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학연구소
국립연구개발법인, 자연과학 종합연구소, 과학 기술 연구소
최근 수정 시각 : 2026-01-15- 15:43:37
이화학연구소(RIKEN)는 일본 과학기술의 자부심이자 ‘과학자의 낙원’이라 불리는 세계 최고의 종합 자연과학 연구소입니다. 1917년 다카미네 조키치의 제창으로 설립된 이래, 물리, 화학, 공학, 생물학 등 전 분야에서 인류의 지적 지평을 넓혀왔습니다. 오코치 마사토시의 혁신적인 경영으로 연구와 산업을 결합한 ‘리켄 콘체른’을 일구며 일본 산업 현대화를 이끌었고, 전후 해체와 재편의 시련 속에서도 유카와 히데키, 도모나가 신이치로 등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며 학문적 정통성을 지켰습니다. 오늘날에는 니호늄 발견, 슈퍼컴퓨터 후가쿠 개발 등 국가 전략 기술을 선도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글로벌 지식 허브로서 그 위대한 서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1913
[다카미네 조키치의 제창]
세계적인 화학자 다카미네 조키치가 일본에도 순수 과학을 연구할 종합 연구소가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그는 미국 시찰 후 기초 과학의 힘이 국가 경쟁력의 근원임을 깨닫고 국립 연구소 설립을 강력히 제안합니다. 이 제안은 일본 정재계에 큰 울림을 주며 연구소 탄생의 씨앗이 됩니다.
다카미네 조키치는 아드레날린 결정화 등에 성공한 인물로, 과학의 실용화와 기초 연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부사와 에이치 등 경제계 거물들을 설득하여 연구소 설립을 위한 민간 차원의 협력을 이끌어냈습니다.
이 제안은 훗날 일본이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과학 강국으로 도약하는 역사적인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1915
[설립 계획의 정부 승인]
일본 정부가 다카미네 조키치의 제안을 수용하여 이화학연구소 설립을 위한 예산을 배정하고 계획을 승인합니다. 국가 예산과 민간 기부금을 합쳐 연구소 건립을 추진하는 민관 협력 모델이 확정됩니다. 일본 최초의 대규모 과학 기술 거점 구축이 본격화됩니다.
당시 일본 의회는 과학 기술 진흥을 위해 매년 거액의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시부사와 에이치를 중심으로 한 경제계는 민간 기부금을 모집하여 연구소의 독립적인 운영 기반을 닦았습니다.
국가적인 전폭 지원 아래 물리와 화학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연구 체계의 청사진이 그려졌습니다.
1917
[재단법인 설립 위원회 구성]
연구소의 공식 출범을 위한 설립 위원회가 구성되어 정관 작성과 조직 정비에 나섭니다. 당대 최고의 학자와 경제인들이 모여 연구소의 장기적인 운영 방안을 논의합니다. 법적 실체로서의 이화학연구소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위원장에는 시부사와 에이치가 추대되어 자금 조달과 행정적 기틀 마련을 총괄했습니다.
연구 분야의 세부 규정을 만들기 위해 물리학자와 화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학문적 엄격성을 확보했습니다.
이 위원회는 연구소의 중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키쿠치 다이로쿠 초대 소장 취임]
수학자이자 교육 행정가인 키쿠치 다이로쿠가 연구소의 첫 번째 수장으로 부임합니다. 그는 연구소의 초기 학문적 방향을 설정하고 우수한 인재들을 영입하는 데 힘씁니다. 하지만 취임 직후 서거하면서 초기 운영은 후임에게 넘겨집니다.
키쿠치 소장은 도쿄 제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인물로, 연구소의 권위를 세우는 데 적임자였습니다.
그는 순수 과학의 연구가 기술 혁신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의 짧은 임기였으나 연구소의 기초 설계도는 그의 지식과 경륜에서 비롯된 것이 많았습니다.
[재단법인 이화학연구소 설립]
마침내 도쿄 고마고메에서 재단법인 이화학연구소가 공식적으로 설립됩니다. 일본 천황의 하사금과 정부 보조금, 민간 기부금을 바탕으로 한 거대 연구 기구의 탄생입니다. 일본 과학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초대 총재로는 가야노미야 쿠니노리 왕이 취임하여 연구소의 격을 높였습니다.
도쿄 분쿄구 고마고메 부지에 대규모 실험동과 연구 시설이 들어서며 연구원들이 집결했습니다.
이로써 일본은 서구의 연구소들과 경쟁할 수 있는 자국 내 독자적인 과학 기술 본부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후루이치 코이 2대 소장 부임]
공학자이자 행정가인 후루이치 코이가 제2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연구소를 이끕니다. 그는 연구 시설의 확충과 조직 안정화에 주력하며 초기 혼란을 수습합니다. 학문 간의 융합 연구를 장려하며 연구소의 정체성을 강화합니다.
후루이치 소장은 토목 공학의 권위자로, 연구소 건물의 증축과 최신 실험 장비 도입을 진두지휘했습니다.
그는 물리학과 화학이 분리되지 않고 협력할 수 있는 유연한 조직 문화를 강조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연구소는 본격적으로 연구 성과를 내기 시작하며 학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1921
[오코치 마사토시 3대 소장 취임]
연구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영자로 꼽히는 오코치 마사토시가 제3대 소장으로 취임합니다. 그는 재정 위기에 처한 연구소를 구하기 위해 파격적인 경영 혁신을 단행합니다. ‘과학자의 낙원’과 ‘연구의 산업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시대를 엽니다.
오코치 소장은 연구원들이 자유롭게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호봉제 폐지 등 인사 혁신을 실시했습니다.
동시에 연구 성과를 직접 사업화하여 얻은 수익으로 다시 연구비를 조달하는 획기적인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이화학연구소는 단순한 연구 기관을 넘어 거대 산업 집단으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1922
[연구실 주임제 도입]
오코치 마사토시 소장이 연구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연구실 주임제’를 도입합니다. 각 연구실의 주임에게 예산과 인사권을 대폭 위임하여 창의적인 연구가 가능하도록 합니다. 이 제도는 소니 창업자 등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요람이 됩니다.
주임 연구원은 자신의 연구실을 하나의 작은 연구소처럼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중앙 집권적인 관리에서 벗어나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소신대로 연구하는 풍토가 조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자율성은 이화학연구소가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쏟아내게 만든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1927
[이화학공업 주식회사 설립]
연구소의 발명품을 시장에 내놓기 위해 ‘이화학공업’을 설립하며 리켄 콘체른의 모태를 만듭니다. 연구 성과가 논문으로만 남지 않고 실제 제품으로 변모하여 국민의 삶에 기여하기 시작합니다. 과학 기술이 부를 창출하는 실증적인 사례를 제시합니다.
합성 술(비타민 첨가 술), 피스톤 링, 감광지 등 연구소의 혁신적 기술들이 상용화되었습니다.
회사의 이익금은 연구소의 보조금 감축을 보충하고 더 큰 연구 프로젝트를 위한 자금이 되었습니다.
이는 대학이나 연구소가 비즈니스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선구적인 시도였습니다.
[리켄 콘체른의 형성]
이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수많은 계열사가 탄생하며 ‘리켄 콘체른’이라는 거대 기업 집단이 형성됩니다. 한때 63개의 회사와 121개의 공장을 거느린 대재벌로 성장하여 일본 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합니다. 과학 기반의 산업 제국이 완성된 순간입니다.
리켄 비타민, 리켄 피스톤 링 등 대중에게 친숙한 브랜드들이 이 시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일반 재벌과 달리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독점적 경쟁력을 확보하여 빠르게 사세를 확장했습니다.
오코치 소장은 이 콘체른을 통해 과학자가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보장받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1932
[합성 청주 ‘리큐’의 성공]
쌀을 사용하지 않고 화학적 방법으로 제조한 합성 청주 ‘리큐’가 대히트를 기록합니다. 식량난 속에서 쌀 소비를 줄이면서도 술의 맛을 유지한 혁신적인 발명품이었습니다. 연구소의 재정을 튼튼하게 만든 효자 상품으로 기록됩니다.
스즈키 우메타로 박사의 영양학 연구와 연계되어 비타민이 함유된 건강한 술로 마케팅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양조 방식을 과학적으로 해부하여 대량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수익은 당시 고가였던 물리 실험 장비들을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1935
[가속기 연구의 태동]
니시나 요시오 박사를 중심으로 양자물리학과 핵물리학 연구를 위한 가속기 건설을 계획합니다. 일본의 물리 연구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원대한 도전이 시작됩니다. 보어, 하이젠베르크 등 세계 석학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시기입니다.
니시나 요시오는 코펜하겐에서 닐스 보어와 함께 공부하며 최신 물리 이론을 일본에 이식했습니다.
그의 연구실은 이른바 ‘니시나 스쿨’이라 불리며 차세대 일본 물리학자들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핵분열과 우주선 연구를 위해 필수적인 실험 도구인 사이클로트론 도입이 강력히 추진되었습니다.
1937
[소형 사이클로트론 완성]
일본 최초의 소형 사이클로트론(입자 가속기)을 성공적으로 제작하여 가동을 시작합니다. 아시아에서 가속기 시대가 열린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원자핵의 비밀을 파헤치는 고에너지 물리 실험이 가능해집니다.
미국 로런스 박사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연구소 자체 기술진이 조립과 제작을 수행했습니다.
방사성 동위원소를 직접 제조하여 의학 및 생물학 연구에 활용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 성공으로 이화학연구소는 세계 3대 핵물리 연구 거점 중 하나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1941
[니호(二号) 연구의 시작]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일본 육군의 요청으로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기초 연구인 ‘니호 연구’에 착수합니다. 니시나 요시오 박사가 총책임을 맡아 우라늄 농축 기술 개발에 매진합니다. 과학이 전쟁의 도구로 동원되는 어두운 시기의 기록입니다.
연구소 내 49호관을 중심으로 기체 확산법을 이용한 우라늄 235 분리 실험이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자원과 기술적 난관, 군부의 과도한 압박으로 인해 연구는 큰 진척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연구는 훗날 일본의 핵 기술 수준을 가늠하는 역사적 사료이자 성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43
[대형 사이클로트론 완공]
전쟁 중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대형 사이클로트론을 완공하는 집념을 보입니다. 대규모 에너지 가속을 통해 더욱 깊은 소립자의 세계를 탐구할 기반을 갖춥니다. 일본 물리 기술력의 정점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습니다.
200톤 규모의 자석을 사용하는 이 장치는 당시 세계적으로도 드문 거대 과학 시설이었습니다.
니시나 요시오 박사는 이 장치를 통해 전후 학문적 재기를 꿈꾸며 밤샘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과학 기구는 전쟁의 광풍 속에서 허망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1945
[고마고메 캠퍼스 공습 피해]
도쿄 대공습으로 인해 고마고메의 연구소 건물들이 화염에 휩싸여 파괴됩니다. 수많은 연구 자료와 실험 장비들이 소실되는 국가적 비극을 겪습니다. 연구소의 기능이 사실상 마비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니시나 요시오 박사는 불타는 연구소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가속기 보호에 힘썼습니다.
연구원들은 폐허 속에서도 중요한 문서들을 구출해내며 연구의 불씨를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이 공습으로 이화학연구소의 물리적 기반은 초토화되었으나 정신적 유산은 보존되었습니다.
[사이클로트론의 파괴와 수장]
패전 후 점령군인 미군이 연구소의 사이클로트론을 원자폭탄 연구 시설로 오인하여 파괴하고 도쿄만에 수장합니다. 과학자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적 자산이 폭력적으로 제거된 사건입니다. 일본 기초 과학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미군 공병대가 들이닥쳐 5일간 해체 작업을 벌인 후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니시나 요시오 박사는 “이것은 순수 학술용”이라며 호소했으나 묵살당했습니다.
훗날 이 사건은 미국의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과도한 처사였다는 비판을 받으며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1946
[오코치 마사토시 소장 공직 추방]
GHQ의 재벌 해체 정책과 전쟁 책임 추궁으로 오코치 마사토시 소장이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연구소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영웅적 지도자가 떠나며 연구소는 지도력 부재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리켄 콘체른 또한 해체 절차를 밟게 됩니다.
오코치 소장은 전범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으나 훗날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그의 퇴임은 이화학연구소가 가졌던 산업적, 정치적 영향력이 종식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연구소는 이제 생존을 위해 독자적인 재건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험난한 길에 들어섰습니다.
1948
[주식회사 과학연구소(Kaken)로 전환]
재단법인이 해체되면서 연구소는 생존을 위해 민간 기업 형태인 ‘주식회사 과학연구소’로 새출발합니다. 보조금이 끊긴 상태에서 연구원들이 직접 약을 만들어 파는 고난의 시기를 보냅니다. 기초 과학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시작됩니다.
페니실린 대량 생산과 비타민 판매로 겨우 연구소의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연구원들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연구하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기업으로서의 수익은 신통치 않았으나, 연구의 자율성을 지키려는 의지는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니시나 요시오 사장 취임]
기업화된 과학연구소의 초대 사장으로 니시나 요시오 박사가 취임합니다. 그는 과학적 양심을 지키며 연구소를 재건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명예를 겁니다. 전후 일본 과학의 부흥을 이끄는 리더로서 활약합니다.
니시나 사장은 해외 과학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지원을 요청하고 최신 학술 정보를 구했습니다.
그의 인품과 실력에 감복한 수많은 젊은 물리학자들이 폐허가 된 연구소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연구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해 정부를 상대로 끈질긴 협상을 벌였습니다.
1949
[유카와 히데키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이화학연구소 출신인 유카와 히데키 박사가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합니다. 패전의 절망에 빠져 있던 일본 국민들에게 과학의 힘으로 큰 희망과 자부심을 선사합니다. 이화학연구소의 학문적 저력을 세계에 다시 한번 증명한 순간입니다.
유카와 박사는 니시나 요시오가 이끄는 연구실에서 중간자 이론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의 수상은 이화학연구소가 추구해온 기초 과학 연구의 가치를 국가적으로 인정받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일본 정부는 연구소에 대한 재정 지원 재개를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1951
[니시나 요시오 사장 서거]
연구소 재건을 위해 헌신하던 니시나 요시오 사장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연구원들은 정신적 지주를 잃은 슬픔에 잠기며 다시 한번 위기를 맞이합니다.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연구소의 국책 기관화를 향한 노력이 이어집니다.
임종 직전까지도 연구소의 장래를 걱정하며 후배들에게 연구에 정진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과학자가 참석하여 일본 현대 물리 확립에 기여한 공로를 기렸습니다.
그의 서거 이후 연구소는 민간 기업 형태의 한계를 절감하고 법적 지위 회복을 위해 더욱 결속했습니다.
1952
[사토 마사노리 사장 취임]
전 남만주철도 이사 출신인 사토 마사노리가 과학연구소 사장으로 부임합니다. 그는 경영 효율화를 통해 만성 적자 구조를 개선하고 연구소의 체질을 개선합니다. 연구와 경영 사이의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한 시기입니다.
실용성 없는 연구실을 과감히 정리하고 시장성이 있는 기술 개발을 장려했습니다.
당시 활발해진 의약품 사업을 통해 연구소의 운영 자금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시기 연구소는 점차 안정을 찾으며 다시 종합 과학 기구로서의 면모를 회복해 나갔습니다.
1958
[나가오카 하루오 초대 이사장 부임]
특수법인으로 전환된 이화학연구소의 첫 번째 이사장으로 나가오카 하루오가 취임합니다. 그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대대적인 조직 개편과 연구 시설 현대화에 착수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연구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전설적인 물리학자 나가오카 한타로의 아들로, 가문의 명예를 걸고 연구소 발전에 헌신했습니다.
연구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전 세계에서 우수한 연구 인력을 수혈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이화학연구소는 고마고메를 떠나 더 넓은 부지로의 이전을 계획하게 됩니다.
[특수법인 이화학연구소 출범]
과학연구소 주식회사가 해산되고, 국가의 지원을 받는 특수법인 ‘이화학연구소’로 재탄생합니다. 10년 만에 다시 국책 연구 기관으로서의 지위와 명칭을 되찾은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일본 과학 기술 정책의 중심 기구로 화려하게 복귀합니다.
이화학연구소법 제정에 따라 정부의 안정적인 예산 지원이 보장되었습니다.
기업적 성격을 벗고 다시 순수 과학과 국가 전략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이날의 부활은 전후 일본이 과학 입국(科學立國)을 국정 목표로 세웠음을 상징합니다.
1963
[와코시 캠퍼스 이전 시작]
도쿄 고마고메의 좁고 노후된 시설을 떠나 사이타마현 와코시의 광활한 부지로 이전을 시작합니다. 현대적인 대규모 연구 단지를 조성하여 세계적인 연구 기지로 도약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합니다. 이화학연구소의 새로운 황금기가 열리는 장소입니다.
수년에 걸쳐 진행된 이 거대 프로젝트를 통해 첨단 가속기와 초대형 실험 장비들이 설치되었습니다.
고마고메 캠퍼스는 일부 연구 기능만 남긴 채, 대부분의 역량이 와코시로 집결되었습니다.
와코시는 오늘날까지도 이화학연구소 본부가 위치한 일본 과학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65
[도모나가 신이치로 노벨상 수상]
이화학연구소 출신이자 니시나 스쿨의 제자인 도모나가 신이치로 박사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합니다. 양자전기역학의 기초를 확립한 공로를 인정받아 연구소의 학문적 계보가 이어지고 있음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일본 물리 연구의 황금 시대가 도래했음을 상징합니다.
도모나가 박사는 전시와 전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이화학연구소의 연구 인프라를 활용했습니다.
그의 수상은 니시나 요시오가 뿌린 씨앗이 세계적인 꽃으로 피어난 결과였습니다.
이 수상을 통해 이화학연구소는 세계 최정상급 물리학 연구소로서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1966
[아카보리 시로 2대 이사장 취임]
생화학 분야의 권위자인 아카보리 시로가 제2대 이사장으로 부임합니다. 그는 생물학과 화학의 융합을 통한 신영역 개척에 힘쓰며 연구소의 외연을 확장합니다. 현대 생명 과학 연구의 기틀을 마련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단백질 연구와 효소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성과를 냈던 그의 경험이 연구소 운영에 투영되었습니다.
와코시 캠퍼스의 이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연구 부서 간의 소통을 강화했습니다.
그는 과학자가 존경받는 사회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대중 과학 보급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1967
[설립 50주년 기념행사]
창립 반세기를 맞아 그간의 성과를 정리하고 미래 50년을 향한 새로운 비전을 선포합니다. 일본 과학 기술의 살아있는 역사를 자축하며 국민적 관심을 환기합니다. 세계로 뻗어 나가는 글로벌 연구소로의 도약을 다짐합니다.
50주년 기념사에서 오코치 소장의 정신을 계승하고 첨단 과학의 선구자가 될 것을 선언했습니다.
전 세계의 협력 기관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대규모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했습니다.
이 행사를 계기로 이화학연구소의 국제적 네트워크가 획기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1974
[소립자 및 중이온 가속기 강화]
세계 최첨단 중이온 가속기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물성 물리학 연구에 박차를 가합니다. 원소의 근원을 탐구하는 기초 연구를 통해 새로운 물리 법칙 발견을 목표로 합니다. 전 세계 물리학자들이 와코시로 모여드는 계기가 됩니다.
기존 사이클로트론의 성능을 뛰어넘는 고성능 가속기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습니다.
이 시설은 훗날 일본이 신원소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장비가 될 기술적 모태가 되었습니다.
물질의 극한 상태를 재현하는 실험들을 통해 이화학연구소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1984
[쓰쿠바 생명과학센터 설립]
과학 도시 쓰쿠바에 생명 과학 연구를 전담할 분원을 설치합니다. 유전 공학과 분자 생물학 분야의 연구 역량을 결집하여 인류의 질병 정복에 도전합니다. 생명 과학의 메카로서 이화학연구소의 영향력이 확대됩니다.
당시 급격히 발전하던 유전자 조작 기술과 세포 배양 연구의 허브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국내외 제약 회사 및 대학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 실질적인 보건 의료 성과를 도출했습니다.
이 센터는 훗날 이화학연구소 생명 과학 분야의 핵심 기지로 성장하게 됩니다.
1987
[개척 연구소 시스템 도입]
젊은 연구자들이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개척 연구소’ 시스템을 도입합니다.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10년 후의 기술을 미리 연구하는 선구적인 조직입니다. 연구소 내의 혁신과 역동성을 불어넣는 촉매제가 됩니다.
나이와 경력에 상관없이 뛰어난 아이디어를 가진 인재들에게 독립적인 연구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연구 문화를 장려하여 수많은 원천 기술을 확보하는 성과를 냈습니다.
이 시스템은 전 세계 연구기관들이 벤치마킹하는 인사 관리의 모범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1988
[오다 미노루 6대 이사장 취임]
우주 물리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오다 미노루가 이사장으로 부임합니다. 그는 연구소의 연구 범위를 우주와 지구 환경으로 넓히며 거시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지적인 모험심이 가득한 연구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X선 천문학의 개척자였던 그의 철학에 따라 천체 물리학 연구 부서가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그는 과학자가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이화학연구소는 국제적인 공동 우주 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1993
[아리마 아키토 7대 이사장 취임]
이론물리학자이자 교육자인 아리마 아키토가 제7대 이사장으로 부임합니다. 그는 연구소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연구 평가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인프라 투자를 단행합니다. 대형 방사광 가속기 건설을 진두지휘합니다.
도쿄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그의 경륜은 연구소 행정의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였습니다.
그는 젊은 연구자들의 해외 파견을 장려하고 글로벌 인재와의 교류를 제도화했습니다.
그의 재임 중 SPring-8 프로젝트가 본격화되며 물리 실험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습니다.
1997
[대형 방사광 시설 SPring-8 완공]
효고현 하리마 과학정원에 세계 최대 규모의 방사광 가속기 시설인 SPring-8을 완공합니다. 빛의 속도로 가속된 전자가 내뿜는 강력한 빛으로 물질의 미세 구조를 관찰합니다. 현대 과학의 가장 강력한 돋보기를 인류가 보유하게 된 순간입니다.
원자 수준의 해상도를 제공하여 신약 개발, 신소재 연구 등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전 세계 수천 명의 연구자가 매년 이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 하리마를 방문합니다.
이 시설은 이화학연구소가 거대 과학(Big Science)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1998
[뇌과학 종합연구센터(BSI) 설립]
인간 뇌의 신비를 풀기 위해 뇌과학 전담 연구 조직인 BSI를 출범시킵니다. 인지 기능, 신경 퇴행성 질환, AI와의 융합 연구 등을 수행합니다. 생명 과학의 마지막 미개척지로 불리는 뇌 연구를 선도합니다.
초대 센터장으로 이토 마사오 박사를 영입하여 세계 최정상급 연구진을 구성했습니다.
치매와 우울증 등 사회적 파급력이 큰 질환의 원인 규명에 획기적인 성과를 냈습니다.
이 센터는 훗날 이화학연구소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과학 기술을 추구하게 만드는 핵심 축이 되었습니다.
2000
[요코하마 캠퍼스 설립]
유전체 과학과 오믹스 연구를 위한 요코하마 연구 단지를 조성합니다. 인간 유전체 지도의 해독과 질병 유전자 분석 등 정밀 의료의 토대를 닦습니다. 생명 과학 분야의 대규모 데이터 기반 연구가 시작됩니다.
세계적인 게놈 연구 흐름에 발맞춰 대규모 시퀀싱 시설과 분석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요코하마 시와의 협력을 통해 바이오 클러스터를 구축하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했습니다.
이 캠퍼스는 맞춤형 의료와 미래 식량 자원 연구의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발생·재생과학 종합연구센터(CDB) 설립]
고베에 재생 의학 연구를 위한 전문 센터인 CDB를 설립합니다. 줄기세포를 이용한 조직 재생과 생명 탄생의 원리를 규명하는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합니다. 전 세계 재생 의학계의 중심지로 급부상합니다.
다케이치 마사토시 박사를 중심으로 세포 부착 분자 연구 등 세계적 성과를 도출했습니다.
iPS 세포의 임상 적용 연구 등 인류의 수명을 연장할 혁신적 기술들이 이곳에서 논의되었습니다.
고베 의료 산업 도시의 핵심 기관으로서 산학연 협력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2001
[노요리 료지 박사 노벨 화학상 수상]
이화학연구소의 이사인 노요리 료지 박사가 비대칭 촉매 반응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합니다. 연구소의 리더가 학문적 정점에 올랐음을 보여준 자랑스러운 결과입니다. 연구소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다시 한번 조명받습니다.
노요리 박사는 훗날 이사장으로 부임하여 연구소의 구조적 개혁을 주도하게 됩니다.
그의 수상은 이화학연구소가 우수한 연구진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존중하는 문화를 가졌음을 의미했습니다.
이 수상을 계기로 연구소의 학문적 권위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2002
[바이오리소스센터(BRC) 설립]
생명 과학 연구의 필수 자원인 마우스, 세포, 미생물 등을 보존하고 분양하는 BRC를 쓰쿠바에 세웁니다. 연구 인프라의 표준화와 안정적인 공급 체계를 구축합니다. 전 세계 생명 과학 연구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수행합니다.
엄격한 품질 관리와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통해 연구의 신뢰성을 높였습니다.
희귀 질환 연구를 위한 유전자 변형 모델 동물을 개발하여 전 세계에 보급했습니다.
이 센터는 일본 생명 과학 자원의 국가 전략 자산화를 성공시킨 핵심 기구입니다.
2003
[노요리 료지 9대 이사장 취임]
노벨상 수상자인 노요리 료지 박사가 독립행정법인 초대 이사장으로 부임합니다. 그는 ‘연구를 위한 연구’를 넘어 ‘사회와 함께하는 과학’을 강조하며 조직의 대대적인 체질 개선을 이끕니다. 12년간의 장기 집권을 통해 연구소의 전성기를 이끕니다.
그는 ‘리켄 비전’을 선포하여 기초 과학과 응용 과학의 벽을 허무는 혁신을 단행했습니다.
국제적인 평가 위원회를 구성하여 연구 수준을 세계 기준으로 검증받도록 했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이화학연구소는 노벨상급 연구 성과가 지속적으로 창출되는 구조를 갖추었습니다.
[독립행정법인 이화학연구소 전환]
특수법인 체제에서 독립행정법인 체제로 전환하며 운영의 자율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합니다. 민간 경영 기법을 도입하여 연구 성과의 사회 환원을 더욱 가속화합니다. 현대적인 연구 기관으로서의 거버넌스를 완성합니다.
성과 중심의 평가 제도를 정착시키고 예산 운용의 유연성을 확보했습니다.
정부로부터의 간섭은 줄이고 연구의 공공성과 투명성은 높이는 혁신적인 구조입니다.
이 전환은 이화학연구소가 글로벌 선도 연구 기관들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행정적 기틀이 되었습니다.
2004
[113번 신원소 발견]
모리타 코스케 박사 팀이 가속기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113번 신원소를 세계 최초로 발견합니다. 아시아 국가가 주기율표에 이름을 올린 최초의 쾌거입니다. 수십 년간 축적된 연구소 가속기 기술력의 결정체입니다.
수조 번의 충돌 실험 끝에 얻어낸 단 몇 개의 원자로 인류의 지식 지도를 바꿨습니다.
이후 수년간의 검증 과정을 거쳐 발견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 발견은 일본 기초 과학의 끈기와 실력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위대한 기록입니다.
2006
[RI빔 팩토리(RIBF) 가동]
세계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방사성 동위원소 빔 가속기 시설인 RIBF를 본격 가동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희귀 원소들을 생성하여 우주의 탄생과 물질의 근원을 연구합니다. 핵물리학 연구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합니다.
초전도 가속기를 이용해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극한의 핵종들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주 초기 별의 내부에서 원소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비밀을 풀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설은 전 세계 물리학자들이 가장 연주하고 싶어 하는 꿈의 무대로 불립니다.
2011
[슈퍼컴퓨터 ‘K’ 세계 1위 달성]
이화학연구소가 개발한 슈퍼컴퓨터 ‘케이(K computer)’가 전 세계 슈퍼컴퓨터 순위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합니다. 일본의 연산 기술력을 세계 최고로 입증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복잡한 기후 예측과 의학 데이터 분석에 혁명적 도구가 마련되었습니다.
초당 1경 번의 연산 속도를 달성하여 인간 지능의 한계를 넘어서는 분석을 가능케 했습니다.
후지쯔와의 협력을 통해 순수 독자 기술로 개발되어 국가적 자부심을 드높였습니다.
이 성공은 훗날 후가쿠로 이어지는 일본 슈퍼컴퓨터 전략의 찬란한 금자탑이 되었습니다.
2012
[X선 자유전자 레이저 SACLA 가동]
원자 수준의 초고속 현상을 찰나의 순간에 촬영할 수 있는 SACLA 시설을 가동합니다. 화학 반응의 과정을 동영상처럼 관찰하여 물질의 변화 비밀을 밝혀냅니다. 현대 과학의 초정밀 관측 기술의 정점입니다.
SPring-8 부지 내에 건설되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한 첨단 시설입니다.
나노 초 단위의 변화를 포착하여 광합성의 원리나 촉매의 작동 과정을 해부하고 있습니다.
이 시설은 전 세계에서 단 몇 곳만 보유한 전략적 과학 인프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2013
[환경자원과학연구센터(CSRS) 출범]
지구 환경 위기와 자원 고갈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CSRS를 설립합니다. 식물의 기능을 극대화하여 탄소를 저감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원을 연구합니다. 과학 기술로 지구의 생존 전략을 설계하는 최전선 조직입니다.
식물의 광합성 효율 개선과 바이오매스 전환 기술 연구에서 세계적인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희토류 대체 소재 개발 등 자원 안보와 직결된 연구들을 주도적으로 수행합니다.
이 센터는 이화학연구소가 인류 공통의 과제인 기후 위기 해결에 얼마나 진심인지를 보여줍니다.
2015
[마츠모토 히로시 10대 이사장 취임]
우주 공학자이자 교토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마츠모토 히로시가 이사장으로 부임합니다. 그는 연구소의 국제화와 인적 교류를 더욱 강화하며 조직의 유연성을 높입니다. 연구 성과를 사회로 연결하는 ‘사회 환원’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습니다.
해외 연구소와의 공동 캠퍼스 운영 등 파격적인 글로벌 전략을 추진했습니다.
연구원들이 자유롭게 창업하거나 기업과 협력할 수 있는 제도적 장벽을 대폭 낮추었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이화학연구소는 더욱 젊고 역동적인 조직으로 변모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국립연구개발법인 전환]
국가 전략 과제를 수행하는 ‘국립연구개발법인’으로 법적 지위가 다시 한번 격상됩니다. 중장기적인 연구 목표 달성을 위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책임이 동시에 강화됩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국가 연구소로서의 소명이 확고해집니다.
단기적인 성과에 급급하지 않고 수십 년을 내다보는 거대 과학 프로젝트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법인 명칭에 ‘국립’이 명시되면서 국제적인 협력 관계에서 강력한 신뢰도를 확보했습니다.
이로써 이화학연구소는 일본 정부의 과학 기술 혁신 전략을 실행하는 가장 강력한 엔진이 되었습니다.
2016
[신원소 이름 ‘니호늄’ 확정]
이화학연구소가 발견한 113번 원소의 이름이 ‘니호늄(Nihonium)’으로 최종 확정되어 전 세계에 선포됩니다. 원소 기호는 Nh로 정해졌으며, 일본을 넘어 아시아 최초의 명예를 얻었습니다. 주기율표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자국 문명을 새긴 역사적 쾌거입니다.
발견 후 12년의 끈질긴 검증 끝에 국제순수응용화학연합(IUPAC)의 최종 승인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이름을 딴 원소명은 일본 과학 교육 현장에 엄청난 자긍심을 불어넣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화학연구소가 인류 지식의 보고에 영구적인 공헌을 했음을 의미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2017
[이화학연구소 창립 100주년]
연구소 창립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식을 거행하고 다음 100년을 향한 ‘리켄 신시대’를 선언합니다. 일본 천황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1세기 동안의 과학적 성취를 기립니다. 인류를 위한 과학의 사명을 다시 한번 다지는 축제의 장입니다.
고마고메에서 시작된 작은 연구소가 세계 최정상의 과학 기구로 성장한 과정을 전시와 강연으로 공유했습니다.
인공지능, 양자 컴퓨팅 등 차세대 핵심 기술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약속했습니다.
지난 100년의 역사를 집대성한 기념백서를 발간하여 후세 과학자들의 지침서로 남겼습니다.
2018
[혁신지능통합연구센터(AIP) 본격화]
인공지능 기술의 사회적 신뢰와 혁신을 위해 AIP 센터의 활동을 전면 확대합니다. 딥러닝을 넘어 인간과 공존할 수 있는 윤리적 AI 모델을 연구합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브레인으로서의 역량을 강화합니다.
수기야마 마사시 박사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AI 전문가들을 대거 영입했습니다.
빅데이터를 활용한 재난 예측과 맞춤형 의료 등 실생활에 직결된 AI 솔루션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거대 테크 기업들과도 협력하며 AI 연구의 오픈 플랫폼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2020
[슈퍼컴퓨터 ‘후가쿠’ 세계 1위 석권]
K의 후속 기종인 ‘후가쿠(Fugaku)’가 전 세계 슈퍼컴퓨터 순위에서 주요 4개 부문 모두 1위를 차지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웁니다. 압도적인 성능으로 일본의 컴퓨팅 파워를 세계 만방에 알렸습니다. 코로나19 비말 분석 등 시급한 사회적 난제 해결에 즉각 투입됩니다.
기존 K보다 100배 이상의 성능을 목표로 개발되어 기획 단계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단순한 계산 속도뿐만 아니라 실제 앱 구동 능력에서도 압도적인 효율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성공은 이화학연구소가 거대 컴퓨팅 자원을 활용한 가상 실험의 선구자임을 증명했습니다.
2021
[후가쿠 본격 가동 개시]
슈퍼컴퓨터 후가쿠가 시범 가동을 마치고 전 세계 연구자들을 위한 본격적인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에너지, 보건, 기상 등 국가 전략 9대 분야의 시뮬레이션을 전담하게 됩니다. 데이터 주권 시대를 이끄는 핵심 무기가 장착되었습니다.
고베에 위치한 계산과학연구센터에서 매일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신소재 탐색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여 산업계의 경쟁력을 한층 높였습니다.
전 세계 연구자들이 온라인으로 접속하여 후가쿠의 막강한 연산력을 공유하는 개방형 연구 환경을 구축했습니다.
2022
[고노카미 마코토 11대 이사장 취임]
전 도쿄대학교 총장 고노카미 마코토가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연구소의 미래 설계를 맡습니다. 그는 ‘지식 집약 사회’를 위한 과학 기술의 역할을 강조하며 학문과 사회의 결합을 더욱 강화합니다. 포스트 팬데믹 시대의 새로운 연구 질서를 정립합니다.
이론물리학자로서의 전문성과 대학 총장으로서의 경영 능력을 동시에 발휘하고 있습니다.
연구소의 연구 데이터를 자산화하여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프로젝트를 주도합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이화학연구소는 더욱 개방적이고 혁신적인 글로벌 리딩 연구소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2023
[일본 최초 국산 양자컴퓨터 공개]
이화학연구소가 주도하여 개발한 일본 최초의 국산 양자컴퓨터를 가동하고 클라우드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미래 게임 체인저가 될 양자 기술 분야에서 국가적 자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양자 역학의 평화적 활용을 위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초전도 회로를 이용한 64큐비트 규모로 개발되어 상업적 활용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습니다.
후지쯔 등 민간 기업과 협력하여 양자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 성과는 이화학연구소가 기초 물리 이론을 실제 하드웨어로 구현해내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2024
[AI for Science 프로젝트 발동]
슈퍼컴퓨터 후가쿠와 생성형 AI를 결합하여 과학 연구 자체를 혁신하는 ‘AI for Science’ 대형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AI가 가설을 세우고 실험 데이터를 분석하여 연구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미래형 연구 방식을 실험합니다. 인류 과학 발전의 가속 페달을 밟는 시도입니다.
물리, 화학, 생물 등 모든 분야의 연구원들이 AI 도구를 활용하는 통합 연구 플랫폼을 구축 중입니다.
연구자가 수십 년간 해야 할 데이터 분석을 AI가 단 몇 분 만에 처리하는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이화학연구소는 이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똑똑한 연구소’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지속 가능 자원 연구 2030 비전]
2030년까지 인류의 자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환경 기술 로드맵을 발표합니다. 인공 광합성 상용화와 완전 순환형 소재 개발을 구체적인 목표로 제시합니다. 미래 세대를 위한 지구 환경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한 것입니다.
글로벌 환경 협약 준수를 넘어 능동적으로 환경을 복원하는 기술들에 연구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경제계와 협력하여 연구소의 녹색 기술이 산업 현장에 즉각 적용되도록 기술 이전을 확대합니다.
이화학연구소의 존재 이유가 인류의 지속 가능한 생존에 있음을 다시 한번 천명했습니다.
2025
[현재 진행형인 과학자의 낙원]
오늘날 이화학연구소는 3,000명 이상의 연구진이 상주하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과학 거점으로서 그 위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오코치 마사토시의 ‘자유로운 연구’ 정신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숨 쉬며 매일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인류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로서 그 여정은 멈추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우주 공간에서의 생명 실험과 극한 물리학 연구 등 더욱 거대한 도전에 나서고 있습니다.
전 세계 수많은 젊은 과학자가 선망하는 가장 창의적이고 수평적인 연구 환경을 제공합니다.
이화학연구소의 연혁은 곧 일본을 넘어 전 인류가 과학을 통해 진보해온 위대한 기록 그 자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