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뮬러 원
자동차 경주 시리즈
최근 수정 시각 : 2025-11-07- 00:16:46
포뮬러 1(F1)은 단순한 모터스포츠를 넘어, 기술 혁신, 상업적 팽창, 그리고 인간 드라마가 얽힌 한 세기가 넘는 역사의 집약체입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공공 도로에서 시작된 위험천만한 자동차 경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체계적인 규정과 월드 챔피언십을 갖춘 '포뮬러 1'으로 진화했습니다. 이후 기술 혁명과 천문학적인 자본이 유입되며 F1은 전 세계 수억 명의 팬을 열광시키는 글로벌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로 자리 잡았습니다. 본 보고서는 F1의 시초가 된 그랑프리 레이싱의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스포츠의 판도를 바꾼 중요한 사건들을 시간 순으로 정리하여 F1의 역사를 조망하고자 합니다.
1906
[최초의 그랑프리 개최]
프랑스 르망에서 최초의 '그랑프리(Grand Prix)' 자동차 경주가 열렸습니다. 이 경주는 도시 간 도로 경주의 위험성 때문에 폐쇄된 공공 도로 서킷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헝가리 출신의 페렌츠 시스가 르노 차량을 타고 이틀에 걸친 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자동차 경주는 1903년 파리-마드리드 레이스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며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프랑스 자동차 클럽(ACF)은 안전을 위해 통제된 105km 길이의 공공 도로 서킷에서 경주를 개최했으며, 이것이 '그랑프리'라는 명칭을 사용한 최초의 공식적인 이벤트였습니다. 이 경주는 국가별 자동차 클럽 간의 경쟁 형태로 발전하며 그랑프리 레이싱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925
[최초의 월드 챔피언십]
FIA의 전신인 AIACR(국제 공인 자동차 클럽 협회) 주관으로 최초의 '제조사 월드 챔피언십'이 개최되었습니다. 이 챔피언십은 드라이버가 아닌 제조사를 위한 것이었으며, 알파 로메오가 첫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이 시리즈는 3시즌 만에 중단되었지만, F1 월드 챔피언십의 개념적 전신이 되었습니다.
1923년 프랑스 잡지 '로토(L'Auto)'가 글로벌 시리즈 아이디어를 제안한 것을 바탕으로, 1925년 인디애나폴리스 500을 포함한 4개의 레이스로 챔피언십이 구성되었습니다. 알파 로메오는 강력한 P2 모델을 앞세워 초대 챔피언의 영예를 안았고, 이를 기념하여 1972년까지 브랜드 엠블럼에 월계관을 추가했습니다.
1946
[포뮬러 1 규정 공식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터스포츠 재건을 위해, FIA의 전신인 AIACR의 스포츠 위원회(CSI)가 새로운 그랑프리 규정을 논의했습니다. '포뮬러 1'이라는 명칭이 최고 수준의 레이싱 카테고리를 위한 공식 규정으로 합의되었습니다. 이는 현대 F1의 기술적 토대를 마련한 순간이었습니다.
전쟁 이전에도 월드 챔피언십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전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1946년, CSI는 새로운 규정을 투표에 부쳐 '포뮬러 1'을 공식 명칭으로 채택했습니다. 이 규정에 따른 첫 공식 경주는 1946년 토리노 그랑프리였으며, 1947년부터 본격적으로 F1 규정에 따른 레이스들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1950
[F1 월드 챔피언십 출범]
영국 실버스톤 서킷에서 최초의 FIA 드라이버 월드 챔피언십 경주가 열렸습니다. 이 역사적인 레이스에는 영국 국왕 조지 6세가 참석했으며, 알파 로메오를 탄 주세페 파리나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로써 오늘날 우리가 아는 F1의 시대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49년 말, FIA는 여러 국가의 F1 그랑프리를 묶어 드라이버를 위한 월드 챔피언십을 창설한다고 발표했습니다. 1950년 시즌은 인디애나폴리스 500을 포함한 총 7개의 레이스로 구성되었으며, 실버스톤에서 열린 첫 경주에는 약 14만 명의 관중이 모였습니다. 페라리는 이 첫 경주에 불참하고 8일 뒤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데뷔했습니다.
1962
[로터스의 모노코크 섀시 혁명]
로터스 팀이 기존의 스페이스 프레임 디자인을 대체하는 알루미늄 모노코크 섀시를 도입했습니다. 이 혁신적인 설계는 차량의 강성을 높이고 무게를 줄여 F1 차량 설계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미드십 엔진 도입 이후 가장 큰 기술적 진보로 평가받습니다.
1950년대 후반 쿠퍼 팀에 의해 시작된 미드십 엔진 혁명에 이어, 1962년 로터스의 창립자 콜린 채프먼은 항공기 기술에서 영감을 얻은 모노코크 섀시를 F1에 도입했습니다. 이 새로운 섀시는 더 가볍고 구조적으로 훨씬 견고하여 코너링 성능을 극대화했습니다. 이 기술은 곧 모든 팀이 채택하는 표준이 되며 F1 차량 설계의 패러다임을 바꾸었습니다.
1968
[스폰서십과 에어로 시대 개막]
팀 건스톤이 처음으로 담배 회사 로고를 차량에 부착하며 상업적 스폰서십 시대를 열었고, 곧이어 로터스도 골드 리프 리버리를 선보였습니다. 같은 해 로터스는 차량에 앞뒤 윙(에어로포일)을 장착하여 다운포스를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두 가지 변화는 F1의 외관과 비즈니스 모델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1968년 1월 1일 남아공 그랑프리에서 개인 참가팀인 팀 건스톤이 처음으로 상업 스폰서십을 도입했고, 5개월 뒤 로터스가 팩토리 팀 최초로 임페리얼 토바코의 골드 리프 색상으로 차량을 도색하며 본격적인 스폰서십 시대를 열었습니다. 같은 해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로터스의 콜린 채프먼은 차량에 윙을 부착해 공기역학적 다운포스를 생성하는 아이디어를 선보였고, 이는 F1의 에어로다이나믹 기술 경쟁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1981
[콩코드 협정과 상업권 장악]
버니 에클레스턴이 이끄는 FOCA(F1 제작자 협회)와 FISA(국제 자동차 스포츠 연맹) 간의 권력 투쟁이 '콩코드 협정' 체결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협정을 통해 FOCA는 F1의 TV 중계권 협상 권한을 확보했습니다. 이는 F1이 거대한 상업적 스포츠 제국으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F1의 상업적 권리를 두고 팀들을 대표하는 FOCA와 규제 기관인 FISA 간의 'FISA-FOCA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1981년 체결된 첫 콩코드 협정은 FOCA에게 TV 중계권 협상 권한을 부여했고, 버니 에클레스턴은 이 권한을 바탕으로 F1을 전문적인 TV 스포츠 상품으로 만들어 막대한 부를 창출하기 시작했습니다.
1989
[세나와 프로스트의 충돌]
일본 그랑프리에서 챔피언십을 다투던 맥라렌의 팀 동료 아일톤 세나와 알랭 프로스트가 충돌했습니다. 프로스트는 리타이어했고, 세나는 레이스를 재개하여 우승했지만 실격 처리되어 프로스트가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F1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논쟁적인 라이벌 관계의 정점을 보여주었습니다.
1989년 시즌 내내 이어진 두 선수의 갈등은 스즈카 서킷의 시케인에서 정점에 달했습니다. 세나가 추월을 시도하자 프로스트가 코너를 닫아버리며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이듬해인 1990년에는 반대로 세나가 첫 코너에서 프로스트와 충돌하며 챔피언을 결정짓는 등,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는 2년에 걸쳐 F1 역사에 길이 남을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1994
[이몰라의 비극과 안전 강화]
산마리노 그랑프리 주말 동안 롤란드 라첸버거와 전설적인 드라이버 아일톤 세나가 연이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F1 역사상 최악의 주말로 기록된 이 사건은 스포츠 전반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FIA는 차량과 서킷의 안전 규정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1994년 이몰라 서킷에서 일어난 두 건의 사망 사고는 F1의 안전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최고조로 끌어올렸습니다. 이 사건 이후, FIA는 엔진 출력 제한, 단계적 바닥 도입, 콕핏 측면 보호 강화 등 차량 안전 규정을 대폭 수정했습니다. 또한 서킷의 안전 기준을 높이고 위험한 코너를 재설계하는 등, F1을 더 안전한 스포츠로 만들기 위한 포괄적인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2000
[슈마허, 페라리 21년 한을 풀다]
미하엘 슈마허가 일본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페라리에게 21년 만의 드라이버 챔피언십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는 1996년 슈마허의 이적 이후 팀을 재건해 온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이 우승을 시작으로 페라리와 슈마허는 2004년까지 5년 연속 챔피언을 차지하는 압도적인 황금기를 열었습니다.
1979년 조디 쉑터 이후 드라이버 챔피언을 배출하지 못했던 페라리는 장 토드, 로스 브런, 로리 번, 그리고 미하엘 슈마허로 구성된 '드림팀'을 구축하여 팀을 재건했습니다. 수년간의 도전 끝에 2000년 스즈카에서 미카 하키넨과의 치열한 접전 끝에 거둔 우승은 페라리 부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어진 5년간의 지배는 F1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팀 중 하나로 페라리의 위상을 공고히 했습니다.
2007
[스파이게이트 스캔들]
맥라렌이 페라리의 기밀 기술 정보를 불법적으로 입수한 사실이 드러나 F1계를 뒤흔들었습니다. 이 '스파이게이트' 사건으로 맥라렌은 1억 달러라는 기록적인 벌금을 부과받았습니다. 또한 해당 시즌의 컨스트럭터 챔피언십 포인트를 모두 박탈당했습니다.
페라리의 전 직원 나이젤 스텝니가 맥라렌의 수석 디자이너 마이크 코플란에게 780페이지에 달하는 페라리 차량의 기술 데이터를 유출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FIA의 조사 결과, 맥라렌은 이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스포츠 역사상 가장 큰 액수의 벌금과 함께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에서 제외되는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2014
[V6 터보 하이브리드 시대 개막]
F1이 1.6리터 V6 터보차저 엔진과 강력한 에너지 회수 시스템(ERS)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파워 유닛 규정을 도입했습니다. 이 규정 변화는 F1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큰 기술적 전환 중 하나였습니다. 메르세데스 팀이 이 변화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응하며 압도적인 지배 시대를 열었습니다.
기존의 2.4리터 V8 자연흡기 엔진을 대체한 새로운 파워 유닛은 열에너지 회수 시스템(MGU-H)과 운동에너지 회수 시스템(MGU-K)을 포함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 복잡한 기술에 대한 이해도와 준비성에서 앞선 메르세데스는 2014년부터 8년 연속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석권하는 전례 없는 지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2017
[리버티 미디어, F1 인수 완료]
미국 미디어 기업 리버티 미디어가 F1 그룹 인수를 최종 완료하며 40년간 이어진 버니 에클레스턴의 시대를 마감했습니다. 체이스 캐리가 새로운 CEO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인수는 F1의 디지털 미디어 확장과 팬 참여 증대 등 새로운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리버티 미디어는 2016년 말 F1의 지배 지분 인수에 합의했으며, 2017년 1월 23일 44억 달러 규모의 인수를 완료했습니다. 버니 에클레스턴은 명예 회장으로 물러났고, F1은 소셜 미디어 활용, 'Drive to Survive' 시리즈 제작 등 팬들과의 소통을 강화하는 새로운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2021
[아부다비 그랑프리 최종랩 논란]
시즌 마지막 레이스인 아부다비 그랑프리에서 루이스 해밀턴과 막스 베르스타펜의 챔피언십이 결정되었습니다. 마지막 랩에서 레이스 디렉터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세이프티 카 규정 적용으로 베르스타펜이 해밀턴을 추월하며 첫 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이 사건은 F1 규정 적용의 일관성에 대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레이스 막판에 발생한 세이프티 카 상황에서, 당시 레이스 디렉터였던 마이클 마시는 일부 랩핑카에게만 언랩(unlap)을 허용하여 마지막 한 랩의 레이스를 재개시켰습니다. 새 타이어를 장착한 베르스타펜이 해밀턴을 극적으로 추월하며 월드 챔피언이 되었고, 이 결정은 스포츠의 공정성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촉발시켰으며, 결국 FIA의 레이스 운영 구조 개편으로 이어졌습니다.
[실버스톤의 콥스 코너(Copse Corner) 충돌과 51G의 충격]
영국 그랑프리 오프닝 랩에서 챔피언십 경쟁자였던 루이스 해밀턴과 막스 베르스타펜이 고속 코너인 콥스에서 충돌, 베르스타펜이 리타이어하고 해밀턴이 우승을 차지했다.
2021년 영국 그랑프리는 시즌의 분수령이 된 사건이었다. 당시 포인트 리더였던 베르스타펜은 스프린트 예선에서 폴 포지션을 차지하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일요일 결선, 두 드라이버는 첫 랩부터 휠-투-휠(Wheel-to-Wheel) 배틀을 벌이며 웰링턴 스트레이트(Wellington Straight)를 지나 콥스 코너로 진입했다. 시속 290km에 육박하는 초고속 코너에서 해밀턴은 인사이드 라인을 파고들었고, 베르스타펜은 아웃사이드에서 방어 기동을 취했다.
결과적으로 해밀턴의 메르세데스 W12 좌측 전륜과 베르스타펜의 레드불 RB16B 우측 후륜이 접촉했다. 이 충격으로 베르스타펜의 차량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타이어 배리어에 꽂혔으며, 이때 기록된 충격량은 무려 51G에 달했다. 경기는 즉시 적기(Red Flag) 발령으로 중단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는 트랙 밖에서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베르스타펜이 인근 병원으로 후송되어 정밀 검사를 받는 동안, 해밀턴은 10초 페널티를 극복하고 샤를 르클레르(Charles Leclerc)를 추월해 우승을 차지했다. 해밀턴의 자국 국기를 흔드는 세리머니에 대해 베르스타펜은 병상에서 SNS를 통해 "병원에 있는 동료를 두고 저런 축하를 하는 것은 무례(disrespectful)하다"고 비난했다. 레드불의 수뇌부 헬무트 마르코(Helmut Marko)와 크리스찬 호너(Christian Horner)는 해밀턴의 행동을 "아마추어적이고 위험한 운전"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고, 메르세데스의 토토 울프(Toto Wolff)는 이를 "레이싱 사고(Racing Incident)"로 규정하며 맞섰다. 이 사건은 두 팀 간의 감정적 골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게 만들었으며, 시즌 남은 기간 동안의 모든 경합에 독성(toxicity)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몬자(Monza)의 레티필로 시케인 샌드위치 사고]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피트 아웃하던 해밀턴과 메인 스트레이트를 달려오던 베르스타펜이 1번 코너에서 충돌, 레드불 차량이 메르세데스 차량 위로 올라타며 동반 리타이어했다.
실버스톤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몬자에서 두 라이벌은 다시 한번 물리적으로 충돌했다. 상황은 피트 스톱 타이밍의 엇갈림에서 비롯되었다. 베르스타펜은 11초가 넘는 느린 피트 스톱으로 인해 예상보다 뒤쪽으로 합류했고, 해밀턴 역시 피트 스톱 후 코스로 복귀하는 시점에 베르스타펜과 조우했다.
레티필로 시케인(Rettifilo Chicane) 진입 과정에서 베르스타펜은 아웃사이드 라인을 통해 추월을 시도했으나 공간은 협소했다. 베르스타펜의 차량이 소시지 커브(Sausage Kerb)를 타고 튀어 오르며 해밀턴의 차량 위를 덮쳤다. 이때 베르스타펜의 우측 후륜 타이어가 해밀턴의 헬멧을 직접 가격했으나, 헤일로(Halo) 안전 장치 덕분에 해밀턴은 치명상을 피할 수 있었다.
스튜어드는 이 사고의 주된 책임이 베르스타펜에게 있다고 판단하여 다음 경기인 러시아 그랑프리에서 3-그리드 페널티를 부과했다. 이 사고로 인해 다니엘 리카르도(Daniel Ricciardo)가 맥라렌(McLaren)에게 2012년 이후 첫 우승을 안겨주는 이변이 연출되었다. 챔피언십 관점에서는 두 드라이버 모두 0점을 기록했으나, 심리적 압박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는 두 드라이버가 서로에게 단 1cm의 공간도 양보하지 않을 것임을 전 세계에 확인시켜 준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라스트 랩(Last Lap)의 반전과 마이클 마시의 결정]
시즌 마지막 경기인 아부다비 GP의 마지막 바퀴에서 세이프티 카 절차 논란 속에 베르스타펜이 해밀턴을 추월하며 월드 챔피언에 등극했다.
F1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고 극적인 피날레였다. 해밀턴과 베르스타펜은 369.5점 동점으로 최종전에 돌입했다. 경기 내내 해밀턴은 압도적인 페이스로 레이스를 리드하며 통산 8번째 챔피언 등극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스 종료 5랩을 남기고 니콜라스 라티피(Nicholas Latifi)의 사고로 세이프티 카(SC)가 발령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레드불은 즉시 베르스타펜을 피트로 불러들여 소프트 타이어로 교체하는 승부수를 띄웠고, 메르세데스는 트랙 포지션을 잃을 것을 우려해 해밀턴을 스테이 아웃(Stay out) 시켰다. 논란의 핵심은 레이스 디렉터 마이클 마시(Michael Masi)의 세이프티 카 운영이었다. 당초 "백마커(Backmarker, 한 바퀴 뒤쳐진 차량)들은 추월할 수 없다"고 공지했으나, 레이스 종료 직전 "해밀턴과 베르스타펜 사이에 있는 5대의 차량만 추월을 허용한다"고 번복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마지막 1랩을 남기고 경기가 재개되었고, 신선한 타이어를 장착한 베르스타펜은 낡은 하드 타이어의 해밀턴을 5번 코너에서 추월하며 생애 첫 월드 챔피언에 등극했다. 메르세데스는 즉각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FIA는 이후 조사 끝에 "인적 오류(Human Error)"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마이클 마시를 경질했다. 이 사건은 F1 규정 운영의 투명성과 일관성에 대한 거대한 담론을 불러일으켰으며, 베르스타펜 시대의 서막을 여는 동시에 해밀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2022
[안전을 위한 수직 진동 제어 규정(TD039) 시행]
FIA는 드라이버들의 건강을 보호하고 공정한 경쟁을 위해 차량의 수직 진동(Bouncing/Porpoising)을 제한하고 플로어(Floor) 유연성을 엄격히 규제하는 기술 지침을 발효했다.
FIA는 벨기에 GP부터 TD039를 적용했다. 핵심은 '공기역학적 진동 측정 지표(AOM)'를 도입하여 허용치를 넘는 차량은 지상고를 의무적으로 높이도록 강제한 것이다. 또한, 페라리와 레드불이 규정의 허점을 이용해 플로어 하단의 스키드 블록(Skid Block)을 유연하게 만들어 마모를 피하고 있다는 의혹을 차단하기 위해 플로어 강성 테스트를 강화했다. 이 조치 이후 전반기까지 강력했던 페라리 F1-75의 경쟁력은 급격히 하락했고, 레드불 RB18은 오히려 더 강력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시즌 후반 독주 체제를 굳혔다.
[레드불 레이싱의 재정 규정 위반]
FIA는 레드불 레이싱이 2021년 시즌 예산 상한선을 초과 지출했음을 공식 확인하고 제재를 부과했다.
2021년 챔피언십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은 2022년 말까지 이어졌다. FIA 감사 결과, 레드불은 2021년 예산 상한선인 1억 4,500만 달러를 약 1.6%(약 220만 달러) 초과 지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경미한 위반(Minor Breach)'으로 분류되었으나, 경쟁 팀들은 단 1%의 초과 비용도 차량 개발에 막대한 이점을 줄 수 있다며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레드불은 케이터링 비용, 병가 처리, 세금 공제 등의 행정적 착오라고 해명했으나, 결국 FIA와의 '인정된 위반 합의(ABA: Accepted Breach Agreement)'를 통해 700만 달러의 벌금과 향후 12개월간 윈드 터널(Wind Tunnel) 및 CFD 사용 시간 10% 삭감이라는 스포츠적 페널티를 수용했다. 이 사건은 2021년 타이틀 경쟁이 얼마나 극한의 한계 상황에서 이루어졌는지를 방증하는 동시에, F1의 새로운 재정 규정이 실제로 팀들에게 강력한 구속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023
[닉 드 프리즈(Nyck de Vries) 방출과 리카르도의 알파타우리 합류]
성적 부진을 겪던 루키 닉 드 프리즈가 10경기 만에 경질되고, 레드불 리저브 드라이버였던 다니엘 리카르도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2022년 몬자에서 윌리엄스 대타로 출전해 인상적인 데뷔를 했던 닉 드 프리즈는 알파타우리(AlphaTauri) 풀타임 시트 확보 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과 잦은 사고를 냈다. 반면, 맥라렌에서 방출된 후 레드불의 서드 드라이버로 복귀한 리카르도는 실버스톤 타이어 테스트에서 현역 수준의 랩타임을 기록하며 크리스찬 호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레드불은 즉각적인 교체를 단행, 헝가리 GP부터 리카르도를 투입했다. 이는 단순히 하위 팀의 드라이버 교체가 아니라, 부진에 빠진 세르지오 페레즈를 압박하고 향후 레드불 시트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었다. 리카르도는 복귀 후 네덜란드 GP에서 손목 골절 부상을 입어 잠시 리암 로슨(Liam Lawson)에게 자리를 내주기도 했으나 , 이후 복귀하여 건재함을 과시했다.
[라스베이거스 스트립 서킷(Las Vegas Strip Circuit)의 개막과 드라마]
F1이 직접 프로모터로 나선 첫 번째 경기인 라스베이거스 GP가 개최되었으며, 초기 시설 문제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레이싱 쇼를 선보였다.
2024
[레드불 레이싱의 리더십 위기와 권력 암투]
크리스찬 호너 팀 감독이 여성 직원에 대한 부적절한 행동 혐의로 내부 조사를 받았으며, 무혐의 처분 이후에도 자료 유출과 항소 기각 등으로 팀이 내홍을 겪었다.
시즌 개막 직전, 호너 감독에 대한 내부 고발이 접수되었다. 레드불 유한회사(GmbH)는 독립 변호사를 선임해 조사를 진행했고 2월 28일 기각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다음 날, 익명의 계정으로 F1 관계자들에게 관련 증거 파일(왓츠앱 대화 내용 등)이 유포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 사건은 단순한 스캔들을 넘어 레드불 내부의 파워 게임(태국 대주주 vs 오스트리아 본사 및 요스 베르스타펜)을 노출시켰다. 요스 베르스타펜(Jos Verstappen)은 공개적으로 호너의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다. 2024년 8월, 고발인의 항소가 최종 기각되면서 호너는 자리를 지켰으나 , 이 과정에서 팀의 핵심 엔지니어인 아드리안 뉴이(Adrian Newey)가 팀을 떠나기로 결심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마이애미의 기적 - 노리스, 110경기 만에 첫 승]
마이애미 그랑프리에서 랜도 노리스(Lando Norris)가 세이프티 카의 행운과 맥라렌의 대규모 업데이트에 힘입어 막스 베르스타펜을 꺾고 커리어 첫 우승을 차지했다.
2025
[레드불의 즉결 처분 - 로슨 강등, 츠노다 승격]
2025년 시즌 초반 레드불 시트에 앉았던 리암 로슨이 부진하자, 레드불은 일본 GP부터 유키 츠노다(Yuki Tsunoda)를 막스 베르스타펜의 파트너로 승격시키고 로슨을 레이싱 불스(RB)로 강등시켰다.
[왕의 귀환 - 맥라렌, 2년 연속 컨스트럭터 제패]
맥라렌 레이싱이 2024년에 이어 2025년에도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컨스트럭터 월드 챔피언십을 조기에 확정 지었다.
안드레아 스텔라(Andrea Stella) 체제의 맥라렌은 MCL39 차량을 통해 기술적 우위를 완전히 점했다. 랜도 노리스와 오스카 피아스트리(Oscar Piastri)라는 가장 강력한 드라이버 라인업은 매 경기 더블 포디움을 밥 먹듯이 하며 레드불을 압도했다. 이는 1998년 이후 맥라렌의 황금기가 다시 도래했음을 의미하며, 2024년의 우승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