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

과학자, 발명가, 기술자,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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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1-01- 18: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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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과학자, 발명가, 기술자,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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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세종 시대의 천재 과학기술자.

- 관노(노비) 신분이었으나 세종에게 발탁되어 관직에 오름.

- 자격루(세계 최초 자동 물시계), 앙부일구(공중 해시계), 갑인자(고효율 금속활자) 등 수많은 위대한 발명품을 제작함.

- 조선의 과학 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이끎.

- 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사건으로 파직된 후 역사에서 사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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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5

[관노의 아들로 태어나다]

아버지는 원나라 출신 유민, 어머니는 동래현의 관기(노비)였다.

관노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어릴 때부터 뛰어난 기술자적 재능을 보였다.

정확한 출생연대는 불확실하며 1385년경 혹은 1393년경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출생연대는 불확실하며 1385년경 혹은 1393년경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는 원나라 소주·항주 출신의 장성휘이며, 어머니는 동래현의 기생(관노)이었다. 그는 동래현의 관노 신분이었지만, 기술자로서의 재능이 매우 뛰어났다.

1421

[세종의 신임, 중국 유학길에 오르다]

태종에 이어 세종 역시 장영실의 재능을 높이 사 중용했다.

세종은 그를 윤사웅, 최천구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 선진 천문기기의 기술을 배워오도록 명했다.

장영실은 본래 동래현의 관노였으나, 그의 뛰어난 기술을 태종이 먼저 인정하여 발탁했다. 세종은 실용주의자로서 장영실의 재능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부왕의 뒤를 이어 그를 중용했다. 세종은 윤사웅, 최천구 등과 함께 장영실을 중국에 보내, 당시 조선보다 앞서 있던 천문기기의 모양과 기술을 배워오도록 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겼다.

1423

[노비에서 관리가 되다]

중국에서 돌아온 후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마침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났다(면천).

세종은 대신들의 논의를 거쳐 그를 종5품 상의원 별좌에 임명했다.

약 34세 때, 중국 유학 후 천문기기를 성공적으로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노비 신분에서 면천되었다. 세종은 신분 질서를 중시하는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영실을 종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임명하며 파격적인 대우를 시작했다.

1424

[첫 물시계 '갱점지기' 제작]

정5품 행사직으로 승진한 장영실은 왕의 명을 받아 '갱점지기(更点之器)'를 만들었다.

이것이 그의 첫 물시계 작품이었다.

세종은 장영실을 정5품 행사직으로 승진시키고, 시간을 알리는 기계인 '갱점지기(更点之器)'를 만들라고 명했다. 장영실은 이 명을 받들어 첫 번째 물시계를 성공적으로 제작해냈다.

1433

[정4품 호군으로 승진]

이천의 책임 하에 진행된 천문 기구 제작 프로젝트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정4품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하며 신분 상승을 이어갔다.

1434

[세계 최초의 자동 시보 물시계, 자격루 완성]

조선의 국가 표준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완성했다.

이는 수력에 의해 자동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는 세계 최초 수준의 정교한 자동 시보 장치였다. 세종의 총애가 극에 달했다.

장영실, 김조, 이천 등이 약 2년간의 노력 끝에 '자격루(自擊漏)'를 완성하고 발표했다. 자격루는 단순히 물의 흐름으로 시간을 재는 것을 넘어, 정해진 시간마다 자동으로 인형이 나타나 종, 북, 징을 쳐서 시각을 알리는 매우 정교한 자동 시보 장치였다. 이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발명품으로, 조선의 국가 표준시계로 사용되었다.

[세계 최고 속도의 금속활자 '갑인자' 주조]

이천이 총책임자였던 구리 금속활자 '갑인자(甲寅字)' 주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갑인자는 하루에 40여 장을 찍어도 판이 흐트러지지 않는 혁신적인 인쇄 기술로, 이전(하루 2장)보다 인쇄 효율을 20배 이상 끌어올렸다.

천문기구뿐만 아니라 금속 제련 전문가로서 '갑인자(甲寅字)' 주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약 20여만 자에 달하는 갑인자는 조립이 견고하여, 이전 활자가 하루 2장만 찍어도 자본이 흐트러졌던 것과 달리, 하루에 40여 장을 찍어도 될 만큼 튼튼하고 깨끗했다. 이는 **조선의 인쇄 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킨 위대한 업적이었다.

[백성을 위한 공중시계, 앙부일구]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참여하여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제작했다.

이 시계는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되어,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그림(12지신)을 보고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한 **세계 최초의 공중시계** 중 하나였다.

앙부일구(仰釜日晷)는 '가마솥(앙부)' 모양의 해시계라는 뜻이다. 이전의 시계들과 달리, 일반 백성들이 쉽게 시간을 볼 수 있도록 혜정교(서울 종로)와 종묘 앞에 설치한 공중시계였다. 특히 글을 모르는 백성을 배려하여 시간마다 12지신 그림을 그려 넣어 누구나 쉽게 시간을 읽을 수 있게 한, 세종의 애민정신과 장영실의 기술력이 결합된 걸작이다.

1438

[자동 천상시계 '옥루' 완성]

자동 물시계이자 천상시계(天象時計)인 '옥루(玉漏)'를 완성했다.

이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 시간, 계절, 천체의 움직임까지 관측할 수 있는 장치로, 경복궁 흠경각에 설치되었다.

옥루(玉漏)는 장영실의 기술력이 집대성된 장치였다. 단순히 시간만 알리는 자격루를 넘어,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고 계절의 변화와 천체의 움직임까지 관측할 수 있는 자동 천문시계였다. 세종은 이를 위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이라는 전각을 따로 지어 설치할 만큼 아꼈다.

1442

[추락의 시작, 왕의 가마가 부서지다]

장영실은 당시 금속 전문가로서 관료 생활을 이어가던 중, 세종대왕이 온천 행차에 사용할 어가(가마)의 제작을 감독했다.

하지만 세자가 이 가마에 금이 가 있는 것을 발견했고, 얼마 안 가 가마가 부서지는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1442년) 세종은 오랜 격무와 당뇨, 안질(눈병) 등으로 건강이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장영실에게 어가(임금의 가마) 제작을 명한 것도 '이천 온천'으로의 요양을 위한 것이다.

이 시기 세종은 이미 많은 정무를 세자에게 위임하고 있었고, 이것이 바로 **'대리청정(代理聽政)'**이었다.


세자가 단순히 궁궐을 거닐다 '우연히' 금이 간 것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임금의 온천 행차는 준비 과정부터 안전까지 모든 것이 중요한 국가 행사이다.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는 실질적인 국정 운영자로서, 아버지(세종)의 안전과 직결된 왕의 가마(어가)를 직접 점검하고 준비 상황을 총괄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세자가 어가의 결함을 발견했다는 기록은, 그가 장영실을 싫어해서라는 음모론보다는 '왕의 대리인'으로서 자신의 책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료(史料)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의금부 탄핵,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조정은 가마 사건을 왕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 의금부에서 곤장 80대와 삭탈관직을 구형했다.

세종이 형벌을 감해 주었으나, 장영실은 이 사건을 끝으로 역사 기록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어가 파손 사건은 단순한 실수가 아닌 왕의 안위를 위협한 '불경죄'로 취급되었다. 조정 신료들은 장영실의 책임을 물어 의금부에서 곤장 80대와 삭탈관직(모든 관직 박탈)을 구형했다. 세종은 그간의 공을 생각해 형벌을 2등 감해주었지만, 파직은 피할 수 없었다. 조선 최고의 과학자는 이 사건 이후 어떤 역사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으며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사망일이나 무덤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1. '어가 파손'이 단순 실수가 아닌 이유: 불경죄


그렇다면 왜 이 사건이 장영실의 완전한 몰락으로 이어졌을까?

이는 '왕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 왕의 몸(옥체)이나 왕이 사용하는 물건(어가, 옥새 등)에 흠결이 생기게 하는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닌, **'대역죄(大逆罪)' 또는 '불경죄(不敬罪)'**로 다스려졌다.

장영실이 감독한 어가가 부서졌다는 것은, 자칫 왕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 있었던 중대한 사건이었다.


2. 진짜 배경: '신분'의 한계와 사대부의 반발


장영실의 몰락이 유독 가혹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그의 **'출신 성분'**이다.

- 관노(官奴) 출신의 파격 승진: 장영실은 노비 출신으로, 오직 세종의 '총애' 하나만으로 정3품 상호군(오늘날의 차관급 이상)까지 올랐다.

- 사대부들의 오랜 불만: 성리학적 신분 질서를 굳게 믿던 조선의 사대부(양반 관료)들은 장영실의 이러한 파격적인 승진을 처음부터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실록에도 그를 면천시키고 관직을 주려 할 때마다 신하들이 반대했던 기록이 나옴.)

- 결정적 '꼬투리' 제공: 사대부들은 세종의 총애 때문에 장영실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왕의 어가'가 부서지는 명백한 '불경죄'가 발생하자 일제히 그를 탄핵했다.


결론적으로, 세자가 어가의 결함을 발견했다는 기록은 '음모론'이 아니라 '대리청정'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장영실의 '신분적 한계'와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대부들의 반발'이 결합되어, 세종조차 그를 보호해 줄 수 없었던(혹은 보호해 줄 명분이 사라졌던) 결정적인 몰락의 계기가 되었다. 세종이 그토록 아꼈던 천재 과학자는 이 '불경죄'라는 단 하나의 실책으로 인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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