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 쓰토무

일본의 반핵무기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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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1-06- 22:5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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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쓰토무의 93년 생애는 '운명'과 '아이러니'로 점철된 역사 그 자체입니다. 나가사키 출생이라는 운명은 그를 히로시마 출장(유조선 설계)으로 이끌었고, '한코(도장)'라는 사소한 변수는 그를 인류 최초의 원폭 생존자로 만들었습니다. 3일 후, 그의 고향 나가사키에서 상사의 불신("미쳤다") 속에 겪은 두 번째 피폭은, 그의 증언을 끔찍한 현실로 증명한 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92세에 '유일한 공식 이중 피폭자'라는 기록을 쟁취한 것은, 개인의 기억을 인류의 역사로 승격시킨 마지막 투쟁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핵무기가 한 개인과 그 가족을 65년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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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나가사키에서의 출생]

야마구치 쓰토무는 1916년 3월 16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성장하며 기술 설계를 공부했습니다. 이 출생지는 훗날 그가 '이중 피폭자'가 되는 운명에 결정적인 전제 조건이 됩니다.

야마구치 쓰토무는 1916년 3월 16일, 당시 일본 제국이었던 나가사키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며, 훗날 기술 설계를 공부한 후 미쓰비시 중공업에 입사하게 됩니다. 그의 출생지 '나가사키'는 단순한 인적 사항이 아니라,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한 후 그가 귀환할 '집'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다른 도시 출신이었다면 히로시마 피폭 이후의 경로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며, 이로 인해 나가사키 출생이라는 사실은 1945년 8월 9일의 두 번째 피폭 사건과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인과관계의 첫 번째 고리가 됩니다.

1930

[미쓰비시 입사, 유조선 설계]

야마구치는 1930년대에 미쓰비시 중공업에 제도사로 입사했습니다. 그는 전시 일본에 필수적이었던 유조선(oil tankers) 설계를 담당했습니다. 이 직무는 그가 1945년 히로시마로 장기 출장을 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야마구치는 1930년대에 미쓰비시 중공업(Mitsubishi Heavy Industries)에 입사했습니다. 일부 자료는 그가 도쿄 와세다 대학에서 공학 학위를 받았다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의 직무는 제도사(draftsman)였으며, 구체적으로 유조선 설계를 담당했습니다. 1940년대 태평양 전쟁이 심화되면서 일본 제국은 자원 부족에 시달렸고, 그가 설계하던 유조선은 핵심 전략 물자였습니다. 그가 근무한 미쓰비시 중공업은 당시 '전시 재벌(wartime zaibatsu)'로 불릴 만큼 전쟁 수행의 중심축이었으며 , 유조선 설계라는 그의 전문 기술은 그를 1945년 여름 히로시마로 3개월간의 장기 출장을 가도록 이끈 결정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1945

[히로시마 출장 중 1차 피폭]

3개월간의 히로시마 출장 마지막 날, 그는 기차역으로 가다 개인 도장('한코')을 잊어 사무실로 돌아가던 중 피폭당했습니다. 원폭 중심지 3km 지점에서 폭발에 휩쓸려 고막이 파열되고 심각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해군 방공 훈련대로 도랑에 몸을 숨겨 기적적으로 생존했습니다.

1945년 8월 6일은 그의 3개월간 히로시마 출장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는 동료 아키라 이와나가, 사토 구니요시와 함께 고향 나가사키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개인 도장('한코', hanko)을 사무실에 두고 온 것을 깨닫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바로 이 사소한 변수가 그의 운명을 갈랐습니다. 오전 8시 15분, 그가 감자밭 옆을 지날 때 B-29 폭격기(에놀라 게이)가 투하한 '리틀 보이' 원자폭탄이 폭발했습니다. 피폭 위치는 폭심지(ground zero)에서 약 3km(1.9마일) 떨어진 지점이었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거대한 섬광"을 본 직후 , 해군 방공 훈련에서 배운 대로 즉시 도랑(irrigation ditch)에 몸을 던져 눈을 가리고 엄지손가락으로 귀를 막았습니다. 이 즉각적인 반응이 그의 생명을 구했지만, 폭풍은 그를 공중으로 들어 올려 내동댕이쳤습니다. 이 피폭으로 그는 고막이 파열되고, 일시적인 실명을 겪었으며, 상반신 좌측에 심각한 방사선 화상을 입었습니다.

[피폭 다음 날, 나가사키행 열차 탑승]

야마구치는 8월 6일 밤을 히로시마의 방공호에서 보낸 후, 다음 날인 8월 7일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 열차는 히로시마의 참상을 겪은 생존자들을 싣고 그의 집이 있는 나가사키로 향했습니다. 이 이동은 그를 두 번째 비극의 현장으로 이끌었습니다.

8월 6일, 끔찍한 화상을 입은 야마구치는 방공호로 기어가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동료들을 만났고, 다음 날인 8월 7일 함께 고향 나가사키로 돌아가는 기차에 탑승했습니다. 이 기차는 단순한 귀향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히로시마에서 나가사키로 이동한 사람은 약 300명으로 추산되며, 이들은 히로시마의 방사능과 참상을 다음 피폭지인 나가사키로 물리적으로 이동시키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훗날의 연구에 따르면, 이 열차에 탔던 이중 피폭자 집단의 약 90%가 나가사키에서 두 번째 폭탄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 야마구치의 생존은 더욱 기적적인 일이 됩니다.

[상사에게 보고 중 2차 피폭]

8월 9일, 그는 심한 화상에도 불구하고 미쓰비시 사무실에 출근했습니다. 그가 상사에게 "단 하나의 폭탄이 히로시마를 파괴했다"고 보고하자, 상사는 "미쳤다"고 불신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 '팻 맨'이 투하되었습니다.

1945년 8월 9일, 야마구치는 히로시마에서 입은 화상으로 온몸에 붕대를 감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직장인 미쓰비시 중공업 사무실에 출근했습니다. 8월 8일 나가사키에 도착한 그는 치료를 받았으나, 9일 아침 보고를 위해 출근한 것입니다. 오전 11시, 그는 자신의 상사에게 히로시마에서의 경험을 설명하며 "단 하나의 폭탄이 도시 전체를 파괴했다"고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상사는 그 말을 믿지 못하고 그를 "미쳤다(crazy)"고 질책했습니다. 야마구치의 증언이 당시 인류의 인지 범위를 초월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미군 폭격기 '북스카(Bockscar)'가 투하한 '팻 맨' 원자폭탄이 나가사키 상공에서 폭발했습니다. 이번에도 그의 위치는 폭심지에서 3km(1.9마일)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두 번째 폭발은 상사의 불신을 깨고, 핵 시대의 진실을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증명했습니다. 야마구치는 이번 폭발에서는 직접적인 외상을 입지 않았지만 , 폭풍으로 인해 기존의 붕대가 모두 망가졌고, 이후 일주일 이상 고열과 구토 등 급성 방사선 증후군에 시달렸습니다.

[전후 번역가, 교사, 엔지니어로 근무]

종전 후, 야마구치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방공호에서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연합군 점령하 미군 부대에서 번역가로, 이후에는 교사로 일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 미쓰비시 중공업에 복직하여 엔지니어로 경력을 재개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 당시, 야마구치는 아내 히사코와 갓난아들 가쓰토시와 함께 일주일째 방공호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 중 절망감에 일본이 패배하면 가족과 함께 수면제로 동반 자살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 막상 항복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무감각한 상태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생존을 위해 다양한 직업을 가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첫 직업 중 하나는 자신들에게 원폭을 투하한 국가의 군대인 미군 점령군 부대에서 번역가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잠시 학교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으나 , 결국 그는 자신의 원래 전문 분야인 엔지니어링으로 돌아가 미쓰비시 중공업에 복직했습니다

1957

[나가사키 '히바쿠샤'로 공식 인정]

1957년, 야마구치는 일본 정부로부터 '히바쿠샤(피폭자)'로 공식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인정은 오직 나가사키에서의 피폭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50년 이상 자신의 실제 경험과 공식 기록이 불일치하는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원폭 투하 후 12년이 지난 1957년, 야마구치 쓰토무는 일본 정부로부터 나가사키 원폭에 대한 '피폭자(히바쿠샤)'로 공식 인정받았습니다. 이 인정을 통해 그는 '원폭 피해자 건강 수첩(Atomic Bomb Victim Health Handbook)'을 교부받았으며, 이는 월간 의료 수당과 무료 건강 검진 혜택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이 공식 인정은 그의 경험 중 절반만을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의 행정 시스템은 오직 그가 거주하고 있던 나가사키에서의 피폭 사실만을 인정했으며, 히로시마에서의 피폭 경험은 공식 기록에서 누락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야마구치는 1957년부터 2009년까지 52년간, 자신의 실제 경험(히로시마+나가사키)과 행정 기록(나가사키)이 불일치하는 법적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2005

[아들의 암 사망, 공개 증언 시작]

60년간 침묵했던 야마구치는 2005년 아들 가쓰토시가 암으로 사망하자 공개 증언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피폭의 고통이 대물림되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생존을 '증언할 운명'으로 재해석했습니다. 2006년에는 유엔(UN) 본부에서 핵무기 폐기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야마구치는 피폭 후 약 60년간 자신의 경험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러나 2005년, 그의 삶에 거대한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나가사키 피폭 당시 갓난아기였던 아들 가쓰토시(Katsutoshi)가 59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한 것입니다. (그의 아내 히사코 역시 나가사키 피폭 생존자로, 2008년 신장암과 간암으로 사망했습니다 ). 아들의 죽음을 통해 피폭의 트라우마가 2세에게까지 대물림되는 것을 목격한 그는, 자신의 생존을 더 이상 개인적인 불운이 아니라 "두 번의 원폭을 경험하고 살아남아,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나의 운명(destiny)"이라고 재정의하기 시작했습니다. 89세의 나이에 그는 침묵을 깨고 적극적인 반핵 운동가로 변모했습니다. 2006년에는 '이중피폭(Niju Hibaku)' 다큐멘터리에 출연했으며 , 90세에 처음으로 여권을 발급받아 뉴욕 유엔 본부를 방문, 영화 상영회에 참석해 핵무기 폐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또한 자서전과 시(tanka)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2009

[유일한 '이중 피폭자' 공식 인정]

2009년 1월, 야마구치는 자신의 경험 전체가 공식 역사로 남기를 바라며 이중 피폭 인정을 신청했습니다. 2009년 3월 24일, 나가사키시는 그의 히바쿠샤 수첩에 히로시마 피폭 사실을 추가 기재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정부가 인정한 유일한 '이중 피폭자'가 되었습니다.

2009년 1월, 92세의 야마구치는 일본 정부에 자신의 이중 피폭 상태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달라고 신청했습니다. 이는 추가적인 의료 혜택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내 이중 방사선 피폭이 이제 공식 정부 기록이 되었다. 이는 내가 죽은 뒤에도 끔찍한 역사를 젊은 세대에게 말해줄 수 있다"고 말했듯이 , 자신의 개인적 기억이 공적인 역사로 확정되기를 바랐습니다. 나가사키시 당국은 처음에 추가 인정의 필요성에 소극적이었으나 , 그의 신청을 받아들여 2009년 3월 24일, 그의 '히바쿠샤' 수첩에 1945년 8월 6일의 히로시마 피폭 사실을 공식적으로 추가 기재했습니다. 이로써 야마구치 쓰토무는 당시 알려진 160여 명의 비공식 이중 피폭자들 중에서 ,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유일한' 이중 피폭자가 되었습니다.

2010

[위암으로 나가사키에서 사망]

2009년 위암 진단을 받은 야마구치 쓰토무는 2010년 1월 4일 93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 원인인 위암은 방사선 피폭과 관련된 대표적인 질병입니다. 그의 죽음은 원자폭탄이 수십 년에 걸쳐 피해자의 삶을 잠식하는 무기임을 증명하며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이중 피폭자로 공식 인정받은 이듬해인 2009년, 야마구치는 위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는 2010년 1월 4일, 자신이 태어난 곳이자 두 번째 피폭을 겪은 고향 나가사키의 한 병원에서 93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인인 '위암'은 방사선 피폭의 장기적 후유증으로 발생하는 대표적인 질병 중 하나입니다. 그가 93세까지 장수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 그의 아내와 아들이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 그 자신 역시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원자폭탄이 1945년 8월의 순간적인 폭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한 개인과 그 가족의 삶을 잠식하고 대물림되는 고통임을 그의 93년 생애를 통해 입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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