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첩

중국의 발명품, 조미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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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1-06- 22: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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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첩의 역사는 '감칠맛'과 '보존'을 향한 욕망이 빚은 세계화의 연대기입니다. 아시아의 발효 어장 '케찹(kê-tsiap)'은  보존성을 무기로 유럽에 전파되었고 , 18세기 영국에서는 버섯과 호두 등 현지 재료로 '번역'되는 창조적 변용을 겪었습니다. 1812년 토마토가 처음 도입되고  1834년 '약'으로 오해받는  과도기를 거쳐, 1876년 하인즈가 식초와 설탕으로 보존법을 혁신하고  투명한 병으로 '신뢰'를 판매하며  비로소 오늘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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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

[케첩의 원형, 아시아의 케찹]

현대 케첩의 어원은 중국 남부 푸젠성(Fujian)의 호키엔(Hokkien) 방언 '케찹(kê-tsiap)' 또는 '게찹(kôe-chiap)'이며, 이는 '절인 생선이나 갑각류의 염수(젓갈)'를 의미했습니다. 이 소스는 1600년대 활발한 해상 무역의 허브였던 푸젠성을 중심으로 중국 남부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케첩의 초기 확산 동력은 맛 자체보다 냉장 기술이 없던 시대에 상하지 않고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보존성'에 있었습니다.

케첩의 원형은 현대의 붉고 달콤한 소스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물질이었습니다. 이는 '膎汁'(kôe-chiap / kê-chiap)으로 표기되며, 발효시킨 생선이나 해산물에서 나오는 짠 국물, 즉 '액젓'에 가까웠습니다. 1873년 편찬된 중국어-영어 사전에도 'kôe-chiap'이 "절인 생선이나 조개류의 염수"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 소스가 글로벌 상품이 될 수 있었던 일차적 요인은 '물류'였습니다. 17세기는 냉장 기술이 전무했던 시대로, 특히 장거리 항해를 하는 선원들에게 식품의 '보존성'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케찹'은 발효 과정을 통해 수개월간 부패하지 않고 보관할 수 있었기에 , 유럽 상인들에게는 실크, 도자기, 향신료와 더불어 아시아에서 구매해야 할 매력적인 교역 상품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상인들은 "중국 상인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할 정도로 , 아시아는 이미 선진적인 글로벌 무역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즉, 케첩의 원형은 유럽인들의 '발견'이 아니라, 이미 아시아 경제권 내에서 활발히 유통되던 '상품'을 구매한 것이었습니다.

1699

[유럽의 케첩 수용과 확산]

17세기 말, 동남아시아에서 향신료, 직물, 도자기를 찾던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은 현지의 발효 어장인 '케찹'을 처음 접했습니다. 이 소스는 장기 보관이 용이해 선원과 상인들에게 매력적이었고 , 1699년 영국 문헌에 "높은 동인도 소스(a high East-India Sauce)"로 처음 기록되었습니다. 1711년 무역상 찰스 록커(Charles Lockyer)는 "최고의 케첩은 통킹(Tonquin, 현 베트남 북부)에서 온다"고 기록하며, 당시 유럽인들이 이를 명확한 아시아산(産) 고급 소스로 인식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유럽으로의 전파는 단일 경로가 아니었습니다.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은 각기 다른 동남아시아의 무역항에서 이 소스를 접했으며 , 이로 인해 'ketchup', 'catsup', 'katchup' 등 다양한 철자가 혼용되었습니다. 이들이 원본 소스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현지에서 레시피를 어설프게 복제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시아의 발효 기술과 재료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대신 그들은 원본 소스가 가진 핵심 속성, 즉 '강렬한 감칠맛'과 '보존성'을 모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1700년대 초반 영국에서 '케첩' 또는 '캣첩(catsup)'으로 불리기 시작한 이 소스들은, 원본의 맛을 재현하기 위해 stale beer(김빠진 맥주)나 향신료 등을 첨가하는 초기 변형을 거쳤습니다.

1727

[최초의 유럽식 케첩 레시피]

유럽에서 '케첩'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최초의 레시피는 1727년 엘리자 스미스(Eliza Smith)의 베스트셀러 요리책 The Compleat Housewife에 등장했습니다. 이 'Katchup' 레시피는 멸치(anchovies), 샬롯, 식초, 생강, 육두구(nutmeg) 등을 포함했습니다. 이 레시피는 아시아의 '발효 어장'을 유럽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염장 멸치'로 대체하여 원본의 감칠맛을 구현하려 한, 동서양의 조리법이 혼합된 과도기적 형태였습니다.

엘리자 스미스의 레시피는 케첩 역사에서 중요한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 역할을 합니다. 1600년대 아시아의 원형(발효 생선 젓갈)과 1800년대의 토마토 케첩 사이에서, 1727년의 이 레시피는 '멸치'를 사용함으로써  그 기원이 '생선'에 있음을 명확히 증명합니다. 영국인들은 아시아의 'kê-tsiap'을 직접 제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가장 흔하고 저렴하게 '발효 생선의 감칠맛'을 낼 수 있는 재료인 염장 멸치를 선택했습니다. 이 레시피는 이미 식초와 향신료를 사용하며 원본의 어장에서 벗어나 '소스'의 형태로 진화하고 있었지만, 그 뿌리가 어장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1750

[토마토 없는 케첩의 황금기]

18세기는 토마토가 아닌 다양한 재료로 케첩을 만들던 '황금기(golden age)'였습니다. 이는 아시아 소스의 복제 실패가 아니라, '감칠맛(umami)'이라는 개념을 현지 재료로 '번역(translation)'하려는 창조적 변용의 시대였습니다. 이 시기 영국에서는 버섯 케첩 , 호두 케첩 , 굴 케첩  등이 유행했으며, 이 외에도 맥주, 와인, 과일, 견과류 등이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18세기 영국인들에게 '케첩'은 특정 재료(토마토)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장기 보존이 가능하도록 소금이나 식초, 알코올 등으로 처리한 고농축 감칠맛 소스'라는 기술적 카테고리를 의미했습니다.   

버섯 케첩 (Mushroom Ketchup): 제인 오스틴이 선호했다고 알려진  가장 대중적인 변형이었습니다. 제조 과정은 "썩어가는 늪의 웅덩이"처럼 보였지만 , 최종 결과물은 간장이나 우스터셔 소스와 유사한 짙은 갈색의 감칠맛 소스였습니다.   

호두 케첩 (Walnut Ketchup): 18세기 후반에 유행했으며, 생선 요리의 풍미를 더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굴 케첩 (Oyster Ketchup): 한 1700년대 레시피는 굴 100개, 화이트 와인 3파인트, 레몬 껍질 등을 요구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버전도 존재했습니다.   

기타: 'Prince of Wales' 케첩은 엘더베리와 멸치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모든 레시피의 공통점은 '감칠맛'과 '보존성'입니다. 영국인들은 아시아의 '케찹'이 가진 핵심 속성, 즉 '감칠맛'을 자신들에게 익숙한 버섯 피클 등의 아이디어와 결합시켰습니다. 이는 사용자가 언급한 '뇌절'이 아니라, 외래의 개념을 현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창조적 변용'이었습니다. 

1812

[최초의 토마토 케첩 등장]

최초의 '토마토' 기반 케첩 레시피는 1812년 필라델피아의 과학자이자 원예가인 제임스 미스(James Mease)에 의해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사랑의 사과(love apples)'라 불리던 토마토가 최고의 케첩을 만든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레시피는 토마토 펄프와 향신료 외에 보존제로 '브랜디(brandy)'를 사용했으며 , 현대 케첩의 핵심인 설탕과 식초는 거의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H.J. 하인즈(1876년)의 공로로 언급한 '토마토의 도입'은 사실 하인즈보다 64년이나 앞선 1812년에 제임스 미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미스의 케첩은 현대의 것과 매우 달랐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보존 방식'입니다. 18세기 영국에서는 버섯이나 굴 케첩의 부패를 막기 위해 와인이나 브랜디 같은 알코올을 첨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조리법이었습니다. 미스가 1812년 레시피에서 브랜디를 사용한 것 은, 그가 '새로운' 현대 케첩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기존' 18세기 영국식 케첩 제조법에서 주재료만 버섯/호두에서 토마토로 '교체'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소스는 달고 신맛이 아닌, 알코올 향이 나는 짠맛의 소스였을 것이며 , 현대 케첩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중요한 '과도기적 산물'이었습니다.

1834

[케첩, 만병통치약이 되다]

1834년 오하이오주의 의사 존 쿡 베넷(John Cook Bennett) 박사는 토마토가 소화불량, 설사, 황달 등 각종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토마토는 유독성 식물인 '가지과(nightshade family)'에 속한다는 이유로 '독초'라는 오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베넷 박사는 이 인식을 뒤집고 토마토 케첩을 농축한 '토마토 알약(tomato pills)'을 개발하여 약으로 판매했습니다.

토마토가 '독초'에서 '식품'으로 격상되는 데 결정적인 사회적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1830년대는 콜레라가 창궐하고 식품 안전 규제가 전무하여  설사나 소화불량이 치명적인 질병으로 여겨지던 시기였습니다. 베넷 박사의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했음에도  이러한 대중의 불안감을 파고들며 '토마토 건강 열풍(fad)'을 일으켰습니다.   

이 '의학 사기'는 역설적으로 토마토의 대중화에 기여했습니다. '독초'라는 공포의 대상이 '약'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리브랜딩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열풍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베넷의 성공 이후 '카피캣(copycats)'들이 시장에 난립하여, 토마토 알약이라 속이고 실제로는 단순 '설사약(laxatives)'을 판매하는 '토마토 알약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1850년대에 의학적 명성은 완전히 무너졌지만 , 토마토는 더 이상 '독'이 아닌 '식재료'로서의 가능성을 대중에게 각인시키게 되었습니다

1876

[하인즈, 현대 케첩의 표준화]
1876년 헨리 J. 하인즈(Henry J. Heinz)는 'F. & J. Heinz Company'를 설립하고 'Catsup'을 출시하며 현대 케첩의 산업적 표준을 확립했습니다. 하인즈의 혁신은 '토마토의 도입'이 아니라, 기존 케첩의 만성적인 부패 문제를 해결한 '보존법의 혁신'에 있었습니다. 그는 '발효' 방식을 완전히 버리고, 다량의 '식초'(산도를 높여 보존)와 '설탕'(식초의 신맛을 중화)을 사용하여 화학 보존제 없는 장기 보존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하인즈가 시장에 진입할 당시, 상업용 토마토 케첩은 보존성이 매우 낮아 쉽게 썩거나  발효가 진행되어 시큼하게 변하는  저급한 제품이었습니다. 하인즈의 진짜 혁신은 '요리'가 아닌 '화학(Chemistry)'과 '마케팅'에 있었습니다.   

첫째, 그는 케첩을 '생물학적(발효)' 보존 식품에서 '화학적(산성)' 보존 식품으로 재정의했습니다. 그는 200년간 케첩의 정체성이었던 '발효' 를 중단시키고, 대신 다량의 식초를 투입하여 박테리아의 성장을 억제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유해한 화학 보존제 없이도 상온에서 유통 가능한 최초의 '보존제 프리(preservative free)' 케첩이 탄생했습니다.   

둘째, 현대 케첩 특유의 '달고 신 맛(sweet and tart)' 은 이 화학적 혁신의 '부산물(byproduct)'입니다. 보존을 위해 투입한 막대한 양의 식초는 케첩을 너무 시게 만들었습니다. 하인즈는 이 신맛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막대한 양의 설탕을 투입해야 했습니다. '보존'이라는 공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맛'의 표준이 우연히 탄생한 것입니다.   

셋째, 하인즈는 '신뢰'를 판매했습니다. 1869년 첫 제품(서양 고추냉이)부터 , 그는 '투명한 유리병(clear glass bottles)'을 고집했습니다. 당시 경쟁사들이 부패나 저급한 재료를 숨기기 위해 '갈색 병(brown bottles)' 을 사용한 것과 정반대였습니다. 식품 규제가 없던 시대, 투명한 병은 제품의 '순수성(purity)'과 '품질'을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마케팅 전략이었습니다. 하인즈는 '맛'이 아니라 '안전'을 판매함으로써 시장을 지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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