 에피소드가 가득하여 수강 신청이 몰릴 정도로 인기였습니다.
운동선수 출신 교수가 드물던 시절에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며 학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포기하지 않는 거인의 정신"을 강조하며 인격 교육에도 힘썼습니다.
2003
[대전광역시 씨름협회 전무이사 역임]
지역 체육 발전을 위해 행정가로서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대전 씨름의 저변 확대를 위해 각종 대회를 유치하고 행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현장 출신 행정가로서 실질적인 개선책을 마련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지역 중고등학교 씨름부 창단을 지원하며 미래 꿈나무 육성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어려운 협회 재정을 안정화하기 위해 지역 기업들의 후원을 끌어내는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대전 씨름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화합을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2005
[씨름연맹 기술위원장 위촉]
대한씨름연맹의 핵심 보직인 기술위원장을 맡아 한국 씨름의 정책 방향을 결정합니다. 경기 규칙 개정과 선수 보호 대책 마련 등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했습니다. 씨름의 현대화와 글로벌화를 위한 중장기 프로젝트를 주도했습니다.
점점 체중 위주로 흘러가는 씨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기술 씨름의 부활을 주장했습니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위해 경기 시간 조정과 점수제 도입 등을 제안하며 혁신을 꾀했습니다.
원로 씨름인들과 젊은 선수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며 연맹 운영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2006
[지방선거 대전 서구의원 당선]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하여 대전 서구의회 의원으로 당선됩니다. 체육인 출신 정치인으로서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정계에 진출했습니다. 그의 압도적인 인지도가 선거 승리의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지역 내 생활체육 인프라 확충과 청소년 복지 향상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의회 활동 중에도 특유의 소탈한 성격으로 동료 의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정치 입문은 그가 단순히 스포츠 스타에 머물지 않고 사회 발전에 기여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2008
[지역 봉사 활동 및 사회 공헌]
정치인으로서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는 봉사 활동에 매진합니다. 연탄 배달, 무료 급식소 봉사 등 소외된 계층을 찾아가 직접 발로 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주민들은 그를 '우리 동네 거인 아저씨'라 부르며 신뢰를 보냈습니다.
장학 재단을 통해 어려운 환경의 운동선수 지망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경로 잔치를 정기적으로 열어 효를 실천하는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사회 공헌 활동은 체육인의 정계 진출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습니다.
2010
[제5회 지방선거 재도전]
더 큰 정치를 위해 다시 한번 지방선거에 도전하지만 고배를 마십니다. 비록 선거 결과는 좋지 않았으나 정치적 소신을 잃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결과에 승복하며 다시 체육과 교육의 현장으로 돌아갔습니다.
낙선 후에도 지역 발전을 위한 조언자 역할을 멈추지 않고 지속했습니다.
그는 "정치는 씨름처럼 결과가 명확하지만 과정 또한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전했습니다.
이후 정계보다는 체육 행정과 후학 양성에 더욱 전념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2
[지속되는 허리 질환과 수술]
선수 시절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대수술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합니다. 큰 키를 지탱하던 척추의 퇴행성 질환이 심각해지면서 거동이 불편해질 정도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는 수술 후 혹독한 재활 과정을 다시 한번 견뎌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수많은 씨름 동료와 제자들이 병문안을 다녀갔습니다.
재활을 통해 기적적으로 일어선 후 그는 건강의 소중함을 알리는 캠페인에 참여했습니다.
이 시기는 거인도 고난을 겪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시간이었습니다.
2015
[전설의 재회 - '씨름 올스타' 출연]
왕년의 씨름 스타들이 모인 방송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팬들에게 향수를 선사합니다. 이만기, 이준희 등과 함께 모래판 위에서의 추억을 공유하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이가 든 거구들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따뜻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방송 중 후배 선수들과 친선 경기를 하며 예전의 기술을 재현해 보였습니다.
그는 "씨름은 내 목숨과도 같다"며 여전한 씨름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과거의 라이벌들이 이제는 평생의 친구로 남은 모습은 프로그램의 백미였습니다.
2017
[씨름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 지원]
씨름의 세계적인 가치를 알리기 위해 유네스코 등재 추진위원회에 참여합니다. 한국의 전통 놀이인 씨름이 세계 문화유산이 되는 과정에서 상징적인 인물로서 힘을 보탰습니다. 그의 서명과 영상 메시지는 등재 과정에서 큰 설득력을 가졌습니다.
국제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씨름의 규칙과 철학을 직접 시연하고 설명했습니다.
남북 공동 등재를 위해 남북 체육 교류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씨름이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 데 있어 그의 존재감은 국가적인 자산이 되었습니다.
2019
[씨름 신드롬의 재점화와 멘토 활동]
최근 불기 시작한 '젊은 씨름' 열풍에 힘입어 신예 선수들의 멘토로 활약합니다. 젊은 후배들에게 기술뿐만 아니라 씨름 선수로서 가져야 할 정신 자세를 전수했습니다. 그는 신구 세대를 잇는 씨름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인기 예능 '씨름의 희열' 등에 자문으로 참여하여 방송의 깊이를 더했습니다.
후배 선수들에게 "자신의 신체를 믿고 기술을 과감히 걸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의 격려는 침체되었던 씨름계가 다시 대중의 관심을 받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2021
[복면가왕 깜짝 출연]
MBC '복면가왕'에 가면을 쓰고 출연하여 예상치 못한 노래 실력을 뽐냅니다.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패널들과 관객들은 거구의 정체가 전설의 이봉걸임을 알고 경악했습니다. 그는 음악을 통해 대중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어 행복했다는 소감을 남겼습니다.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소화하여 반전 매력을 선사했습니다.
그는 가면의 이름으로 '기중기'를 선택하여 자신의 전성기 별명을 추억했습니다.
정체가 공개된 후 씨름의 부활을 기원하는 간절한 메시지를 전해 뭉클함을 자아냈습니다.
2022
[대한씨름협회 홍보대사 위촉]
공식적인 씨름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전국을 돌며 씨름의 가치를 알립니다. 지역 축제와 연계된 씨름 대회를 홍보하며 관객 유치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여전히 모래판의 향기를 그리워하는 팬들에게 직접 찾아가는 정성을 보였습니다.
사인회와 토크쇼를 통해 젊은 팬들과 직접 소통하는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SNS를 활용한 씨름 홍보 콘텐츠에도 출연하며 시대의 변화에 발맞췄습니다.
그의 홍보 활동은 씨름에 대한 대중의 친밀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2023
[현재의 근황과 건강 관리]
여전히 대전에 거주하며 교수직 정년퇴임 후 명예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꾸준한 재활 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하며 씨름계의 크고 작은 행사에 원로로 참석 중입니다. 그의 삶은 후배 체육인들에게 하나의 교과서로 남았습니다.
최근에는 지팡이 없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허리 건강이 호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종종 동네 주민들과 씨름 이야기를 나누며 평범하지만 의미 있는 일상을 보냅니다.
이봉걸이라는 거인이 모래판에 뿌린 땀방울은 한국 스포츠사의 영원한 유산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