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튼

신발, 구두,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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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1-14- 23: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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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튼은 14세기 유럽의 오염된 도시 환경에서 신발을 보호하기 위한 실용적 '덧신'으로 탄생했습니다. 초기에는 '아르놀피니의 초상'에서 보듯 부유층의 상징이었으나 , 15세기 푸들렌 유행에 맞춰 뾰족해지고 , 17세기 철제 링이 도입되는 기술 혁신을 겪었습니다. 한편 베네치아에서는 지위의 상징인 '쇼핀'으로 극단적 진화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19세기, 포장 도로의 발달과 방수 고무신 '갤로시'의 등장은 600년간 이어진 패튼을 역사의 유물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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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패튼'이라는 이름의 탄생]

'패튼(Patten)'이라는 용어는 14세기에 처음 사용된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발' 또는 '발굽'을 의미하는 고대 프랑스어 '파트(Patte)'에서 유래했습니다. 이는 패튼이 신발을 보호하기 위해 땅과 직접 접촉하는 '발굽'과 같은 기능적 역할을 했음을 시사합니다.

 '패튼'의 어원은 그 자체로 이 신발의 핵심 기능을 정의합니다. 메리암-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이 단어는 14세기에 처음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 중세 영어 'patin'을 거쳐 고대 프랑스어 'patin'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단어의 뿌리는 '발' 또는 '발굽(paw, hoof)'을 뜻하는 '파트(patte)'입니다.   

이 어원은 패튼이 섬세한 인간의 신발과는 구별되는, 즉 더럽고 거친 땅과 깨끗한 신발 사이의 동물적이고 기능적인 매개체였음을 암시합니다. 본질적으로 패튼은 '신발'이라기보다는 '신발의 발굽'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중세 영어에서는 '클로그'나 '갤로시'와 같은 다른 덧신 용어들과 혼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patte'라는 어원은 패튼이 다른 덧신과 구별되는 '높이', 즉 땅과의 '분리'라는 핵심 기능에 집중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어원적 특징은 패튼 제작자(maker of pattens)를 의미하는 'Pettener'와 같은 직업적 성씨의 등장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이는 14세기 이후 패튼 제작이 단순한 가내 수공업을 넘어, 전문화된 기술을 요하는 독립적인 직업군으로 사회에 인식되었음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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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품의 등장: 중세 도시의 오물]

14세기 유럽 도시는 포장되지 않은 도로와 만연한 오물로 매우 비위생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진흙, 동물 배설물, 생활 오수가 뒤섞인 거리를 걸어야 했습니다. 패튼은 이러한 환경에서 얇고 방수가 안 되는 신발을 보호하기 위한 필수적인 실용적 도구로 탄생했습니다.

패튼의 존재 이유는 '패션'이 아닌 '환경'이었습니다. 패튼의 핵심 기능은 도로 포장이 최소화된 시대에 착용자의 발을 거리의 "진흙과 오물"로부터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오물"은 단순한 흙이 아니었습니다. 14세기 런던의 거리는 젖은 진흙, 썩은 생선, 쓰레기, 동물의 내장, 그리고 "인간의 배설물"과 "동물의 분뇨"가 뒤섞인 "부패한 혼합물"이었습니다. 당시 도시 거주민들은 요강의 내용물을 그대로 거리로 버렸으며 , 하수 시스템은 분뇨 처리가 아닌 빗물 배출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당시의 신발과 치명적인 상극이었습니다. 중세의 신발은 굽이나 내부 지지대가 거의 없고, 방수가 되지 않는 얇은 가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물과 오물은 가죽을 늘어나게 하고 봉합선을 풀리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패튼은 (1) 방수가 안 되는 얇은 신발과 (2) 분뇨로 가득 찬 거리라는 두 가지 조건이 만나 탄생한 필연적 발명품이었습니다. 이는 신발이라기보다는 '개인용 보호 장비' 또는 '도시형 보행 보조기구'에 가까웠습니다. 때때로 4인치(10cm) 이상 발을 높여준 패튼의 디자인은  단순한 보호를 넘어, 오물과의 '접촉' 자체를 거부하려는 위생적, 사회적 욕구를 반영합니다.

1400

[런던에서의 유행과 초기 위상]

14세기 후반 런던에서 패튼은 단순한 실용품을 넘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런던에서 흔하지 않았으며, 값비싼 신발을 보호할 필요가 있는 부유층의 패션 액세서리였습니다. 15세기에 이르러 대중에게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1465년에는 패튼 제작에 사시나무 사용을 허가하는 법령이 통과되기도 했습니다.

런던의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패튼은 14세기 후반까지 런던에서 흔하지 않았습니다. 14세기 후반에 등장한 패튼은 "특권층의 패션 액세서리"로 사용되었으며 , 종종 상류층을 위한 장식이 가미되었습니다. 이는 흥미로운 사회적 모순을 드러냅니다. 패튼은 가장 더러운 것을 밟기 위해 존재하지만, 동시에 가장 깨끗하고 값비싼 신발을 신었음을 증명하는 수단이었습니다. 패튼의 착용은 '나는 내 신발이 더러워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지위의 사람이다'라는 사회적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15세기에 이르러 가죽 패튼이 유행하기 시작하며 런던의 더 넓은 대중에게 확산되었습니다. 이러한 대중화는 1465년 런던 시의 법령에서도 확인됩니다. 이 법령은 패튼 제작자들이 화살을 만들고 남은 사시나무를 사용하도록 허가했습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시사합니다. 첫째, 패튼의 수요가 증가하여 재료 수급이 중요해졌다는 것, 둘째, 시 당국이 화살(군수품) 가격 유지를 위해 패튼(민수품) 재료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을 만큼 패튼 산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1434

[예술에 기록된 패튼 (아르놀피니)]

1434년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초상'은 패튼의 사회적 의미를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입니다. 그림 속 패튼은 방 한구석에 벗어둔 채로 묘사되어, 패튼이 철저히 '실외용'이었음을 증명합니다. 미술사학자들은 이 벗어둔 패튼이 결혼 서약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성스러운 땅(holy ground)'임을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얀 반 에이크의 1434년작 '아르놀피니의 초상'은 패튼이 묘사된 가장 중요한 예술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그림의 왼쪽 하단 구석에 패튼 한 쌍이 "벗어둔(cast-aside)" 상태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패튼의 '기능적 정의'를 완성합니다. 패튼은 '신발'이 아니라 '덧신(overshoe)'이며 , 실외의 오물을 실내로 들이지 않기 위한 '경계의 도구'였음을 시각적으로 증명합니다. 패튼을 벗는 행위는 단순한 위생 문제를 넘어 '사회적 예절(etiquette)'의 영역이었습니다.   

미술 사학자들은 이 벗어둔 패튼이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합니다. 즉, 이 행위가 일어나는 방 안이 '성스러운 땅(holy ground)'임을 나타내며, 이는 결혼 서약이라는 신성한 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 내부에서도 패튼 착용이 금지되거나 제지되었던 것과 유사합니다. 실외의 '세속적인 더러움'을 상징하는 패튼을 벗음으로써, 실내의 '신성함'을 지키는 것입니다.   

1450

[패션의 공진화: 푸들렌과 패튼]

15세기 중반, '푸들렌(poulaines)'이라 불리는 매우 길고 뾰족한 신발이 남녀 모두에게 크게 유행했습니다. 패튼은 이 사치스러운 신발을 보호하기 위해 그 형태를 따라 진화했습니다. 그 결과, 패튼 역시 극단적으로 길고 뾰족한 모양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15세기는 남녀 모두에게 '푸들렌' (혹은 크라코우)이라 불리는 매우 길고 뾰족한 신발(very long, pointed toes)이 유행했던 시기입니다. 이 비실용적인 신발을 야외의 오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 위에 신는 패튼 역시 "매우 길고(even longer)" 뾰족한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1450년경 하우메 페레르(Jaume Ferrer)의 '성 세바스티안' 이나 1460년대 마스터 E. S.의 판화  같은 예술 작품에서 명확히 확인됩니다. 이는 '형태는 (보호해야 할) 패션을 따른다'는 물질 문화의 법칙을 보여줍니다. 패튼의 디자인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유행하는 신발의 실루엣에 철저히 종속되어 '공진화(co-evolution)'했습니다.   

이는 패튼 제작이 고도로 맞춤화된 작업이었음을 의미합니다. 패튼 제작자들('Pettener') 은 고객의 극단적인 푸들렌 형태에 맞춰 패튼의 나무 밑창을 깎아야 했습니다. 이 시기 뾰족한 패튼을 신는다는 것 자체가 '나는 이렇게 비실용적이고 값비싼 푸들렌을 신은 사람이다'라는 이중의 과시였습니다. 

1470

[극단적 진화: 쇼핀(Chopine)의 분리]

패튼의 '높이'라는 기능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스페인에서 극단적으로 진화하여 '쇼핀(Chopine)'이라는 새로운 신발을 탄생시켰습니다. 쇼핀은 원래 패튼처럼 신발을 보호하는 덧신으로 시작했으나 , 곧 지위의 상징으로 변모하여 50cm가 넘는 플랫폼 슈즈가 되었습니다. 이는 패튼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진화적 분기'였습니다.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베네치아와 스페인에서 유행한 여성용 플랫폼 슈즈 '쇼핀'은 그 기원을 패튼에 두고 있습니다. 쇼핀은 원래 패튼, 클로그, 또는 덧신(overshoe)처럼 진흙과 거리 오물로부터 신발과 드레스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초기 스페인 쇼핀은 섬세한 슬리퍼를 보호하는 패튼처럼 기능했습니다.

이는 패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진화적 분기'입니다. '높이'를 통한 '보호'라는 실용적 목적을 가졌던 공통 조상(패튼)이 두 갈래로 나뉜 것입니다. (1) 패튼 계열은 '덧신'이라는 실용적 목적에 충실하게 남았습니다. (2) 쇼핀 계열은 '높이' 자체가 목적이 되어, '지위 과시'라는 상징적 기능으로 극단화되었고, '덧신'이 아닌 그 자체로 완전한 '신발(shoe)'이자 '패션(fashion construct)'이 되었습니다.   

쇼핀의 극단적인 높이는 착용자가 걷기 위해 두 명의 하인이 필요할 정도였으며 , 이 '비실용성'이야말로 '나는 노동을 하지 않는 최상류층이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이는 '실용성'이 목적인 패튼(사건 2)과는 정반대의 철학이며, 현대 플랫폼 슈즈의 직접적인 기원이 됩니다.

1630

[철제 링(Iron Ring)의 도입]

1630년경, 패튼의 디자인에 "급진적인 기술적 진보"가 일어났습니다. 기존의 나무 밑창에 나무 쐐기(wedge)를 붙이던 방식에서, 나무 밑창을 원형 또는 타원형의 '철제 링(Iron Ring)'으로 받치는 방식으로 변화했습니다. 이 디자인은 더 가볍고 내구성이 강했으며, 이후 19세기까지 이어지는 패튼의 표준 형태가 되었습니다. 

1630년경부터 패튼은 나무 쐐기형 지지대 대신 원형 또는 타원형의 철제 링(Iron Ring)으로 지지하는 "급진적인 기술적 진보(radical technical advance)"를 경험했습니다. 이 변화는 영구적인 것으로 ,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패튼의 전형적인 형태를 규정지었습니다. 1748년의 한 방문객은 "여성들은 통로에 자신의 패튼을 벗어두는데, 이는 높은 철제 링 위에 서 있는 일종의 나무 신발이다"라고 구체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기술적 변화는 중요한 감각적 파급 효과를 낳았습니다. 바로 '소리'입니다.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이 바스(Bath)의 거리에서 들리는 "끊임없는 패튼의 짤랑거림(ceaseless clink of pattens)"이라고 묘사한 것은 , 바로 이 철(iron)이 돌(stone)에 부딪히는 소리였습니다. 이 독특한 소음은 패튼 착용자를 즉각적으로 식별하게 했고, 교회 내부 등에서 착용을 금지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1700

[착용자의 변화: 여성과 노동계급]

18세기에 이르러 남성 신발은 밑창이 두꺼워지고 부츠가 유행하면서, 남성들은 더 이상 패튼을 신지 않게 되었습니다. 중세에 남녀 공용이었던 패튼은  점차 여성과 야외 노동자들의 전유물이 되었습니다. 결국 패튼은 상류층 남성들에게서 멀어지고 '하층 계급'의 상징이 되거나 여성용 액세서리로 젠더화되었습니다.

 18세기와 19세기에 남성 패션은 '남성 대포기(The Great Male Renunciation)' 현상을 겪으며 실용적으로 변했습니다. 남성 신발은 밑창이 두꺼워졌고, 부유한 신사들은 승마 부츠를 신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신발들은 스스로 충분한 보호 기능을 제공했기에, 남성들에게 패튼은 불필요한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15세기에는 남녀 공용이었던  패튼이 "오직 여성들과 야외 직업에 종사하는 노동 계급 남성들"에 의해서만 착용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패튼은 상류층 숙녀들 사이에서도 버려졌고, 점차 "하층 계급(lower classes)" 이나 하녀 , 시골 여성 들의 전유물이 되었습니다.

1850

[역사의 뒤안길로]

19세기 중반, 패튼은 500년 만에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도시의 도로가 포장되고 '보도(sidewalk)'가 설치되면서 패튼의 핵심 존재 이유였던 '오물'이 사라졌습니다. 결정적으로, 1850년대에 방수가 되고 조용한 '고무 갤로시(방수 고무신)'가 발명되면서 패튼을 완전히 대체했습니다. 

패튼의 쇠퇴는 두 가지 거대한 문명사적 변화가 동시에 일어난 결과입니다.

첫째, '문제'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19세기의 대대적인 도시 공학 발전은 도로 포장과 보행자 전용의 높은 포장 통로를 확산시켰습니다. 도로가 깨끗해지면서  패튼이 해결하고자 했던 '오물'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사라졌습니다.   

둘째, '더 나은 해결책'이 등장했습니다. 19세기 중반 이전까지 패튼은 유일한 대안이었지만 , 1850년대에 가황 처리된 '고무 갤로시(rubber galoshes)'가 널리 보급되면서 패튼을 대체했습니다.   

고무 갤로시는 패튼이 가진 모든 단점을 해결한 상위 호환 제품이었습니다. 갤로시는 (1) 완벽한 방수를 제공한 반면, 패튼은 나무와 가죽으로 완벽 방수가 어려웠습니다. (2) 갤로시는 유연하여 걷기 편했지만, 패튼은 "끔찍하게 걷기 불편한"  플랫폼이었습니다. (3) 갤로시는 조용했지만, 패튼은 '짤랑거림' 이라는 소음을 발생시켰습니다. 산업 혁명(가황 고무)과 도시 공학(도로 포장)은 중세의 유물이었던 패튼을 압도했습니다. 

1900

[패튼의 종말]

20세기 초, 패튼은 일상적인 신발로서의 생명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일부 시골 지역에서 진흙 속을 걷기 위해 명맥을 유지했을 뿐 , 패튼은 박물관의 유물이 되었습니다. 그 이름만이 런던 패튼 제작자 조합이나 현대의 방수 커버 제품에 남아있습니다.

패튼은 19세기 또는 "심지어 20세기 초까지" 진흙탕 조건에서 일부 여성들에 의해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도시가 아닌 일부 시골 지역(countrywomen)에 국한된 , 사실상 사라진 물건의 마지막 잔재였습니다.   

패튼은 사라졌지만, 그 '개념'은 살아남았습니다. 패튼의 직계 후손은 '갤로시(Galoshes)' 또는 '러버 부츠(Rubber Boots)'입니다. 흥미롭게도 '갤로시'라는 단어 자체도 중세 라틴어에서 '나무 밑창(wooden clog)'을 의미했으며 , 이는 패튼과 용어적, 기능적 뿌리를 공유함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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