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슨 웰스
배우, 영화 감독, 영화 프로듀서, 각본가
최근 수정 시각 : 2026-01-13- 10:14:02
미국의 전설적인 배우이자 영화 감독인 오슨 웰스는 1938년 라디오 드라마 《우주 전쟁》으로 미디어의 영향력을 입증했습니다. 1941년 영화 《시민 케인》을 통해 혁신적인 연출과 서사로 영화 예술의 지평을 넓히며 불후의 걸작을 탄생시켰습니다. 아카데미상 및 미국 영화 연구소 선정 1위로 그의 업적은 시대를 초월하여 인정받고 있습니다.
1915
[오슨 웰스의 탄생]
위스콘신주 케노샤에서 발명가인 아버지 리처드 웰스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베아트리스 웰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 그림, 마술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며 '신동'으로 불렸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웰스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를 특별한 예술가로 키우기 위해 지적인 자극과 교육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 형성된 다방면의 문화적 소양은 훗날 그가 각본, 감독, 연기를 동시에 수행하는 종합 예술가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19
시카고의 다양한 극장과 박물관을 드나들며 연극적 상상력을 키웠고 정규 학교 교육보다는 독학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부모의 자유로운 교육 방침 덕분에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을 아주 어린 나이에 섭렵하며 문학적인 깊이를 더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부모의 별거와 가문의 불화는 어린 웰스의 내면세계에 다소 우울하고 냉소적인 정서를 심어주기도 했습니다.
1924
[어머니와의 사별]
그를 예술적으로 가장 깊이 이해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던 어머니 베아트리스가 간염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9세의 나이에 겪은 어머니의 죽음은 웰스에게 평생 치유되지 않는 근원적인 상실감과 고독을 남겼습니다.
이후 그는 아버지와 함께 전 세계를 여행하며 정착하지 않는 방랑자적 삶의 태도와 국제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부재는 그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상실된 낙원'과 '지워진 과거'에 대한 테마로 꾸준히 승화되었습니다.
1926
힐 교장은 웰스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보고 학교 내 모든 연극 제작과 무대 설계를 그에게 일임하는 파격적인 지원을 했습니다.
웰스는 학교 강당에서 직접 조명을 다루고 무대 장치를 고안하며 실전 연극 연출의 기초를 완벽하게 마스터했습니다.
이곳에서 제작한 수많은 셰익스피어 연극들은 훗날 그의 화려한 커리어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지적 자산이 되었습니다.
1930
[아버지의 죽음과 고립]
유일한 법적 보호자였던 아버지 리처드마저 알코올 중독 관련 질환으로 사망하며 15세의 나이에 완전한 고아가 되었습니다.
홀로 남겨진 웰스는 후견인의 관리를 받게 되었으나 일찍부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독립심을 키웠습니다.
부모를 모두 잃은 슬픔은 그를 예술적 세계에 더욱 광적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며 타인과의 거리를 두는 습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유산을 정리한 뒤 예술가로서의 진정한 길을 찾기 위해 홀로 아일랜드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1931
[아일랜드 게이트 극단 데뷔]
더블린의 게이트 극단 오디션에서 자신을 미국의 유명 배우라고 속이고 주인공 자리를 따내는 대담함을 보였습니다.
16세 소년의 노련한 거짓말과 압도적인 연기력에 속은 단장은 그를 <주스 쥐스>의 주인공으로 전격 발탁했습니다.
아일랜드의 비평가들은 그의 존재감에 찬사를 보내며 '미국의 천재 배우가 아일랜드를 찾았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이 성공적인 데뷔는 웰스가 미국 브로드웨이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강력한 경력적 명분이 되었습니다.
1934
[버지니아 니콜슨과 결혼]
연극 배우인 버지니아 니콜슨과 첫 번째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리며 예술적 동반자 관계를 맺었습니다.
두 사람은 초기 연극 제작 활동을 공유하며 가난하지만 열정적인 예술가 부부로서 뉴욕 연극계에서 활동했습니다.
결혼 생활 중 첫째 딸 크리스토퍼가 태어났으나 웰스의 창작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원만한 가정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예술에 대한 몰입과 외부 활동의 증가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1940년에 법적으로 완전히 종결되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출연]
캐서린 코넬의 극단이 제작한 <로미오와 줄리엣> 브로드웨이 공연에서 티볼트 역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공연을 통해 웰스는 브로드웨이의 주요 인사들에게 자신의 연기력과 카리스마 있는 저음을 확실하게 각인시켰습니다.
순회공연 중 수백 회의 실전 무대를 경험하며 관객을 장악하는 법과 무대 공포를 극복하는 법을 체득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라디오 방송 관계자들과 접촉하며 목소리만으로 연기하는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1935
[연방 연극 프로젝트 발탁]
뉴욕에서 대공황 극복을 위해 정부가 주도한 '연방 연극 프로젝트(FTP)'의 연출가로 전격 발탁되었습니다.
존 하우스먼과 파트너십을 맺고 국가의 재정적 지원 아래 막대한 제작비를 활용한 실험적 연극들을 기획했습니다.
웰스는 전통적인 무대 문법을 파괴하고 과감한 조명 기법과 음향 효과를 도입하여 뉴욕 비평계에 큰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시기의 실험적인 연출 경험은 훗날 그가 머큐리 극단을 설립하여 독립적인 창작을 이어가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36
[부두 맥베스 연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배경을 아이티로 바꾸고 모든 출연진을 흑인 배우로 구성한 파격적인 공연을 연출했습니다.
마녀 대신 부두교 주술사를 등장시킨 이 연극은 할렘 지역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개막 당일 할렘의 거리는 몰려든 인파로 교통이 마비될 정도로 엄청난 흥행과 화제성을 기록했습니다.
당시 인종 차별이 극심하던 미국 사회에서 흑인 예술가들의 잠재력과 역량을 증명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남았습니다.
1937
[닥터 파우스트의 시각적 혁명]
크리스토퍼 말로의 <닥터 파우스트>를 연출하며 암흑과 빛의 대비를 극대화한 독창적인 미장센을 구축했습니다.
배경 세트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오직 좁은 조명 빛줄기만으로 무대 공간을 구획하는 혁신적인 연출을 선보였습니다.
관객들은 마치 허공에 인물들이 떠 있는 듯한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시각 경험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웰스가 무대를 단순히 평면이 아닌 입체적인 그림으로 다루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선구적인 사례입니다.
[머큐리 극단 창립]
존 하우스먼과 함께 독립적인 창작 집단인 '머큐리 극단'을 설립하고 독자적인 예술 활동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기존 상업 극단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신들만의 예술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한 독립 예술 군단이었습니다.
조셉 코튼, 아그네스 무어헤드 등 훗날 할리우드를 빛낼 명배우들이 이 극단에서 연기 인생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머큐리 극단은 곧 연극을 넘어 라디오와 영화를 넘나드는 20세기 가장 전설적인 예술가 그룹으로 진화했습니다.
[현대판 줄리어스 시저 공연]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를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스트를 연상시키는 현대적인 배경으로 각색하여 공연했습니다.
배우들에게 파시스트 제복을 입혀 독재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무대 위에서 던졌습니다.
거대한 벽돌 벽과 붉은 조명만으로 극도의 심리적 긴장감을 조성하는 미니멀리즘 연출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비평가들은 고전의 완벽한 현대적 변주라 찬사를 보냈으며 웰스를 시대적 통찰력을 가진 지성인으로 평가했습니다.
1938
[라디오 방송 머큐리 극단 개시]
CBS 라디오 채널에서 매주 고전 문학 작품을 드라마로 각색하여 방송하는 전용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습니다.
웰스는 프로그램의 제작, 각본, 연출, 목소리 연기를 혼자 도맡으며 1인 다역의 경이로운 천재성을 발휘했습니다.
라디오 특유의 음향 효과와 정교한 심리 묘사만으로 청취자들을 상상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마술을 부렸습니다.
여기서 쌓은 사운드 연출 기법은 훗날 영화 <시민 케인>의 복합적인 음향 디자인을 완성하는 핵심 토대가 되었습니다.
[우주 전쟁 방송 소동]
소설 <우주 전쟁>을 실제 뉴스 속보 형식으로 각색하여 방송함으로써 미국 전역에 거대한 패닉을 일으켰습니다.
화성인이 지구를 침공했다는 가짜 뉴스를 실제 상황으로 믿은 수천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긴박한 현장 중계 음향과 생생한 목소리 연출이 청취자들을 감쪽같이 속이며 대중 매체의 엄청난 위력을 실감케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웰스는 단 하룻밤 만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위험한 천재라는 수식어를 얻게 되었습니다.
1939
[RKO 파격 계약과 할리우드 입성]
할리우드 스튜디오 RKO와 역사상 유례없는 전권을 보장받는 영화 제작 계약을 체결하며 영화계에 입문했습니다.
영화 제작 경험이 전혀 없던 24세 청년에게 편집권과 최종 결정권을 부여한 것은 할리우드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습니다.
스튜디오의 간섭 없이 자신이 원하는 배우와 스태프를 직접 구성하고 창작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를 확보했습니다.
이는 기존 영화인들의 질투와 견제를 샀으나 위대한 걸작 <시민 케인>이 탄생할 수 있었던 필수적인 조건이었습니다.
1941
[영화 시민 케인의 역사적 개봉]
현대 영화의 문법을 완전히 새로 쓴 장편 데뷔작 <시민 케인>을 전 세계에 공개하여 영상 예술의 신기원을 열었습니다.
딥 포커스, 로우 앵글, 비선형적 서사 구조 등 혁신적인 기법들을 총동원하여 영화적 표현의 한계를 획기적으로 넓혔습니다.
언론 재벌 허스트의 집요한 상영 방해 공작과 매수 시도로 인해 개봉 초기 상업적 흥행에는 큰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비평계는 즉각적으로 찬사를 보냈으며 이후 수십 년간 전 세계 비평가들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영화' 1위를 지켰습니다.
1942
[위대한 앰버슨가 편집권 박탈]
두 번째 영화인 <위대한 앰버슨가> 제작 과정에서 스튜디오에 의해 강제로 편집권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웰스가 정부 요청으로 브라질에서 촬영을 진행하는 사이 RKO는 영화가 너무 어둡다는 이유로 40분 분량을 무단으로 잘라냈습니다.
원본 필름의 상당 부분이 소실되고 결말도 낙관적으로 수정되면서 웰스의 예술적 의도는 심각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웰스와 할리우드 거대 자본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보여주는 영화사상의 비극적인 기록입니다.
1943
[리타 헤이워드와 결혼]
당대 최고의 섹시 스타이자 여배우인 리타 헤이워드와 두 번째 결혼을 발표하여 전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천재 감독과 전설적인 여배우의 만남은 화려해 보였으나 내면적으로는 서로의 창작욕과 정서적 불안이 격렬하게 충돌했습니다.
웰스는 그녀를 단순한 핀업 걸 이상으로 변모시키려 했으나 바쁜 일정과 방랑벽으로 인해 원만한 가정생활을 지속하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딸 레베카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1947년에 결국 이혼에 합의했습니다.
1944
[제인 에어 로체스터 역 출연]
영화 <제인 에어>에서 고뇌와 비밀에 찬 주인공 로체스터 역을 맡아 배우로서의 압도적인 연기력을 과시했습니다.
웰스는 자신의 특기인 낮은 중저음의 발성과 강렬한 표정 연기를 통해 원작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재현해냈습니다.
비록 공식적인 감독은 아니었으나 제작 전반에 깊숙이 관여하여 영화 특유의 고딕적이고 몽환적인 시각미를 완성했습니다.
이 영화의 대중적 성공 덕분에 웰스는 할리우드에서 배우로서 높은 몸값을 유지하며 자신의 제작비를 벌 수 있었습니다.
1946
[이방인의 상업적 성공]
자신도 흥행 영화를 충분히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정통 누아르 스릴러 <이방인>을 연출했습니다.
나치 전범을 추적하는 긴박한 이야기를 다루어 웰스의 모든 연출작 중 상업적으로 가장 뛰어난 수익을 기록했습니다.
감독뿐만 아니라 주연인 나치 전범 역할을 소름 돋는 연기 변신으로 소화해내며 다재다능함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철저히 예산과 일정을 지키며 복귀를 시도했으나 스튜디오 시스템과의 구조적인 마찰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1947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시각 혁신]
아내 리타 헤이워드와 함께 출연한 미스터리 누아르 <상하이에서 온 여인>에서 전위적인 촬영 기법을 시도했습니다.
헤이워드의 상징이었던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금발로 변신시킨 파격적 설정은 스튜디오의 극심한 반발을 샀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인 '거울의 방' 암살 장면은 복잡한 인간의 자아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영화사의 위대한 정점으로 평가받습니다.
개봉 당시에는 지나치게 난해하다는 평을 받았으나 시간이 흐른 뒤 누아르 장르의 독창적인 고전으로 재정립되었습니다.
1948
[유럽으로의 자발적 망명]
할리우드의 창작 간섭과 미국 내 매카시즘 광풍을 피해 유럽으로 떠나 수십 년간 정처 없는 창작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럽을 진정한 창작의 자유가 허용되는 땅이라 믿고 전 대륙을 돌며 독립적인 영화 제작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자신의 영화 제작비를 직접 벌기 위해 다른 감독들의 상업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는 고단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이 시기 웰스는 국경 없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시각적 영토를 전 세계로 넓히며 거장의 명성을 유지했습니다.
[저예산 맥베스의 실험적 연출]
매우 열악한 자본과 환경 속에서 단 23일 만에 영화 <맥베스>를 완성해내는 놀라운 예술적 임기응변을 발휘했습니다.
저렴한 세트의 한계를 가리기 위해 안개와 명암 대비를 적극 활용하여 몽환적이고 기괴한 지옥의 분위기를 창조했습니다.
독일 표현주의 미학을 과감히 도입하여 연극적인 원작을 가장 영화적인 공포와 비극의 서사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이 작품은 웰스가 거대 스튜디오의 전폭적 지원 없이도 독자적인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습니다.
1949
[제3의 사나이 해리 라임 연기]
캐럴 리드 감독의 <제3의 사나이>에서 악당 해리 라임 역으로 출연하여 영화사상 가장 매혹적인 악역을 탄생시켰습니다.
매우 짧은 출연 분량에도 불구하고 관람차 안에서의 독백 장면 하나만으로 영화 전체의 존재감을 완벽히 장악했습니다.
뻐꾸기시계와 민주주의를 대조한 그의 유명한 대사는 웰스가 직접 즉석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역할의 대성공으로 웰스는 유럽 영화계에서 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수많은 러브콜을 받게 되었습니다.
1952
[오셀로 칸 영화제 대상 수상]
제작비 부족으로 3년간 촬영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완성한 <오셀로>로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차지했습니다.
의상이 오지 않자 사우나에서 암살 장면을 찍는 등 기가 막힌 임기응변이 빛을 발한 시각적 마스터피스입니다.
그림자와 거울을 활용한 복합적인 미장센은 셰익스피어 비극의 어두운 심연을 완벽하게 시각화했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할리우드의 외면을 받았던 천재가 유럽 예술의 심장부에서 화려하게 부활했음을 전 세계에 알린 사건이었습니다.
1955
[파올라 모리와의 마지막 결혼]
이탈리아 출신 배우 파올라 모리와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리고 생애 마지막까지 안식처가 되어준 가정을 꾸렸습니다.
영화 <미스터 아카딘> 촬영 중 인연을 맺은 그녀는 웰스의 복잡한 예술가적 기질을 묵묵히 포용하며 곁을 지켰습니다.
두 사람은 딸 베아트리스를 얻었으며 웰스는 죽기 직전까지 그녀와의 혼인 관계를 유지하며 삶의 안정감을 찾았습니다.
방랑하던 거장 웰스는 그녀를 통해 비로소 삶의 정서적인 휴식과 창작의 안정적인 기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958
[악의 손길 오프닝의 혁신]
잠시 할리우드로 복귀하여 연출한 <악의 손길>에서 영화사에 남을 경이로운 롱테이크 오프닝 장면을 선보였습니다.
3분이 넘는 오프닝 롱테이크 샷은 전 세계 영화 학도들에게 교과서적인 미장센의 전범으로 영원히 기록되었습니다.
직접 연기한 부패 경찰관 퀸란 역은 웰스의 배우 커리어 중 가장 소름 끼치고 압도적인 명연기로 손꼽힙니다.
스튜디오의 무단 편집에 항의하며 작성한 장문의 메모는 훗날 영화가 거장의 의도대로 완벽히 복원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1962
[카프카의 심판 영화화]
프란츠 카프카의 난해한 소설 <심판>을 자신만의 환상적이고 폐쇄적인 영상 언어로 완벽하게 영화화했습니다.
파리의 폐쇄된 기차역을 거대한 세트로 개조하여 관료주의 사회의 공포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웰스는 이 작품을 자신의 모든 연출작 중 가장 만족스럽고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작품이라 평할 만큼 애착을 보였습니다.
앤서니 퍼킨스의 신경질적인 연기는 웰스가 창조한 기괴한 공간 속에서 예술적 시너지를 극대화했습니다.
1965
[한밤의 차임벨 발표]
셰익스피어 극의 조연인 팔스타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를 통해 인간의 비극적 본질과 고독을 다루었습니다.
거구의 팔스타프 역에 자신의 영혼을 투영하여 연기했으며 저무는 시대의 슬픔과 우정의 배신을 처연하게 그렸습니다.
극도로 적은 예산으로 촬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최고의 셰익스피어 영화 중 하나라는 극찬을 평단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비평가들은 영화 속 팔스타프의 몰락이 할리우드에서 밀려난 웰스 자신의 삶과 매우 닮아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1968
[첫 컬러작 불멸의 이야기]
이사크 디네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자신의 생애 첫 번째 컬러 영화인 <불멸의 이야기>를 제작했습니다.
전설 속 이야기를 현실에 직접 구현하려는 한 노인의 헛된 욕망을 통해 환상과 실재의 경계를 탐미적으로 묘사했습니다.
프랑스 텔레비전 방송용으로 기획되었으나 컬러라는 새로운 매체를 다루는 웰스의 탁월한 미학적 감각이 돋보였습니다.
이 작품은 웰스가 흑백 영화의 거장을 넘어 컬러 영상의 마술사로서도 충분한 역량이 있음을 다시 증명했습니다.
1970
[아카데미 공로상의 영예]
할리우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평생 공로 명예상을 수상했습니다.
자신을 수십 년간 외면했던 할리우드 주류 영화계가 마침내 그의 천재성을 공식 인정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시상식에는 직접 참석하지 않고 사전 녹화된 영상을 통해 위트 넘치는 감사 인사와 예술적 소신을 전했습니다.
할리우드는 그를 '불굴의 예술가'라 칭송했으나 그는 여전히 다음 작품 제작을 위한 자금 마련에 고심 중이었습니다.
1973
[에세이 영화 거짓의 F 발표]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교묘하게 무너뜨리는 에세이 다큐멘터리 <거짓의 F>를 발표하여 세상을 다시 놀라게 했습니다.
실제 위작 작가와 전기 작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예술의 진정성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해학적으로 던졌습니다.
웰스는 영화 속에 마술사로 직접 등장하여 현란한 편집 기술을 부리며 관객의 고정관념을 우아하게 조롱했습니다.
이 작품은 현대의 모큐멘터리와 파운드 푸티지 장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선구적인 걸작으로 추앙받습니다.
1975
[AFI 평생 공로상 수상]
미국 영화 연구소(AFI)로부터 평생 공로상을 받으며 살아있는 전설로서 최고의 학술적 예우를 받았습니다.
시상식에는 할리우드의 수많은 동료 영화인들이 참석하여 웰스가 개척한 영화적 영토에 대해 깊은 경의를 표했습니다.
웰스는 수상 소감에서 영화 제작을 위해 평생 겪어야 했던 고난들을 유머러스하게 회고하며 지치지 않는 창작 의지를 보였습니다.
이 시기 그는 영화계의 신화적 존재가 되었으나 미완성 유작 <바람의 저편> 완성은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었습니다.
1982
[트랜스포머 유니크론 목소리 연기]
애니메이션 <트랜스포머 더 무비>에서 행성을 집어삼키는 절대악 유니크론의 목소리를 연기했습니다.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신의 거대하고 웅장한 저음을 활용해 악당 캐릭터에 압도적인 위엄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이들을 위한 거대 로봇 영화에 쓰인다는 점에 흥미를 느끼며 유쾌하게 녹음에 임했습니다.
이 작업은 웰스의 생애 마지막 공식 연기 활동 중 하나로 기록되어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유작이 되었습니다.
1985
[생애 마지막 방송 출연]
세상을 떠나기 단 하루 전날 밤 <머브 그리핀 쇼>에 출연하여 자신의 삶과 예술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방송에서 그는 여전히 날카로운 지성과 위트를 뽐내며 자신의 영화적 이상이 아직 다 실현되지 않았음을 고백했습니다.
시청자들은 활기찬 그의 모습을 보며 거장의 퇴장을 전혀 예감하지 못했으나 이는 그의 마지막 대중 앞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 인터뷰 영상은 웰스 사후 그를 추모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 가장 소중한 영상 기록 유산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거인의 마지막 숨결]
할리우드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조용히 세상을 떠나며 20세기 최고의 천재 예술가 중 한 명의 막을 내렸습니다.
웰스는 사망 전날까지도 다음 날 있을 촬영 각본을 수정하고 있었을 정도로 마지막 순간까지 창작의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그의 서거 소식은 전 세계 언론에 긴급 타전되었으며 전 세계 영화인들은 거대한 별의 추락을 진심으로 애도했습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미완성 필름과 방대한 메모들은 후대 학자들에게 소중한 연구 자산이자 영원한 수수께끼가 되었습니다.
1987
[스페인의 땅에 잠들다]
그의 유언에 따라 평생 사랑하고 동경했던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한 농장에 유해가 안치되었습니다.
친한 친구였던 투우사의 사유지에 묻혔으며 평생 전 세계를 방랑하던 거장은 비로소 평온한 안식을 찾았습니다.
웰스는 생전 스페인의 고전적인 문화와 열정을 영화의 영감으로 자주 삼으며 남다른 애착을 보였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무덤은 현재도 전 세계의 영화 팬들이 천재를 기리기 위해 성지순례처럼 찾아오는 소박한 명소가 되었습니다.
2018
[바람의 저편 마침내 공개]
사후 33년 만에 넷플릭스를 통해 미완성 유작 <바람의 저편>이 완벽히 복원되어 전 세계에 공개되었습니다.
최신 디지털 복원 기술과 동료 영화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완성된 이 영화는 평단에 거대한 전율을 안겼습니다.
영화 속에는 노장 감독의 몰락과 할리우드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자전적 서사로 담겨 있어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죽어서도 여전히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주는 그의 천재성은 웰스라는 거작에 마침내 역사적인 마침표를 찍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