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베이커
정치인, 외교관, 변호사, 대통령 비서실장, 국무장관, 재무장관
최근 수정 시각 : 2026-01-16- 11:07:24
제임스 베이커는 미국 현대사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The Fixer)'이라 불리며 차가운 지성과 정교한 협상력을 발휘한 인물입니다. 휴스턴의 유력 법조 가문에서 태어나 해병대 장교와 성공한 변호사를 거쳐 정치에 입문한 그는,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의 핵심 포스트를 두루 섭렵하며 냉전의 종식과 독일의 재통일, 그리고 중동 평화 회담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다섯 차례의 공화당 대통령 캠페인을 지휘하며 승리를 이끌어낸 전략가이자, 재무부와 국무부를 이끌며 세계 경제와 외교 질서를 재편한 그의 삶은 권력의 중심부에서 행정의 예술을 완성한 대서사시입니다.
1930
[휴스턴 법조 가문의 탄생]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제임스 애디슨 베이커 주니어와 에리카 그레이엄 베이커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그의 집안은 휴스턴의 유력한 법조 명문가로, 할아버지는 유명 로펌인 베이커 보츠의 창립 멤버였습니다. 명문가 특유의 엄격한 가풍 속에서 장차 공직 사회의 리더로 성장할 자양분을 쌓습니다.
베이커 가문은 텍사스 사회에서 매우 높은 사회적 위상과 경제적 영향력을 지닌 가문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텍사스 법조계의 거물이었으며, 이러한 배경은 제임스 베이커가 자연스럽게 법과 행정의 원리를 깨우치게 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성장 환경은 그가 훗날 권력의 중심부에서도 냉철함을 유지할 수 있는 상류층 특유의 매너와 규율을 익히게 했습니다.
1948
[더 힐 스쿨 졸업]
펜실베이니아주 포츠타운에 위치한 명문 사립학교인 더 힐 스쿨을 졸업합니다. 엘리트 교육 과정을 거치며 학업과 인성 교육을 동시에 이수하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가문의 전통과 개인의 학구열을 이어가기 위해 프린스턴 대학교로 진학합니다.
더 힐 스쿨은 미국 동부의 전통 있는 사립 학교로서 수많은 지도층 인사들을 배출한 곳입니다.
베이커는 이곳에서 엄격한 학사 일정과 공동체 생활을 통해 규율과 리더십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사립학교에서의 경험은 그가 향후 화이트 칼라 엘리트들과 소통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1952
[프린스턴 대학교 학사 취득]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우수한 성적으로 취득하고 졸업합니다. 대학 시절 그는 학문적 탐구와 함께 사교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폭넓은 인맥을 형성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미국 해병대 장교로 복무를 시작합니다.
프린스턴에서 그는 역사와 정치를 공부하며 국가 운영에 대한 지적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아이비리그 특유의 학문적 엄격함 속에서도 그는 탁월한 친화력을 발휘하며 동료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시작된 군 복무는 그에게 조직 관리와 책임감이라는 실천적 미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해병대 장교 임관]
대학 졸업 직후 미국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여 군 생활을 시작합니다. 한국 전쟁 직후의 긴장된 안보 환경 속에서 장교로서 부대를 지휘하는 경험을 쌓습니다. 해병대 특유의 강력한 리더십과 충성심은 그의 평생 신조가 됩니다.
그는 해병대 장교로서 엄격한 훈련 과정을 거치며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길렀습니다.
부하 대원들을 통솔하는 과정에서 발휘된 그의 결단력은 훗날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조직을 이끄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해병대에서의 군 복무는 그에게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공직자의 헌신 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1953
[메리 스튜어트 매켄리 하와의 결혼]
군 복무 중이던 1953년, 첫 번째 아내인 메리 스튜어트 매켄리와 백년가약을 맺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은 휴스턴 사교계에서 큰 화제였으며, 이후 슬하에 네 명의 아들을 둡니다. 가정을 꾸림으로써 그는 인생의 새로운 책임감과 안정을 얻게 됩니다.
메리 스튜어트와 베이커는 서로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며 안정적인 가정을 유지했습니다.
그녀는 베이커가 법조계와 정계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헌신적인 내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베이커는 평생 가족을 소중히 여겼으며, 네 아들의 아버지로서 강한 책임감을 보였습니다.
1954
[해병대 중위 전역]
2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해병대 중위로 명예롭게 전역합니다. 군 생활을 통해 얻은 실천적 리더십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법조인이 되기 위해 학업을 재개합니다. 그는 가문의 전통을 따라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로스쿨로 진학합니다.
군 전역 후 베이커는 사회인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철저한 준비 과정을 가졌습니다.
장교 복무 경력은 훗날 그가 보수적인 유권자들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 큰 강점이 되었습니다.
로스쿨 진학은 법률 전문가로서의 전문성을 확보하고 가문의 기대를 실현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였습니다.
1957
[오스틴 로스쿨 졸업]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로스쿨(UT Austin Law School)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하고 졸업합니다. 로스쿨 재학 시절 그는 법률 지식 습득에 매진하며 탁월한 논리적 사고를 배양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텍사스주 변호사 자격을 획득하며 전문가의 길로 나섭니다.
오스틴 로스쿨은 텍사스 법조계의 핵심 인재들을 길러내는 최고의 교육 기관이었습니다.
베이커는 이곳에서 법리적 해석과 협상 기술을 익히며 장차 변호사로서 성공할 기반을 닦았습니다.
로스쿨 졸업은 그가 휴스턴의 대형 로펌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식적인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로펌 '앤드류스 앤 커스' 입사]
가문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휴스턴의 대형 로펌인 앤드류스 앤 커스(Andrews & Kurth)에 입사합니다. 가문의 로펌인 베이커 보츠 대신 다른 곳을 선택한 것은 본인의 실력으로 승부하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기업 전문 변호사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베이커 보츠를 선택하지 않은 배경에는 텍사스의 '안티 네포티즘(친인척 채용 금지)' 학칙이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앤드류스 앤 커스에서 매우 성실하고 치밀한 일 처리로 고객들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변호사 활동을 통해 쌓은 경제계 인맥은 훗날 그가 재무장관으로 활동하는 데 소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1970
[조지 H.W. 부시의 상원 캠페인 참여]
친구 조지 H.W. 부시의 텍사스주 상원의원 선거 캠페인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합니다. 비록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베이커는 선거 전략 수립과 조직 운영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민주당 지지자에서 공화당의 핵심 전략가로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선거 과정에서 여론 조사 분석과 메시지 관리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부시와의 협력 관계는 단순한 친구 이상으로 발전하여 평생의 정치적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첫 캠페인 참여는 베이커가 변호사의 삶에서 정치 전략가의 삶으로 이동하는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첫 아내 메리 스튜어트의 소천]
첫 번째 아내인 메리 스튜어트가 유방암으로 투병하던 중 안타깝게 세상을 떠납니다. 아내의 죽음은 베이커에게 깊은 상실감을 주었으며, 인생의 경로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이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는 오랜 친구였던 조지 H.W. 부시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하게 됩니다.
아내를 잃은 후 베이커는 한동안 일에만 몰두하며 슬픔을 잊으려 했습니다.
당시 친구 조지 H.W. 부시는 그가 슬픔에 빠져있는 대신 사회적 활동에 전념하도록 독려했습니다.
사생활의 비극이 역설적으로 미국 외교사의 거물이 탄생하게 된 정치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73
[수잔 윈스턴 베이커와의 재혼]
첫 아내와 사별한 지 3년 만에 수잔 윈스턴과 재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립니다. 수잔은 이전 결혼에서 얻은 세 자녀가 있었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딸 한 명이 더 태어납니다. 복합 가족의 가장으로서 베이커는 가족 간의 화합을 이끄는 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수잔은 베이커가 워싱턴 정계의 치열한 삶을 견뎌낼 수 있도록 정서적 안식처를 제공했습니다.
그녀는 베이커의 정치적 커리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공식 석상에서도 동반자로 활동했습니다.
가족의 결속력은 베이커가 수십 년간 고위 공직을 수행하는 동안 큰 힘이 되었습니다.
1975
[상무부 차관 임명]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상무부 차관(Under Secretary of Commerce)으로 임명되며 중앙 정계에 데뷔합니다. 법조계와 경제계에서 쌓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행정부 운영의 실무를 담당했습니다. 워싱턴 관료 사회의 생리를 빠르게 파악하며 역량을 입증합니다.
상무부 차관으로서 그는 무역 정책과 산업 발전 전략 수립에 관여했습니다.
공직 사회에서의 첫 번째 임무는 그가 복잡한 행정 절차와 입법 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포드 대통령은 베이커의 신속하고 정확한 일 처리 능력에 깊은 신뢰를 보였습니다.
1976
[포드 대통령 캠페인 매니저 역임]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캠페인을 총괄하는 매니저로 활동합니다. 비록 지미 카터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지만, 패배가 유력했던 선거를 막판까지 접전으로 몰고 간 그의 전략은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워싱턴 최고의 선거 전략가라는 명성을 얻습니다.
선거 초반 포드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을 극복하기 위해 혁신적인 홍보 전략을 도입했습니다.
전국적인 선거 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며 공화당 내 지지 기반을 결집시켰습니다.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베이커의 위기 관리 능력은 정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1978
[텍사스 법무장관 선거 낙선]
고향인 텍사스주에서 법무장관(Attorney General)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후보에게 패배합니다. 본인이 직접 후보로 나선 유일한 선거였으며,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자신이 직접 출마하는 것보다 다른 이의 승리를 돕는 전략가로서의 길에 더 적합함을 깨닫습니다. 이후 그는 무대 뒤의 설계자로 남기로 결심합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텍사스 전역을 누비며 대중과 소통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패배의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하며 텍사스 정치 지형의 변화를 파악했습니다.
직접적인 낙선 경험은 그가 장차 대통령들의 선거 전략을 수립할 때 더욱 신중하고 치밀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0
[부시의 대선 경선 캠페인 지휘]
198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조지 H.W. 부시의 캠페인을 지휘합니다. 레이건이라는 거물에 맞서 '모멘텀'을 만들어내는 전략을 구사하여 부시가 부통령 후보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경쟁자였던 레이건 캠프조차 베이커의 유능함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는 부시가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승리하도록 이끌어 '빅 모(Big Mo)'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습니다.
레이건과의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세련된 협상력을 발휘하여 부시를 부통령으로 안착시켰습니다.
이 과정은 훗날 베이커가 레이건 행정부의 중추가 되는 중요한 신뢰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1981
[레이건 행정부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 취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White House Chief of Staff)으로 임명됩니다. 경선 경쟁자의 참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레이건은 그의 능력을 높이 사 핵심 요직을 맡겼습니다. 베이커는 백악관 내 '트로이카' 체제의 중심이 되어 국정 운영을 설계합니다.
레이건의 비서실장으로서 그는 대통령의 의제를 입법화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와의 협상을 주도하며 레이건의 경제 정책인 '레이거노믹스'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백악관 내의 복잡한 권력 관계를 조율하며 대통령을 가장 안정적으로 보좌한 비서실장으로 평가받습니다.
[대통령 저격 사건 당시의 위기 관리]
레이건 대통령 저격 사건이 발생하자 백악관 비서실장으로서 차분하고 신속하게 대응합니다. 국가적 혼란 상황에서 정부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지휘하였으며, 대통령의 수술과 회복 과정을 대중에게 알리는 메시지를 관리했습니다. 그의 냉철함은 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과의 권력 갈등 상황 속에서도 헌법적 절차를 준수하려 노력했습니다.
병상의 대통령을 대신해 주요 현안을 처리하며 국정 공백을 최소화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이커는 레이건의 전폭적인 신뢰와 함께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었습니다.
[1981년 경제회복세법(ERTA) 통과 주도]
레이건 행정부의 핵심 경제 공약인 대규모 감세안 통과를 위해 의회와의 협상을 진두지휘합니다. 민주당 하원의원들을 설득하고 압박하는 세련된 정치를 통해 법안 통과를 이끌어냈습니다. 이는 레이건 시대 경제 부흥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베이커는 의원 개개인의 필요와 정치적 상황을 분석하여 맞춤형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법안 통과를 통해 정부 지출 축소와 규제 완화라는 보수적 경제 의제를 현실화했습니다.
그의 탁월한 협상 능력은 민주당 지도부조차 경계하면서도 존경하는 수준이었습니다.
1983
[사회보장제도 개혁안 합의 도출]
파산 위기에 처한 사회보장제도를 구하기 위해 여야 합의를 이끌어냅니다. 베이커는 초당적 위원회의 뒤에서 실질적인 협상 중재자로 활동하며, 세금 인상과 혜택 조정을 포함한 고통 분담안을 도출했습니다. 이는 미국 복지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한 중대한 성과였습니다.
그는 공화당의 보수주의와 민주당의 복지주의 사이에서 실질적인 접점을 찾아냈습니다.
비밀리에 진행된 협상을 통해 정치적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실효성 있는 대안을 마련했습니다.
사회보장 개혁은 베이커가 가진 중재와 타협의 기술이 가장 빛난 사례 중 하나입니다.
1984
[레이건의 49개 주 압승 선거 지휘]
1984년 레이건 대통령의 재선 선거 캠페인을 비서실장으로서 지원합니다. '미국에 다시 아침이 왔다(Morning in America)'는 슬로건 아래 경제적 번영과 국가적 자긍심을 강조하는 전략을 폈습니다. 결과적으로 레이건은 50개 주 중 49개 주에서 승리하는 역사적 기록을 세웁니다.
베이커는 대통령의 메시지가 중산층 유권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도록 관리했습니다.
민주당 월터 먼데일 후보의 약점을 파고드는 정교한 네거티브 및 포지티브 전략을 병행했습니다.
역사적인 대승은 베이커를 공화당의 '선거 마법사'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5
[미국 재무장관 취임]
레이건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며 재무장관(Secretary of the Treasury)으로 임명됩니다. 도널드 리건 비서실장과 직책을 맞교환한 이 인사는 베이커의 영역을 국내 행정에서 경제와 국제 금융으로 확장시켰습니다. 그는 재무부의 권위를 높이며 세계 경제의 설계자로 활동합니다.
재무장관으로서 그는 단순히 세무 행정을 넘어 거시 경제 정책 전반을 주도했습니다.
그의 임명은 시장에 강력한 안정과 변화의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했습니다.
재무부를 이끌며 그는 미국 경제의 달러화 강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 공조를 준비합니다.
[플라자 합의(Plaza Accord) 주도]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주요 5개국(G5) 재무장관 회담을 열고 달러화 강세 완화와 엔화·마르크화 가치 인상을 골자로 하는 플라자 합의를 끌어냅니다. 이는 국제 금융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환율 조정 사례로 꼽히며, 베이커의 국제적 협상력이 발휘된 정점이었습니다.
베이커는 미국의 무역 적자 해소를 위해 일본과 서독을 강력하게 설득하고 압박했습니다.
합의 이후 달러 가치는 급락하였으며, 이는 미국의 수출 경쟁력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플라자 합의는 국제 경제 질서가 협상을 통해 재편될 수 있음을 보여준 기념비적 사건입니다.
[베이커 플랜(Baker Plan) 발표]
개발도상국의 부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신규 대출과 성장을 연계한 '베이커 플랜'을 제안합니다. 긴축 중심의 기존 해법 대신 경제 성장을 통한 부채 상환 능력을 강조하며 국제 금융 기구의 역할을 촉구했습니다. 이는 제3세계 채무 문제에 대한 미국의 전향적 태도 변화를 보여주었습니다.
베이커는 부채 위기가 정치적 불안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상업 은행들의 참여를 독려했습니다.
민간 은행의 자금 공급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조정을 결합한 입체적인 해법이었습니다.
비록 완전한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이는 훗날 '브래디 플랜'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1986
[1986년 세제개편법 통과]
미국 역사상 가장 대대적인 세제 개편으로 평가받는 1986년 법안 통과를 주도합니다. 베이커는 소득세 최고 세율을 대폭 낮추고 복잡한 조세 구멍을 메우는 초당적 합의를 끌어냈습니다. 이는 세제를 단순화하고 경제적 효율성을 극대화한 현대적 조세 제도의 완성이었습니다.
재무장관으로서 그는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세법 초안을 정교하게 관리했습니다.
민주당 소속 댄 로스텐카우스키 하원 세입위원장과 긴밀히 협력하여 정파적 갈등을 넘었습니다.
이 법안 통과는 베이커가 행정 능력과 입법 전략을 겸비한 인물임을 다시 증명했습니다.
1987
[미국-캐나다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관리]
미국과 캐나다 간의 역사적인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위해 재무장관으로서 협상을 지원합니다. 북미 대륙의 경제 통합을 향한 첫걸음이었으며, 베이커는 협상 막판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직접 나서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훗날 NAFTA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베이커는 캐나다 대표단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관세 철폐와 무역 장벽 제거를 논의했습니다.
국내 이익 단체들의 반발을 조율하며 자유 무역이 가져올 장기적 이익을 설파했습니다.
협정의 타결은 베이커가 다자간 협상뿐만 아니라 양자간 무역 외교에서도 능숙함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1988
[부시 캠페인 의장직 수행을 위한 재무장관 사임]
조지 H.W. 부시 부통령의 대통령 선거 승리를 돕기 위해 재무장관직을 사임하고 캠페인 의장직을 맡습니다. 레이건의 그늘을 벗어나 부시만의 승리 동력을 만드는 데 집중했습니다. 친구의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안정적인 각료직 대신 다시 한번 험난한 선거판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베이커는 부시가 레이건의 계승자인 동시에 독자적인 지도자임을 강조하는 전략을 수립했습니다.
당시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 후보의 지지율 우세를 꺾기 위해 공격적인 네거티브 전술을 병행했습니다.
그의 사임은 정부 운영보다 친구의 승리가 우선이라는 의리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조지 H.W. 부시 대통령 당선 기여]
부시 후보의 대선 캠페인을 총지휘하여 마침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둡니다. 베이커는 선거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적절한 시점에 이슈를 선점하는 천재적 감각을 발휘했습니다. 부시의 당선으로 그는 차기 행정부에서 외교 수장으로 임명될 발판을 마련합니다.
베이커는 TV 토론 준비부터 광고 집행까지 캠페인의 모든 세부 사항을 직접 챙겼습니다.
'나의 입술을 읽어라, 새로운 세금은 없을 것이다'라는 부시의 핵심 공약을 관리했습니다.
선거 승리는 베이커가 미국 정치 역사상 가장 유능한 선거 전략가 중 한 명임을 입증했습니다.
1989
[제61대 미국 국무장관 취임]
부시 대통령 취임과 함께 미국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으로 임명됩니다. 냉전의 마지막 단계라는 격변의 시기에 미국 외교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국무부 조직을 장악하고 자신의 핵심 측근들과 함께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외교 전략을 수립합니다.
취임 직후 그는 국무부의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신속한 의사결정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전 세계적인 민주화 열풍 속에서 미국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전략적 행보를 시작했습니다.
베이커의 취임은 '변호사형 외교'가 세계 무대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실험의 시작이었습니다.
[몰타 정상회담(Malta Summit) 준비 및 관리]
부시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의 몰타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조율했습니다. 냉전의 공식적인 종식을 알린 이 회담에서 베이커는 소련과의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세밀한 의제를 준비했습니다. 이는 유혈 충돌 없는 냉전 종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베이커는 소련 내부의 개혁 세력을 지원하면서도 미국의 안보 이익을 양보하지 않는 전략을 폈습니다.
회담 기간 동안 고르바초프의 신뢰를 얻기 위해 인간적인 유대감을 형성하려 노력했습니다.
몰타 정상회담은 베이커가 거시적인 외교 흐름을 얼마나 잘 제어하는지 보여주었습니다.
[파나마 침공(Operation Just Cause) 외교적 대응]
미군의 파나마 침공 당시 국무장관으로서 국제 사회의 반응을 관리하고 개입의 정당성을 홍보했습니다. 마약 밀매와 민주주의 파괴를 일삼던 노리에가 정권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주변국들과의 갈등을 최소화하는 외교적 수완을 보였습니다. 이는 미국의 무력 개입에 대한 국제적 비난을 방어한 성과였습니다.
베이커는 침공 직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긴밀히 소통하며 미국의 개입이 일시적임을 강조했습니다.
노리에가의 체포와 파나마의 민주적 정권 이양을 위한 후속 조치를 마련했습니다.
이 사건은 베이커가 군사 작전과 외교적 수습을 어떻게 결합하는지 보여준 사례입니다.
1990
[고르바초프와의 '나토 확장 금지' 구두 협의]
독일 통일 협상 과정에서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에게 나토(NATO)의 관할권이 동쪽으로 단 1인치도 확장되지 않을 것이라는 유명한 구두 약속을 남깁니다. 이는 독일 통일을 향한 소련의 동의를 얻기 위한 전략적 양보였으나, 훗날 동구권 확장을 둘러싼 역사적 논쟁의 중심이 됩니다.
베이커는 독일의 통일이 소련의 안보 위협이 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하려 노력했습니다.
이 약속은 공식적인 문서로 남지 않았으나, 러시아 외교사에서 중요한 근거로 인용됩니다.
베이커의 이 발언은 냉전 후반부의 복잡한 신뢰 관계를 상징하는 핵심적 대화였습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강력한 규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국무장관으로서 즉각적인 국제 사회의 제재를 이끌어냈습니다. 소련과의 공동 성명을 발표하여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 통과를 주도했습니다. 이는 걸프 전쟁 승리를 위한 광범위한 다국적군 결성의 시작이었습니다.
베이커는 침공 당일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과 즉각 소통하여 공동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중동 분쟁에서 손을 잡은 것은 냉전 종식 이후 세계 질서의 큰 변화를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이라크에 대한 경제 제재와 무력 사용 승인을 위한 국제적 공감대를 신속히 형성했습니다.
[독일 통일을 위한 '2+4 협정' 서명]
모스크바에서 독일 통일의 최종 법적 기반이 된 '2+4 협정'에 미국 대표로 서명합니다. 베이커는 통일 독일의 나토 잔류와 전승국들의 권리 포기를 끌어내기 위해 수개월간 치밀한 셔틀 외교를 폈습니다. 이는 독일 통일이라는 역사적 대업에 미국의 주도적 역할을 각인시킨 성과였습니다.
그는 통일 독일이 유럽 안보의 중추가 되도록 서방 국가들과 소련 사이의 이견을 조율했습니다.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긴밀히 협력하며 통일 과정의 속도를 조절하고 안정성을 확보했습니다.
2+4 협정의 타결은 베이커가 이룬 외교적 업적 중 가장 빛나는 성과 중 하나입니다.
[걸프전 다국적군 결성을 위한 광범위한 셔틀 외교]
이라크에 대항하는 다국적군 결성을 위해 수십 개국을 방문하는 강행군 외교를 텄습니다. 특히 아랍 국가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중동 지도자들을 일일이 설득하고 미국의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이는 군사적 승리보다 더 어려운 '외교적 연합'의 완성이었습니다.
베이커는 소련이 미국의 군사 행동을 묵인하도록 설득하고 중국의 기권을 유도하는 수완을 보였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등 주요 아랍국가들의 참전을 이끌어내어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했습니다.
그의 셔틀 외교 덕분에 미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제 연대를 기반으로 전쟁을 치를 수 있었습니다.
1991
[제네바 회담에서 이라크에 최후통첩]
제네바에서 타리크 아지즈 이라크 외무장관을 만나 쿠웨이트 철군을 위한 최후통첩을 전달했습니다. 베이커는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제시했으나 이라크의 거부를 확인한 후, 군사적 행동이 불가피함을 국제 사회에 알렸습니다. 이는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가는 마지막 외교적 절차였습니다.
베이커는 아지즈 장관에게 부시 대통령의 친필 편지를 전달하려 했으나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회담 실패 후 그는 평화적인 해결 노력이 소진되었음을 차분하게 발표하여 명분을 쌓았습니다.
이 회담은 전쟁 전 미국의 외교적 성실함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대통령 자유 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 수여]
걸프 전쟁의 성공적 수행과 냉전 종식에 기여한 공로로 조지 H.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습니다. 이는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미국 최고의 훈장입니다. 베이커의 공직 생활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영예로운 순간이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훈장 수여식에서 베이커의 냉철한 판단력과 애국심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이 상은 그가 레이건과 부시 두 행정부에 걸쳐 세운 막대한 업적에 대한 국가적 보답이었습니다.
베이커는 훈장을 받은 후에도 자만하지 않고 바로 다음 외교 과제인 중동 평화 회담에 착수했습니다.
[마드리드 중동 평화 회담 주도]
이스라엘과 아랍 인접국, 그리고 팔레스타인 대표단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마드리드 평화 회담을 성사시켰습니다. 베이커는 모든 당사국을 설득하기 위해 수차례 중동을 방문하여 회담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이는 훗날 오슬로 협정의 초석이 된 역사적인 회담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장 문제를 압박하면서도 아랍 측의 무력 포기를 종용하는 균형 외교를 폈습니다.
대화조차 거부하던 적대국들을 한 테이블에 앉힌 것은 베이커 외교의 정수로 평가받습니다.
마드리드 회담은 중동 평화 프로세스의 실질적인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 사건이었습니다.
1992
[백악관 비서실장 재임명]
재선 위기에 처한 부시 대통령의 긴급 요청으로 국무장관직을 사임하고 다시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복귀합니다. 흔들리는 국정 운영을 다잡고 선거 캠페인을 지원하기 위한 '특단 조치'였습니다. 그는 외교 무대에서 물러나 다시 한번 국내 정치의 한복판으로 돌아왔습니다.
베이커의 복귀는 부시 행정부의 마지막 승부수였으나 경제 불황이라는 큰 벽에 부딪혔습니다.
그는 국정의 고삐를 죄고 정책 메시지를 선거 중심으로 재편하려 노력했습니다.
이 인사는 베이커가 대통령에게 얼마나 필수적인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입니다.
[부시 대통령의 재선 실패와 공직 퇴임]
빌 클린턴 후보에게 패배하며 부시 대통령의 재선이 무산되었고, 베이커도 공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12년간의 공화당 장기 집권이 끝나며 그는 워싱턴의 전설적인 관료로서 일단의 마침표를 찍습니다. 퇴임 후 그는 고향 텍사스로 돌아가 민간 영역에서의 활동을 준비합니다.
패배 후 그는 담담하게 정권 이양 과정을 관리하며 성숙한 관료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의 퇴임은 냉전 시대를 이끌었던 미국의 원로 정치인 세대가 교체됨을 의미했습니다.
베이커는 퇴임사에서 미국의 위대한 외교적 승리들을 회고하며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1993
[베이커 보츠(Baker Botts) 로펌 복귀]
공직 퇴임 후 가문의 로펌인 베이커 보츠에 시니어 파트너로 복귀합니다. 수십 년간 쌓은 정치적 경험과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국제 비즈니스와 전략적 자문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민간 영역에서도 여전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글로벌 기업들의 고문으로 활동합니다.
그의 복귀는 로펌의 대외적 신뢰도와 국제적 네트워크를 비약적으로 상승시켰습니다.
그는 주로 에너지 분야와 국제 분쟁 해결 분야에서 독보적인 자문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로펌 활동을 통해 그는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했습니다.
[베이커 공공 정책 연구소(Baker Institute) 설립]
라이스 대학교에 자신의 이름을 딴 '제임스 베이커 공공 정책 연구소'를 설립합니다. 외교와 경제 정책을 심도 있게 연구하고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지적 허브로 성장시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학문과 정책에 녹여내어 사회에 기여하고자 했습니다.
연구소는 중동 문제, 에너지 정책, 조세 제도 등 그가 현직 시절 다뤘던 의제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합니다.
베이커는 직접 연구소 운영에 관여하며 세계적인 석학들과 지도자들을 휴스턴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이 연구소는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책 연구 기관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1995
[회고록 'The Politics of Diplomacy' 발간]
국무장관 시절의 경험을 담은 회고록을 발간하여 냉전 종식의 뒷이야기를 공개합니다. 정교한 외교 전술과 강대국 간의 협상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하여 학계와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미국 현대 외교사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책에서 외교는 단순히 원칙의 나열이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타협임을 강조했습니다.
주요 지도자들과의 협상 비화와 고뇌를 솔직하게 서술하여 독자들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회고록의 발간은 베이커가 실무자를 넘어 외교 전략의 이론가로서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7
[유엔 서사하라 특사 임명]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요청으로 서사하라 분쟁 해결을 위한 특사로 임명됩니다. 수십 년간 해결되지 않은 아프리카의 난제를 풀기 위해 중재자로 나섰습니다. 그는 이해 당사자들 간의 직접 대화를 유도하며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했습니다.
베이커는 모로코와 폴리사리오 전선 사이의 신뢰 구축을 위해 셔틀 외교를 폈습니다.
'베이커 플랜'이라 불리는 자치 및 독립 투표안을 제시하며 실질적 대안을 마련하려 노력했습니다.
비록 완전한 종결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개입은 분쟁 지역에 평화의 모멘텀을 주었습니다.
2000
[조지 W. 부시 대통령 후보의 플로리다 재검표 지휘]
2000년 미 대선의 운명을 가른 플로리다주 재검표 논란 당시 조지 W. 부시 후보 측의 법적·정치적 대응을 총지휘합니다. 베이커는 치밀한 법적 전략과 언론 대응을 통해 부시 후보의 당선을 수호했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적 감각과 위기 관리 능력이 다시 한번 발휘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연방 대법원의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도의 법률적 논리를 구성했습니다.
앨 고어 측의 공세에 맞서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메시지로 지지자들을 결집시켰습니다.
부시 가문과의 오랜 인연을 바탕으로 그는 다시 한번 공화당 정권 창출의 결정적 공헌자가 되었습니다.
2001
[엔론(Enron) 사태 자문 활동]
거대 에너지 기업 엔론의 파산 사태 당시 법률 자문을 제공했습니다. 텍사스 경제의 기둥이었던 엔론의 몰락 과정에서 발생한 복잡한 법적 분쟁을 관리했습니다. 이는 전직 고위 관료로서 기업의 투명성과 책임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베이커는 엔론의 해외 프로젝트와 관련된 국제 법률 이슈들을 조율했습니다.
사태의 여파가 텍사스 법조계와 정계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려 노력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에게 민간 기업 윤리와 공적 감시의 필요성을 다시 일깨워주었습니다.
2003
[이라크 부채 탕감을 위한 특사 임명]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이라크의 대외 부채 문제 해결을 위한 대통령 특사로 임명됩니다. 이라크 전쟁 후 국가 재건을 가로막던 수십조 원의 부채를 탕감받기 위해 전 세계 채권국들을 방문했습니다. 그의 외교적 권위 덕분에 대규모 부채 탕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유럽과 중동 국가들을 순방하며 이라크의 안정이 세계 평화에 필수적임을 역설했습니다.
파리 클럽 소속 국가들로부터 유례없는 규모의 부채 감면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이 임무는 베이커가 은퇴 후에도 여전히 국가적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인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2004
[우즈베키스탄 선거 감시단 참여]
국제 선거 감시단의 일원으로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하여 민주적 선거 절차를 점검합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 과정을 지원하고 미국의 가치를 전파하는 활동이었습니다. 전직 국무장관으로서 세계의 민주주의 확산을 위해 기여했습니다.
베이커는 현지 정치 상황을 점검하고 투명한 선거 관리를 촉구했습니다.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야당과 시민 단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의 참가는 국제 사회가 우즈베키스탄의 정치 발전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2005
[연방 선거 개혁 위원회 공동 의장 역임]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함께 연방 선거 개혁 위원회의 공동 의장을 맡았습니다. 투표의 공정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개선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과거의 정적이었던 카터와 손을 잡고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초당적 모습으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위원회는 투표용지 규격화와 유권자 확인 절차 강화 등을 포함한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베이커는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이견을 조율하며 실질적인 합의안을 이끌어냈습니다.
이 활동은 미국 선거 제도의 신뢰성을 회복하기 위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2006
[이라크 연구 그룹(Iraq Study Group) 공동 의장 임명]
교착 상태에 빠진 이라크 전쟁의 탈출구를 찾기 위해 결성된 '이라크 연구 그룹'의 공동 의장을 맡습니다. 리 하밀턴 전 하원의원과 함께 초당적 위원회를 이끌며 현지 조사를 수행했습니다. 늪에 빠진 미국 대외 정책에 실용적인 해법을 제시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위원단은 이라크 정부의 책임 강화와 주변국들과의 외교적 해결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베이커는 이념적 도그마 대신 현실적인 철군 시나리오와 외교적 대안을 모색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당시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략 수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베이커 공공 정책 연구소 확장 및 활동 강화]
설립 10주년을 넘어서며 연구소의 연구 범위를 에너지 정책에서 의료 정책, 글로벌 거버넌스로 대폭 확장합니다. 베이커는 현역 시절의 인맥을 활용해 주요국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국제 포럼을 활성화했습니다. 휴스턴을 미국 남부의 정책 중심지로 변모시켰습니다.
그는 연구소가 단순한 학술 기관을 넘어 정책 결정자들에게 실질적 조언을 주는 싱크탱크가 되도록 관리했습니다.
자신의 공직 시절 기록물들을 연구소에 기증하여 연구자들에게 개방했습니다.
베이커의 열정 덕분에 연구소는 세계 최고의 대학교 부설 연구소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2007
[세계 정의 프로젝트(World Justice Project) 고문 활동]
법치주의 확산을 위한 글로벌 이니셔티브인 '세계 정의 프로젝트'의 고문으로 활동합니다. 전 세계 국가들의 법치 수준을 평가하고 개선을 유도하는 활동이었습니다. 법조인 출신으로서 공정한 법 집행이 국가 발전에 필수적임을 강조했습니다.
베이커는 법의 지배가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안정의 토대라는 자신의 신념을 전파했습니다.
다양한 국가의 법조인들과 교류하며 사법부의 독립성 강화를 지원했습니다.
이 활동은 그가 공직을 떠난 후에도 인류 보편의 가치를 위해 헌신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2008
[에너지 안보에 관한 초당적 위원회 참여]
미국의 에너지 자립과 국제 에너지 가격 안정을 위한 초당적 위원회에 참여합니다. 재무장관 시절 겪었던 오일 쇼크와 중동 문제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에너지 전략을 제안했습니다. 기후 변화와 에너지 안보를 결합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습니다.
베이커는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는 것이 전략적 필수임을 강조했습니다.
국내 에너지 생산 확대와 효율성 증대를 위한 입법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의 조언은 행정부와 입법부가 장기적인 에너지 로드맵을 수립하는 데 참고가 되었습니다.
2010
[실바누스 테이어상(Sylvanus Thayer Award) 수상]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로부터 국가를 위해 헌신한 시민에게 수여되는 실바누스 테이어상을 받습니다. 해병대 출신임에도 육군사관학교의 존경을 받은 것은 그의 공직 경력이 정파와 군종을 넘어선 것임을 보여줍니다. 국가 안보를 수호한 그의 업적에 대한 칭송이었습니다.
수상 연설에서 그는 군과 민간의 협력이 미국의 번영을 이끄는 힘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생도들에게 변화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미국의 전략적 위치를 설명하며 리더십을 강의했습니다.
이 상은 베이커가 미국 안보 공동체 내에서 차지하는 압도적 위상을 상징합니다.
[휴스턴 시청 앞 기마상 제막]
휴스턴 시는 베이커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시청 인근의 스미스 파크에 그의 기마상을 건립합니다. 고향 휴스턴을 빛낸 인물로서 시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제막식에는 정계와 경제계의 수많은 명사들이 참석하여 그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기마상은 그가 즐기던 텍사스 기수(Rider)로서의 이미지를 형상화했습니다.
베이커는 제막식에서 휴스턴이 자신의 정체성의 뿌리임을 감격스럽게 표현했습니다.
동상은 현재도 휴스턴 시민들에게 '전략가 베이커'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2012
[대선 후보 선거 전략 자문]
2012년 대선 당시 공화당 밋 롬니 후보의 선거 전략에 대해 비공식적인 조언을 제공합니다. 전설적인 전략가의 지혜를 얻기 위해 많은 후배 정치인들이 그를 찾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공화당의 정신적 지주로서 정계의 향방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주로 외교 정책과 중산층 유권자 소구 전략에 대해 조언했습니다.
정파적인 비난보다는 정책의 실효성과 국가적 통합을 중시하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그의 자문은 선거판의 과열 속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2013
[미국 의회 금메달(Congressional Gold Medal) 추진 관련 논의]
그의 공직 생활 50년을 기념하여 의회 차원의 금메달 수여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민주당과 공화당 의원들이 한목소리로 그의 협상력과 애국심을 칭찬했습니다. 이는 베이커가 초당적으로 존경받는 미국의 '국로'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베이커는 자신의 명예보다 미국 민주주의의 회복이 더 중요하다는 겸손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의회 내에서의 그에 대한 평가는 정쟁의 시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상징이었습니다.
그의 생애 전반에 걸친 '국가 수호'의 가치가 다시 한번 재조명되었습니다.
2015
[라이스 대학교 창립 기념식 기조연설]
자신의 연구소가 위치한 라이스 대학교의 주요 행사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미래 세대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교육과 정책의 결합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임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팔순의 나이에도 명쾌한 지성과 강력한 호소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연설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열심히 일하고 연구하라(Work hard, study)'는 자신의 좌우명을 전했습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지식인이 가져야 할 윤리 의식을 강조했습니다.
이 연설은 많은 학생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으며 대학 커뮤니티의 자부심을 높였습니다.
2017
[기후 탄소 배당금 위원회 발족 주도]
보수주의적 관점에서의 기후 변화 해결책인 '탄소 배당금' 계획을 제안하며 위원회를 발족합니다. 시장 원리를 활용하여 탄소 배출을 줄이면서도 경제 성장을 저해하지 않는 혁신적인 대안이었습니다. 보수 진영의 환경 정책 논의를 주류로 끌어올린 성과였습니다.
그는 탄소세 수입을 국민들에게 직접 배당하여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는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전직 국무장관 조지 슐츠와 협력하여 보수층과 기업들을 설득했습니다.
이 활동은 베이커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여전히 생산적인 정책을 내놓고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2018
[평생의 친구 조지 H.W. 부시 대통령의 임종을 지킴]
오랜 정치적 동반자이자 절친한 친구인 조지 H.W. 부시 대통령이 세상을 떠날 때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베이커는 부시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며 두 사람의 위대한 우정을 마무리했습니다. 장례 위원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며 친구를 명예롭게 떠나보냈습니다.
그는 친구의 발치에 앉아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눴으며, 부시의 유언을 챙겼습니다.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통해 부시 대통령의 인간적 위대함과 외교적 업적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감동적인 파트너십으로 기억됩니다.
2020
[제임스 베이커 90세 생일 기념]
미국 정계의 원로로서 아흔 번째 생일을 맞이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전 세계의 수많은 지도자들이 영상 메시지를 통해 그의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정교한 지성을 유지하며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국가적 지혜'로 불립니다.
베이커 연구소는 창립자의 생일을 맞아 그가 남긴 외교적 유산에 대한 특별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조촐하게 생일을 보내며 지난 공직 시절을 회고했습니다.
아흔의 나이에도 그는 집필과 연구소 자문 활동을 지속하며 노익장을 과시했습니다.
2021
[현대 외교의 거장으로서의 지속적인 자문]
미국의 대외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고위 관리들과 비공식적으로 소통하며 지혜를 나눕니다. 특히 러시아와 중국과의 관계 설정에서 냉전 종식의 주역인 그의 조언은 여전히 큰 무게감을 갖습니다. 정파를 초월한 외교의 현자로 존경받습니다.
그는 국제 질서가 무너지는 시기에 동맹의 가치와 다자간 협상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과거의 협상 비화를 전하며 현재의 갈등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습니다.
그의 서재는 여전히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정책 입안자들의 방문으로 북적입니다.
2023
[베이커 연구소 30주년 기념식 참석]
자신이 설립한 베이커 연구소의 창립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연구소의 성과를 축하합니다. 라이스 대학교의 학문적 발전과 휴스턴의 정책 역량을 강화한 공로를 재확인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산이 미래 세대에 의해 건강하게 이어지고 있음에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기념식에서 그는 '진실한 정책은 정파가 아닌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철학을 강조했습니다.
수많은 제자들과 연구원들이 그에게 존경의 뜻을 표했습니다.
이 행사는 베이커의 정치적, 학문적 여정이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자리였습니다.
2024
[평화와 국익을 위한 최후의 제언]
최근의 국제 분쟁 상황에 대해 원로로서 깊은 우려를 표하며, 다시금 '정교한 외교'의 시대로 돌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그는 무력보다는 대화가, 비난보다는 협상이 인류의 비극을 막는 길임을 역설했습니다. 94세의 나이에도 그의 목소리는 미국 외교의 이정표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언론 인터뷰와 기고문을 통해 국가 간의 신뢰 구축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자신의 공직 경험을 집대성한 마지막 지혜를 후대 지도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베이커는 여전히 미국이 가장 신뢰하는 '문제 해결사'이자 영원한 국무장관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