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

대학교, 국립대학, 교육기관, 연구 중심 대학, 아일랜드 명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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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
대학교, 국립대학, 교육기관, 연구 중심 대학, 아일랜드 명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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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 성 존 헨리 뉴먼 추기경에 의해 설립된 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UCD)은 아일랜드 독립 운동의 지적 요람이자 현대 국가 건설의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더블린 도심의 세인트 스티븐스 그린에서 시작된 이 대학은 제임스 조이스와 같은 문학 거장부터 패트릭 피어스 등 독립 지도자들을 배출하며 아일랜드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습니다. 1960년대 벨필드 캠퍼스로의 대이전을 거치며 유럽 최초의 MBA 개설 및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통해 글로벌 명문대로 도약했습니다. 현재는 3만 8천 명 이상의 학생이 수학하는 아일랜드 최대의 교육 기관으로서 '별을 향하여(Ad Astra)'라는 모토 아래 인류의 지평을 넓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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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

[털스 공의회의 결정]

아일랜드 가톨릭 위계질서가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을 공식 결의했습니다. 트리니티 칼리지에 대응하는 새로운 학문의 전당을 더블린에 세우기로 했습니다.

당시 아일랜드 내 가톨릭 신자들은 성공회적 배경의 트리니티 칼리지 진학에 제약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에 아일랜드 대주교들은 가톨릭 정신과 학문을 조화시킬 독자적인 대학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이 결정은 훗날 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이 탄생하게 되는 역사적인 제도적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1854

[뉴먼 추기경의 취임]

성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이 아일랜드 가톨릭 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그의 저서 '대학교의 이념'은 현대 고등 교육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뉴먼 총장은 지식의 전달을 넘어 지적인 인격 형성을 목표로 하는 교육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명성과 학문적 깊이는 신설 대학이 조기에 학술적 권위를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의 교육 철학은 오늘날까지도 UCD의 정체성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가치로 남아 있습니다.

[가톨릭 대학교 개교]

성 말라키 축일에 맞춰 아일랜드 가톨릭 대학교가 더블린 세인트 스티븐스 그린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아일랜드 고등 교육사의 새로운 장이 열린 역사적 순간입니다.

개교 당시 소수의 교수진과 학생으로 시작했으나 가톨릭 사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현재의 뉴먼 하우스를 중심으로 초기 강의와 연구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이 기관은 훗날 여러 차례의 재편 과정을 거쳐 현재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으로 진화했습니다.

1855

[세실리아 거리 의대]

더블린 도심의 세실리아 거리에 가톨릭 대학교 부속 의과대학이 공식적으로 개설되었습니다. 의료 인재 양성을 위한 독자적인 실습 및 교육 환경을 갖췄습니다.

세실리아 거리 의대는 당시 아일랜드 내 가톨릭 신자들이 전문 의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뛰어난 해부학실과 강의실을 갖추어 아일랜드 의학계의 발전을 주도하는 거점이 되었습니다.
이 시설은 훗날 UCD 의학부의 강력한 전통과 명성을 만드는 물리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1857

[뉴먼 총장의 사임]

대학의 기틀을 닦았던 존 헨리 뉴먼 총장이 직무를 마치고 대학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임 이후 대학은 초기 형성기를 지나 새로운 발전 단계에 진입했습니다.

비록 총장직에서는 물러났으나 그가 남긴 방대한 학술 자산과 교육 철학은 대학에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사임 직전까지도 그는 대학의 재정적 자립을 위해 가톨릭 교구의 후원을 유도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의 후임자들은 뉴먼이 세운 원칙들을 바탕으로 대학의 조직을 더욱 체계화해 나갔습니다.

1861

[우드록 총장 체제]

바르톨로뮤 우드록이 뉴먼의 뒤를 이어 총장으로 임명되어 대학 행정을 총괄했습니다. 그는 대학의 법적 지위 확보와 재정 안정화에 경영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우드록 총장은 아일랜드 전역의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모금 활동을 전개하여 대학 기금을 확충했습니다.
그는 교육 과정의 내실을 기하고 졸업생들의 사회 진출을 돕기 위한 다양한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대학은 아일랜드 사회 내에서 확고한 교육 기관으로 뿌리내렸습니다.

1879

[헤더 네빌 총장 임명]

우드록 총장이 주교로 임명되어 떠난 후 헨리 네빌이 새로운 총장으로 부임했습니다. 대학의 경쟁력을 높이고 현대적인 학문 체계를 이식하려 노력했습니다.

네빌 총장은 인문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분야의 교육 비중을 높이는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영국 정부와의 관계 설정 속에서 대학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한 외교적 노력도 병행했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대학은 국립대학교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위한 내부 정비를 진행했습니다.

1880

[아일랜드 왕립대 설립]

아일랜드 왕립대학교가 설립되면서 가톨릭 대학교 학생들에게도 공식 학위 취득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는 대학이 제도적 인정을 받는 데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왕립대학교는 직접 강의를 하지 않고 여러 칼리지 학생들의 시험을 관장하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이를 통해 가톨릭 대학교 소속 학생들은 국가가 공인하는 학위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체제의 변화는 대학이 더욱 우수한 인재들을 유치할 수 있는 유인책이 되었습니다.

1882

[대학 조직의 재편]

가톨릭 대학교가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조직 전반을 대대적으로 재편성했습니다. 변화하는 교육 법규에 맞춰 대학의 구조를 현대화했습니다.

기존의 분산되어 있던 각 학부의 권한을 명확히 하고 통합 행정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이 재편 과정에서 세인트 스티븐스 그린의 기관은 학술적 독립성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조직 개편은 훗날 예수회에 의한 성공적인 운영을 가능하게 만든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883

[예수회의 운영권 인수]

아일랜드 예수회가 대학교의 운영과 관리를 맡게 되면서 교육의 질적 수준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엄격한 학풍과 수월성 교육이 대학에 안착했습니다.

예수회의 체계적인 교수법과 유럽 전역의 학술 네트워크가 대학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특히 인문학과 고전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강의가 진행되며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대학은 아일랜드 지식인 사회의 가장 강력한 인재 배출처로 부상했습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개명]

세인트 스티븐스 그린에 위치한 교육 기관이 정식으로 '유니버시티 칼리지'라는 명칭을 얻었습니다. 이는 대학의 법적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조치였습니다.

왕립대학교 체제 내에서 독립적인 고등 교육 기관으로서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선포했습니다.
교명 변경과 함께 경영 및 관리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대대적인 인적 쇄신도 단행되었습니다.
이 명칭은 훗날 '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되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윌리엄 델라니 사장 취임]

예수회 신부인 윌리엄 델라니가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초대 사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특유의 추진력으로 대학의 학문적 수준을 정상권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델라니 사장은 저명한 학자들을 대거 영입하여 교수진의 전문성을 획기적으로 강화했습니다.
그는 학생 자치 활동을 장려하고 캠퍼스 내에 활기찬 토론 문화를 조성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대학은 아일랜드 독립 운동의 지적 기반을 형성하는 핵심지로 거듭났습니다.

1884

[시인 홉킨스 교수의 부임]

영국의 저명한 시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가 그리스어 및 라틴어 교수로 임명되어 강단에 섰습니다. 그의 존재는 대학의 인문학적 깊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홉킨스 교수는 뛰어난 언어학적 지식과 시적 직관으로 학생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이 대학의 일원이 된 것은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국제적 위상을 증명했습니다.
그가 남긴 학문적 유산과 시작(詩作) 활동은 오늘날까지도 UCD 인문학부의 커다란 자부심입니다.

1898

[제임스 조이스의 입학]

20세기 문학의 거장 제임스 조이스가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학업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대학 생활은 훗날 그의 작품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이스는 이곳에서 현대 언어학와 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진행하며 천재성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대표작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는 당시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풍경과 학풍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의 학창 시절 기록은 UCD가 세계적인 문학가를 키워낸 산실임을 보여주는 소중한 역사입니다.

1902

[제임스 조이스의 졸업]

제임스 조이스가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학사 학위를 수여받고 졸업했습니다. 대학의 우수한 인재가 세계적인 작가로 거듭나기 위한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조이스의 졸업은 대학의 인문학 교육이 실질적인 결과물로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는 졸업 후에도 대학 동료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아일랜드 문예 부흥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현재 UCD 캠퍼스에는 그의 문학적 성취를 기리는 다양한 기념관과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1905

[왕립 과학기술 건물 개관]

영국 국왕 조지 5세가 더블린 메리언 거리에 위치한 과학 및 공학 학부 건물을 공식 개관했습니다. 최신 설비를 갖춘 이 시설은 아일랜드 과학 기술의 허브가 되었습니다.

웅장한 조지아 양식의 이 건축물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실험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정부 기관 인근에 위치하여 과학 연구 성과가 실제 정책에 반영되는 유기적인 구조를 가졌습니다.
훗날 이 건물은 아일랜드 정부 청사로 쓰이게 될 만큼 역사적, 건축적 가치가 뛰어납니다.

1908

[아일랜드 대학교법 통과]

영국 의회에서 아일랜드 대학교법이 통과되면서 국립대학교 시스템 구축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는 아일랜드 자치권 확보를 위한 교육적 승리였습니다.

이 법에 따라 아일랜드 내의 고등 교육 기관들이 체계적으로 재편성되는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가톨릭 대학교의 후신인 UCD가 정식 국립대학교로서의 권위와 지위를 얻게 된 계기입니다.
아일랜드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이 법안의 통과를 위해 수년간 끈기 있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아일랜드 국립대(NUI) 설립]

아일랜드 국립대학교 시스템이 공식 출범하며 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이 핵심 구성 대학으로 참여했습니다. 명실상부한 국가 대표 대학교로서의 위상을 확립했습니다.

더블린, 골웨이, 코크의 대학들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어 학문적 연대를 강화했습니다.
UCD는 수도에 위치한 본부 대학으로서 국가 교육 정책과 연구를 주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독자적인 학위 수여 권한을 확보함으로써 글로벌 명문대로 도약할 수 있는 법적 기틀을 완성했습니다.

[D. J. 코피 초대 총장 선출]

생리학 교수인 데니스 코피가 UCD의 첫 번째 총장으로 선출되어 취임했습니다. 국립대학교 체제 하의 대학 운영 시스템을 설계하고 안착시키는 데 헌신했습니다.

코피 총장은 의학 전문가다운 꼼꼼함으로 초기 행정 조직의 기틀을 견고히 다졌습니다.
그는 각 학부 간의 협력을 이끌어내고 연구 중심 대학으로의 전환을 강력히 추진했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리더십 덕분에 UCD는 설립 초기부터 높은 학술적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UCD 의학부 정식 출범]

세실리아 거리의 의과대학이 국립대학교 체제 내의 UCD 의학부로 정식 편입되었습니다. 아일랜드 최고 수준의 의료 교육 시스템이 완성되었습니다.

기존의 우수한 교수진과 실습 시설이 국립대학교의 풍부한 자본과 결합되었습니다.
임상 교육과 기초 의학 연구를 병행하는 현대적인 의학 커리큘럼이 정착되었습니다.
이후 UCD 의학부는 수많은 명의를 배출하며 아일랜드 공공 보건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상경학부의 설립]

대학 내에 상경학부(Faculty of Commerce)가 새롭게 설립되어 경영 인재 양성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아일랜드 경제 현대화를 위한 중요한 교육적 조치였습니다.

경제학, 회계학, 경영 관리를 아우르는 전문적인 교육 과정이 도입되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산업 현장과 긴밀히 소통하며 실무 능력을 겸비한 리더들을 배출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 학부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UCD 마이클 스머핏 경영대학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1911

[아이비 경의 부지 기증]

아이비 경(Lord Iveagh)이 얼스포트 테라스 인근의 광활한 부지를 대학에 기증했습니다. 도심 내 캠퍼스 확장을 위한 결정적인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기증받은 부지에는 아이비 가든이 포함되어 있어 학생들에게 쾌적한 휴식 공간을 제공했습니다.
확보된 토지 위에 새로운 강의동과 대강당이 건설되며 대학의 외형적 성장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지역 명망가와의 협력을 통한 대학 발전의 가장 대표적이고 성공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공식 문장 수여 및 승인]

얼스터 왕실 문장관 네빌 윌킨슨으로부터 대학을 상징하는 공식 문장을 수여받았습니다. 대학의 권위와 전통을 상징하는 시각적 아이덴티티가 확립되었습니다.

문장 속에는 하프와 세 개의 성 등 아일랜드와 더블린을 상징하는 문양들이 정교하게 배치되었습니다.
'Ad Astra'와 'Cothrom na Féinne'라는 모토는 대학의 지향점인 수월성과 정의를 담았습니다.
이 문장은 현재까지도 각종 공식 행사와 학위 수여식에서 대학의 상징으로 소중히 쓰이고 있습니다.

1913

[민족주의 지성의 집결]

초기 아일랜드 역사를 가르치던 에오인 맥닐 교수가 아일랜드 민족주의 세력 창설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대학이 단순 학업의 장을 넘어 국가 운동의 중심이 된 시기입니다.

맥닐 교수의 기고문은 아일랜드 전역의 청년들에게 독립을 위한 무장의 필요성을 일깨웠습니다.
수많은 UCD 학생과 동문들이 그의 주장에 공감하며 국가의 미래를 위해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캠퍼스는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망과 치열한 논쟁이 교차하는 지적 전초 기지가 되었습니다.

[아일랜드 자원군 결성]

맥닐 교수를 참모총장으로 하여 아일랜드 자원군(Irish Volunteers)이 공식적으로 결성되었습니다. 대학의 지성들이 주도하여 국가 독립을 위한 실질적 힘을 조직했습니다.

자원군 내부의 주요 전략가와 간부들은 대부분 UCD의 교수와 학생들로 채워졌습니다.
이들은 낮에는 학문을 탐구하고 밤에는 전술을 연구하며 국가의 부름에 대비했습니다.
UCD 출신들이 주축이 된 이 조직은 훗날 부활절 봉기와 독립 전쟁의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1914

[제1차 세계대전의 파고]

전쟁 발발과 함께 아일랜드 자치법을 둘러싼 학내 여론이 팽팽하게 대립했습니다. 영국군 참전 찬반을 두고 교수진과 학생들 사이에 깊은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일부 구성원들은 자치권을 약속받기 위해 영국군에 자원했으나 다른 이들은 이를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학생이 학업을 중단하고 유럽 전선으로 파견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 시기의 혼란은 대학이 겪어야 했던 시대적 숙명이자 국가 탄생 전의 진통이었습니다.

1916

[부활절 봉기와 UCD]

패트릭 피어스, 토마스 맥도나 등 UCD 출신 지도자들이 주축이 되어 부활절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대학의 지성이 아일랜드 공화국 탄생의 선봉에 서서 희생되었습니다.

봉기에 참여한 수많은 UCD 구성원들은 아일랜드 민족 정신의 상징적 영웅으로 남았습니다.
교수였던 맥도나 등이 처형된 소식은 대학 사회에 엄청난 슬픔과 함께 독립의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UCD는 이후 아일랜드 현대사를 관통하는 '독립의 요람'이라는 숭고한 별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톰 케틀 교수의 전사]

UCD의 경제학 교수이자 시인이었던 톰 케틀이 제1차 세계대전 서부 전선에서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대학 지식인 계층의 큰 상실이자 국가적 비극이었습니다.

그는 아일랜드의 자유를 위해 영국군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나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시와 학술적 성취는 대학의 명예를 드높였으며 그의 희생은 깊은 추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캠퍼스 내에는 그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그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1921

[자유국 정부의 중추 역할]

아일랜드 자유국 수립 직후 UCD 졸업생 4명이 정부의 핵심 요직에 기용되었습니다. 신생 국가의 행정 기틀을 마련하는 데 대학 인재들이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행정, 법률, 경제 등 국가 운영 전반에 대학에서 배운 전문 지식들이 직접 투입되었습니다.
이들은 식민 통치의 잔재를 걷어내고 민주적인 국가 시스템을 설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대학 교육이 실제 국가 건설의 실무로 이어진 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사례입니다.

1922

[국가 지도자 양성소 등극]

아일랜드 독립 이후 수많은 역대 대통령과 총리(Taoisigh)들이 UCD를 거쳐 배출되었습니다. 명실상부한 아일랜드 정치의 엘리트 양성소로 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UCD 출신들은 국가의 위기 때마다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발전을 이끌어 왔습니다.
정치뿐만 아니라 사법부와 행정부 곳곳에 대학 동문들이 포진하여 국가의 근간을 유지했습니다.
UCD라는 이름은 곧 국가를 책임지는 인재들의 자부심이자 신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26

[왕립 과학대학 전격 합병]

대학교육법에 따라 메리언 거리의 왕립 과학대학이 UCD로 최종 통합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대학의 이공계 연구 인프라와 교육 역량이 획기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전문 과학 기술 교육 기관을 흡수함으로써 UCD는 진정한 종합 대학교의 면모를 완성했습니다.
최신 실험 설비와 저명한 연구진이 합류하여 과학 기술 분야의 도약을 이끌었습니다.
이 합병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과학 기술 인재를 양성하는 통합 거점을 구축한 조치였습니다.

[알버트 농과대학 편입]

글라스네빈에 위치한 알버트 농과대학이 UCD의 시스템으로 정식 편입되었습니다. 농업 국가인 아일랜드의 핵심 산업 연구를 대학이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농학 및 유제품 과학 분야의 전문성을 확보하여 실용적인 학문 연구를 대폭 장려했습니다.
광활한 농지를 실험장으로 활용하며 아일랜드 농업 현대화에 크게 기여하는 성과를 냈습니다.
이 부지는 훗날 더블린 시티 대학교(DCU)의 기반이 되는 등 지속적인 교육 가치를 창출했습니다.

1933

[벨필드 부지 최초 확보]

학생들의 스포츠 활동 지원을 위해 벨필드 하우스와 인근 부지를 전격 매입했습니다. 이는 훗날 거대 벨필드 캠퍼스 조성의 역사적인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협소한 도심 캠퍼스를 보완하기 위한 단순한 운동장 확보 목적이었습니다.
넓은 녹지 공간은 학생들에게 쾌적한 여가 환경을 제공하며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 결정은 수십 년 뒤 대학 전체가 이전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의 소중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1940

[아서 콘웨이 총장 선임]

저명한 물리학자 아서 콘웨이가 UCD의 신임 총장으로 선출되어 취임했습니다. 과학적 분석력을 바탕으로 대학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주력했습니다.

콘웨이 총장은 국제적인 학술 교류를 활성화하고 연구 기금 확보에 남다른 수완을 보였습니다.
전쟁 중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학문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대학은 기초 과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논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아일랜드 최대 대학 등극]

UCD가 아일랜드 내 모든 3차 교육 기관 중 규모와 학생 수 면에서 압도적 1위에 올랐습니다. 국가를 대표하는 지식 교육의 심장부로 확고히 공인받았습니다.

역사가 깊은 트리니티 칼리지를 제치고 수용 능력과 학문적 다양성에서 앞서 나갔습니다.
더블린 시민들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드는 명소로 성장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대학은 국가의 장기적인 교육 정책 수립의 파트너로서 위상을 굳혔습니다.

1944

[전시 졸업식의 기록]

전쟁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대규모 졸업식을 거행하며 지식인 배출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졸업생들은 국가 재건을 위한 소중한 인적 자원이 되었습니다.

엄격한 전시 통제 하에서도 학업을 마친 학생들을 위한 성대한 축하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졸업식 사진과 기록들은 당시 UCD 구성원들이 가진 배움에 대한 열정을 생생히 증명합니다.
이들은 종전 후 아일랜드의 경제 발전과 사회 통합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1947

[마이클 티어니 총장 취임]

고전학자인 마이클 티어니가 총장으로 취임하여 대학의 장기 발전 로드맵을 수립했습니다. 벨필드 캠퍼스 이전이라는 대역사를 구상하고 시작한 장본인입니다.

티어니 총장은 도심 캠퍼스의 노후화와 공간 부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정부를 설득하여 대규모 캠퍼스 부지를 확보하고 현대적인 교육 시설 설계를 주도했습니다.
그의 원대한 비전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벨필드 캠퍼스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만든 원동력입니다.

1960

[벨필드 대이전 프로젝트]

도심의 한계를 벗어나 남부 벨필드에 새로운 통합 캠퍼스를 조성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현대적인 파크 캠퍼스 구축을 위한 첫 삽을 떴습니다.

133헥타르의 대지에 강의실, 연구동, 주거 시설을 아우르는 도시형 캠퍼스를 기획했습니다.
최첨단 건축 공법을 도입하여 기능적이고 심미적인 대학 환경을 조성하는 데 역점을 뒀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UCD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대학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4

[제레미아 호건 총장 선임]

제레미아 호건이 새로운 총장으로 선임되어 벨필드 이전 사업을 힘차게 이어갔습니다. 교육 시스템의 현대화와 국제 교류 확대를 중점적으로 추진했습니다.

호건 총장은 대학의 국제적 평판을 높이기 위해 해외 대학들과의 공동 연구를 장려했습니다.
이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학술적 공백을 최소화하는 정교한 행정력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UCD는 아일랜드를 넘어 유럽의 중심적인 교육 기관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유럽 최초 MBA 과정 개설]

유럽 전역을 통틀어 최초로 경영학 석사(MBA) 프로그램을 공식적으로 도입했습니다. 비즈니스 교육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며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했습니다.

미국식 비즈니스 교육의 장점을 수용하고 유럽의 경제 환경에 맞게 커리큘럼을 개발했습니다.
이후 수많은 글로벌 CEO들을 배출하며 UCD 경영대학이 세계 톱 클래스로 올라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창의적인 경영 감각을 지닌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 혁신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힙니다.

[과학부 벨필드 이전 완료]

토마스 네빈 교수의 지휘 아래 과학부가 캠퍼스 이전의 첫 번째 주자로 벨필드에 안착했습니다. 첨단 연구 시설을 갖추고 과학 강국의 꿈을 실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최신 실험 기구와 분석 장비를 갖춘 실험실은 아일랜드 과학 연구의 수준을 높였습니다.
이후 다른 학부들의 순차적인 이전을 이끌어내는 성공적인 롤모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벨필드 캠퍼스가 학문적 열기로 가득 찬 새로운 교육의 중심지로 변모하는 시작점이었습니다.

1967

[트리니티와의 합병 제안]

도너 오말리 교육부 장관이 국가 교육 경쟁력 강화를 위해 UCD와 트리니티 칼리지 합병안을 내놓았습니다. 학계와 정치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한 국가 내 거대 대학 간의 소모적 경쟁을 줄이고 자원을 통합하려는 파격적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각 대학이 가진 독특한 전통과 정체성 문제로 인해 구성원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결국 합병은 무산되었으나 아일랜드 대학들의 상생과 협력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9

[주요 학부들의 대이동]

상경학부, 인문학부, 법학부가 차례로 구 도심 캠퍼스를 떠나 벨필드 신규 캠퍼스로 이전을 마쳤습니다. 대학의 중심축이 남부 더블린으로 완전히 이동했습니다.

수만 명의 학생과 방대한 학술 자료를 안전하게 옮기는 거대한 행정 작전이 완료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쾌적한 환경에서 학문 간 융합을 꾀할 수 있는 최적의 학습 조건을 갖게 되었습니다.
벨필드 캠퍼스는 아일랜드 젊은 지성들의 활기가 넘치는 거대한 지식 타운으로 변모했습니다.

1972

[토마스 머피 총장 취임]

의학 전문가인 토마스 머피가 총장으로 취임하여 캠퍼스 안정화와 학문적 내실을 기했습니다. 그는 대학의 사회적 책임과 공공성을 강화하는 경영을 펼쳤습니다.

머피 총장은 학생 복지 시설을 대폭 확충하고 교수들의 연구 환경을 세심하게 돌봤습니다.
지역 사회와 연계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대학의 개방성을 높였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UCD는 아일랜드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대학으로서 위상을 굳혔습니다.

[UCD 워터 타워 준공]

캠퍼스의 독보적인 랜드마크인 60미터 높이의 워터 타워가 완공되었습니다. 혁신적인 기하학적 디자인으로 현대 건축의 미학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존 폴 건설이 시공한 이 타워는 5각형 기둥 위에 12면체 탱크를 올린 독특한 구조입니다.
실제 용수 공급뿐만 아니라 대기 환경 연구를 위한 관측소 기능도 겸비하고 있습니다.
이 건축물은 기술적 우수성을 인정받아 훗날 권위 있는 건축 관련 상들을 휩쓸었습니다.

1973

[메인 도서관 공식 개관]

학생들의 학술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할 최신식 대형 도서관이 캠퍼스 중심에 문을 열었습니다. 방대한 지식의 보고로서 대학의 심장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지털 시스템을 선제적으로 도입하여 자료 검색과 대출 업무의 효율성을 대폭 높였습니다.
수천 개의 열람석을 갖춘 쾌적한 공간은 학생들의 학문적 열기를 담아내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이 도서관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풍부한 학술 자료를 보유한 지식의 성지입니다.

1979

[콘크리트 학회상 수상]

UCD 워터 타워가 아일랜드 콘크리트 학회로부터 최고의 영예인 건축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예술과 공학의 완벽한 조화를 이룬 성과로 극찬을 받았습니다.

콘크리트 소재의 한계를 극복한 과감한 형태미와 구조적 안정성이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대학 캠퍼스 내 건축물이 국가적인 상을 수상하며 학교의 대외적 이미지를 고양시켰습니다.
이 수상은 UCD 벨필드 캠퍼스가 현대 건축 디자인의 정수임을 입증하는 역사적 기록입니다.

1980

[리치뷰(Richview) 부지 확보]

대학이 17.4에이커 규모의 리치뷰 부지를 추가로 매입하여 캠퍼스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건축학부가 이곳으로 이전하여 독창적인 교육 환경을 갖췄습니다.

기존 조지아 양식의 건축물들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면서 최신 스튜디오 공간으로 개조했습니다.
학생들은 역사적 숨결이 살아있는 공간에서 창의적인 설계를 배우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리치뷰는 이후 전 세계 건축가들이 방문하고 싶어 하는 유럽 최고의 건축 교육 거점이 되었습니다.

1981

[스포츠 콤플렉스 개장]

학생들의 기초 체력 증진과 전문 선수 양성을 위한 대규모 종합 스포츠 센터가 문을 열었습니다. 국제 표준의 경기 시설을 갖춘 체육의 요람이 마련되었습니다.

올림픽 규격 수영장과 대형 체육관을 갖추어 대학 스포츠 문화의 수준을 높였습니다.
학생들은 전공 공부뿐만 아니라 다양한 운동을 통해 건강한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시설은 이후 아일랜드 국가대표팀의 훈련 장소로도 활용될 만큼 뛰어난 품질을 자랑합니다.

1986

[패트릭 매스터슨 총장 취임]

철학 교수 출신 패트릭 매스터슨이 새로운 총장으로 선임되어 대학의 내실 있는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인문학적 가치를 대학 경영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매스터슨 총장은 연구 중심 대학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글로벌 연구 과제 유치에 힘썼습니다.
유럽 대학 연합과의 연대를 공고히 하여 학생들의 해외 파견과 교류 기회를 대폭 넓혔습니다.
그의 합리적인 경영 아래 대학은 학문적 성과와 재무적 안정을 동시에 달성했습니다.

1990

[블랙록 캠퍼스 시대]

블랙록 지역의 캐리스포트 칼리지 부지를 인수하여 제2캠퍼스를 조성했습니다. 이곳에 세계적인 수준의 스머핏 대학원 경영대학이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블랙록은 경영학 연구를 위한 최고의 환경이었습니다.
대학원 중심의 전문 교육 체계를 갖추어 글로벌 비즈니스 인재 양성의 허브로 집중 육성했습니다.
이 캠퍼스는 현재 전 세계 경영대학원 순위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는 핵심 자산이 되었습니다.

[벨그로브 학생 마을 개관]

캠퍼스 내 첫 번째 학생 전용 주거 단지인 벨그로브 학생 마을이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 경험을 선사하며 캠퍼스 문화를 혁신했습니다.

단순한 숙소를 넘어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며 소통하는 자치 공동체 공간으로 기획되었습니다.
통학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 학업 몰입도를 높이고 학생들 간의 유대를 강화했습니다.
이 주거 모델은 이후 건설된 수많은 학생 기숙사들의 성공적인 표준 지침이 되었습니다.

1991

[캐리스포트 부지 최종 인수]

스머핏 경영대학원의 성장을 위해 블랙록의 대규모 부지를 최종적으로 인수 완료했습니다. 대학의 경영학 역량을 세계적 수준으로 키우기 위한 전략적 결단이었습니다.

인수 과정에서 확보된 역사적인 건물들을 최첨단 스마트 강의실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유럽 내 다른 명문 비즈니스 스쿨들과 경쟁할 수 있는 독보적인 물리적 기반을 확보했습니다.
현재 이 부지는 아일랜드 내에서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교육 공간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1992

[머빌 학생 마을의 준공]

캠퍼스 내 두 번째 대형 주거 단지인 머빌 학생 마을이 준공되어 학생들을 맞이했습니다. 증가하는 주거 수요에 부응하며 학생 복지 수준을 한 단계 높였습니다.

현대적인 편의 시설과 친환경 설계를 접목하여 학생들로부터 높은 만족도를 얻었습니다.
외국인 유학생들을 집중 수용하여 캠퍼스의 국제적 다양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공동 카페와 세탁실 등 생활 밀착형 시설을 완벽히 갖추어 자급자족 생활 환경을 완성했습니다.

[영화 연구 센터 설립]

예술적 지평을 넓히기 위해 대학 내에 영화 연구 센터를 공식 설립했습니다. 아일랜드 영상 문화 산업을 이끌어갈 창의적인 인재 배출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영화 이론과 제작 실무를 유기적으로 결합한 혁신적인 커리큘럼을 선보여 화제를 모았습니다.
국내외 거장 영화인들을 초빙하여 세미나를 여는 등 산업계와의 활발한 교류를 주도했습니다.
이 센터는 훗날 UCD가 디지털 미디어 연구의 선두 주자로 나가는 튼튼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93

[아트 코스그로브 총장 취임]

역사학자인 아트 코스그로브가 제레미아 호건의 뒤를 이어 UCD의 수장으로 부임했습니다. 대학의 국제적 인지도를 제고하고 대규모 연구 자본을 유치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코스그로브 총장은 대학의 수익 구조를 다변화하고 글로벌 산학 협력을 강화하는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캠퍼스 현대화 계획을 차질 없이 마무리하여 벨필드의 학문적 완성도를 극대화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UCD는 전 세계 대학 랭킹에서 비약적인 상승세를 기록했습니다.

1994

[오라일리 홀 정식 개관]

대학의 주요 행사와 대규모 컨퍼런스가 열리는 상징적 건물인 오라일리 홀이 문을 열었습니다. 토니 오라일리 경의 거액 기부를 통해 세워진 웅장한 전당입니다.

스콧 탈론 워커가 설계한 이 건물은 캠퍼스의 시각적 정점이자 문화적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1,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어 대규모 국제 학술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왔습니다.
매년 수많은 졸업생들이 이 홀에서 학위를 받으며 사회로의 영광스러운 첫발을 내딛습니다.

1996

[말레이시아 분교 설립]

말레이시아 페낭에 RCSI와 공동으로 아일랜드 의과대학(RUMC)을 설립했습니다. 교육 콘텐츠 수출을 통해 아시아 지역에 UCD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습니다.

학생들이 말레이시아와 아일랜드를 오가며 임상 경험을 쌓는 혁신적 프로그램을 도입했습니다.
동남아시아 의료 인력의 전문성 강화에 기여하며 글로벌 네트워크를 대폭 확장했습니다.
이 분교는 UCD가 세계적인 교육 서비스 공급자로 거듭나는 과정의 핵심적인 성공 사례입니다.

1997

[대학교법에 따른 개편]

새로운 대학교법 시행에 따라 대학의 공식 법적 명칭이 '아일랜드 국립대학교 더블린'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국립대학교 시스템 내에서의 자율성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대학 운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국가 연구 예산을 효율적으로 배분받을 수 있는 법적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조직 개편을 통해 각 대학원과 학부의 독립적인 경영권을 보장하는 현대적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이는 UCD가 독자적인 브랜드 경쟁력을 키우면서도 국립대의 위상을 지켜가는 전략이었습니다.

1998

[현재 정식 교명 확정]

정부령에 따라 '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을 포함한 현재의 정식 명칭이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역사적 전통과 현대적 브랜드 가치를 동시에 담아낸 결과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UCD라는 약칭을 공식 브랜드 아이덴티티로 통합했습니다.
명칭 확정 이후 대대적인 글로벌 리브랜딩을 통해 세계 100대 명문대로의 도약을 선언했습니다.
통일된 명칭 아래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 된 자부심으로 대학 발전에 매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3

[NovaUCD 혁신 센터 개소]

기술 이전과 창업 지원을 전문으로 하는 NovaUCD가 캠퍼스 내에 정식 문을 열었습니다. 대학의 우수한 연구 성과를 실제 산업화하는 핵심 기지 역할을 맡았습니다.

교수와 학생들이 개발한 원천 기술이 시장의 비즈니스로 이어지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했습니다.
수많은 기술 벤처 기업들이 이곳에서 탄생하여 아일랜드 지식 경제를 이끄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산학 협력의 선도적인 모델로서 유럽 내 타 대학들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2004

[휴 브래디 총장 시대]

의학 전문가인 휴 브래디가 신임 총장으로 취임하여 UCD의 공격적인 혁신을 주도했습니다. 연구 역량의 질적 강화와 글로벌 순위 상승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습니다.

브래디 총장은 'UCD Horizons'라 불리는 혁신적인 학생 맞춤형 교육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대규모 외부 연구비를 유치하고 첨단 과학 연구소들을 잇달아 건립하며 하드웨어를 일신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UCD는 아일랜드 내 부동의 1위 대학으로서 입지를 더욱 굳건히 했습니다.

[수의대 '노아의 알' 설치]

수의과대학 앞마당에 라헬 조인트의 예술 조형물 '노아의 알(Noah's egg)'이 설치되었습니다. 캠퍼스의 문화적 감수성을 높이는 새로운 명소로 등극했습니다.

생명 존중의 가치와 예술적 미학을 결합하여 학생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장소입니다.
과학과 인문학이 공존하는 캠퍼스 환경을 조성하려는 대학의 노력이 담긴 상징물입니다.
현재는 수많은 방문객들이 기념 촬영을 하는 캠퍼스의 필수 방문 코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2006

[UCD 호라이즌 시행]

학생들이 전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타 학문을 탐구하는 UCD 호라이즌 제도를 전격 도입했습니다. 융합형 인재 양성을 위한 획기적인 교육 개혁이었습니다.

학업의 유연성을 극대화하여 학생들이 자신만의 창의적인 커리큘럼을 설계하게 했습니다.
이 제도는 학생들의 학습 동기를 부여하고 복잡한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혔습니다.
아일랜드 고등 교육계 전반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타 대학들의 모범 사례가 되었습니다.

2010

[FT 유럽 경영대 30위]

파이낸셜 타임즈가 선정한 유럽 비즈니스 스쿨 평가에서 UCD가 당당히 공동 30위에 올랐습니다. 아일랜드 최고 경영대의 저력을 글로벌 무대에서 증명했습니다.

졸업생들의 뛰어난 사회 진출 성과와 높은 연봉 수준이 고득점의 핵심 요인이었습니다.
유럽 내 쟁쟁한 명문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글로벌 비즈니스 교육의 허브임을 과시했습니다.
이 성과는 전 세계 우수 학자들과 학생들이 UCD 경영대로 모여드는 강력한 유인책이 되었습니다.

[이코노미스트 MBA 31위]

이코노미스트지가 발표한 전 세계 정규 MBA 순위에서 UCD가 31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기록했습니다. 글로벌 수준의 경영학 교육 역량을 인정받은 결과입니다.

교수진의 탁월한 연구 실적과 전 세계에 포진한 동문 네트워크의 힘이 만들어낸 성과입니다.
아일랜드 국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1위 자리를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다국적 기업들이 선호하는 글로벌 리더 양성소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진 사건입니다.

2011

[FT 세계 MBA 78위 랭크]

파이낸셜 타임즈의 글로벌 MBA 종합 순위에서 78위에 오르며 세계 100대 경영대의 명성을 이어갔습니다. 교육의 질 개선을 위한 지속적인 투자의 결실입니다.

전 세계 수천 개의 경영 대학원 중 최상위 1% 그룹에 포함되는 높은 수준임을 입증했습니다.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을 유치하여 캠퍼스의 국제적 경쟁력을 높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글로벌 비즈니스 지형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커리큘럼 혁신이 빚어낸 성과입니다.

2012

[QS 세계 대학 평가 131위]

권위 있는 QS 세계 대학 랭킹에서 전 세계 131위를 기록하며 아일랜드 대표 대학의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학계와 고용주로부터 높은 평판을 얻었습니다.

전 학문 분야에 걸쳐 고르게 높은 학술적 신뢰도와 논문 인용도를 기록했습니다.
졸업생들의 글로벌 취업 경쟁력이 지표로 입증되면서 대학의 이미지가 한층 개선되었습니다.
이 순위는 UCD가 세계적인 연구 중심 대학으로서 확고한 궤도에 올랐음을 의미합니다.

[THE 유럽 대학 순위 88위]

타임지(THE) 선정 유럽 지역 대학 평가에서 88위를 차지하며 유럽 100대 대학 지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유럽 내 학술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강화했습니다.

유럽 연합 내 주요 연구 프로젝트를 주도할 수 있는 학문적 권위를 공식 인정받았습니다.
풍부한 연구 인프라와 우수한 교수진을 바탕으로 유럽 교육 표준을 선도해 왔습니다.
이 성과는 UCD가 글로벌 학술 네트워크의 핵심 허브로 기능하는 강력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국제화 비율 20% 달성]

전체 재학생 24,000명 중 유학생 비율이 20%를 넘어서며 진정한 글로벌 캠퍼스로 거듭났습니다. 전 세계 인재들이 모이는 다양성의 장이 완성되었습니다.

100여 개국에서 온 학생들이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며 글로벌 시민으로 성장하는 환경입니다.
해외 명문 대학들과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하여 학생들의 시야를 넓혔습니다.
국제화된 학풍은 학문적 토론의 깊이를 더하고 세계적인 연구 네트워크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2014

[앤드류 딕스 총장 부임]

호주 출신 공학자인 앤드류 딕스가 신임 총장으로 선임되어 대학의 글로벌 전략을 강화했습니다. 연구의 사회적 임팩트와 기술 혁신을 경영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딕스 총장은 대학의 연구 결과가 사회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실용 학문 풍토를 장려했습니다.
전 세계 동문 네트워크를 체계화하여 대학 후원 기반을 비약적으로 넓히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UCD는 아일랜드 국가 경제의 성장을 견인하는 핵심 파트너로 자리매김했습니다.

2015

[경제 기여도 보고서 발표]

UCD가 매년 아일랜드 경제에 약 13억 유로의 직접적인 가치를 창출한다는 분석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대학의 공익적 존재 이유를 숫자로 증명했습니다.

연구 성과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유학생들의 소비 효과 등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입니다.
단순한 교육 기관을 넘어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거대 주체임을 대내외적으로 공표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정부의 대학 지원 정당성을 확보하고 민간 투자를 유도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2021

[벨필드의 노신사 타계]

수십 년간 캠퍼스의 일원이었던 노숙자 마이클 번(일명 올드 맨 벨필드)의 사망 소식에 전 구성원들이 애도를 표했습니다. 공동체의 따뜻한 포용성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UCD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그를 단순한 이방인이 아닌 캠퍼스의 소중한 일원으로 존중해 왔습니다.
그의 타계 직후 캠퍼스 내에 추모 공간이 마련되어 많은 이들이 그의 삶을 기억하고 애도했습니다.
이 사건은 UCD가 지향하는 인간 존중과 다양성 포용의 가치가 캠퍼스 문화 속에 살아있음을 보여줬습니다.

2022

[기부금 5억 유로 돌파]

대학의 미래 발전을 위한 기금(Endowment) 규모가 5억 5,400만 유로를 넘어서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탄탄한 재무 기반을 바탕으로 교육 혁신을 가속화했습니다.

전 세계 동문들의 헌신적인 기부와 전략적인 자산 관리가 만들어낸 값진 성과입니다.
확보된 기금은 장학금 혜택 확대와 노후 시설 개선 등 학생들을 위해 최우선적으로 쓰였습니다.
재무적 안정성은 대학이 외부 환경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독자적인 연구를 지속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2023

[첫 여성 총장 올라 필리]

대학 설립 170년 만에 최초의 여성 총장으로 올라 필리 박사가 선출되어 취임했습니다. 다양성과 형평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리더십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필리 총장은 공학자 출신다운 실용적 마인드로 캠퍼스 내 성평등과 연구 윤리 강화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 중립 캠퍼스 구축 프로젝트를 대학의 핵심 과제로 설정했습니다.
그녀의 취임은 보수적인 아일랜드 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혁신과 변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2024

[학생 수 3만 8천 명 돌파]

UCD의 총 등록 학생 수가 38,000명을 넘어서며 아일랜드 최대 대학교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습니다. 글로벌 교육 수요에 성공적으로 부응한 결과입니다.

학부생과 대학원생 비율이 조화를 이루며 연구 활성화 지수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모인 지성들이 캠퍼스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융합 연구의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UCD가 지향하는 교육의 보편적 확대와 질적 수월성이 동시에 달성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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