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 쓰토무

일본의 반핵무기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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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29- 11: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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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쓰토무
일본의 반핵무기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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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쓰토무의 93년 생애는 '운명'과 '아이러니'로 점철된 역사 그 자체입니다. 나가사키 출생이라는 운명은 그를 히로시마 출장(유조선 설계)으로 이끌었고, '한코(도장)'라는 사소한 변수는 그를 인류 최초의 원폭 생존자로 만들었습니다. 3일 후, 그의 고향 나가사키에서 상사의 불신 속에 겪은 두 번째 피폭은, 그의 증언을 끔찍한 현실로 증명한 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92세에 '유일한 공식 이중 피폭자'라는 기록을 쟁취한 것은, 개인의 기억을 인류의 역사로 승격시킨 마지막 투쟁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핵무기가 한 개인과 그 가족을 65년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언입니다.

주요사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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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나가사키에서의 출생]

야마구치 쓰토무는 1916년 3월 16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성장하며 기술 설계를 공부했습니다. 이 출생지는 훗날 그가 '이중 피폭자'가 되는 운명에 결정적인 전제 조건이 됩니다.

1930

[미쓰비시 입사, 유조선 설계]

야마구치는 1930년대에 미쓰비시 중공업에 제도사로 입사했습니다. 그는 전시 일본에 필수적이었던 유조선 설계를 담당했습니다. 이 직무는 그가 1945년 히로시마로 장기 출장을 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야마구치의 직무는 제도사였으며, 구체적으로 유조선 설계를 담당했습니다. 

1940년대 태평양 전쟁이 심화되면서 일본 제국은 자원 부족에 시달렸고, 그가 설계하던 유조선은 핵심 전략 물자였습니다. 그가 근무한 미쓰비시 중공업은 당시 '전시 재벌'로 불릴 만큼 전쟁 수행의 중심축이었으며, 유조선 설계라는 그의 전문 기술은 그를 1945년 여름 히로시마로 3개월간의 장기 출장을 가도록 이끈 결정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1945

[히로시마 출장 중 1차 피폭]

3개월간의 히로시마 출장 마지막 날, 그는 기차역으로 가다 개인 도장('한코')을 잊어 사무실로 돌아가던 중 피폭당했습니다. 원폭 중심지 3km 지점에서 폭발에 휩쓸려 고막이 파열되고 심각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해군 방공 훈련대로 도랑에 몸을 숨겨 기적적으로 생존했습니다.

오전 8시 15분, 그가 감자밭 옆을 지날 때 B-29 폭격기가 투하한 '리틀 보이' 원자폭탄이 폭발했습니다. 피폭 위치는 폭심지에서 약 3km(1.9마일) 떨어진 지점이었습니다. 

 이 피폭으로 그는 고막이 파열되고, 일시적인 실명을 겪었으며 상반신 좌측에 심각한 방사선 화상을 입었습니다.

[피폭 다음 날, 나가사키행 열차 탑승]

야마구치는 8월 6일 밤을 히로시마의 방공호에서 보낸 후, 다음 날인 8월 7일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 열차는 히로시마의 참상을 겪은 생존자들을 싣고 그의 집이 있는 나가사키로 향했습니다. 이 이동은 그를 두 번째 비극의 현장으로 이끌었습니다.

당시 히로시마에서 나가사키로 이동한 사람은 약 300명으로 추산되며, 이들은 히로시마의 방사능과 참상을 다음 피폭지인 나가사키로 물리적으로 이동시키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훗날의 연구에 따르면, 이 열차에 탔던 이중 피폭자 집단의 약 90%가 나가사키에서 두 번째 폭탄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야마구치의 생존은 더욱 기적적인 일이 됩니다.

[상사에게 보고 중 2차 피폭]

8월 9일, 그는 심한 화상에도 불구하고 미쓰비시 사무실에 출근했습니다. 그가 상사에게 "단 하나의 폭탄이 히로시마를 파괴했다"고 보고하자, 상사는 "미쳤다"고 불신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 '팻 맨'이 투하되었습니다.

미군 폭격기 '북스카'가 투하한 '팻 맨' 원자폭탄이 나가사키 상공에서 폭발했을 때, 그는 폭심지에서 3km(1.9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야마구치는 이번 폭발에서는 직접적인 외상을 입지 않았지만, 이후 일주일 이상 고열과 구토 등 급성 방사선 증후군에 시달렸습니다.

[전후 번역가, 교사, 엔지니어로 근무]

종전 후, 야마구치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방공호에서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연합군 점령하 미군 부대에서 번역가로, 이후에는 교사로 일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 미쓰비시 중공업에 복직하여 엔지니어로 경력을 재개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 당시, 야마구치는 아내 히사코와 갓난아들 가쓰토시와 함께 일주일째 방공호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 중 절망감에 일본이 패배하면 가족과 함께 수면제로 동반 자살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막상 항복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무감각한 상태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생존을 위해 다양한 직업을 가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첫 직업 중 하나는 자신들에게 원폭을 투하한 국가의 군대인 미군 점령군 부대에서 번역가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잠시 학교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으나 결국 그는 자신의 원래 전문 분야인 엔지니어링으로 돌아가 미쓰비시 중공업에 복직했습니다

1957

[나가사키 '히바쿠샤'로 공식 인정]

1957년, 야마구치는 일본 정부로부터 '히바쿠샤(피폭자)'로 공식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인정은 오직 나가사키에서의 피폭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50년 이상 자신의 실제 경험과 공식 기록이 불일치하는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 인정을 통해 그는 '원폭 피해자 건강 수첩'을 교부받았으며, 이는 월간 의료 수당과 무료 건강 검진 혜택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이 공식 인정은 그의 경험 중 절반만을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히로시마에서의 피폭 경험은 공식 기록에서 누락되었습니다.

2005

[아들의 암 사망, 공개 증언 시작]

60년간 침묵했던 야마구치는 2005년 아들 가쓰토시가 암으로 사망하자 공개 증언을 시작했습니다. 2006년에는 유엔(UN) 본부에서 핵무기 폐기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야마구치는 피폭 후 약 60년간 자신의 경험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러나 2005년, 그의 삶에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나가사키 피폭 당시 갓난아기였던 아들 가쓰토시가 59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한 것입니다. 그의 아내 히사코 역시 나가사키 피폭 생존자로 2008년 신장암과 간암으로 사망했습니다.


2006년에는 '이중피폭' 다큐멘터리에 출연했으며, 90세에 처음으로 여권을 발급받아 뉴욕 유엔 본부를 방문, 영화 상영회에 참석해 핵무기 폐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또한 자서전과 시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2009

[유일한 '이중 피폭자' 공식 인정]

야마구치는 자신의 경험 전체가 공식 역사로 남기를 바라며 이중 피폭 인정을 신청했습니다. 

2009년 3월 24일, 나가사키시는 그의 히바쿠샤 수첩에 히로시마 피폭 사실을 추가 기재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정부가 인정한 유일한 '이중 피폭자'가 되었습니다.

2010

[위암으로 나가사키에서 사망]

2009년 위암 진단을 받은 야마구치 쓰토무는 2010년 1월 4일 93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곳이자 두 번째 피폭을 겪은 고향 나가사키의 한 병원에서 93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인인 '위암'은 방사선 피폭의 장기적 후유증으로 발생하는 대표적인 질병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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