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블레어

정치인, 영국 총리, 변호사, 작가,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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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블레어
정치인, 영국 총리, 변호사, 작가,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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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블레어는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영국 총리를 역임하며 노동당 역사상 유례없는 3회 연속 집권을 이끌어낸 현대 영국의 핵심 정치가입니다. '제3의 길'이라는 중도 좌파 노선을 정립하여 노동당을 현대화하고 18년 만의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으며, 북아일랜드 평화 협정과 국가 최저임금제 도입 등 내정에서 괄목할 업적을 남겼습니다. 비록 이라크 전쟁 참전 결정으로 인하여 후반기 통치에 대한 역사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퇴임 후에도 국제적인 분쟁 해결과 신앙 및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며 글로벌 리더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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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토니 블레어의 탄생]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리오 블레어와 헤이즐 블레어 부부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리오 블레어는 변호사이자 대학 강사였으며 보수당 정치 지망생으로서 아들에게 큰 지적 자극을 주었습니다.
출생 직후 잠시 동안 가족과 함께 호주 아델레이드에서 거주하며 유년기의 일부를 보냈습니다.
가족의 배경과 아버지의 야망은 훗날 그가 정치적 진로를 선택하고 법조계에 입문하는 데 간접적인 동기부여가 되었습니다.

1961

[초기 교육의 시작]

더럼에 위치한 코리스터 학교에 입학하여 초기 교육 과정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이 학교에서 그는 학업뿐만 아니라 음악과 연극 등 예술 분야에서도 소질을 나타내며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교육 환경은 그가 대중 앞에서 연설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기본 기술을 익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초기 인맥과 경험은 그가 영국 사회의 엘리트 코스를 밟는 첫 번째 단계가 되었습니다.

1966

[명문 사립학교 진학]

에든버러의 권위 있는 사립학교인 페츠 칼리지에 진학하여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페츠 칼리지는 '스코틀랜드의 이튼'으로 불리는 명문으로 이곳에서 그는 엄격한 규율과 높은 학문적 수준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학교 내에서 유쾌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알려졌으며 연극 공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예술적 감수성을 키웠습니다.
이 시기의 사립학교 생활은 훗날 그가 영국의 전통적인 사회 구조를 깊이 이해하고 개혁하는 데 영감을 주었습니다.

1971

[파리에서의 공백기]

대학 진학 전 1년 동안 프랑스 파리에서 거주하며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쌓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바텐더와 소규모 공연 모델 등을 하며 영국과는 다른 대륙의 문화와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프랑스어와 유럽의 정치적 지형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게 되었으며 자신의 견문을 넓혔습니다.
청년기의 이 자유로운 경험은 그가 훗날 총리가 되었을 때 친유럽주의적인 외교 성향을 갖게 된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1972

[옥스퍼드 법대 입학]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입학하여 법학 전공자로 학업에 매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옥스퍼드 시절 그는 법학 지식을 습득하는 동시에 학내 정치 논쟁과 사교 활동에 매우 활발히 참여했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학구파라기보다 지적 호기심이 왕성하고 대인 관계가 넓어 동료들 사이에서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인간관계는 훗날 그가 법조계와 정계에서 주류로 활동할 때 가장 강력한 네트워크가 되었습니다.

1974

[록 밴드 보컬 활동]

옥스퍼드 재학 중 록 밴드 '어글리 루머스'의 메인 보컬로 활동하며 무대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는 전설적인 록 가수 믹 재거를 동경하며 무대 위에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가수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경험은 그가 대중의 감정을 읽고 무대를 장악하며 대중과 소통하는 기술을 익히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당시의 밴드 활동은 그가 기존의 딱딱한 정치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친근한 젊은 지도자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975

[옥스퍼드 졸업 및 학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하며 성공적으로 대학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전문 법조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위해 영국 법조계의 심장부인 런던으로 향했습니다.
대학 시절을 통해 다져진 논리적 사고와 대중 변론 능력은 그가 평생 동안 사용할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졸업 직후 그는 영국의 전통적인 법조 사회인 '링컨스 인'에 입소하여 본격적인 법률 실무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1976

[법률 실무 수련 시작]

링컨스 인에서 수습 변호사로서 실제 사건들을 다루며 법률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키웠습니다.

그는 법정에서의 변론 기법과 복잡한 법리 해석을 실전에서 배우며 법조인으로서의 자질을 착실히 쌓았습니다.
변호사로서의 초기 활동은 그가 사회적 모순과 정의의 문제에 대해 실무적으로 깊이 고민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영국의 사법 체계와 의회 민주주의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심층적으로 관찰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셰리 부스와의 운명적 만남]

법률 사무소 데리 어바인 밑에서 동료 수습 변호사였던 셰리 부스를 처음 만나 인연을 맺었습니다.

당시 셰리 부스는 그보다 법학 지식이 훨씬 해박하고 명석한 법조인 지망생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법률적 가치와 정치적 지향점을 공유하며 급격히 가까워졌고 연인 관계로 진지하게 발전했습니다.
셰리 부스는 훗날 그가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는 데 있어 지적인 동반자이자 가장 강력한 조력자가 되어주었습니다.

1980

[셰리 부스와의 결혼]

오랜 연애 끝에 셰리 부스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런던의 이즐링턴 지역에 자리를 잡고 전문직 부부로서의 모범적인 삶을 시작했습니다.
셰리 블레어는 자신의 성을 유지하며 변호사 커리어 사상 최연소 여성 대법관 후보가 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안정적인 가정환경은 블레어가 변호사 업무에 집중하며 서서히 중앙 정치계로 눈을 돌리는 지탱점이 되었습니다.

1982

[보궐선거 첫 출마]

노동당 후보로 비콘스필드 지역 보궐선거에 출마하며 처음으로 본격적인 정계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당시는 포클랜드 전쟁의 영향으로 보수당의 인기가 압도적으로 높았기에 당선 가능성은 희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선거에서 낙선했으나 패기 넘치는 선거 캠페인으로 노동당 지도부에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습니다.
이 실패는 그에게 선거 운동의 실무를 이해하게 했으며 중앙 정치 무대에 이름을 알리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1983

[하원의원 첫 당선]

새롭게 신설된 세지필드 선거구의 노동당 후보로 출마하여 압도적인 표차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노동당이 전국적으로 참패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선거구에서 승리하며 당당히 의회에 입성했습니다.
그는 초선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명료한 논리와 호소력 있는 연설로 주목받는 노동당의 신예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이 당선을 통해 그는 평생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노동당의 근본적 개혁을 주도할 인재로 부상했습니다.

1984

[재무 담당 대변인 발탁]

의회 입성 1년 만에 재무 담당 예비내각 대변인으로 임명되어 당의 핵심 전략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초선 의원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파격 발탁으로 그의 뛰어난 지적 능력과 변론술을 당이 인정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보수당의 경제 정책을 예리하게 비판하며 야당의 날카로운 공격수로서 대중적 인지도를 빠르게 높였습니다.
이 직책을 수행하며 그는 국가 경제 지표와 정책 전반에 대한 심도 있는 전문 지식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1987

[세지필드 의원 재선]

총선에서 세지필드 지역 의원으로 다시 한 번 선택받으며 정치적 입지를 더욱 확고히 다졌습니다.

재선 성공 후 그는 노동당 내 소장파 그룹의 핵심 리더로 자리 잡으며 당의 대대적인 현대화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노동당이 전통적인 노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중산층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설파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고든 브라운과 운명적인 파트너십을 맺으며 당의 장기적인 집권 플랜을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1988

[예비내각 에너지 장관]

야당의 예비내각 에너지 담당 장관으로 임명되어 영국의 주요 산업 정책을 심도 있게 다루었습니다.

그는 당시 민영화 이슈가 뜨거웠던 에너지 산업 분야에서 노동당만의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논리 정연한 정부 비판과 대중에게 친숙한 정책 발표는 그를 차세대 당수 후보로 강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직책을 통해 그는 복잡한 산업 규제와 거시 경제 구조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1989

[예비내각 고용 장관]

노동당 예비내각의 고용 담당 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영국의 노동 시장 개혁을 적극적으로 논의했습니다.

그는 노조의 권익 보호와 시장의 유연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새로운 노동당'의 초기 맹아를 보여주었습니다.
TV 등 대중 매체에 자주 노출되며 그의 스마트하고 현대적인 이미지는 젊은 유권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노동당의 전통적 노선과 시대적 요구 사이의 갈등을 직접 체험하며 개혁 의지를 굳혔습니다.

1992

[예비내각 내무 장관]

존 스미스 당수 체제 하에서 예비내각 내무 장관이라는 중책을 맡아 당의 치안 정책을 진두지휘했습니다.

치안과 범죄 예방을 다루는 이 직책에서 그는 보수당의 강점이었던 '법과 질서' 이슈를 완전히 선점했습니다.
그는 '범죄에 강하고 범죄의 원인에도 강하겠다'는 유명한 슬로건으로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이 전략은 노동당이 더 이상 사회 질서 유지에 나약하지 않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94

[존 스미스 당수의 급거 사망]

당시 노동당 당수였던 존 스미스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당 지도 체제에 거대한 공백이 발생했습니다.

존 스미스의 죽음은 노동당에 큰 슬픔인 동시에 당권 경쟁을 촉발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블레어는 고든 브라운과의 긴밀한 막전 협의 끝에 자신이 노동당 당권에 도전하기로 전격 결정했습니다.
이 사건은 영국 정치사에서 노동당의 세대 교체와 과감한 현대화를 앞당기는 비극적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노동당 당수 공식 당선]

당원들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노동당의 새로운 당수로 선출되며 차기 총리 후보로서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그는 선거 과정에서 당의 전면적인 개조와 18년 만의 정권 교체를 향한 강력한 의지를 피력했습니다.
그의 당선은 보수당의 장기 집권을 끝낼 수 있다는 노동당원들의 간절한 희망이 투영된 역사적 결과였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뉴 레이버(New Labour)'라는 브랜드명을 앞세워 영국 사회 전반의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1995

[당헌 제4조 폐지 주도]

노동당의 오랜 국유화 원칙을 담은 당헌 제4조를 공식 폐지하고 현대적 정당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이는 노동당이 과거의 도그마에서 벗어나 시장 경제를 수용하는 실용적 중도 정당임을 선포한 사건이었습니다.
당내 강경 좌파의 거센 반발이 있었으나 그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대다수 당원을 설득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개혁을 통해 노동당은 경제 운영 능력에 대한 시장의 신뢰를 얻고 집권 가능성을 비약적으로 높였습니다.

1997

[영국은행 독립성 부여]

영국 중앙은행에 금리 결정권을 전격 이양하여 통화 정책의 정치적 독립성을 공식 보장했습니다.

이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금리가 변동되는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차단하여 시장의 신뢰를 얻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 결정이 영국의 장기적인 물가 안정과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이로써 블레어 정부는 초기부터 경제 관리에 매우 유능하다는 인상을 대내외에 확실히 각인시켰습니다.

[총선 대승과 정권 교체]

전국 총선에서 보수당에 유례없는 압승을 거두며 18년 만에 노동당의 정권 교체를 완벽히 이루어냈습니다.

노동당은 하원 650석 중 418석을 차지하는 영국 의회 역사상 기록적인 압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 승리는 영국 사회가 보수당에 지쳐 있었음을 증명하며 블레어의 변화 메시지가 국민에게 통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블레어는 만 43세의 나이로 취임하여 185년 만에 영국의 가장 젊은 총리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영국 총리 공식 취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정부 구성권을 위임받아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에 정식 입성했습니다.

관저 앞에서 그는 '오늘부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연설로 전 영국 국민에게 변화의 희망을 전했습니다.
그는 고든 브라운을 재무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자신의 핵심 동료들로 구성된 개혁적인 내각을 발표했습니다.
취임 직후 기록적인 대중 지지율은 그가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과감한 개혁들을 추진하는 엔진이 되었습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 추모]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그녀를 '민중의 왕세자비'로 명명하며 국민적 애도를 주도했습니다.

그의 연설은 슬픔에 빠진 국민의 마음을 정확히 대변했으며 당시 왕실의 경직된 태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뤘습니다.
이 발언은 왕실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완화하고 그가 진정한 국민의 지도자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 되었습니다.
그의 기민한 대처는 총리로서의 대중적 지지율을 사상 최고치로 끌어올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8

[성 금요일 협정 타결]

수십 년간 이어진 북아일랜드 분쟁을 종식시키는 역사적인 '성 금요일 협정' 체결을 직접 이끌어냈습니다.

그는 아일랜드 정부 및 각 분쟁 당사자들과 끈질긴 협상을 벌여 평화를 위한 대타협을 성공적으로 이뤄냈습니다.
이 협정은 북아일랜드에 자치 의회를 설립하고 무장 단체의 폭력 사용을 영구 중단하는 법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북아일랜드 평화 정착은 블레어 총리의 전체 재임 기간 중 가장 위대한 정치적 업적으로 널리 평가받습니다.

1999

[코소보 전쟁 개입 주도]

인종 청소 위기에 처한 코소보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토의 군사 개입을 국제 사회에서 적극 주도했습니다.

그는 독재자 밀로셰비치에 맞서 국제 사회가 인도주의적 목적으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원칙을 천명했습니다.
영국군은 공습과 지상군 파견을 통해 코소보 지역의 평화와 인권 회복에 핵심적인 기여를 수행했습니다.
코소보 개입은 블레어의 '자유주의적 개입주의' 외교 노선이 실제 군사 작전으로 구현된 첫 번째 사례였습니다.

[국가 최저임금제 최초 시행]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법정 최저임금제를 전격 도입하여 저임금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국가가 보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기업들의 비용 부담 우려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가치를 정당하게 보상해야 한다는 신념을 끝까지 관철했습니다.
최저임금제 도입은 영국 내 빈곤 문제를 획기적으로 완화하고 소득 불평등을 개선하는 데 실질적 기여를 했습니다.
현재까지도 이 제도는 블레어 정부가 남긴 가장 성공적이고 대중적인 사회 복지 정책 중 하나로 꼽힙니다.

[지방 자치 권한 이양 완료]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 대대적인 자치권을 부여하는 권한 이양 정책을 법적으로 공식 완료했습니다.

에든버러와 카디프에 각각 자치 의회를 설립하여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주요 정책을 결정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는 영국의 오랜 중앙 집권적 통치 구조를 분권형으로 근본부터 바꾸는 거대한 헌법적 개혁이었습니다.
자치권 이양은 연합 왕국의 통합을 유지하면서도 각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거버넌스 모델이 되었습니다.

2001

[총선 2연속 압승 달성]

전국 총선에서 다시 한 번 노동당을 승리로 이끌며 안정적인 총리직 연임에 성공했습니다.

노동당은 여전히 압도적인 하원 의석수를 유지하며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재확인했습니다.
그는 선거 과정에서 공교육의 질 향상과 공공 보건 의료 시스템의 근본적 개혁을 최우선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2연속 압승은 그가 추진해온 '뉴 레이버' 노선이 영국 사회의 주류 가치로 확고히 안착했음을 의미했습니다.

2002

[이라크 WMD 보고서 발표]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즉각적인 위협이라는 정부 정보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습니다.

보고서는 이라크가 단 45분 이내에 생화학 무기를 발사할 수 있다는 매우 자극적인 내용을 포함했습니다.
이 문건은 이후 전쟁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핵심 근거로 사용되었으나 정보의 정확성을 두고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정보 보고서 제출은 그를 장기적으로 정치적 곤경에 빠뜨리는 '이라크 전쟁 진위 논란'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2003

[이라크 침공 전격 단행]

의회의 치열한 논쟁 끝에 승인을 받아 미국 주도 다국적군과 함께 이라크 침공 작전을 전격적으로 개시했습니다.

사담 후세인 독재 정권을 전복시키고 중동 지역에 민주주의를 전파하겠다는 명분으로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그는 이 전쟁이 인류의 자유와 국제 질서 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었음을 국민들에게 다시금 역설했습니다.
참전 결정은 그의 총리 재임 기간 중 가장 논쟁적인 선택으로 남았으며 평생의 정치적 자산에 타격을 주었습니다.

2005

[총선 3연속 승리 대기록]

이라크 전쟁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총선에서 승리하며 노동당 역사상 최초의 3기 연속 집권을 달성했습니다.

의석수는 전보다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하원 과반을 확보하며 집권당으로서의 막강한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이 승리는 그의 뛰어난 선거 전략과 보수당 야당의 분열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정치적 결과물이었습니다.
노동당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지도자라는 기록을 세웠으나 동시에 퇴진에 대한 내부 압박도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런던 올림픽 유치 성공]

싱가포르 IOC 총회에서 파리를 극적으로 제치고 2012년 하계 올림픽의 런던 개최를 최종 확정지었습니다.

그는 직접 현장으로 날아가 각국 위원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일대일 설득 작업을 벌이는 스포츠 외교를 펼쳤습니다.
올림픽 유치는 영국의 국가 브랜드를 높이고 침체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최고의 기회로 평가받았습니다.
성공적인 유치 소식은 이라크 전쟁으로 냉담했던 영국 국민들에게 간만에 큰 자부심과 기쁨을 선사했습니다.

[7·7 런던 테러 사태]

올림픽 유치 성공 다음 날 런던 대중교통에서 발생한 동시다발적 테러에 맞서 국가적 통합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는 테러범들이 우리의 민주적 삶의 방식을 파괴하지 못할 것이라는 단호한 연설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테러 직후 신속히 피해 현장을 방문하여 부상자들을 위로하고 구조 대원들을 격려하는 책임감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영국의 대테러 안보 정책을 전면 강화하고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무거운 과제를 남겼습니다.

2007

[총리 퇴임 및 관저 고별]

의회에서의 마지막 총리 질의응답을 마친 후 다우닝가 10번지를 떠나 총리직에서 공식 퇴임했습니다.

여야 의원들은 이례적으로 퇴임하는 총리에게 전원 기립 박수를 보내며 그의 10년 노고를 공식 치하했습니다.
그는 버킹엄 궁전을 방문하여 여왕에게 사직서를 제출한 후 평범한 시민이자 의원 신분으로 돌아갔습니다.
10년 2개월이라는 그의 재임 기간은 노동당 출신 총리 중 역대 최장기 기록으로 역사에 뚜렷이 남았습니다.

[중동 특사 전격 임명]

총리직 퇴임 당일 국제 사회의 요청을 수락하여 중동 평화 4자 회담의 특사로 임명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경제적 자립과 이스라엘과의 평화 공존을 위한 국제적 중재자 역할을 곧바로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퇴임 후에도 글로벌 난제 해결을 위한 외교 현장으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복귀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이 역할은 그가 총리 시절 쌓은 국제적 영향력과 협상 능력을 다시 한 번 평화에 기여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2010

[회고록 '여정' 출간]

총리 재임 기간의 비화와 정치적 고뇌를 담은 회고록 '여정'을 출간하여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는 책을 통해 이라크 전쟁 결정의 고통스러운 당위성과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솔직하게 기술했습니다.
회고록 판매 수익금 전액을 영국 참전 용사들의 재활을 돕는 자선 단체에 기부하는 대범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 책은 현대 영국의 정치사와 노동당의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016

[칠콧 보고서의 공식 발표]

이라크 전쟁 참전 과정을 전면 조사한 칠콧 보고서가 발표되어 그의 참전 결정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보고서는 당시 전쟁 외에 평화적 해결책이 남아 있었음에도 정부가 성급히 참전을 결정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블레어는 대국민 기자회견을 열어 당시의 결정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모든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정치적 유산에 대한 대중의 평가를 다시 한 번 엄격하게 재정립하는 고통스러운 계기가 되었습니다.

[글로벌 변화 연구소 출범]

기존의 산발적인 활동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토니 블레어 글로벌 변화 연구소'를 공식 출범시켰습니다.

연구소는 종교적 극단주의 대처, 정부 거버넌스 개선, 기술 혁신 지원 등 3대 핵심 과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수백 명의 전문가가 참여하여 각국 정부에 실질적인 정책 솔루션을 제공하는 거대 싱크탱크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이 연구소를 통해 인류가 직면한 복합적 위기에 대한 과학적이고 데이터에 기반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022

[가터 훈장 기사 서임]

윈저 성에서 열린 공식 임명식을 통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가터 훈장을 직접 수여받았습니다.

그는 이제 이름 앞에 '서(Sir)'라는 호칭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가문의 큰 영예를 안았습니다.
임명식 현장에서 그는 가족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며 지난 40여 년의 정치 인생을 조용히 되돌아보았습니다.
이 의식은 그가 영국의 헌법 질서와 전통 속에서 가장 높은 존경을 받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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