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퍼드 대학교

대학교, 연구 기관, 명문 대학교, 사립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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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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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스탠퍼드에 위치한 세계적인 명문 사립 연구 중심 대학입니다. 상위권 대학의 진지함과 캘리포니아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조화된 독특한 분위기를 자랑합니다. 실리콘 밸리와 인접해 첨단 산업 교육 및 연구에 유리하며, 구글, 나이키 등 수많은 혁신 기업 창업자를 배출했습니다. 8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고, 최고 수준의 재정 지원으로 학생들에게 기회를 제공합니다. 넓은 캠퍼스와 아름다운 지중해식 건축물이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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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

[리런드 스탠퍼드 탄생]

스탠퍼드 대학교의 공동 설립자이자 철도 거물인 리런드 스탠퍼드가 태어났습니다.

뉴욕주에서 태어난 그는 훗날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센트럴 퍼시픽 철도의 사장이자 정치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막대한 자산은 훗날 요절한 아들을 기리기 위한 대학교 설립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철도 산업을 통해 일군 부는 미국 서부 개발과 교육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828

[제인 스탠퍼드 탄생]

대학의 공동 설립자이자 초창기 운영을 실질적으로 이끈 제인 라스롭 스탠퍼드가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리런드 스탠퍼드와 결혼한 후 남편과 사별한 뒤에도 대학의 존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특히 재정적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보석을 팔아 교수들의 월급을 충당하는 등 강한 결단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대학의 초기 비전과 철학을 정립하는 데 남편 못지않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1861

[주지사 당선]

리런드 스탠퍼드가 캘리포니아주 제8대 주지사로 선출되었습니다.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남북전쟁 기간 동안 캘리포니아를 이끌었습니다. 정치적 성공은 그에게 사회적 영향력을 부여했으며, 이는 교육 기관 설립을 위한 법적 기틀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지사 재임 경험은 훗날 대학을 운영하고 정부와의 관계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1868

[아들 리런드 주니어 탄생]

스탠퍼드 부부의 외아들이자 대학교의 명칭이 된 리런드 스탠퍼드 주니어가 태어났습니다.

스탠퍼드 부부에게는 늦은 나이에 얻은 소중한 아들이었으며 가문의 희망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 함께 유럽 여행을 다니며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성장했습니다. 그의 존재는 부모에게 삶의 가장 큰 기쁨이었으며, 훗날 대학 설립의 유일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1869

[대륙횡단철도 완공]

리런드 스탠퍼드가 유타주 프로몬토리에서 대륙횡단철도의 마지막 황금 못을 박았습니다.

미국 동부와 서부를 잇는 철도망의 완성은 미국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이었습니다. 리런드는 철도왕으로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이는 대학 캠퍼스 부지 확보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확보된 자본은 훗날 8,180에이커에 달하는 거대한 캠퍼스를 조성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1872

[말의 움직임 촬영 실험]

리런드 스탠퍼드의 후원 하에 에드워드 머이브리지가 말의 달리는 모습을 연속 촬영했습니다.

말이 달릴 때 네 발이 모두 땅에서 떨어지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과학적인 실험이었습니다. 이 실험은 인류 최초의 연속 동작 사진으로 기록되어 영화 산업 발전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설립자의 과학적 호기심과 후원은 대학 설립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1884

[리런드 주니어 사망]

스탠퍼드 부부의 외아들이 이탈리아 여행 중 장티푸스로 인해 15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은 부모에게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이후 스탠퍼드 부부는 "캘리포니아의 아이들을 우리의 아이들로 삼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슬픔을 승화시키기 위해 부부는 아들의 이름을 딴 기념 대학을 세우기로 전격 결정했습니다.

1885

[상원의원 당선]

리런드 스탠퍼드가 캘리포니아주를 대표하는 미국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주지사 퇴임 후 중앙 정치 무대로 복귀하여 국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의원 활동 중에도 그는 대학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구상과 법적 절차를 병행했습니다. 그의 정치적 지위는 신생 대학이 사회적인 신뢰를 얻고 자리를 잡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대학 설립 증서 집행]

스탠퍼드 부부가 대학교 설립을 위한 공식적인 설립 증서를 집행하며 법적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정식 명칭은 '리런드 스탠퍼드 주니어 대학교'로, 아들을 기리는 기념비적 성격을 띠었습니다. 부부는 소유하고 있던 거대한 팔로알토 목장을 대학 부지로 기증했습니다. 이 증서는 대학이 지향해야 할 학문적 자유와 교육의 공익적 목적을 명확히 규정했습니다.

1887

[캠퍼스 정초석 거행]

대학교 건물 건설의 시작을 알리는 정초석(Cornerstone) 거행식이 열렸습니다.

메인 쿼드랭글 지역에 설치되었으며, 부지 설계는 유명 조경가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가 맡았습니다. 붉은 기와 지붕과 아치형 회랑을 특징으로 하는 독특한 캘리포니아풍 건축 양식이 채택되었습니다. 이날의 행사는 황량했던 목장이 세계적인 학문의 전당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1891

[초대 총장 선임]

유명한 어류학자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스탠퍼드 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그는 대학의 기틀을 닦고 초기 교수진을 구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설립자 부부는 유능한 교육자를 모시기 위해 동부 명문 대학의 인재들을 적극 영입했습니다. 조던 총장의 진보적인 교육 철학은 스탠퍼드가 초기부터 혁신적인 대학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대학교 공식 개교]

스탠퍼드 대학교가 첫 학생들을 맞이하며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첫해에 555명의 학생이 등록했으며, 당시로서는 드물게 남녀공학이자 비종파 대학으로 출발했습니다. 초창기 교수진 중 상당수가 코넬 대학교 출신이었기에 '서부의 코넬'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습니다. 개교 첫날부터 학비 면제와 실용적인 교육을 내세워 많은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1892

[대학교 출판부 설립]

학술적 지식 보급을 위해 스탠퍼드 대학교 출판부가 설립되었습니다.

대학 내에서 생산되는 연구 결과물을 출판하여 외부 세계와 공유하는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매년 수백 권의 양질의 학술 서적을 발행하며 지식의 보급이라는 대학 사명을 실천했습니다. 현재까지도 인문, 사회,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권위 있는 출판 기관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첫 빅 게임 승리]

라이벌인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와의 첫 미식축구 시합에서 승리했습니다.

이 경기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두 대학 간의 유서 깊은 경쟁인 '빅 게임'의 시작이었습니다. 승리 직후 캠퍼스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으며 대학의 결속력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스포츠를 통한 학내 문화 형성은 스탠퍼드 학생 생활의 중요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해양 연구소 설립]

몬터레이 베이에 홉킨스 해양 스테이션을 설립하여 해양 생물학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미국 서부 해안에서 가장 오래된 해양 연구 기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풍부한 해양 생태계를 바탕으로 연구원들이 독창적인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현장 중심의 연구를 강조하는 스탠퍼드의 학풍을 잘 보여주는 초기 사례입니다.

1893

[법학 교육 과정 개설]

대학교 내에 법학 교육을 위한 학부 커리큘럼이 처음으로 개설되었습니다.

이는 훗날 세계 최고의 법률 교육 기관인 스탠퍼드 법학전문대학원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초기부터 실무 중심의 법학 교육을 지향하여 유능한 법조인 양성에 힘썼습니다. 이후 전문 대학원 체제로 전환되면서 더욱 체계적인 전문 법학 교육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리런드 스탠퍼드 사망]

설립자인 리런드 스탠퍼드가 서거하며 대학은 중대한 재정적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사후에 그의 유산에 대한 대규모 법적 소송이 제기되면서 대학 자금이 동결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대학의 폐교를 예상했으나 미망인 제인 스탠퍼드의 의지로 운영을 지속했습니다. 이 시기의 인고는 훗날 스탠퍼드가 강력한 재정 독립성을 추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94

[첫 박사 학위 수여]

대학교 설립 이후 처음으로 박사(Ph.D.)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단순한 학부 교육을 넘어 고도의 학문 연구 기관으로서의 역량을 입증했습니다. 연구 중심 대학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박사를 배출하며 세계적인 학술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했습니다.

1895

[첫 입학생 졸업]

개교 당시 입학했던 이른바 '개척자 클래스(Pioneer Class)' 학생들이 졸업했습니다.

졸업생 중에는 훗날 미국 제31대 대통령이 되는 허버트 후버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초창기 열악한 환경에서 수학한 이들은 사회 각계각층으로 진출하여 대학의 명성을 높였습니다. 이들의 성공은 스탠퍼드 교육의 질을 대외적으로 증명하는 강력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1896

[첫 여자 농구 시합]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자 대학 간 농구 경기인 스탠퍼드 대 버클리 전이 개최되었습니다.

여성들의 체육 활동이 제한적이던 시대에 혁신적인 시도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경기를 통해 여학생들의 열의와 대학 스포츠의 다양성을 확인했습니다. 여성의 권익 증진과 평등한 기회 제공이라는 대학의 초기 가치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1898

[교육학 발전의 기틀]

엘우드 패터슨 커벌리가 교육학 부문 수장으로 합류하여 학문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그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교육 행정 및 정책 연구의 선구자였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스탠퍼드 교육학은 학문적 체계와 실용성을 동시에 확보했습니다. 훗날 교육전문대학원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1903

[메모리얼 교회 헌당]

설립자 제인 스탠퍼드가 남편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스탠퍼드 메모리얼 교회가 완공되었습니다.

캠퍼스의 정중앙에 위치하며 비종파적인 종교적 화합을 상징합니다.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과 장엄한 건축 양식으로 캠퍼스 내 가장 아름다운 명소로 꼽힙니다. 설립자의 종교적 관용과 남편에 대한 사랑이 깃든 대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합니다.

1905

[제인 스탠퍼드 사망]

대학의 존립을 위해 헌신했던 설립자 제인 라스롭 스탠퍼드가 서거했습니다.

그녀의 죽음 이후 대학 운영권은 완전히 이사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스트리크닌 중독설 등 여러 논란이 있었으나 공식적으로는 심장 질환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녀가 생전에 보여준 헌신은 대학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는 데 절대적인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06

[대지진 캠퍼스 강타]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인해 캠퍼스 건물의 대다수가 심각한 파손을 입었습니다.

건설 중이던 도서관과 체육관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메모리얼 교회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은 즉시 재건에 착수하여 더욱 견고한 캠퍼스를 구축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 시련은 구성원들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대학의 회복 탄력성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08

[쿠퍼 의과대학 인수]

샌프란시스코의 쿠퍼 의과대학을 인수하며 정식 의학교육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는 현대적인 스탠퍼드 의과대학으로 발전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운영되었으나 이후 연구 역량 강화를 위해 캠퍼스로 이전되었습니다. 우수한 의학 인프라를 흡수하여 서부 최고의 의학 연구 기관으로 도약하기 시작했습니다.

[법학전문대학원 조직]

기존의 법학 부서를 전문 법학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School of Law)로 정식 조직화했습니다.

전문적인 법조인 양성을 위한 체계적인 학위 과정과 연구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이후 높은 입학 기준과 우수한 교수진을 통해 미국 최정상급 로스쿨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수많은 판사와 법학자들을 배출하는 요람이 되었습니다.

1913

[제2대 총장 취임]

지질학자인 존 캐스퍼 브래너가 대학교의 제2대 총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초대 총장 조던과 함께 초기 스탠퍼드를 구축한 핵심 교수진 중 한 명이었습니다. 비록 임기는 짧았으나 대학의 행정 시스템을 안정화하고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의 지질학적 연구 성과는 대학의 학문적 권위를 높이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의과대학 정식 조직]

쿠퍼 의과대학 인수를 기반으로 한 스탠퍼드 의과대학이 정식으로 출범했습니다.

최첨단 임상 교육과 기초 과학 연구를 병행하는 현대적 의대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 의료진을 영입하여 환자 진료와 교육의 질을 높였습니다. 이후 다양한 의학적 혁신을 주도하며 인류 건강 증진에 기여하게 됩니다.

1916

[제3대 총장 취임]

레이 라이먼 윌버가 제3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장기간 대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대학의 구조를 현대적으로 개편하고 학문적 우수성을 확보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이라는 격변의 시기에 대학의 중심을 잡은 리더였습니다. 의학 분야의 발전을 특히 강조하여 스탠퍼드 의료 인프라를 강화하는 데 공헌했습니다.

1917

[아트 갤러리 건설]

토마스 웰튼 스탠퍼드의 기부로 캠퍼스 내에 예술 갤러리가 건립되었습니다.

학생들의 예술적 감수성을 키우고 다양한 전시를 개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예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설립 정신을 계승하여 수준 높은 소장품을 확보해 나갔습니다. 오늘날까지도 학내 미술 교육과 전시의 핵심 장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교육전문대학원 조직]

기존의 교육학 부서를 전문 대학원 체제(School of Education)로 승격 및 조직화했습니다.

교사 양성을 넘어 교육 정책과 교육 심리학 등 폭넓은 학문 연구를 지향했습니다. 미국 전역의 공교육 시스템 개선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후 수많은 교육 지도자들을 배출하며 세계 교육학의 흐름을 주도했습니다.

1919

[후버 전쟁 기록 보관소]

허버트 후버가 제1차 세계대전 관련 자료를 보존하기 위해 기록 보관소를 설립했습니다.

이 기관은 훗날 세계적인 공공 정책 싱크탱크인 후버 연구소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보존하고 인류의 평화와 자유를 연구하는 사명을 띠고 출발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수집된 방대한 정치, 경제, 역사 사료들을 소장하고 있는 보물창고입니다.

[메인 도서관 개관]

대학교의 중앙 도서관 역할을 하는 메인 도서관 건물이 공식적으로 개관했습니다.

방대한 학술 자료를 수용하고 학생들에게 최적의 학습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이후 대학의 성장에 따라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현재의 그린 도서관(Green Library) 체제가 되었습니다. 학문의 요람으로서 연구자들에게 필수적인 정보 자원을 제공하는 중추 역할을 합니다.

1923

[법학전문대학원 인증]

스탠퍼드 법학전문대학원이 미국 변호사 협회(ABA)로부터 공식 인증을 획득했습니다.

교육 과정의 전문성과 우수성을 국가적으로 공인받은 역사적인 성과였습니다. 인증 획득을 통해 졸업생들이 미 전역에서 활약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로스쿨의 위상이 한 단계 도약하며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5

[경영전문대학원 설립]

허버트 후버의 강력한 권고로 스탠퍼드 경영전문대학원(GSB)이 설립되었습니다.

서부 지역에 최고 수준의 비즈니스 지도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출발했습니다. 초기부터 실용적인 경영 기법과 리더십 교육을 결합한 혁신적인 커리큘럼을 선보였습니다. 현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입학하기 어려운 최고의 MBA 과정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1929

[총장 대행 체제]

로버트 에클스 스웨인이 윌버 총장의 공백기 동안 약 4년간 총장 대행을 맡았습니다.

윌버 총장이 연방 정부 내무장관으로 입각하면서 생긴 행정 공백을 메웠습니다. 대공황의 위기 속에서도 대학의 학사 운영과 재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가는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총장 대행으로서의 헌신적인 활동은 대학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934

[펠릭스 블로흐 합류]

스위스 출신의 물리학자 펠릭스 블로흐가 나치 탄압을 피해 스탠퍼드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훗날 스탠퍼드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되는 뛰어난 과학자였습니다. 그의 영입을 시작으로 스탠퍼드 물리학과는 세계적인 연구 거점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수한 해외 인재 유치를 통해 대학의 국제적 경쟁력을 높인 성공적인 사례입니다.

1937

[한나 하우스 완공]

거장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한나 하우스가 캠퍼스 인근에 완공되었습니다.

육각형 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라이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건축학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폴 한나 교수 부부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유기적 건축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현재는 대학의 역사 유적지로 관리되며 많은 건축학도와 방문객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1938

[커벌리 빌딩 개관]

교육학 연구와 교육의 중추가 될 커벌리 빌딩이 대규모 기부와 함께 문을 열었습니다.

경제 대공황의 여파 속에서도 교육의 미래를 위해 지어진 상징적인 건물입니다. 최첨단 강의실과 도서관 시설을 갖추어 교육학 연구자들에게 최상의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이 건물의 개관은 스탠퍼드 교육전문대학원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1

[후버 타워 완공]

대학 개교 50주년을 기념하여 캠퍼스의 랜드마크인 후버 타워가 완공되었습니다.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의 이름을 딴 이 타워는 역사 기록물 보존의 중심지입니다. 전망대에서는 캠퍼스 전체와 베이 에어리어의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대학의 역사적 성취를 기리고 미래로 나아가는 의지를 담은 상징적 건축물입니다.

1943

[제4대 총장 취임]

도널드 B. 트레시더가 제4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 대학을 이끌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도 대학의 학사 운영과 연구 역량을 유지하는 데 힘썼습니다. 군인 교육 프로그램 등을 도입하여 국가적 위기 상황에 대학이 기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서거 전까지 대학의 재정과 행정 시스템을 정비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1946

[생물학 연구 패러다임 전환]

스탠퍼드 생물학 부서가 분자 생물학 중심으로 연구 초점을 맞추며 혁신적인 변화를 시작했습니다.

고전적인 생물학에서 벗어나 유전학 및 분자 수준의 생명 현상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이러한 선구적인 시도는 훗날 생명공학 분야에서 스탠퍼드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했습니다. 기술적 발전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학문의 경계를 확장한 성공적인 사례입니다.

1948

[트레시더 총장 사망]

재임 중이던 도널드 B. 트레시더 총장이 갑작스러운 심장 마비로 서거했습니다.

대학 구성원들은 큰 충격에 빠졌으며 행정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비상 체제가 가동되었습니다. 사망 후 총장 대행 임무는 앨빈 유리히 등이 맡아 안정적인 인수인계를 준비했습니다. 비록 짧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그의 리더십은 대학 발전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을 받습니다.

1949

[제5대 총장 취임]

J. E. 월리스 스털링이 제5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스탠퍼드의 위대한 도약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19년 재임 기간 동안 스탠퍼드는 지역 대학에서 세계 최고의 연구 중심 대학으로 변모했습니다. 공격적인 연구비 유치와 인프라 확충을 통해 대학의 규모와 질을 획기적으로 높였습니다. '서부의 하버드'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스털링 총장의 탁월한 경영 능력 덕분이었습니다.

1951

[스탠퍼드 연구 단지 설립]

프레데릭 터먼의 주도로 대학교 부지에 스탠퍼드 산업 단지(현 연구 단지)가 설립되었습니다.

대학 부지를 기업에 임대하여 산학 협력을 도모한 세계 최초의 대학 연구 단지입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수많은 벤처 기업들이 탄생하며 실리콘밸리의 전설이 시작되었습니다. 대학의 연구 성과가 산업 현장과 결합되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혁신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1952

[교무처장 직제 신설]

대학의 학술 행정을 총괄하는 교무처장(Provost) 직제를 처음으로 신설했습니다.

초대 교무처장으로는 더글러스 휘태커가 임명되어 학사 운영의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이 직제는 총장의 대외적인 활동과 대학 내부의 학문적 조율을 분담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현대적인 대학 거버넌스 시스템을 구축하며 전문적인 행정 체계를 갖춘 계기였습니다.

1954

[최초의 석좌 교수직]

잭스 가족의 거액 기부를 통해 대학 최초의 공식 석좌 교수직(Endowed Chair)이 신설되었습니다.

우수한 교수진을 유치하고 학문 연구를 지속적으로 후원하기 위한 선진적인 제도입니다. 석좌 교수는 안정적인 연구비를 지원받아 자신의 분야에서 독창적인 성과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학의 학문적 깊이를 더하고 세계적인 석학들이 모여드는 문화를 조성했습니다.

1955

[터먼 교무처장 임명]

공학부 학장이었던 프레데릭 터먼이 교무처장으로 임명되어 대학의 혁신을 가속화했습니다.

그는 교수와 학생들이 직접 창업에 도전하도록 장려하며 실리콘밸리의 형성을 주도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산학 협력과 기술 혁신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스탠퍼드 공학부는 세계 최강의 기술 연구 기지로 성장했습니다.

1956

[쇼클리 연구소 설립]

트랜지스터의 공동 발명가 윌버 쇼클리가 팔로알토에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그의 합류는 실리콘밸리라는 지명이 생겨나기 전의 핵심적 사건입니다. 터먼 교무처장의 권유로 고향인 팔로알토에 둥지를 틀었으며 우수한 인재들을 끌어모았습니다. 비록 연구소 운영 자체는 순탄치 않았으나 반도체 산업의 거대한 씨앗을 뿌린 결과가 되었습니다.

1957

[페어차일드 반도체 설립]

쇼클리 연구소를 떠난 8인의 연구원들이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설립하며 벤처 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이른바 '배신자 8인'이라 불린 이들의 독립은 실질적인 실리콘밸리 산업의 시작으로 꼽힙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훗날 인텔 등 거대 IT 기업들을 창업하며 세계 기술 지형을 바꿨습니다. 스탠퍼드 인근에서 일어난 이러한 혁신은 대학과 기업의 공생 관계를 더욱 견고히 했습니다.

1958

[해외 캠퍼스 프로그램 시작]

학부생들이 세계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도록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첫 해외 캠퍼스를 열었습니다.

미국 대학 중 선구적으로 글로벌 교육 시스템을 도입하여 학생들에게 해외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이후 피렌체, 파리 등 전 세계 주요 도시로 네트워크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고 글로벌 이슈에 대응할 수 있는 창의적 인재 양성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1959

[의과대학 캠퍼스 이전]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의과대학 임상 시설이 팔로알토 본 캠퍼스로 모두 이전했습니다.

기초 과학 연구와 임상 진료가 한곳에서 이루어지는 통합 의료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이전과 동시에 대규모 메디컬 센터가 완공되어 서부 최고의 의료 인프라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대학 내 다른 학문 분야와의 융합 연구가 활발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2

[선형 가속기 센터 설립]

입자 물리학 연구의 세계적 거점인 스탠퍼드 선형 가속기 센터(SLAC)가 설립되었습니다.

약 3km에 달하는 거대한 선형 가속기를 갖추어 고에너지 물리학 연구를 주도했습니다.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물질의 근본 구조를 밝히는 데 지대한 공헌을 세웠습니다. 에너지부와의 협력을 통해 국가적 연구 시설로서의 독보적인 위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1963

[인공지능 연구소 설립]

존 매카시 교수가 스탠퍼드 인공지능 연구소(SAIL)를 설립하여 AI 연구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컴퓨터가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고 학습하는 인공지능 분야의 초기 기초를 다졌습니다. 로봇 공학, 음성 인식 등 현대 IT 기술의 근간이 되는 수많은 연구 성과를 쏟아냈습니다. 전 세계 최고의 AI 연구자들이 모여드는 중심지로서 오늘날까지 그 명성을 잇고 있습니다.

1965

[SAIL 집행관 합류]

레스터 언스트가 SAIL의 운영을 책임지는 집행관으로 합류하여 효율적인 연구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연구소의 행정적 기반을 마련하고 연구원들이 창의적인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기술 개발뿐만 아니라 연구 조직의 운영 모델을 정립하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습니다. 초기 인터넷의 전신인 ARPANET 노드 연결 등 중요한 기술적 성과를 뒷받침했습니다.

1967

[라이먼 교무처장 선임]

리처드 라이먼이 교무처장으로 선임되어 대학 내 소통과 개혁을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 운동이 격렬해지던 시기에 대학의 행정 시스템을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이끌었습니다. 학문적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대학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주었습니다. 훗날 총장으로 재임하며 보여줄 강력한 리더십의 토대를 마련한 시기였습니다.

1968

[MLK 암살 대응 토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암살 소식에 대학 내에서 사회적 정의에 대한 대토론이 열렸습니다.

인종 차별 문제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대학 구성원들의 자성과 성토가 이어졌습니다. 대학이 단순한 상아탑이 아닌 사회의 아픔에 동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이후 흑인 인권 증진을 위한 구체적인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낸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BSU 마이크 점거 사건]

흑인 학생 연합(BSU) 멤버들이 대학 행사 중 마이크를 잡고 인종적 다양성 확대를 위한 요구안을 발표했습니다.

약 70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흑인 교직원 채용 확대와 교과 과정 개편 등을 요구했습니다. 라이먼 교무처장은 이들의 요구를 경청하고 대다수를 수용하며 대학의 개혁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스탠퍼드가 더욱 포용적이고 다원적인 공동체로 나아가는 역사적인 변곡점이었습니다.

[제6대 총장 취임]

케네스 핏저가 제6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학생 운동이 정점에 달한 시기에 대학을 맡았습니다.

그는 대학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며 교육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격동하는 사회적 요구와 학내 갈등 사이에서 짧은 임기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연구 역량이 훼손되지 않도록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70

[제7대 총장 취임]

리처드 라이먼이 제7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1970년대 대학의 안정을 이끌었습니다.

교무처장 시절부터 보여준 균형 잡힌 감각으로 학내 갈등을 효과적으로 해결했습니다. 대학의 재정 구조를 건실하게 개편하고 기부 문화를 활성화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스탠퍼드가 명실상부한 미국 최고의 명문 대학 그룹에 안착하도록 만든 장본인입니다.

1971

[스탠퍼드 감옥 실험]

심리학과 필립 짐바르도 교수가 인간의 심리와 권력 관계를 탐구하는 유명한 '감옥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환경이 인간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었으나 윤리적 논란으로 조기 중단되었습니다. 심리학사에 기록될 만큼 충격적인 결과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실험 이후 대학 연구의 윤리적 가이드라인이 강화되는 등 학계 전반에 큰 파장을 주었습니다.

1973

[재조합 DNA 기술 개발]

스탠퍼드 의대의 스탠리 코언과 허버트 보이어가 유전자를 재조합하는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습니다.

현대 유전공학의 탄생을 알린 혁명적인 과학적 성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기술을 통해 인슐린 등 유용한 단백질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생명과학 분야에서 스탠퍼드의 압도적인 연구 역량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사건입니다.

1976

[스탠퍼드 역사협회 설립]

대학교의 역사를 보존하고 연구하기 위해 스탠퍼드 역사협회(SHS)가 창립되었습니다.

캠퍼스의 유서 깊은 건물들을 보존하고 설립자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활동을 펼쳤습니다. 대학의 기록물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미래 세대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역사 강연과 투어 등을 통해 구성원들에게 대학에 대한 자부심과 소속감을 고취시킵니다.

1980

[인문학 센터 설립]

인문학 분야의 심도 있는 연구와 교류를 위해 스탠퍼드 인문학 센터가 설립되었습니다.

과학 기술 중심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인문학적 깊이를 더하려는 대학의 의지가 담겼습니다. 전 세계 석학들이 모여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공간입니다. 다양한 펠로우십 프로그램을 통해 인문학 연구자들에게 최상의 연구 조건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제8대 총장 취임]

생물학자인 도널드 케네디가 제8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대학의 연구 부흥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연방 정부와의 연구 협력을 강화하고 우수한 신진 연구자들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대학의 교육 과정에 인문학적 가치를 강화하려는 노력도 병행했습니다. 학문 간의 경계를 허무는 융합 연구를 장려하여 스탠퍼드만의 독특한 학풍을 공고히 했습니다.

1981

[정부 자금 오용 조사]

대학이 정부로부터 받은 간접 연구비를 유용한 혐의로 대대적인 조사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캠퍼스 내 시설 관리비 등의 항목으로 연구비를 부적절하게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대중 매체를 통해 보도되며 대학의 명성에 작지 않은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후 대학의 재정 투명성을 강화하고 연구비 관리 시스템을 전면 개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6

[DC 파워 빌딩 철거]

스탠퍼드 인공지능 연구소의 초기 거점이었던 DC 파워 빌딩이 노후화로 인해 철거되었습니다.

많은 초기 AI 연구자들의 추억이 깃든 장소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연구소는 캠퍼스 본부로 자리를 옮기며 더욱 현대적인 시설에서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물리적인 공간은 사라졌으나 그곳에서 싹튼 혁신적 아이디어들은 IT 기술의 근간으로 남았습니다.

1987

[국제학 연구소 설립]

글로벌 이슈를 다학제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프리먼 스포글리 국제학 연구소(FSI)가 설립되었습니다.

국가 안보, 국제 협력, 에너지 정책 등 현대 사회의 난제들을 연구합니다. 전직 고위 정부 관료들과 저명한 학자들이 모여 실질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곳입니다. 스탠퍼드가 세계적인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허브가 되었습니다.

1988

[생각하는 사람 기증]

미술품 수집가 제럴드 캔터가 오귀스트 로댕의 걸작 '생각하는 사람' 청동상을 기증했습니다.

스탠퍼드는 파리를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로댕 컬렉션을 보유한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캠퍼스 곳곳에 배치된 로댕의 조각상들은 학생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선사합니다. 캔터 아트 센터는 이를 통해 세계적인 수준의 대학 미술관으로 도약하게 되었습니다.

1989

[로마 프리타 지진]

강력한 로마 프리타 지진으로 인해 캠퍼스 내 수많은 역사적 건물이 다시 피해를 입었습니다.

메인 도서관인 그린 도서관의 구관과 메모리얼 교회 등이 심각한 균열을 겪었습니다. 대학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단순한 복구를 넘어 대대적인 내진 보강 공사를 실시했습니다. 자연재해에 대비하는 대학의 인프라 관리 수준이 한 단계 높아지는 계기였습니다.

1991

[개교 100주년 기념]

스탠퍼드 대학교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성대한 기념 행사와 학술 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대학이 이룬 비약적인 성취를 돌아보고 미래 비전을 선포했습니다. 수많은 동문과 학계 인사가 참석하여 스탠퍼드의 성공을 축하했습니다. 100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세계 정점에 오른 대학의 저력을 다시 확인한 자리였습니다.

1992

[제9대 총장 취임]

게르하르트 캐스퍼가 제9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대학의 명성 회복과 학문적 수월성에 집중했습니다.

연구비 오용 조사 이후 실추된 대학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학부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개혁안을 도입하여 학생들의 만족도를 높였습니다. 시카고 대학 출신의 법학자로서 원칙에 충실한 대학 경영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993

[최초의 여성 교무처장]

콘돌리자 라이스가 스탠퍼드 대학교 최초의 여성이자 최연소 교무처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정치학 교수였던 그녀는 대학의 행정 혁신과 예산 구조 조정을 주도했습니다. 탁월한 행정 능력을 바탕으로 대학의 학문적 경쟁력을 한층 더 끌어올렸습니다. 훗날 국무장관을 역임하는 등 스탠퍼드 출신 인사의 국가적 활약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1994

[디렉터스 컵 수상]

전국 대학 체육 부서의 성적을 종합하는 NACDA 디렉터스 컵 수상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이후 스탠퍼드는 25년 연속으로 이 컵을 거머쥐며 미국 최고의 스포츠 대학임을 입증했습니다. 공부와 운동을 모두 잘하는 학생 선수들의 요람으로서 독보적인 문화를 형성했습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최다 배출하는 등 대학 스포츠의 정점에 서 있습니다.

1995

[철학 백과사전 창간]

에드워드 잘타 연구원이 주도하여 온라인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SEP)'을 창간했습니다.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는 고품격 학술 백과사전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전 세계 철학 연구자들과 학생들에게 가장 신뢰받는 온라인 자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지식을 디지털화하여 보급하려는 대학의 사명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공 사례 중 하나입니다.

1998

[구글의 탄생]

스탠퍼드 대학원생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가 캠퍼스 내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구글을 설립했습니다.

대학의 검색 알고리즘 연구가 전 세계 정보 탐색 방식을 바꾸는 거대 기업으로 진화했습니다. 대학은 이들의 창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으며 초기 투자 수익을 통해 막대한 기금을 확보했습니다. 학문의 상업적 성공이 대학의 연구 재원으로 다시 환원되는 선순환 구조의 정수를 보여주었습니다.

2000

[제10대 총장 취임]

컴퓨터 공학자인 존 헤네시가 제10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21세기 대학의 번영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대학의 기금을 비약적으로 늘리고 실리콘밸리와의 협력을 극대화했습니다. 나이츠-헤네시 장학 프로그램 등 우수한 인재 유치를 위한 혁신적인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16년의 재임 기간 동안 스탠퍼드를 명실상부한 전 세계 최고의 명문 대학으로 성장시켰습니다.

2006

[캔터 아트 센터 활성화]

캔터 아트 센터가 대규모 기부와 소장품 확대를 통해 대학 미술관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다양한 기획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사회와의 문화적 교류를 강화했습니다. 특히 아시아 미술과 현대 미술 컬렉션을 강화하여 전시의 폭을 넓혔습니다. 캠퍼스 내 예술 교육의 허브로서 학생들이 예술을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2011

[최초 대규모 자금 캠페인]

대학의 미래 성장을 위한 최초의 전사적인 대규모 자금 조달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연방 정부 지원의 한계를 극복하고 독립적인 연구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동문들과 기업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자금은 새로운 연구 센터 건립과 학생 장학금 확충에 핵심적으로 투입되었습니다.

2012

[에체멘디 총장 대행]

교무처장인 존 에체멘디가 헤네시 총장의 안식년 동안 약 4개월간 총장 대행을 수행했습니다.

대학의 안정적인 운영을 유지하며 주요 학사 일정과 결정을 차질 없이 이끌었습니다. 헤네시 총장과의 환상적인 파트너십을 통해 대학 경영의 연속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총장 대행으로서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다시 교무처장직으로 복귀했습니다.

2014

[캠페인 목표 조기 달성]

자금 조달 캠페인이 시작 3년 만에 10억 달러 모금을 돌파하며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전 세계 수많은 기부자들의 지지로 대학의 재정적 기초가 더욱 탄탄해졌습니다. 이후 캠페인 종료 시점에는 약 15억 달러라는 경이로운 최종 모금액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대학의 연구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혁신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앤더슨 컬렉션 개관]

미국의 전후 현대 미술의 정수를 담은 앤더슨 컬렉션이 캠퍼스 내에 정식 개관했습니다.

앤더슨 가족이 기증한 세계적인 수준의 현대 미술 작품들이 상설 전시됩니다. 캔터 아트 센터와 함께 캠퍼스 예술 지구의 핵심 축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학생들과 지역 주민들이 수준 높은 현대 미술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2015

[래스롭 도서관 개관]

노후된 메이어 도서관을 철거하고 학생 중심의 디지털 도서관인 래스롭 도서관을 개관했습니다.

학제 간 연구와 협업을 강조하는 현대적인 학습 공간을 대거 확충했습니다. 방대한 동아시아 컬렉션을 수용하여 지역학 연구의 거점 역할을 수행합니다. 최첨단 멀티미디어 장비와 연구 지원 시설을 갖추어 디지털 교육 환경에 부응했습니다.

2016

[바이오허브 파트너십]

마크 저커버그와 프리실라 찬이 지원하는 6억 달러 규모의 바이오허브(Biohub) 파트너십에 참여했습니다.

버클리, UCSF와 함께 질병 정복을 위한 첨단 의학 연구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대학의 의학 및 공학 기술이 결합되어 인류의 건강 문제를 해결하는 전초 기지가 되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자본과 대학의 지성이 결합된 새로운 연구 모델로 평가받습니다.

[제11대 총장 취임]

신경과학자인 마크 테시에 라빈이 제11대 총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학문적 수월성을 유지하면서 대학의 사회적 포용성을 넓히는 데 주력했습니다. 특히 기후 변화와 지속 가능성 연구를 위한 새로운 학교 설립을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자신의 과거 논문 데이터 논란으로 인해 사임하게 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2017

[드렐 교무처장 취임]

물리학자 퍼시스 드렐이 교무처장으로 임명되어 대학의 학술 행정을 이끌었습니다.

교수진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학생들을 위한 연구 지원 정책을 강화했습니다. 대학 내 예산 구조를 효율화하여 연구 및 교육 사업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총장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대학의 안정적인 성장 기반을 공고히 했습니다.

2020

[팬데믹 대응 원격 수업]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 대응하여 대면 수업을 전면 중단하고 원격 수업 체제로 전환했습니다.

학생들과 교직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신속한 결정이었습니다. 디지털 기술을 적극 활용하여 학사 일정의 차질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후 교육 방식의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는 예상치 못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2022

[유대인 차별 공식 사과]

대학은 과거 1950년대에 있었던 유대인 지원자에 대한 의도적인 차별 행위를 공식 사과했습니다.

자체 조사 결과 입학 심사 과정에서 부적절한 제한이 있었음을 인정했습니다. 과거의 과오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더욱 포용적이고 정의로운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한 대학의 의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2023

[제12대 총장 취임]

고전 사학자인 리처드 샐러가 대학의 제12대 총장(임시)으로 취임했습니다.

테시에 라빈 총장의 사임 이후 대학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리더십을 맡았습니다. 행정적 연속성을 보장하며 차기 정식 총장 선출을 위한 과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인문학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대학 내 신뢰 회복과 소통에 주력했습니다.

[제니 마르티네즈 교무처장]

법학전문대학원 학장이었던 제니 마르티네즈가 대학교의 신임 교무처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대학의 학문적 우수성을 유지하고 법적, 행정적 전문성을 바탕으로 운영을 조율합니다. 다양한 학문 분야 간의 협력을 촉진하고 학생 지원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차세대 리더로서 대학의 미래 전략을 수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 중입니다.

2024

[제13대 총장 취임]

조나단 레빈이 스탠퍼드 대학교의 제13대 총장으로 공식 취임했습니다.

경영대학원 학장 출신의 경제학자로서 대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데이터 기반의 혁신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경영 철학을 내세웠습니다. 전임 총장의 논란을 뒤로하고 구성원들의 화합과 학문적 도약을 이끌 적임자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2025

[탄소 배출 감축 목표]

캠퍼스 전체의 탄소 배출량을 기존 대비 80%까지 감축하겠다는 목표 기한을 맞이했습니다.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대학 차원의 강력한 환경 보존 노력이 결실을 맺는 시기입니다. 재생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효율화 시설 확충을 통해 탄소 중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대학들에게 지속 가능한 캠퍼스 운영의 모범 사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2030

[제로 웨이스트 달성 목표]

스탠퍼드 캠퍼스에서 배출되는 폐기물을 완전히 없애는 제로 웨이스트(Zero-waste) 달성 목표 기한입니다.

재활용 극대화와 일회용품 근절을 통해 자원 순환 시스템을 완성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학생들과 교직원이 함께 참여하는 지속적인 환경 캠페인을 통해 문화를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미래 세대에게 깨끗한 지구를 물려주기 위한 대학의 장기적인 환경 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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