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제46대 미국 대통령, 제47대 미국 부통령, 연방 상원의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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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제46대 미국 대통령, 제47대 미국 부통령, 연방 상원의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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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은 비극적인 개인사와 정치적 역경을 딛고 일어선 미국의 제46대 대통령입니다. 델라웨어주의 최연소 상원의원으로 시작해 36년간 의정 활동을 펼치며 외교 전문가로 명성을 쌓았고, 오바마 행정부의 부통령으로서 국정 전반을 조율했습니다. 아내와 딸, 그리고 장남을 먼저 떠나보낸 슬픔을 공공에 대한 봉사로 승화시킨 그의 생애는 끈기와 공감의 가치를 증명합니다. 노련한 정치력을 바탕으로 민주주의 회복과 국제 동맹 강화를 주도하며 미국 현대사의 중대한 변곡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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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조 바이든의 탄생]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의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조셉 로비네트 바이든 주니어가 태어났습니다. 가톨릭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강한 가족적 유대감 속에서 자랐습니다.

조 바이든은 가톨릭 신자인 부모 사이에서 3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초기에 사업적으로 성공했으나 이후 가계가 어려워지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스크랜턴에서의 유년 시절은 훗날 그가 노동계층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953

[델라웨어로의 이주]

가족이 경제적 이유로 펜실베이니아를 떠나 델라웨어주 클레이몬트로 이사했습니다. 이곳에서 바이든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바이든의 아버지는 스크랜턴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해 델라웨어로 먼저 떠나 기반을 닦았습니다. 클레이몬트의 아파트에서 생활하며 바이든은 가계의 어려움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가 중산층과 서민의 삶을 깊이 이해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1961

[아치미어 아카데미 졸업]

델라웨어주 클레이몬트에 위치한 가톨릭계 사립 고등학교인 아치미어 아카데미를 졸업했습니다. 학창 시절 운동선수와 리더로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바이든은 미식축구팀에서 와이드 리시버로 활약하며 팀의 무패 행진을 이끄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심한 말더듬 증상을 극복하기 위해 거울 앞에서 시를 낭독하는 등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극복의 과정은 훗날 그가 대중 연설가로 거듭나는 강인한 의지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1965

[델라웨어 대학교 졸업]

델라웨어 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을 복수 전공하여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대학 시절 다양한 사회 활동을 통해 정치에 대한 관심을 키웠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에도 미식축구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으나 학업과의 병행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학업 성적은 특출나지 않았지만 대인 관계와 리더십 부문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기 만난 동료들과의 유대 관계는 훗날 정치 인생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1966

[닐리아 헌터와의 결혼]

뉴욕주 스캐너틀리스의 가톨릭 교회에서 닐리아 헌터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두 사람은 시라큐스 대학교 대학원 시절 만나 사랑을 키웠습니다.

닐리아의 부모는 처음에 민주당원인 바이든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그의 성실함에 마음을 열었습니다. 바이든은 닐리아를 통해 정서적 안정과 정치적 영감을 얻었으며, 결혼 후 시라큐스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바이든이 델라웨어 상원의원에 당선될 때까지 가장 헌신적인 조력자였습니다.

1968

[시라큐스 법대 졸업]

시라큐스 대학교 법학대학원을 졸업하며 법학박사(J.D.) 학위를 받았습니다. 법조인으로서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첫발을 뗐습니다.

법대 재학 시절 바이든은 논문 인용 누락 등으로 학문적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이를 극복하고 학업을 마쳤습니다. 그는 법을 통해 사회 구조를 바꾸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습니다. 졸업 후 델라웨어로 돌아온 그는 변호사 자격시험을 준비하며 본격적인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1969

[변호사 자격 취득]

델라웨어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윌밍턴에서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국선 변호인으로 근무하며 소외된 계층의 권리를 옹호했습니다.

그는 윌밍턴의 로펌에서 근무하며 실력을 쌓았고, 동시에 사회적 약자를 위한 무료 변론에도 힘썼습니다. 이 시기에 델라웨어의 지역 정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공정한 법 집행에 대한 그의 신념은 훗날 사법위원회 활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1970

[뉴캐슬 카운티 의원 당선]

델라웨어주 뉴캐슬 카운티 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지역 사회의 현안을 해결하는 젊은 리더로 주목받았습니다.

바이든은 도시 개발과 환경 보호 사이의 균형을 강조하는 공약으로 주민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는 의회에서 활발한 입법 활동을 펼치며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검증받았습니다. 카운티 의원으로서의 성공적인 행보는 곧이어 상원의원 도전을 위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1972

[연방 상원의원 첫 당선]

29세의 나이로 델라웨어주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현직 의원인 공화당의 J. 케일럽 보그스를 꺾고 미국 역사상 최연소 상원의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선거 운동원으로 참여한 소규모 캠페인으로 시작해 진정성 있는 소통으로 표심을 공략했습니다. 그는 젊음과 활력을 무기로 변화를 갈망하던 델라웨어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선거 자금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을 일일이 만나는 저인망식 선거 운동이 승리의 열쇠였습니다.

[비극적인 교통사고]

상원의원 당선 직후 크리스마스 쇼핑을 가던 아내 닐리아와 딸 나오미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아들 보와 헌터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인생 최고의 순간에 찾아온 이 비극으로 바이든은 상원의원직 사퇴까지 고려했습니다. 그는 병실에서 두 아들을 간호하며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뇌했습니다.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인 마이크 맨스필드의 설득으로 그는 마음을 다잡고 공직을 수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73

[상원의원 취임 선서]

아들 보의 병실에서 상원의원 취임 선서를 하며 공식적인 의정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비극 속에서도 국가에 대한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이 이례적인 취임 선서는 전 미국인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직접 돌보기 위해 매일 워싱턴 D.C.에서 델라웨어까지 암트랙 열차로 통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암트랙 조'라는 별명은 그가 30년 넘게 고수해온 성실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75

[질 제이콥스와의 만남]

동생의 소개로 만난 질 제이콥스와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사별 후 실의에 빠졌던 바이든과 두 아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어주었습니다.

질은 바이든의 아들들과도 빠르게 친해지며 가족의 빈자리를 채웠습니다. 바이든은 그녀에게 다섯 번이나 청혼한 끝에 승낙을 받아냈습니다. 질 바이든은 훗날 교육자이자 영부인으로서 바이든의 정치 여정에 없어서는 안 될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1977

[질 바이든과의 재혼]

뉴욕 UN 채플에서 질 제이콥스와 결혼하며 새로운 가정을 꾸렸습니다. 두 아들 보와 헌터가 들러리로 참여하여 축복을 더했습니다.

재혼 후 가정이 안정을 되찾으면서 바이든은 상원의원으로서 더욱 정력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질은 결혼 후에도 교직 활동을 이어가며 독립적인 여성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들의 결합은 개인적인 아픔을 치유하고 더 큰 공적 사명을 향해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78

[상원의원 재선 성공]

델라웨어 주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연방 상원의원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지역 사회에 대한 헌신과 성실한 의정 활동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선거 기간 동안 그는 암트랙 통근을 통한 서민적 면모를 부각하며 유권자들과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는 중앙 정치 무대에서도 존재감을 나타내며 당내 유망주로 떠올랐습니다. 재선 성공을 통해 그는 델라웨어의 확고한 정치적 대표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81

[딸 애슐리 바이든의 탄생]

조 바이든과 질 바이든 사이에서 딸 애슐리가 태어났습니다. 바이든 가문은 새로운 가족의 탄생으로 기쁨과 활력이 넘쳤습니다.

애슐리는 바이든의 막내딸로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녀는 훗날 사회복지사로서 활동하며 아버지의 정책 수립에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바이든은 바쁜 의정 활동 중에도 자녀들과의 시간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자상한 아버지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1984

[상원의원 3선 성공]

델라웨어 상원의원 선거에서 다시 한번 승리하며 3선 중진 의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사법위원회와 외교위원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풍부한 입법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적 현안에 목소리를 높이며 정치적 중량감을 키웠습니다. 그는 당파를 초월한 협치 능력을 보여주며 동료 의원들 사이에서 신망을 얻었습니다. 3선 당선은 그가 중앙 정계의 거물로 성장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87

[상원 사법위원회 위원장 선출]

상원 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사법행정과 범죄 예방 시스템을 총괄했습니다. 강력한 입법권을 바탕으로 사법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위원장으로서 대법관 인준 청문회를 이끌며 날카로운 검증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로버트 보크 대법관 후보자의 인준을 부결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보수적인 사법부로의 급격한 경도를 막아낸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첫 번째 대통령 선거 출마]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44세의 젊은 상원의원으로서 신선한 돌풍을 예고하며 대권 도전에 나섰습니다.

그는 '세대의 변화'와 '희망'을 주제로 역동적인 캠페인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영국 노동당 당수 닐 키녹의 연설을 인용하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논란과 로스쿨 시절 과제 표절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이러한 도덕성 논란 끝에 그는 경선 중도 하퇴를 결정했습니다.

1988

[뇌동맥류 파열 및 투병]

생명을 위협하는 뇌동맥류 파열로 두 차례의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개월간의 입원과 재활 치료를 통해 기적적으로 복귀했습니다.

생존율이 희박했던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그는 삶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신앙의 힘으로 고통을 이겨냈으며, 가족들의 헌신적인 간호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 투병 기간은 그가 정치적 야망보다 인간적인 가치를 우선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0

[상원의원 4선 성공]

투병을 마치고 복귀한 후 델라웨어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4선에 성공했습니다. 건강 이상설을 잠재우며 강력한 리더십을 과시했습니다.

시련을 이겨낸 그의 모습은 유권자들에게 깊은 신뢰를 주었습니다. 그는 상원 사법위원장으로서 범죄 소탕과 여성 폭력 방지 입법에 더욱 매진했습니다. 4선 성공은 그가 델라웨어를 넘어 미국 전체의 거물 정치인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991

[클래런스 토머스 청문회 주관]

아니타 힐 교수의 성추행 폭로로 논란이 된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 후보자의 인준 청문회를 진행했습니다. 증언 처리 방식에 대해 많은 비판과 논란이 일었습니다.

바이든은 청문회 의장으로서 아니타 힐의 증언을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는 여성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훗날 그가 영부인이나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 사과해야 했던 정치적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성희롱과 여성 권익에 대한 사회적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1994

[여성폭력방지법(VAWA) 제정]

바이든이 주도한 여성폭력방지법이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서명으로 공식 발효되었습니다.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대응 체계를 마련한 역사적 입법입니다.

바이든은 자신의 의정 활동 중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이 법안을 꼽습니다. 이 법은 가정 폭력과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엄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끈질기게 의원들을 설득하여 법안 통과를 이끌어냈습니다.

1996

[상원의원 5선 성공]

다섯 번째 상원의원 임기를 시작하며 델라웨어의 독보적인 정치인임을 증명했습니다. 외교 정책 분야에서 영향력을 더욱 확대했습니다.

그는 상원 외교위원회 민주당 간사로서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회복에 힘썼습니다. 나토(NATO) 확장과 보스니아 분쟁 해결 등 주요 국제 현안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5선 성공은 그가 미국의 외교 안보 전략을 기획하는 핵심 인물로 부상했음을 의미했습니다.

1999

[코소보 분쟁 해결 주도]

유고슬라비아의 인종 청소를 막기 위한 나토의 개입을 강력히 지지하며 관련 결의안을 주도했습니다. 군사적 개입을 통한 인도적 문제 해결을 주장했습니다.

바이든은 밀로셰비치 정권에 맞서기 위해 공습을 포함한 강력한 조치를 촉구했습니다. 그는 발칸 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 유럽 지도자들과 긴밀히 협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외교적 수완은 국제 사회에서 큰 인정을 받았습니다.

2001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 선출]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미국의 대외 정책을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9.11 테러 이후 급변하는 국제 정세의 중심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면서도 동맹국들과의 다자간 협력을 강조했습니다. 전 세계를 누비며 각국 정상들과 회담을 갖고 미국의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외교위원장으로서의 경험은 그가 훗날 부통령과 대통령으로서 외교 정책을 펼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2002

[이라크 전쟁 권한 부여 지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승인하는 전쟁 권한 부여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이는 훗날 그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뼈아픈 실책 중 하나로 평가받았습니다.

당시 그는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에 대한 정보당국의 보고를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정보가 허위로 드러나면서 그는 자신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후회했습니다. 이 투표 결과는 훗날 당내 경선에서 진보 진영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상원의원 6선 성공]

델라웨어 주민들의 변함없는 지지 속에 6선 고지에 올랐습니다. 상원의 살아있는 전설로서 입법부의 권위를 대변했습니다.

전쟁과 경제 위기라는 국가적 난제 속에서도 그는 노련한 정치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초선 의원들의 멘토 역할을 자처하며 의회의 전통과 문화를 전수했습니다. 6선 성공을 통해 그는 차기 대권 도전의 발판을 더욱 단단히 다졌습니다.

2007

[두 번째 대통령 선거 출마]

2008년 대선을 향한 민주당 경선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풍부한 외교 경험과 중도적 실용주의를 강점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는 버락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등 강력한 후보들과 경쟁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낮은 득표율을 기록하며 경선 초반에 사퇴했습니다. 비록 대권 도전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뛰어난 정책 지식은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2008

[부통령 후보 지명]

민주당 대선 후보 버락 오바마에 의해 러닝메이트 부통령 후보로 전격 지명되었습니다. 오바마의 부족한 외교 경험을 보완할 최적의 파트너로 선택되었습니다.

바이든은 처음에는 부통령직을 망설였으나 오바마의 진정성에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두 사람은 세대와 인종을 뛰어넘는 조화를 보여주며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습니다. 바이든의 노련함과 오바마의 변화 메시지는 강력한 시너지를 냈습니다.

[제47대 미국 부통령 당선]

버락 오바마와 함께 역사적인 대선 승리를 거두며 미국의 제47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아프리카계 대통령과 가톨릭계 부통령의 탄생이었습니다.

당선 확정 후 바이든은 지지자들에게 통합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그는 부통령으로서 경제 위기 극복과 외교 관계 복원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같은 날 그는 델라웨어 상원의원 7선에도 당선되었으나 부통령직 수행을 위해 의원직을 사임했습니다.

2009

[부통령 취임 및 국정 참여]

미국의 부통령으로 공식 취임하여 오바마 행정부의 핵심 동반자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오바마의 조언자'로서 국정 전반에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바이든은 부통령으로서 매일 대통령과 함께 정세 보고를 받으며 긴밀히 협력했습니다. 그는 특히 의회와의 가교 역할을 맡아 주요 법안 통과를 주도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바이든에게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마지막으로 방에 남는 사람'이 되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미국 복구 및 재투자법 집행]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7,870억 달러 규모의 경기 부양안 집행 감독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예산의 투명하고 효율적인 집행을 진두지휘했습니다.

바이든은 주지사들과 시장들을 직접 만나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점검했습니다. 그는 낭비와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경기 부양책의 성공을 이끌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행정가로서의 탁월한 실행 능력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2010

[오바마케어(ACA) 서명식 참석]

역사적인 건강보험개혁법 서명식에 참석하여 오바마 대통령의 곁을 지켰습니다. 서명 직전 대통령에게 귓속말로 이 법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서명식장에서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대통령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며 기쁨을 나눴습니다. 바이든은 건강보험 혜택 확대를 위해 의회 내 반대 세력을 설득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오바마케어는 바이든이 부통령 시절 이룬 가장 중요한 국내 정책 성과 중 하나입니다.

2011

[이라크 미군 철수 총괄]

오바마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라크 주둔 미군 철수 작전을 총괄 지휘했습니다. 전쟁의 종결을 선언하며 평화적인 정권 이양을 도왔습니다.

바이든은 수차례 이라크를 방문하여 현지 지도자들과 협상하며 철수 일정을 조율했습니다. 그는 미군 철수 후에도 이라크의 안정을 위해 다각적인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임무의 완수는 그가 외교 정책의 핵심 설계자임을 다시 한번 입증한 사례였습니다.

2012

[동성결혼 지지 공개 선언]

TV 인터뷰 도중 개인적으로 동성결혼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전격 발표했습니다. 이는 오바마 행정부의 공식 입장보다 앞선 발언으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바이든의 소신 발언은 결과적으로 오바마 대통령이 며칠 뒤 동성결혼 지지를 공식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성소수자의 인권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바이든의 인간적이고 솔직한 정치 스타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입니다.

[부통령 재선 성공]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재선에 성공하며 부통령직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경제 회복 성과를 바탕으로 유권자들의 재신임을 받았습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바이든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노동계층의 표심을 결집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부통령 토론회에서도 상대 후보를 압도하며 선거 승리에 기여했습니다. 재선 당선은 오바마-바이든 콤비의 국정 운영 능력이 국민에게 인정받았음을 의미했습니다.

2013

[재정 절벽 협상 타결 주도]

미국 경제를 위협하던 '재정 절벽' 위기 상황에서 공화당 지도부와 극적인 협상을 이끌어냈습니다. 의회와의 노련한 협상력을 다시 한번 발휘했습니다.

바이든은 오랜 친구인 공화당 미치 매코널 원내대표와 긴밀히 소통하며 합의안을 도출했습니다. 그는 정치적 교착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당파적 이익보다 국가 경제를 우선시했습니다. 이 협상의 성공으로 미국은 대규모 세금 인상과 예산 삭감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2015

[장남 보 바이든의 사망]

델라웨어주 법무장관이자 바이든의 정치적 후계자로 기대를 모았던 장남 보 바이든이 뇌종양으로 투병 끝에 사망했습니다. 바이든 인생의 또 다른 거대한 비극이었습니다.

바이든은 아들의 병간호를 위해 부통령직 사임까지 고려했을 정도로 헌신적이었습니다. 보의 사망은 바이든에게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안겨주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2016년 대선 불출마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암 정복 프로젝트인 '캔서 문샷'에 매진하기 시작했습니다.

[2016년 대선 불출마 선언]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가족들과 함께 201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선거를 치를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고백했습니다.

바이든은 '애도하는 기간이 선거 일정과 맞지 않는다'며 담담하게 불출마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의 곁에서 깊은 위로와 지지를 보냈습니다. 비록 불출마했지만, 그는 민주당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2016

[캔서 문샷(Cancer Moonshot) 시작]

아들의 사망 원인이었던 암을 퇴치하기 위한 국가적 프로젝트인 '캔서 문샷'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암 연구와 치료의 혁신을 위해 민관 협력을 주도했습니다.

바이든은 전 세계 암 전문가들을 연결하고 연구 데이터를 공유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아는 암의 종말을 앞당기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프로젝트를 이끌었습니다. 이 활동은 그가 공직을 떠난 후에도 바이든 재단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2017

[대통령 자유 훈장 수여]

퇴임을 앞두고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최고의 민간인 훈장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예고 없이 훈장을 전달하며 그를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부통령'이라 칭송했습니다.

바이든은 예상치 못한 훈장 수여에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표했습니다. 이 훈장은 특별 등급(With Distinction)으로 수여되었으며, 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 극소수에게만 주어진 영예입니다. 오바마와 바이든의 깊은 우정과 파트너십을 상징하는 감동적인 장면으로 남았습니다.

[부통령 퇴임 및 야인 생활 시작]

8년간의 부통령 임기를 마치고 백악관을 떠났습니다. 퇴임 후 델라웨어로 돌아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사회 활동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퇴임 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명예 교수로 위촉되어 '펜 바이든 센터'를 설립했습니다. 또한 암 퇴치와 가정 폭력 방지를 위한 바이든 재단을 설립하여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야인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트럼프 행정부의 실책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며 정치적 존재감을 유지했습니다.

[회고록 '아빠, 약속해줘요' 출간]

아들 보 바이든의 투병 과정과 가족의 아픔을 담은 회고록을 출간했습니다.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진솔하게 기록했습니다.

이 책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전 미국인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바이든은 북투어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 슬픔을 치유하고 희망을 찾는 법에 대해 대화했습니다. 회고록은 그가 왜 다시 정치 무대로 돌아와야 하는지에 대한 인간적인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2019

[세 번째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

2020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미국의 영혼을 위한 전투'를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트럼프 시대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통합을 이루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그는 샬러츠빌 인종차별 시위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을 비판하며 출마의 정당성을 강조했습니다. 가장 노련한 후보로서 '검증된 리더십'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바이든은 민주당 내의 다양한 후보들과 치열한 경선을 예고하며 대권 가도에 올랐습니다.

2020

[슈퍼 화요일 대역전극]

민주당 경선 초반 열세를 딛고 '슈퍼 화요일'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며 단숨에 대세론을 형성했습니다. 흑인 유권자들의 압도적인 지지가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 승리를 기점으로 중도층의 지지가 바이든에게 결집되었습니다. 그는 경선 라이벌들을 차례로 제치고 민주당의 유력한 후보로 부상했습니다. 이 극적인 반전은 바이든의 끈기 있는 선거 전략과 확장성을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확정]

경선 라이벌 버니 샌더스 의원의 사퇴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직을 사실상 확정지었습니다. 진보 진영과의 정책 공조를 약속하며 당내 통합을 이끌어냈습니다.

바이든은 샌더스와 함께 정책 태스크포스를 구성하여 당의 공약을 정비했습니다. 그는 중도파와 진보파를 아우르는 포용적인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로써 바이든은 본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맞붙을 민주당의 단일 대오를 완성했습니다.

[카멀라 해리스 러닝메이트 지명]

상원의원 카멀라 해리스를 부통령 후보로 전격 지명했습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종 여성을 러닝메이트로 선택하는 혁신을 보여주었습니다.

바이든은 해리스의 검사 및 의원 경력이 국정 운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두 사람의 조합은 민주당 지지층의 다양성을 대변하며 선거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해리스는 바이든의 든든한 파트너로서 본선 승리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제46대 미국 대통령 당선]

피말리는 개표 접전 끝에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승리하며 제46대 미국 대통령 당선을 확정지었습니다. 역대 최다 득표 기록을 세우며 승리했습니다.

바이든은 당선 연설에서 '분열이 아닌 통합을 추구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코로나19 극복과 경제 재건을 최우선 과제로 발표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불복 논란 속에서도 그는 담담하게 정권 인수 과정을 준비했습니다.

2021

[제46대 미국 대통령 취임]

워싱턴 D.C. 의사당에서 제46대 미국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했습니다. 취임사에서 '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선언하며 국가적 통합을 호소했습니다.

의사당 폭동 사태 직후 열린 삼엄한 경비 속의 취임식이었습니다. 바이든은 취임 첫날 파리 기후 협약 재가입 등 17개의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정책 기조의 대전환을 알렸습니다. 그는 '모든 미국인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초심을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미국 구조 계획법(ARP) 서명]

코로나19 경제 지원을 위한 1조 9천억 달러 규모의 미국 구조 계획법에 최종 서명했습니다. 취임 후 첫 번째 대규모 입법 성과를 달성했습니다.

이 법을 통해 미국 가정에 1,400달러의 지원금이 지급되고 실업 급여 혜택이 연장되었습니다. 바이든은 백신 접종 가속화와 학교 재개를 위한 예산도 대거 투입했습니다. 이 조치는 코로나19로 위축된 미국 경제를 빠르게 회복시키는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취임 후 첫 의회 연설]

취임 100일을 앞두고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첫 정책 연설을 했습니다. '미국 가족 계획'과 '미국 일자리 계획'을 제안하며 거대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바이든은 교육, 보육, 인프라 투자를 위한 대규모 예산 투입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중국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국가적 결집을 호소했습니다. 이 연설은 바이든 행정부의 중장기 국정 운영 방향을 보여주는 청사진이었습니다.

[첫 해외 순방 및 G7 정상회의 참석]

대통령 취임 후 첫 해외 순방지로 유럽을 방문했습니다. G7 정상회의와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하여 '미국이 돌아왔다'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타전했습니다.

바이든은 동맹국들과의 관계 복원에 주력하며 다자주의 외교를 재건했습니다. 그는 기후 변화와 보건 안보 강화를 위한 국제적 합의를 주도했습니다. 이 순방은 트럼프 시대의 '미국 우선주의'를 종식시키고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철군 완료]

20년간 이어진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하고 미군 철수를 완료했습니다. 철군 과정의 혼란으로 인해 정치적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카불 함락과 탈레반의 정권 장악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 피해와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바이든은 '영원한 전쟁'을 끝내기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었다며 철군의 정당성을 옹호했습니다. 이 사건은 바이든 외교 정책에 대한 중대한 시험대이자 큰 정치적 상처가 되었습니다.

[초당적 인프라 법안 서명]

도로, 교량, 광대역 인터넷망 확충을 위한 1조 2천억 달러 규모의 초당적 인프라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여야 합의를 이끌어낸 바이든의 협치 능력이 빛을 발한 순간입니다.

미국 역사상 수십 년 만에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공공 인프라 투자 법안입니다. 바이든은 이 법안 통과를 위해 공화당 의원들을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인프라법은 미국의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핵심 기반이 되었습니다.

2022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대응]

러시아의 불법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력히 규탄하며 국제 사회의 제재를 주도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대규모 군사 및 경제 지원을 승인했습니다.

바이든은 나토 동맹국들과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러시아를 국제 금융 망에서 고립시켰습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첨단 무기 체계를 신속하게 지원했습니다. 이 위기 상황에서 바이든은 자유 진영을 결집시키는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첫 아시아 순방 및 한미 정상회담]

취임 후 처음으로 아시아를 방문하여 한국과 일본 정상을 만났습니다. 한미 동맹을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으로 격상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바이든은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를 방문하여 반도체 공급망 협력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북한의 핵 위협에 대응한 확장 억제 실행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번 순방을 통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초당적 총기 안전법 서명]

약 30년 만에 미국 의회를 통과한 의미 있는 총기 규제 법안인 '초당적 안전 사회법'에 서명했습니다. 총기 폭력 근절을 위한 중요한 첫걸음을 뗐습니다.

잇따른 총기 난사 비극 이후 여야가 극적으로 합의한 법안입니다. 이 법은 총기 구매자에 대한 신원 조회를 강화하고 위험 인물의 총기 소유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바이든은 더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이번 합의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습니다.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서명]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역량을 강화하고 연구 개발을 지원하는 반도체법에 서명했습니다. 첨단 기술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반도체 공장 건설에 수백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여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를 유도했습니다. 바이든은 이 법이 미국의 경제 안보와 일자리 창출에 직결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반도체법은 미래 산업 주도권을 지키기 위한 바이든 행정부의 핵심 산업 전략입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서명]

기후 변화 대응과 약값 인하를 골자로 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최종 서명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가장 기념비적인 입법 성과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법은 청정 에너지 산업 육성을 위해 3,690억 달러의 대규모 투자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노인들의 처방 약값 상한선을 설정하여 서민 가계의 부담을 줄였습니다. 바이든은 이 법을 통해 미국이 기후 변화 극복의 선구자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중간 선거 예상 밖 선전]

전통적인 '집권 여당의 패배' 예상을 뒤엎고 상원 다수당 지위를 유지하며 중간 선거에서 선전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 기조가 국민적 지지를 확인받았습니다.

공화당의 '붉은 물결'을 막아내며 민주당은 상원에서 의석을 추가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선거 결과를 '민주주의를 위한 위대한 날'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승리로 바이든은 임기 후반기 국정 운영의 강력한 동력을 확보했습니다.

2023

[우크라이나 카불 깜짝 방문]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전격 방문하여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미국의 변함없는 지원 의지를 전 세계에 시위한 상징적 행보였습니다.

공습경보가 울리는 가운데 두 정상은 키이우 거리를 함께 걸으며 우애를 다졌습니다. 바이든은 이 자리에서 5억 달러 규모의 추가 군사 지원 패키지를 발표했습니다. 이 방문은 러시아의 침공에 맞선 우크라이나인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2024년 재선 출마 공식 선언]

대통령 재선 도전을 공식화하는 영상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다시 한번 국민의 선택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극단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고령에 대한 우려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경험과 성과를 강조하며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바이든은 재선 도전을 통해 자신의 정책들을 더욱 공고히 뿌리내리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워싱턴 선언 발표]

윤석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 위협에 대응한 확장 억제를 강화하는 '워싱턴 선언'을 채택했습니다. 핵협의그룹(NCG) 신설 등 구체적인 조치를 담았습니다.

바이든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 우산이 확고함을 다시 한번 천명했습니다. 미 전략핵잠수함의 한국 기항 등 가시적인 억제 수단들을 배치하기로 했습니다. 이 선언은 한미 동맹의 안보 신뢰도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린 역사적 합의로 평가받았습니다.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

한미일 3국 정상을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하여 역사적인 3국 협력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와 경제 협력을 제도화했습니다.

다자회의 계기가 아닌 단독 3국 정상회의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세 정상은 공동 성명을 통해 역내 위협에 대한 즉각적인 공조와 정례적인 회담 개최를 약속했습니다. 바이든은 이를 통해 자신의 핵심 외교 목표 중 하나인 한미일 삼각 동맹을 완성했습니다.

[이스라엘 전시 방문]

하마스의 기습 공격 이후 전쟁 중인 이스라엘을 전격 방문하여 지지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스라엘의 방어권 지지와 인도적 구호 지원 사이의 균형을 모색했습니다.

바이든은 네타냐후 총리와 전시 내각 위원들을 만나 미국의 확고한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동시에 가자 지구 민간인들을 위한 인도적 통로 확보와 구호 물자 전달을 강력히 촉구했습니다. 이 방문은 중동 분쟁이 확전되는 것을 막기 위한 고도의 외교적 행보였습니다.

2024

[재선 도전 첫 국정연설]

강력한 어조로 지난 3년간의 성과를 과시하며 재선 승리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인 국정연설을 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을 겨냥한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바이든은 민주주의 수호와 경제 회복, 재생권 보호 등을 주요 핵심 이슈로 내세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령 논란을 정면 돌파하며 역동적인 연설 스타일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번 연설은 재선 캠페인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나토 창설 75주년 주재]

워싱턴에서 열린 나토 창설 75주년 정상회의를 주재하며 동맹의 결속력을 확인했습니다.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한 나토의 확장과 강화를 주도했습니다.

바이든은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축하하며 동맹의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장기적인 방위 지원 계획을 승인하며 나토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이 회의를 통해 바이든은 자신의 다자주의 외교 정책의 성공을 과시했습니다.

[대선 후보직 사퇴 선언]

재선 도전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직에서 전격 사퇴했습니다. 국가와 당의 이익을 위해 용퇴를 결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바이든은 성명을 통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그는 남은 임기 동안 대통령으로서의 직무에 전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 전격적인 사퇴는 미국 정치사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새로운 대선 국면을 열었습니다.

[사퇴 관련 대국민 연설]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후보직 사퇴 이유를 설명하는 대국민 연설을 했습니다. '새로운 세대에게 횃불을 넘길 시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바이든은 자신의 성취보다 민주주의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며 개인적인 야심을 내려놓은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는 해리스 부통령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며 당의 단결을 호소했습니다. 이 연설은 평생 공직에 헌신해온 노 정객의 품격 있는 마무리를 보여주었습니다.

2026

[조 바이든의 역사적 유산]

반세기 넘는 공직 생활을 마무리하며 미국 현대사의 거대한 획을 그은 지도자로 남았습니다. 비극을 극복한 인간 승리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사법, 외교, 행정 모든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트럼프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동맹을 재건한 공로가 높게 평가됩니다. 바이든이 남긴 통합과 공감의 리더십은 미래 세대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유산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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